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샨티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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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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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샨티 제국
Asanteman
가나 공화국 형태의 연합
파일:아샨티 제국 국기.svg
파일:아샨티 제국 국장.svg
국기
국장
파일:아샨티 제국 지도.jpg
(1670년 ~ 1901년)
위치
가나 남부
수도
쿠마시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아샨티헤네
주요 국왕
초대 오세이 코피 투투 1세(1670년 ~ 1717년)
16대 오툼포 나나 오세이 투투 2세 (1999년 ~ 현재)
언어
아샨티 취어
민족
아샨티족
종교
아칸 종교
주요사건
1670년 건국
1701년 덴키라 정복 후 독립
1824년 ~ 1901년 영국-아샨티 전쟁
1901년 멸망
통화
금괴, 금화
조개껍데기
성립 이전
보노만[1]
덴키라[2]
멸망 이후
영국령 골드코스트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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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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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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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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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토고|

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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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1. 개요
2. 역사
2.1. 건국
2.2. 독립
2.3. 전성기
3. 매체에서 등장



1. 개요[편집]


아샨티 제국은 현재 가나에서 1670년부터 1901년까지 지속된 아칸족들의 국가였으며 가나의 대부분과 코트디부아르와 토고를 지배할 정도로 강한 아프리카의 제국이였다.

제국군사력, , 건축, 정교한 계층 및 문화로 인해 아샨티 제국은 광범위하게 연구되어 왔으며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토착 문화보다 더 많은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다.


2. 역사[편집]







2.1. 건국[편집]


파일:아샨티건국.jpg

아샨티족은 원래 최고 추장인 오만헤네가 이끄는 씨족을 중심으로 했다. 그 중 한 씨족이었던 오요코는 아샨티의 아열대 숲 지역에 정착하여 쿠마시에 수도를 설립했다.

아샨티는 다른 아칸족이었던 덴키라의 지류가 되었지만 17세기 중반에 오티 아켄텐 추장 휘하의 오요코는 아샨티 일족을 덴키라에 대항하는 느슨한 연합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아샨티 제국의 문화유산으로 가장 유명한 황금 의자의 도입은 오세이 투투 하에서 중앙 집중화의 수단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덴키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 직전에 각 아샨티 정착촌의 모든 씨족 수장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고. 회의 도중 황금 의자는 아샨티헤네 오세이 투어 1세의 수석 사제(또는 현자 고문)였던 오콤포 아노키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에서 오세이 투우 1세의 무릎으로 내려갔다. 오콤포 아노키에는 의자가 새로운 아샨티 연합의 상징이라고 선언했고, 의자와 오세이 투투에게 아산테헤네로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새로 선언된 아샨티 연합은 그 후 덴키라와 전쟁을 벌이고 패배시켰으며 황금 의자는 아샨티 사람들의 정신 또는 영혼인 선섬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아샨티에게 신성하게 남아 있다.


2.2. 독립[편집]


파일:첫얌축제.jpg

1670년대, 오요코 일족의 수장이었던 오세이 코피 투투 1세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아칸족의 급속한 통합을 시작했다. 오세이 코푸 투투 1세 왕과 그의 수석 고문인 오콤포 콰메 프림퐁 아노키예는 아샨티 왕국을 장악한 상호 압제자인 덴키라에 맞서 영향력 있는 아샨티 도시 국가의 연합을 이끌었다.

아샨티 제국은 페야즈 전투에서 피지배국 덴키라를 완전히 물리쳤고, 1701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무기의 강경한 힘과 노하우 외교를 통해, 그 듀오는 다른 아샨티 도시 국가의 지도자들이 아샨티 수도인 쿠마시에 대한 충성과 충성을 선언하도록 유도했다.

처음부터, 오세이 투투 왕과 아노키에 신부는 팽창주의자와 제국주의적인 지방 외교 정책을 따랐다. 민속에 따르면, 오콤포 아노키는 아고나-아크로폰소를 방문한 것으로 여겨진다.


2.3. 전성기[편집]


파일:코피투투1세.jpg

아칸 주의 느슨한 연합의 강점을 깨달은 오세이 투투는 주변 아칸 그룹의 중앙 집중화를 강화하고 중앙 정부 내에서 사법 제도의 권한을 확장했다. 그렇게 이 느슨한 작은 도시 국가 연합은 왕국으로 성장했고 결국 국경을 확장하려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새로 정복된 지역은 제국에 합류하거나 종속국이 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오세이 투투의 후계자인 오포쿠 웨어 1세는 가나 영토의 대부분을 정복하며 국경을 확장했다.

한편 17세기 중반에 다양한 유럽 세력들이 금 무역에 진출했고, 대표적인 것이 포르투갈이였다. 그렇게 하여 건설된 것이 포르투갈령 골드코스트. 한편 포르투갈이 쇠망하자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를, 스웨덴 제국과 덴마크-노르웨이는 각각 스웨덴령 골드코스트와 덴마크령 골드코스트를 세웠다. 또한 17세기에 들어서 금 무역과 함께 대서양 노예 무역이 이루어졌다.


2.4. 무역의 중심지[편집]


파일:가나지도였는디그뭐였다라.jpg
그렇게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골드 코스트는 유럽 밖에서 유럽 군사 건축의 가장 높은 집중도가 되었다. 때때로 아칸족들은 또한 유럽인들이 지역 정치 당국과 상업적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에 빠졌다.

종종 복잡한 이러한 동맹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을 입대하거나 설득하여 라이벌 유럽 항구와 아프리카 동맹국을 공격하거나, 반대로 유럽인을 국가 간 전쟁에서 용병으로 모집하거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외교관으로 모집하려는 다양한 아프리카 강대국을 포함했다.

요새는 건설되고, 버려지고, 공격되고, 점령되고, 팔리고, 교환되었고, 많은 장소들이 유럽 국가들과 경쟁함으로써 요새화된 위치를 위해 한 번에 선택되었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18세기의 대부분을 운영했다. 1750년에 설립된 '상인들의 영국 아프리카 회사'는 이러한 유형의 여러 초기 조직의 후계자였다.

이 기업들은 기업들이 무역 활동을 추구하고 다양한 수준의 정부 후원으로 각각의 관할권을 방어함에 따라 새로운 시설을 건설하고 유인했다. 스웨덴과 프로이센의 단명한 모험이 있었다.

덴마크인들은 골드 코스트에서 철수한 1850년까지 머물렀다. 영국은 19세기의 마지막 분기까지 모든 네덜란드 해안 요새를 소유했고, 따라서 그들을 골드 코스트에서 지배적인 유럽 세력으로 만들었다.

17세기 후반, 골드 코스트의 정치 내의 사회적 변화는 전쟁의 변화로 이어졌고, 금 수출 및 노예 수입 경제에서 주요 지역 노예 수출 경제로의 전환으로 이어졌다.

파일:가나무억지두.jpg

일부 학자들은 골드 코스트의 통치자들이 수출 시장을 위한 노예를 획득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확장 전쟁에 참여했다는 전제에 도전했다. 예를 들어, 아샨티 제국은 주로 제국의 통제 하에 있던 영토를 진정시킨 후 하위 왕국으로부터의 공물 지급을 요구하고, 무역로, 특히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대한 접근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이다.

골드 코스트에 대한 노예 공급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의 손에 있었다. 노예 무역에 종사하는 다양한 아칸 족의 왕과 같은 대부분의 통치자들과 개별 지역 상인들도 노예 무역에 종사했다. 상당수의 노예들도 그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데려와 중개인에게 팔렸다.

3. 매체에서 등장[편집]


게임 도미네이션즈에서 아샨티 왕국의 보물인 아샨티 쿠두지가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아샨티 쿠두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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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칸족의 하위 집단으로 여겨지는 아브론(브롱)족이 세운 국가로 후에 아샨티 제국으로 흡수되었으며 현재 가나의 보노 주, 보노 동부 주, 아하포 주 지역이다.[2] 아샨티 및 다른 이웃 아칸족 국가들을 지배하던 국가로 페이야스 전투에서 아샨티에게 패배한 뒤 아샨티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