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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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코네그리아노 공작
봉아드리안 쟈노 드몽세
Bon-Adrien Jeannot de Moncey
1er Duc de Conegliano


파일:28QRb3D.jpg

출생
1754년 7월 31일
사망
1842년 4월 20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초대 코네그리아노 공작.


2. 생애[편집]


1754년 7월 31일에 출생했다. 1774년에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지원해 군인이 되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평민 출신이었는데다가 열렬한 혁명의 지지자 였기 때문에 출세가도를 달릴 수가 있었다. 그후 1794년 혁명전쟁 당시에는 스페인군과 맞서 싸워 스페인군을 모두 프랑스 본토 밖으로 내몰아 버린 공을 치하받아 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왕당파와 모의를 했다는 혐의를 받아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이후 백수로 지내다가 1800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전역을 일으키자 다시 기용되어 이탈리아 전역에서 큰 공을 세웠다. 1804년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원수로 서임되었다.1812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자 몽세는 반대했고, 아예 원정 자체에 따라가지 않았고 바로 해고 크리를 당한다. 하지만 1814년에 나폴레옹은 다시 몽세를 파리 수비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몽세는 나름 그 역할을 잘 수행하였으나 파리 수비군을 지휘하던 오귀스트 마르몽이 이기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항복하는 바람에 결국 몽세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의 실각이후엔 루이 18세를 지지하여 작위를 받았다. 또 백일천하 당시에는 나폴레옹과 왕당파 어떤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적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미셸 네 원수의 재판 증인출두를 거부한 탓에 루이 18세의 미움을 사서 원수직과 귀족작위를 박탈당했다.[1] 그래도 이듬해 원수직을 다시 회복했고, 3년후에는 작위도 회복했다. 1823년에 군인으로써의 마지막 작전에 참가했는데, "성 루이의 10만 아들들"이라는 군대의 군단장으로써였다. 이름은 나름 멋있었지만, 그 임무는 그다지 명예롭지 못했는데, 바로 스페인에서 폭정을 펼치던 보르본 왕조의 페르난도 7세 에게 대항해 혁명을 일으킨 스페인 자유주의자들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프랑스인들의 상당수가 이 원정에 반대했고, 나폴레옹의 향기가 남아있던 군대의 사기도 시원찮았지만, 그는 과거 이베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한 게릴라전에서 명성을 떨친 이 미나 장군을 상대로 카탈루냐에서 항복을 받아냈다.

군에서 물러난 이후 1833년부터 사망한 1842년까지는 앵발리드 관장직을 지냈다. 1840년 12월, 세인트 헬레나 섬에 묻혔던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다시 가져오는 이장식이 진행된다는 말을 듣자 그는 생애 마지막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미 85세의 고령이었던 탓에 몸상태가 정말 오늘내일하는 수준이었는데, 몽세는 의사들에게 "황제폐하를 영접해야하니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그 의지 덕분에 이장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2] 그는 나폴레옹의 검에 입을 맞추며 "마침내 황제께서 돌아오셨다, 이제 집에 가서 죽자."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장식에 참석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842년 4월 20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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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과거의 전우를 반역죄인으로 고발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 양심이었다.[2] 다만 너무 쇠약해져서 나폴레옹의 관이 앵발리드 내부에 들어오자 기립하는 몇 분을 못 버티고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