안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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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1922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956년, 조선로동당 함경남도위원회 조직위원을 지냈으며 1961년 8월, 함흥시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강희원의 뒤를 이어 당중앙위원회 경공업-상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66년 6월 29일, 알제리 독립 4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알제리로 가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리영호 단장을 배웅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김세봉의 뒤를 이어 내각 상업상에 임명되었으며 1969년 6월, 정부 대표단장으로 이라크를 다녀왔다. 1969년 12월, 북한-수단 친선협회위원장을 겸하였으며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78년, 황해남도 행정위원장을 지내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의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법안심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평양시 경제지도위원장으로 이동하였다. 1983년 6월, 조선로동당 6기 7중전회에서 경공업비서로 발탁, 1983년 11월, 6기 8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4년 1월,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예산위원장에 보선되었으며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4월 13일,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5년 10월 1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5년 11월 19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는 경공업위원회와 화학공업부가 통합되어 탄생한 경공업 및 화학공업위원장에 발탁되는 등 김일성 시대 후반기의 핵심적 테크노크라트 중 한 사람으로 급부상한다. 1985년 12월, 경제과학 대표단을 이끌고 불가리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인지 아님 개혁개방을 논해서인지는 몰라도 1986년 2월 4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부총리 및 화학 및 경공업위원장에서 전격 해임되었고, 이것이 로동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과 비서국 비서에서 소환되었고 이것이 보도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북한은 웬만해서는 정치국 위원이나 비서국 비서급 인물을 소환하는 것을 보도하지 않으며 그저 새로 누가 보선되는 것을 보고 추적해야 하는데 대놓고 쫓아냈다고 보도한 것은 뭔가 엄중한 사연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같이 해임된 공진태의 경우에는 노동자 파견 문제와 자본주의 국가로의 수출 문제가 추궁당했기 때문에 해임됐다.

이후 함경남도 행정경제지도원장으로 하방되었고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는 재선되었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함남 행정경제지도위원장으로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것이 보도되었으나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탈락하였으며 대형 공장 지배인들까지 다 위촉되던 김일성, 오진우 장의위원에서조차 빠졌다. 이후 북한 매체에서도 일절 언급이 없으며 애국렬사릉 안장 소식도 없다. 함남 행정경제지도위원장에서조차 일을 못한다고 쫓겨나서 구르고 있거나 아님 1990년 이전에 조용히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

3. 참고문헌[편집]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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