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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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용수(독립운동가).jpg


자문(子文)
본관
거창 신씨[1]
출생
1888년 10월 28일
전라도 흥덕현 이서면 사천리
(現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2] 60번지[3])
사망
1951년 6월 29일 (향년 62세)
전라북도 고창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2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신용수는 1888년 10월 28일 전라도 흥덕현 이서면 사천리(現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 60번지)에서 아버지 신희범(愼喜範, 1867 ~ 1947. 2. 20)과 어머니 의성 김씨(? ~ ?. 8. 14)[4] 사이의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후 1906년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군 고현내면 원촌리(現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부친 신희범을 따라 어린 나이로 입진하였다. 1908년 2월 박도경(朴道京) 의병장이 남포군(藍浦郡)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재차 입진했고,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3월 1일에는 고창군에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0일간 옥고를 치렀다. 한편, 같은 해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감독 및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하여 전라북도 전주군 지방에 전북독립운동감독부를 설치하고 노진룡(魯鎭龍)을 감독에, 오의균(吳毅均)을 부감독에 임명했는데, 이때 신용수는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족의식 고취 등에 진력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1년 6월 29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별세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고향인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에 안장되었다가 2016년 9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편집]


  • 친일반민족행위자 신용욱은 6촌 동생이다.파일:신용욱 신용수 촌수결과 1.png파일:신용욱 신용수 촌수결과 2.png
  • 증손자 신헌규(愼憲揆, 1965. 11. 14 ~ )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울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약리학 전공으로 2000년 8월 의학 석사 학위[5], 2003년 의학 박사 학위[6]를 각각 취득했다. 이후 서울아산병원 전임의를 거쳐 현재 강북삼성병원 정형외과 교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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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의공파 32세 용(鏞) 항렬.[2]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신용남·신용욱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이 지번의 필지는 1914년 9월 5일 토지조사사업 당시 신용수 자신의 소유가 되었다.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이 지번의 필지는 신용수 자신의 소유였다. 이후 1988년 8월 31일 장남 신정재(愼正宰, 1912. 11. 14 ~ 2004. 3. 19)에 의해 소유권보존등기가 이뤄졌고, 2004년 1월 15일 장증손자 신광규(愼光揆, 1963. 5. 7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4] 김용재(金龍載)의 딸이다.[5] 석사 학위 논문 : 유전적으로 고혈압을 유발시킨 쥐에서 심근과 장간막 동맥 칼슘조절 단백질의 기능과 발현 level의 변화(2000. 8).[6] 박사 학위 논문 : 중등부 야구 투수의 주관절 변화에 대한 분석(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