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론(핵융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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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론 프로젝트 (Astron Project)

1. 요약
2. 촛점 강화
3. 아스트론 제안
4. 아스트론 테스트
5. 정밀 조사와 재검토
6. 취소



1. 요약[편집]


아스트론은 그리스계 미국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필로스(Nicholas Constantine Christofilos : 1916~1972)에 의해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에 건설된 핵융합로와 관련된 개발 계획을 가리킨다. 아스트론은 스텔러레이터(stellarator)[1]와 자기거울(magnetic mirror)[2]과 같은 설계에서 발견되는 몇몇 문제점들을 피할 수 있는 독특한 플라즈마 구속 시스템을 이용했다. 제한적인 감독 아래 여러차례 세부 설계가 변경되는 과정에 개발 작업이 크게 지연되었고, 이로 인해 개발 과정을 감독하기 위한 검토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스트론 핵융합로는 위원회가 정한 성능과 목표를 완전히 달성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하여 1972년에는 자금 지원이 취소되었고 프로젝트는 1973년에 끝났다.


2. 촛점 강화[편집]


크리스토필로스는 오늘날 물리학 실험에 이용되는 입자가속기에 사용된 강력한 촛점이라는 개념을 처음 고안해낸 업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40년대에 엘리베이터 관리회사를 운영하는 동안 자신이 고안한 촛점 이론에 따라 개념 구상을 시작했고, 1948년에는 가속기에 관한 몇가지 유용한 아이디어를 요약하여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방사선 연구소에 실험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들이 몇몇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의 편지를 돌려주었을 때, 크리스토필로스는 그 동안 지적 받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보충 제안을 이미 완성시키고 있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편지는 무시되었다. 1950년에 크리스토필로스는 특허 출원을 신청했고 1956년에 제2,736,799호 미국 특허로 승인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의 어니스트 쿠랜트(Ernest Courant), 밀튼 스탠리 리빙스턴(Milton Stanley Livingston)과 하트랜드 스나이더(Hartland Snyder)는 1952년 12월 1일자 물리학 리뷰 잡지에 "The Strong-Focusing Synchrotron—A New High Energy Accelerator"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똑같은 장치를 고려하고 있었고 크리스토필로스와 같은 해결책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잡지 기사를 보자마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곧바로 브룩헤이븐 연구소로 찾아가 그들이 자신의 편지에서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비난했다. 그 다음에는 메릴랜드주에 있는 원자력 위원회를 찾아가 그곳의 변호사들과 만났고, 위원회는 그에게 10만 달러의 특허료를 주었다.


3. 아스트론 제안[편집]


이 특허권을 팔면서 어느 정도 명성이 생기고 연구비도 챙긴 크리스토필로스는 본격적으로 미국 물리학계에 입성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핵물리학자도 아니었으며 더 놀라운 건 물리학과 관련된 그 어떤 학위를 딴 경력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는 1953년 4월부터는 셔우드 프로젝트 회의에 처음 참석하게 되었고, 그리스에서 그가 일하고 있던 다른 아이디어인 아스트론에 대해 발표했다.

그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간단히 요약하면, 고에너지의 전자를 자기거울에 주입하는 것이었다. 전자들은 거울에 포착되어 탱크 체적의 바깥쪽 표면 근처에 전류층을 형성하는데, 그는 이것을 "E-layer"라고 불렀다. E-rayer 자체가 강력한 자기장을 생성하고 전류가 임계 밀도에 도달하면 자기장은 역전되어 연속적인 차단 구역을 형성하는 폐쇄된 라인을 형성하게 된다. 일단 E-rayer가 성공적으로 형성되면, 그 내부로 핵융합 연료가 주입되고 E-rayer와의 상호 작용에 의해 가열되어 핵융합에 필요한 초고온에 도달하게 된다. 이 과정이 제대로 실현되기만 하면, 연료를 가압하고 고온으로 달구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플라즈마를 가두는 3가지 기능을 한꺼번에 달성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고, 이와 같은 이론은 물리학계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큰 주목을 끌게 된다.

이러한 배치는 맨 끝에 열린 자기장선이 있는 기본 자기거울 개념으로 주요 문제 중 하나를 해결했다. 융합 연료는 이 선을 따라 원자로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설계자들은 기계를 매우 높은 온도에서 작동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미러는 자연스럽게 플라즈마를 누출시켰다. 실제로 그 누출은 이론이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따라서 이 융합로는 크리스토필로스가 성취하기를 희망하는 수준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 당시 셔우드 팀은 이 같은 예측을 여전히 비밀에 부쳐두고 있었다. 그리고 주류 물리학계는 여전히 크리스토필로스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처음 그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미리 공식을 써둔 칠판이 준비된 프리젠테이션에 오르기 전에, 칠판 위의 일부 공식들은 조심스럽게 지워져 있었다. 당연히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가 칠판을 자신만의 방정식으로 채워나가는 동안, 다른 물리학자가 끼어들어 그가 쓴 공식 아래에 새로운 오류를 드러내는 공식들을 휘갈겨 쓰는 비열한 소행마저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런 따돌림과 연구 방해를 참다 못해 브룩헤이븐 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그곳에서 아스트론 이론을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었다.




4. 아스트론 테스트[편집]


1956년에 크리스토필로스는 마침내 보안 허가를 받았고, 자신의 아스트론 개념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2년이 지난 1958년제네바에서 열린 원자력 평화회의에서 그들이 제안한 시스템의 모델과 함께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할 수 있었다. 이 발표는 2개의 주제, 즉 플라즈마가 들어 있는 자기병(magnetic bottle)과 고에너지 입자(relativistic electrons)를 제공하는 입자 가속기로 구성되었다.

이런 나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규 물리학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크리스토필로스는 연구실에서 항상 외부인 취급을 받았다. 타임지는 "그는 아직도 물리학 학위가 없고, 영어보다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정적인 논쟁이 그를 아웃사이더로 만들게 했다."고 논평했다. 이로 인해 물리학계 내에서 마찰이 발생했고, 종래는 아스트론 프로그램의 종료가 요구되었다. 1963년은 전체 프로젝트가 셔우드 프로젝트 팀에 의한 검토 결과 공식적인 취소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여전히 제어된 핵융합 프로그램의 운영에 가능성을 인정받아 후원자가 있었는데, 특히 버클리 대학의 글렌 시보그(Glenn T. Seaborg) 박사와 캐나다 물리학자 존 S.포스터(John Stuart Foster)가 그랬다. 포스터 같은 경우는 셔우드 팀은 물론이고 리버모어 연구원들과도 굳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특히 큰 힘이 되었다. 그렇지만 포스터는 워싱턴 D.C.의 정치가들이 연구소에 아스트론 핵융합로를 당장 만들어내라고 지시하는 일이 닥칠까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상당한 논쟁 끝에, 그 프로그램은 계속되도록 허용될 것이지만 1965년까지는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결정되었다.

1963년까지 연구팀은 필요한 특성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선형 유도 가속기(linear induction accelerator)를 설계하고 제작했다. 특히, 가속기 설계는 강력한 입자 빔 병기를 연구하는 사업인 프로젝트 시소(Project Seesaw)의 연구팀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토타입 융합로를 건설하는 도중에 아스트론 개발 팀은 전자가 가속기 영역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토필로스는 탱크에 들어간 전자의 속도를 약간 늦추는 저항 전선을 도입해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에너지를 잃은 전자는 가속기 외부로 나오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약간의 추가 작업 후에, 첫번째 결과는 1964년 6월에 보고서로 출판되었다. 가속기는 4 메가볼트와 120 암페어 조건에서 작동했고, 2 A/cm2의 미약한 전류밀도만 생성시키는데 그쳐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수확도 있었다. 자기장 반전에 필수적인 E-layer가 가속기 직경의 0.05%에 불과하지만 안정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개발팀은 추가 목표를 세우고 1965년까지 조금씩 전진해나가고 있었으나, 결국 기준치를 달성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렇더라도 앞서 밝혀진대로 전자층은 안정적이어서, 전체 개발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새롭게 편성된 허브-앨리슨 위원회(Herb-Allison committee)는 그것을 이정표로 삼아 개발을 계속할 것을 권고했다.

1967년까지 그 수치는 6%로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실제로 플라즈마를 구속하기에 필요한 수준의 E-layer와는 거리가 멀었다. 1968년 크리스토필로스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케네스 파울러(T. Kenneth Fowler) 교수는 더 강력한 가속기와 탱크의 업그레이드를 요구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5. 정밀 조사와 재검토[편집]


핵융합로 업그레이드를 위한 자금은 승인되었지만 AEC에서 직접 감독되는 비용만 지불되었다. 이 시점까지 재래식 융합로 디자인인 스텔러레이터와 자기거울 방식은 오랫동안 실제 플라즈마를 이용해 실험을 거듭하면서 압력과 온도를 서서히 증가시키고 있었다. 이런 반면에 아스트론 계획은 플라즈마 실험의 전제 조건인 E-layer를 만드는 과정에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어서 이제 더 이상 뛰어난 설계라고 보기는 곤란해지고 있었다.

이쯤 되자 주류 핵물리학자들은 E-layer를 형성할 수 있더라도 실제 그것으로 플라즈마가 안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는 전혀 노력하지 않은 채 가속기 성능과 같은 실용 단계에 필요 이상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투덜대면서 부정적인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작동하고 안정된 아스트론이 방출되는 것보다 더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지 여부를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사실, 이것은 아스트론 계획이 품고 있는 심각한 우려 사항이었다. 왜냐하면 그 융합로 내부의 고에너지 입자들은 전자 동기 복사(electron synchrotron radiation)[3] 때문에 많은 양의 전력을 방출할 것이고 그때문에 에너지 생성 효율은 분명히 떨어질 것이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크리스토필로스도 이런 결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실제 작동되는 융합로 설계에서는 전자 대신 양자를 사용할 것이고, 같은 수준의 에너지 손실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당시에는 양자 가속기란 장치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위원회는 그렇게 설계를 바꾸는 과정이 간단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6. 취소[편집]


아스트론의 계속되는 문제와 더불어, 다른 핵융합로 연구팀인 상대론적 전자 코일 실험(Relativistic Electron Coil Experiment) 팀이 1968년에 제안했던 목표를 먼저 달성할 것처럼 보이는 사태에 직면하자, 위원회와 일단의 핵물리학자들은 계획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통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지적한 여러 문제들 중에서도 아스트론 팀이 "어려움을 이해하기보다는 피하거나 피할 수 있는 독창적인 방법을 찾고만 있다"고 지적했다. 원자력 위원회의 핵융합 제어 프로그램의 책임자인 로이 굴드(Roy Walter Gould : 1927~) 박사는 프로젝트가 계속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했지만, 미리 정해둔 타임 테이블에서 특정한 목표를 완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로버트 허쉬(Robert L. Hirsch) 박사가 1972년에 로이 굴드의 뒤를 이어 원자력 위원회의 관리 직책을 인수하면서 각 팀들이 연구 중인 접근 방식을 분류한 다음, 중복되거나 보상 효과가 떨어지는 계획안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위해 전반적인 재검토를 시작했다. 1968년에 소련이 발표한 토카막이 시연한 흥미로운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시간에 쫓기고 있던 허쉬는 상대적으로 간결하고 효과적인 프로젝트를 선호했다. 그가 보기에 아스트론과 같은 많은 핵융합 프로그램들은 단기적인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고, 허쉬는 그것들을 취소하고 싶어 했다.

1972년 9월 24일, 크리스토필로스는 AEC의 제임스 슐레진저(James Schlesinger : 1929~2014) 박사를 만났지만, 회의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제대로 만나주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긴 하루를 보낸 그는 집으로 갔다가 다시 위원회로 오는 통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부근 마을인 저먼타운(Germantown)의 모텔에서 잠을 잤다. 하지만 그날 밤, 크리스토필로스는 과도한 긴장과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마비로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리처드 브릭스(Richard Briggs) 교수가 1973년 6월에 계획된 프로젝트 종료일까지 아스트론 프로그램을 대신 맡게 되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아스트론은 파울러 교수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안정화 분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더 큰 단일 펄스를 사용하자 이 장치는 50%의 반자성(diamagnetic) 강도를 달성했는데, 이는 펄스 체인에 관해 크리스토필로스가 그간 기울여온 노력의 성과 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그들이 남긴 최종 보고서는 "다중 펄스 주입에 의한 E-layer 축적은 일반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기술했고, 취소될 무렵 그들은 어떤 물리적 문제가 축퇴 과정을 제한하고 있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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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L.스피처가 1951년에 고안한 장치로, 미국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의 핵융합 연구계획인 ‘셔우드 계획’에 속하는 실험장치였다. 1963년 이래 프린스턴 대학에서 가동되고 있는 C형은 러시아의 토카막 융합로와 함께 대표적인 환형 핵융합로였다. 토러스형인 도넛 모양의 장치 외부에 구리줄을 감아 자기장이 생기게 하고, 그 내부에 갇힌 플라스마가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도록 설계된 실험장치이다. 자기력선이 토러스를 l번 감은 다음, 원래 위치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회전변환각이 주어져 있다. 플라스마는 전류에 의해 100만℃ 정도까지 가열된 후 외부에서 급격히 변동하는 자기장을 걸어줌으로써 유기되는 자기력 펌핑 효과에 의해서 초고온으로 가열된다.[2] 공간적으로 변화하는 정상 자기계배위(磁氣界配位)가운데를 운동하는 전하입자는 자기장(磁氣場)의 최고치를 Bm, 최소치를 Bo라고 할 경우, 입자 자기(磁氣)모멘트의 불변성으로부터 자기장(磁氣場)의 강도 Bo의 곳에서의 입자 선회각(旋回角)을 θ라 하면, sin2θ·Bm/Bo≥1을 만족하는 입자는 자기장(磁氣場)의 강도 Bm의 곳에서 계(系)내로 반사된다. 이러한 자기장 배위를 자기거울이라 한다.[3] 자계 속에서 상대론적 고속으로 나선 운동을 하는 하전 입자가 방사하는 전자파. 처음에는 은하 전파의 일부나 전파 성운의 전파 등 방사 기구로써, 또 고에너지 하전 입자 원형 가속기(예컨대 전자 싱크로트론)의 방사 손실로서 착안이 되었다. 그 후 전자 싱크로트론에서의 방사광은 그 특징을 이용하여 진공 자외에서 X선 영역에 걸쳐서의 강력한 연속 광원으로 쓰이게 되었다. 전자 싱크로트론의 경우, 전자의 속도 υ가 느릴 때는 궤도 운동의 각 진동수 ω0=υ/R(R : 궤도 반경)과 같은 진동수의 쌍극자 방사가 사방으로 나가지만, 전자의 속도가 광속도에 가까와지면 상대론적 효과에 의해 빛이 방사되는 방향은 전자의 궤도 접선 방향으로 집중하게 되는 동시에 ω=nω0의 고조파가 나타나고, 전자의 에너지가 증가함에 따라 방사 에너지는 점차 차수가 높은 고조파 부분에 집중되게 된다. 이 방사는 편광해 있어서 궤도면상에서 관측하면 그 면에 평행인 전기 벡터를 가진 직선편광으로서, 관측 방향이 궤도면에서 기울면 상하에서 회전 방향이 역의 타원 편광이 된다. 이들의 방사 강도나 스펙트럼 분포 등은 이론식에서 도출할 수 있어서 진공 자외 영역에서 흑체 방사에 대신하는 표준 광원으로서도 사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