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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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해석
2.1. 원문
2.2. 의미
2.3. 신 부재의 극복
3. 창작물에서의 신은 죽었다
4. 여담



1. 개요[편집]


"최근에 일어난 최대 사건 ㅡ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는 것, 기독교 신에 대한 신앙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 ㅡ 은 유럽에 이미 그 첫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 중략 ..) 신 자체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는 것이 이제 입증된다면?"

프리드리히 니체[1]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현재의 세대는 이전 세대의 희생과 업적 덕택으로 존속해왔다는 부채의식 때문에 조상이 만든 모든 관습에 복종하게 되었고, 이런 복종의 의무는 필연적으로 조상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조상에 대한 공포는 그 자체의 상상에 의해서 종내에는 어마어마한 존재로 커지게 되어 결국에는 그것이 하나의 신으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니체에 따르면 신은 조상에 대한 공포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 '신 자체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는 이 주장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사실 그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 그래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목표를 상실하게된 인간은, 이제 어떤 목표를 추구하며 살아야 될까를 얘기해봐야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2][3]


2. 해석[편집]



2.1. 원문[편집]


니체가 그의 철학적 용어로 이 문장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그의 저서인 《즐거운 학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한 미치광이가 '신을 믿는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낮에 횃불을 들고,[4] '신(God)의 부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원문을 보면...

그대들은 밝은 아침에 등불을 켜고 시장으로 달려가 쉴새없이 이렇게 외치는 미치광이[5]

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

주변에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서 있었으므로, 그는 더 많은 조소를 일으켰다. 길이라도 잃은 것인가? 누군가가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길을 못 찾고 헤메는 것인가? 또 다른 이가 말했다. 아니면 그는 숨는 것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여행을 하던 것인가? 이민을 위해 온 것인가?—이렇게 그들은 소리치고 웃었다. 미치광이는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내가 가르쳐주리라.[6]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였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전부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7]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쓸어내어 버릴 스펀지라도 주었는가?[8] 우리가 이 지구를 해로부터 풀어주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9] 그것은 이제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는가?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가?[10]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아직도 위쪽이 있고 아래쪽이 있는가? 우리는 끝없는 허무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11] 빈 공간의 흐름을 느끼지도 못하진 않는가? 계속해서 추워지지는 않는가? 밤이 우리를 점점 궁지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12] 우리는 아침에도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13] 아직도 사토장이[14]들이 신을 땅에 묻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직도 신이 부패해 가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 또한 부패한다.[15]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2.2. 의미[편집]


'추구해야할 절대적 가치는 이제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신'의 대표되는 절대적 가치는 서양철학사의 맥락에서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플라톤의 '이데아', 그리스도교의 '로고스(The Word: 신)', 칸트의 '실천이성(도덕)의 신 요청' 등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절대적 이성인 '이데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 의하여 '신'으로 통용되었으며, 이러한 '신'은 근대철학의 칸트에 의하여 '도덕적 실천이성에 의해 요청되는 존재'로 분류되어진 것이다.

여기서 '신 개념'은 2단계를 거치면서 우리에게 절대적 영향을 행사한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신 개념'으로 치환시켰을 때 문제가 생겼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현실의 삶보다 내세의 삶(천국)을 더 강조하기에 이르렀고, 천국을 강조할수록 '현실에서의 삶'은 점점더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게 되버렸다. 본래, 이상적인 삶의 추구라 해서 현실에서의 삶을 모두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데아(이상)를 신 개념으로 치환시키게 되자, 이상적인 삶의 추구는 절대화되었고 더이상 현실에서의 어떤 삶마저도 모두 용납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칸트가 '실천이성의 신(God) 요청'을 말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신'은 '도덕'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덕화된 그리스도교의 신은 심지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회는 항상 자신의 욕망을 버리도록 강요받고 있다.[16] 즉, 모든 도덕적 가치 기준은 신이 이미 정해놓은 것이므로, 인간은 그 가치를 따라야만 하는 존재이며 거기에서 벗어난 가치는 억압되고 왜곡된다.

결국 두단계를 거쳐 '신 개념'은 현실에서의 삶을 억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야말로 니체가 추구하는 철학적 목표이기에, '현실의 삶'을 옥죄이는 이러한 '신'은 죽어야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인 것이다.

2.3. 신 부재의 극복[편집]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의 사라짐은 인간에게 목적의식을 잃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현실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목표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즉,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신이 사라진 세계'의 인간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행위인 것이다. 니체는 그 목표가 '힘'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 '힘'은 우주 만물 모두에게 있는 힘이며 에너지고 생명력이다. 이 '힘'은 단지 생존을 위해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자하는 의지를 발현시키는 힘이다. 니체가 『아침놀』에서 말했듯이, "사람은 주거를 제공하고, 오락을 제공하고, 음식과 영양을 제공하고, 건강을 주었음에도, 여전히 불행과 불만을 느낀다. 사람은 압도적인 힘을 원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또다른 목표를 끊임없이 세움으로써 허무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간다. 그 가치는 자신이 만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만큼은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일테다. 이것이 신이 죽은 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충실히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예상되는 '위험'에 겁먹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면, 그 자신의 길을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마치 춤을 추듯이, 놀이를 즐기듯이 '힘에의 의지'를 마음껏 누리면서 세상에 도전하며, 제 자신의 삶을 모험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도 말했듯이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천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우리는 '목적'이 없다고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삶을 하나의 놀이로 보며,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와 가치를 창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찌 우리는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 그런고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7]

해석1: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절대적 이성'을 가치로 삼고 살아야 되는데, 현실의 삶을 사는 우리가 이걸 견딜 수 있겠느냐! 그런 까닭에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으면 안된다는 뜻.

해석2: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아닌 우리'는 '창조 행위'를 하지 못할 것인데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 (창조는 신의 역할이기 때문..) 그러므로 새로운 가치 창조를 막는 신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뜻.


3. 창작물에서의 신은 죽었다[편집]







  • 신 같네 노래 가사에서 Gott ist tot가 언급된다.



  •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다룬 일상 4컷 만화 니체 선생에서도, 불교를 공부하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 "손님은 신"이라고 진상을 부리는 취객에게 "신은 죽었다."며 손놈의 얼굴에 바코드를 찍는다.

  •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신이 자신의 종족을 완전에 이르게 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신의 화염에 최후를 맞는다. 그것이 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한다. 자신이 돌보던 종족이 마침내 기쁨에 찬 목소리로 '신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사실 새 시리즈에선 말 그대로 신의 살해가 아닌 숨겨진 뜻 - 절대적 진리의 부정 - 역시 드러난다. 바우 성주의 신념에 가득 찼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는 말이나 계속해서 나타나는 도덕에 대한 부정 등이 그 예. 애초에 니체 철학이 매우 감미된 소설이다.

  • 2014년에 개봉한(한국 2015년 개봉) 미국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에서는 "신은 죽었다"를 모티브로 하되, 내용은 정반대로 학생들에게 신의 죽음을 강요하는 교수를 상대로 학생인 주인공이 신은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이 명제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찰보다는 기독교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적인 영화다.[18] 그리고 후속작으로 2016년에 개봉한(한국 2017년 개봉) 신은 죽지 않았다 2도 나왔는데, 무신론 수업을 강요하는 학교 선생에 대해서 한 교사가 투쟁하는 내용을 법정 드라마로 다루고 있다. 역시 기독교적 믿음이 주제이다. 두 영화 다 작중에서 기독교가 탄압받는 듯한 연출이 있는데, 실상은 정반대다. 사회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고 광범위하게 근본주의가 횡행하고 불신자는 아예 정치출마도 못하게 법으로 정한 주도 많은 곳이 미국이다. 현실의 미국 사회에서 특히 남쪽에서는 무신론자에 대한 인식은 꽤 나쁘다. 다만 무종교인에 대해서는 그나마 나은편.[19] 다만 2010년대 이후로는 무종교인의 증가로 이러한 인식은 많이 사라졌으며 종교적인 곳은 치안이나 사회가 개판이라는 인식이 많이 생겼으므로 이는 어느정도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 미국은 무종교인 인구가 가톨릭 인구를 추월했다. 단, 이 배경이 북미나, 한국, 유럽이 아닌 곳들이라면 제법 맞아떨어지는데, 영화에서처럼 기독교 신자가 타인에게 언어적인 박해만 받게 되면 다행일 지경인 기독교공포증 국가는 전세계에 아주 많다. 특히 대표적인 곳으로는 중동 및 이슬람 문화권 국가들이다. 물론, 이슬람권 국가들은 무신론자가 살기에도 무척 힘든 곳이다. 3편인 신은 죽지 않았다 3: 어둠 속의 빛과 2021년작 4편까지 나왔다.

  • 인디 게임 제작 팀 hc에서 만든 비주얼 노벨five colors volunteers에서는 토끼가 미쳐버리자 갑자기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주변 인물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토끼는 화를 내고 결국 주변에서 억지로 인정하게 되는데 이때 토끼가 말한다.




  • 신을 죽이는 방법에선 신을 죽이는 주문으로 나오는데 "신 ○○○은/는 죽었다" 이런 구조다.



4. 여담[편집]



  • 니체의 이 말이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론적으로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맞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신의 기원을 "조상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했으며, 『즐거운 학문』에서는 신이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고까지 말했다. '신 개념'이 니체의 책에서 긍정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은 '유일신'이 아닌 '여러 신'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때 '신 개념'은 여러 가치 중의 하나의 가치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니체가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단, 니체는 예수를 그렇게까지는 비판하지 않았는데, '사람'인 예수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신'으로 섬긴 그리스도교인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20]

  • 이와 관련해서 니체와 신과 청소부를 동시에 등장시키는 농담도 있었다. 이 낙서는 만화 광수생각에도 나온적이 있다. 다만 여기선 변형되어서 낙서를 지우면서 '걸리면 죽는다'로 바뀌었다. 사실은 니체의 모국인 독일에서 비롯된 농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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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관련된 전통적인 낙서 패턴이 하나 있으며, 뒤의 두 문장은 소소하게 차이가 있는 다양한 파생형들이 있다.

  • 2008년 KBS 예능프로 1박 2일의 강원도 인제 편에서 멤버들간 퀴즈대결을 벌이다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한 사람을 맞히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여기서 강호동은 "신이 왜 죽어요"라는 오답을 내놓았고 오답에 대한 벌칙으로 물대포 세례를 맞았다.

  • 도올 김용옥은 저서 '노자와 21세기'에서 신흥종교, 사이비종교 등 온갖 종교가 보편화된 20세기를[21] 예를 들면서 '니이체는 헛지랄을 한 것이다. 도무지 죽일 수 없는 것을 죽인 것이다...(중략)...서구문명에 대한 양심선언에 불과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1] 『즐거운 학문』 제5부 우리들 두려움 모르는 존재들.[2]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종교·도덕비판 뿐만이 아니라 '목적론, 인과론, 이성, 평등, 주체' 등의 개념 역시, 하나의 허구이자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다만 이 주제들은 신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인과론과 목적론, 이성, 평등, 주체의 개념을 각각 따로따로 깨부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타겟이 종교(신)인 셈.[3] 니체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 단지 '하나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과학같은 학문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즉, 모든 것은 '하나의 관점'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강제하려는 그 종교의 특성을 극렬히 비판했던 것.[4] '신이라고 불리는 절대적 진리가 없는 세상은, 마치 어두캄캄한 밤과 같다'는 비유적 표현이다.[5]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패러디한 것이다. 하루는 디오게네스가 벌건 대낮에 손에 든 램프에 불을 켜고 길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어떤 사람이 뭐하냐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사람을 찾고 있다네"라고 대답했다. 멀쩡한 대낮에 등불을 켜고 살펴봐도 사람다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디오게네스는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는데, 니체에게 있어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스승으로서 "절대적 진리 = 신"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디오게네스는 신을 저격하는 역할에 적격인 셈.[6] 사실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데, 신을 찾는 행동을 했다는 얘기다. 즉, 신을 찾는 행동은 퍼포먼스였던 것.[7] 니체는 바다를 "모험의 장소"로 인식한다. 예술, 문학, 신학, 과학 등등, 가치 위에서 놀 수 있고 그 가치에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뜻한다.[8] 여기서 지평선은 그 너머에 미래의 목적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지평선 전체가 없어졌다는 것은, 즉 우리가 추구할 목적이 이제 사라졌음을 말한다.[9] 해(태양)는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서 '진리(이데아)'를 말하는 것이다. 해가 지구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10] 항성(별)은 개개인을 가리킨다.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말은, 즉 '개인주의'를 의미한다.[11]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기에 허무주의로 귀결된다.[12] 밤은 진리(태양)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상대주의(절대적인 진리란 없으므로)는 허무주의로 귀결됨으로써, 우리의 삶마저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3] 여기서 아침은 새로운 기준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근데 그것도 역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으므로, 개인은 자신만의 등불(가치)를 밝혀야만 된다.[14] 무덤을 만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사토장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교회의 사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니체는 같은 책에서 "신의 무덤은 바로 교회"라고 말한다.[15]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믿는 교회의 사제(사토장이)들 역시도,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제각기 다르다. 그들의 믿음과 해석은 '주관적'이다. 그러한 믿음과 해석은 결코 신의 존재를 확신시켜주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을 땅에 묻고 있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신이 부패한다는 것은 '신이라는 개념' 자체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점차 변화해왔다는 것을 말한다.[16] 니체는 구약(유대인)의 '신'은 긍정한다. 이러한 '인격신'은 잘못도 저지르면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다니기에(욕구를 가지고 욕심을 추구하기에), 그리스 신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인간의 삶을 '투영'해주어 그 '현실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17]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 최혁순 역에서 인용.[18] 그 예로 무신론자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교수가 실은 어릴 적, 기독교 신자였다가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입은, 사실상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이상의 반신론자라는 것이다. 물론 그가 무신론자이면서 반신론자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유신론자나 종교인이었다가 상처를 받고 무신론자가 된 사례는 의외로 제법 흔하다.[19] 물론 냉전시기에 이루워진 반공정서 때문일수도 미국에서는 무신론자는 공산주의와 연관되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20] 니체는 예수를 신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보았다.[21] 실제로 남미에서는 가톨릭이 세를 급격히 늘려나갔고, 종교극단주의가 본격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도 20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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