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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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အောင်ဆန် | Aung San


파일:Aung-San-Burma-copy.jpg

출생
1915년 2월 13일
인도 제국 낫마욱
(現 미얀마 연방 공화국 낫마욱)
사망
1947년 7월 19일 (향년 32세)
영국령 버마 랑군
(現 미얀마 연방 공화국 양곤)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인도 제국(1915~1937)
[[버마국|

버마국
display: none; display: 버마국"
행정구
]]
(1942~1945)
파일:영국령 버마 기.svg 영국령 버마(1937~1947)[1]
가족
아내 킨 치
아웅 산 수 치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인, 장군
서명
파일:아웅 산 서명.svg

1. 개요
2. 생애
3. 죽음과 미얀마의 분열
4. 여담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asiancorrespondent.com/AungSan.jpg}}}
아웅 산의 사진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진으로, 미얀마 국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다.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이자 미얀마의 국부이다. 존칭인 '보조 아웅 산'[2]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보조'는 버마어로 '장군'이란 뜻이다. 또한 아웅 산 수 치의 아버지이다.


2. 생애[편집]


파일:Aung_San,_Khin_Kyi,_Aung_San_Oo.jpg

파일:Khin_Kyi_portrait.jpg

1945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3]
아웅 산의 아내 킨 치(1912.4.16.~ 1988.12.27)
1932년, 양곤대학에 입학하였으며, 4년 뒤인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1940년 영국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 하이난성에서 버마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후 일본의 도움을 받아 버마에 다시 돌아와 영국군과 싸웠다. 일본은 괴뢰정부인 버마국을 세우고 영국보다 더욱 가혹한 통치를 시행하여 버마인을 비롯한 인근 국가에서 동원해온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아웅 산은 30인의 동지와 함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을 결성,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고 영국군이 버마를 재점령하자, 아웅 산은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애틀리-아웅 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버마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3. 죽음과 미얀마의 분열[편집]


독립을 쟁취하기 전인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의 형[4]을 포함한 7인의 장관들과 함께 양곤 사무국 건물에서 임시 내각 회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아침에 군복을 입고 톰슨과 스텐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4명의 괴한이 지프를 타고 사무국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호원들을 죽이고 회의장으로 난입, 총기를 난사하였다. 아웅 산을 비롯한 5명이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3명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이후 영국 식민정부는 임시 내각의 총리였던 우 소[5]를 비롯한 8명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체포, 버마 임시 대법원에 이들의 재판권을 넘겨주었다. 우 소는 억울함을 항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명 모두 이듬해에 처형하였다.

그의 암살로 버마의 운명은 독립 이후부터 삐걱댔고, 이후 버마족카렌, 카친, , 친, 카미, 아라칸, 로힝야족 같은 소수민족들과 이념이 다른 정당간 내전이 끊이지 않게 되며,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혼란한 빈국으로 추락하고 만다. 독립 이후 버마의 굴곡진 역사에서 민족, 종교, 이념을 막론하고 모두가 존경하고 버마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아웅 산의 죽음은 제일 안타까운 순간. 만일 그가 죽지 않고 버마의 초대 대통령이나 혹은 초대 총리가 되었더라면 적어도 지금 같은 내전, 쿠데타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았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아웅산은 버마족 출신이었지만 카렌, 샨, 카친 등 소수민족들에게도 관대하였으며, 팡롱 협약이라는 미얀마 내 소수종족들의 자치와 권익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었다.

동남아시아의 국부들 중에서도 유난히 기구한 운명인데 다른 국부들과 달리 집권은 커녕, 반대파에 의해 독립을 보지도 못하고 죽은것도 모자라, 죽은지 36년뒤에 어느 북한김정일에 의해 자신의 묘소를 폭파되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까지 당했다. 거기에 본인 사후에 은 갖은 고생끝에 민주화 운동으로 집권했으나 미얀마 군부에 의해 축출되어 다시 감금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버마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건 물론이거니와 버마 통합을 실현하려던 인물이었기에, 현 미얀마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군부조차도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그래서 딸인 아웅 산 수 치가 30년 넘게 미얀마 군부에게 대항하며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정권 시기에 겪은 탄압이 가택 연금으로 끝났던 것.

달리 말하자면 아무리 군부가 이끄는 독재 정권이라 한들 아웅 산의 후손을 함부로 탄압했다가는 그날로 정권이 무너질 수 있을만큼 아웅 산의 위상 자체가 최고존엄인 건데, 심지어 미국의 한 언론인이 미얀마에 취재 목적으로 입국해놓고는 아웅 산 수 치의 자택에 몰래 찾아가 인터뷰를 한 게 탄로나서 국외 추방 명령을 받아 공항으로 압송될 때 어느 여경이[6] 작은 목소리로 아웅 산 수 치의 안부를 물어봤다고.

4. 여담[편집]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아웅 산 수 치이며, 본래 버마어에는 성이 따로 없지만 영국 유학을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본인의 이름 '수 지'[7] 앞에 붙여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외모도 판박이 수준에 가까울 만큼 닮은 편.

암살 배후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사건이 터지기 직전, 아웅산을 향한 암살이 곧 진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실제로 의심되는 반 아웅산 인사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아웅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회의장에 경호원 몇 명을 배치하는 것 외에는 전혀 대비가 없었다. 게다가 괴한들이 검문소를 통과할 때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기에 의혹이 커졌다. 또한 우 소가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증거가 부족했고, 그는 한평생 군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아웅산을 암살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암살 사건 이후, 사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였지만, 대부분 알 수 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후일 BBC에서 왜 우 소가 암살범으로 지목되었는지 취재하였는데, 그가 암시장에서 영국군 하급 장교들을 통해서 무기를 구매하는 장면이 목격되어서 라는 것. 결국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에는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김재익 등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관료들이 죽으면서 알려졌다. 미얀마를 방문한 사절단이 외교상 관례에 따라 아웅산의 묘소를 참배하는데 이를 노리고 북한이 테러를 일으킨 것. 묘지는 테러 이후 오랫동안 폐쇄됐다가 최근인 2012년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됐다.[8] 참고로 테러로 목조 건물이 박살난 뒤 돌로 다시 지어서 폭탄 테러 당시의 옛 모습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테러로 희생된 한국인 추모비도 있다. 양곤을 찾으면 99% 방문하는 슈웨다곤 파고다 북문 바로 앞에 있어서 들리기는 쉽다.

아시아 식민국가의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가 독립 후 독재자가 되어 독립 영웅이었던 이미지조차 망치고 추악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9], 아웅 산은 독립을 이룬 직후 암살당해서 여전히 영웅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물론 아웅 산이 버마의 국가지도자가 되었다면 비슷한 독립운동가들처럼 독재자가 되었을지 청렴한 통치를 펼쳤을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펼치기도 전에 죽는 바람에 만약으로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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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패전후 정권은 다시 영국령 버마로 돌아온다.[2] ဗိုလ်ချုပ် အောင်ဆန်[3] 아내가 안고 있는 아기가 외동딸 아웅 산 수 치이다.[4] 아웅 산 수 치에게는 큰아버지.[5] 친영 매국노. 미얀마의 독립을 반대하였다.[6] 미얀마에서는 경찰도 행정부의 내무부 산하 기관이 아니라 군 산하 기관이다.[7]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수 치'이지만 2013년 한국을 방문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수 지'로 표기하고 있다.[8]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2012년 이 묘소를 참배했는데, 참배가 끝나고 나서야 이를 공개했을 정도로 엄격히 보안에 부쳤다.[9] 당장 한국의 이승만만해도 이에 정확히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