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익

덤프버전 : r20210301



1. 영변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태익
2. 신흥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태익



1. 영변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태익[편집]


성명
신태익(申泰翼)
생몰
? ~ 1924년
출생지
평안북도 영변군
사망지
만주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신태익은 평안북도 영변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1919년 4월 박장호, 조맹선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국내에 지단을 설치할 때 평북 영변지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수행했다. 1922년 8월 환인현 남구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도어 남만주 일대 독립군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창설하자, 그는 대한통의부 교통부 부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조를 둘러싸고 마찰이 일어난 끝에 대한통의부 내 임시정부 지지세력이 1923년 8월 참의부를 조직하면서 통의부와 참의부 간의 갈등이 첨예해졌다. 이에 통의부는 편강렬 등이 조직한 의성단(義誠團)과 연합하기 위해 신태익을 의성단에 파견했다. 그러나 1924년경 의성단을 방문하여 군인 7명과 무기 10정을 지원받고 돌아오던 중 중국인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신태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신흥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태익[편집]


성명
신태익(申泰益)
생몰
1898년 5월 8일 ~ 1986년 9월 5일
출생지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 중흥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신태익은 1898년 5월 8일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 중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5월 28일 일본에서 의원들로 구성된 전국경제조사시찰단이 함흥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위한 환영회에 함흥변호사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동아일보 1919년 6월 25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연설자로 나와서 일본의 동화정책(同化政策)의 부당성과 한글 사용 금지, 창씨개명 등의 일제 식민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지원병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이 일본에 동화(同化)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3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같은 해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또 다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의 부당함을 공격하다가, 1943년 다시 일경에 붙잡혀, 소위 육해군형법 등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에는 1949년 반민특위 제1부 재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이후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6년 9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신태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