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만

덤프버전 :


파일:정부상징.svg
파일:부총리 겸.svg>
파일:교육부장관.svg

{{{#!wiki style="margin: 0 -10px"
[ 펼치기 · 접기 ]

교육부장관 (1990~2001)


31대
윤형섭
32대
조완규
33대
오병문
34대
김숙희


35대
박영식
36대
안병영
37대
이명현
38대
이해찬

39대
김덕중
40대
문용린
41대
송자
42대
이돈희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2001~2008)


43대
한완상
44대
이상주
45대
윤덕홍
46대
안병영

47대
이기준
48대
김진표
49대
김병준
50대
김신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2008~2013)


51대
김도연
52대
안병만
53대
이주호
54대
서남수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2013~현재)


55대
서남수
56대
황우여
57대
이준식
58대
김상곤
59대
유은혜
파일:교육부 MI 가로형.png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제5·7대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제52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안병만
安秉萬 | Ahn Byung-man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002_152.jpg

출생
1941년 2월 8일
충청북도 괴산군
사망
2022년 5월 31일 (향년 81세)
본관
순흥 안씨
재임기간
제52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2008년 8월 6일 ~ 2010년 8월 30일

[ 펼치기 · 접기 ]
가족
부인 박정희, 슬하 1남 1녀
병역
대한민국 공군 중위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학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플로리다 대학교 (정치학 / 박사)
약력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제5·7대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한국대학총장협회 회장
풀브라이트재단 이사장
제53대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책학자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과 제53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괴산군 출신.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법학 석사를 졸업하였고 플로리다 대학교 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명지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서 행정학을 가르치다가 1994년부터 1998년, 2002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외대생들로부터 워낙 명망이 높은 교수였던지라 90년대 말까지 학내분규가 극심했던 교내 상황을 수습할 적임자로 여겨졌고 총학생회 대의원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취임했으나, 막상 임기 중에는 다소 독선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학내자치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혔다는 평도 존재한다.[1][2]

2008년 8월부터 2010년 8월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다. # 사교육에 밀려 비중이 작아지는 공교육을 소생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기본적으로 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를 금지하는 3불 정책을 유지했다.

하지만 재임 기간 중 학업성취도 평가, 전교조 교사 명단 공개, 시국선언 교사 중징계 등 교육계 내에서 갈등이 잦았다. 2008년 9월, 수능성적과 학업성취도 평가 원자료, 즉 성적 결과를 국회에 공개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되었다.

대입 자율화를 위해 입학사정관제 확대, 학생부 전형 확대 등을 추진했다.

2010년, EBS 교재만으로도 100점 맞을 수 있게 하겠다며 대입수학능력시험 개혁을 시도했다. 그전까진 EBS 수능 강의 내용이 수능에 약 30% 가량 영향을 주었으나, 당해부터는 EBS 연계율을 70%까지 높히겠다고 발표했다. # 이에 사교육 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고 사교육비 경감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2년 5월 31일 사망하였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8~2010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내면서 공교육 살리기와 사교육 억제에 노력한 점이 주요 성과로 평가받는다.[3]

3. 둘러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7 21:46:58에 나무위키 안병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외대의 많은 학생자치단체들이 본격적으로 학교의 간섭을 받게 된 것이 안병만 총장 체제부터이다.[2] 외대 10-11대 총장을 지냈었던 김인철 교수가 안병만을 은사로 삼고 있다고 밝혔는데, 김인철 교수 역시 총장 재임 시절 독선적인 운영과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사건사고로 비판을 받았다.[3] 하지만 수능 탐구 영역의 지나친 과목 수 축소로 인해 훗날 탐구 영역의 난도가 급상승하여 결과적으로 사교육이 억제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