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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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보스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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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6닛폰햄우승.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6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3~1994, 1996~2000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br] 2004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 나인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br] 2004~200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000 [[한신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63번}}}
니시자토 코우키
(1987~1989)

신조 츠요시
(1990~1992)


카타야마 다이키
(1993~2000)
{{{#000 [[한신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5번}}}
카나모리 에이지
(1988~1992)

신조 츠요시
(1993~2000)


에반스
(2001)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1번
아쿠네 코키치
(1999~2003)

SHINJO
(2004~2006)


모리모토 히초리
(2007~2010)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1번
사이토 유키
(2017~2021)

BIGBOSS
(2022~)


현역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No.1


빅 보스[1]
BIGBOSS

본명
신죠 츠요시[2]
新庄剛志 / Tsuyoshi Shinjo
생년월일
1972년 1월 28일 (52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파일:나가사키현 현기.svg 나가사키현 쓰시마시(대마도)
학력
니시닛폰 단기대학 부속 고등학교
포지션
외야수[3], 내야수[4]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신인 드래프트 5순위
소속팀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한신 타이거스 (1990~2000)
파일:뉴욕 메츠 엠블럼.svg 뉴욕 메츠 (2001)
파일: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엠블럼.svg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2)
파일:뉴욕 메츠 엠블럼.svg 뉴욕 메츠 (2003)
파일: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엠블럼(2004~2021).svg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04~2006)
지도자
파일: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엠블럼.png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2022~)
응원가
한신 시절: 응원가[5]
닛폰햄 시절: 응원가[6]
SNS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1. 개요
2. 유년기
3. 고교 시절
4. 한신 시절
4.1. 1999년 6월 12일, 고의사구 타격 끝내기 안타
6. 닛폰햄 시절
6.1. 2004년
6.2. 2005년
6.3. 2006년
7. 플레이 스타일
8. 은퇴 후
9. 지도자 경력
10. 여담
11. 사건 사고
11.1. 각성제 복용 의혹
12.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은퇴 후에는 탤런트, 크리에이터, 경마마주 등을 겸업한다. 준수한 외모, 강한 개성과 특유의 쇼맨십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당대 일본프로야구계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이었다. 통산 성적에서 특출난 부분은 없지만 빠른 발과 강견을 살려 1990년대 ~ 2000년대 일본 최고로 평가될 정도의 중견수 수비를 했고, 출루율 3할 초반대를 쉬이 넘기지 못할 정도로 공갈성은 짙었지만 한 시즌 20홈런 가까이를 때릴 수 있는 파워를 지녔었다. 베스트나인 3회, 골든글러브(NPB) 10회, 올스타전 MVP 2회 등 수상 실적도 화려한 편.

한신 타이거스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는 유니폼의 영어명 표기를 SHINJYO로 썼으나,[7]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에는 등록명까지 포함하여 SHINJO가 되었고, 이 등록명은 일본에 다시 돌아온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선수시절 등번호는 63(1990~1992년, 2006년 9월 27일), 5(1993~2003년), 1(2004~2006년 9월 26일, 2006년 9월 28일~2006년 10월 26일).


2. 유년기[편집]


신조의 아버지의 어릴 적 꿈은 야구 선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갖가지 혹독한 훈련으로 신조를 단련시켰고, 신조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몇 시간씩 팔굽혀펴기를 하며 자신을 단련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남에게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소프트볼 대회에서 끝내기 패배를 당했는데 울면서 판정에 항의했고 위로하는 감독에게도 오심이라고 매달렸는데, 감독은 이런 지기 싫어하는 근성을 대단히 여겨, 자기가 감독을 맡아줄테니 연식야구팀을 만들어 분함을 풀어보자고 했다. 신조는 이 말을 듣고 이틀만에 멤버를 모아 나가오카 파이터즈(長丘ファイターズ)를 결성했다. 주장이자 에이스, 4번타자로 공수주 모두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노스텝으로 점핑스로도 곧잘 했다고 한다. 이때 신조의 아버지가 코치로 지근거리에서 노크 연습을 혹독하게 시켰는데, 감독이 "애들이 불쌍할 정도로 엄격해, 보고 있기 힘들 때도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연습의 효과는 확실히 있었는지 팀은 결성 1개월만에 후쿠오카현 대회에서 3위를 했다.

부자 지간의 정이 깊었고,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라는 교육 방침에 맞게 신조도 아버지를 보면 무슨 뜻인지 알았다고 한다. 또 신조의 집은 어릴 적 무척 빈곤하여 뭘 사달라고 보챈 적이 없으나, 고등학생 때 겨울철 연습으로 손이 곱아 견딜 수 없을 때 가죽장갑을 사달라고 부친께 부탁드리자, 자신의 작업용 장갑을 살 돈으로 사주었다고 한다.


3. 고교 시절[편집]


1989년, 니시닛폰단기대학부속고교 3학년 재학 때, 제71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후쿠오카 지역 예선 4회전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쳤다. 후쿠오카 결승전에서도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나 팀은 후쿠오카대학 부속 오오호리고교한테 4:6로 져서 코시엔 진출은 실패했다. 고교 시절 전국대회 출장은 못했으며, 같은 해 드래프트[8]에서 5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지명순위가 낮아 프로 진입을 망설이다가, 아버지가 "네가 갈 수 없었던 코시엔에서 플레이할 수 있잖냐."고 하는 말을 듣고 입단. 이때 등번호는 63번이었다.

이 때 요코미조 카츠라(横溝桂) 스카우트의 평가는 타력:B, 주력:A, 어깨:특A였다. 참고로 스즈키 이치로는 세 항목 모두 A, 마쓰이 히데키는 타력:특A, 주력A, 어깨A로 평가했다고 하며, 어깨 부문 특A는 고교 선수 중에 신조 이외에 준 적이 없다고.

덧붙여 이 시절은 신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으로 한신에는 관심이 없었다.


4. 한신 시절[편집]


파일:신조 츠요시 한신시절.jpg

한신 타이거즈 시절 야구카드. (2000년)

1990년, 프로 1년차는 2군에서 보내며, 9월부터 11월에 플로리다에서 개최하는 가을 교육 리그에 참가했다.

1991년 시즌도 가을까지 2군에서 보냈지만, 침체된 1군의 상황 아래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9] 등 수뇌진에 발견돼 첫 1군 승격을 했다. 9월 10일 도쿄 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경기에서 대타로 첫 출장. 코우다 이사오(香田勲男) 투수한테 첫타석 첫안타 첫타점을 기록. 16일에는 유격수-7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1992년 3월에 예정된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장행시합[10] 멤버로 유럽에 가기로 했으나, 대표팀 사정상 무산됐다. 시즌 개막은 2군으로 했으나, 4월 하순 부상자와 교체되어 1군 진입. 이때도 유격수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5월 팀의 주축 타자였던 3루수 토마스 오말리[11]가 부상 이탈하며 다시 1군에 승격된다. 5월 26일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전에서 7번 타자(3루수)로 첫출장. 우도우 카츠야(有働克也) 투수에게 첫타석 초구를 좌측 담장으로 넘겨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 홈런은 강렬한 인상을 남겨, 이틀 뒤 초대 미스터 타이거스 후지무라 후미오가 죽은 것과 연관지어 매스컴에선 신조를 타이거스를 이을 재목으로 기대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수비는 유격수를 거쳐 중견수로 정착했다. 9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좋은 수비를 보이며, 오노 유타카(大野豊) 투수에게 프로첫 끝내기 홈런을 쳤다.

이 해는 침체된 전년도와 달리 팀이 우승 쟁탈에 나섰고 최종순위는 요미우리와 함께 공동 2위였다. 이때 카메야마 츠토무(亀山努)와 같이 활약을 하여 카메신 피버(亀新フィーバー)[12] 라고 하며, 신조가 가는 곳이나 기숙사에는 연일 여성팬들이 들끓어 '신조걸'이라고 보도됐다. 규정타석에는 약간의 차로 미달됐고 신인왕 선정에서도 동료인 쿠지 테루요시(久慈照嘉)[13]에게 근소한 차로 져 놓쳤다.[14] 연봉의 상승율은 323%로 사쿠라이 코다이가 2008년이 되며 346%를 기록할 때까지 구단 최고였다.[15]

1993년부터 등번호를 5로 바꿨다. 2월 하순 시범경기에서 헤드슬라이딩을 하다 왼쪽어깨를 다쳐 5월 중순이 돼서야 시즌 첫 출장을 했다. 10월 주니치 드래곤즈와 경기에서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고 나서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21세 8개월 3일째에 4번타자 선발 출장은 현재까지 한신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해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했고,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16]를 첫 수상했다.[17]

1994년, 팬투표에서 센트럴 리그 최다득표를 얻어 올스타전 첫 출장을 했다. 이 해에도 골든글러브 수상.[18]

1995년 6월 20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원정경기 때 3 - 4 로 한신이 1점차로 요코하마를 쫓는 상황에서 9회 초 노아웃 때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친 홈런성 타구가 자기 이름이 적힌 응원기에 맞고 떨어져 2루타가 됐다. 그래서 이 판정에 격분한 한신 타이거스 팬들이 쓰레기를 던지고 그라운드에 난입해 심판에게 폭언, 폭행을 행사하는 등의 난동을 부려 8분간 경기가 중단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문제는 이 홈런성 타구가 정말 홈런이었다면 동점이 되어서 경기를 반전시킬 가능성이 있었으나 결국 2루타로 판정되면서 동점은 커녕 득점도 못 얻고 그 뒤 사사키가 남은 3명의 타자를 전부 아웃시키면서 결국 이 날 경기는 한신이 패배하고 말았다. 신조 본인은 경기 후 "열심히 응원해 주셨으니까 어쩔 수 없죠."라고 코멘트를 남겼다.

이 해는 부상도 있고 해서 규정타석에 미치지 못하고, 11월 19일엔 "자신에겐 야구 센스가 없다"는 이유로 급작스런 은퇴 선언을 했다가 이틀 뒤인 21일에 발언을 철회했다. 당시 감독대행을 역임하다 다음 시즌인 1996년부터 감독 취임이 예정되어 있던 후지타 타이라 감독과의 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후지타가 2군 감독 시절 부상이 심해져서 연습에 참가하는 대신 트레이너실에 가있던 신죠를 일방적으로 지각한 것으로 간주하여 정좌를 시키는 등[19] 크게 질책한 일과 당시 부상 치료에 전념하려 했으나 후지타 감독이 교육리그에 출장시키려 한 일 등으로 인해 후지타와는 성향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과 더불어 신조가 따르던 카시와바라 준이치 타격코치가 퇴단한 것에 대해 구단에 불신감을 가져 요코하마에 트레이드를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은퇴를 선언해 버린 것인데, 이후 아버지의 병이 악화되자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아버지께 드리는 최고의 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이 어떻든 간에, 목숨과는 바꿀 수 없으니까요. 오늘은 재계약할 생각입니다."고 하며 아버지에게 힘을 내게 하기 위해 현역생활을 계속할 것을 결단했다. 또 이때 은퇴를 하면 MLB에 도전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이유였다. 후일 "1995년의 소동은 노모 히데오처럼 메이저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생겼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할 땐 포스팅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을 때라, 신조의 말은 농담으로 받아져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1996년 10월 9일, 시즌 최종전이자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키도 카츠히코나카니시 키요오키의 은퇴시합에서 주니치를 상대로 1회 카나모리 타카히로(金森隆浩) 투수한테 만루홈런을 쳤다. 같은 이닝에 시오타니 가즈히코(塩谷和彦)가 똑같이 카나모리 투수에게 만루홈런을 쳐, 1이닝 만루홈런 2개라는 진기록을 세웠다.[20] 골든글러브 수상.[21] 오프 시즌에는 하와이 윈터 리그에 참가해서 히어로 스타즈에서 플레이했다. 히어로 스타즈의 감독은 후일 닛폰햄에서 다시 감독으로 만난 트레이 힐만이었고, 동료로는 뉴욕 메츠에서 같이 플레이할 베니 아그바야니(Benny Agbayani)가 있었다. 힐만은 닛폰햄에 신조가 들어왔을 때, 스타즈 시절의 기억은 없다고 했는데, 아그바야니는 다시 만난 신조에게 그때 체격이나 머리 모양도 기억한다고 말했다.

1997년, 타율 2할 1푼의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팬투표 2위로 올스타전에 출장해 센트럴 리그 응원단에게 집단 응원 보이콧을 당했으며, 관객석으로부터는 "신조 꺼져라" 라는 야유와 함께 페트병이 날아왔다. 응원 현수막에는 "신조 츠요시, 그딴 성적으로 나오지 마라. 부끄러운 줄 알아라"는 메세지가 적혔다. 은퇴 회견 때 이 사건에 관해선 "그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 하지만 레귤러로 모든 시합을 출장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22]

1998년 9월 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2점 차로 좇는 상황에서 7회말 카와사키 켄지로(川崎憲次郎) 투수에게 솔로 홈런을 쳤다. 이 전날인 8월 31일 신조를 스카우트한 와타나베 쇼죠(渡辺省三) 스카우트가 고베 시 내의 빌딩 옥상에서 이유 불명으로 떨어져 죽었다. 역시 와타나베가 발굴한 카메야마 츠토무에게 이 일을 알게 된 신조는 시합이 끝난 뒤, "오늘날 제가 있는 건 와타나베 씨 덕분이라,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습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에는 패배. 이 해엔 극도의 타격부진을 겪으며, 시즌 타율, 홈런, 타점 전부가 규정타석 도달 시즌 가운데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 해에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23]

1999년 3월 5일, 같은 해 취임한 노무라 카츠야감독의 아이디어로 시범 경기에서 투수로 등판~, 구속 143km/h를 기록하며 한 회를 3자 범퇴로 막았다. 또 후쿠오카 돔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상대로는 145km/h를 기록했다. 그러나 투구 와중에 왼쪽 무릎에 통증이 왔기 때문에 투수로서 공식전 출장은 단념했다. 이 투수 도전에 대해서 노무라 감독은 "투수의 심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저 정도 어깨를 가진 녀석이 어떤 공을 뿌릴까 포수 출신으로 흥미가 있었다.", "저 송구를 본다면, 누구라도 투수를 시켜보고 싶잖냐심재학?, 하반신을 이용할 줄 안다면 150km/h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1999년 7월 올스타 2차전에서 쿠로키 토모히로(黒木知宏)에게 친 안타가 센트럴 리그 1000번째 안타가 됐다. 3차전에서는 첫 MVP를 받으며, 2년 전 굴욕을 실력으로 씻어냈다. 9월10일 요미우리 전에서 결승타가 되는 홈런을 치며, 다시 단상에 올라가 "내일도 이긴다!"고 선언하지만, 다음날부터 구단 타이기록이 되는 12연패를 맛본다.

이 해는 팀에 복귀한 은사 카시와바라 타격코치의 지도 아래 전년도의 부진을 만회했고 아래에 나온 대로 고의사구를 타격해 끝내기를 만들기도 했다. 병살타도 5월 후반까지 없었는데, 시즌 첫 병살타를 삼중살로 기록한다. 시즌 종료 후 병살타수는 21개로 양 리그 최대를 기록했다. 골든글러브 수상. [24]

2000년은 최초로 개막전 4번 타자로 출장했다. 7월 20일, 1000시합 출장 달성. 9월 30일 코시엔에서 히로시마를 상대로 9회말 키토우 마코토(紀藤真琴)에게 한신 시대 마지막 홈런을 끝내기 홈런으로 쳤다.

이 해의 시즌 홈런, 타점이 커리어 하이. 홈런에 대해선 '<선제, 동점, 결승, 역전> 의 수훈 홈런이 28개 중 20개로 눈에 띄었고, 시즌 전반에는 수훈 홈런수가 양 리그 중 최다'라고 닛칸스포츠가 특집기사로 다뤘다. 11월 미일야구에 출장해서 20타수 이상에 .409를 기록했다. 베스트나인 수상[25], 골든글러브를 외야수 부문 최다득표로 수상.[26]

시즌 종료 후, FA선언을 하고 미국과 일본의 여러 구단과 교섭. 2000년의 빼어난 성적도 있고 인기선수의 방출을 막고자 한신이 5년 12억엔을 제시했지만, 12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겨우 저랑 맞는 야구환경을 찾았습니다. 그 구단은 뉴욕 메츠입니다." 발표하며, 연봉 50만 달러로 이적했다.[27][28] 등번호는 한신 때와 마찬가지로 「5」로 결정됐다. 12월 27일, 탤런트 오코치 시호(大河内志保)과 결혼. 1992년부터 결혼 때까지 8년간 동거했다는 걸 공표했다. 2007년 12월 이혼하였다.

한신 시절을 요약하자면, 주전 중견수 및 중장거리 타자로서 야기 히로시히야마 신지로와 같이 4466566664 시절 한신에서 장타를 기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타자였다. 한신이 암흑기 시절 뽑은 중장거리~장거리 유망주만 해도 세키카와 코이치, 키타가와 히로토시, 시오타니 가즈히코, 이마오카 마코토 등이 있었고 신조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결국 암흑기의 종결을 못 보고 한신을 떠나게 됐다. 저들 중에서 한신에서 암흑기의 종결을 본 선수는 이마오카 마코토가 유일하다. 다행히도 신조의 중견수 자리는 2001년에 입단한 아카호시 노리히로가 완벽하게 메꿨다.


4.1. 1999년 6월 12일, 고의사구 타격 끝내기 안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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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1937 추계 · 1938 춘계 · 1944 · 1947 · 1962 · 1964 · 1985 · 2003 · 2005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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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별 요약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 역대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사건사고 · 한신아재 · 커널 샌더스의 저주 · JFK(한신) · 4466566664
주요 인물
감독 오카다 아키노부 · 선수회장 치카모토 코지
주요 명장면
백스크린 3연발 · 일본프로야구 최장시간 소요 경기 ·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 고의사구 끝내기 안타
2022년 센트럴 리그 3위
경기장
1군 한신 고시엔 구장 · 고시엔 기간 교세라 돔 오사카 · 2군 한신나루오하마 구장· 지방구장 머스캣 스타디움
홈 중계 채널
파일:가오라스포츠 로고.png / 파일:스카이A 로고.jpg
기타 정보
한신 본선 ·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 전통의 일전 · 도쿄온도 · 죽음의 원정
관련 틀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영구 결번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29]



99년 6월 12일 경기의 하이라이트. 2루 수비를 보는 장면과 고의사구 끝내기 안타 장면이 들어있다.

6월 1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경기에서 12회말 마키하라 히로미(槙原寛己)[30]고의사구를 쳐내며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 첫 구는 외각을 살짝 벗어나는 완만한 투구였는데, 이 정도라면 칠 수 있겠다고 생각해, 2구째 똑같은 공을 삼유간 빠지는 안타로 만들었다. "유격수가 2루 베이스를 지키고 있는 걸 보고 삼유간으로 굴리면 빠지겠다 확신했다. 쉬운 공이 오도록 타석 바깥쪽에 섰다. 칠 때는 평소 발을 딛는 부분으로 내딛었다." 고 했다. 요미우리 쪽에서는 신조가 방망이를 휘두를 때 내딛은 왼발이 배터 박스를 벗어났으니 규정 위반이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구심인 타나카 토시유키(田中俊幸)는 "배터박스 안에 발이 일부분이라도 걸쳐 있으면 위반이 아니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송에서 신조는 "카시와바라 쥰이치(柏原純一)[31] 코치와 미리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이 일이 있기 3일 전에 히로시마전에서 고의사구를 받았는데, 휘두르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타격 투수에게 부탁을 해 크게 벗어나는 공을 치는 연습을 했다고 나중에 보도됐다. 또 실행 전날의 스포츠신문에도 신조가 크게 벗어나는 공을 치고 있는 사진이 게재됐다. 게다가 TV방송 "언제 봐도 파란만장"에서 신조는 "미리 카시와바라 코치를 통해서 노무라 감독에게 고의사구를 칠 걸 허가를 받았고, 상황에 따라 Go사인을 내기로 맞춰놨다. 그리고 (연장 12말 동점 한신 1사2루 상태에서 3번 이마오카 마코토(今岡誠)가 타석에 선 와중에 배터리 미스로 츠보이 토모치카(坪井智哉)가 3루로 진루했고, 이 때문에 이마오카와 신조가 고의사구로 걸러질 것이 예상된 가운데) 카시와바라 코치가 노무라 감독에게 허락을 받고 초구를 보낸 뒤 사인이 나왔다. 그때 카시와바라 코치가 낸 사인이 정해놓은 것보다 오버액션이라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고 풀어놨다. 노무라 감독에게 "저 녀석은 우주인"이라고 말하게 한 플레이였지만, 나중에 방송에서 노무라는 고의사구를 치라고 허가를 낸 뒤에, 고의사구를 치는 게 상대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망설였다고 말했다. 최근 신조는 한 방송[32]에 출연하여 이 끝내기 안타를 언급하며 만약 이게 (비디오 판독 제스처)있었다면 아웃이었다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당시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웠던지라 심판도 타석에 나와서 친 것을 보지 못 했다고 말하며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이었던 나가시마가 앞으로 신조를 상대로 공을 뺄때는 신조의 등뒤로 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본인은 역스윙으로 안타를 치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 시합에서 신조는 8회말 솔로 홈런을 포함해 6타수 4안타 2타점을 올렸으며 12회초 수비에서는 전회 공격에서 대타 기용으로 내야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2루 수비를 맡아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땅볼 타구를 처리했다. 이 때는 글러브는 동료인 히라오 히로시(平尾博嗣)[33]의 것을 빌려썼다. 시합 뒤, 히어로 인터뷰에서 『월간 토라토라 타이거스』의 취재등으로 잘 알던 요미우리TV 아나운서 오야마 켄이치(尾山憲一)가 인터뷰를 맡았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선 "내일도 이긴다!"고 선언하며, 그대로 단상에서 내려가 인터뷰를 끝냈다. 그러나 다음날인 6월 13일 경기에선 패배. 신조 자신도 전날과 다르게 선발 우에하라 코지한테 3타석 연속삼진을 당하는 등, 5타수 무안타에 머물렀고 그 뒤로 팀은 12연패를 기록, 최하위로 추락했다. 신조는 고의사구를 치는 건 한 번으로 끝이라고 말한 것과 달리, 이 시합 전 타격연습에서도 멀리 벗어난 공을 치는 연습을 했다고 보도됐다. 이후 한동안은 신조를 고의사구로 내보낼 때, 상대포수가 투수를 향해 멀리 벗어나게 하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한 뒤, 한신과 교류전에서 고의사구를 당했는데, 상대포수인 옛 동료 야노 아키히로(矢野燿大)에게 "쳐도 됩니까?" 묻자 "안돼안돼"하고 거절당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5.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편집]


2001년 4월 4일 개막전에서 8회초 대주자로 첫 출장. 1루주자로선 드문 센터 플라이 때 태그업을 들어가 2루로 진루. 후속 타자인 로빈 벤추라의 홈런으로 첫 득점을 기록했다. 직후 좌익수를 맡아 다이빙캐치를 보였으며, 동점으로 따라잡혀 돌입한 10초 첫타석에서 첫안타를 기록했다. 6월 22일 베터런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경기에서 6회, 센터쪽 큰 타구를 좇아 펜스 바로 앞에서 포켓 캐치를 해 「윌리 메이즈의 더 캐치급 수비였다」고 보도됐다. 팀이 졌기 때문에 신조는 이 수비에 관해 말을 하지 않았다. 8월 3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MLB에 진출한 일본인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았다. 랜디 존슨이 상대였던 이 경기에서 성적은 4타수 무안타.

이 해에는 좌익수로 46경기, 중견수로 53경기, 우익수로 39경기를 출장했는데, 외야 전 포지션을 맡으며 보살을 기록했다. 시즌 보살수는 12[34] 타격에선 만루에서 12타수 7안타, 타율 0.584를 기록하여 승부에서 강한 면모로 보여 마이크 피아자와 함께 승리타점 11로 구단 최다를 기록했다. 최종 성적은 123경기 출장에 타율 0.268, 출루율 0.320, 장타율 0.405, OPS 0.725에 10홈런 4도루로 완전 붙박이 주전급은 아니지만 백업 외야수 성적으로는 꽤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수비력이 좋아 외야 3포지션을 커버하는 전천후 외야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 해 루키 올스타에 뽑혔다.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때 135만 달러에 계약하여 신조 개인 최초로 연봉 1억 엔을 넘겼다. 그러나 며칠 뒤, 내야수 대시 란포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통보를 받고 이적했다. 등번호는 5. 또 야구와 별개로 베스트 드레서 상을 받았다.

2002년 성적은 118경기 타율 0.238, 출루율 0.294, 장타율 0.370에 OPS .664 9홈런 5도루로 전년도보다 다운그레이드됐다. 2002년 월드 시리즈에 출장하였고, 1차전에서 9번 지명타자로 출장해 3타수 1안타를 기록하면서 동양인(일본인 포함) 선수로서는 최초로 월드시리즈에서 안타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시즌이 끝난 후 자이언츠는 신조와 재계약을 맺지 않았고, 신조는 2003년에는 다시 친정팀 뉴욕 메츠에서 뛰게 되었다.

2003년 메이저 3년차 캠프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젊은 선수를 보고 "내 대신에 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수뇌진에 제안을 한 것이 「소극적인 선수」로 인상을 남겼다. 시범 경기에서 리그 최고 타율을 남겼지만, 시즌 최종적으론 은퇴의 이유가 된 왼쪽 넓적다리 이상으로 출장 경기 수가 줄었고 타격성적도 저조했다. 6월에는 부상 외의 이유로 최초로 마이너로 떨어졌다. 7월에는 40인 로스터에서도 제외된 뒤 AAA 노포크 타이즈(Norfolk Tides)에서 타율 3할을 유지하며 시즌을 마쳤다. 마이너 생활에서 장거리 버스 이동을 비롯한 여러가지 메이저와 차별을 겪었지만, 메이저를 꿈꾸며 노력하는 젊은 선수들과 교류로 "지금껏 야구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뒷날 말했다.

다음해 메츠와 계약을 맺지 못하자 NPB 복귀를 결심하여 2004년 시즌부터 홋카이도로 이전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했다. 추정 연봉은 8000만 엔에 2년 계약. 먼저 교섭을 해온 구단에 가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게 닛폰햄이었다고 한다. 이전 몸을 담았던 한신에서는 카네모토 토모아키, 아카호시 노리히로 등 외야수가 충분했기에 신조와 교섭하지 않았다. 한신의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은 "(신조가) 온다고 해도 포지션이 없다" 했다.

공식발표 전날, 영화 나쁜 녀석들 2의 특별 시사회에서 비공식으로 관객에서 알렸다. 공식발표의 회견 때에는 신조의 입단을 원하는 팬들의 서명을 모은 것을 소개했다. 삿포로 돔에서 열린 입단회견에서는 "삿포로 돔을 가득 채우겠다.", "팀을 일본제일로 만들겠다."를 목표로 삼았다.[35]


6. 닛폰햄 시절[편집]




닛폰햄에서 등록명은 「SHINJO」2019년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에서 몇 안 되는 영문 알파벳 등록명 사례이자 최초. 말 그대로 등록명을 알파벳으로 등록한 것. 규정상 알파벳이 안 된다는 규정은 없고 딱히 본명이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영문으로는 아무도 등록을 하지 않았던 것을 신죠가 처음으로 등록한 것. 이후 니시오카 츠요시가 2007년 한정으로 이름의 영문 표기를 딴 TSUYOSHI를 등록명으로 썼고 G.G.사토T-오카다 등 알파벳을 등록명에 사용하는 선수가 신죠 이후로 늘어나게 되었다.
등번호는 1. 그야말로 신조의 쇼맨십과 스타성이 제대로 발휘되었던 기간. 입단 후 은퇴까지 3년에 걸쳐 신조는 사비로 삿포로돔 우중간 좌석 위에 개인 광고 간판을 2장 설치했고, 닛폰햄 주최시합 때 외야석에 신조 시트[36]를 만들었다. 팬서비스의 일환으로 2004년 5월 10일부터 홈런을 쳤을 때 타법명명을 했고,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시합 전 시트 노크 때, 가면을 쓰는 퍼포먼스[37]를 포함해서 현재의 닛폰햄 덕아웃의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남겼다. 도쿄에서 존재감이 없던 비인기구단 닛폰햄이 신 연고지 홋카이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넘어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구단으로 성장하게끔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6.1. 2004년[편집]


2004년은 개막부터 7월까지 2번 중견수로 출장했고, 8월에는 츠보이 토모치카[38]와 타순을 바꿔 1번으로 플레이오프가 끝날 때까지 나섰다. 5월 30일, 하코다테 치요가다이 야구장(函館市千代台公園野球場)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의 장즈자(張誌家) 투수를 상대로 일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7월 11일,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 게임 2차전에서 3회말 2사 3루 상황[39]에서 주자로 있던 신조는 포수가 투구에게 공을 던지는 틈을 타 홈으로 돌진, 투수가 곧장 반구하는 크로스플레이 상황에서 세이프에 성공했다. 포수 야노는 구심에게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고[40] 올스타전 사상 첫 단독 홈스틸로 기록됐다. 헬멧이 벗겨져 나갔던 신조는 배를 땅에 붙인 상태로 양손 양발로 땅을 치며 기뻐했다.[41] 이 플레이는 하기 전에 3루를 맡고 있던 주루코치 마쓰나카 노부히코[42]와 상대 센트럴 리그의 후루타 아츠야, 야마모토 마사히로에게 얘기를 하고 허락해달라고 했다 한다. 전반기 마지막 시합의 히어로 인터뷰에서 "MVP는 제 것입니다" 선언한대로 MVP로 선정. 또 히어로 인터뷰에서 이 해 일어난 프로야구재편문제[43]에 대해서 "이제부터는 퍼시픽 리그입니다."고 말했다.

프로야구 재편문제에서 발전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파업이 끝난 뒤, 첫번째 경기였던 9월 20일 삿포로돔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경기에서는 전전날, 전날 시합 중지의 사과로서 "그제와 어제 시합을 못 해서 미안 Joy"하고 동료 외야수 다섯과 비밀전대 고렌쟈의 가면을 쓰고 시트노크를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 팬들의 갈채를 받았다.[44]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싸우는 와중에 4-8로 지는 게임에서 4회말 아라카키 나기사(新垣渚)에게 솔로 홈런을 치고, 9회말 팀이 9-12에서 3연타로 12-12로 따르붙었을 때, 2사 만루 상황에 타석에 서서 미세 고지(三瀬幸司)에게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친다. 이 장면에서 1루 주자 다나카 유키오(田中幸雄)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2루 베이스 앞에서 신조를 맞이해 껴안고 도는 바람에 신조는 선행주자 추월로 아웃, 홈런은 취소되고 단타 처리됐다. 단, 신조의 아웃 전에 3루주자 나라하라 히로시(奈良原浩)가 홈으로 들어와 끝내기 승리는 성립됐다. 야구가 득실차 따지는 스포츠도 아니고. 끝내기 홈런이 취소됐지만 끝내기 승리한 첫번째 사례로 남았다. 끝내기 홈런이 되었다면 개인 통산 끝내기 만루 홈런 최다 기록 타이(2회)를 이룰 수 있었다. 극적인 경기 종결 뒤, 신조는 아웃은 됐지만 상관않고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며 팀 동료들의 환영을 받았다. 홈런을 안타로 바꾼 원흉인 다나카 유키오 는 곧장 신조에게 사과했고, 신조는 "괜찮아요! 이겼잖아요."하며 웃음으로 받았다. 다나카는 끝내기 요건인 3루 주자가 홈을 통과하는 시점에 머리가 하얘져, 신조를 반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히어로 인터뷰에서 "오늘의 히어로는 제가 아닙니다. 모두예요!" 발언, "내일도 이긴다!"고 선언했고,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다음날은 진다는 한신 시대부터의 징크스를 다음날 경기에서도 홈런을 치며 이기고 벗어났다.

이 해 시즌 타율은 커리어 하이인 .298를 기록했고 7~9월에는 전부 월간 타율 3할을 넘기며, 9월 월간 MVP를 수상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공헌했다. 11월 이온 올스타 시리즈 2004 미일야구에 팬 투표로 뽑혔지만, 부상을 이유로 출장하지 않았다. 베스트 나인[45], 골든 글러브(외야수 부문 최다 득표)[46], 일본 프로스포츠대상 공로상을 받았다.


6.2. 2005년[편집]


1번 중견수로 시작해 5월 중순부터는 5번으로 기용됐지만, 7월 중순 오른쪽 손가락에 공을 맞고 등록말소가 된 이후 출장이 줄어들었다. 4월 15일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전에선 넥스트 배터 서클에서 파울볼을 국부에 직격당한 뒤,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홈런을 치고, 「우불X 타법」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뉴스에서 「방송금지용어 타법」이라고 소개했다. 4월 23일, 도쿄돔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우 전에서 미일 통산 1500시합 출장을 달성했다. 6월 5일, 나고야돔에서 주니치의 야마모토 마사히로 투수를 상대로 미일 통산 200홈런을 달성했다. 6월 12일, 코시엔에서 옛 팀 한신을 상대로 홈런을 치고 한신 팬들의 박수를 받자 「나를 키워준 이 구장에 감사타법」이라고 명명했다. 8월 모교인 니시닛폰 단기대학 부속고교 야구부가 전년도 코시엔에 출장을 한 걸 축하하며 소형버스를 기증하여 「코시엔 사상 최대의 선물」이라고 화제가 됐다.

이해는 부상 문제로 규정타석에 도달하지 못했다. 골든글러브상을 외야수 최다 득표로 수상했으나 수상식에는 불참했다. 시즌 수비성적은 평범했는데, “올해 나에게 골든글러브는 아까워. 1년간 이 상을 목표로 뛴 선수들한테 면목이 없네. 내년부터는 인상이 아닌 숫자로 줬으면 해. 그렇지 않으면 이 멋진 상이 가치 없게 돼버리니까”라고 얘기했다.[47] 2년 계약 만료 뒤 맺은 재계약은 신조의 희망으로 1년 계약, 연봉은 자기 최고인 3억엔(추정)이 됐다.


6.3. 2006년[편집]


이해 한신 시절 감독이었던 나카무라 가쓰히로가 오릭스, 노무라 카츠야가 라쿠텐의 감독으로 취임해, 치바 롯데 마린즈의 바비 발렌타인 감독(2001년 메츠 시절 감독)을 포함해, 3명의 은사와 대전하게 됐다. 1년간 6번 중견수로 고정 기용됐다.

신조의 발안으로 「삿포로돔 초만원 대작전」이라 하여 “무언가 합니다”고 알린 3월 25일 삿포로돔의 퍼시픽 리그 개막전에서 시합 전에 할리데이비슨의 트라이크[48]를 몰고 입장하는 쇼를 감행. 신조를 이어 다른 스타팅 멤버들도 사이드카의 조수석에 타고 입장하여 가득 찬 관중들에게 큰 환성을 받았다. 이걸 시작으로 이 해 시합 전에 퍼포먼스 쇼를 한 3시합은 모두 닛폰햄이 승리했다. 이 해부터 개인광고간판 두 장 중 1장에 자신의 일러스트가 말하는 말풍선에 메시지를 써넣는 걸 시작했다. 관객 만원 달성 시에는 무언가 메시지를 넣기로 약속하고 다음날인 3월 26일 “삿포로돔 43,000팬, 위험해, 감동이야!”를 써넣어 팬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4월 17일, 도쿄돔에서 은사 나카무라 가쓰히로가 이끄는 오릭스와 경기에서 친 첫 홈런에 「28년간 마음껏 야구를 했어. 올해로 유니폼을 벗습니다 타법」이라 이름 지으며 갑자기 은퇴표명을 하고, 히어로 인터뷰에서 다시 관객들에게 선언했다. 이 첫 홈런을 마지막으로 타법 명명은 그만두었다. 은퇴 발표부터 시작 후반에 걸쳐 매스컴의 주목은 날이 갈수록 커져 신조의 퍼포먼스는 「신조 극장」이라 표현되며 연일 보도되었다.

4월 30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경기에서 유니폼 밑에 입은 옷깃이 있는 연습복 때문에 물의 빚었다.[49] 신조 본인은 시합 직전 심판단에 출장 가부 확인을 요청해 “어쨌거나 출장은 된다”고 인정받고 출장했다. 이후 상대 팀 감독과 프론트의 항의로 심판단은 회의 끝에 “이후 시합에서는 불가”라고 결정해, 심판단의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신조 본인은 해도 된다는 일을 한 결과라 신조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6월 16일, 삿포로돔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에서 사사오카 신지를 상대로 일본 통산 200홈런을 달성했다. 8월 22일, 이와테 현영 야구장에서 라쿠텐의 와타나베 코우키 투수를 상대로 미일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9월 15일, 2007년 여름에 있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자민당과 민주당에게 요청받았다는 게 알려졌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9월 27일, 정규 시즌 최종전인 소프트뱅크와 경기에서 당일 한정으로 프로야구선수가 되고 처음 받은 등번호인 63을 달고 나왔다. 원래 63번은 와타나베 류이치 선수의 것으로 이날 한정으로 와타나베가 68번을 달기로 했으나, 소속된 2군 시합이 없었기 때문에 등번호 68의 유니폼은 따로 제작하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이 일에 관해 “이왕이면 등번호 1로 받고 싶었다”며 농담조로 얘기했다. 팀이 정규 시즌 1위 통과를 결정 지은 시합 이후 은퇴 세레모니를 행했다. 삿포로돔 장내의 불을 끄고, 이제까지 야구인생을 되돌아보는 VTR을 중견수 수비 위치에서 지켜본 뒤, 유니폼과 글러브, 리스트밴드, 타월을 그라운드에 놓고 눈물을 보이며 구장을 떠났다. 유니폼 안의 언더셔츠에는 “오늘, 이날, 이 순간을 마음의 앨범에 새기고, 이제부터도 나답게 가면 돼!”라고 프린트되어 있었다. 은퇴 스피치는 하지 않았지만, 떠날 때, 스코어 보드에는 “얼마남지 않은 야구인생 밝고 즐겁게 흰공을 쫓을 것을 오늘 이날 모두에게 약속합니다.”라는 서명이 붙은 즉필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예정대로 다음날인 9월 28일에는 등번호 1을 다시 달았고, 와타나베도 63으로 돌아갔다.

10월 2일, CM출연 계약을 맺고 있던 다이도 드링코에서 D-1 COFFEE의 「SHINJO 은퇴기념캔」을 12월까지 한정 발매했고, 동시에 「SHINJO 은퇴 기념 캠페인」도 전개했다. 11월 이온 미일야구2006에서 팬투표 톱으로 뽑혔지만 출장사퇴를 표명하며 “일본 시리즈에서 모든 걸 불태우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시리즈에서 신조 최후의 타석.

그리고 진짜 일본에서 마지막 경기인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2006년 일본시리즈 5차전[50]에서 알렉스의 좌익수 플라이를 마지막 아웃카운트로 연결한 좌익수 모리모토 히초리와 서로 껴안으며 우승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그의 프로야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다.



우승 헹가레. 눈물을 흘리는 신조를 헹가레치는 팀원들[51].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쇼맨은 이렇게 일본 야구계의 정점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7. 플레이 스타일[편집]


현역시절에는 전형적인 수비형 외야수였으나 현재 와서는 갭파워가 있는 OPS히터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재평가해주려 해도 역시 기본적으로 컨택이 영 좋지 않다 보니 타율에 비해 펀치력은 있었다 정도이지 수비형 야수였다는 평가는 바뀌지 않고 있다. OPS히터라고 불러주려고 해도 7할 중반을 왔다갔다하는 선수한테 OPS히터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하지 않은가.(...)

커리어하이는 일본 복귀 첫 시즌의 123경기 544타석 .298/.327/.508 150안타 79타점 24홈런. 커리어 통틀어, 규정타석 무시해도 단 한해도 3할을 기록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타율은 낮았고, 통산타율이 2할 5푼으로 2할대 초반도 찍는 경우가 종종 있던, 멘도사 라인보다 아주 약간 나은 정도의 컨택트를 지닌 선수였다. 90년대~00년대까지의 당시 일본야구는 타고투저였는데, 4년 연속으로 2할 4푼을 넘기지 못한 것은 할 말이 없는 수준.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야 조금 높았지만 그게 낮은 타율을 상쇄할 정도로 엄청 높은 편도 아니어서 통산 .305로 타율보다 5푼 정도 간신히 높은 수준의, 선구안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단 하나 파워만큼은 확실하여 풀타임시 20홈런을 충분히 넘길만한 장타력을 지니고 있고 종종 25홈런가까이 넘기는 시즌도 만들어 내고는 했다. 투수친화적인 한신 고시엔 구장, 삿포로 돔을 홈으로 뛰면서 찍은 성적인만큼 보다 타자친화 구장에서 뛰었다면 30홈런도 기대할 수 있었을만한 파워넘버. 커리어하이는 미국 진출 직전시즌의 28홈런. 한마디로 공갈포라는 정의에 정말 딱 부합하는 타자.

이런 신죠를 주전으로 뛸 수 있게 해 준 것은 절륜한 수비력이었다. 1993년, 1994년, 19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 연속으로, 한신 시절 총 7회의 골드글러브를 쓸어담으며 주전 중견수로서 한신의 외야를 책임졌다. 보통 메이저리그에서도 .970대에서 골드글러브를 타네마네 하는데 통산 필딩율이 .986일 정도의 높은 필딩율에 커리어 최고 1시즌 13개, 매년 10개 내외의 외야보살을 꽂아대는 엄청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철벽수비를 자랑했다. 신조의 강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99년 주니치전에서 우익수 츠보이가 잡으려고 콜을 보낸 희플을 콜 무시 후 달려들어 낚아챈 후(...) 다짜고짜 홈으로 던져서 홈으로 태그업하던 3루주자를 홈보살을 꽂아버렸다. 이 당시 3루주자가 이종범으로 이종범의 주루스피드는 모두가 다 아는 대로이니 정말 놀라운 어깨가 아닐 수 없겠다.

이렇게 수비 하나만큼은 철벽이었던 선수로서 SF시절 당시 같은 팀이었던 배리 본즈가 신조를 엄청난 중견수라고 칭찬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은퇴하는 해까지 골드글러브를 가져갔다. 주력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으로 전성기 땐 한 시즌 10도루 내외는 기대할 만큼의 꽤 빠른 발을 지니고 있었다. 이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외야수비 범위와 그 스즈키 이치로의 레이저 송구에 비견될 강견은 신조가 일본에서 수비형 외야수 하면 아직까지 대표적인 선수로 떠오르는 데 한몫했다.

종합하자면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5툴에서 컨택만 뺀 4툴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튼 공갈포로서 공격 면에서의 생산력은 그리 높지 않은 선수였으나, 현역 시절에는 저럼에도 실질적 데뷔시즌인 92년에 엄청난 단기 임팩트를 남기며 젊은 중심타자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던 팬들과 현장의 기대치를 확 높였고, 그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못한 뒤에도 워낙 화려한 플레이와 스타성을 갖추어 주목을 끈 데다 암흑기 한가운데의 한신에선 그만한 장타력을 갖춘 선수가 거진 없다시피 했고 무엇보다 세이버매트릭스가 없었던 관계로 타율과 출루율은 별로지만 홈런을 많이 칠 수 있는 신죠는 실질 생산력과는 별개로 한신 시절엔 중심타자에 가까운 입지였다. 나중에 세이버가 생기면서 홈런갯수만 많지 출루율이 낮아서 실질적인 생산력은 별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재평가가 된 것.

다만 이렇게 수비가 강점인 외야수답게 연봉 면에선 불이익을 받았는데, 뉴욕메츠에서 135만 달러 계약을 하기 전까지 일본에선 고액연봉자의 상징이라는 연봉 1억 엔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역시 외야수의 제일가는 덕목은 타격이라는 점이 다시금 생각나는 부분. 물론 연봉이 못 오른 건 본인의 기복 이외에도 막장 중의 상막장이던 당시 한신의 팀 성적과 싸늘한 외부 시선 때문에 그런 것도 있긴 했다. 한신이 FA때 5년 12억으로 1년 2억 좀 넘는 계약을 제시하긴 했지만 본인이 거절하고 미국에 갔으니...

신기한 것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성적하락폭이 별로 없어, 타격 하락폭이 거의 없었고[52], 필딩율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론 타격이야 그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하락폭이 없는 수비는 그의 수비가 메이저에서도 통하는 진퉁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53] 덕분에 팬그래프 기준 메이저리그 통산 wRC+는 76 정도였으나 수비에서 높은 기여도를 인정받아 3년 통산 2.8, 첫 2년 동안 1.7, 1.3의 WAR을 기록했을 정도. 사실 메이저리거가 된것도 은퇴시즌에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의 일품수비를 자랑했기 때문이다.


8. 은퇴 후[편집]


은퇴 후에는 2007년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었다. 이후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야구선수로 큰 인기를 얻어 그간 받은 거액의 연봉과 광고수익 등 벌어들인 수익이 50억 엔이 넘고 실보유자산은 25억 가까이 되는 거부였지만, 사기를 당해 22억엔이 넘는 큰 돈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정확히는 여태까지 자산관리를 전부 어머니에게 맡겼었는데, 어머니가 투자사기를 당해 그 돈을 전부 날려버리고 1억엔 남짓밖에 안되는 재산만이 남게 된 것.

은퇴 이후 경마 마주 등 하고싶은 것을 하고 살다가 그마저도 지쳤는지 인도네시아 발리로 이주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던 신조였지만 결국 이 사기로 인해 귀국하여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로는 매달 나오는 소액의 메이저리거 연금과 야구해설이나 예능에 나오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내에서 돈을 벌며 사는 중. 2017년 출연한 예능에서 22억을 잃어 페라리 타다가 지금은 스쿠터 타고 다닌다는 자학드립성 썰을 담담히 풀며(...) 좌중을 웃프게 만들었다. 역시 엔터테인먼트의 도사라고 해야 할지...

2019년 11월 18일 현역 복귀 선언을 하며 1년 후 트라이아웃에 도전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본인은 '전설을 만들고 싶다'고...물론 나이가 47세에 은퇴한지 14년이 된 사람인 만큼 합격 가능성이야 제로겠지만 역시 야구계의 기인이자 엔터테인먼트의 달인다운 행보. 이에 구단은 신죠를 임의은퇴신분에서 자유계약선수로 신분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2020년 12월 7일 열린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실전 경기를 치렀는데 첫 3타석에선 각각 2루 땅볼, 볼넷, 2루 땅볼로 물러났지만 4번째 타석에서 적시타를 쳤다![54] 타 구단에서의 영입 가능성은 없는 수준이고 본인도 복귀를 단념했지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현역 복귀를 목표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2021시즌 집권 10년만에 최악의 행보로 시즌을 마친 쿠리야마 히데키감독의 사임으로 인해 다음 시즌인 2022시즌 전 소속팀인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비록 선수는 아니지만 감독으로나마 현역 복귀에 성공했다.

감독 선임 전에는 닛칸스포츠에서 한신 중견수 후배인 치카모토 코지에게 수비 관련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치카모토는 2021년 대폭발한다


9. 지도자 경력[편집]



9.1.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편집]


이후 한동안 별다른 소식 없이 지내다가 쿠리야마 히데키 닛폰햄 감독이 2021년을 끝으로 사임하는 것이 알려졌고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인 이나바 아츠노리도 감독이 아닌 구단 GM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언론에서 신조의 감독설을 비중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10월 26일 닛폰햄 파이터즈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으며 구단측에선 10월 29일 감독 취임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등번호는 자신의 선수 시절 등번호이자 사이토 유키가 달았던 1번으로 결정되었다. 입단식에서 1번은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스타 선수를 키워서 줄 것이며 그때까진 자신이 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이 양반은 감독이 되자마자 선발 라인업 공모전을 열 예정이라 하면서 괴짜 기질 어디 안 갔음을 인증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도 화려한 패션으로 등장해 경기 중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하겠다느니, 안타없이 점수를 내겠다느니, 아예 자신이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선수로 복귀해서 자기 자신을 대타로 쓴다느니 하는 13개조 공약을 발표하며 폭발하는 스타성을 과시했다. 감독이라는 직함도 딱딱하다고 생각했는지 "빅 보스"라고 불러달라고 밝혔다.[55] 실제로 발리 살던 시절 사람들이 빅 보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본 내 언론들도 감독과 빅 보스 호칭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감독 호칭을 사용하는 언론사가 많은 편. 인터넷에선 그런거 없이 빅 보스로 사실상 통일이다.

빅보스 선임이후 감독 활동에만 집중하려는지 유튜브 채널 업로드가 1개월동안 끊겼는데, 정작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은 활발히 업로드되고 있다. 그 와중에 가상화폐 거래소와 계약을 맺고 계약금의 일부를 가상화폐로 받기로 했다고.


9.1.1. 2022년[편집]


상술한 파격적인 행보와는 별개로 훈련과 선수 건강에 있어서는 상당히 엄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내에서는 아무리 예능이라지만 지도는 제대로 한다라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본인은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신조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하면 엄격해진다고. 예로 키요미야 코타로를 보고 체중 감량을 지시한다던가[56] 셔틀런 훈련은 신조 스타일상 상품을 걸고 유쾌하게 진행되었지만 막상 진행하니 난이도가 꽤 높았다는 아카호시 노리히로 임시코치의 증언이 있었다. 또 외야 송구 훈련도 송구 높이와 각도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해서[57][58] 잡아내는 꼼꼼함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라운드 정비 시간엔 선수들을 쉬게 해야한다며 본인이 직접 그라운드 정비에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일부 기자들은 신조의 감독 스타일이 한신 시절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고. 장훈도 '독특하긴 하지만 기본에 근거하고 있다'라고 평했다. 또한 야구 외적으로는 개성있고 단정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편으로, 니시카와 하루키 등 선수단 분위기를 나쁘게 만든다고 지적되었던 선수들도 정리하였다. 스기야 켄시 싱글벙글..[59] 다만 니시카와는 고액 연봉 받으면서 태만한 플레이로 수뇌부에 찍혀 쫓겨났다는 설이 있기에 정확한 사유는 안나왔지만 구단과의 좋지 않은 일이 생긴 모양.

멋있는 선수뿐만 아니라 멋있는 코치도 필요하다고 코치진 전원에게도 체중감량, 체형교정을 지시했다(....) 흰머리도 검은 머리로 염색하라는 지시사항도 있었다가 몇몇 코치들의 염색약 알러지로 포기.[60] 또한 신조가 부임하고 난 뒤 팀의 고참 선수들을 대부분 정리하면서 선수단 분위기는 밝아졌고, 웨이트트레이닝 도중 선수들이 사쿠란보를 추기도 했다(...). 또한 선수들에게도 인터뷰 시 "그렇네요" 발언을 자제하도록 하기도 했다.

2022시즌 선수단 전원을 1군에 한 번씩은 콜업할 것이라고 개인 SNS에서 밝혔다. 콜업되며 받은 기회를 잡은 선수가 스타로 키울 첫걸음이라고. 또한 선수들에게 선발 라인업과 오더를 직접 결정해 생각할 기회를 부여한다고 한다. 그리고 2월 26일 시범경기에서 이것이 실현되었는데 이날은 신조가 아니라 선발투수인 우와사와 나오유키가 오더를 결정하고 일일 감독으로 현장을 지도했다. 결과는 DeNA에게 0-5 패전. 우와사와가 현장에서 선수단을 이끄는 동안 신조는 근처 숙소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이 경기 이후에는 신조 본인이 현장에서 지도하고 있다. 아직 시범경기인지라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2스트라이크 1볼에서 대타 기용을 한다거나 가라폰으로 스타팅 라인업을 결정하는[61] 이색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시범경기 막바지인 3월 19일 경기에서는 팬 공모를 통해 결정된 스타팅 라인업을 사용하겠다고 공표했다.

단 이런 신조의 파격적인 행보들을 팬들은 신선하고 개성적이라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일부 타 팀 선수들이나 감독, 야구인들에게는 비호감으로 찍혔다고 전해진다. 키요하라 카즈히로는 개인 유튜브에서 "신조를 좋아하는 야구인은 한 명도 없다"는 말로 디스했고[62] , 나머지 11구단 스태프들에게는 "감독으로 인정할 수 없는 양아치에게 지는 건 야구계의 수치"라는 반응이라 닛폰햄에게는 절대 지면 안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야구에 집중하지 않은 채 개막전의 가치를 경시하는 발언을 하고, 도쿄에서 패션쇼와 기업 행사에 참가하면서 NFT를 내놓는 모습을 보여 2022 시즌은 성적은 포기한 시즌이라지만 닛폰햄 팬들마저 상기한 모습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팬덤 내에서도 처음에는 남다른 화제성을 바탕으로 파이터즈 팬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이후 언론[63]에 의해 선수보다 감독에 스포트라이트가 가는 모습이 잦아지자 이를 좋게 보지 않고 있는 팬들도 생겨나고 있다. 시즌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아보인다고 판단한 어느 평론가가 시즌 100패를 예상하자 신조 본인이 되려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시즌 전 등록명을 BIGBOSS로 변경했다. 나머지 코칭스텝들은 본명을 등록명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신조만 유일하게 본명이 아니게 되었다. NPB의 등록명 규정이 관대한 편이라 규정에 위배되는 등록명은 아니지만 핵심은 굉장히 이례적으로 본명과 관련이 없는 등록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전 사례들을 보면 イチロー, サブロー, TSUYOSHI, T-岡田 등 적어도 본명이 들어간 등록명을 사용한 사례는 있었어도 이번 신조와 같은 경우는 전례에 없던 일[64]이라 상당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정규 시즌이 시작되자 본인이 '놀이'라고 강조했던 원정 3연패를 한 데 이어 홈 개막전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뒤로한채 5연패를 기록하였다. 똑같이 5연패를 기록하고 있는 세리그의 한신 타이거스와 더불어 파리그의 웃음후보에 벌써 등극하였으며, 타팀 팬들은 벌써 신조의 종신감독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한신이랑 비교하기엔 실례인 이유가 닛폰햄 전력은 거의 최약체여서 그렇다 쳐도 한신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계속되는 연패에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30일 경기 직후 인터뷰도 "내일"이라는 말만 남길 정도였다.#

그리고 3월 31일 세이부와의 홈 개막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드디어 첫 승을 신고했다. 5연패를 하고 1승을 했으니 나머지 137경기를 모두 지면 됩니다 그리고 폭탄도 터젔다

하지만 첫 승을 신고하기 무섭게 바로 다음 날인 4월 1일 오릭스 버팔로즈와의 시즌 첫 맞대결에서 영봉패를 당하며 시즌 6패를 적립했다. 이 기세라면 정말로 시즌 100패도 꿈(?)은 아닐 우려가 커지고 있다. 걱정마. 예전 친정팀은 시즌 전패위기야

그리고 4월 2일 오릭스와의 2차전에서도 2연속 영봉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기어이 그 다음날 역전패로 또다시 피스윕을 당했다. 또다른 친정팀인 한신은 개막 9연패를 쳐먹으면서 아직도 첫승 신고조차 못 했다. 범위를 넓히자면 KBO리그 7팀이 한신보다 먼저 이겼고 그 중 세 팀은 닛폰햄보다 1승이 더 많다. 사실상 이번 시즌 한신과의 교류전[65]일본 꼴찌 결정전슈퍼 일본시리즈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첫 승을 이룬 직후에는 결과보다 성장이 중요하다면서 팀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웃음벨 멘트를 했지만, 주니치의 레전드인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신조의 야구를 전혀 알 수 없다면서 팀을 운영하는 방식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4월 5일 치바 롯데 마린스와의 시즌 첫 맞대결에서도 또다시 영봉패의 수모를 겪었다. 같은 날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는 시즌 첫 승을 신고하면서 드디어(?) 동률이 맞춰졌다. 김한신과 이폰햄의 치열한 다패왕 경쟁

4월 6일 마린스를 상대로 3:2의 역전승으로 시즌 2승을 거두었지만 이후에도 다시 연패를 달리고 있다. 4월 9일 패배 직후 인터뷰에서는 경기 내용은 그래도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둡지 않다는 말을 내놓자 문제점이 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한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타팀팬들에게는 승리를 헌납해주는 재미있는 감동님이라는 말도 나온다

특히 선발 로테이션을 4일마다로 정해두고, 타선 라인업의 잦은 변경이 큰 문제점으로 콘도 켄스케를 하위 타순에 배치하거나 아예 선발에서 배제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런 기용에 대해서는 알맹이가 없는 장황한 설명만 늘어놓으면서 명확한 이유가 없다. 이런데도 팀의 레전드이자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는 모리모토 히초리는 "비판의 코멘트가 구체적이지 않다."면서 여론의 비판을 경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연패를 겪을 때는 홍보부를 통해서 코멘트를 전달하다가도 승리하면 기세좋게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를 하는 등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제대로 지고 있지 않는 듯한 태도도 보이고 있다.

4월 10일 라쿠텐과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시즌 3승을 챙겼다. 하지만 당일 라인업은 코치진에게 일임했는데 콘도가 3번 타순, 키요미야 코타로가 4번 타순에 배치되는 등 비교적 정상적인(?) 라인업이었기에 이것대로 또 문제가 있어보인다.

그리고 아예 선발 로테 간격을 4일로 확실히 잡아두겠다고 선언하면서 5회까지 잘 던지는 감각을 살리면서도 투구수를 줄여서 승수를 늘리면 좋고 그러면 개인 성적과 동시에 연봉도 확 올라갈거라고 게임을 너무 많이 한듯한 장담하고 있다. 게다가 선발을 잇는 투수가 3이닝을 던질 수 있는 준비를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다만 시즌 전도 아니고 이제 시즌 초반에 들어간 시점에서 나온 선언이라는 점에서 투수진이 매우 당황할 것이고 4일 로테이션을 해봐야 5일보다는 결국 피로도만 더 쌓인다는 지적하는 의견이 많다. 또한, 투수의 승리는 타선이 터져줘야 가능한 이야기인데 시즌 초반만 보면 파이터스의 타선이 그렇게 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

4월 13일 세이부와의 원정 경기에서 한 팬이 인스타그램 DM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타순으로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대로 실행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러면 결과는? 8구만에 4명의 타자가 모조리 아웃을 당했고, 실점을 많이 내준 팀도 추격만 하다가[66] 끝나면서 패배.

17일 치바 롯데와의 원정 경기에서 상대 선발로 나오는 사사키 로키를 향해 '전원 번트'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빠른 공을 역이용해 초구부터 강공으로 맞서겠다는 것.# 그런가하면 아예 일본의 아롤디스 채프먼에 비유하면서 "정형외과에 가서 팔을 늘리거나 트레이닝을 더욱 버전업해서 구속을 186km로 던질수 있다."는 조언을 가장한 황당한 소리를 내뱉었다.#

한편, 시즌 시작 전에 고액연봉 받고 태만한 플레이를 했다는 이유로 쫓아낸 니시카와 하루키는 라쿠텐에 입단해 3할 초반대의 타율과 홈런도 치는등 맹활약을 하면서 이는 신조의 실책들 중 가장 큰 실책[67]으로 전락했다. 논텐더로 같이 풀린 오오타 타이시는 요코하마에 입단해 오히려 전보다 퇴보하는 중이고 아키요시는 아예 프로팀에 오퍼를 받지 못하고 독립리그로 떠났다.

17일 경기에서는 연장 접전 끝에 1:0으로 간신히 승리하긴 했으나 "선수도 인간이니까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공략을 장담했던 사사키 로키에게 8이닝 동안 퍼펙트로 막히며 입만 살았다는 거만 또다시 증명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18경기 6승 12패, 순위는 최하위지만 5위 세이부는 1게임, 4위 오릭스는 2게임, 3위 치바롯데와는 2.5게임 차이까지 좁혔다. 신조와 똑같이 리그 최하위 웃음후보승점자판기 취급받는 한신 타이거스가 벌써부터 리그 5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와도 5게임 차이가 나는 것에 비하면 의외로 선전하고 있는 것.

빅보스의 입장에서 변호를 하자면 사실 현재의 성적은 닛폰햄 팀 문제가 더 크다. 3년 연속 B클래스에 작년 간신히 5위였던 루징팀을 물려받았는데, 2020년 시즌후에는 1선발 아리하라는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2021년엔 니시카와와 오오타, 나카타의 방출로 클린업이 완전히 해체되어버렸는데 거의 일본 한화이글스 수준의 팀을 물려줘놓고 잘하라는 것은 좀 양심이 없는 요구다. 심지어 그러면서 FA도 하나도 안 사줬다.[68] 그나마 외국인은 좀 비싼 걸 사준 정도. 사실 이런 꼴찌가 당연한 수준의 전력으로 은근슬쩍 4,5위와 비벼지는 걸 보면 오히려 그럭저럭 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편이라 일본 내에서는 아직까지 그럭저럭 긍정적인 여론이 더 많은 편. 사실 팀에서 빅 보스에게 바라는 것도 당장의 성적보다는 리빌딩이니만큼, 얼마나 새로운 얼굴들을 키워낼 수 있느냐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빅보스도 그걸 알기 때문에 저런 기행같아 보이지만 계속 신인들에게 기회와 경험이 많이 돌아가도록 매경기 타순 바꾸기, 메이저리그식 4일 휴식 로테이션 등등을 하는 것이고.

하지만 골든 위크 기간을 포함해 늘어나는 패배에 5월 10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도 패배 직후 결국 "1군에 남고 싶은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방망이를 내지 않는 한 평생 결과가 안나온다."며 드물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배 속에서도 성장시킨다는 뉘앙스로 개막 이전에 말했던 것은 뭐였냐는 여론이 있다.

교류전에 도입해서, 6월 1일 경기가 끝난 기준, 8경기에서 4승 4패를 거두면서, 생각보다 꽤 선전하고 있다. 야쿠르트와 원정 3연전에서는 비록 1승 2패였지만, 2번 모두 끝내기로 졌을 만큼, 잘 싸워주었고, 요미우리와의 홈 시리즈에서는 위닝시리즈라는 놀라운 결과물을 내었다. 히로시마 원정 3연전에서도 위닝을 확보했다. 그리고 6월 3~5일 대망의 일본 최하위 결정전 한신과의 원정 3연전을 벌일 예정.
3일 경기 전 외야 관중석을 향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보이는 등 감개무량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고시엔의 관중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별개로 경기는 불펜 불쇼로 7-1에서 역전패를 당하는 등 스윕을 당하면서 아낌없는 친정사랑을 보여주었다.


10. 여담[편집]


신조 츠요시 괴짜 전설

위키에 소개된 내용 이외에도 청바지 핏이 안 산다고 하체 트레이닝을 거부한다든가, Who Wants to Be a Millionaire?일본판 프로그램에 나가서 마지막 문제를 연필을 굴려 맞췄다든가 하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한국 웹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가와 케이와 함께 한신 역사상 양대 기인이라 할 수 있는 선수인데, 공교롭게도 만화 루키즈에는 이 둘의 이름을 합친 '신조 케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크레용 신짱에 나온 바로는 노하라 미사에가 신조의 팬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시대상으로 OB 베어스박철순팬이라고 현지화로 번역됐다.

야키소바 컵라면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발리에서 스스로 트레이닝을 할 때 주식으로 먹기도 했는데, 발리에서 살 동안 훈련기간에 탄수화물만 먹는다고 팬들이 기겁하기도 했다.

2022년 후지TV에서 고향 쓰시마 섬을 위하여 80만엔을 한번에 쓰는 기획을 했는데, 쓰시마가 워낙 좁고 돈을 쓸 곳이 없다 보니 아무리 비싼 곳을 가봐도 돈을 다 쓰지 못한 상태로 녹화가 끝났다.


10.1. 팬 서비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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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5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본인의 얼굴로 이루어진 특수메이크업을 하고 등장한 모습

  • 2005년 9월에 신조 츠요시의 마스크를 쓴 5명의 SHINJO[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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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한신과의 교류전에서 보여준 돔 천장에서 등장하는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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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닛폰햄의 마지막시즌이자 본인의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06년 우승후 소속팀 카퍼레이드에서 보여준 욘사마 코스프레

신조 츠요시를 대표하는 점은 팬들을 위한 뛰어난 팬서비스 퍼포먼스다. 한신시절에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기 했지만 본격적으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시작한건 메이저리그에서 리턴한 이후인 닛폰햄 파이터즈시절 이러한 모습은 당시 성적이 좋았던 닛폰햄의 상황과 맞물려 홋카이도로 갓 연고지를 이전한 닛폰햄을 자리잡게한 공신이 되었다.


11. 사건 사고[편집]



11.1. 각성제 복용 의혹[편집]


2022년 6월 8일 주간문춘에서 2006년 도핑 테스트[70]에서 각성제가 검출되었다고 보도하면서[71] 이것이 은퇴의 원인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당시 NPB 사무국은 자칫하면 마약과 연관될 수 있다는 생각에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으나 혐의점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암페타민이 MLB에서도 금지약물일 뿐 경기력 향상 약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은 감안이 필요하다. 자세한 건 암페타민 문서의 여담 문단 참고 바람.


12.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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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 등록명이다.[2]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신조 쓰요시'.[3] 메인 포지션은 중견수.[4] 입단 초기인 1992~93년까지는 내야수로 등록되어 있었다.[5] それ行け Go! 新庄 燃える男 それ行け Go! 新庄 根性見せろ (그래 가자 GO! 신조 불타는 남자 그래 가자 GO! 신조 근성을 보여라) [6] メジャーで鍛えた技と 熱き鼓動を打ち鳴らして 燃えろ新庄 北の大地の星とな (메이저리그 에서 갈고 닦은 기술과뜨거운 박동을 두드리며 타올라라 신조 북쪽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라)[7] 본 항목명이 '신조'로 되어있긴 하나 실제 일본어 표기나 발음을 고려하면 '신죠'에 가깝다. 그런데 일본에서 통용되는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SHINJO(장음까지 표기하면 SHINJŌ)로 표기되어, 영미권 사람들의 발음과는 이래저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보니 본인 나름대로 공식적인 표기법과는 별개로 저런 표기를 쓴 듯. 참고로 일본에서 '조'로 발음되는 음운은 헵번식 표기법에서 'ZO'로 옮겨진다. 사실 일본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SINZYO(장음까지 표기하면 SINZYÔ)가 되므로 나름의 대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8] 1989년 드래프트는 8개 구단 동시 1차 지명의 전설을 쓴 노모 히데오를 필두로 후루타 아츠야 등 레전드급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드래프트로 유명하다.[9] 1회 재임 기준 한신 역대 최장기간 재임 감독(1회로 기준을 잡은 이유는 2회 이상을 포함하면 요시다 요시오가 있기 때문). 이후 한신 GM을 지내고 오승환의 영입에 관여하기도 했다. 201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0] 격려차 하는 시합[11] 한신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하고 오사카 사투리로 감사 인사를 하는 등 팬들에게 사랑받았지만, 1995년에 야쿠르트로 이적. 야쿠르트에서도 1995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일등공신급 활약을 했다. 일본시리즈 4차전 11회에서 코바야시 히로시와의 14구 대전은 일본에서 상당히 유명한 대결이다.[12] 1992년 이후도 암울하지만 1987~1991년까지 5년간 한신은 꼴찌를 네 번이나 했다. 하지만 이때 활약한 카메야마 츠토무는 몇 시즌 지나지 않아 방출... 그 카메야마 츠토무는 도톤보리 강의 구이다오레 인형과 닮은 외모로 유명했다. 덕분에 한신이 잘 나가던 시절 구이다오레 인형은 샌더스 동상처럼 당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자신은 수영 못한다는 말풍선과 튜브를 목에 걸기도 했다.[13] 2016년부터 한신 타이거스 수비주루 코치로 있으며, 한신에 처음 왔던 1992년부터 주전 유격수였다. 1997년 야노 아키히로 등과의 트레이드로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뒤에는 이종범을 유격수 포지션에서 밀어낸 직접적인 장본인. 수비력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14] 덕분에 쿠지는 그해 센트럴리그 최초 무홈런 타자 신인왕이 되었다. 쿠지는 이듬해인 1993년에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15] 2021년 신인 나카노 타쿠무가 362.5%로 사쿠라이의 기록도 깨 버렸다(기존 800만엔에서 21시즌 후 3700만엔으로 인상).[16] 일본의 골든글러브는 한국과는 달리 최고 수비를 선정하는 상이다. 베스트나인은 타격 성적 위주로 수상하며 한국의 골든글러브와 유사하다.[17] 타율/출루율/장타율 .251/.305/.463, 23홈런 62타점 13도루. 수비로는 102시합, 236자살, 13보살, 6실책, 병살 처리 1, 수비율 .976[18] 수비기록은 120시합, 289자살, 4보살, 1실책, 수비율 .997[19] 다만 후지타에 의하면 당시 연습 시간에 지각을 당연한 듯이 일삼던 선수들이 많았기에 선수들에게 직접 규칙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이에 지각한 시간만큼 정좌를 하는 것으로 선수들끼리 직접 합의를 했다고 한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20] 카나모리는 이때가 첫 선발 등판이었는데, 만루홈런 2개를 맞는 바람에 당시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에게 미움을 사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 이후 대만 퉁이 라이온즈에서 계투로 좀 뛰다가 일본으로 복귀 주니치에 다시 입단했으나 1군에 오르지 못하고 다시 전력외 통보를 받고 퇴단했다. 참으로 기구한 삶... 그리고 시오타니는 SK에서 일본인 용병으로 큰 화제를 모았으나 손가락 부상 이후 선수생활을 사실상 종료, 현재는 독립 리그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후쿠이 미라클 엘리펀츠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21] 수비기록은 111시합, 247자살, 6보살, 4실책, 병살처리 1, 수비율 .984[22] 수비성적 135경기 출장, 276자살, 13보살, 6실책, 병살처리 1개, 수비율. 980[23] 수비성적 124경기 출장, 268자살, 12보살, 4실책, 병살처리 5개, 수비율. 986[24] 수비성적은 121경기 출장, 247자살, 8보살, 3실책, 병살처리 2개, 수비율. 988[25] 타격성적은 타율/출루율/장타율 순으로 .278/.321/.491, 142안타, 28홈런, 86타점, 15도루[26] 수비성적은 129경기 출장, 251자살, 8보살, 3실책, 병살처리 3개, 수비율. 989[27] http://www.baseball-reference.com/players/s/shinjts01.shtml Salaries 부분 참조[28] 이때 노무라 감독은 팀의 유일한 레귤러가 떠나간다며 아쉬워했다.[29] 선발 라인업 및 경기 진행 실황 확인 후 개별 경기로 문서를 분리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이 시점까지는 임시로 한신 타이거스 틀을 부착할 예정입니다.[30] 일본프로야구 마지막 퍼펙트 게임 기록 보유자였다. 1985년 백스크린 3연발의 희생자로 기억에 남아있지만, 통산 성적상으로는 한신 킬러. 한신 상대로 38승 10패 10완봉을 기록하였다. 다만 선술한 백스크린 3연발 및 본 고의사구 끝내기 허용으로 인해 한신에 약한 거 아니냐는 말이 오가기도 했다. 그의 일본프로야구 마지막 퍼펙트 게임 기록은 2022년 비로소 사사키 로키에 의해 갱신되게 된다. [31] 현역 시절 고의사구를 받아쳐 홈런을 만든 적이 있었다.[32] 나가시마 시게오의 아들인 카즈시게가 MC로 출연하고있다.[33] 2012년 시즌 종료 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은퇴했다.[34] 이 해의메이저 외야수 가운데 5번째, 신인 외야수 가운데 최다였으며, 구단 신인 외야수 중 최다였다.[35] 현역 마지막 해인 2006년, 신조는 이 두 가지를 다 이루었다.[36] 126석을 만들어 야구를 하는 아이들을 경기마다 무료로 초빙했다.[37] 이때 전적은 6전 4승 1패 1무.[38] 상술했듯 99년 한신에서 데뷔하며 신조와 함께 주전 외야수를 맡던 선수였지만 2003년 닛폰햄의 포수 노구치 토시히로와 트레이드되었다.[39] 투수는 한신의 후쿠하라 시노부, 포수는 역시 한신의 야노 아키히로, 타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40] 플레이가 인정되지 않으려면 볼 데드여야 하는데 포수가 투수에게 공을 건네주는 동안의 공은 볼 데드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게 볼 데드려면 투구가 이루어진 순간부터 타자, 주자를 제외한 필드 상의 모든 선수는 수비수로 간주되니 도루 잡는 것도 볼 데드여야 한다.[41] 그 장면에서 해설석에는 죠지마 켄지가 특별해설로 앉아있었는데, MVP급 플레이라며 웃었다.[42]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4번타자로 NPB 최초 3년 연속 시즌 120타점을 기록했다.[43]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합병으로 촉발되어 아예 요미우리 회장인 와타나베 츠네오가 중심이 되어 단일리그 10구단으로 리그를 재편성하려 했고, 결국 이에 반발한 선수노조가 회장 후루타 아츠야의 지도 하에 파업을 단행한다. 와타나베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일본프로야구계에서 발언권이 아주 강력한 인물이다. 애초에 일본 프로 스포츠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팀이 요미우리 자이언츠고 그 요미우리의 구단주가 바로 와타나베 츠베오다.[44] 아카렌쟈 : 모리모토 히초리, 아오렌쟈 : 시마다 카즈테루(島田一輝), 키렌쟈: 신조, 모모렌쟈: 이시모토 츠토무(石本努), 미도렌쟈: 츠보이 토모치카[45] 타격성적 .298/.327/.508, 150안타, 24홈런, 79타점[46] 수비성적 122경기 출장, 272자살, 8보살, 5실책, 병살처리 1, 수비율 .982[47] 독특한 언행으로 개념 없는 운동선수로 알려졌지만, 신조 츠요시는 굉장히 지적인 사람이다. 그의 퍼포먼스는 여러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자신이 생각하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의 실천에 가깝다.[48] 바퀴 세 개 달린 오토바이[49] 연습복이 좀 화려했다고 하는데, 프로선수가 몸가짐을 똑바로 안 하면, 타의모범이 될 수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당시 관계자 중 하나는 신조 이전에 그러던 선수가 없던 것이 아닌데, 신조였기에 문제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옷깃이 있는 이너웨어는 80년대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꽤 흔히 볼 수 있었다.[50] 다르빗슈 유가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닛폰햄의 2006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1962년 장훈이 대활약한 첫 제패 이후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제패였다.[51] 신조,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팀 최연장자인 다나카 유키오, 구단 사장, 트레이 힐만 감독 순으로 헹가레를 했다. 당시 팀의 일원이던 모리모토 히초리, 다르빗슈 유, 가네무라 사토루, 오카지마 히데키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52] 메이저 당시 좌완 한정 플래툰으로 출전했기 때문이다.[53] 그래서 대만, 한국, 우주리그를 가도 2할 5푼을 칠거라는 농담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54] 신조에게 적시타를 맞은 비운의 허용투수는 히구마 쥬리어스라는 미국 혼혈 선수였다. 이 선수는 1997년생으로 2015년 드래프트에서 4라운더로 야쿠르트에 입단했으나 1군 기록 없이 5년만에 방출당하고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이 선수가 더 안타까운 것은 신조 앞에 상대한 두 선수 상대로도 전부 볼넷을 내주는 바람에(...) 2볼넷 1안타라는 최악의 기록으로 트라이아웃을 마무리했다는 점.[55] 이 때문인지 일본 위키피디아 신조 문서에서 신조의 호칭을 감독으로 할지 빅 보스로 할지에 대한 토론이 붙었다.# 또한 BB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데, 닛폰햄 마스코트 이름과 겹쳐서 신조 본인이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중.[56] 도시락을 한번에 7개 먹는데 신조 빅보스는 웬만하면 한번에 3개까지 먹으라고 하였다(...). 일반인 기준으로 하나 이상도 힘든 사람이 많은데 이 쓴소리로 인해 키요미야는 실제로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57] 파일:신조마캠.jpg아예 배트를 들고 승합차 위로 올라가 배트로 일정 높이(3m)를 가리키며 이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는 송구는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위의 사진이 바로 이때 찍힌 사진. 실제로 사회인야구에서도 낮게 송구하는 것을 바람직한 송구로 보고 있다.[58] 이 이유는 외야수가 홈에 송구할 때 송구의 높이가 너무 높으면 커트맨이 커트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나머지 주자들 혹은 안타를 친 주자가 추가 진루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야에서의 송구는 내야에서 1루수 등의 커트맨이 잡을 수 있는 정도로 주는 것이 바람직하며, 일부러 원바운드가 되게끔 던지는 장면도 있다.[59] 실제로 스기야는 연봉이 20%나 깎여도 신조 감독을 보고 자라온 성덕이기에, 신조 감독의 힘이 되고 싶다고 언급하였다. 닛폰햄 구단 측에서 덕아웃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남겨둔 듯. 하지만 스기야는 오프시즌에 신조 감독이 예능 나오지 말라고 해서 이번 오프시즌에는 안 나온다(...).[60] 신조는 이제 50대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나이살 하나없이 슬림핏 근육질과 식스팩을 유지하고 있고 11월 초 인증까지 했다.[61] 가라폰을 굴려서 나온 숫자가 그날의 타순이 되며, 붉은 구슬이 나오면 선발에서 제외되는 방식으로 진행.[62] 이 발언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신조의 언행을 비판했다. 이러한 발언이 몹시 꼰대같다며 젊은 세대들이 키요하라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현 시점에서는 해당 발언과 반발 여론이 소리없이 묻혔다. 사실 저 발언을 해도 키요하라의 유튜브 채널은 중장년층이 주 시청자라 젊은 사람들이 반발해도 딱히 큰 영향은 없었다. 그나마 구독자 수가 조금 줄어 50~49만대에서 유지될 정도.[63] 신조는 언론과의 관계도 상당히 신경쓰는 편이라, 스프링캠프 때 기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64] 그나마 2010년 알렉스 라미레스가 외국인 제한이 풀려 등록명을 라미짱으로 하려 했지만 하필 소속팀이 등록명에 매우 보수적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라 무산됐다. 참고로 요미우리는 본명 말곤 등록명을 쓸 수 없으며 한국이나 일본등 한자권 국가 출신 선수면 무조건 등록명을 본명으로만 해야하며 서양 선수들은 이름이 엄청 길지 않는 이상 가타카나로만 해야한다. C.C 메르세데스(본명은 크리스토퍼 크리스토모 메르세데스)처럼 이름이 길지 않는 이상 줄이지도 못한다. 대신 팀내 선수들끼리 등록명이 겹치지 않기 위해 본명을 풀네임으로 쓰거나 성+이름 일부 정도는 허용해 준다.[65] 6월 3, 4, 5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진행 예정.[66] 추격점을 냈던 타자들이 그 팬이 정하지 않은 선수들이었다는게 코미디.[67] 아무리 태만하게 플레이를 해도 신체적 기량이 가장 뛰어난 20대후반인데다 출루율이 초라한 타율치곤 꽤 높게나와서(타출갭이 1할이 가까이 된다) 반등의 여지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쳐냈다. 결국 타 구단들이 낚아채기 위해 오퍼를 보냈고 가장 나은 조건을 제시했던 라쿠텐으로 간 것이다.[68] 다만 2022년 스토브리그엔 그럴싸한 FA 매물이 주니치의 불펜투수 마타요시 카즈키 빼곤 거의 없기도 했다. 그 망했다던 2021년은 타선이랑 수비가 문제였지 투수진은 돔구장의 어드밴티지를 받으면서 중상위권을 유지해왔기에 투수진이 괜찮은 상황에서 다른 투수를 큰돈들여 영입할 필요가 없었다.[69] 신조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이시모토 츠토무, 이나바 아츠노리,고야노 에이치, 모리모토 히초리다.[70] 당시 도핑 테스트는 NPB에서 처음 시행되었기 때문에 제재 없이 비공개로 결과를 통보했다.[71] 정황상 암페타민의 일종인 그리니로 보인다. 메이저리그에서는 2006년, NPB에서는 2007년 금지약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