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쇼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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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도쿄 4구)
선거제도 개편

제41대
아라이 쇼케이


제41~42대
모리타 겐사쿠[1]

파일:Japan_gov_logo.png 일본국 제38~41대 중의원 의원
아라이 쇼케이
新井将敬 | Arai Shokei


파일:아라이 쇼케이.jpg

출생
1948년 1월 12일
오사카부 오사카시
사망
1998년 2월 19일 (향년 50세)
도쿄도 미나토구
학력
오사카부립 기타노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 / 중퇴)
도쿄대학 (경제학 / 학사)
소속 정당

(1983-1994 / 1997-1998)

(1994-1996)
소속 파벌
정책과학연구소 → 탈당 → 세이와 정책연구회
의원 선수
4 (중)
의원 대수
38, 39, 40, 41
지역구
舊 도쿄 2구 → 도쿄 4구
약력
신일본제철 근무
대장성 관료
사카타 세무서장
대장성 은행국 총무과 과장보좌
와타나베 미치오 대장대신 비서관
중의원 의원 (제38-40대 / 舊 도쿄도 제2구)
신진당 도쿄도 연합회 간사장
중의원 의원 (제41대 / 도쿄도 제4구)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중의원 4선을 지냈다. 재일 조선인 출신(조선적). 증권 스캔들로 중의원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자 도쿄 미나토구호텔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2. 생애[편집]


1948년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경재(朴景在)이다.[2] 역시 아라이(新井)란 성은 통명으로 박(朴)씨들이 박혁거세가 우물 속의 알에서 나왔다는 고사에서 따서 많이들 썼다고 한다. 조선학교 대신에 일본의 중학교, 오사카부립 키타노 고등학교[3]를 졸업했다. 1966년에 조선적에서 일본인으로 귀화하였다. 본래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재수하여 도쿄대학 이과1류[4]에 입학했다. 젊은 시절엔 미시마 유키오카를 마르크스에 심취했다. 정작 졸업은 도쿄대학 경제학부에서 했다. 중간에 전과한 모양이다.

대학 시절 열렬한 운동권이었기에 졸업 후 육체노동자가 되려고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에 들어갔지만 국가를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에 3개월간 주경야독하여 1973년에 대장성에 들어간다. 당시 대장성은 도쿄대 법학부 현역 대학생이 아니면 들어가기 힘들었는데 그는 민간 기업 출신임에도 대장성에 입성했다. 대장성 입성 후 세무 관련 업무를 맡다가 후생성에 파견되었울 때 당시 후생대신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 1923년 ~ 1995년)[5]의 비서를 지냈고 그가 아라이를 총애하여 농수산상으로 옮길 때도 비서로 데리고 갔으며 와타나베가 신임 대장대신(大藏大臣; 기재부 장관)으로 취임하자 비서관이 되었다. 비서관으로 지내면서 증권업계가 원하던 중기국채펀드 등을 도입했고 은행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후 와타나베의 도움으로 1983년 중의원 선거에서 중선거구 舊 도쿄 2구에 출마, 이시하라 신타로와 대결했다.[6] 당시에 아라이의 포스터에 북한 사람이란 표식을 누군가 붙여놓은 '검은 씰 사건(黒シール事件)'이 일어났다. 이시하라는 자기 비서가 알아서 한 거라고 꼬리 자르기를 시전했고 아라이는 낙선했다.[7] 아라이는 이때 좀 더 자신이 확실한 일본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신우익 운동을 펼치던 우익운동가인 노무라 슈스케(野村秋介, 1935-1993)와 친해졌고, 노무라가 이시하라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1986년에 舊 도쿄 2구에 다시 출마하여 처음으로 입성한 후 4선을 역임했다. 아라이의 상관인 사무차관이었던 하토야마 이이치로가 아라이의 초대 후원회장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인 하토야마 유키오[8]는 아라이의 지역구 주민이었는데 정작 홋카이도 제4구로 나가 당선됐다. 당선 이후엔 와타나베 미치오의 파벌인 정책과학연구소(와타나베파)에 소속되었다. 1992년에 자민당 부대표인 가네마루 신이 5억 엔 상당의 불법자금을 받은 도쿄 사가와 규빈 사건(東京佐川急便事件)이 일어나자 가네마루를 맹렬히 비판하고 정치개혁 등을 주장해 젊은 논객으로 인기를 얻는다. 특히 아라이는 일본의 중대선거구제 대신에 소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했는데 소선거구제에 반대하던 이시하라 신타로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수구파라고 공격했다. 이듬해 1993년에 자민당이 쪼개질 때 탈당하여 자유당을 결성한다. 1994년엔 신진당에 들어갔지만 오자와 이치로의 독단적인 당 운영에 반대하여 탈당하고 1996년, 소선거구제 개편 이후 도쿄 4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자민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그 후 자민당에 복당했다. 복당 이후엔 원래 거쳐였던 와타나베파가 그를 거부했기에 가메이 시즈카의 조언에 따라 세이와 정책연구회(미쓰즈카파)에 속했다.

그러던 중 증권 스캔들이 일어나는데 1980년대에 그와 연이 있던 증권사인 닛코 증권(日興証券; 현 SMBC 닛코 증권)의 편의를 봐주고 차명계좌 등을 운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98년 1월 30일에 이날 예산위에서 자신의 정치역정을 묻는 같은 당 자민당의원의 질문에 "16살때까지 주변에서 한국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았으며 선거때에는 벽보에 `조센진'이라는 낙서가 나붙곤 했다"고 답변, 주목을 끌었으며 2월 18일 저녁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생명을 걸고 말하건대 닛코증권에 부당이익 제공을 요구한 사실은 없다고 결백을 거듭 주장했지만 국회증언 등을 통해 "도를 넘는 요구를 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으나 은행측 관계자들은 검찰조사에서 "아라이의원의 요구에 따라 이익을 제공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2월 19일에 중의원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라이는 "여러분은 오늘 제가 말한 것을 잘 새겨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는 말에 거짓은 없으니까."[9]라고 말했고, 다음 날 도쿄도 미나토구의 호텔에서 목 맨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호실 바닥에는 위스키 병이 가득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아내와 가메이 시즈카에게 보내는 유서가 있었다고 한다. 아라이는 가메이 시즈카의 권유로 자민당 복당시 미쓰즈카파에 가입한 것이기도 하고, 가메이 역시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으로 나중엔 자민당을 탈당해 여러 야당에서 활동하였기에 아라이를 호의적으로 바라본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사실상 아라이가 죽을 무렵엔 유일하게 그의 곁에 있어주었다.

아라이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간혹 음모론이 나오기도 한다.[10] 아라이가 자살했을 때 노부모가 생존해있던 상태였는데 "도대체 왜 우리 애만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건가."라고 발언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다.

아라이 의원의 자살 전날 마지막 기자회견을 다룬 MBC 보도

아라이 쇼케이 의원 자살 하루후 상황을 다룬 MBC 보도

아라이 쇼케이 의원 자살 소식을 전달하는 일본 뉴스 보도

그의 사후 아내인 마리코가 지역구 도쿄4구의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검토하였으나 실제로 출마하진 않았다.

아라이 쇼케이의 자살 당시 한국 시사저널에서 귀화 대의사(代議士)[11]의 신화였던 그의 삶과 죽음을 다룬 기사가 있다. 온정주의적 접근을 통해 그를 일본 사회 구조의 희생양으로 바라본 시선의 분석이다. #

한편 한국신문에서는 그의 부당이익공여 혐의가 명확했고 아라이가 대장성 출신이기에 다른 의원들의 부당거래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을것같아 몰아붙인거라는 중립적 시각의 분석도 있다. 한국일보 기사

아라이 쇼케이의 비서였던 오구마 신지(小熊慎司; 1968 ~ )는 2012년에 모두의 당 소속으로 일본 참의원이 되었다가 개혁결집회를 거쳐 현재 입헌민주당 소속 중의원이다. 지역구는 후쿠시마현 제4구.


3. 평가[편집]


개인사로 볼 때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6세까지 조선적이었던 불리한 조건임에도 자민당 소속의 중의원 4선의원을 지냈다. 당시 그와 대립하던 인물들은 오자와 이치로, 이시하라 신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일본 정계의 거물들이다. 일제강점기 때 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소수의 조선인이 있긴 하지만 전후에 중의원을 지낸 한국계 일본인은 그가 유일하다.[12]

아라이 쇼케이는 최소 겉으로는 자신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란 자각은 그리 없던 것으로 보이고, 비록 청년기때는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정계 입문 후에는 전형적인 우익성향 일본인이었다. 도쿄 지검이 수사에 들어가자 자신의 출신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는 설도 있다.[13] 풍문치고는 꽤 일리가 있는데, 단순한 뇌물수수범의 변명이라기엔 한국이나 일본이나 검사들을 동원해서 정적에게 표적수사를 지시해서 누명을 씌워 탄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14].

그의 홈페이지가 아직 유지되고 있는데, 이곳에 남은 생전의 기록 등의 일부를 볼 수 있다.

한신 대지진 등 비상 사태에 대응할 수 없는 일본 평화헌법 9조의 개헌을 논의하는 등, 전형적인 우파 일본인의 태도를 보였다. 특히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략)

あの日、村山さんは、午後からずっと続いている会議をそのままやって、翌日は財界人と食事をしていた、その時もう神戸は火の海となっていたのに、それでも責任を追及されないわけです、何も法を破ったわけ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

그날 무라야마 씨는 오후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 회의를 그대로 하고, 다음날은 기업인과 식사를 하고 그대로 고베는 불바다가 되고 있었는데, 그래도 책임을 추궁받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라는 이유로요. 

しかし本当に政治責任は無いのか、私だったらあの時、非常事態を宣言して、その瞬 間にこう考えたでしょう。あの事態をみて、とうとう来るべきものが来てしまったわけですから、後でそれが非合法だ、独裁だと言われても総理大臣をやめる覚悟で、テレビに向かって一般通行車両の禁止、自衛隊の出動要請をいたします。

그러나 정말 정치 책임은 없는 것인지, 나라면 그 때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그 순간 동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보고, 드디어 올 만한 것이 왔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이 불법이다, 독재라고 말해도 총리를 끝낼 각오로, TV를 향해 일반 통행 차량을 금지하고, 자위대의 출동 요청을 할 것입니다.

(중략)

この戦後五十年、アメリカが一週間で作った憲法を、しかも翻訳の憲法を五十年間、神様のごとく守り続けてきました。五十年も憲法改正が一度も無い国なんて、日本くらいのものです。

전후 50년간 미국이 일주일만에 만든 헌법을, 게다가 번역된 헌법을 오십년 동안 신처럼 지켜 왔습니다. 오십년 동안 헌법 개정이 한 번도 없는 나라 따위 일본 정도일 겁니다. 출처


그러면서도 작은 정부 등의 자유주의적인 견해도 보였다.

自由民主主義と言うが、自由主義と民主主義は相対立する観念でもある。何故ならば、自由主義は、自由という「個人」の「権利」にこだわる価値観であるが、民主主義は、字義通り、民主という「全体」で決したこと(広く「法」と言っても良い)に従う、共同体的価値観だからである。そこには大きな開きがある。その間をうまくつなごうとして、「自由は必然性の認識である」とか、「権利」と「法」の優越関係について哲学者は考えてきたのだ。ただ、自由民主主義と言っても両者は対置されるものではなくて、自由主義の精神がなければ、民主主義は死んでしまう。

자유 민주주의라고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관념이기도하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자유라는 "개인"의 "권리"에 집착하는 가치 인 민주주의는 문자 그대로 민주는 "전체"로 결정한 것을 (널리 "법"이라해도 좋은)에 따르면, 공동체 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큰 차이가있다. 그 사이를 잘 잡자 며 "자유는 필연성의 인식이다"라고, 「권리」와 「법」의 우월 관계 철학자는 생각해온 것이다. 단, 자유 민주주의라고해도 양측은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정신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죽을 것이다. 출처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83 - 1994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94
탈당
자유당
1994
창당
자유개혁연합
1994
합당


1994 - 1996
합당

[[무소속|
무소속
]]

1996 - 1997
오자와 이치로의 독단적 당 운영에 반발해 탈당


1997 - 1998
복당
사망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도쿄 2구


40,393 (8.8%)
낙선 (6위)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0,909 (20.8%)
당선 (2위)
초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6,326 (16.3%)
당선 (3위)
재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2,059 (14.8%)
3선[15]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도쿄 4구

[[무소속|
무소속
]]

78,805 (38.16)
당선 (1위)
4선[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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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이의 자살로 인한 보궐선거 당선[2] 덧붙여서 그의 할아버지는 부산광역시 근방에서 태어났다. 출처 [3] 하시모토 도루, 마쓰시마 미도리, 노노무라 류타로가 이곳 출신. 도쿄카이세이 고등학교가 있다면 오사카엔 기타노 고등학교가 있다고 할 정도로 지역에선 최고의 고등학교이다. 편차치는 무려 76.[4] 공학부와 물리학 등[5] 나카소네 야스히로파로 부총리 등을 지냈다. 정치인 와타나베 요시미의 아버지이다.[6] 같은 자민당이었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던건 당시 일본 중의원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도쿄 2선거구에서 5명 선출했는데 당시 자민당에서 3명의 후보자를 냈다.[7] 참고로 당시 도쿄 3구의 선거결과는 자민당이 1명 당선되었고 야당후보가 4명 당선되었다.[8] 아직 자민당 소속이었을 때다.[9]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서 이미 아라이가 죽음을 결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10] 사건 관련자들 중에 자살자가 많긴 했다.[11] 일본에선 국민의 뜻(議)을 대표(代)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을 대의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2] 중의원의 경우는 일본 패전 이전에는 한국계는 박춘금이 유일했다.[13] 아라이가 차별때문에 일본인이 되고싶었던 반면 반대로 같은 재일교포인 하쿠 신쿤(백진훈)은 아버지의 나라 한국, 어머니의 나라 일본’이라는 홍보 포스터를 내세운 그는 정책 공약으로 평화헌법 수호,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과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넓히는 안보법제 폐지 등을 주장했고 일본에서는 아직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재일한국인이 스스로 한국인임을 숨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재일한국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선거에 나간 것은 어떤 의미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한국인임을 숨기고 이 나라 일본에서 생활하는 재일동포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했으며 왜 자신의 국적을 숨기면서 비굴하게 사느냐고 비난하거나 한국사람이 한국말도 못하느냐고 비웃기도 하는것과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며 하지만 일본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이를 참아내며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재일동포가 고국 동포에게까지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할 때 그들이 느끼는 슬픔이 어떤 것일지 한번 생각해봐 주길 바랬고 영주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마련하려고 노력했었고 외국인이지만 일본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방 참정권을 했었다.[14] 비슷하게도 부라쿠민 출신이라서 정계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노나카 히로무랑은 달리, 아라이 쇼케이 본인은 전형적인 보수 정치인이었지만, 어쨌든 재일 한국인 출신이 자민당 내에서 승승장구하는 걸 꼴보기 싫어한 자민당 내 주류 계파에서 검찰 측에 아라이를 표적수사하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15]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6] 1998.02.09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