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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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동맹
Ēxcān Tlahtōlōyā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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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틀어 상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78px-Aztec_Empire_1519_map-fr.svg.png

1519년 아즈텍 제국의 최대 강역
1428년 ~ 1521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테노치티틀란 왕국
스페인 제국
[[누에바에스파냐|

누에바에스파냐
]]
위치
멕시코 고원 일대
정치 체제
연합왕국, 도시국가
수도
테노치티틀란 (사실상)
국가 원수
우에이 틀라토아니(황제)
주요 황제
이츠코아틀(1428~1440)
몬테수마 2세(1502~1520)
민족
메시카족 외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
5~6백만 명
문자
고전 나와틀어
종교
아즈텍 국교[2]
주요 사건
1428년 삼국동맹 결성
1521년 멸망[3]
면적
220,000 km2 (1520년)


언어별 명칭

한국어
삼국동맹
아즈텍 제국
메시카 제국
고전 나와틀어
Ēxcān Tlahtōlōyān
나와틀어
Mēxihcatlahtohcāyōtl
스페인어
Triple Alianza
Imperio azteca
Imperio mexica
영어
Triple Alliance
Aztec Empire
중국어
阿茲特克帝國

1. 개요
2. 명칭
4. 인구
5. 문화
5.1. 교육
5.3. 가톨릭으로 개종되기까지
5.4. 꽃 전쟁
6. 경제
7. 야금술
8. 사회 구조
8.1. 귀족 계급 / 피필틴
8.2. 평민 계급 / 마세우알틴
8.2.1. 테쿠틀리, 테칼레케, 칼풀레케
8.3. 노예 계급 / 틀라코틴, 마예케
8.4. 계급 간의 사회 이동
9. 고립된 제국
10. 스페인에게 정복된 이유
10.1. 전염병?
10.2. 전투 능력의 격차
10.3. 주변 부족과의 갈등
11. 평가
11.1. 야만적인 고대 제국?
12. 여담
13. 창작물에서
13.1. 아즈텍 제국 캐릭터



1. 개요[편집]


12세기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했던 아스카포찰코국의 제후국인 테노치티틀란국이 1428년 주군국을 제압하고 근방의 도시국가들을 복속하여 성립된 연합 제국이다. 근본적으론 테노치티틀란 왕국이 영토를 확장한 형태이기에 테노치티틀란 왕국 시기와 제국 시기를 통틀어 아즈텍 제국이라 칭한다.


2. 명칭[편집]


'아즈텍 제국'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의 학자들이 편의상 사용하는 명칭이다. 테노치티틀란을 세운 민족은 스스로를 메시카(/meːˈʃiʔka/), 그리고 수도인 테노치티틀란메시코 테노치티틀란(/meːˈʃiʔko tenoːt͡ʃˈtit͡ɬan/)이라고 불렀다. 아즈텍은 메시카족의 건국 신화상의 고향인 '아스틀란'(Aztlan)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18~19세기의 유럽 사학자들이 근대 멕시코와 유럽인 도래 이전의 메시카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 붙인 것이었다. # 후대의 학자들이 편의를 위해 역사상의 특정 국가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흔한 현상으로, 동로마 제국도 그러한 예이다.

삼국동맹[4]이란 명칭은 스페인 식민 시기에 처음 등장한 이름이고, 이것이 아즈텍 제국 당시에도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미디어에서 아즈텍이 스스로를 '아즈텍'이라 부르는 것은 스파르타인이나 아테네인이 자신들을 그리스인이라 칭하는 것과 유사하므로(실제로는 헬라인이라고 칭함) 주의가 필요하다.


3.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제국/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인구[편집]


인구는 500~600만 명이었다. 적어보이겠지만 사실 당시의 세계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인구였다. 참고로 동시기 영국 인구가 400~500만 명이었다. 특히 구 아즈텍의 중추였던 대도시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의 인구가 약 8~2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당시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제법 거대한 규모였다. 그때 런던이나 파리는 5~10만 명이었고, 구세계의 역사적인 대도시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의 전성기 시절의 인구가 약 50만 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5]

이런 규모는 아마도 주변 위성도시와 경제권 인구수를 묶어서 통계로 낸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10만 이상이 안 되어도 도시 규모가 작다고 할 수 없다. 비슷한 시기인 16세기 중반 그단스크의 인구가 7만여 명이었는데 당대 동유럽에서 상당히 큰 축에 속하는 대도시였다.[6]


5. 문화[편집]


인신공양, 식인 등, 다른 대륙에서 쇠퇴한 풍습이 상당한 규모로 이뤄졌기에 대중문화에서는 잔혹한 고대 문명 정도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지만 알고 보면 뛰어난 천문학 기술, 대규모 도시 건설, 무상 의무교육 실시[7] 등 나름 당시 아메리카 문명 중에서는 꽤나 고도로 발전한 문명이었다. 인신공양과 식인으로도 유명한데, 이 둘은 당시 남미 전역에서 나타나긴 했지만 아즈텍은 독보적일 정도로 그 규모가 남달랐다.

종말론 떡밥으로 유명했던 마야 달력 만큼은 아니지만 아즈텍의 달력인 태양의 돌도 상당히 유명하다. 이유인즉 현대 달력에 명절국경일을 표기하듯 월별 인신공양 제사를 표기했기 때문.

5.1. 교육[편집]


여러 사회 요소들 가운데서도 특히 교육을 가장 중시해서, 최초로 모든 '자유민'들에게 신분에 상관 없이 남녀 모두에게 의무교육을 실행한 국가[8]였다. 물론 말만 제국이지 실상은 수많은 도시국가들로부터 조공만 받고, 내정은 일체 간섭하지 않는 도시국가들의 군집인지라 행정력이 닿는 유일한 직할지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의 시민들에 한해서였다.[9]

남성의 경우, 체력 단련과 군사 교육, 가상전쟁 훈련과 일부러 고통을 참아내야하는 극기훈련에, 체제에 충성심을 갖게 하는 사상 교육에 해당하는 종교 교육 등등의 군대와 같은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학문의 경우, 평민 학교에서는 최소한의 생활 지식과 숫자 세기 정도의 기초만 가르쳐서 마치 같은 군국주의 국가인 스파르타가 했던 것처럼, 사실상 징병제에 더 가까웠다. 여자의 경우는 기초적인 생활 지식과 집안일, 여성으로의 몸가짐 등을 익혔다.


5.2. 인신공양과 종교 제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신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3. 가톨릭으로 개종되기까지[편집]


아즈텍 제국이 정복된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 제일 먼저 틀락스칼텍의 왕과 귀족들이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에스파냐에 우호적인 원주민들이 그 뒤를 이었는데, 1540년대에 이르면 이미 250만 명 가까이 되는 원주민들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가톨릭 전승에 의하면 이 시기에 과달루페의 성모가 발현했다고 한다. 교회 측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1531년 12월 9일 이른 아침, 아즈텍 농부인 성 후안 디에고 콰우틀라토아친(San Juan Diego - Cuauhtlatoatzin)이 미사에 참례하려고 테페약 언덕 꼭대기를 넘고 있을 때, 신비롭고 찬란한 빛을 내는 구름 속에 푸른 망토를 입은 성모 마리아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는 그에게 나우아틀어로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믿으며, 내 도움을 요청하는 지상의 모든 백성의 자비로운 어머니이다. 나는 그들의 비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나의 사랑과 연민, 구원 그리고 보호를 증거로 제시하는 표시로 내가 발현한 이곳에 성당을 세우길 바라고 있다. 그러니 너는 멕시코 주교관에 가서 이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는 것이 내 소망임을 전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자신이 발현한 장소에 성당을 세워 자신을 공경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를 보고 놀란 콰우틀라토아친은 그대로 주교관으로 달려가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보고했지만, 스페인 카스티야 출신의 후안 데 수마라가 주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테페약 언덕은 과거 아즈텍인의 신이었던 토난친 여신의 성소였기 때문이다. 수마라가 주교는 콰우틀라토아친에게

"성모님이 나타났다는 기적의 증거를 가져오라"

고 요구했다. 콰우틀라토아친이 주교를 만나고 나서 테페약 언덕을 지났을 때, 그는 다시 성모 마리아와 마주쳤다. 그는 성모 마리아에게

"주교님이 저의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라고 하소연했는데, 그러자 성모 마리아는 언덕 위에 장미꽃이 피어 있으니, 꺾어다가 주교에게 보여 주라고 했다.

문제는 테페약 언덕 꼭대기가 이 필 수 없는 험한 바위 언덕이었던 데다가, 당시 계절도 겨울이었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콰우틀라토아친은 그곳에서 (그 지역 자생종이 아닌 수마라가 주교의 고향인) 카스티야산 장미들이 만발한 것을 목격했고, 꽃들을 채집하여 자신의 망토로 쌌다. 그러고는 서둘러 내려와 성모 마리아에게 다시 갔다. 성모 마리아는 그가 가지고 온 장미들을 보고 손수 그의 망토에 가지런히 다시 놓아주었다. 뒤이어 그녀는 콰우틀라토아친에게 말했다.

후안, 이 여러 가지 장미송이들이 네가 주교에게 가져가야 할 표적이다. 너는 주교에게 이것들을 가져가서 내 소망을 깨닫도록 하고, 내가 요청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내 이름을 들어 말하도록 하여라. 너는 나의 심부름꾼으로서 신념을 지니고 행동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는 너의 망토에 싸인 꽃송이들을 주교의 앞에 나아갈 때까지 풀어 보이지 않을 것을 엄격하게 명령한다. 그것들을 조심해서 가져가도록 하여라. 네가 그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할 때, 내가 너를 산 위로 보냈으며 거기에서 이 꽃들을 발견했다고 전하여라. 그렇게 한다면 너는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요구한 성당이 세워지는 날까지 너는 그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주교는 콰우틀라토아친이 가져온 장미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런데 장미꽃들이 마루 바닥에 폭포처럼 흩뿌려지면서,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도 새겨져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를 본 주교는 그 경이로움에 놀라 그 즉시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새겨진 망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성모 마리아의 요청을 믿지 않고 무시한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해 용서의 기도를 바쳤고, 요청대로 성당도 세워졌다. 이 성당은 과거 아즈텍인이 제례를 행하던 피라미드 바로 위에 세워졌다.

이후 '후안 디에고'로 개명한 콰우틀라토아친은, 테페약 언덕에 세워진 작은 성당을 지키면서 자신이 겪은 기적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원주민들이 개종했는데, 사실 다신교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던 원주민들은 하느님[10]도 우이칠로포치틀리, 토난친, 케찰코아틀 같은 아스텍의 전통적인 신과 동급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전통 신에게 지내는 제사 의식 등이 여전히 아스텍인의 종교관에 남아 있었으며, 멕시코나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예수상이 그토록 피칠갑(?)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멕시코인 개종자는 약 900만 명이었는데, 성모 발현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당시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은 건 사실로 보인다. 교황청에서 인정한 첫 번째 성모 발현과달루페의 성모에 대해 역대 교황들은 성모신심을 바치며 공경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90년 5월 6일2002년 7월 31일 과달루페의 성모 성지를 방문해 시복식시성식을 집전하면서 후안 디에고를 복자품과 성인품에 올렸다. 시복식 영상, 시성식 영상

스페인 선교사들은 또한 '인신공양으로 태양이 뜨도록 유지한다'는 원주민들의 신앙관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매일매일 피를 흘리시고,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그분의 살을 먹으니, 태양이 멈출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정말로 인신공양을 하지 않고도 태양이 뜨는 것을 본 원주민들은 자연스럽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선교사들의 표현이 언뜻 괴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톨릭성체성사 교리에 따르면 매우 정확한 표현이다. 가톨릭에서 예수의 죽음은 창조주가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를 인신공양의 제물로 바치고, 그렇게 바쳐진 창조주의 피와 살을 피조물이 섭식함으로써 창조주의 초월적인 사랑이 드러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당연히 이 교리는 표현 자체부터 직관적인 면에서 원주민들의 취향에 너무나 잘 맞았다. 그리고 딱히 괴이할 것도 없는 것이, 애초에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 영구히 제물이 되어주셨으니 더 이상 사람이나 동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

는 기독교의 교리 자체가 기존 종교의 제사의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세계[11]에도 고대에는 바알 신앙 등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종교가 있었고, 인신공양을 혐오한 고대 로마 종교나 고대 유대교에서도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식은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기독교의 이 같은 교리는 이전의 기존 종교에 비해 간소하고 효율적인 종교의식을 통해, 특히 가축을 제물로 바칠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아즈텍에서도 반복된 것이다.

종합하자면
  • "기존의 종교관이 깨지고(인신공양을 하지 않아도 태양은 뜬다.)
  • 그러면서도 가톨릭의 교리가 기존의 인신공양 교리와 정확히 수렴되어 맞물리며("《구약성서》-가축을 제물로, 아즈텍-사람을 제물로 → 《신약성서》-주 예수께서 하느님의 안배에 따라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셨고, 더 이상 직접적 제물은 바치지 않아도 된다."[12])
  • 직접적으로 제물을 바칠 여력이 없는 하층민들과 원주민들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교리에(주 예수께서 스스로를 바쳤으므로 더 이상 직접적인 제물을 바칠 이유가 없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적 믿음을 하느님께 바치기만 해도 된다.)."
  • 거기에다가 주 예수께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참여자에게 그것을 먹고 마시는 의식까지 할 수 있었다.
  • 추가적으로 유럽에서 이미 널리 기르고 있던 가축들이란 직접적인 지원까지.
복합적인 요인이 정확히 맞물려 급속도로 퍼질 수 있었다.

이런 급격한 교화는 이후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교황이 원주민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별다른 저항없이 빠르게 개종되었기에 원주민들의 문화와 이성이 존중되었으며, 이는 아직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원주민들에게도 해당되었다.

이와 관련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초기 포교 시절에 원주민들이 세례성사를 매우 영험한 주술 정도로 여기고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세례를 수 차례, 심하면 몇십 차례도 받으려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톨릭7성사 중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그리고 성품성사에서 각 단계의 품(부제품<사제품<주교품)은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가톨릭화와 함께, 인육 섭취가 발달한 이유 중 하나를 육용 가축의 부족으로 추정한 에르난 코르테스스페인 본토에서 돼지를 들여와 가축으로 키우게 하여 그 고기를 먹게 함으로서[13], 가축의 부족과 그 속에서 태동하여 체계화된 종교라는 복합적인 요인이 전부 해결되자 인육 섭취도 함께 사라졌다.

5.4. 꽃 전쟁[편집]


아즈텍의 전쟁 방식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꽃 전쟁이다. 적군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것.

5:5부터 400:400까지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일어난 국지전으로, 이는 틀락스칼텍같은 아즈텍에 비해선 영세하나 언제든 강력해질 수 있을 잠재력을 가진, 아즈텍에 적대적인 도시국가들을 상대로 벌어진 전쟁들이다. 아즈텍만의 고유의 전쟁 방식은 아니고 아즈텍 이전 고전기부터 존재해왔던 전쟁 방식이나, 틀락스칼텍과의 200여년 간의 꽃 전쟁은 특기할만한다.

한창 테츠코코 근방을 평정하고 여러 민족 도시 국가들을 복속시켜가며 규모를 불리던 아즈텍은 근방의 틀락스칼텍 역시 몇 번 공격했으나, 이를 요격한 틀락스칼텍 병력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틀락스칼텍을 정복하는 것은 매번 실패했다. 이러한 틀락스칼텍에 대한 공략이 매번 실패하고, 그렇다고 틀락스칼텍과의 원수 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놔뒀다간 틀락스칼텍이 어느 사이에 강대해져서 아즈텍을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 사용한 방책이 바로 소규모 국지전을 통한 견제, 즉 '꽃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전쟁 형태였다. 세력 간의 전쟁이 교착 상태로 빠지고 이에 대해 마땅한 대책이 없을 때 쓰이던 전통적인 의례 전쟁이었고, 이로 인해 아즈텍은 막대한 전비로 인해 경제가 망가지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틀락스칼라를 포위하고 사실상 손아귀 안에 있음을 과시할 수 있었다. 200여년간 이러한 꽃 전쟁을 통해 균형을 맞춰왔으며 다른 도시국가들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꽃 전쟁의 지속은 틀락스칼텍같은 복속되지 않은 크고 작은 부족 세력들과 아즈텍 사이에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악감정을 불러올 것이 명확했다. 계속된 아즈텍의 압박과 방어전에 이골이 난 틀락스칼텍은 언제든 테노치티틀란을 파괴하고 싶어했으며, 그러한 감정이 코르테스의 에스파냐 군대와 만나게 되면서 결국 아즈텍 입장에선 최악의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꽃 전쟁 같은 소규모 국지전을 통한 영향력 행사는 고대 그리스 같은 도시국가들의 연합 형태의 권력 구도를 가진 여러 국가들에선 의외로 흔한 형태의 전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도 실질적으로 정복한 영토인 메세니아를 일부러 멸망시키지는 않고 남겨두었고 매년 메세니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해 쳐들어가 메세니아인들을 죽였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후일 메세니아를 잃는데 테베와의 전쟁에서 진 후 테베는 스파르타에 의해 메세니아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며 메세니아에서 스파르타의 영향력을 없앴고(실질적인 독립) 이렇게 자유를 찾은 메세니아는 그동안 스파르타가 저지른 만행에 이를 갈며 스파르타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지하고 재침공에 대비해 방어준비를 했다. 이 때문에 메세니아의 독립으로 노예계급을 이루던 메세니아인들이 떨어져나가 큰 타격을 입었고 이에 메세니아 수복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이후로도 메세니아는 로마에 병합되기 전까지 스파르타가 참여한 동맹에는 절대로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반스파르타 성향을 띄게 된다.

물론 아무리 거대한 제국이라 한들 이 전쟁을 항상 아즈텍의 승리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몬테수마 2세의 치세에서는, 꽃 전쟁이 6번이 있었는데. 0승 4패 2무, 즉 한 번도 못 이겼고, 심지어 한 번은 침공을 받기도 했다.[14]


6. 경제[편집]


지역마다 다른 통화가 사용되었다. 물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 화폐 단위는 카카오이다.


위조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행한 아즈텍에서도 밀랍이나 점토, 야생 카카오 아종 등으로 위조화폐를 만드는 생계형 위조범들이 있을 정도로 카카오 콩은 상당히 귀중한 소액 화폐였다. 모든 카카오 콩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고, 종과 출처가 된 지역에 따라 크고 작은 가치의 편차가 있었다. 고액 화폐의 경우에는 후에 서술되는 콰치틀리 면포나 금속으로 된 도끼날 등이 있었으나, 누에바에스파냐 시대로 접어들며 에스파냐의 화폐들이 유입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카카오 콩은 누에바에스파냐 시대에도 살아남았고,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부 지역에서 화폐로서의 기능을 했다. 누에바에스파냐 시대가 되면 에스파냐의 레알 및 페소들과 병행했는데 이를 통해서 명확한 가치 편차를 알 수 있다. 레알은 200개의 카카오 콩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8레알은 1페소의 가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고액 화폐인 콰치틀리(quachtli) 면포 역시 품질에 따라서 각기 다른 가치를 가졌으며, 작게는 카카오 콩 65개부터 크게는 240 ~ 300개까지 다양한 가치의 편차를 가졌다.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일반인들은 1년에 20개의 면직물을 소비할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술했듯, 에스파냐의 화폐들이 유입되면서 결국 쇠퇴하게 된다.

아즈텍인 사회의 중심은 여느 문명들과는 크게 다르지 않게, 시장이 중심이 되었다. 특히 도시국가들을 포함한 대제국으로 성장한 아즈텍이 무역 체계를 독점한 이후, 도시국가들에서 나오는 수많은 공물과 상품들이 아즈텍의 시장을 오고 갔다. 장날이 되면 60,000명이 올 수준이었던 테노치티틀란의 틀라텔롤코 중앙 시장은 에스파냐인들도 놀랄 수준으로 거대했으며, 이러한 시장의 존재를 본 한 스페인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가는 것과 천당에 가는 것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대개의 아즈텍 부인들은 천당을 고른다. 그러나 먼저 천당에서 시장에 갈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강을 통해서 물자가 오가고 상인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으며, 아즈텍의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5일장이 섰다. 그만큼 귀족들과 왕족의 소비력이 막강했으며, 새의 깃털과 재규어의 가죽, 카카오와 황금, 해안지역에서 가져온 굴, 거북, 가재 등 온갖 물자들이 몰려들었으며 밀수 역시 이루어졌다.#

아즈텍에 바퀴가 있었는지 여부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거리지만, 대체로 바퀴가 물류 수송에 커다란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수도 테노치티틀란부터가 운하도시였고, 물류에서 카누가 차지하는 부분은 현대의 자동차 그 이상이었다. 아즈텍에서는 상인의 카누를 부수는 것은 전쟁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더군다나 수레를 만들어도 이를 끌만한 마땅한 원동력, 즉 , 같은 종의 대형 우제류들이 없었던 메소아메리카에선 바퀴가 쓰이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실제로 이 지역의 바퀴 유물도 완구같은 형태로만 발견되고 있다.

다만 수도가 내륙에 있었던 아즈텍에 도로망이 미비했던 건 페널티였는데, 이것 때문에 전성기의 영토도 잉카 제국의 1/10을 겨우 넘겼고, 아즈텍의 멸망 당시 잉카와는 다르게 피난이나 임시수도 같은 시도도 못해보고 그대로 멸망했다.

도구의 대부분이 나무나 돌이었고, 철을 다루지 못했던 탓에 나무를 베는게 어려워서 숲을 밀어버리고 개간을 하는 건 어려웠다. 다만 농업 자체는 번성했다.

아즈텍은 주로 채식 위주로 식사를 했으며, 육류도 먹었는데 여러 양서류, 파충류 동물들과 곤충류들을 별미로 먹었다. 주요 가축으로 , 칠면조, 오리 등이었다고 추정되고는 있으나, 이 부분은 불확실하다. 칠면조 뼈같이 확실하게 증거가 남아있는 마야 문명을 통해서 추정만 할 뿐이다.[15] 또한 주요 작물로는 이나 땅콩 등의 견과류, 용설란, 옥수수, 토마토, 아마란스 등이 있었다.# , 같은 노동집약적 문명의 안정성에 주요 역할을 하는 곡식들이 없었던 메소아메리카 지방에서 지력을 굉장한 수준으로 소비하고, 보관도 어려운 옥수수같은 주요 작물들의 한계와 지력을 회복시켜줄 대형 가축의 부재는 아즈텍의 발전에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이는 곧 자연스럽게 식량이 인구 수를 제한시키는 맬서스 트랩에 빠지게 만들었고, 이러한 한계는 잉카 같은 타 아메리카 계열 문명들도 마찬가지였다. 감자 같은 다른 작물들은 안데스 산맥을 넘지도 못했고, 설사 넘어서 아즈텍에 와 재배되었다고 해도 결국 한계는 확실했기 때문에 곡식의 부재를 이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7. 야금술[편집]


메소아메리카 지역은 전체적으로 야금술의 유입이 늦었다. 남아메리카나 북아메리카 지역의 원주 문명들, 특히 오대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기원전 5500년대 당시 사용된 유물이 출토될 정도였고, 남아메리카는 기원전 2150년대에 만들어진 금속 유물이 출토된 데 비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금속 유물은 기원전 200년대에 출토된 유물이다. 초기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야금술이 퍼진 곳은 현대의 에콰도르 지방 문명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멕시코 서부 지역으로, 10세기 초반에는 멕시코 서부에서 메소아메리카 전역으로 널리 퍼졌다.

아즈텍에서 야금술의 주요 재료로 사용된 것은 다른 메소아메리카 문명들과 유사하게 , , 그리고 구리 등이었다. 이러한 금속들이 널리 쓰인 것은 유라시아 문명들도 그러하듯, 가공이 쉬웠기 때문이었고, 특히 청동을 통해 실생활에 쓰일만한 도끼나 농기구같은 여러 도구들까지 만들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금속 기술들의 발전이 곧장 무기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금속제 무기들보다는 흑요석 무기들이 더 널리 쓰였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부서지거나 하면 쓰기 어려운 금속 무기들과 달리 발전한 흑요석 가공 기술을 통해 흑요석 무기들을 쉽고 간편하게 만들 수 있었고, 무뎌지면 부러트린 후 다시 쓰면 되었다. 또한 아즈텍의 금속 무기 유물로는 화살촉 등이 있었으며, 콩기스타도르들이 아즈텍을 침략할 즈음엔 아즈텍인은 청동기들을 실험하면서 여러 성분을 가진 금속들을 만들고 있었다.#


8. 사회 구조[편집]



8.1. 귀족 계급 / 피필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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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에서 귀족으로 불리는 계층인 지도자층을 아즈텍에선 피필틴(Pipiltin)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지위는 상속되었으며 힌두교브라만 계급처럼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고위직을 담당하여 공무원, 제사장, 대상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유럽의 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기관인 '칼메칵'(calmecac)을 운용했으며 이 곳에서 제례, 전쟁 수행, 행정 기술과 같은 실무 능력과 고위층으로서 요구되는 사교 예절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교육기관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피필틴뿐이었다.

일본의 다이묘처럼 피필틴들은 행정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일정한 크기의 봉토를 하사받았는데, 이를 '필랄리'(pillali)라고 불렀다. 이 봉토는 아즈텍 사회에서 실질적인 농노 계층인 '마예케'(mayeque)들이 운영했다. 마지막으로 피필틴들이 정부로부터 받는 가장 큰 특권은 바로 조세의 완전 면제였다.


8.2. 평민 계급 / 마세우알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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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 장인 그리고 소수의 상인들로 구성된 이들을 마세우알틴(macehualtin)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득의 일부를 국가에 바쳐야 하는 의무를 지닌 일종의 신민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주로 마을 규모의 공동체 경제 단위를 구성하며 살았는데 이를 '칼풀리'라고 불렀다. 칼풀리는 일종의 지연과 혈연으로 묶인 집단을 말했으며, 각각의 칼풀리는 공동으로 땅을 소유하고 이를 후대의 구성원에게 물려주었다.

이런 칼풀리를 운영하기 위한 마세우알틴 계급의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따로 존재했는데, 이를 '텔포치칼리'(telpochcalli)라고 불렀다. 이 교육기관은 기초적인 종교 신앙과 전쟁에서 징집병의 역할을 수행할 마세우알틴들의 전투 교육, 그리고 일상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했다.

8.2.1. 테쿠틀리, 테칼레케, 칼풀레케[편집]


마세우알틴들의 사회체계를 결정하는 칼풀리는 그들 사이에서 지배와 피지배 계층을 나누기도 했다. 칼풀리를 지도하고 법적•경제적 책임을 지는 이들을 테쿠틀리(tecuhtli)[16]라고 불렀으며, 칼풀리 내에서 나오는 일정량의 생산물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마세우알틴들은 이 테쿠틀리를 통해서 중앙에 세를 납부했는데, 자신이 속한 칼풀리에 세수를 바치는 이들을 테칼레케(tecaleque)라고 불렀으며, 틀라토아니(아즈텍 사회의 종교체계)에게 세수를 납부하는 이들은 칼풀레케(calpuleque)라고 불렀다. '칼풀리'라고도 불리는 이 사회 체계는 아즈텍 사회 체계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8.3. 노예 계급 / 틀라코틴, 마예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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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번역되는 아즈텍의 노예 계급을 틀라코틴, 또는 마예케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노예'라고 번역되지만, 노예보다는 채무나 죗값을 갚을 능력이 없어 노동력으로 갚는 일시적인 상태에 가깝다. 때문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서유럽의 노예와는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 노예가 되는 이유
이들은 정복한 도시의 공물로서 끌려온 전쟁 포로가 대부분이었다. 자유민이나 귀족이라도 죄를 지으면 틀라코틴으로 강등당할 수 있었다. 큰 빚을 져도 노예가 되었고, 거액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었다.

  • 세습되지 않음
서유럽 노예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아즈텍 노예 계급은 세습되지 않았다. 노예의 자녀는 평민으로 인정받았다.

  • 업무 외 생활의 자유, 재산 소유권
노예들도 성실하게 일만 한다면 개인의 일상생활에 전혀 침해를 받지 않았으며, 결혼하여 자녀를 가질 수도 있었고, 돈을 벌어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심지어 소유권에는 '다른 노예'도 포함되어 있어서, 노예가 노예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17]

  • 노력에 따라 해방이 가능함
빚이나 죗값을 전부 갚으면 해방되었다. 또한 노예일지라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면 자유를 얻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사가 될 수 있었다.

  • 부당한 학대로부터 보호받음
주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노예를 폭행하거나 학대하면 그 소유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주인이 자신을 부당하게 학대할 경우, 지역 내 특정 신전으로 도망치면 그 자리에서 해방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 채무 불이행 시
노예가 일을 게을리하면 노예를 판 자에게 환불을 요구할 수 있었고, 3번 이상 되팔린 기록이 있다면 종교적 제물 혹은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8.4. 계급 간의 사회 이동[편집]


아즈텍은 매우 엄격한 법률을 가진 제국이었으나, 그와 별개로 계급 제도만큼은 다른 국가들보다 매우 유연했다. 아즈텍의 계급은 태어날 때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넘나들거나, 죄를 지어 강등당할 수도 있었다.

이 벽을 가장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18]. 사회 지도층이자 귀족인 피필틴의 경우에는 전공을 세우거나, 포로를 잡아오는 수에 따라 더 많은 봉토를 선사받았다(이는 아래에 설명된 꽃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평민 계급인 마세우알틴도 피필틴들의 무공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여주면 피필틴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며, 그의 자녀도 피필틴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노예 신분인 틀라코틴의 경우, 죗값이나 채무를 모두 청산하거나 전투에 나가서 공을 세우면 자유민이 되었는데, 이를 재규어 전사독수리 전사라 불렀다. 오늘날로 따지면 장교에 해당하는 자유민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재규어 전사와 독수리 전사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재규어 전사는 전술한 대로 평민이 4~8명 정도의 포로를 잡으면 노예병도 공적을 세워 평민으로 해방되면 될 수 있는 위치였지만 독수리 전사는 귀족 계급이거나 귀족으로 신분상승할 수준의 공적을 세워야만 될 수 있었다. 현재로 비유하자면 위관과 영관 수준의 계급 차이가 존재한다.

아즈텍 사회의 법률은 굉장히 엄격했고, 계급 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진행되었다. 피필틴의 경우,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처벌을 통해서 마세우알틴으로 강등될 수 있었으며, 심각한 범죄의 경우에는 틀라코틴으로 더 강등시키거나 아예 제물로 써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계급 간 이동은 다른 메소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다른 아즈텍 사회의 경쟁력 중 하나였으나, 사실상의[19] 마지막 황제였던 몬테수마 2세가 제위에 관련된 문제로 큰 곤혹을 치른 이후 계급간 이동이 상당히 경직되었으며, 특히 재규어 전사를 폐지하면서 국방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다만 몬테수마 2세가 재규어 전사 제도를 폐지한 이유는 당시 재규어 전사들이 특권계층화 되어 중세 아랍의 맘루크나 18~19세기의 예니체리처럼 정치에 멋대로 개입하는 등 폐단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규어 전사의 대체제가 나오기도 전에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침략해버렸다는 것이다.

8.5. 역대 황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틀라토아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고립된 제국[편집]


총, 균, 쇠》에 따르면 잉카 제국과는 단순히 교류가 없는 정도를 넘어 서로의 존재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유라시아에서는 이미 2,000년 전에 8,000km나 떨어져 있는 로마 제국한나라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교류도 있었던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두 중남미 제국은 둘 다 해운업이 발달한 문명이 아니었고, 그 사이는 빽빽한 밀림인 다리엔 갭과 높은 안데스 산맥으로 막혀 있었다.[20]

다만, 《총, 균, 쇠》에서는 이로 인해 잉카 제국의 수레를 끌 수 있는 중남미 유일의 짐승인 라마와 아즈텍 제국의 육상 수송의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는 도구인 바퀴가 만나지 못했다는 점을 아쉬움을 담아서 서술하고 있다. 운송수단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 역량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힘 좋은 가축과 바퀴 달린 도구, 그 둘의 조합은 당연히 패권 국가의 기반이 되는 중장거리 운송수단이다. 만약 그 두 요소가 조합될 수 있었더라면 메소아메리카의 역사는 정말 크게 변했을 것이다.

10. 스페인에게 정복된 이유[편집]


왜 이 거대한 제국이 그리도 쉽게 멸망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콩키스타도르의 강철검, , 로 대표되는 무력의 기술차와 주변 부족들의 적의(敵意), 전염병의 유행 정도로 요약된다.

10.1. 전염병?[편집]



당시 총은 강력하지만 효율적인 무기는 될 수 없었고, 숫자에서도 스페인 측이 훨씬 열세였다. 의외로 총은 등장 당시 임팩트는 컸지만, 워낙 원시적인 수준이라 전장을 지배하는 게임 체인저 같은 무기는 못 되었다. 가령 총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인 스트렐치가 있었는데도 창기병인 윙드 후사르가 주축이 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발린 루스 차르국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아즈텍의 패배 원인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지만, 스페인의 정복은 '전염병 등이 문제가 될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한 전염병은 정복 과정에서가 아니라 정복 이후 원주민들의 저항 역량을 약화한 요인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을 케찰코아틀로 인정해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케찰코아틀을 자처하기 전에는 그들을 케찰코아틀로 부르지 않았고, 그 뒤에도 콩키스타도르들의 탐욕스러움 때문에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곧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아즈텍은 이미 스페인령 쿠바 총독과의 짧은 만남을 한 차례 경험해 본 적 있었으며, 이후 스페인인들의 공격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10.2. 전투 능력의 격차[편집]


아즈텍이 패배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전투 능력에서의 차이였다. 당시 아즈텍은 청동기시대와 석기시대의 과도기였다, 금속을 통해서 무기를 만드는 것은 실험적으로 행해졌을 뿐이지 가장 많이 대중적으로 쓰이던 무기들은 대체로 흑요석같은 석기 무기들이었다. 콩키스타도르들은 수백년에 걸친 레콩키스타 시기를 거친 베테랑들이 대다수였고, 아즈텍이 콩키스타도르와 원주민 연합군들과의 전쟁에서 밀린 것이 단순 꽃 전쟁같은 작은 전쟁에만 특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이었다. 당시 아즈텍은 푸레페차, 즉 타라스칸과의 전쟁 중 대패를 경험한 이후, 영토 확장을 사실상 단념하게 되면서 비슷한 체급인 국가와의 전쟁이 근 50여년간 부재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꽃 전쟁만 벌이면서 아즈텍이 전면전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다. 당시 대규모 전면전이 일어날 일도 없었고, 일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콩키스타도르들의 상륙은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에 비해서 콩키스타도르들은 전술되어있듯, 근 800년 동안 이어진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전쟁에서 다져진 베테랑들이 대다수였고, 무관으로서의 귀족에 충실한 이들이 많았다. 대를 이어서 벌어진 싸움에서 계속 쌓인 노하우들은 후술할 금속 및 화약무기들과 함께 아즈텍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만약 이러한 노하우가 없었다면 슬픔의 밤같은 사건들이 계속 벌어진 끝에 에스파냐 군대는 동맹 원주민 세력들마저도 모두 잃고 흩어져 결국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에 대를 이어서 전쟁 기술들을 가르친 귀족 세력들은 아즈텍과의 전쟁에서 명백한 우위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콩키스타도르들의 승리 비결이 단순 철로 된 무장이라고 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이긴하다. 이러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스페인은 아즈텍을 밀어붙였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들은 단지 유럽에서 가져온 무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재료를 모아 화약과 포탄을 제조[21]했고, 호수에 띄울 조립식 전함 역시 우호적인 현지 원주민들의 협력하에 직접 건조한 것이었다. 틀락스칼라에서는 원주민들로부터 구리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화살촉을 제작하기도 했다.[22]

게다가 아즈텍에는 금속제 무기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마카후이틀로, 나무 몽둥이에 날카로운 흑요석 날을 여러 개 박아넣은 무기였다. 이 무기는 금속제 갑옷이 아닌 일반적인 직물이나 가죽, 그리고 맨살에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으나[23], 스페인인들의 갑옷에는 의미가 없었고, 이는 다른 흑요석 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금속 무기도 없는데 금속제 갑옷은 당연히 있을리가 없었다.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갑옷은 솜을 넣은 두꺼운 누비 갑옷들이 주류였다.[24] 이러한 갑옷은 금속 검과 창, 화살에 당연히 퍽퍽 뚫린다.

여기에 더해서 스페인인들은 금속제 도검과 쇠뇌는 물론이고 심지어 화약을 사용하는 이나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니 아예 화력면에서 아예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았다.[25]

물론, 이러한 점을 뒤엎을만한 단점이 스페인인들에게도 있었는데 바로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당장에 테노치티틀란에 올 때 당시 코르테스가 이끄는 이들은 카리브 원주민까지 합쳐도 1,000명이 안 되었고, 그나마 코르테스가 자신을 토벌하러 온 토벌군을 매수하고서야 2,000명 정도 되었는데 이들이 슬픔의 밤 전투로 사실상 전멸했다. 당장에 슬픔의 밤에서 아즈텍인들은 앞에 있던 아군이 죽건말건 달려들어 코르테스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정도였기에 아무리 아즈텍이 화력이 딸린다고 해도 압도적인 규모 앞에서는 아즈텍의 희생자가 갑절 이상으로 나도 결국은 스페인군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한 명 죽이면 한 명이 뒤에서 나타나고 그 한 명을 죽이면 또 뒤에서 나타나면서 점점 적군이 나에게 다가오는 상황인데 기관총이 없는 이 시대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26] 수적으로 어느 정도 동일하다면야 같은 숫자에 경험과 화력빨까지 살리겠는데 숫자가 적으니, 아군이 얼마나 죽건말건 미친듯이 달려드는 미친 전술를 가지고 적군이 공격해오면 답이 없는 것이다.

허나 스페인인들은 운 좋게도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게 되는데 아즈텍의 패권에 반발하던 지역 부족들의 협력이었다. 당장에 슬픔의 밤 이전에도 코르테스의 병력은 스페인인+카리브 원주민까지 합쳐 2,000명 남짓 되었지만 그와 동맹한 현지 원주민은 8,000명이나 되었다. 물론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군이 40,000명이나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격차지만, 심지어 슬픔의 밤 이후로는 스페인인+동맹한 원주민 숫자가 2,00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어도 그 중에 400명만 스페인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주민 숫자가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외에 아즈텍인들은 아즈텍식 전투 관습을 버리지 못했다. 오툼바 전투에서 20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패배한 이유가 피정복민들을 인신공양을 위한 제물로 잡는 '꽃 전쟁' 방식을 정복자와 그 동맹을 상대로 행했기 때문이었다.


10.3. 주변 부족과의 갈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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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아즈텍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와 함께 행군하는 멕시코 원주민 부족 병사들

사실 위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메소아메리카 사회는 험난한 지형들로 인한 소통과 교류의 부재로 굉장히 분열되어 있었고, 도시국가들과 부족들마다 기술과 사회의 발달 수준이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즈텍 종교는 틀락스칼텍이나 타라스칸 등을 제외하면 마땅한 경쟁 상대가 부재했고, 아즈텍 하위 부족들 역시 흔히 불리는 삼국동맹에 해당하는 도시국가들을 제외한다면 뚜렷하게 발전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10,000명 단위의 대규모로 성장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기 때문에 선민사상이 상당히 두드러졌다. 아즈텍의 하위 부족 국가들을 말할 때 흔히 말하는 인간 가축이란 것 역시 어느 정도 과장이기는 하나 당시 아즈텍, 정확히는 테노치티틀란이 가진 선민사상을 명백히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관념에 의거하여 오랫동안 테노치티틀란은 하위 부족들을 험하게 다뤄왔으며, 이러한 선민사상과 그에 기반한 통치로 인해 오랫동안 반아즈텍 감정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에스파냐 군대가 틀락스칼라군과 연합하여 메소아메리카를 가로질러 진격하기 시작하자 그다지 수가 많지 않았던 에스파냐 군대는 현지 원주민들을 통해, 막 도착한 시기에 비해 수십 배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군대가 맞부딪히는 상황에서 염두에 두어야할 점이 있는데, 아즈텍은 대규모 전쟁을 벌일 능력은 있었으나 그러한 대규모 군대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뤄야할 지에 대한 전략•전술의 노하우가 없었던 반면, 에스파냐 군대는 근 800년을 이어온 레콩키스타의 대규모 전투들에서 전략•전술의 노하우를 배워서 왔다. 능력만 있는 쪽과 능력을 갖추고 이를 활용할 전략과 전술을 갖춘 쪽이 싸운다면 결국 능력만 있는 쪽이 패배하는 것은 당연했고, 결국 그리 되었다.

중남미 토착 문명의 복속과 멸망의 초석을 놓으며 큰 흐름을 주도한 건 콩키스타도르들과 그 뒤에 있는 스페인이었지만, 전근대적 기술력의 한계로 인하여 스페인 정복 이후에도 1500년대~1600년대를 통틀어 독자적인 원주민 세력의 자체적인 영향력은 상당히 유지되었고, 자연스럽게 무늬만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인 식민지 내에서 원주민 세력들이 따로 따로 서로 항쟁하며 경쟁하는 구도가 오래 지속되었다.

인근 원주민들의 도시국가들과 부족들 중에는 아즈텍에게 너무나 핍박받고 살아와서 아즈텍이라면 치를 떨며 원수로 여겼던 곳도 있었고, 아즈텍과 스페인 사이에서 아무런 의견 표명도 없이 잠잠히 있다가 전세가 스페인 쪽으로 기울자 아즈텍을 손절하고 그대로 스페인에 붙어버린 경우도 꽤 되었다. 아즈텍의 지배하에서 도리어 농민들의 삶의 질이 좋아졌단 말도 있었던만큼 아즈텍 근방 원주 부족 국가들의 참가는 흔히 알려진 수준으로 '모두가 아즈텍 원정에 참가했다'거나, '엄청나게 많았다'라고 보기는 어렵다.[27] 그렇지만 아즈텍 정벌에 참가한 원주민들 역시 꽤 되었고,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아즈텍 정벌에 나서자 자발적으로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꽤 큰 규모의 병력까지 제공하여 스페인군과 함께 싸웠다. 아무리 화력에 무기/갑주가 좋아도 보급 등의 문제로 인해 스페인인들만으로는 무리 또는 굉장히 힘들었을 전쟁이 아즈텍 제국 내부의 피지배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덕택에 유리해질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과 스페인의 경쟁 라이벌이었던 포르투갈이 식민지배했던 다른 아메리카 지역들의 경우를 보면…

  • 마야 문명이 위치한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벨리즈중앙아메리카 북부 일대의 경우, 각각의 도시국가 및 여러 군소 부족 하나하나와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100년이 넘도록 스페인군의 정복 활동이 이루어져서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에 가서야 스페인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 스페인의 식민 진출 이전 아즈텍의 영향권에 속해있지 않았던 캘리포니아 반도, 치와와, 두랑고, 코아우일라 등 멕시코 북부 지역캘리포니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텍사스 주미국 서남부 지역들의 경우에도 마야 문명권이었던 멕시코 남부 지역,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벨리즈 같은 중미 북부 지역들과 비슷하게 콩키스타도르들이 멕시코 북부 지역과 미국 서남부 일대에 분포하던 나바호족, 푸에블로족, 치리카와족, 추마시족, 후파족, 포모족 등 현지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각각 정벌하는 데 많은 시간들을 쏟아야 했기에,[28] 17세기 중후반기에 와서야 스페인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토가 방대하고 척박한 사막지대가 많아 스페인에게 정복되지 않은 원주민 부족들의 상당수가 잔존해있었으며, 이후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고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으로 영토를 팽창하던 미국과, 스페인에서 독립한 옛 식민지령 국가였던 멕시코에 의해 모두 완전히 정복되었다.

  • 잉카 제국의 영역권에 속해 있었던 페루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의 경우, 이전 멕시코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침공 이전 잉카 제국과 카나리족, 차차포야족, 챵카족 등 피지배 원주민 부족 간의 내분과 갈등이 증폭되면서 이들 모두 남미 대륙으로 들어오던 스페인인들과 손을 잡아 잉카 제국을 공격했고,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의 함락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잉카 멸망 이후에도 망코 잉카 유판키와 투팍 아마루와 같은 잔존 잉카 세력들이 40년 가까이 빌카밤바에서 항전하다가 1572년에 스페인에게 완전히 정복, 평정되었다.

  • 파라과이과라니족의 경우, 스페인군을 상대로 한 게릴라 방식의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져 스페인 식민 당국이 유화책으로 겨우 달랬다.

  • 승마술이나 화약 무기 등 유럽식 전쟁 방식에 빠르게 적응하여 습득하고[29] 종족들 간의 결집력도 있어서 본격적으로 스페인군에게 반격까지 가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역에 분포하던 마푸체족과 카웨스카르족, 테우엘체족[30] 같은 남미 원주민 부족들의 경우,[31] 결국 스페인 식민제국 시절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평정을 못하여 북부 지역은 스페인이 지배하고, 남부 지역은 원주민들이 지배하는 불완전한 상태였다가, 식민지였던 칠레아르헨티나가 독립한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양국 정부가 추진한 남부 개척 정책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었다.

  •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유일한 포르투갈 식민지이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영토 면적이 가장 방대했던 브라질의 경우, 포르투갈이 그 방대한 면적의 브라질 영토를 전부 다 식민지배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식민지 개척 초기에 해안 지역에만 포르투갈의 통제력이 미쳤고, 포르투갈의 통제력이 닿지 않았던 서부 내륙 아마조니아 밀림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 다수는 반독립 상태를 유지했다가 이후 포르투갈 식민지시대 중후반기에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 서부로 대거 진출하여 본격적인 서부 개척이 이뤄지고,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완전히 브라질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심지어 아마조니아 지역은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정글 지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오늘날에도 브라질 정부의 행정력이 닿지 못하는 곳이 많으며, 그래서 21세기에나 그 존재가 알려진 미접촉 부족이 꽤 있는 편이다.

  • 베네수엘라의 경우, 카라카스족의 카시쿠 과이카푸로 추장이 베네수엘라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연합하여 밀림과 습지대가 많은 베네수엘라의 지형을 활용해 스페인군에게 항거하는 등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이 끈질기게 이어졌고, 결국 1552년에 와서야 완전히 스페인에게 정벌되었다.

  • 우루과이의 경우, 스페인이 노리던 , , 구리 등 지하 자원들이 여타 라틴아메리카 지역들보다 빈약한 데다가 식민지 개척 초기 축산업이나 어업을 빼고는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산업이 별로 없어[32] 페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칠레 같은 다른 스페인령 남미 지역들에 비해 사실상 쓸모 없는 땅에 가까웠고, 내륙 오지에서는 차루아족 같은 현지 원주민들이 극렬하게 저항했으나, 이후 스페인이 막대한 병력수를 동원한 정복 전쟁을 밀어붙여 차루아족 등 현지 남미 원주민들이 차지하던 내륙지대까지 모조리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일부 잔존 부족 세력들이 스페인 식민지 시기 후반까지도 살아남아 있었는데 우루과이가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 와서야 우루과이 정부에 의해 모두 정벌되었다.

  • 아즈텍, 마야 문명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멕시코 중남부 지역에서 번성하던 다른 원주민 문명인 타라스칸(푸레페차)은 1521년 스페인의 공격으로 아즈텍이 멸망한지 9년뒤인 1530년에 스페인군에게 정복되었다.

  • 코스타리카, 파나마, 니카라과중앙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국가들의 경우, 자그마한 국토 면적에 비해 습하고 험한 늪지대와 밀림들이 워낙 많아 18세기까지 스페인의 직접적 통제가 먹히지 않는 내륙 지역들이 군데 군데 존재하고 있었다.

  • 남극해와 가까운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섬에 살았던 야간족과 오나족 같은 원주민들의 경우, 한랭하고 거친 기후에 스페인조차도 쉬이 침략하지 못해 마푸체족과 테우엘체족 등 아르헨티나와 칠레 남부 본토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까지 사실상 반독립 지역으로 남아있었지만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1860년대와 1870년대를 전후하면서 남아메리카 남부 본토 지역을 완전히 정벌한 후, 티에라델푸에고 섬으로 진출해 칠레령과 아르헨티나령으로 분할•합병했다. 이후 칠레군과 아르헨티나군, 백인 이주민들에 의해 원주민들은 모조리 학살되거나 토벌되었다#.

다른 지역 원주민들은 다 오랫동안 잘 버티거나 훗날 정복되었어도 그럭저럭 버텼지만, 아즈텍만은 이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군대와 연합한 원주민 부족의 공격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33]

특히 제물 대상자들의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지지가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제물이 되는 것을 막아줄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물이 될 뻔했을 때 스페인인들이 구해준 적도 있었다. 특히 그 대표격인 틀락스칼텍인들은 슬픔의 밤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탈탈 털려서 도주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코르테스를 도운 보답으로 영토 보존, 자치권, 세금 면제, 아즈텍 영토 할양 등의 혜택을 약속받았고, 이 약속은 스페인이 물러날 때까지 지켜졌다.

추가로 코르테스는 끝까지 자신을 도운 틀락스칼텍인들에게 스페인에서 가져온 돼지 수십 마리를 선물로 주고 잠시 스페인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돼지가 30,000마리에 달할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물량과 동원 전력의 측면으로 보면 사실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은 틀락스칼텍을 주축으로 한 다양한 반아즈텍 동맹군의 업적에 가까웠고, 이 중에서 스페인 세력은 분명히 주도적인 지도 세력이긴 했지만, 머릿수로는 훨씬 더 많은 반아즈텍 토착 협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인구가 1,000만 명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자체도 스페인인들은 2,000명도 안 되는 규모였지만 텍스코코, 틀락스칼텍, 오토미 등의 원주민 동맹군이 주력이라서 이들을 합한 100,000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50,000명 정도 규모의 아즈텍 방어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특히 그동안 인구는 훨씬 많았지만 구심점이 없어서 맨날 아즈텍에게 당하고만 살았던 틀락스칼텍스페인콩키스타도르라는 제대로 된 구심점이 생겨버리자 아주 거칠 것 없이 아즈텍을 압살해버렸다.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250,000명이 살던 당대의 초거대 도시로, 호수 속에 있었던 자연요새였다.[34] 게다가 테노치티틀란의 250,000명의 시민들은 유사시 전부 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이 주변 원주민 도시들과 군사 협력을 하고 조립식 전함을 동원해 호수를 장악해서 한 번에 도시에 갇히게 되자, 호수는 오히려 아즈텍인들을 봉쇄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텍스코코 호수는 석회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래는 마실 수가 없었는데,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이 물을 마시게 된 아즈텍인들은 병이 들어 더욱 위기에 몰렸다. 철저히 고립된 상황과 석회 성분이 많은 호수는 전염병의 대유행도 불러왔다.

결국 1521년, 스페인인들과 원주민 동맹군의 총공격에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그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해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원주민 동맹군은 아즈텍에 대한 원한이 단단히 쌓여 있었던지라 스페인인들보다 더 잔혹하게 아즈텍인들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아즈텍인들이 학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한 사람들은 코르테스의 비호 아래 용서받았고,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만 학살되었다.[35]

항복한 아즈텍인 중에서 귀족이자 아즈텍 군사령관이었던 틀라쿳신은 마지막까지 아즈텍의 저항을 이끌며 코르테스에 맞섰으나 아즈텍이 멸망하고 나선 이후에는 친스페인 인사가 되어 멕시코 시티를 재건하는 직책까지 맡았고, 이를 잘 수행해내어 스페인 총독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상당한 수의 하인과 땅, 고급 주택을 보유한 고위 인사가 되었다.[36] 몬테수마 2세의 황녀인 아즈텍의 공주 테쿠이츠폿신은 틀라토아니의 적통인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코르테스의 적극적인 보호로 아즈텍 황족을 말살하려 했던 원주민 동맹군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고, 코르테스의 배려로 스페인인 장교 알론소 데 그라도의 아내가 되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현존하는 몬테수마 2세의 후손들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며 이 가문은 1935년 멕시코 정부에서 지급을 중단할 때까지 연금을 수령받았다. 남계로 내려온 적통도 있었지만 그쪽은 1836년에 마지막 후손이 뉴올리언스에서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대가 끊기게 되었다.

잔존한 아즈텍인들은 테노치티틀란 재건과 지방 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었는데,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틀락스칼라의 군대와 구 아즈텍 제국군이 한 깃발 아래 싸우는 웃지 못할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촌극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어서, 멕시코 제1제국 건국 이래로 테노치티틀란의 후신인 멕시코 시티와 틀락스칼텍의 후신인 틀락스칼라 주는 현재까지도 같은 멕시코 땅이다. 물론 역사가 역사인지라 두 지역 주민들은 서로를 각각 매국노의 후손과 식인종의 후손으로 욕하는 등 현재까지도 사이가 매우 나쁘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교황청에 투서를 넣어 자신과 원주민 현지처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에게 적자 지위를 부여해 재산을 상속하게 하거나,[37] 친분이 있었던 원주민과의 혼혈들에게 이런저런 조치를 취했다. 그 때문에 에르난 코르테스는 현대 멕시코 메스티소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11. 평가[편집]


20세기까지는 서양 열강 세력에게 짓밟힌 비운의 토착 민족들이라는 동정적인 여론이 많았고, 당시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인신공양을 과장해 악마화했다는 주장이 정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르테스의 증언을 뒷받침할 확실한 증거가 없어 코르테스 생전에도 그의 말을 허풍이라 비웃는 여론이 많았으며 또 아메리카 일대가 콩키스타도르 같은 침략자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곳이 많았기 때문에 서양 열강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는 반응이 많았었다. 멕시코 민족주의자들도 이런 주장을 내세워 자신들이 아즈텍의 후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 대규모 인신공양과 식인의 증거들이 대규모로 발굴된 이후,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코르테스의 과장으로 치부하기에는 아즈텍의 인신공양의 흔적은 다른 중남미의 마야, 잉카 문명과 비교해도 규모나 잔혹성이 강하다는 것이 정설이긴 했다. 그러다가 2015년에 130,000명의 머리를 전시했다고 기록한 우에이 촘판틀리 유적이 실제로 발견되면서, 코르테스의 기록이 정말로 상당히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아즈텍의 학살 규모는 이미 코르테스 생전 때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논란이었고, 코르테스가 촘판틀리 같은 인신공양의 기념물들을 파괴하려고 노력했기에[38] 남은 증거도 부족해 수백 년간 과장된 기록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안드레스 데 타피아(Andrés de Tapia)가 기록했던 우에이 촘판틀리(Huey Tzompantli)가 2015년에 실제로 발견되고, 안드레스의 기록과 그 규모가 매우 흡사하면서 코르테스 원정대의 기록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기록임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발견된 유골들이 야외에서 부식되어서 주기적으로 교체된 사실도 확인되었고, 우에이 촘판틀리에 버금가는 촘판틀리가 코르테스 쪽 기록에 의하면 5개는 더 있었다. 거기에 촘판틀리에 없는 다른 희생자들의 수까지 감안해 보면, 아즈텍이 1년에 최소 수천 명씩은 학살해 인신공양으로 바쳤고, 심할 때는 몇만 명씩 학살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유물로 확인되었다. 동 시기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이토록 방대한 인신공양 및 식인을 자행했던 문명은 상나라, 페니키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사실 인신공양 문화 자체는 인류 역사적으로 꾸준히 실행되어 오긴 했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문명에서 행해지는 종교 의식은 크게 인신공양에서 동물공양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기도 및 제사로 변화했다. 그런데 인신공양이 다른 단계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대형 초식 동물 가축, 즉 , 돼지 같은 생물들이 필요했고, 그런 환경 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인구 등의 다른 조건 또한 같이 갖춰져야 했기 때문에 인신공양이 완전히 퇴화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사례가 아즈텍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로쿼이, 잉카, 마야, 타라스칸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들이 상당한 인신공양과 식인(잉카 제외)를 자행했다.

한국 역시 2010년대까지는 식민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아즈텍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다. 예를 들어 2006년에 개봉한 <아포칼립토>를 평가하면서[39] 백인우월주의적 왜곡이라며 비판하는 칼럼이 많이 나오기도 했었다. (<아포칼립토>의 관점에 문제가 많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상술한 촘판틀리 유적 발견 이후로는 인식이 극변하여, 2020년대 초에 와서는 '판타지 소설 뺨치는 악의 제국', '멸망당할 만했던 국가' 등으로 조롱당하고 있다. 그나마 한국 트위터 내의 아즈텍 역덕후들이 '아즈텍의 식인 문화가 인터넷 밈이 되면서 과장되고 있다'라는 우호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나 영향력은 작다.

아즈텍을 옹호하는 일각에서는 이러한 태도 급변화는 어디까지나 대중이나 역덕후, 인터넷 밈 수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각종 역사에 대한 밈이 다 그렇듯, 인터넷의 여론은 흥미 본위로 과장되거나 편향된 점이 많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식인을 한 것은 마오리족도 똑같지만 마오리족은 전투민족이라면서 찬양을 하는 것처럼, 여론이 일관된 논리를 갖췄다기보다는 유행에 따라 간다는 주장이다.

다만 마오리족의 식인과 아즈텍의 식인은 좀 다르다는 점에서 곧바로 반박 가능하다. 일단 마오리족은 적어도 전투에서 패배한 자들 위주로 잡아먹었고 이마저도 나중에는 서로 싸우고 잡아먹기만 하다간 공멸할 것이라고 여겼는지 하카라는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내 희생자를 줄였다. 반면 아즈텍은 여러 도시와 부족들을 지배하에 두면서 지배하에 있어 저항도 못하는 이들을 상대로 식인을 단순한 종교적 시스템으로서가 아니라 통치수단으로 했기에 더 비판받는다. 나름대로 자성의 노력을 했던 마오리족과 달리 아즈텍은 오히려 스페인의 침공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갈수록 더더욱 잔혹해져갔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아즈텍의 이미지가 악화된건 단순히 유행이 아니라 명백한 실존 유물이 발견된 것이 크고 그간 아즈텍에 대한 동정여론도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던 인신공양의 규모나 잔혹도가 인간 상식선을 벗어나서 사람들이 과장이 심하게 들어간 허구라고 믿었던 이유가 강했기 때문이고 오히려 이런 인간상식 밖에 인신공양이 드러나서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좀 더 아즈텍에 대한 비판이 강해진 측면도 없지 않다.

피지배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잔혹한 지배자가 덜 잔혹한 다른 지배자로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아즈텍의 압박을 받던 틀락스칼텍 같은 상당수 도시국가들의 입장에서 코르테스가 구원자로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침략의 선봉대를 지휘했고, 이로 인해 멕시코 지방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미국-스페인 전쟁 이전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40] 사실상 스페인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스페인의 통치 역시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준으로 가혹했다. 더군다나 스페인은 테노치티틀란을 무너트린 후, 그 지역을 멕시코시티란 이름으로 바꿔서 메소아메리카 지방의 통치 중심으로 사용했으며 테노치티틀란의 권위는 아즈텍 성립 이래부터 현재까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야돌리드 논쟁에서도 보듯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원주민 부족들에게 잔혹한 통치를 수행했다.

메소아메리카라는 장소는 오랫동안 고립된 채 15세기까지도 원시적인 사회의 모습을 유지했다. 즉, 그들이 갖고 있었던 종교 세계에서 포로들은 제물로 바칠 옥수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도덕적으로 전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멸망되지 않기 위해선 적극적으로 포로들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때문에 본격적인 인신공양 이외에도, 일정 나이 이상의 남성들은 전투에서 적을 죽이고 그 피를 바르는 것으로 성인식을 치르기도 했다.[41]

다시 말해, 메소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인신공양과 식인은 관습에 따른 의식이었으며, 규모 면에서 인근 메소아메리카 문명, 그리고 유라시아 전체의 과거와 비교해서도 대규모에 속했다. 유라시아에선 관습에 따른 인신공양과 식인이 일찍이 쇠퇴했고, 기독교와 이슬람을 비롯한 새로운 종교에 의해 완전히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아즈텍은 아메리카 지방 특유의 환경과 늦은 발전, 그리고 인신공양을 대체할 새로운 관습의 부재로 인해 자발적으로 인신공양 제사를 사라지게 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원시 사회라도 대체로는 비윤리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을 터부시하고, 보편적인 윤리와 효율성에 맞는 방식을 찾기 마련이다. 아즈텍 내에서 인신공양이 쇠퇴하지 못한 것은, 아즈텍 문명이 구습에 대해 자성하지 못한 부분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주변 국가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원망을 샀다. 스페인인들이 아즈텍 제국에 당도하자 수많은 부족들이 스페인 측에 가담할 정도로 끔찍한 통치를 저질렀던 것은 분명한 외교적 실책이었다.


11.1. 야만적인 고대 제국?[편집]


상술했듯이 특유의 인신공양의 악명과 대항해시대 이전까지 고립된 이미지 때문에 인터넷에서 아즈텍을 아시리아, 상나라처럼 잔인한 고대 국가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아즈텍 제국은 중세에 속하는 15세기에 존재했던 국가였으며, 실책과 별개로 아즈텍은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발전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 남녀 무상 의무교육[42]
  • 노블레스 오블리주[43]
  • 자유로운 신분상승[44]
  • 장애인 우대
  • 계획적인 전술과 군사훈련[45]
  • 천민 계급의 자유[46]
  • 절제와 단식수행[47]
  • 현대 멕시코 요리까지 계승되는 다채로운 요리
  • 고도로 발달한 무역과 조공 시스템
  • 천문학과 역법의 발달
  • 뛰어난 예술 활동
  • 당대 최대 규모의 시장
  • 발달한 야금술과 금속 주조술[48]
  • 호수 위 신도시(테노치티틀란) 건설

등이 있다.

이는 당시 중남미 특유의 폐쇄적인 지형을 감안하면 어지간한 유럽, 아시아 국가들보다 크게 발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특히 장애인 우대의 경우 고대부터 장애인 대우가 시궁창이었던 유럽에 비해서 나은 편으로 고대 스파르타는 장애인이 태어나면 버렸고 로마는 장애인을 활쏘기 과녁으로 썼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 평가받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장애인은 사회에서 퇴출되어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중세 동로마 제국도 후천적 장애인조차도 장애 정도에 따라 권리를 제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즈텍이 연구된지 수백 년이나 지나면서 이런 발달한 문명을 갖추고 먹고 사는데도 큰 지장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계속 문화나 전통이라는 이유로 당대 기준으로 잔혹한 인싱공약 문화를 고수했기 때문에 인식 개선에 차질을 빚고 있다.[49]


12. 여담[편집]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이 대부분 그렇듯이 15세기에 최전성기를 누리던 아즈텍을 원시 문명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아즈텍이 건국된 1248년은 고려시대 중반 고종의 집권기였고, 아즈텍이 멸망한 1521년은 조선시대 중반 중종의 집권기였다. 아즈텍 제국이 맹위를 떨친 시기의 반은 한국사의 '근세'로 지칭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물론, 당시 청동기시대 초기였던 아즈텍 문명이 유럽인도, 중국 등의 유라시아 세계에 비해서 낙후되어 있었지만, 호수 위에 대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어 8 ~ 200,000여 명을 부양한 것이나, 고대 이집트 수준의 천문학 역법을 보유하고 있었던 점을 봤을 때 절대 원시 문명이라 보기 어렵다.

열대우림에서 발생한 문명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인근 유카탄 반도에 있었던 마야 문명의 이미지와 섞인 것으로, 아즈텍이 존재하는 멕시코 중앙 고원은 고지대 상춘 기후라서 열대우림은 커녕 도리어 건조한 편이어서 초원 사이 사이에 선인장이 많이 자라는 편이었다. 아즈텍 건국 신화에서도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서서 뱀을 먹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50]

세계 유일본인 아즈텍 시대 가죽 지도(11세기 제작)를 국내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내 혜정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맨눈으로 보면 그냥 가죽 덩어리 같지만 첨단 도구로 확대하면 보인다고 한다.

아즈텍 시대의 유물 중에는 인간의 두개골처럼 생긴 커다란 호루라기가 있는데, 이를 불면 마치 정말로 인간의 절규 같은 소리가 나와서 일명 '죽음의 호루라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호루라기의 구조가 실제 인간의 성대, 목 구조와 흡사하다는 사실이 매우 섬뜩하다, 이러한 데스휘슬은 전쟁 중 적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함이었고, 사실 메소아메리카 지방에서 널리 쓰인 호루라기이기도 하니 아즈텍 고유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실 전쟁에서 적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 쓰인 물건이니만큼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제작된 게 당연하다. 링크

아즈텍 왕조의 계승권은 그 왕조의 마지막 황녀가 스페인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손들에게 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왕조를 부흥시키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공작의 대우를 받으며 지금도 가계가 이어지고 있어서, 언제고 이들을 다시 불러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인신공양, 식인 등의 풍습이 있었던 지역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에 대한 대우는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22년 5월부터 8월까지 아즈텍 특별전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이라는 국제교류 전시회를 대규모로 열었는데, 박물관 측에서 설명한 전시회의 취지는 아즈텍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으나 정작 보러 간 사람들은 인신공양 행위 자체에 기겁하고 있어 인터넷상에서 회자되었다.[51] 전시에선 인신공양 자체를 부정하진 않지만, 아즈텍의 인신공양이 인육을 먹기 위함이나 쾌락이 목적이 아니라는 변호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전반적인 전시 퀄리티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유머] 국립중앙박물관 아즈텍전 후기

멕시코의 조칼로 광장에서 아즈텍 문명이 스페인군과 그 동맹군에게 함락된 지 500년째 되는 날에 전통의상을 입고 참가하는 행사가 열렸다.행사 사진 기사

13. 창작물에서[편집]


굉장히 발달된 사회상과 반비례하는 금속 기술, 그리고 16세기까지 남아 있었던 잔인한 인신공양 문화라는 특징들로 인해서 메소아메리카 지역이 등장하면 십중팔구 등장한다.

  • <Warhammer>의 리자드맨들의 전체적인 문화와 모티브가 아즈텍과 마야 등 중미 문명에서 따왔다. 특히 적대적인 타 종족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점이 비슷하다. 흑요석 가공술이나 가죽 누비 갑옷 등으로 상당한 전투능력을 보였던 것처럼 이들도 올드 원들의 피조물로 초고대문명에 가까운 기술력을 보여준다.


  • <모탈 컴뱃 X>부터 등장하는 코탈 칸은 지구인이 아닌 외계 아웃월드 출신이긴 하지만, 복장과 쓰는 무기 등을 보면 아즈텍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특히 산 채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뽑아버리는 페이탈리티는 명백한 메소아메리카식 인신공양의 패러디.


  •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중남미를 대표하여 등장하는 개근 문명이다. 문명마다 고유한 성능을 갖게 된 문명 3 이후로는 각 작품마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군사에 이점이 있으며 그에 걸맞게 AI도 대체로 호전적인 축에 속한다. 지도자는 문명 1부터 문명 4까지 줄곧 몬테수마 2세였다가 문명 5부터 몬테수마 1세가 등장한다. 문명 온라인에서도 플레이 가능한 문명으로 채택되었다.
    • <문명 3>: 식량을 추가로 제공해 도시의 성장을 빠르게 하는 농업적 특성과 군사에 이점이 있는 군사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인 전사보다 발이 빠른 것이 특징인 재규어 전사를 고유 유닛으로 받는다.
    • <문명 4>: 군사에 이점이 있는 군사적 특성과 문명의 전체적인 운영을 유연하게 해 주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유 유닛인 재규어는 일반적인 검사보다 전투력이 낮지만 숲이나 정글이 있는 타일에 위치해 있으면 방어력 보너스를 얻어 더 강력해진다. 희생의 제단이라는 고유 건물은 법원을 대체하는데, 노예 노동 시 불만이 감소하여 많은 생산력을 보다 수월하게 얻을 수 있게 해 준다.
    • <문명 5>: 적을 죽이면 문화 점수가 들어온다. 즉, 주변의 만만한 문명 하나 붙들고 계속 전쟁 상태 유지하면서 병력을 잡아먹어 문화를 충당하는 문명이며, 유명한 소치밀코 수상 정원을 모티브로 삼은 수상 정원은 많은 식량을 제공해 주어 인구를 빠르게 늘릴 수 있게 해 주며 본작에서 인구는 곧 과학으로 연결되므로 각종 기술을 보다 빠르게 연구할 수 있다. 고유 유닛인 재규어도 숲과 정글에서 전투력과 행동력 보너스를 받으며 적 유닛을 제거할 때 체력을 소량 회복하는 등 유용한 진급들로 무장하고 있다.
    • <문명 6>: 고유 유닛인 독수리 전사가 처치한 적 유닛이 일정 확률로 건설자가 되고, 문명의 특성으로 건설자를 소모하여 건설 속도를 가속시킬 수 있다. 따라서 독수리 전사로 적을 포로로 잡고, 그 포로는 도시 생산에 갈아넣는 식으로 운영하게 된다. 몬테주마의 지도자 특성 덕분에 사치품에서 더 많은 쾌적도를 얻으며 사치품을 다양하게 확보할수록 유닛들의 전투력이 증가하므로, 전쟁을 보다 수월하게 치를 수도 있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의 DLC 선셋 인베이전에서는 유럽을 침략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콜럼버스 이전에 바이킹들이 아메리카를 먼저 발견했는데, 이때 바이킹의 항해 기술이 아즈텍인들에게 노획되었다는 설정이다.[52] 이후 아즈텍인들은 발달된 항해 기술을 바탕으로 수백년에 걸쳐 아메리카의 패권 국가가 되고, 1200년대에 이르러 1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유럽 대륙을 침략한다. 이 설정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후반부가 아주 하드코어한 동유럽, 중동 지역과 달리 서유럽은 후반부 플레이가 루즈해진다는 이유에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나온 것이다. 한편 잉카 제국은 무슨 짓을 한 건지 13세기에 총을 개발해서 아즈텍 제국과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

  • 죠죠의 기묘한 모험》 1부 프롤로그에서 아즈텍 제국의 어느 부족이 돌가면의 힘으로 세계정복을 꿈꾸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언급이 나온다.[53]

  • <미디블2: 토탈 워>에 등장. 오리지널에서는 AI 팩션이며 확장팩 킹덤즈의 아메리카 캠페인에서 쓸 수 있다.
고증대로 철제 무기와 방어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유럽의 중보병 및 기병, 포병에게 골고루 약하다. 그러나 유럽의 병력은 반드시 원정군일 것이기 때문에 수적으로 압도할 수는 있다. 아즈텍의 병력은 부대 단위당 병사 수가 더 많으며, 사기도 높게 잡혀 있어서 병종의 우위를 누리기 힘든 시가전 등에서 유럽 군대와도 거의 대등한 싸움이 가능하다. 야전에서 아즈텍으로 유럽 군대와 야전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에르난 코르테스가 충분히 증명하지 않았던가?[54]

  • <스타바운드>의 조류형 외계 종족 아비안은 아즈텍 제국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NPC 이름도 나와틀어로 되어 있으며, 건축 양식도 비슷하고, 종교 의식으로 인신공양을 하기도 한다.

  • <주토피아> 영화에서 피닉의 밴에 그려진 그림으로 나온다. 코요테로 패러디된 건 덤.#

  • SCP-034는 아즈텍 설화의 흑요석검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 왠지 모르겠지만 <블랙 앤 화이트 2>에선 그리스를 침공한다. 그 외에도 많은 속국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야만한 아즈텍이라며 치를 떨며 혐오한다. 그렇지만 무력적으로 짱 세서 얌전히 닥치고 있었는데, 신이 그리스를 이끌고 와버리자 문화적이든, 군사적이든 아즈텍보다 그리스가 낫다는 판단하에 죄다 배신해버린다.

  • <던전 크롤>의 키쿠바쿠드하의 재단이 영락없는 휴이 촘판틀리다. 사악한 강령술의 악마신 키쿠바쿠드하는 신선한 시체를 바쳐 고통을 선사하고, 강령술로 시체를 기워입어 방어력을 올리는 시고투비의 포옹 역시 메소아메리카 국가들의 인신공양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3.1. 아즈텍 제국 캐릭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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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ˈjéːʃkaːn̥ t͡ɬaʔtoːˈlóːjaːn̥\](예슈칸 틀라톨로얀). 아즈텍 제국 언어인 나와틀어의 발음을 로마자로 옮김.[2] 우이칠로포치틀리, 케찰코아틀 등의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 기존의 메소아메리카 종교와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틀라카엘렐이 중간에 종교개혁을 통해서 신화의 내용을 고쳤기 때문이다.[3] 명목상으로 테노치티틀란의 틀라토아니가 스페인 식민 당국의 허수아비 임금으로 1565년까지 존재했다.[4]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틀라코판[5]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는 100만 명을 넘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 역시 100만을 돌파했음이 확실시된다.[6] 사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이 오늘날의 도시들보다 작았던 이유가 인구를 늘리고 도시 면적을 넓혀도 당시 기술 수준의 한계로 식수, 위생, 식량 등 각종 제반 환경이 열악해 인구를 유지하고 증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인구가 적을수밖에 없었고 1,000 단위 인구를 가진 소도시들이 대부분이며 점조직 형태로 위치해 있었다.[7] 상술했듯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무교육과는 다른, 스파르타와 비슷한 군사 교육이었다.[8] 남자 한정이면 스파르타.[9] 교육열로 사회 진출의 열망이 대단히 강했던 조선도 완벽한 의무교육을 제공할 정도는 아니었다.[10] 토착화되어 나우아틀어로 테오틀(Teōtl, '신')이라고 불렸다. 스페인어하느님은 "El Dios"라 했는데, 거기에서 나우아틀화가 된 것이다.[11] 특히 유럽 문화권 주변[12] 인간의 본성 중 하나가 "오랫동안 이어져온 관념을 버리기 힘들다"인데, 《신약성서》를 통해 가톨릭을 퍼뜨리는 것은 "이들에게는 기존의 오래된 관념을 인정하는 선에서, 한편으로는 파격적인 새로운 관념을 주입하는 것"이기도 했다.[13] 돼지 문서에도 나와있다시피, 한 번 태어나면 열 쌍둥이는 기본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돼지고기를 이용한 각종 요리 및 염장고기가 흔했다.[14] 사실 몬테수마 2세 시절이 아즈텍 제국이 재규어 전사 제도를 폐지해 국방력이 문제가 생겼고 또 복속한 국가들에 대한 과도한 공물 요구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15] 사실 가축 사육설은 인신공양을 옹호하기 위한 가설중 하나이지만, 테노치티틀란이 가축을 기를 정도로 넓은 지역도 아니고 마야가 위치한 유카탄 반도와 직선거리로도 1,000km가 넘기 때문에 마야의 가축이 제대로 전파 되었는지도 불확실하다.[16] 사회적 지위 말고도 "어르신"이라는 뜻을 가졌다. 신들의 이름에 '테쿠틀리'가 붙은 경우가 많다.[17] 조선시대의 노비도 이와 유사하게 노비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다.[18] 사실 근세 이전의 계급제도가 다 이런 식이었다.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과거 제도를 치러서 여기서 합격한 사람들이 양반이나 신사로 불리면서 지배 계층을 형성했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이전의 일본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다이묘들이 칼과 영지를 하사하고 가신으로 부리기도 했으며, 12세기 이전의 유럽기사들은 주로 부유한 평민 계층에서 충당되어 이들 중에서 공적이 큰 사람들에게 귀족 작위가 내려지는 일이 많았다. 유럽, 일본 사회와 아즈텍, 조선, 중국 간의 차이라 하면, 유럽이나 일본은 근세 이후로 이렇게 형성된 신분제가 아예 고정되어 근대까지 이어진 것이고, 아즈텍과 조선, 중국에서는 이런 식의 느슨하고 유연한 신분제도가 멸망때까지 유지되었다는 차이가 있다.[19] 몬테수마 2세의 후임자인 쿠이틀라우아크와 콰우테목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20] 사실 근대 시기에도 안데스 산맥 때문에 아르헨티나칠레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21] 황은 포포카테페틀 화산 분화구에 직접 들어가서 구했고, 초석은 열대지방 흙에 산재해 있던 걸 물에 타 말려서 채취했으며, 포탄은 석재로 만들었다.[22] 당시에는 철제 대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구리주석을 조합한 청동 대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리와 주석들을 모아서 청동 대포를 만들어 쓴 것이다. 당시 아즈텍을 비롯한 메소아메리카는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쯤 되는 과도기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실생활용 도구들을 만들어서 쓰긴 했으나, 화약의 부재 때문에 그것들로 대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23] 코르테스가 탄 말의 목이 마콰우이틀에 의해 단번에 잘려나가 코르테스가 죽을 뻔했다는 기록도 있다. 흑요석의 단면은 매우 날카로워서 현대까지도 수술용 메스로 쓰일 정도다. 그러나 흑요석은 날카롭고 경도가 높은 편이지만, 강도가 낮고 취성이 강해 실제 내구성은 강철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기에 스페인인의 철제 무기와 부딪히면 깨지거나 부서졌고, 스페인인들의 판금 갑옷에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24] 스페인인들도 나중에는 무거운 판금 갑옷 대신에 아즈텍 방식의 갑옷을 종종 입게 된다. 금속제 갑옷보다 가벼워서 활동하기 편한 데다가, 원주민들의 투석구를 막아내는 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25] 코르테스 휘하의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에 도착해서 맨 처음 한 행동이 바로 화산을 찾아다닌 것이었는데, 화산에서는 화약의 재료가 되는 유황초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26] 아즈텍측도 슬픔의 밤 이전에 강화를 요청하는 스페인측에 처음에는, "우리가 니들 1명 죽일 때 우리 전사 25,000명이나 죽는들 결국 이기는건 우리"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수적 우세는 경험이고 화력이고 의미없을 정도로 너무 심했다. 기관총이라도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 시대엔 기관총 같은 건 없었다.[27] 애초에 태생이 도시국가의 복속과 동맹으로 이루어진 제국인 만큼 당연히 아즈텍도 이러한 동맹시의 경우 가혹한 통치를 할 이유가 없었으며 그들 또한 적극적으로 적대할 이유가 적었다. 흔히 말하는 꽃전쟁을 통한 인간가축과 같은 형태는 틀락스칼라와 같은 적대세력이나 문명수준, 인구규모가 낮은 소수부족을 대상으로 한것에 분명하다.[28] 특히 뉴멕시코 주의 경우, 스페인 세력이 점령했다가 원주민들의 반격으로 축출되는 일까지 있었다.[29] 미국인디언 전쟁 당시 미국 중서부/남서부 지역에서 항전했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비슷했다.[30] 후안 페론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바로 이 부족 출신이었다.[31] 반면 아르헨티나와 칠레 중북부 일대에 살았던 차루아족, 아이마라족, 케추아족 같은 다른 남미 원주민 부족들은 커다란 저항없이 스페인군에게 손쉽게 정복되었다.[32] 지금도 우루과이는 남미에서 육우 사육 등 축산업이 잘 나가는 나라이다.[33] 물론 아즈텍은 여러 부족국가들과는 통일되어 있어서 중앙이 무너지면 구조 자체가 무너지기 쉬웠고 그렇다고 잉카만큼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아즈텍이 보유한 영토는 한반도 크기에 불과했다. 반면 잉카는 아즈텍의 10배 가까운 영토를 자랑했다. 심지어 잉카는 남북으로 긴 제국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중앙이 무너지자 그냥 남쪽으로 파천하여 항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 역시도 아즈텍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었다.[34] 테노치티틀란은 스페인에 의해 함락된 후 호수가 메워져 현재의 멕시코 시티가 되었는데, 호수를 메워서 만든 도시라는 특성상 멕시코시티 도시철도를 건설하기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35] 코르테스가 남긴 기록에 보면 "메시카(아즈텍 민족)를 죽여라!"라면서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죽했으면 스페인 장교들과 병사들이 기겁하여 말렸을 정도로 아즈텍인들에 대한 증오는 실로 엄청났다.[36]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목테수마 데 툴텡고 공작이라는 스페인 작위를 계승해오고 있다.[37] 전부는 아니었지만 서장자 마르틴 코르테스를 비롯한 4명은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38] 기독교적 이념에도 맞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도 주변 원주민 세력의 지지를 위해서 원주민 피해자들로 만든 인신공양 기념물을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39] <아포칼립토>에 나오는 문명이 마야 문명이긴 하나, 작중의 인신공양이나 규모는 누가 봐도 아즈텍이다. 대놓고 아즈텍이라고 하자니, 히스패닉 및 멕시코계 인구가 결코 적지 않은 미국 사회상 때문에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로 마야로 바꿨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40] 시선에 따라 갈리기는 하나 그러한 상황에서 현대의 구 스페인 식민 국가들도 사실상 스페인이 지배하는 지역이라 보는 이들도 있고, 실제로도 예나 지금이나 구 에스파냐, 포르투갈 식민지 국가들의 사회 계층들은 스페인계 백인 상류층과 원주민, 혹은 흑인 하류층같은 형태로 분열되어 있다.[41] 이런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해당 남성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자를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참고로 이런 성인식은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의 최대 피해자였던 틀락스칼텍조차도 동맹국 군대인 스페인군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치렀다. 물론 적의 피로 피칠갑 하는 것과 수만명씩 제단에서 죽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42] 어려서는 가정교육을 받고, 15세부터 학교에 들어가 학문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동시대 동아시아와 유럽은 여성의 교육진출이 제한적이었다.[43] 평민보다 귀족이 더 엄격한 교육과 처벌을 받은 것은 물론, 단식 기간에는 틀라토아니(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44] 구대륙의 사회에서 신분은 천명, 즉 한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구조였던 반면 아즈텍 제국에서는 전쟁에서 공을 쌓는 등 마음만 먹으면 평민도 귀족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잘못하면 귀족이 평민이나 천민으로 강등당하기도 했다.[45] 모의 전투, 효율적인행군, 동맹 체계나 거리를 이용한 전술과 무기 사용 등 굉장히 복잡한 전술이 존재했다.[46] 아즈텍의 천민계급 역시 예속된 신분이었지만 공을 쌓으면 평민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었다. 조선의 노비와 비슷하지만 노비 역시 신분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서양의 노예가 말하는 가축 취급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자유가 보장된 셈.[47] 아즈텍에서 과음하고 취하는 것은 최대 사형까지 갈 정도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예외였다) 혐오의 대상이었고, 특정 기간 동안 아즈텍인들은 평민부터 황제까지 단식하고 성행위마저 삼가며 절제했다. 그들을 처음 만난 스페인인들은 그들의 교양있는 행동과 절제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단식 역시 기독교의 금육이나 이슬람의 라마단과는 비교도 안 되게 철저히 지켜졌다.[48] 흔히 아메리카에는 금속 제련술이 없었다는 오해가 있지만 스페인의 침략 무렵 아메리카는 이미 청동기 시대에 접어든 이후였다.[49] 이는 고대 아시리아나 상나라 역시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이들의 인신 공양 문화는 당시에도 큰 비판을 받아 전성기에도 주변 민족들의 반란으로 국력을 지속적으로 소모해야 했으며 이게 누적되어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50] 흥미롭게도 아즈텍과 비슷한 기후를 가진 곳은 아즈텍을 정복한 스페인이다. 둘 다 산악 건조지형이라는 면에서 크게 비슷하다. 괜히 스페인의 북중미 식민지배의 중심지가 멕시코 시티와 인근 지역이 된 것이 아니다. 유럽에서 미국의 서부극을 흉내내 찍으면서도 미국 본토 서부극과 달리 텍사스(과거에는 멕시코령이었음)나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역이 주된 배경이 되는 스파게티 웨스턴 또한 사막이나 황무지를 배경으로 한 촬영이 주로 스페인에서 이루어졌다.[51] 사람 넓적다리 뼈로 만든 피리, 제사에 바칠 사람 심장을 담는 그릇 등이 전시되어 있다.[52] 물론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에 당도한 것은 9세기 경의 일이고, 아즈텍은 13세기 경에나 등장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 지역도 아즈텍은 중미에 위치한 반면 바이킹들은 캐나다 해안가에만 당도했다. 현실과 달리 가축으로 쓸만한 우제류라도 있었던 모양이다.[53] 이들은 햇빛에 취약한데 아즈텍이 태양을 숭배하는 문명인 것을 감안하면 햇빛에 불타 사라진 듯 하다. 죠죠 특유의 현실에 있던 상황을 픽션이랑 섞은 예시중 하나이다.[54] 다만 플레이어는 기병의 기 자도 모르던 당시 아즈텍 지휘관이 아니며, 기병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으므로 얘기가 좀 다르다. 게다가 AI 역시 멍청해서 기병을 제대로 활용 못하니, 보병의 빠른 이동속도와 압도적인 병력수로 유럽 보병을 포위공격+기병대에 보병 우라돌격을 시킨다면 중수 이상 되는 실력만 가져도 손쉽게 이길 수 있다. 오히려 포위공격이 불가능해 한 번에 한 놈 법칙 식으로 스페인군에게 학살당하기 일쑤인 시가전에서 더 불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