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마엘 구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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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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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이후
1. 개요
2. 생애
3. 만행
4. 평가
5. 기타

Abimael Guzman / アビマエル・グスマン



1. 개요[편집]


페루의 마오주의 군벌 빛나는 길의 창시자이자 지도자.


2. 생애[편집]


마누엘 루벤 아비마엘 구스만은 1934년 12월 3일에 페루 지방의 항구 도시 몰렌도에서, 부유한 상인의 사생아로 태아났다. 구스만은 철학 및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 제목은 칸트의 공간 이론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였다. 1962 년 구스만은 화망가 산 크리스토발 대학교 교장에 의해 철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는 1965년 당시 부인인 오거스타 라토레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처음 방문했다. 구스만은 1970년대 중반에 학교를 떠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구스만은 곤살로 동지라는 이름을 채택하고 마오주의 모델, 농민 주도의 혁명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을 이어간 "공산주의의 여섯 번째의 이론가"로 선언했다. 그의 정치적 선언에서 제국주의가 궁극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실패하며 향후 50~100년 안에 폐허로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스만은 이 비판을 미국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소련 제국주의에도 적용 했는데, 그는 "사회제국주의"라고 불렀다.[1]

아비마엘 구스만을 지지하던 그룹은 페루 공산당 내에서 수 차례의 정치적 투쟁 끝에 여러 분파들과 결별한 후 빛나는 길을 설립했으며 수도 라마가 아닌, 시골 및 농촌지역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의료봉사와 야학활동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고 주민들을 포섭해나갔다. 공산주의의 성평등이념에 따라 여성 지휘관 비율이 40-50%인 것도 큰 특징이었다.

1980년 그가 만든 빛나는 길은 Chuschi 마을에서 투표함을 불태움으로써 페루 정부에 대항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한 때 아비마엘 구스만의 빛나는 길은 수도 라마를 포함한 페루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1992년 후지모리 정부의 테러방지국(DIRCOTE)의 감사로 인해 구스만의 은신처가 발각되어[2] 정부군에 의해 체포된 후로 세력이 매우 줄어들었다. 그 후 구스만은 1992년 군법 재판을 받고 1993년 평화 선언을 하면서 빛나는 길 조직의 와해를 가속화시켰다. 2004년의 재심 이후, 2005년의 공판에서 테러 및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리마 폭탄 테러로 인한 2018년의 추가 재판에서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21년 9월 11일에 리마항 칼라오 해군기지 최고보안감옥 내에서 사망하였다. #

3. 만행[편집]


빛나는 길은 군대와 경찰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좌파 조직, 자신들이 조직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 농민을 대상으로 폭력을 자행했다. 다만 상당수가 후지모리 정부의 날조이다.

후지모리 정부의 장성과 성직자로 이루어진 '평화와 화해 위원회'는 빛나는 길이 1983년에 루카나마르카 고지대 마을에서 69명을 고문 및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허나 루카나마르카 사태는 루카나마르카 민병대가 선제적으로 빛나는 길 비무장요원을 고문살해한 것으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이다. 그러나, 구스만과 빛나는 길은 좌익 언론인 자코빈 지조차 지적하듯 "루카나마르카(Lucanamarca) 마을에서 원주민들이 샤이닝 패스(Shining Path) 칼럼 리더를 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구스만의 반군은 피의 복수를 가했습니다. 1983년 4월, 빛나는 길 게릴라 열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자, 여자, 어린이를 집에서 끌어내고 메인 광장의 땅에 강제로 내몰았습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머리나 가슴에 한 발의 총알을 맞았습니다. 불운한 사람들은 마체테로 잘려 죽거나 끓는 물에 흠뻑 젖었습니다. 반군은 생존자들을 산 채로 불태우려고 했지만 보초병이 다가오는 군대의 진격에 대해 경고하자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현장을 떠났고 69명의 농민(그 중 17명의 어린이와 1명의 6개월 된 아기)이 죽거나 죽어갔습니다" 기사
파일:250px-La_Masacre_de_Lucanamarca.png


가디언지[3] 뉴욕타임즈 등 여러 진보 성향의 해외 언론들 역시 구스만의 만행에 대해 보도하였다.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언론 레프트 보이스도 후지모리 독재정권의 발표를 인용하여 "공식 추산에 따르면 전쟁 중 최대 70,000명이 사망했습니다. 대략 절반은 국가군에, 절반은 게릴라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빛나는길의 유령은 우익 정부와 정치인에게 매우 유용했습니다. 억압을 정당화하고 사회 운동을 범죄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들은 테러리즘이라는 비난을 사용하여 좌파 대안, 특히 착취와 억압에 기반을 둔 현재의 경제 및 정치 시스템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대안을 훼손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기사

다만 저 자코빈의 기사마저 그 출처가 페루 진실과 화해위원회에 기반하고 있기에 믿을 바는 절대로 못된다.

막상 영국의 우익성향 언론인 디스패치마저도 대다수의 살육 및 폭력행위가 정부군에 의한 것이었고 빛나는길은 오히려 농민과 여성의 해방에 기여했다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적 있다.

성소수자와 성매매 여성을 타락했다며 죽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 자체는 페루의 우익독재자 후지모리 정권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4. 평가[편집]


한 때 페루의 절반 가량을 점령한 혁명군의 지도자였기에 페루의 원주민과 농민공동체, 빈민에게 큰 지지를 받았으나 도시민[4], 재벌과 성직자, 지주들에게는 딱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해외 마오주의자들은 구스만의 이론적 공헌을 매우 고평가한다.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은 구스만이 죽자 트위터에 "우리 동포들의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테러의 주모자 아비마엘 구즈만이 사망했다. 테러를 규탄하는 우리의 입장은 확고하고 확고하다."라고 올렸다.[5]

5. 기타[편집]


구스만은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영향인지 [6] 종교에 그다지 적대적인 편은 아니었다.

일부 카스티요 정부 관료들이 빛나는 길에 동정적이거나, 동조했던 과거가 있어 페루에서 논란이 됐다. 기사 그나마 카스티요 본인이 빛나는 길에 맞서 싸운 과거가 있는지라 논란이 희석된 편. 하지만 빛나는 길 음악의 댓글들을 보면 "자유페루의 정치인들은 이곳 출신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 "카스티요가 이기면 학교가 이렇게 될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쟁. 인민전쟁과 곤잘로 동지 만세", "곤잘로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좋았다면 왜 아이디어가 아니라 폭력으로 설득을 하였나요" 등의 댓글 싸움이 펼쳐진다(..) # 댓글에서 이런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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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당시 마오쩌둥의 입장이기도 했다.[2] 한 기사에 따르면, 그의 은신처 내부에서 배출된 다량의 쓰레기 내부에 포함된 구스만이 앓던 병인 건선 치료제 및 몇몇 쪽지들을 발견한 것이 체포의 주된 계기였다고 한다.[3] 빛나는 길의 주요 희생자는 그것이 방어한다고 주장한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잔인하고 여성이나 어린이를 거르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28,000명 이상의 페루인을 살해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빈곤한 농촌 지역 사회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기사[4] Kenney, Charles D. 2004. Fujimori's Coup and the Breakdown of Democracy in Latin America. Notre Dame, Indiana: University of Notre Dame.를 참고하면 약 15-17%의 도시민만이 동조적이었다.[5] 카스티요 역시 좌익 성향이긴 하나 노선이 마르크스-레닌주의빛나는 길마오주의와 다르고, 카스티요 본인도 빛나는 길과 맞서 싸운 적이 있다. 더군다나 카스티요는 집권 이후 우경화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6] 마오쩌둥은 종교인을 배척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군중을 찾아 가자마자 바로 ‘우리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믿는 신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종교를 반대하고 선전을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