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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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이름
명근

매산(梅山)
세례명
야고보
본관
순흥 안씨
생몰
1879년 9월 2일[1]~1927년 7월 7일
출생지
황해도 벽성군 수양산 아래
사망지
중국 지린성 의란현 팔호리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안명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벽성군 수양산 아래에서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둘째형인 안태형의 3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수학하다가 1897년 11월 28일 본적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옮기고 부친과 함께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했다. 당시 청계동 주민들 99명이 안태훈의 권유로 빌렘 신부에게 세례를 받을 정도로, 안태훈은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고 가톨릭 신앙이 투철했다. 다만 안태훈의 형제 중 맏형 안봉진(安奉鎭)만은 조상의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유일하게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안명근은 안중근의 종제로,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감화를 받아 항일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1906년 12월 1일 최광옥, 김용제, 최명식, 송종호, 차승용, 양성진, 장윤근, 김용구 등과 함께 안악면학회(安岳勉學會)를 조직하고 교육구국과 민중계몽을 위해 활동했다. 안악면학회는 짧은 시일 내에 회원이 70여 명으로 늘어났다. 면학회의 설립 목적은 신교육과 민지계발로 청소년들을 계몽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많은 학교를 세워 교사들을 양성하며, 농사기술을 개량하고 공업을 장려하여 산업진흥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곳의 운영은 참여한 유지들의 기금을 기반으로 삼았다.

1907년 봄, 안악면학회 인사들은 사범교육과 중등교육에 필요한 교재 발간을 위해 출판서점인 면학서포를 설립했다. 면학서포는 신민회가 운영한 평양의 태극서관과 미주 신한민보사에서 운영한 북미소년서회와 비슷한 조직으로, 안악면학회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저술 및 출판하고 보급했다. 그리고 1907년 4월 15일 양산학교에서 안악면학회 주최 춘계대운동회를 개최했다. 운동회는 은율, 장연, 재령, 봉산, 신천 등지와 백 리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 있는 37개 학교 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할 정도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안악면학회의 활동을 감시한 통감부는 운동회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안악군 소학교에서 춘계대운동회가 열리는 일은 이미 보고되었거니와 금일 15일에 각처 37개 학교가 훈련장에 모두 모이니, 천여 명 학도가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면서 행렬의 질서가 정연하고 관람자가 병풍을 둘러치듯 몰려들었다. 상오 9시부터 시작하여 하오 4시에 이르기까지 산술, 작문, 경주와 체조 운동을 차례로 시험하고 각 학생들이 연설하였다. 그 다음날 하오 9시에 내빈 중 신사 최광옥 씨는 '사람'이란 문제로, 미국 선교사 쿤스 씨는 '대한독립'이란 문제로 연설할 때에 장래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박수치며 갈채를 보내고 준비한 물품은 이때에 판매를 사작하였다더라.


이렇듯 안악면학회가 주도하는 교육구국운동이 황해도 일대로 확산되자, 통감부는 안악면학회와 관련인사들을 감찰했다. 하지만 안악면학회 인사들은 이러한 일제의 간섭에 굴하지 않고 1907년 7월 3일 양산학교에서 제1회 하기사범강습소를 개소했다. 하기사범강습회는 여름 방학 중에 비어있는 양산학교 시설을 이용하여 개최되었는데, 안악면학회와 양산학교가 공동으로 주최했고 민지개발운동을 담당할 일꾼을 양성한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후 1908년 봄 제2회 연합운동회를 개최했고 같은 해 8월 13일 제2회 하기강습회 졸업식을 거행했으며, 8월 22일에는 양산학교 내에서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설립을 논의하고 그해 11월에 조직했다. 해서교육총회 실무책임자인 학무총감은 김구가 맡았고, 안명근은 안악면학회에 이어 해서교육총회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한편, 헤이그 특사 사건 후 고종이 퇴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한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이 소식을 접한 신천군 인사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 60여 명의 결사를 조직했다. 이 결사대 대표로는 3명이 뽑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안명근이었다. 안명근 등은 서울로 향했고, 서울 남대문 밖에 있는 '김형제상회'에서 안창호를 만났다. 안창호는 안명근 등 신천 대표들에게 "무력 행사를 해서는 안된다"고 조언했다.

"우리가 만일 무력 행사를 취하면 일본 수비대와 결투하게 될 것이오. 지금 경비를 위해서 각처에 있는 일본 수비대를 서울에 집중시켜 놓은 수효가 무려 수천 명에 달하는데 우리의 사정은 매우 불리하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군인의 수효가 이갑 등 4인의 통솔을 받는 군대를 통산해도 1,500명에 불과한 뿐인 즉 중과부적으로 당하기가 어렵게 되었소. 그래서 이제 어가동도(御駕東渡) 문제는 다른 방도를 고려해야 하겠소. 무력투쟁만은 불가하니 이를 단념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한다고 보오."


그러나 일제는 고종 퇴위를 강행하고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해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산했다. 이후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황해도 일대 애국계몽 인사들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해 일제에 맞설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안명근은 그들의 대표를 맡아 관서 지방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1910년 11월 8일, 송화군 하용문 본정동에 거주하는 신석충의 집을 찾아가 그의 아들에게 5천 원을 요청하여 2회에 걸쳐 3천 원을 받아냈다. 이어 11월 21일 신천군 대정면 본산동에 거주하는 민병찬(閔秉瓚)을 찾아가 그의 조부 민영설(閔永卨)에게 2천 원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협박하여 승낙받았다. 이후 안명근이 수차례 독촉했지만 그들이 미루어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

1910년 11월 30일, 안명근은 신천군 읍면내 3리에 거주하는 이원직(李元稙)에게 1만원을 요청하여 현금 6천 원과 4천 원의 출금표를 받았다. 12월 19일에는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자산가의 명단, 재산과 다과, 헌병분견소의 위치, 일본인 거주자 및 자산가의 거둥을 정찰한 후 최명식, 김익연, 장윤근, 김용제 등을 동원해 그들에게 총기를 휴대하게 했다. 이후 12월 20일 야간에 자산가 원명락, 원정주, 원정균, 최약권, 김계수 등을 잇달아 방문해 자금을 모으기로 계획했다. 그날 밤 11시경 남산 습락현에 모이기로 했지만, 정작 모인 자가 수 명에 그치고 안악 읍내 자산가들이 "음력 12월 이전에는 다액의 현금을 소지할 수 없다"고 하자 거사일을 1911년 1월 중순으로 연기했다. 그러던 중 1911년 1월 10일 안명근이 모집한 군자금을 맡아두던 배경진이 체포되어 군자금 9천원을 압수당했고, 안명근 등 3명이 평양역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는 니콜라 빌렘 신부와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헌병대에게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가 안명근을 일제에 밀고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는 소식을 안명근을 통해 전해들은 뒤, 안중근의 친지들이 참석한 미사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에 대해 강론했다. 한편 안중근은 사형이 확정되자 뮈텔 주교에게 빌렘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안명근이 뮈텔 주교를 직접 방문해 빌렘 신부를 보내줄 것을 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하지만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0년 3월 2일 여순 감옥으로 가서 안중근을 면회하고 돌아왔다. 이에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2개월간 성무 정지령[2]을 내렸다. 빌렘 신부는 성무정지령으로 극도로 악화된 뮈텔 주교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안명근을 밀고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2월 2일 빌렘 신부는 안명근을 면회했는데, 안명근은 빌렘 신부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사실을 몰랐다.[3]

일제는 1911년 1월 안명근의 계획에 찬동한 원행섭, 박만준[4], 한순직 등을 체포했다. 이후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조작했고, 황해도 일대 애국지사 160여 명을 검거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강도 및 강도 미수사건으로 사건을 확대했다. 또한 일제는 신민회가 일제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했다고 날조하고 중앙간부들인 양기탁을 비롯한 회원 700여 명을 검거하고 이미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신민회 간부들도 재기소했다. 이로 인해 조사받은 이들 중 122명이 기소되었고, 그 중 유죄 판결을 받은 이가 105인에 달했기에 일명 105인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는 안명근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김구, 박만준, 배경진, 이승길, 한순직, 김홍량, 원행섭 등 7명에게 징역 15년, 도인권, 양성진 2인은 징역 10년, 그 외 최익형, 최명식, 김익연, 장윤근, 고봉수, 박형병, 한정교, 김용제 등 8인은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모두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고 항소심 끝에 99명이 무죄 석방되고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승훈 등 6인 만이 징역 5~6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안명근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동안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4년 4월 9일에 가출옥되었다.

그가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모친 김씨 부인은 1913년 봄 황해도 신천군을 떠나 북간도 육도구로 이사하여 지내다가 1913년 7월 상순에 별세했다. 또한 안명근의 부인 권수산나는 두 아들과 함께 중국 목릉현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소왕령 등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방랑생활을 하다가 1920년경에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돌아왔다. 안명근이 마침내 출소하여 신천군으로 돌아오자, 동지 배경진을 비롯해 수십 명의 친구들이 환영했고 신천시내 유지들이 안명근 환영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일제 경찰관헌들이 금지해 무산되었다.

안명근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왼쪽 눈은 시력이 없다시피 되었고, 청계동 구택에서 부인과 함께 과수재배로 수양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수행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1927년 7월 7일 전염병에 걸린 공소 신자를 돌보다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선종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안명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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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찌 된 일인지 사촌인 안중근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2] 미사성사를 집전하지 못하게 한 것[3] 빌렘 신부는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1913년 7월 조선총독부에 안명근 사면을 건의했지만 거절당했다.[4]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만준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