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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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
7위
8위
9위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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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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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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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위
24위
2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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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패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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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위
27위
28위
2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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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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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포크스
31위
32위
33위
3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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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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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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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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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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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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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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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위
5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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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위
아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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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위
5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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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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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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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위
6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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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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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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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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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위
73위
74위
7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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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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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위
77위
78위
7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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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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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배비지
81위
82위
8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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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아서 왕
King Arthu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Arth_tapestry2.jpg

왕호
아서 왕
King Arthur (영어)
Y Brenin Arthur (웨일스어)[1]

Arthur Pendragon[2]
출생
출생일 미상
콘월 틴타겔[3]
사망
미상, 미래에 부활할 왕
재위
537년경[4]
종교
기독교

1. 개요
2. 설명
3. 무구
4. 역사와 재구
4.1. 아서 왕의 역사적 시대 배경
4.2. 역사 속 아서 왕의 후보
4.3.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주장
5. 대중문화
6. 여담



1. 개요[편집]


아서 왕(King Arthur) 또는 아서 펜드래곤(Arthur Pendragon)은 고대 브리튼 지역에서 브리튼인들을 이끌었으며,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제국을 건설했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2. 설명[편집]


'아서 왕'은 신화와 전설 속에 존재하는, 판타지(fantasy)적 인물이다. 만일 '아서 왕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부터 6세기 초까지의 로만 브리튼 이후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서 왕의 초기 설화들을 보면, 아서 왕은 브리튼의 영웅으로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 브리튼을 방어하기 위해 군담(軍談)적 살신성인에 해당하는 공을 세우고있다. 아서 왕이 완전히 창작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측 역시 '당시 브리튼인들의 멸족과 망국에 대한 위기감, 구원자에 대한 열망이아서 왕 전설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아서 왕의 전설이 전 유럽에 널리 알려지며, 유럽의 여러 영웅서사들이 편입되었고 중세유럽의 방대한 이야기군인 아서 왕 전설이 만들어졌고, 아서 왕은 국왕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국가를 건설하고, 수많은 영웅들의 왕이자 중세시대의 위인으로 활약하였다.

아서 왕 전설은 아서(Arthur)왕과 궁정에서의 원탁의 기사들의 이야기를 총칭하는 것으로, 중세 유럽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오랫동안 서양세계 음유시인과 문학가들에 의해 널리 사랑받았으며, 오늘날에도 판타지 문학과 예술의 원류로 영감의 소재가 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서 왕은 대중적 판타지의 주인공이며[5] 대표적인 성군의 이미지이자 중세의 영웅 이미지로 존재하고있다. 아서 왕 전설은 켈트 신화를 바탕으로 로마 신화의 요소를 가지고 게르만 문화 영향을 받았으며 기독교 신화가 가미되어 중세[6] 내내 각색되어져 왔다. 당대의 음유시인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를 읊으며 다녔으며, 예전에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독립된 전승의 주인공인 영웅의 이야기들은 모두 아서 왕 전설의 사이클에 통합되었다. 아서 왕 전설은 기사도, 로맨스, 전쟁, 마법, 탐구, 비극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아서 왕 전설은 거대한 신화적 성운의 상상적 중심에 놓여있는 이야기 군(群)이며, 사실 아서(Arthur)라는 이름조차 그것이 실제의 이름이라 하기가 어렵다. 아서는 켈트어 아츠(arz)에서 온 것인데, ‘곰’은 켈트 문명에서 ‘’의 상징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더 왕과 아서 왕이라는 표현이 둘 다 사용되지만, 외래어 표기법의 표준 표기로는 아서이다. 아서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인명으로 종종 사용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아서 위즐리나 《셜록 홈즈》를 쓴 아서 코난 도일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만 맥아더(MacArthur)와 같은 경우는 관용어 존중의 차원에서 맥아서가 아닌 맥아더로 읽히고 있다. 이름이 언급된 최초의 문헌은 웨일스어 문헌인 《어 고도딘(Y Gododdin)》으로 추측된다. 남아있는 사본은 13세기의 것이지만 원본은 가장 이르게 작성된 부분은 7세기, 대부분은 9~10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서 왕에게 구체적인 생애를 부여한 것은 12세기에 라틴어로 저술된 몬머스의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7]이며 이를 통해 아서 왕은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브리타니아 열왕사> 이전의 초기 설화에서 아서 왕은 웨일스 지방의 켈트족의 영웅[8]으로 초자연적인 존재와 싸우는 신화적인 면을 가졌으며,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인기를 모으며 프랑스, 독일등 대륙으로 전래되면서 부터는 여러 지역의 원탁의 기사들이 추가되고 활약하면서 중세 기사도 문학의 원류가 되었다.

아서 왕은 중세 유럽에서 예수 다음으로 가장 많이 회자된 인물이자, 수많은 영웅을 거느리고 있는 왕 중의 왕이며 수많은 무공을 세운 최고의 영웅이다. 때문에 중세기 문학 예술에서 이른바 영웅의 본보기, 기사도 정신의 원천으로서 그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중세의 아홉 위인(Nine Worthies) 중 하나로 칭송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나머지 여덟 명은 헥토르, 알렉산드로스 대왕,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윗, 여호수아, 유다 마카베오, 카롤루스 대제, 고드프루아 드 부용.


3. 무구[편집]


아서 왕 전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멀린, 호수의 여인등 다양한 조력자에게서 구한 여러가지 신비한 무기들이다. 그 유명한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비롯한 그의 무구 전설은 중세 기사도 문학의 서사 전개 방식에 중요한 소재로 작용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정통 판타지 소설클리셰가 되고 있다.

그대가 말하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리라. 바람이 불고, 비가 젖고, 태양이 회전하며, 바다가 에워싸고, 땅이 이어지는 한. 다만 오직 내 와, 내 망토, 내 검 칼레드불흐(=엑스칼리버), 내 창 흐롱고머얀트, 내 방패 위넵구르투헤르, 내 단검 카른웬하이, 그리고 내 아내 그웬휘바르(=기네비어)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Thou shalt receive the boon whatsoever thy tongue may name, as far as the wind dries, and the rain moistens, and the sun revolves, and the sea encircles, and the earth extends; save only my ship; and my mantle; and Caledvwlch, my sword; and Rhongomyant, my lance; and Wynebgwrthucher, my shield; and Carnwenhau, my dagger; and Gwenhwyvar, my wife.

아서 왕이 사촌동생 킬후흐에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한 말. 영문 번역은 Lady Charlotte Guest에서 발췌.

  • 구스화이트(Goosewhite): 강철로 만들어진 투구. 수많은 보석들이 황금으로 고정되어 있고, 한때는 우서 펜드래곤의 소유였던 무구. 모든 것 중 매우 희귀한 것이었기에 구스화이트라고 불렸다.
  • 롱고미니아드 (창)
  • 엑스칼리버(+검집)
  • 위가르(Wygar): 강철 그물로 장식된 사슬갑옷. 요정의 장인이 탁월한 기술로 지은 것으로, 지혜로운 자가 만들었다 하여 위가르라 불렸다. 그리고 강철 넓적다리 가리개 등등은 아발론에서 마법의 능력을 부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칼리번이 있었을 당시에는 위가르를 착용하고 칼리번은 옆구리에 찼다고 한다. 작가 라야먼은 그의 작품에서 아서 왕의 갑주(구스화이트, 위가르)에 대해 화려하게 묘사했고, 같은 12세기의 로버트 와스(Robert Wace)도 유사한 글을 썼던 반면,[9] 정작 라야먼과 와스가 아서 왕이라는 소재를 얻은 몬마우스의 제프리는 아서 왕의 갑옷을 묘사하지 않았다. 투구에 대해서는 드래곤이 새겨진 황금 투구[10]를 썼다고 적었지만, 갑옷의 경우에는 아서 왕이 갑옷을 입었는지 자체를 생략한 채 가죽 조끼(leather jerkin) 차림으로 전투에 나섰다고 기록했다. 즉, 제프리의 기록을 종합하면 아서 왕은 가죽 조끼에, 황금 드래곤 투구를 쓰고,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방패 프리드웬을 들고, 장검 칼리번을 차고, 그의 창 론을 쥐고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이 된다.
  • 카른웬난(Carnwennan)[11]: 아서 왕의 단검.[12] <킬후흐와 올루웬(Culhwch ac Olwen)>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아서 왕이 킬후흐에게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하면서 "다만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매우 귀중한 보물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모험의 과정에서 아서 왕이 동굴 속에 사는 마녀 오르디(Orddu)를 이 단검으로 "단칼에 둘로 쪼개어 반으로 갈랐다"(clove her in twain so that she fell in two parts)는 기록이 있듯이, 전설의 무기에 걸맞는 스펙을 보여준다. 또한 웨일스의 삼제가 중 아서 왕궁의 기사들의 삼제가에서는 하나님께서 아서 왕에게 내리신 세 가지 신성한 무기를 들면서 "그의 창 롱고미안트, 그의 검 칼레드풀흐(=엑스칼리버), 그의 단검 카른웬난"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카른웬난은 아서 왕 전설에서 일종의 삼종신기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지만, 장검이나 창에 비해 단검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임팩트가 적어서인지 웨일스 밖에서는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 클라렌트 (아서 왕의 검중 하나)
  • 프리드웬(배 또는 방패)
  • 투명 망토(or 그웬(Gwenn)): 웨일스 신화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망토. 아서 왕에게는 그 착용자를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망토가 있는데, 엑스칼리버나 롱고미니아드 등과 함께 쿨후흐에게 절대로 넘겨줄 수 없는 보물들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프러다인 섬의 열세 가지 보물(Tri Thlws ar Ddeg Ynys Prydain)>은 이 망토를 열세번째 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서 보이지 않지만, 그 자신은 모두를 볼 수 있다"(whoever was under it could not be seen, and he could see everyone)라고 간결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12세기 웨일스의 <로나뷔의 꿈(Breuddwyd Rhonabwy)>에서는 망토가 아니라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양탄자 그웬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아서 왕의 앞에 양탄자를 펼쳤는데, 각 모서리에 불그레한 금빛의 사과가 있었고, 그는 양탄자 위에 의자를 놓았다. 그 의자는 너무나 거대했기에 세 명의 무장한 전사들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양탄자의 이름은 그웬이었는데,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모두를 볼 수 있었다.
And he spread the carpet before Arthur, and there was an apple of ruddy gold at each corner thereof, and he placed the chair upon the carpet. And so large was the chair that three armed warriors might have sat therein. Gwenn was the name of the carpet, and it was one of its properties that whoever was upon it no one could see him, and he could see every one.
아서 왕이 그래서 이 신비한 양탄자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하면, 오웨인 경과 거기 앉아서 체스를 두는 것이다. 망토든 양탄자든 간에 상당히 흥미로운 기능을 지닌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킬후흐와 올루웬>, <로나뷔의 꿈>에서는 이 물건 자체가 스토리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무구가 너무 사기여서 묻히기라도 한 듯.


4. 역사와 재구[편집]



4.1. 아서 왕의 역사적 시대 배경[편집]


아서 왕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시기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약화된 로만 브리튼 이후로 로마 군단이 철수한 5, 6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사에서도 이 당시의 역사서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이후의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 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역사 기록을 남길 정도로 문명화되는 8세기 말이 되면 이와 반대로 사료가 너무 많아져서 아서의 모델이 되는 여러 인물들을 추정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파일:Map_Gaels_Brythons_Picts.png

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로만 브리튼)



브리튼 속주 로마군은 407년, 일부 수비군만을 남기고 갈리아로 출정을 떠나 갈리아를 점령했으나 이후 군사적 좌절이 계속되며 브리튼을 방치했고 410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로 편지를 보내 스스로를 지키라고 명령하며 로만 브리튼 시대는 막을 내렸다. 결국 갈리아의 브리튼 속주 로마군은 전멸당해 브라타니아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로마 본토 역시 게르만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다. 로마 군단이 철수한 힘의 공백 아래 로마화된 켈트족, 즉 브리튼인들은 야인(野人) 켈트계인 픽트족, 게일족, 스코트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당하게되었고 이후 주트족, 색슨족, 앵글로족, 프리시족 등 게르만계 부족들까지 북해를 건너오면서 브리타니아 섬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영국 수도사 길다스(Gildas)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게른(Vortigern)이 425년부터 30여 년 동안 브리튼을 통치했다고 한다. 보티건(Vortigern)은 길도(Gildas)와 비드(Bede)의 기록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여기선 왕이 아니라 참주로 나왔는데, 고유이름이기 보다는 족장이나 왕을 뜻하는 보통명사일 수 있다고 한다. 446년, 보티건은 브리튼인들이 야인 켈트계인 픽트족들에게 남침을 받게 되자 게르만계 주트족 용병들은 고용해 이를 물리졌다. 이후 용병들은 돌아가지않고 브리튼에 정착했고 분쟁이 일어나자 보티건은 주트족과 동맹을 맺고 영토를 분할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렇게해서 켄트 왕국이 세워지자 이어서 색슨족들도 밀려들어와 서식스왕국, 웨섹스왕국, 에식스왕국을 건립하였고 이와 함께 앵글로족도 머시아왕국, 이스트 앵글리아왕국, 노섬브리아왕국을 건국하여 앵글로색슨 7왕국이 세워졌다. 5세기 이후 앵글로족이 또다시 대규모로 브리타니아로 이주했고 시간이 흐르며 색슨족도 저지독일어 대신 앵글로 족의 고대 영어를 사용하며 앵글로 색슨족은 함께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후에 9~10세기 경 이들 주도로 통일국가를 이루어 '잉글랜드'가 되었다. 앵글로색슨 7왕국의 건립은 4 ~ 6세기 300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었던 게르만족 대이동 물결의 일부였다. 이 7왕국은 8세기가 되면서 3개의 왕국(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식스)으로, 9세기에는 하나의 왕국 웨식스로 통합되었다.

켄트 왕국이 세워지며 그곳에 살던 브리튼인들은 쫒겨나게 되었고, 이후 다른 게르만계인 색슨족과 앵글로족이 들어와 국가를 세우면서 브리튼인들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브리튼인들은 저항했으나 6세기경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페스트로 추정되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상륙하면서 크게 좌절되었으며, 이미 구 브리타니아의 수도 론디니움(Londinium, 현재의 런던)은 전쟁터가 되어 수도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13]. 전쟁은 7~8세기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리된다. 로만 브리튼인들은 서쪽의 웨일스로 밀려났으며 대륙으로 건너간 브리튼인 일부는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Britany)라는 왕국을 세웠다. 동쪽에 남아있던 브리튼인들의 경우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다가 동화되었다. 최후의 승자는 앵글로색슨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서 왕 전설의 결말이 브리튼인들의 동족상잔과 아서 왕국의 몰락으로 끝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서 왕 전설 역시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잉글랜드는 후에 노르만족의 침입과 지배를 받게 되지만 노르만족 역시 점차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되면서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현대의 윈저 왕조에 이르기까지 앵글로색슨(게르만 계열)이었다. 예외적으로 튜더 왕조브리튼(웨일스) 계열이다.[14]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는 자신의 장남의 이름을 아서로 짓기도 했다. 그러므로 사실 현대 영국인과 영국 왕실은 앵글로색슨, 노르만, 브리튼의 피가 모두 섞였다고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nsbruck_1_262.jpg}}}
1520년대에 만들어진 아서의 동상[15]

아서 왕의 초기 모델은 이런 혼란스러웠던 브리튼의 상황 속에서, 이민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브리튼인들을 일시적으로나마 구원한 "어떤 브리튼인 영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어지고 있다. 실제로 바돈 산의 전투 등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한 세대 정도 극도로 위축되었던 정황이 기록 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러한 인물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설에 근거해서 여러 인물들이 아서 왕의 모델이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그런 인물의 존재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가 않다.

아서 왕의 시대를 살아간 길다스 사피엔스(500?~570?)의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16]이 당대 유일한 기록이나 어디에도 '아서 왕'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서 왕보다 2세기 후의 《브리튼 부족사》에서야 최초로 '앵글로색슨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령관 아서'가 등장하지만 그러나 그마저도 '왕'이 아닌 전투지휘관이며, 200년 후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면 그다지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하기가 어렵다.

6세기경 바돈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은 앵글로색슨족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적어도 100년 이상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위축되었다는 것은 실제 상황이나, 이 당시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고사하고 전투가 벌어진 바돈 산이 어디인지조차 알 방법이 전혀없다.[17] 따라서 역사가들은 아서 왕이 실제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가 부족한 고대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 "6세기 중반 아서 라는 지도자가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다"는 이야기 자체는 완전 허구만은 아니다. 우선 브리튼인들의 6세기경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앵글로색슨족의 공세를 100년 이상이나 늦춘 대승을 거두었다. 또 이 무렵 다른 기록에서도 '아서'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즉,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짓는 당대의 유행을 감안한다면 바돈 산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의 이름이 혹시 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심증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아서라는 이름은 켈트어 아츠(arz)에서 온 것으로 이는 왕이라는 뜻을 가지니 아무래도 어떤 특정인의 이름이기보다는 지도자, 왕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아서 왕은 브리튼인들의 왕이면서, 동시에 앵글로색슨족에게도 전설의 왕이었으며, 노르만족들에게도 전설의 왕으로 영국 역사 내내 영국의 왕으로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앵글로색슨족이 아서 왕을 받아들인 이유는 바이킹 시대에 브리튼인들과 비슷한 동병상련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유독 한국에서 나돌아다니는 경향이 있는데,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노르만 정복 이후[18], 노르만족이 역시 스스로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서 왕 전설을 다시 끄집어 내서 중세시대에는 잊혀졌던 아서왕의 신화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고[19], 반대로 알프레드 대왕같은 앵글로색슨 인물들이 잊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알프레드 대왕의 행적 자체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아 그 행적이 아서왕 신화에 흡수되었고 그렇기에 아서 왕과 알프레드 대왕의 행적은 비슷한 면이 상당히 많다. 즉,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서 왕 전설 역시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걸 바이킹 시대와 연관 지어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20]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영국의 많은 사람들은 아서 왕을 영국을 지켜주는 전설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게 된다.


4.2. 역사 속 아서 왕의 후보[편집]


아서 왕 자체를 실존 인물로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아서 왕과 뚜렷한 관련성을 가진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상 아서 왕 혹은 그 모델이 되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며, 단순히 전설일 뿐이라며 많은 역사가들이 역사상의 아서 왕 및 그 모델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렇지만 직ㆍ간접적으로 아서 왕과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기록들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상의 인물을 전설속의 아서 왕에 대응시키려는 이런저런 노력이 한동안은 있어져 왔다.

역사상의 아서 왕의 실체에 대한 설명 중에 유명한 것은 아서 왕 전설이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사르마티아 중기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중기병 자체가 '기사'의 이미지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펜드래곤과 비슷한 용의 문양을 사용했다는 점, 땅에 칼을 꽂아놓는 관습이 있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된다. 또한 사르마트족의 전설에는 영웅이 죽게 되자 그의 검을 바다에 던지는 이야기[21]나, 아서 왕의 '호수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물의 여인'도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사르마트족과 관련시킬 만한 전설은 초기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에 주로 나오며, 이는 켈트 신화에도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으므로 굳이 사르마트와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있다.

그와 관련된 다른 유명한 설로는 '아서 왕 = 로마의 군인 아르토리우스'설로, 루키우스 아르토리우스 카스투스(Lucius Artorius Castus)가 5,500명의 사르마트 기병을 이끌고 브리타니아 북부의 '하드리아누스의 성벽'을 수비한 것이 아서 왕 이야기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름의 유사성과 함께 그의 깃발이 펜드래곤이라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반론으로는 그는 로마 제국이 아직 강성하던 시기의 인물이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점, 그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점, 그가 사르마트 기병을 지휘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는 점 등이 있다.

또 다른 학설로는 로마의 기록에 '브리튼의 왕(REX BRITANNICA, a king of Britons)'으로 등장하는 '리오타무스'가 있다. 리오타무스라는 말은 브리튼어로 위대한 왕을 의미하므로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의 요청으로 무려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이는 이 시대에 브리튼의 분쟁에서 동원되는 병력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리오타무스는 색슨족과 맞서싸우는 입장에서 본토에서의 증원을 막기 위해서 로마와 협력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 관리의 배신 때문에 로마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르군트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패배 후 리오타무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브리타니아 열왕사(Historia Regum Britanniae)>에서는 리오타무스가 퇴각한 방향에 아발론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오기는하지만 이 시대의 기록이 부족해 연구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신뢰하기는 어렵다. 이는 이 주장의 약점이기도 한데, 리오타무스가 존재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서 왕과의 관련 여부는 둘째치고 우선 리오타무스가 누구인지부터 연구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서 왕과는 다른 게, 아서 왕은 로마와 협력한 것이 아니라 로마군을 무찔렀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 외, 아서 왕 전설에서 아서 왕의 숙부로 나오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있다. 그가 실존했으며 아서 왕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는 길다스의 기록에 있는 바돈산 전투가 몬머스의 제프리의 기록에는 바돈 산 전투가 아서 왕이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다스의 기록에 의하면 색슨족 부대는 브리튼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다가 함정에 빠져 바돈 산에서 포위섬멸되었다고 한다. 길다스는 바돈 산 전투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길다스의 다른 기록을 보면 이 당시의 군 지휘관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인 듯하다. 물론 바돈 산의 전투는 벌어진 정확한 시기도, 바돈 산이 어디인지도, 그리고 싸운 것이 브리튼 인들인지 로마군인지조차 불분명하다. 하지만 최소한 색슨족이 브리튼인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활동이 백년 동안 위축된 점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사실일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몬머스의 제프리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우서 펜드래곤의 형이라고 기록했다. 이때문에 바돈산 전투를 치룬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곧 아서 왕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지만, 길다스의 기록을 검토한 학자들은 아우렐리아누스가 활동한 것은 바돈 전투보다 앞선 시대라고 보았다. 또한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우스는 길다스의 기록 이외 다른 곳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실존했던 인물인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만약 그가 실존했다면 로마의 기록에도 나타날텐데 그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22]

이 외에도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튼 왕국의 왕이었던 우리엔 레게드(Urien Rheged)나 전설적인 북부 브리튼의 왕 코엘 헨(Coel Hen)[23], 브리타니아 출신으로써 로마제국으로 출병하여 아서 왕 전설의 로마제국 정벌의 모티브가 됐다 여겨지는 대립황제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마그누스 막시무스[24] 콘스탄티누스 3세 등도 섞였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했다. 또한 켈트 신화에서 발전해 나간 아서 왕 전설이 중세를 거치며 앵글로색슨족의 대영웅 알프레드 대왕을 모델로 재구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아서 왕의 전설은 여러 시대, 여러 지역의 여러 민족의 설화와 역사적 기억들이 유입되어 섞여서 연상되는 인물이 너무 많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서 왕은 로만 브리튼인으로 로마화된 켈트족들의 지도자이고, 기독교인이다. 당시 브리튼인들은 북유럽 다신교를 믿는 게르만족과 기독교를 믿지않는 로마화되지 않은 켈트족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아서 왕 전설은 로마화된 켈트족의 신화로 켈트 신화의 바탕위에 로마 신화의 요소가 얻어진 기독교신화이기도 하다. 아서 왕의 모델 역시 로마화된 켈트족, 즉 브리튼인들의 장군에, 기독교도로써 로마군 출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갈리아 전기가 쓰여질 무렵과 아서 왕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사이의 시간차, 골 지방과 영국의 기후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당대의 무장 상황을 고려한다면 로마군의 제식 갑옷인 로리카 하마타(체인메일)로 무장 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어떠한 가설을 따라도 지금의 상상화처럼 플레이트 아머를 두른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2000년대 이후 영화부터는 고증을 살려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지 않다. 중세내내 아서 왕 전설은 각색되어 왔으며 아서 왕의 이미지는 브리튼의 민족 영웅에서 중세 영웅의 이미지로 탈바꿈되었다.

아서 왕 전설의 시기와 영국 역사를 쭉 비교해 봤을 때, 실재했다면 여러 정황상으로 로마 지배시기가 끝나가던 때(5세기 후반~6세기 전반)가 가장 적절하며 그 시절에 실제로 영국을 통치했을 만한 강력한 군사지휘관의 증거가 여럿 나온다. 그로 인해 그의 정체가 사실 로마군에 복무한 퇴역 군인이며, 로마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혹은 그 과정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가설이 힘을 얻기도 했다. 아서 왕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인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서는 그를 '왕'이 아닌 군 사령관(dux bellorum)으로 부르며, '브리튼의 왕들 편에서 싸웠다'고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엑스칼리버 전설의 경우 금속 제련 기술의 발달로 인해 품질 좋은 금속검을 대량으로 보유했던 것을 비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 호수로 유해를 보냈다는 전설의 경우, 북유럽에서 죽은 이들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비유하는 이야기가 많아 같은 맥락으로 취급했다. 그 가설을 따르며 진상을 추적해 나가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여러 기록들을 조사해 가다가 마침내 아서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는 헨리 2세의 사망 직후 글래스턴베리의 수도사들이 수도원 묘지에서 아서왕과 귀네비어 왕비의 무덤을 발견한 사건에 따른 것이다. 전설속 인물의 무덤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헨리 2세는 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해[25] 아서 왕을 소설화하는데 주력했으며, 신이 선택한 사람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헨리 2세는 웨일스 국경에 자리한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발론의 위치 추적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신화의 대부분의 내용은 구전으로 돌던 전설의 모음집적 성격이 짙다. 그래서, 주류 학계에서는 전설속의 아서 왕이 정확히 어떤 인물을 모델로 했는지 가려내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다. 위에서 설명한 인물들도 죄다 물증이 없는 추측에 싸인 가설일 뿐이다. 참고로 아서 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당대가 아닌 9, 10세기 윤색된 역사서로서 존재하는 연대기에는 그저 무슨 무슨 전투에서만 싸웠다는 기록만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아서 왕 전설의 고고학적 증거를 찾는 고고학자들이 소개되었다. 엑스칼리버의 정체를 거푸집에서 금속 검을 뽑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는 등 참고할만한 고고학적 연구가 많다. 다만 마지막 영상의 글래스턴베리 유해는 진짜가 아니라 나중에 사라진 것으로 재연극에서 유해를 연기한 소품일 뿐인데 진짜인 것처럼 썸네일 낚시를 하여 비판받았다.

4.3.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주장[편집]


"아서의 포지션에 해당할 인물"들이 위와 같이 여러 명 거론되지만, 그들 중 확실한 물증이 있는 인물은 단 한명도 없다. 아서의 실존성을 주장하는 주요 전거는 『브리튼인의 역사』(9세기)와 『캄브리아 연대기』(10세기)다. 『브리튼인의 역사』에 '바돈 산 전투'가 기록되어 있고, 『캄브리아 연대기』에 '바돈 산 전투'와 '캄란 전투'가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튼인의 역사』는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초기 버전 같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문헌이다. 사료로서 가치보다는 설화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여지는 문헌이다. 반면, 『캄브리아 연대기』는 아서 왕에 대한 기록이 지나치게 자세해서 문제가 되는데, 도저히 6세기의 인물의 행적을 이렇게 많이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선행문헌(인용, 전거의 대상)이 『브리튼인의 역사』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캄브리아 연대기』의 상세한 아서왕의 행적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 처음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오늘날 로만 브리튼 이후(sub-Roman Britain) 시대를 논할 때 역사학자들은 아서 왕 이야기를 그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최대한 언급해줘봤자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 해줄 말이 없다”에 그친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아서 왕은 '전설 속 인물'로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지금이야 다들 전설로 인정하고 당연시 생각하면서 전설과 역사를 명확하게 구분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서의 왕국의 강역을 지도에 표시하려는 시도들이 있을 정도로 아서 왕을 역사적 인물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서 왕이 전설 속 인물이고 아서 왕이 특정인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기에 "아서 후보"조차 존재할 수 없다는 학설과 주장은 바로, 기록에 따른 것이다.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는 아서를 6세기 사람이라고 기록했는데, 정작 6세기 당대에 쓰인 길다스 사피엔스의 『브리튼의 파괴와 정복』에는 바돈 산 전투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아서라는 존재는 전혀 기록된 바 없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도 없다. 8세기 사람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에도 없다. 400년에서 820년 사이에 작성된 필사본 중 "아서"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26] 그래서 '아서 왕 완전허구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서 왕"이 역사학자가 진중하고 중요한 연구를 할 시간을 빼앗고 현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주제 자체를 교과서와 역사책으로부터 추방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학자로는 Nowell Myres,[27] David Dumville[28] 등이 있다.

또한 아서 왕이 실제 역사적 모델과는 무관하며, 완전히 켈트 신화에서 유래한 신화적인 존재라고 보고있다. 그중에서는 거인 2명을 처치한 영웅이라는 점도 있는데 실제로 초기 아서 왕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켈트 신화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아서 왕 전설의 주요 소재 중 하나인 성배의 원전 역시 켈트 신화의 누아다의 황금솥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아서 왕 전설은 초창기에는 구전으로 전승되었으며 아서 왕은 신의 후손으로 신화적 인물이었다. 마치 단군신화와 같은 민족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후 몬머스의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의해 처음으로 아서왕의 생애가 문헌으로 기록되었고,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전 유럽의 관심을 받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아서 왕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이후 중세시대 내내 인기를 모으며 수많은 아서왕의 이야기들이 씌여지게 된다.

일부에서는 아서 왕이 허구적 인물로 로만 브리튼인이 아니라서 그 시대의 복장이나 양식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전설이 구전되었던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이어서 아서 왕의 초기 판본들을 보면 중세 이전의 생활 양식들이 묘사되어지고 있다. 또한 아서왕 전설은 수많은 이본(異本)들이 있는 이야기라서 같은 인물이라도 이야기마다 다른 성격과 다른 스토리로 나오며 시대상 역시 로만 브리튼 시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다양하다. 중세 이후 아서 왕과 관련된 이야기 대부분이 중세풍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아서 왕의 전설이 중세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것에 기인한것이다.


5. 대중문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서 왕/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서 왕과 그의 용맹한 기사들, 강력한 마법사에 대한 로맨틱한 이야기는 중세 이후 서양 문명을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였다. 전 유럽을 아울렀던 상상력의 원천이자 판타지 문학에 영감을 불어넣으며 원류로 손꼽히는 만큼 오랜 시간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변주되어 왔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서 왕 전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서 왕 전설은 웨일즈 지방에서 신화로서 구전되다가 12세기 몬머스의 제프리(Geoffrey of Monmouth)가 라틴어로 집필한 <브리타니아 열왕사>(Historia Regum Britanniae)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후 중세 내내 다양한 이야기로 각색되어져 오다 15세기 후반 토마스 말로리가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아서 <아서 왕의 죽음>을 출판했다. <아서 왕의 죽음>은 영국 최초의 산문이다.


6. 여담[편집]


  • 아서 왕 전설은 여러시대 특히 중세 시대에 내내 유행을 하며 수많은 내용의 첨삭이 발생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이본(異本)들이 존재한다. 이야기가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문헌마다 주제, 사건, 등장인물의 요소들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원래의 이야기는 웨일스 신화였으며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아서 왕의 생애를 최초로 기록한 몬머스의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나온 이후 아서 왕 전설이 널리 알려지며 여러 운문과 산문이 나왔고 후대의 이야기들은 제프리의 판본을 시작점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제프리는 아서가 색슨족 등 이민족들을 물리치고, 브리튼 섬은 물론 아일랜드·아이슬란드·노르웨이·갈리아까지 지배하는 제국을 세웠다고 썼다. 오늘날 아서 왕 전설의 필수요소로 생각되는 기본적 합의사항들은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 예로는 아서의 아버지가 우서 펜드래곤이라는 것, 마법사 멀린, 아서의 아내 기네비어, 성검 엑스칼리버, 틴타겔성에서 아서가 잉태되었다는 것, 캄란 전투에서 모드레드와 결전을 치른다는 것, 그리고 아발론에서 안식을 맞고 다시 부활해 돌아올 것이라는 것 등이 있다.

  • 프랑스 불가타 연작에서는 아서 왕의 전투 함성이 "클라렌스(Clarence)!!"였다. 여기서 클라렌스는 웨일스의 지역 이름인데, 프랑크의 샤를마뉴 대왕도 실제 지역명인 "몽주아(Munjoie)!"를 전투 함성으로 사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프랑스 작가들이 아서 왕 문학을 집필하면서 그걸 따라했다는 것이 현대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B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멀린에서는 아서 왕과 기사들의 전투 구호가 "Camelot!"이나 "For the love of Camelot!"으로 변경되었다.


  • 아서 왕의 전설은 여러 시대, 여러 지역의 여러 민족의 설화와 역사적 기억들이 유입되어 섞여있는데 거인 2명을 처치한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29]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여길 참조. 에드워드 1세웨일스를 정복하고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서 왕 전설을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30]

  • 1981년의 영화 "엑스칼리버"는 '토머스 말로리'의 15세기의 저서 《아서 왕의 죽음》(Le Morte D'Arthur: 제목은 불어지만 실제론 영어로 쓰임)을 원작으로 하고있다. <아서 왕 전설>의 배경은 시기를 알 수 없는 중세로 되어 있으며, 이는 중세 기사도 문학에 속한다. 아서 왕 전설이 중세에 유행을 하다보니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많은 편이라 이 영화처럼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빛나는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서 왕 전설이 만들어졌을 배경과 시대를 반영한다라면, 여기에서처럼 플레이트 아머를 입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5~6세기 무렵 로마와 그 영향을 받은 왕국들은 사슬갑옷이나, 찰갑, 어린갑 등의 여러 조각들을 엮은 갑옷을 애용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고증에 맞게 아서 왕이 로리카를 입고 있는 것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아서 왕은 로만 브리튼 이후 시대의 브리튼인일 것이므로 드루이드 교도가 아니라 기독교인이어야 한다.[31]

  • 2004년의 아일랜드 합작 영화 킹 아더는 아서가 브리튼에 주둔했던 로마군의 보조병(사르마티아 중기병) 출신일 것이라는 설과 로마인 아르토리우스라는 설을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아일랜드 합작 영화라선지 유일하게 아서가 침략자 앵글로색슨족에 맞서서 브리튼인 기독교도들을 지킨 영웅이라는 것을 부각시킨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는 멀린이 마법사가 아니라 브리튼인을 이끄는 드루이드에 가까운 투사로 나오며 기네비어가 투희였다는 설을 따라 우즈족 전사로 나와 멀린과 함께 아더를 조력하고 있다. 색슨족 족장 체르디치(스텔란 스카스가드) 및 그 아들 킨리치(틸 슈바이거)을 맡은 배우들도 스웨덴인독일인 으로 캐스팅했으며 초반에는 "랍토피안나!"라는 게르만어 대사를 쓴다. 영화의 마지막 바돈 산의 전투에서는 아서가 색슨족 족장인 체르디치, 킨리치를 죽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체르디치는 웨식스 왕국을 세웠고 신릭이 뒤를 이으며, 이 왕국은 이후 500년간 이어지며, 8세기부터 침략해오는 바이킹에 대항하는 앵글로색슨족의 중심 세력이 된다. 이 왕조가 낳은 알프레드 대왕잉글랜드 왕국으로 이어질 통일 왕조의 초석을 놓는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픽션으로, 엄청난 역사왜곡이다.대체역사물

  • 현대의 아서왕 영화들은 판타지/ 액션 장르의 뮤비로 악에 해당되는 당대 권력자를 물리치는 아서 왕의 무공이 주내용이며, 대형 전쟁씬이 등장하는 게 특징이다. 2010년대부터는 마법이라는 소재로 화려한 영상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2015년 영국 영화 '킹아더 전설의 서막'은 판타지 영화로 신비한 칼 엑스칼리버를 갖게 된 아서가 멀린과 함께 어둠의 신을 깨우려는 사제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는 이야기로 마법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였다. 2017년 킹 아서: 제왕의 검은 판타지 액션영화로 우서 왕이 어둠의 마법사 모드레드를 처형하고 평화가 오지만 우서 왕 동생 보티건이 우서 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르며 아서 왕이 왕위를 되찾는 이야기를 그렸다. 아서 왕 전설의 대표 악역인 모드레드, 보티건이 설정을 변형하여 악역으로 등장했다. 멀린과 여자 마법사가 등장하는데 크레딧에서 그녀의 이름이 기네비어라고 나온다. 마법과 액션씬이 중요한 영화인만큼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와 멋진 그래픽을 보여줬다.

  • 2020년, 넷플릭스에서는 아서왕 전설 속 호수의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저주받은 소녀'를 제작했다. 아서 왕의 전설에서 아서 왕에게 엑스칼리버를 건넸다는 호수의 요정 니무에의 시작으로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아서가 바위의 엑스칼리버를 뽑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전에 존재했던 엑스칼리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성군의 대표 상징인 아서 왕에 대해, 관심유발(Aggro)을 위해선지 2009년 '아서 왕은 사실 폭군이었다' 라는 기사 #가 나오기도 했으나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이 링크의 세계일보 기사 헤드라인의 원문의 문구는 "genocidal warlord"로, 인종학살을 저지른 전쟁지도자 정도로 번역이되는데, 아서 왕이 앵글로색슨(Anglo-Saxon)족과 전투를 하고 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초창기 설화에서는 민족 영웅이었지만 전설이 확장되어가며 아서 왕은 국가의 영웅이 되고 중세의 영웅이 된다. 쳐들어온 색슨족을 막아내기 위해 브리튼인들은 전쟁에서 싸워야만 했는데, 이때문에 폭군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또한 위 기사에서 곰을 죽인다고 운운하는데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바로 브리튼의 왕권과 용맹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서(Arthur)라는 이름 자체도 ,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역시 명백한 오역이다. 브리튼예언서를 보면 브리튼인들은 난세가 오면 아서가 다시 돌아와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에 대해 '인종학살에 적합할 것으로 (후세에) 떠받들어진 전쟁지도자' 정도로 번역되는 표현을 했는데 어이가 없고 황당한 소견이다.
[1] '어 브레닌 아수르'로 읽는다. 브레닌은 군주를 뜻하므로 영어 이름과 의미는 같다.[2] 아서 왕은 AD 5세기 브리튼 사람으로, 당시 브리튼에는 아직 성(性)이라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팬드래곤'은 일종의 칭호라고 볼 수 있다. '펜드래곤'이란 명칭의 출처는 대부분 창작물로, 동양에서의 '휘'의 개념과 완전히 동일하지는않지만 유사하게 쓰이고 있다. 처음 언급된 <브리타니아 열왕사(Historia Regum Britanniae)>에선 용들의 왕라는 의미로 쓰였다. 브리튼인웨일스의 상징이 붉은 용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적절한 칭호라고 할 수 있다.[3] 웨일스의 몬머스 지방 출신의 성직자 몬머스의 제프리(Geoffrey of Monmouth)가 기록한 <브리타니아 열왕사(Historia Regum Britanniae)>의 서술을 따를 경우.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아서 왕의 일대기를 최초로 정리한 책이며 아서 왕의 시대로부터 수 세기 후인 1136년에 기록된 문헌이다.[4] 웨일스의 더베드(Dyfed) 지방에서 발견된 <캄브리아 편년사(Annales Cambriae)>에서는 아서 왕의 마지막 전투인 캄란 전투가 일어난 시기를 약 537년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캄브리아 편년사>는 아서 왕의 시대로부터 수 세기 후인 10세기 중반에 기록된 문헌이다.[5] 선왕의 하나뿐인 아들이 신분을 감추고 자라 바위에 박힌 전설의 신검 엑스칼리버를 뽑아 자격을 증명하고 왕위에 오르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6] 아서왕의 전설은 중세에 큰 인기를 모으다 르네상스 시대가 오며 연극, 희곡에 밀려 관심에서 멀어지다가 19세기 중세주의, 낭만주의, 고딕 부흥운동으로 부활의 시기를 거쳤으며 현재까지 문학과 다양한 매체의 소재로 활용되어지고 있다.[7] 중세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책 중의 하나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8] 한민족의 단군신화처럼 초창기 아서 왕 전설은 켈트 신화였다.[9] 다만, 와스는 갑옷과 투구에 고유의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10] golden helmet on his head, on which was engraved the figure of a dragon[11] 카른웬하이(Carnwenhau)라고도 표기된다.[12] 기록에 따라 어디서는 단검(dagger)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단도(knife)라고 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불명.[13] "The last days of Londinium". Museum of Londo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8 January 2009. Retrieved 31 March 2013.[14] 그래서 튜더 왕조 시기에 유독 아서 왕과 튜더 왕가를 엮는 시도가 잦았다.[15] 고증에 맞지 않게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다.[16] 길다스가 쓴 것인지도 확실치 않고 추정이다.[17] 일단 후보가 되는 지역은 여럿 있는 모양이다.[18] 노르만족이나 바이킹이나 같은 게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애초에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수백 년 가까이의 혼혈로 인해 그냥 프랑스인과 다를 게 없었고, 영국을 침공한 사람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모집된 용병들이었기에 영국의 노르만족들은 바이킹은 커녕 그냥 전형적인 라틴족이었다. 윌리엄부터가 흑발머리이기도 했고.[19] 영국을 침공했던 노르만족들 1/3 가까이가 앵글로색슨족들에게 쫒겨나 프랑스 서북쪽에 정착한 브리튼인의 후손인 브르타뉴계 용병들이기도 했고, 앵글로색슨족들의 저항 때문에 통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노르만족들은 브르타뉴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아서 왕의 신화를 이용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브리타니아의 후손이고 너희들은 침략자들의 후손이라며 선전했다. 후에 플랜태저넷 왕조가 들어서고는 아예 민중들한테 프랑스어를 강요하기에 이르고,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형태의 아서왕 전설도 본격적으로 퍼지게 된다. 이러한 노골적인 앵글로색슨 정체성 탄압이 수백 년 가까이 지속되었기에 유일하게 사본이 남아있던 베오울프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대 영어 문학들이 결국 소실되어 버렸다. 그래서 톨킨도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영국(England)에는 자랑할 만한 고유한 신화가 없다고 한탄하였고, 그래서 쓴 작품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다.[20] 영어로 구글링해보면 대부분 앵글로색슨 시기가 아닌 노르만 정복 이후로 영국에 다시 켈트 문화가 꽃 피웠다고 언급된다. 참조[21] 심지어 두 번은 던지지 않고 던졌다고 속이려는 내용도 나온다.[22] 이 가설을 따른 작품이 ABE 전집에 포함된 영국 역사소설 '횃불을 들고'인데 이 작품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와 그의 조카이자 기병대장인 새끼곰 '알토스' 두 사람이 아서 왕의 모델로 나온다. (해당 소설은 시공사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로 재발간되었다.)[23] 이 두 사람은 웨일즈의 시와 전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왕들이다.[24] 웨일즈 전설에서의 로마로 출병하여 돌아오지 않았던 웨일즈왕 막센 올레디그의 모티브로 여겨지고 있다.[25] 정치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 신화를 이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26] Pryor, Francis (2004), Britain AD: A Quest for England, Arthur, and the Anglo-Saxons, London: HarperCollins, ISBN 978-0-00-718186-5.[27] Myres, J. N. L. (1986), The English Settlemen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282235-2. "no figure on the borderline of history and mythology has wasted more of the historian's time"[28] Dumville, D. N. (1977), “Sub-Roman Britain: History and Legend”, History 62 (62): 173–92, doi:10.1111/j.1468-229X.1977.tb02335.x. "I think we can dispose of him quite briefly. He owes his place in our history books to a 'no smoke without fire' school of thought ...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there is no historical evidence about Arthur; we must reject him from our histories and, above all, from the titles of our books."[29] 한 명은 콜랑이라는 이름의 키가 5m이고 거대한 을 탄 거인기사로 나온다. 최후는 목이 잘렸는데 목이 그대로 몸에 있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쉽게 말해 끔살이다. 또 한 명은 산 미카엘 성에 사는 식인 거인이다. 엑스칼리버로 거인을 베어 죽이고 거인의 보물을 백성에게 나눠줬다.[30] 본문에서는 웨일스(표기는 웨일즈)만의 문화로 한정하는 듯한데, 사실 웨일스는 브리튼족의 후손 중 하나일 뿐이다. 콘월, 브르타뉴도 브리튼족에서 갈라진 민족들이고, 잉글랜드도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족을 정복하면서 브리튼족이 앵글로색슨 사회에 편입되어 형성된 민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서 왕 전설이 웨일스만의 문화로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아서 왕이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틴타겔 성은 지금도 브리튼족 문화권에 해당하는 콘월에 있다. 아서 왕의 고향이 콘월인 것은 영국 왕가에도 영향을 미쳐 영국 국왕의 장남은 콘월 공작으로 불리며 그 부인의 공식칭호는 콘월 공작부인이다.[31] 이미 드루이드교는 로마 지배 당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4세기 말에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면서 브리튼 역시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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