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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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 공
아서 튜더
Arthur, Prince of Wales

이름
아서 튜더
(Arthur Tudor)
출생
1486년 9월 20일
잉글랜드 왕국 윈체스터 윈체스터 성당 수도원
사망
1502년 4월 2일 (15세)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루드로우 루드로우 성
장례식
1502년 4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우스터 우스터 성당
배우자
아라곤의 카탈리나 (1501년 결혼)
아버지
헨리 7세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
형제
마거릿, 헨리 8세, 엘리자베스, 메리, 에드먼드
종교
기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잉글랜드왕족세자. 헨리 7세요크의 엘리자베스장남이다.


2. 생애[편집]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고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랭커스터 왕조요크 왕조 사이의 길고 긴 장미 전쟁이 끝나고 튜더 왕조가 창건되었다. 이후 1486년에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적장자가 태어나자, 아서 왕 전설의 유명한 왕 아서 펜드래곤의 이름을 따서 아서라고 지었다.[1]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의 혈통을 둘 다 이어받은 아서는 당연히 웨일스 공콘월 공작에 책봉됐다. 웨일스 공가 혈통의 웨일스 공과 콘월 공작이 등장한 셈이었다.

1498년에 12세의 나이로 에스파냐 왕국이사벨라 1세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약혼했지만, 잉글랜드 측에서 엄청난 지참금을 요구하면서 여러 번 약혼이 파토날 위기에 처해졌었다.[2] 우여곡절 끝에 1501년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리지만, 바로 다음 해인 1502년 4월에 감기에 걸려서 1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헨리 7세가 아끼던 자식이었던터라 그는 아서의 장례식에서 흐느껴 울부짖을 정도로 크게 슬퍼했다. 헨리 7세는 평소에 화가 나지 않는 한 감정표현이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었는데, 아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는 것을 보고 신하들과 주변 사람들이 놀랐을 정도. 아서와 결혼하자마자 과부가 된 캐서린은 전남편의 동생인 그 유명한 헨리 8세에게 청혼을 받고 재혼한다.

아서의 요절과 이후 아서와 캐서린의 동침 여부는 튜더 왕조 그리고 영국 역사에서 최대의 전환점 중 하나가 된다.[3] 헨리 8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교황에게 자신은 형의 아내와 결혼했고 그 때문에 천벌을 받았으니 이혼을 허가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기각했고 결국 종교 개혁이 일어나 성공회가 생겨나고 영국은 개신교 국가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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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리 7세의 가문인 튜더 왕조가 역대 영국 왕조 중 유일하게 브리튼인, 정확히는 웨일스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묘하다. 실제로 튜더 왕조 시기에 왕가와 아서 왕을 엮는 작품이 많았다. 특히 헨리 7세가 자신이 아서 왕의 후손이라고 선전했다고 한다. 다만 가계도를 보면 오히려 색슨족을 끌어들인 보티건이 조상 중에 있다(...).참고 전설상에서 아서 왕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실존인물은 나오지 않는다.[2] 당시 헨리 7세는 장미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잉글랜드의 왕이었기에 다른 군주들에 비해서 그리 부유하지 못한데다 굉장한 구두쇠로 악명이 높았다.[3] 캐서린은 시동생이었던 헨리 8세와 재혼할 때 자신이 첫 남편인 아서와 동침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녀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을 교황청에서 받아들여 헨리 8세와의 결혼이 성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