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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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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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9DwpindtNB5SI7iyVyb5FP.jpg

본명
심대섭(沈大燮)
직업
작가, 신문기자

해풍(海風)[1]·백랑(白浪)·금강생(金剛生)·삼준·삼보
본관
청송 심씨[2][3]
출생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現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177-1번지[4])[5]
사망
1936년 9월 16일[6] (향년 35세)
경기도 경성부 연건정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종교
개신교
묘소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 필경사 경내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7]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그날이 오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8B%AC%ED%9B%88.jpg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배우, 영화감독, 각본가.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現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176번지)에서 아버지 심상정(沈相涏, 1871. 9. 19 ~ 1930. 3. 9)과 어머니 해평 윤씨(1870. 6. 26 ~ 1956. 6. 20)[8]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노량진 흑석리(現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6-10번지로 이주했다.

1915년 교동공립보통학교(5회)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었고,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약 8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정리하고 출옥했다.

풀려나고 퇴학당했다.[9] 3.1 운동 가담으로 체포된 직후인 3월 17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관련 학생들의 평소 성품과 행실을 조사한 '학생성행조사서'에서는 심훈에 대해 '영리하나 경솔하여 모든 명령 등을 확실하게 실행하지 않는다. 게으른 편이어서 결석·지각 등이 많고 평소부터 훈계를 받아 온 자이다.'라고 설명했다.#

출옥 후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은 그는 곧 중화민국 절강성 항현(杭縣)[10]로 건너가 지강대학(芝江大學)[11] 극문학부에서 공부하였으나, 복역 시절의 후유증으로 결국 중퇴했다. 1923년에 귀국하여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를 만들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와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5년 5월에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퇴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떠난 후에도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소설인 《탈회》를 동아일보에 1926년 11월부터 연재했다. 《탈회》를 계기로 영화계에 진출해 이듬해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12]에 배우로 출연했으며, 《먼동이 틀 때》의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 및 감독을 맡았다.(필름이 남아 있지 않음) 1930년 조선일보에 중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연재했는데, 일본 경찰의 검열에 걸려 완성되지 못하고 집필이 중단되어 미완성 소설로 남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모델이 박헌영주세죽이라고 한다.

1927년 12월 2일에, 조선일보에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기고한다.

심훈은 박헌영과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이고 친구 사이였는데, 박헌영이 신의주 사건으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되고 1927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매우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에 분노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 박군은 박헌영을 가리킨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13]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14]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15]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아 박군아 XX(헌영)아!
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갈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한)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영화 평론가로도 활약했는데 메트로폴리스를 극장에서 감상하고 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 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2년 어머니 해평 윤씨가 거주하던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16]로 내려가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1935년 장편 소설 《상록수》를 집필했는데, 이 소설이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았다. 그는 이 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탄압 등 여러 사정으로 끝내 만들지 못했으며,[17] 《상록수》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시는 <오오 조선의 남아여>인데, 1936 베를린 올림픽 때 동갑내기인 손기정, 남승룡마라톤 선수가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는 조선중앙일보의 호외 소식을 길거리에서 주워 들고 그 자리에서 감격하여 신문지 뒷면에 즉석해서 시를 지었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伯林마라톤에 우승한 孫, 南 양군에게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 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精靈)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그 뒤 그는 《상록수》의 출간 작업을 위해 당진군에서 경성부로 상경해 한동안 한성도서 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부 연건정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급히 옮겨져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고 결국 1936년 9월 16일 아침 8시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심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으면서 이 시를 낭송하였고, 관을 안으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서봉마을에 안장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 용인시 일대가 개발되자 안성시 삼죽면 마전리 산19-7번지로 이장되었다. 이어 2007년 12월 5일 셋째 아들 심재호(沈載昊, 1936 ~ )에 의해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 필경사(筆耕舍) 경내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기타[편집]


  • 주요 저서로 《상록수》가 유명하다. 해방 후 1949년 유고집으로 《그 날이 오면》이라는 시집이 발간되었다. 시, 소설 두 대표작 모두가 교과서에 실린 인물. 그 이외에 이렇게 시와 소설 둘 모두 교과서에 실은 사람은 심훈을 제외하면 이상이 유일하다. 거기에다가 심훈이 3.1 운동으로 복역하던 당시 어머니에게 썼던 편지가 중학교 1학년 국정 국어교과서에 실린적도 있으니, 교과서와는 인연이 깊은 작가이다. 민족운동에도 공헌이 있고, 동시대의 거의 모든 작가들이 자발적, 혹은 타의에 의해 일제 가담에 연루되기 시작한 시기 이전에 사망하여, 교과서에 올리기에 부담이 없는 인물이다. 다만 절친 박헌영 때문에,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적어도 지금처럼 기억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안창호가 아들처럼 생각한 유상규의 호가 태허임을 유상규 차남이 알게 된 것도, 그 집을 방문한 심훈이 쓴 메모 덕이라고 한다.

  • 자신은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되었을 정도로 나라에서 인정받은 독립유공자이지만, 그의 일가에는 유독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많았다. 특히 그의 두 형인 심우섭(沈友燮, 1890. 2. 11 ~ 1948. 3. 6)·심명섭(沈明燮, 1898. 9. 1 ~ ?)[18]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이고, 첫 아내 전주 이씨 이해영(李海映, 1900 ~ ?)의 남동생은 마찬가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청풍군 이해승이었다. 좀 먼 친척(17촌)이긴 하지만 배우 심영 또한 친일파로 유명하다.

  • 한편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은 심훈의 장조카인 심재영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아니라는 가설도 존재하여 문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심재영은 경성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농민운동에 종사했으며 1980년에는 시를 낸 적이 있다. 심훈은 심재영의 집에서 잠시 집필활동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심재영의 아들이 고택에서 거주하며 관리한다고 한다.

  • 글 쓰는 속도가 빨랐다고 한다. 특히 <직녀성>은 1달 만에, 상록수는 50일 만에 탈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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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의 본관인 해평 윤씨에서 유래되었다.[2] 안효공파(安孝公派)-온양공 인겸(仁謙)파 24세 ○섭(燮) 항렬.[3] 이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바로 안효공파 벌족이었다. 이런 명문가 출신이어서, 왕족이고 갑부였으며 현재는 친일파로 유명한 청풍군 이해승의 누나 이해영과 혼인하였으나, 집안간의 재력 차이가 너무 커서 갈등 끝에 1921년 이혼했다. 이해영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심훈은 이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직녀성' 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후 재혼하여 세 아들을 남겼다.[4] 흑석로13길 9번지[5] 이 지번에 현재는 작은 건물이 있으며 심훈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있다.#[6] 청송 심씨 인터넷족보에는 9월 6일에 별세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7] 체코의 민족영웅 얀 지슈카도 유사한 유언을 남긴 바 있다.[8] 윤현영(尹顯永)의 딸이다.[9] 2005년 경기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10]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항저우시.[11] 1845년 숭신의숙(崇信義塾)으로 설립되었고, 1952년 폐교되어 저장사범학원, 저장대학, 푸단대학 등으로 분리되었다.[12] 이수일과 심순애를 각색하였다.[13] 일본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사건에 연루된 아나키스트 박열을 말한다.[14]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던 시대일보를 말한다.[15] 1925년 있던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신의주 사건)으로 잡혀 고문을 당하던 끝에 죽은 박순병을 가리킨다.[16] 청송 심씨 안효공파 집성촌이다.[17] 이는 8.15 광복 후인 1961년 신상옥 감독이 만들게 되었다.[18] 1950년 8월 납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