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츠카 후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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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후지오.jpg

이름
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 Fujio Akatsuka)
본명
아카츠카 후지오(赤塚 藤雄)[1]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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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생
1935년 9월 14일
만주국 러허성 롼핑현[2]
사망
2008년 8월 2일 (향년 72세)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직업
만화가
수훈
자수포장 (1998년 수훈)
서명
파일:후지오 싸인.pn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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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니가타 시립 가타히가시 중학교 (졸업)
데뷔
폭풍을 넘어서 (1956년)
장르
소녀만화
개그만화
활동 기간
1956년 – 2002년
묘소
도쿄도 하치오지시 후지미다이 묘원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만화계 데뷔
2.3. 말년
3. 여담
3.1. 성향
4. 특징
5. 경력
5.1. 수상
5.2. 기타
6. 작품 목록
7. 관련 인물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d11710-70-183760-2.jpg

일본만화가.

생전 그가 발표한 만화들은 동시기의 후지코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데즈카 오사무, 나가이 고, 요코야마 미츠테루, 미즈키 시게루 등과 같이 이후 일본 만화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3]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아버지 아카츠카 토시치는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헌병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고 관동군 헌병이 되었지만 상관과의 트러블로 이내 헌병 생활을 관두고 고구치의 특무경찰로 활동하며 만주국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 살던 현지인들의 선무 공작 지휘와 동북항일연군, 팔로군의 항일 게릴라와 대치하는 특무 기관원직을 맡았다. 어린 시절 노라쿠로[4] 등의 만화 읽기를 금지당하는 등 엄격하고 권위적이던 아버지가 어린 시절 큰 골칫거리이자 두려운 존재였지만, 만주의 중국인들에게 평등히 보급물자를 배급해 주고 아이들에게도 차별하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하는 등 개념적인 면도 있어서 항일 게릴라한테 2천 엔의 현상금이 걸려있었음에도 밀고당하지 않았으며, 패전 후 일제의 지배에 많은 고난을 당했던 중국인들의 보복으로 마을의 일가가 린치당해 죽은 아비규환 속에도 근처에 숨어있던 가족들과 함께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변장하여 소방차에 올라타 탈출해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몸을 팔던 게이샤였으나 그에 연민을 느낀 아버지가 거두어 결혼을 하고 만주로 함께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몸에 문신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는 어릴 때 한쪽 눈을 다쳐 의안을 끼고 다녔는데 아카츠카 후지오는 한 번 어머니의 의안을 유리구슬로 잘못 알고 가져가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는데 나중에 어머니가 이를 알고 혼냈다고 하며 이 경험에서 나왔던 죄책감이 자신의 만화에 나오는 부조리하고 잔인한 블랙 코미디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패전 직전에 심양에서 소방서장으로 일하던 부친이 소련으로 연행되어 군사재판을 받아 억류당하면서, 남겨진 가족들은 본국의 지원도 없이 자력으로 1946년 후루다오 시에 정박해 있던 다이하츠 동정에 올라타 4일 뒤 나가사키의 사세보 항으로 귀향해 후생성 사세보 인양 원호국[5]에서 오무라 선으로 이동해 어머니의 고향인 나라 현의 야마토코리 야마시로 이사했다. 귀향하던 도중 여동생은 디프테리아로 죽었고 한 동생은 다른 집에 입양되어 형제 수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무척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죽은 둘째 딸의 이름을 이은 생후 6개월의 여동생 아야코 또한 외갓집에 도착한 뒤 영양실조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그의 모친은 우는 기력도 없었고 작가는 가슴이 저미는 듯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은 누구보다 빨리 도주해서 아무도 그의 가족을 돕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한 군산 업체의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아카츠카는 소학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6] 대본소 서점에서 종종 만화를 빌려 읽었는데 가게에서 5엔으로 빌린 데즈카 오사무로스트 월드를 읽고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해, 잠시간 데즈카 풍의 만화를 그리는데 노력한 결과 1947년 다이아몬드 섬이란 SF 만화를 그려 오사카에서 출판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949년 가을, 모친의 생활비로 남은 세 아이를 기르는 게 어려워지자 두 형제는 부친의 고향인 니가타 현에 있던 친척과 친지에 각각 보내졌고[7], 당시 14살이던 아카츠카는 니가타 현에 사는 친척집 일가에 (대련에서 돌아온) 한 모자의 가정에 맡겨져 (그 어머니로부터) 약간의 생활비를 받으며 지냈다. 이듬해 연말 아버지가 일본으로 귀국해 돌아왔지만 혹독한 소련의 억류 생활과 일본의 패전에서 받은 충격 등의 영향으로 정신질환이 와서 예전의 성격들도 모두 사라지고 몸 동작이 더뎌지거나 식욕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해 부엌을 자주 어질러버리고 생고기를 먹으려고 하는 등 무척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이해, 이사한 (현 내의) 니시칸바라 군의 한 중학교로 전입학을 했고, 아버지는 지역 농업협동조합 직원 일자리를 얻고 집 근처에 있던 절에서 월 100엔의 셋방 생활을 시작했다.[8] 집안의 고달픈 가난으로 인해 고등학교 진학을 관두고 영화 간판을 제작하는 간판 가게에 취직했다. 이때 직업 관련상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많은 영화들을 감상하게 되면서 버스터 키튼찰리 채플린이 출연한 희극 영화들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이 무렵 만화 소년 잡지에 투고를 시작해 데즈카 오사무가 심사위원으로 있는 걸 보고 자신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53년 도쿄의 화학 제품 공장에 일하면서 동시에 만화를 투고해나갔고, 그 만화가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눈에 띄어 이시노모리가 주재하는 동일본 만화 연구회의 육필 회람 잡지 '먹물 한 방울'의 동인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이 동인의 도쿄 지부에 하세 쿠니오와 요코타 토쿠오가 있었고, 프로 만화가인 츠게 요시하루가 같이 자기 만화에 관심을 가져 자주 놀러왔었다고 한다. 잠시 휴간할 때 아카츠카 후지오는 츠게 요시하루에게 프로 전향을 권유받아, 1956년 '폭풍를 넘어서'로 만화계에 데뷔한다.

이렇게 어린 시절이 불행하여 큰 돈을 벌고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웃으며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PTSD에 시달렸고 이는 말년에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2.2. 만화계 데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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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 얼마 안되어 도쿄로 이사한 절친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토키와 장으로 옮겨 같이 살면서 '제2차 신만화당' 결성에 참여했다. 나중엔 어머니도 상경해 잠시 동거했으며, 어머니는 그곳에 살던 미즈노 히데코를 매우 마음에 들어해 결혼할 것을 추천하기도 했었다.[9] 초기엔 순정만화 단행본을 3~4달에 1권씩 그리던 대본소 만화가로 활동했으며,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만화가로 성공하고 있는데도 자신만은 팔리지 않는 것을 비관해 만화가를 그만두고 신주쿠의 한 캬바레 점원이 되려 생각한 바 있었으나, 후지코 후지오 A는 일단 테라다 히로오에게 상담해보라고 권유해 문의하기로 했다. 테라다 히로오는 이 무렵 토키와장에 리더이자 큰 형님같은 존재였으며, 그는 아카츠카에게 "잠깐만. 이 돈이 있는 동안은 여기서 있어라. 이것이 떨어지고 나서도 만화가로 팔리지 않는다면 카바레라든지 어디든지 가면 된다"고 월세가 밀려 토키와 장에서 쫓겨나야 하는 사정을 알고 현금 5만엔을 전달해주었다. 입주 후 1년간은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같은 방을 쓰면서 작업 보조와 밥 짓기를 주로 했고, 목욕탕에 갈 돈이 없어 주방에서 몸을 씻다가 이시노모리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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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여러 만화가들과 찍은 흑백 단체사진. 가운데 줄의 왼쪽에서 2번째(10번)이 아카츠카다.[11]

1958년작가 인원이 부족하던 소녀 클럽 증간호에서 기존 작가진을 보완하기 위해 1작가 1작품의 원칙을 지키며 이시노모리와의 합작을 기획해 이즈미 아스카 명의로 작품을 발표하였고,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미즈노 히데코의 공동 필명 U. 마이아로 여러 작품들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치바 테츠야가 팔에 입은 부상으로 원고를 펑크내서, 토키와 장으로 마감이 이틀 후인 긴급 원고를 그려줄 만화가를 찾아 온 월간 잡지 만화왕의 편집자 카베무라 타이조의 부탁으로, 그 동안 쌓아둔 아이디어를 살려 건방진 꼬마가 주인공인 나마쨩이라는 개그 단편을 그려주었는데, 잡지를 펼쳐보니 '신 연재작'이라고 실려 그것으로 인생 처음으로 월간 잡지에 연재를 시작하게 된다. 나마쨩은 호평을 얻고, 연이어 개그 만화 단편 의뢰를 받게되고, 개그 만화가로써의 재능을 각성한다.

월간지 3개의 연재로 바빠지면서 편집자의 소개로 어시스턴트로 고용한 토모코와 1년 간의 연애, 그녀로부터의 청원을 받아들여 결혼하기 위해 1961년 토키와 장을 나왔다. 결혼한 이듬해 주간 소년 선데이에서 오소마츠 군, 리본에서 비밀의 앗코짱을 각각 연재하며 인기 만화가의 대열에 합류한다. 1963년토키와 장 소속 만화가들이 설립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제로에 참가해 후지코 후지오가 연재하던 오바케의 Q타로에 배경을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들을 특별출연시키며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 1965년엔 하세 쿠니오, 후루야 미츠토시, 요코야마 타카오, 타카이 켄이치 등과 함께 신주쿠에 후지오 프로를 설립하였다.

1967년, 주간 소년 매거진(코단샤)에서 천재 바카본, 주간 소년 선데이에서 맹렬 아타로를 연재하면서 천재 개그 작가로 '시대의 총아'가 된다.[12] 이 무렵 카베무라 타이조가 만남을 주선해서 당시 신인 만화가였던 나가이 고를 만났는데, 그의 만화를 보고 어린이를 상대로 이런 잔혹한 만화를 그리면 안된다고 혹평하기도 했지만 정작 나가이 고는 오히려 이런 개그 만화의 거장이 안 하는 분야(에로, 그로테스크, 넌센스, 폭력성 등)의 틈새시장을 더 전념하자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아카츠카 후지오도 나가이 고에게 충격을 받았는지 이 사건 이후로 나가이 고처럼 잔혹한 개그를 하기도 했다.

3년 뒤 봄에(1970년 3월) 모친이 불의의 가스 폭발 사고로 입원해 퇴원하는 도중 지주막하출혈로 재입원해서, 열심히 그녀를 간호했음에도 끝내 뇌사 상태에 빠져 그 해 8월 20일 세상을 떠났고 아내완 서로 별거를 하게 된다. 1972년 후지오 프로에 금전적인 여유가 생긴 것을 계기로 본인 명의의 책임 편집을 제목으로 붙인 잡지 '만화 No.1'을 창간하기도 했다. 허나 다작업으로 바빴던 아카츠카는 편집 작업 참여가 불가능해 실질적으론 하세 쿠니오가 편집장을 맡았고, 얼마 못가 1호당 250만엔이란 적자를 내어 1973년 6호로 휴간한다.

같은해 11월엔 3년간 별거 생활을 거친 아내와 이혼했으며, 이듬해 '개그 게릴라' 연재의 일환으로 "야마다 이치로"로 필명을 바꾸고 연재중인 만화들을 모두 동명으로 집필하기도 했으나 모종의 사정으로 3개월 만에 갈아엎었다. 이 해(1974년)에 세무 조사에서 장기간 세금 체납이 밝혀졌고 연체금만 6천만엔에 달했는데, 이유는 후지오 프로 내부 회계사의 횡령이었고 총 2억엔의 피해액이 집계되었다. 인감 도장까지 맡길 만큼 믿은 이한테 통수를 당했음에도, 아카츠카는 그의 미래를 생각해 고소하지 않았다고 하며, 피해 금액 중 후지오 프로 소속 일부 어시스턴트들의 수영장 비용 관련 문제가 빚어져 이들은 후지오 프로를 퇴사하였다. 만화 '아다치 츠토무 이야기'[13]에 따르면 이 사기의 피해금액은 기업 하나가 날아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천문학적이었고 아카츠카는 전재산의 대부분을 처분했으나 츠토무에게 "나는 원래 가진 게 없던 사람이다. 그때로 돌아갔을 뿐이다. 돈은 다시 벌면 된다."라고 하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2년만에 피해 금액을 다 복구했다고 한다.[14]

2.3. 말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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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1975년엔 주간지 5개와 월간지 7개에 동시로 만화를 연재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으며,[15] 한편으론 타모리의 데뷔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는 등 연예인들, 업계 관계자들과 교류하며 스테이지 그룹 활동을 필두로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해 진행한 바 있었다. 영화 제작에도 관여해 "赤塚不二夫のギャグ・ポルノ 気分を出してもう一度", "下落合焼とりムービー" 등에서 원안, 각본 등을 맡기도 했다. 80년대 초중기엔 소년만화 잡지에서 이전처럼 주로 만화들을 연재하는 경향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인 1982년엔 토키와 장을 주제로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7년엔 아카츠카를 지원하던 한 사진 작가의 전 어시스턴트이자 스타일리스트인 스즈키 마치코와 결혼했으며, 결혼식 기자회견엔 전처와 장녀 아카츠카 리에코도 참여했다. 같은 해 TV 도쿄의 まんがのひろ 시간대에 원조 천재 바카본이 재방송되며 저연령층 시청자한테 호응을 얻자 이듬해부터 2년여간 오소마츠 군, 비밀의 아코짱, 천재 바카본[16], 맹렬 아타로가 속속 리메이크 방영되었고[17], 새로 연재하기도 했지만 연재를 관두면서 더욱 주량이 쌓여가며 알코올 의존증에 빠졌다. 치료를 위해 입원과 퇴원을 여러 번 반복했지만 나을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1992년엔 오랜 세월 아카츠카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던 하세 쿠니오가 후지오 프로에서 퇴사하였다.

1997년 6월 1일 시즈오카 현 내 이케다 20세기 미술관에서 개최된 '만화 바카다 아카츠카 후지오전'에서, 데뷔 전 그린 원고들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그려진 작품들을 포함한 약 200개의 원고들과 뭉크, 다빈치, 드가, 고흐 등의 유명 화가들을 패러디한 아트들이 전시되었고, 바닥에 채워진 바카본 파파와 이야미의 동상 등의 디스플레이들로 주목을 끌었으며, 이후 요코하마, 하코네, 교토 등 일본 전역의 순회 전시도 모두 대흥행을 기록했다. 하지만 6달 후 갑작스런 각혈로 긴급 입원해 검사 결과 식도암 진단을 받아, 작은창자의 일부를 식도 대용으로 이식하는 향후 수술 및 치료 내용을 알린 의사의 제안을 거절하면서까지 퇴원을 강행했다. 그 뒤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면서 종양은 완치됐지만 이듬해 11월 상태가 악화되어 재입원했으며, 한 달 뒤 10시간의 수술을 거쳐 몇 달 간의 장기 입원을 하는 동안 체중이 13kg이나 감소했고 애지중지하던 담배도 끊게 된다.[18]

2000년 8월에는 집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쳐, 몇 시간 후 부자연스럽게 변한 발음을 이상하게 생각해 입원한 결과 급성 경막 하혈종 판정을 받았다. 얼마 뒤 오른손에 마비 증세가 일어나 응급 수술을 받았고, 같은 해 점자 그림책 "赤塚不二夫のさわる絵本 よーいどん!"를 발표했다.[19] 이듬해 2월 8일, 쾌유를 기념한 신년회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렸는데, 당초 가족만이 진행할 예정이던 신년회에 친구 만화가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큰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2002년 4월엔 입원 도중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 뇌출혈 진단을 받고 5시간의 수술을 받은 후 일체의 창작 활동을 중단한다.[20] 2004년부턴 의식불명에 빠져 식물인간이 되어버렸고, 4년 뒤(2008년) 8월 2일 오후 4시 55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21] 사망 소식은 스포츠신문과 일반 잡지들에서 1면으로 실렸고, 각 방송국NHK에선 톱뉴스로 다루는 등 여러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장례식장에서 타모리는 직접 종이에 적은 조제문을 읽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감사의 말을 보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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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는 생전 토키와 장에서 처음 만난 후지코 후지오 A가 위원장을 맡아, 8월 7일 고별식이 도쿄도 나카노 구의 한 에서 진행되었다. 상주는 장녀인 아카츠카 리에코(赤塚りえ子)가 맡았고, 고별식에는 만화, 출판, 예능 관계자들과 생전 그를 기억한 등 약 1200명이 참석[23]했으며, 마츠모토 레이지, 나가이 고, 치바 테츠야 및 원로 작곡가 고바야시 아세이 등이 조문객으로 참배하였다.#

조서는 아비코 모토오(후지코 후지오 A), 타카이 켄이치로(高井研一郎), 후루야 미즈토시(古谷三敏), 키타미 겐이치(北見けんいち)[24] 등이 읽어내렸다. 출관식은 천재 바카본 애니메이션 1기의 주제가가 장송곡으로 흐르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시신은 자택 근처 신주쿠 구의 오치아이 장례식장에서 화장되었다.

3. 여담[편집]


  • 생전 애묘가였다. 그가 길렀던 애완 고양이 키쿠치요는 죽은 척이나 재주를 잘 부려 TV CM에 출연해 아카츠카 후지오의 인지도를 알리는데 한 몫 하였다.[25] 월간 코로코로 코믹에 키쿠치요를 주역으로 설정한 '하나 키쿠치요'를 그려낸 바 있었고 1997년 세상을 떠나자 무척 슬퍼하였다. 천재 바카본에서는 바카본 아버지가 온갖 동물을 다 잡아먹는데도 고양이는 웬만해선 잡아먹지 않는다. 자신이 창작한 고양이 캐릭터 냐로메도 꽤나 똑똑한 캐릭터로 나오며 냐로메를 주역으로 설정한 학습만화들을 십여 편이나 그리기도 했다.(#1, #2) 그리고 그 학습만화들은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해적판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 영화에 많은 흥미를 가져, 하타보의 움직임을 버스터 키튼에서 따왔다든지 그에 대한 패러디 영화를 만든 적이 있었다고 밝혔으며, 홈 라이브러리에는 당시로서는 비싼 희귀한 대화면 모니터와 수천 개의 영화 비디오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린 시절의 꿈은 찰리 채플린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 바카본 아빠(반쪽이 아빠)는 그가 제일로 아끼는 캐릭터로, 그 이유는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반쪽이 아빠의 얼굴만은 제대로 그릴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26] 그의 모티브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했으며, 작가 본인이 반쪽이 아빠의 코스프레를 하는 사례가 있었다.

  • 비밀의 아코짱 주인공인 카가미 아츠코와 오소마츠 군의 토토코의 디자인이 비슷하다는 지적에 대해 1989년에 발행된 만화책 후기에서 작가 자신이 그럴 리 없다고 언뜻 분노한 기색을 나타낸 답변으로 반박한 바 있다.

  • 천재 바카본에 등장하는 "이걸로 됐다!(これでいいのだ!)"란 대사는 아카츠카 후지오 자신이 어렸을 때 머물렀던 만주의 중국인들이 자주 활용한 메이화즈(没法子)를 일본어로 바꾸어 유래한 표현이라고 한다.


  •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TV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영화 등의 음향 효과와 선곡을 담당한 동명이인인 '아카츠카 후지오'와는 '라이브 인 하토야'에서도 음향 효과를 맡게 해주는 등 서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 야마시타 료스케와 처음 만났을 때 연주하던 재즈는 전혀 듣지 않고 대중음악에 흥미를 보였으며, 배우 미소라 히바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미즈키 시게루의 딸과 아카츠카의 딸, 데즈카 오사무의 딸이 나눈 대화들을 정리한 대담집 '게게게의 딸, 레레레의 딸, 라라라의 딸'에서 재즈를 듣지 않은 이유는 수수께끼라고 수록되었다. 그들이 만난 계기는 오소마츠 군에서 재즈를 불쾌하게 쓴 개그가 나온 장면을 봤다는 한 재즈 평론가(야마시타 료스케의 스승이었다 한다.)가 후지오 프로로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 2010년에 그의 생일인 9월 14일에 일본 구글 로고에 작가가 그린 작품의 캐릭터들이 등장한 바 있다.


  • 일본 개그맨 빅3인 타모리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하고 금전과 인맥으로 지원하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처음 만났을 때 정말 웃겼고 타모리가 자신의 어머니처럼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그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1967년 TV 프로 '만화 해적 퀴즈'에서 만화가로선 당시의 일본에서 이례적인 사회 진행을 쿠로야나기 테츠코와 함께 맡은 것을 계기로 생전 수많은 연예인들과 인연을 쌓았다.[27] 70년대 중반엔 하세 쿠니오, 야마시타 료스케 등과 같이 타모리를 만나, 그의 재주를 높이 사 도쿄로 데려다 줘서 집에 머물게 해주는 등 훗날의 국민급 오와라이로 인정받는데 공헌하였다.[28] 6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특별 진행자, 게스트, 심사위원장, 인터뷰 등 다양한 역할로 출연했는데,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TV 프로 출연 횟수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 2015년 9월 NHK BS 프리미엄에서 그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아카츠카 후지오 최후의 이것으로 좋다!'가 방영됐으며, 이 프로그램에서 미완성유작 '야지키타 바카도중'의 원고가 공개됐는데 원본은 집 주방에다 아무렇게나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외에 자신이 문서에 적은 마지막 문자는 '思い出を積み重ねていくのが人生なのよ.イヤーン!H'이 확인됐다.

  • 수학, 과학 학습만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냐로메의 재미있는 교실' 시리즈가 그것이다. 아카츠카 후지오 캐릭터가 총출동을 하고 꽤나 심도 깊은 내용을 다루는데 현직 교수가 감수하긴 했지만 놀랍게도 작가가 직접 공부해서 그린 것이다. 스스로 이해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이 중 '냐로메의 재밌는 성교육 교실' 편은 게이SM까지 소개하는 무시무시한 성교육 저서인데 오소마츠 군의 6쌍둥이가 나와서 성교육을 하기 때문에 오소마츠 상이 방영된 뒤 동인녀 팬 사이에서 재조명되어서 한 번 서점에서 동난 적이 있다.[29][30][31] 유익한 내용이지만 너무 수위가 높아서 수학, 과학 편은 재판되었지만 성교육 편은 재판이 되지 않고 있으며 중고가 5000엔 이상에 거래되고 있다. 한국에도 해적판인지 정식판인진 모르겠으나 일반 학습만화로 수학 편과 과학 편은 출판된 적이 있다. 당연하지만 성교육 편은 안 나왔고.

  • 오소마츠 상의 배경 마을 이름은 아카츠카 마치(赤塚町)이다. 상점 이름을 보면 아카츠카라고 많이 써져있다. 팬들은 도쿄도아카사카로 많이 헷갈린다. 배경이 도쿄도인 것은 맞다.



3.1. 성향[편집]


생전에 아카츠카 후지오는 패전 후 만주국에서 귀향한 일본 본국의 히키아게샤에 대한 무관심으로 빚어진 고난과 어린 시절 이웃들의 차별을 경험한 영향으로 인해 철저한 평화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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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헌법이다!'의 몇몇 장면.

대표작 중에서 대놓고 정치관을 드러낸 작품은 없지만 1970년대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에서 별도의 만화를 연재한 적도 있었고[32], 1982년 와세다대학 공인 서클인 인물연구회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때 일본이 교과서 문제에서 다른 나라들을 고려하지 않는 외교를 진행하는 데에 대하여 자민당에 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답했다. 또한 자민당의 문부성 인사 배치로 인한 압력 행사와 방위비 예산 증액, 징병제 찬성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쳤으며, 미국무기를 팔아사는 국가이므로 일본에 자연스레 압력을 가할 수밖엔 없고, 따지고 보면 미국의 속국과 다름 없으니까 일본은 미국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말한 바 있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세계미국소련 체제로 대립하면서 자연스레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으려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을 끌어들인 냉전의 주요국인 미국을 비판하는 의사인 점에서 그가 평화주의 성향이던 사실을 증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위 블로그에서 아카츠카가 일본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당원으로 활동한 증거를 찾지 못했고, 만화를 연재한다고 그 당의 지지자라는 보장은 없다는 견해로 1차적으로 쇼미더머니스럽다고 의심하기는 했으나, 돈을 준다고 하여도 전혀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 정당의 기관지에 만화를 연재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란 점을 언급하며 그가 아예 좌익이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위 글의 작성자는 이러한 주장을 보충하는 증거로 2003년 8월[33] 일본 공산당이 개최한 반전주의 전시회에서 야나세 타카시, 치바 테츠야, 모리타 켄지 등과 함께 참석했다는[34] 사실과 1983년 출간된 자신의 만화인 '일본국 헌법이다!'[35]에서 일본 정부의 대처와 헌법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 사실을 블로그에서 덧붙이고 있다.

아카츠카 후지오는 평화헌법 폐지와 군비 증강에 반대하는 이유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는데 저희 가족이 중국에 있을 때 제일 먼저 도망간 게 일본군이었습니다. 전혀 지켜주지 않았어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놈들과 그 놈들 후손이 지금 저런 주장을 하는데 어떻게 믿느냐고 깠다. 좌익이냐 아니냐는 확정 지을 수 없어도 전쟁과 일본군하면 치를 떠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저 위의 생애를 보자. 일본군 때문에 가족이 죽고 아버지는 정신병에 걸렸는데 이 사람이 일본군에 긍정적일 수가 없다.

여담으로 아카츠카 후지오의 작품들 애니에서 종종 배경에 욱일기가 있어 우익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지만[36] 일본에서는 독일하켄크로이츠와는 달리 욱일기를 금지시키지 못해[37] 단순히 장식적 문양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애니메이션이 특히 이런 경우가 많은데. 애니메이션은 2기부터는 원작자인 아카츠카 후지오의 체크를 거쳤기 때문에 아카츠카 후지오도 장식적 문양으로서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를 느끼지 않고 방조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38] 그리고 아카츠카 후지오 원작 만화에선 욱일 후광 연출이 안 쓰였다고 나무위키에 오랜 시간 적혀 있었으나 아카츠카 후지오 생전에 나온 만화책도 판본에 따라선 표지에 욱일 후광이 사용되고 있다. 지금도 아카츠카 후지오의 유족과 후지오 프로에서 고인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체크를 거쳐서 상품 전개를 하는데도 욱일 연출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욱일기가 쓰였다고 해서 아카츠카 후지오는 우익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사람은 일본 제국과 일본군 때문에 가족과 생활을 잃어 평생 일본 제국과 전쟁을 비난한 사람으로 절대 그들을 미화하기 위해서 욱일기를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카츠카가 욱일기를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쩌면 그는 단순히 태양을 좋아해서 태양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엔 이 꽤 자주 나오는 편이었다.


4. 특징[편집]


데뷔 초창기인 1950년대엔 소녀만화를 주로 그렸으며, 그림체는 데즈카 오사무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지금의 장르에 해당한 만화들을 그리기 시작한 연도는 1960년대부터로, 대체적으론 넌센스 장르의 나사빠진 부분이 많은 캐릭터들이 나오는 개그 만화들이 많았으나 비밀의 아코짱과 맹렬 아타로처럼 내적으로 진지하거나 여성향 장르의 만화들도 그렸었다.[39]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받은 후지코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요코야마 미츠테루 등과 더불어 토키와장 파 계열 만화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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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폭풍을 넘어서'의 연재본(추정) 표지.

대표작인 오소마츠 군, 맹렬 아타로, 비밀의 아코짱, 천재 바카본의 캐릭터들이 각각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며, 종종 설정붕괴가 나온 에피소드도 있었다. 원작에선 캐릭터들이 살해를 당하거나 사고를 당해 죽는 장면들과 폭력적, 선정적인 장면들도 꽤 있으나[40] 애니메이션에선 이 장면들이 대폭 삭제되거나 완화되어 나온 에피소드가 많다.[41]

작중 세월이 지나 캐릭터가 언급하는 후일담이나 세부 설정 등을 보면 블랙 코미디적인 모습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물론 작품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아카츠카의 작품들의 팬들은 이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42]

동시대에 활동한 동료 만화가들과 달리 해외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개그 성향이 다소 내수용이기도 했다는게 큰 요인일 듯.[43] 그리고 종종 오카마 캐릭터가 출연하며 관련된 섹드립이 나오는 에피소드들도 있는데, 이 경우로 대표 작품인 천재 바카본, 오소마츠 군에서 몇몇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주로 나오는 패턴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은 캐릭터가 "전 사실 게이었습니다."라고 커밍아웃을 하는 전개가 있다. 그리고 개그 만화라 다음 편에선 없던 설정이 된다. 그 외에도 하체탈의하고 다니는 장면도 굉장히 많다. 그러니까 한국에선 아예 들여올 수도 없었던 작가.

오소마츠 상 애니메이션이 처음 나왔을 때 다른 작품을 거침없이 패러디하는 모습, 성드립을 막 치고 방송 심의에 도전하는 장면을 마구 내보내서 시청자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원작자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라고 하는 반응도 나왔는데 아카츠카 후지오는 그것보다 더 했던 사람이다. 수위 높은 사회 풍자와 블랙 코미디를 하던 사람이라 표현 하나하나 걸고 넘어지면 현대 기준으론 온갖 논란에 시달렸을 것이다.[44][45] 귀귀나 초창기의 엉덩국과 작품 세계가 좀 비슷하다. 사실 한국에선 그의 작품이 알려지지 않은 데다 위의 올바른 정치성향 때문에 좀 이미지가 많이 하얀색, 순한맛으로 알려진 감이 있다. 아카츠카 후지오도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서 자신의 만화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논란이 일어나지 않게 방송 출연을 하고 사생활을 관리하며 스스로에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오소마츠 상 애니메이션의 토미나가 요시히코 프로듀서는 아카츠카는 "개그의 저편에 있는 넌센스를 추구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개그를 위해선 그야말로 온갖 짓을 다 했는데 대표적 에피소드로 작가와 어시의 오른손이 사고로 다 분질러졌다고 속이고선 에피소드 하나를 통으로 왼손으로 그려서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못해먹겠다면서 화면의 그림을 하나도 안 그리고 글씨만 내보냈다.

개그 이외의 소녀 만화는 약간의 부조리함은 보이지만 개그 만화를 그릴 때 만큼 과격하진 않고 자중하는 편으로 소녀들도 무리없이 볼 수 있다. 평소엔 개그 만화 특유의 디포르메 그림체지만 갑자기 그림체가 극화체로 바뀌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연출 기법도 아카츠카 후지오가 창시했다.

다작을 할 때는 본인은 콘티만 당담하고 밑그림 담당을 따로 둔 것으로 보인다. 아다치 미츠루 작가의 형 아다치 츠토무가 후지오 프로에서 아카츠카의 수석 어시스트로 일할 때 담당했던 업무가 바로 밑그림이었다. 아카츠카 후지오가 감탄했을 정도로 그의 캐릭터들을 잘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5. 경력[편집]



5.1. 수상[편집]


  • 1964년 오소마츠 군 제10회 소학관 만화상 수상.
  • 1972년 천재 바카본 제18회 문예춘추 만화상 수상.
  • 1997년 제26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대신상 수상.
  • 1998년 자수포장 수상.
  • 2009년 도쿄 국제 아니메 페어 제5회 공로상 수상.


5.2. 기타[편집]




6. 작품 목록[편집]


  • 오소마츠 군 - 2015년부터 오소마츠 상이란 리메이크가 나와서 시리즈로 이어졌다.
  • 맹렬 아타로
  • 비밀의 앗코짱
  • 천재 바카본 - 작가의 자서전과 장례식까지 장식한 작가의 대표작.
  • 렛쯔라곤
  • 폭풍을 넘어서 - 데뷔작
  • 나마짱
  • 홈런 교실[46]
  • 미츠게짱
  • 아카츠카 후지오의 히게히게 이야기
  • 아카츠카 후지오의 개그 게릴라
  • 아카츠카 후지오의 가요 개그 극장
  • 냐로메의 연구실
  • 아카츠카 후지오의 개그 랜드
  • 아카츠카 후지오의 개그 포토 랜드
  • 아카츠카 후지오의 애니멀 랜드
  • 이걸로 됐다 - 에세이 자서전, 1993년 NHK 출판에서 출간.

그 외 작품들은 위키피디아 항목 참조. 이것들은 아카츠카의 작품 중 일부 발표작이다.[47]


7. 관련 인물[편집]




  • (원작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업계인
    • 목록 (접기 클릭)
      • 누노카와 유지[1]
      • 시바야마 츠토무[2]
      • 키타하라 타케오[3]
      • 데자키 오사무[4]
      • 데자키 사토시[5]
      • 코바야시 시치로[6]
      • 이시구로 노보루[7]
      • 토미노 요시유키[8]
      • 코다마 켄지[9]
      • 마에다 미노루[10]
      • 요시카와 소지[11]
      • 오오하시 마나부[12]
      • 아오키 유조[13]
      • 오오츠카 야스오[14]
      • 오카자키 미노루[15]
      • 탄나이 츠카사[16]
      • 사사가와 히로시[17]
      • 우에다 히데히토[18]
      • 사토 준이치[19]
      • 츠지 마사키[20]
      • 타카하타 이사오[21]
      • 미야자키 하야오[22]
      • 코바야시 아세이[23]
      • 와타나베 타케오[24]
      • 호소다 마모루[25]
      • 후지타 요이치[26]
      • 아사노 나오유키[27]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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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음은 같고 한자만 다르다.[2]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로, 러허성이 폐지됨에 따라 허베이성에 편입되었다.[3] 이들 중 후지코 후지오 콤비 중 더 오랫동안 생존 중이던 한 명인 후지코 후지오 A가 2022년 4월에 타계하면서 이후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은 나가이 고밖에 없다.[4] 타가와 스이호작 군국주의 세뇌를 목적으로 한 프로파간다 만화다. 못 보게 한 아버지의 선구안. 1930년도에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으며 훗날 1970년도에 에이켄에서 TVA로도 제작되어 후지 테레비를 통해 방영되었고 1987년에는 스튜디오 피에로에서 리메이크하여 1988년까지 방영되었다.[5] 인양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히키아게샤를 의미한다. 현재 우라가시라 귀환 기념 공원이 위치해 있다.[6] 당시 일가가 만주에서 귀향한 배경과 전후 일본에 형성된 차별 의식으로 인해, 1994년 인터뷰에서 나라 현의 야마토코리 야마시에서 3년간 살았지만, 근처에 사람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풍조가 있었다. 차별 의식이 정착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줄서서 배급받고 내 순서가 되면 '만주, 안돼'라고 말해서 정말로 받은 것은 아니니까,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7] 한 인터뷰에서 니가타에서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음습한 풍토의 나라에 못지 않았으며 집안이 무척 가난했지만, 소년 잡지에 게재된 그림들의 영향으로 자기가 그린 그림이 전교 콩쿠르 대회에서 1등으로 오른 적도 있었다고 언급했다.[8] 아카츠카의 아버지는 말년에 앓던 췌장암이 악화되어 1979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9] 위에 올려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주위에서 '토키와 장의 미청년'으로 불렸다고 한다.[10] 정작 이시노모리는 그 광경을 보고선 자신도 같이 주방에서 씻었다고 한다(...).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훗날 토키와 장 건물이 철거될 때 주방의 수도꼭지를 가져갔다고 한다.[11] 멤버는 나가이 고, 츠노다 지로, 미즈키 시게루, 후지코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데즈카 오사무, 요코야마 미츠테루, 우메즈 카즈오 등등.[12] 다만 순정만화인 비밀의 앗코짱은 개그가 아닌 소녀들이 즐겨보는 이야기로 그렸음에도 세차례 애니화되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고, 맹렬 이타로는 개그 만화지만 진지할 땐 진지하고 크게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는 점을 생각하면 개그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들도 잘 쓰는 편이다.[13] 아다치 미츠루의 형. 만화가보다는 아카츠카의 어시로 유명했다.[14] 당시 아카츠카 후지오가 얼마나 잘 나갔었는지 잘 보여주는 예. 1970년대의 2억엔은 지금으로 치면 수십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평생 일해도 갚기 힘들 금액이다. 아다치 츠토무 역시 고등학생 때 데뷔를 하고 원고료를 받았는데 공무원경찰들보다 몇 배에 달하는 돈이었다고 한다.[15] 위에 상기된 회계사의 횡령한 돈을 갚기 위해서였다. 매달 주간 5개, 월간 7개 페이지 분량이 약 200페이지 정도였다고 한다. 즉 매달 만화책 한권 분량의 원고를 한 셈.[16] 애니메이션 제목은 '헤이세이 천재 바카본'.[17] 맹렬 아타로만 테레비 아사히에서 방영되었고, 나머지 작품들은 전부 후지 테레비에서 방영되었다.[18] 워낙 술과 담배를 즐겼던 것도 있고 빚을 갚기 위해 2년 동안 몸 사리지 않고 일을 했던 것이 타격이 큰 듯하다.[19] 계기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본 시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웃음이 없던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들을 웃게 해주고 싶단 생각에서 제작했다고 했으며, 점자책으로는 당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일본 전국의 맹인 학교에 교재기증되었다. 아카츠카는 이 책을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제공하기 위해서 저작권료를 거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20] 이해 점자 그림책 "赤塚不二夫のさわる絵本ニャロメをさがせ!"이 출간됐으며, 쇼가쿠칸에선 DVD 전집 "아카츠카 후지오 만화 대전집 DVD-BOX"를 발매하였다.[21] 그로부터 몇 달 전인 2월 24일, 치바 테츠야가 문병한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후에 다른 이미지로 대체됨.)[22] 그런데 거의 8분을 달하는 이 조문이 실은 백지였고, 개그 만화의 신인 아카츠카 후지오를 위해 칸진쵸를 흉내낸 개그를 치려 했던 것이라고 기사가 났으며 본인도 인정했다.[23] 일본 위키피디아 출처[24] 뒤의 3명 모두 후지오 프로에서 일했던 어시스턴트였다.[25] 이름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 출연한 미후네 토시로가 연기한 주인공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26] 아이러니하게도 오소마츠 군의 마지막화 에피소드들 중 하나에서는 아카츠카 후지오가 알코올 중독 때문에 만화를 못 그리게 되어 은퇴 후 자살했다고 나온다(...). 이때 배경에 삐뚤빼뚤해진 반쪽이 아빠가 그려져 있다.[27] 와카마츠 코지, 오노 야스시, 오시마 나기사, 이노우에 히사시, 요코오 타다노리, 우치다 유야, 사사키 마모루, 츠츠이 야스타카, 호시 신이치, 요시유키 쥰노스케, 아사바 카츠미, 아라키 노부요시, 사카타 아키라, 나카무라 세이치, 시노하라 카츠유키, 아사다 테츠야, 타무라 세츠코, 나카야마 치나츠, 미즈모리 아도, 히라오카 마사아키, 타이거 타테이시, 마츠모토 레이지, 치바 테츠야, 카지와라 잇키, 미즈시마 신지, 카미무라 카즈오, 쿠리 요지, 고 신타로, 쇼지 사다오, 쿠로테츠 히로시, 니카이 마사히로, 요코야마 류이치, 스기우라 유키오, 미카미 히로시, 최배달(최영의), 안도 노보루, 고바야시 아키라 등등 수십 명이 넘는다.[28] 이에 관련된 일화들로 1976년, 주간 요미우리에서 고 신타로, 하세 쿠니오 등 여러 명과 함께 자칭 '바보스런 일을 성실히 한다'는 이유로 전일본 문제 만족 연구회를 연재했는데, 이를 1978년에 '아카츠카 후지오와 전일본 만족 문제 연구회'로 명칭을 바꾸고 음반 '라이브 인 하토야'를 발표하기도 했다. 1977년 3월 타모리의 첫 LP 완성 기념 캠페인으로 '타모리와 도쿄 보도빌 쇼' 공연에 상연한 쇼 프로그램 '타모리·보도빌 위크'를 기획·제작했으며, 같은 해 10월 29일엔 타모리와 아카츠카 자신의 이벤트를 진행했으나 실적이 좋지 않아 관련 서적을 간행하면서 비로소 적자를 메꿨다고 한다.[29] 몽정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에서 마츠노 오소마츠몽정을 경험하고 놀라서 냐로메에게 얘기했는데 진정한 남자가 되었다고 축하받는다.[30] 자위 편에서 마츠노 토도마츠자위하다 들켜서 놀림거리가 되는 장면이 있다.[31] 피임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에서 오소마츠 6쌍둥이의 아버지가 나와서 "내가 왜 피임을 안 하고 섹스를 했을까."라고 후회하는 장면이 있다.[32] 이 만화의 주인공에서 유래한 캐릭터가 오소마츠 군에 등장하는 하타보이다.[33] 작가가 식물인간이 되기 몇 달 전이었다.[34] 이 중에서 치바 테츠야는 친한이다.[35] 나가이 켄이치와 공동 편저. 2013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36] 천재 바카본 2기와 3기 오프닝에서 욱일기를 연상하는 문양의 배경이 나온다.[37]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군의 깃발이 욱일기였으므로 패전국의 깃발을 못 걸게 하는 맥락으로 자연스럽게 욱일기가 사용금지되었으나 당시 패전의 충격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일본인들을 달래기 위해 미군이 풀어주게 되었다.[38] 사실 아카츠카 후지오가 애니에 비해서 욱일 후광을 배경으로 잘 쓰지 않은 건 배경 그리기 귀찮아서 그랬을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 이 사람 만화는 배경이 공백인 경우가 많다.[39] 실제로 비밀의 아코짱을 보면 그림체만 빼면 스토리가 오소마츠 군, 천재 바카본이 그린 사람이 그린게 맞는지 의심될 지경이다.[40] 사실 나가이 고의 파렴치 학원같이 60~70년대 당시 일본에서 사람이 죽고 폭력이며 선정적인 수위가 쎈 소년만화들이 많이 있었다.[41] 천재 바카본 애니 1작에선 원작파괴스러운 부분들이 여럿 있었다. 이 때문에 천재 바카본의 애니화 재추진에 대해 반대한 적도 있다고.[42] 렛쯔라곤에선 프롤로그 에피소드에서 오소마츠 군의 캐릭터들과 맹렬 아타로의 캐릭터들이 각각의 사건사고를 겪어 세상을 떠났단 언급이 나온다.[43]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오소마츠 군(육가네 6쌍둥이)이 방영하기 전까지만 해도 큰 인지도가 없어서 지금에 비해 오소마츠 군 항목 수정이 별로 없었다.[44] 예로 반쪽이 아빠 항목의 반쪽이 아빠가 바보가 된 이유를 읽어보자. 지금 같으면 장애인을 모욕했다고 방송금지나 작가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을 내용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건 표현에 관대했던 당시의 시대상도 있지만 아카츠카 후지오가 이미지 관리를 잘해서 그런 의도로 그릴 사람이 아니란 걸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45] 또 다른 예로 천재 바카본에서 여러 번 애니메이션화된 '검은 수염' 개그가 유명한데 애니에서는 의사의 얼굴이 무섭다면서 의사에게 수염면도하게 하고, 눈썹을 면도하게 하고, 머리카락을 면도하게 해서 빡빡이로 만드는 게 끝인데 만화책에서는 코, 귀, 입술, 다리가 무섭다면서 전부 자르게 해서 인간 허수아비로 만든다. 비단 이 에피소드가 아니더라도 반쪽이 아빠 등 관련 문서 등을 통해 그의 작품을 그림 없이 글로만 읽어본다면 식인, 사고사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웃기기보다는 기괴하고 폭력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그의 단편인 '캐스트'는 절대로 검색해서는 안 될 검색어에도 포함되기까지 했다.[46] 타카 아오이 원작으로, 초창기엔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공동으로 그렸다.[47] 위에 상기된 회계사의 횡령사건 이후로 일을 엄청 받아서 연재를 했었다고 한다. 제일 많았을 때는 매달 주간 4작품, 월간 3작품씩 총 200 페이지씩 찍어내듯 일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