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키메데 마르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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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916년 출생/ 가톨릭수도사제/살레시오회 수도자/ 이탈리아 가톨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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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르키메데 마르텔리 신부님 약력

¤ 1916. 11. 23. 북부 이탈리아 만또바에서 출생
¤ 1930 14세에 살레시오수도회에 지원
¤ 1932 2년간 수련 후에 첫 서원
¤ 1933 선교사로 지원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신학대학 입학
¤ 1942. 9. 18. 사제서품
¤ 1944 만주 대련에서 보좌신부로 선교활동
¤ 1948 일본 오이다깽 나가즈 보스꼬중학교 교감
¤ 1949 일본 동경 실업중학교 교장

¤ 1954. 6. 25. 사변으로 황폐화된 한국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 한국 입국
¤ 1955. 4. 13. 학교법인 사레지오회 초대 이사장
¤ 1956. 4. 1. 사레지오 중학교 초대교장
¤ 1959. 4. 1. 사레지오 고등학교 초대교장
¤ 1961.11. 1. 한국 사레지오수도회 초대 지부장
¤ 1965. 8. 2. 사레지오 중,고등학교 제3대 교장
¤ 1973. 3. 1. 중,고 분리로 사레지오 고등학교 교장
¤ 1976.10. 9. 광주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 받음
10.23. 치안국장으로부터 청소년선도 유공자로서 감사장을 받음
¤ 1981. 사레지오(살레시오; salesio)고등학교 교장 퇴임 후, 불우아동 및 정착촌 후원사업
¤ 1984. 8. 6. 서울 성모병원에서 선종(담양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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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 마르텔리 신부님 - 마(馬)신부님(1916.11.23.~1984. 8. 6.)

우리 한국 살레시안들의 정신적 지주셨던 마신부님!
비록 지금은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셔서 이국 한국에서 살레시오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셨습니다.
1950년대 중반, 이 땅에 이탈리아 출신의 한 가톨릭 사제가 발을 내딛고. 그분 이
름은 아르키메데 마르텔리(Archimede Martelli, SDB). 우리 한국인들은 그분을 마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마신부님께서는 1916년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의 코멧사기오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돈보스코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살레시오수도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이후 선교사가 되어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 마치신 후 1942년도에 사제로 서품된 마 신부님은 1944년에 중국으로 파견되어 따이렌과 만주 등지를 거쳐, 한국에서 특히 광주광역시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사목하시다가 지금은 전남 담양 땅에 잠드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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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의 무등산처럼 그런 덕스러운 체구, 80kg의 몸무게, 168cm의 신장, 유난히 검은 눈썹, 움푹 팬 깊고 푸른 눈, 두툼하고 길게 쳐진 매부리코, 솥뚜껑처럼 탐스러운 손, 널 짝만큼 큰 구두, 헐렁한 바지, 이런 것들이 마신부님의 외모였습니다. 그리고 약간 서툴면서 목쉰 듯한 한국말, 만사를 포용하는 호탕한 웃음소리, 능숙한 운전, 거기에다 성직자로서 갖춘 정직성, 솔직하며 꾸밀 줄 모르는 인간적 모습, 활동적이고 섬세하며 항상 분망함 속에서도 시간을 요리할 줄 아는 덕인이 바로 마신부님 이었습니다. 1954년 한국 땅에 발 디딘 이래 30년을 한국인과 함께 살며 성직자로서, 교육자로서, 또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후원자로서 생을 불태운 향년 68세의 고희(古稀)를 앞둔 노스승 마신부님은 일생동안 남에게 아낌없이 주는 생활로 일관해 오시다가, 1982년부터 앓아오시던 골수암이 폐렴과 합병증세를 일으켜 끈질긴 투병을 하시던 중 1984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8월6일 밤 9시 50분. 서울 가톨릭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69세 나이로 선종(善終)하셨습니다.

마신부님은 평생을 교육자로서 돈 보스코의 정신을 한국 땅에 심어 오셨고 불우한 이웃들에게 한없는 자선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그의 유덕은 살레시오(옛 교명, 사레지오) 역사와 더불어 길이 간직될 것입니다.


1. 시인 ‘빌리지우스’의 고향 ‘만토바’에서 출생

마신부님의 태어난 고향은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시인 ‘빌리지우스’의 고향으로 유명해진 북부 이탈리아 ‘만토바’이며, 1916년 11월 23일 4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부농(富農)은 아니었지만 농장을 가꾸고 가축을 길러 생계를 유지해 왔으나 비교적 행복한 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족 중 ‘막시밀리안’이라고 부르는 누나 한 분이 계셨는데 가톨릭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큰 명성을 올렸으며, 훗날 수녀가 되기 위하여 수련장을 찾아갔으나 안질 때문에 입소하지 못하고 크게 실망하여 고민했다고 합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성지인 루르드에 가서 성모님께 “내 눈을 고쳐달라, 아니면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애원했다고 합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투병하였으나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하고 2개월 후에 선종하고 말았습니다.(1938) 그 후 만토바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성녀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며 누님에 대한 추모의 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마신부님 가문의 자랑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지 4개월 후 마신부님의 어머니는 병고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셨다가 전사했다고 합니다.


2. 선교사로 출발, 1942년 일본 ‘도쿄’에서 사제 서품

고향 ‘만토바’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5학년이 되던 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도시로 유명한 ‘베로나’의 살레시오기숙학교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2학년까지 공부하였습니다. 그 후 중학교 3, 4학년 때 토리노시에 있는 살레시오회에 지원하였는데 그 해가 1930년, 그러니까 14세 때의 일이었다. 2년간의 수련기를 마치고 첫 서원을 한 후 선교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일본에 건너온 신부님은 미야자키 살레시오 예비대학에서 기초과정을 마치고 도쿄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1942년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3. 마신부에게 큰 영향을 끼친 ‘가보리 신부’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마신부님은 소규모의 살레시오 인쇄소에서 일하는 안토니오 가보리신부와 함께 일하였습니다. 그는 인쇄소에서 이탈리아의 후원자들에게 ‘먼 곳의 메아리’라 불리는 뉴스레터를 인쇄하여 보내는 일을 하였으며(약1500부), 신문기사 쓰기, 편집, 인쇄, 배부, 등 온갖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여기서 들어온 수입은 몬시뇰 치맛띠 신부와 가보리 신부에 의해 새로 설립되고, 미야자키 자선여성단체에 의해 운영되는 고아원과 양로원에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자선여성단체’에서 돌보아주던 고아와 노인을 돕는 자선사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 심각해진 것은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대한 감시가 뒤따랐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은인들의 후원금(성금)도 받을 수 없는 당국의 조치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일하던 가보리 신부는 실망하지 말고 일하자고 용기를 주었고, 미야자키 ‘자선여성단체’회원(훗날 가보리 신부는 이들과 함께 ‘까리따스 수녀회’를 창설한다)들과 함께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땅을 파고, 곡식을 심고, 송아지를 기르며 고아원과 양로원을 계속 보살피게 되었습니다. 마신부는 이러한 가보리신부의 헌신적인 삶을 보고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1942년 사제로 서품된 마신부는, 도쿄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공부해 보라는 관구장 치맛띠 신부의 청을 정중히 거절하면서 계속해서 가보리 신부를 돕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청이 받아드려져 미야자키로 돌아와 고아원과 양로원 가족들을 보살피며 생활하게 되지만, 1944년 다시 관구장 신부의 부름을 받고 만주의 항구도시인 대련으로 들어가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4. 1944년 관구장신부로부터 만주 선교의 사명을 받다

그는 주저 없이 순명하고 짐을 꾸려 1944년 8월 6일 일본 ‘모지항’에서 부산행 연락선 ‘아사이 마루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선박편으로 한국에 도착한 마신부는 철도편으로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 평양을 걸쳐 만주까지 가게 되는데, 그가 한국을 통과하면서 10년 후에는 지금 여행 중인 이 나라에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 여생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대련은 매우 번창한 항구 도시였는데, 인구는 70여만을 돌파하고 있었고, 그중 약 40만이 중국인, 20만이 일본인 그리고 나머지는 주로 백러시아인(약 7만명)과 독일인, 한국인(약 7천명)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대련은 몹시 이색적인 도시로써 가로수가 끝없이 늘어서 있고 질서 정연한 넓은 시가지와 현대적인 건물, 그리고 대륙의 특유한 기질이 항구도시에 뒤섞여 강한 매력을 뿜어내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백러시아인들은 거의가 공산혁명 때 망명한 러시아 귀족들이었고, 독일인들은 일본과 동맹국이라는 위치에서 매우 우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던 나라는 일본이었으나 그 누구도 억압과 착취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곳에서 생활하려면 제일 큰 역할을 해주는 것이 언어였습니다.


5. 레이드 죠스끼 백작부인에게서 영어를, 대부 신부에게 중국어를 배움

여기에서 마신부는 ‘레이드 죠스끼’라는 러시아 백작부인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는데 그 부인은 러시아 왕가 집안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유창하게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를 말할 수 있었으며 그곳의 5개국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능한 부인이었고 고상한 의상과 품위 있는 말씨로 항상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중국어는 현지의 대부 신부(훗날 마신부가 주교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신부)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밤에는 이 두 언어를 빨리 습득하기 위해 소교구의 영국학생들에게 영어를 사용하면서 중국어를 가르쳤습니다. 마신부는 전쟁전후에도 대련에서 3년을 더 보냈는데, 그 때 잊을 수 없는 것은 그곳 수녀원에서 한 한국인 수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곳 수녀원에는 일본인 수녀와 독일인 수녀 그리고 한국인 수녀 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의 친척이 되는 분으로 본명은 마리아 수녀였습니다. 마리아 수녀는 그곳에서 세탁 일과 부엌 일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온갖 굿은 일을 도맡아 하는 어머니 같은 수녀였습니다.


6. 소련군의 대련 점령과 마신부의 일본 귀환

마신부가 만주 대련에서 3년 간 보좌신부로 일하고 있을 당시 중국의 모택동은 군대를 거느리고 산악지대로 들어가 천하를 장악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소련군은 대련을 점령하여 시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니다. 도덕의식이 극도로 희박해진 소련 군인들은 수녀원까지 박차고 들어가 수녀원의 재산과 교회를 빼앗고 외국 수녀들과 신부들을 추방했습니다. 그때 마신부는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간신히 피신하고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 후 만주에서 선교활동이 거의 불가능하여 1948년 마신부는 할 수 없이 일본으로 되돌아옵니다.


7. 현(玄)대주교의 살레시오회 초청과 마신부의 내한(來韓)

일본에 돌아온 마신부는 다시 선교활동에 전력하면서 청소년 교육과 고아원 사업에 몰두하다가 나가즈 보스코 중학교 교감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동경 실업중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6ㆍ25사변이 발발하여 가는 곳마다 전흔이 얼룩진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에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미국인 신부 ‘카폰’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미국 군종신부단에서는 카폰 신부가 전사한 한국에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 사업을 당시 광주교구를 맡고 있던 미국인 주교 하롤드 헨리(Harold W.Henry-현 주교) 교구장에게 일임하기로 했습니다. 현 주교는 이 정신에 적극 찬동하고 적절한 사업을 물색하던 중 한국에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 사업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업이라는 점에 의견을 모았고, 일본에 진출해 있던 살레시오회를 초청, 한국에 돈 보스코 정신에 따라 청소년을 교육하는 학교를 세우기로 했는데 마침 패기와 열정에 넘친 38세의 마신부가 당시 일본
관구장 탓시나리 신부의 임명을 받고 1954년 11월에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마신부는 1954년 광주시 중흥동에 부지 2만5천평을 매입, 곧 정지작업을 완료하고 김창섭(현 아시아 극장주인) 씨를 선정하여 학교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CAC사령관이었던 송호림 사령관이 군 장비를 지원해 주었고, 한국인들의 따뜻한 배려로 성금이 모금되고 살레시오회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우선 12칸 교실을 신축, 1956년부터 중학교 문을 열었습니다.

초대 교장으로 마신부가 취임하고, 1958년에는 고등학교를 병설하여 중·고교의 초대 교장으로서 살레시오 중· 고등학교를 단시일 내에 사학 명문으로 만들었고, 호남교육의 전당으로 자리잡는 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신부는 한국 살레시오회의 씨앗을 뿌리고 회원들을 모집 양성하여 한국 살레시오회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할 수 .는 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8. 은퇴 그리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마지막 삶

마신부는 퇴임 후에도 교장 재직 시부터 해오던 전남.북지구 고아원과 미감아 정착촌 29개 시설을 찾아다니며, 1년에 2,15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학용품을 대어주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거주하는 시설에 TV와 회관 건립 및 복지시설을 갖추어줌으로써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은 그들에게 삶의 희망과 기쁨을 맛보며 살수있도록 각별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암과 투병하며 결국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으며, 그들을 위하여 은인들의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수없이 발송했습니다. 정착촌 어린이들이 마신부의 영전에 바친 마지막 편지(*아래, 정착촌 어린이들 편지)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아이들 또한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장례는 당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가 주례하였습니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그의 제자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전남도지사, 광주시장을 비롯하여 전남 광주지역의 성직자, 교직자, 신자들과 그를 알고 애도하는 광주시민들이 수없이 모여들었습니다. 장례식은 그가 제자들을 위해 만든 아름다운 살레시오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치러졌는데, 자리가 부족하여 주변 운동장까지 조문객으로 가득 찼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대형 영정을 앞세운 장례행렬은 광주 시민들의 애도 속에 광주의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돌았으며, 그 이후에 스스로 택하신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일생과 가장 일치하는 말은 “나는 내가 택한 길을 나의 인생에서 결코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나는 마신부님이 화를 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는 말이 장례식에 참석한 대부분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그는 민중 속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중과 함께 우는 법과 민중과 함께 웃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어려웠던 시절의 침울한 사회에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낙천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안돼!”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맞이했고 모든 사람을 편하게 느끼도록 처신하였습니다. 그는 교장이었을 때도 체면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화장실을 청소했습니다. 소변기 속에 학생들이 버린 휴지조각을 손으로 집어내고, 1960년대 수세식 화장실이 거의 없었던 시절에 학생들에게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막히고 또 막히는 대변기를 뚫고 또 뚫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불쾌감이나 실망을 보이지 않았고 인내롭게 기다렸습니다.


9. 한국 생활 30년, 인심 좋은 한국인에 감사

마신부는 1976년 회갑을 맞이했을 때 당시 전남도지사 전석홍 씨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을 만큼 한국인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마신부는 살아 생전에 늘 한국인들에게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이면서도 “나는 꼭 한국 땅에서 살다가 한국 땅에 묻히겠다.”고 말한 점을 보아도 한국에 얼마나 애착을 느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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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사도이신 당신>

◆정착촌 어린이들의 마지막 편지 ◆
일평생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우리를 위해 애쓰신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많은 공적과 사랑을 베푸셨기에 비록 작은 정성이지만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께서는 우리 모든 신자들이 염원하는 아름다운 세계로 가셨지만 인간적인 이별이 못내 아쉬워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고향을 등지고 이국 땅에 와서 어언 30년 이상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봉사하신 당신을 바라볼 때 그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가슴에 와 닿음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이 이 땅에서 30년 간이라는 긴 세월을 사랑의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자였고, 어려운 이들의 위안과 위로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정착촌의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포부를 심어 주셨습니다. 또 당신은 청소년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여름에는 많은 학생들과 함께 기도하며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에게 무언의 부탁을 주셨습니다. 항상 남을 도와라, 사랑하라 그리고 희생하라는 당신의 교훈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당신은 이 밖에도 우리에게 언제나 푸짐한 선물과 사랑을 주셨으며 정착촌의 발전을 위해 몸소 희생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당신이여, 이 세상 사람들과의 이별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계신 곳에 항상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에 항상 당신이 계시니 어찌 이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먼저 가 기다리고 계시면 우리도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 그 날을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당신의 업적을 이 작은 입으로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 조그만 눈에 비친 당신의 업적과 사랑을 어찌 다 담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여, 고이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