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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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시대별 구분
2.1. 구석기 시대
2.1.1. 석기의 등장
2.1.2. 수렵과 채집의 시대
2.1.3. 인류의 대확산
2.1.4. 유적
2.2. 중석기 시대
2.3. 신석기 시대
2.3.1.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2.3.2. 황하 유역의 신석기 문화 전개 양상
2.3.3. 관련 문서
3. 관련 영상
4. 창작물에서
5. 기타




1. 개요[편집]


석기시대(, Stone Age)는 인간을 주요한 도구로 사용한 시대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사용한 도구로는 돌을 깨서 만든 뗀석기,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가 있다. 보통 돌로 만든 도구의 수준에 따라서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이 시기는 인간의 문명이 미약했던 시기이고,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이라는 뜻의 선사 시대(先史時代, Prehistory)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대다.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동기 시대라는 중간기를 설정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가 지역 구분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인 것에 반해 동기 시대는 지역별로 존속 기간 등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기 시대를 설정할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인 편이다.[1]


2. 시대별 구분[편집]



2.1. 구석기 시대[편집]


/ Paleolithic (Period)[2]
파일:빙하기 동아시아.jpg
마지막 빙하기의 동아시아 해안선.

260만 년~300만 년 전부터 시작되어, 지역에 따라 9000년~1만 5천 년 전까지의 시기로 보는 매우 긴 시기다. 신석기 시대의 돌입 이전은 전부 구석기 시대라고 보면 된다. 인간이 살았던 시기[3]를 100(300~400만년)으로 본다면 구석기 시대는 98.8 정도를 차지하는 매우 긴 시기가 된다. 쉽게 말해서 인류가 탄생한 지 24시간이 됐다고 가정하면 약 15분 전까지만 해도 주먹도끼 휘두르는 원시인이었단 소리. 거기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전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600~700만년 전)를 정식 인류의 조상으로 인정한다면 구석기 시대의 비중이 훨씬 더 늘어난다.

지질학적인 기준으로는 플라이오세 말기, 플라이스토세의 일부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옛 석기 시대. 인류 최초의 시대 구분으로, 선사 시대 중 처음을 장식하는 시대이다. 인류학적 분류로 보면 아프리카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가장 먼저 구석기를 사용했다. 현재로서는 인류와 다른 동물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시대로,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들은 많으나 아직까지 인류 외에는 '돌을 깨서 도구를 만든다'는 개념까지 도달한 동물은 카푸친 원숭이밖에 없다.[4][5] 그래서 카푸친 원숭이는 돌 자체를 도구로 사용한 지는 3000년 전, 돌을 깨서 석기를 만들어 사용한 건 최소 700년 전부터라고 하는데, 그래서 인간 외에 석기시대에 진입한 유일한 동물로 보며, 이 원숭이들이 200만 년 정도 더 지나면 인간처럼 문명을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1.1. 석기의 등장[편집]


뗀석기에는 행위에 의식과 목적이 있다.[6]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4: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기는 2015년 케냐 로메퀴에서 발견된 330만 년 전 석기이다. # 하지만 호모종이 만든 것은 아니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이 시대에 사용된 석기는 뗀석기(= 타제석기, 打製石器)[7]를 사용하였으며, 전문가가 아니면 이것이 그냥 돌인지 석기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전문가는 타격법과 가압법을 구분해 가공 여부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긁개를 두고 59개 유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전기 구석기일수록 돌을 좌우로 나누었을 때 그 대칭이 명확한 편이다.



유튜브 뗀석기 만드는 법. 9:20 구간에 보면 진짜 돌칼을 만든다.

좌우 대칭의 개념이 생겨 적극적으로 도구에 적용시킨 시대이다. 이 '도구의 좌우 대칭' 개념은 다음 시대로 넘어가 신석기 시대의 간석기 → 청동기 시대의 동검 → 철기 시대의 철검으로 계승되었고, 현대인이 사용하는 도구에도 이 개념은 녹아 있다.

파일:attachment/석기 시대/Biface.jpg

파일:attachment/석기 시대/Clovis.jpg

파일:attachment/석기 시대/Blade.jpg

파일:attachment/석기 시대/Bronze.jpg
주먹도끼
클로비스 찌르개
청동기 시대 간돌칼
비파형 동검

보통 구석기 시대 돌도끼를 상상하면 나무에 묶은 돌을 연상하는데, 사실 나무라는 손잡이가 달린 경우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가서야 등장한다. 전기 구석기 시대는 돌 하나를 맥가이버칼처럼 전천후 기능으로 사용했지만,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석기 하나당 1~2가지 용도로 썼다. 가장 오래된 석기군은 올도완 석기.

석기 시대이기 때문에 이름처럼 석기를 주로 이용하였지만, 뼈나 뿔, 상아 같이 단단한 물질도 제법 많이 사용되었으며, 해안가 지역에서는 넓적한 조개 껍데기를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나 부수면 날카롭게 갈라지며,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하기 쉬운 흑요석은 주요한 무기 자원으로 거래되었다.[8] 흑요석은 산출지가 한정되었고 성분에 따라 산출지를 쉽게 특정할 수 있는데, 산출지 주변뿐 아니라 오늘날의 국경을 넘어 먼 지역에서도 흑요석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에,[9] 구석기 시대에도 오늘날의 국제교역 같은 장거리 지역 간 이동이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석기의 용도는 일반적으로 사냥이나 전쟁을 위한 무기나, 고기나 곡물 등 식량이나, 가죽 옷감의 가공을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지만, 실제 구석기 유물을 현미경 등으로 조사해보면 의외로 마모흔 등 많이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그 당시 석기는 일상에 널리 쓰기에는 상당한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석기가 권위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장식용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청동기 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위 사진의 돌칼도 그 형태가 실용적 목적보다는 장식용이다. 청동기도 실제 생활 도구로서 보다는 권위의 과시 등의 용도가 더 일반적이 었다. 철기 시대에 와서야 철기가 농경도구 등 일상용구로 널리 쓰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선 당연히 모양을 잡아 만들어놓은 '완제품' 석기 유물을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지만,[10] 실제로 그 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인들에겐 석기 자체보다 석기를 만들 '몸돌'이 더 중요한 물품이었다고 한다. 돌의 조각을 떼어낸 도구 특히 얇게 떼어낸 날붙이 같은 것이 사실 그렇게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따라서 완성품 석기는 기본적으로 몇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가깝고, 계속 석기로 쓸 조각을 떼어낼 질 좋은 몸돌 쪽이 구석기인들에겐 더 중요한 물건이었다. 구석기인들은 실제로는 아예 몸돌을 갖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석편을 떼어내 사용했다고도 한다.[11] 그리고 이렇게 따진다면 장신구 같은 것은 동물의 뼈나 조개껍질은 물론 심지어 돌도 갈아서 만들던 구석기인들이 '갈아서 만든 도구'는 쓰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12]

한때 전기 구석기 유물 중 아슐리안형 석기(석기의 양면에 모두 날이 선 형태가 특징)를 기준으로 문화적 진보 수준을 평가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되지 않고 찍개나 거친 자갈돌 석기만 발견되던 동아시아를 문화적으로 뒤쳐진(culturally retarded) 상태로 평가하던 고고학자(대표적으로 모비우스[Movius])들이 있었으나[13] 1978년에 우리나라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 도끼(흔히 양면 핵석기라 부른다)가 발견되었는데 연대추정시기에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505040338_02.jpg

최초 발견자 그렉 보웬. 당시 주한미군이었던 그는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다가 전곡리 석기를 발견했다. 자세한 내용은 연천 전곡리 유적 문서로.

반면 일본의 자칭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일본의 석기시대 연도를 올리기 위해 가짜 유물을 만들어 파내는 자작극을 하기까지 했다.

경기도 고양시평택파주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도 구석기 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

2014년에는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남한강 유역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약 1만 8천 년 전후의 것인 듯한 눈금이 새겨진 석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해당 석기는 길이 20.6 cm, 너비 8.1 cm, 두께 4.2 cm의 길쭉한 규질사암 자갈돌에 0.4 cm 간격으로 눈금 22개를 새겼는데, 손으로 들고 다른 돌의 길이를 잴 수 있는 크기로 망치 등을 제작할 때 쓰였을 수도 있다고 발굴작업을 맡았던 연구원은 설명했다. 우종윤 선사문화연구원장은 "눈금 돌이 발견된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처음"이고 "구석기인들이 단순히 숫자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을 넘어 각종 사물을 측정하는 용도로까지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구석기인들의 눈금자?… 충북 단양서 눈금 새겨진 돌 발굴

2020년 현생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에, 뗀석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찌기 불을 이용하여 가공하기 쉽게 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2.1.2. 수렵과 채집의 시대[편집]


이 시대는 주로 수렵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얻었다. 과거에는 'Man the hunter(사냥하는 남자)'라는 개념이 강해서 사냥에 의해 주도된 시대라고 여겼다. 하지만 극지방을 비롯한 예외적인 환경을 제외한다면 수렵-채집 집단의 영양공급에서 채집식량의 비중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수렵-채집사회의 식량자원 획득은 그들이 생활하는 주변 자연환경의 다양성 만큼이나 천차만별로 다양하기에 일반화 하기에 어렵지만, 대체로 사냥, 어획 등을 통해 얻어지는 동물성 영양소와 채집으로 얻어지는 식물성 영양소의 비중은 6:4~4:6 정도로 평균적으로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명칭도 '수렵사회'나 '채집사회'가 아니라 '수렵-채집 사회'이다.[14] 그리고 이 - 크게 나눠 - 두 가지의 식량 획득방식은 모두 일장일단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식물성 식량자원이 거의 없다시피한 극지방과 같은 예외적인 환경이 아니라면 채집식량은 수렵식량에 비해 훨씬 안정성인 있는 칼로리와 영양소 공급원이다. 만일 늘 어느 정도는 얻을 수 있는 채집식량이 없다면 사냥에 실패하면 굶어 죽어야 할테니 이를 빼놓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면 당연히 식물성 채집식량은 칼로리 밀도가 낮고, 무엇보다 충분한 단백질 공급이 가능하지 않다. 덧붙여, 채집활동을 하는 '채집집단'에게는 식량수집외에도 한 가지 역할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연료"를 획득하는 것이다. (어차피 두 가지가 나오는 장소가 비슷한 곳이다.)

동물성 식량은 칼로리 밀도가 높으며, 동시에 과 같은 식물성 단백질원이나 가축의 을 활용할 수 있는 농경 이후와는 달리, 수렵 채집 사회에서 사냥과 어로 이외의 단백질 획득 방법은 비교적 제한적이다. 따라서 채집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해도 사냥 혹은 어로활동을 통한 식량획득이 없다면, 역시 (열량부족 뿐 아니라 영양소 밸런스 파괴로) 버텨내기 어렵다. 따라서 '무엇이 일방적으로 주도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냥과 어로 이외의 단백질 획득방법에는[15]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벌레 채집이 있다. 곤충은 어떤 동물보다 수도 많고 잡기도 쉬워서 큰 체력소모나 위험 부담 없이 얻을 수 있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대신 크기가 작다 보니 질량 대비 열량 효율은 매우 낮아서 단백질 보충용으로는 가능하지만 주식으로 쓰기는 힘들다.[16] 다른 단백질 획득 방법들에 비하면 도리어 '채집활동'에 더 가까운 속성(잡기 쉽지만 열량은 낮은 식량)이어서 여성들은 물론 아이들도 쉽게 수행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미 죽은 동물의 사체나(이를 위해 사체를 찾아다니는 독수리 같은 새들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맹수들이 사냥한 먹잇감을 빼앗거나 그들이 남긴 것을 가져가 먹는 스케빈징이 있다.

이는 인간의 신체적 강점인 정교한 투척 능력과 손을 쓸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장시간을 걷는 데 유리한 것, 털이 없고 피부에 땀을 흘리기에 상대적으로 체온조절이 쉬운 인간의 신체적 특징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능력은 사냥에도 중요한 요소로 활용된다. 특히 이는 인류가 발원한 곳이 아프리카 평원이었음을 고려해보면 생각보다 좀 더 요긴한 특성이다. 인간이 쫓아오면 동물은 당장은 인간보다 훨씬 빨리 도망칠 수 있지만, 인간보다 훨씬 빨리 지쳐서 한숨 돌리려고 하면 계속 인간들이 쫓아오니 계속 도망칠 수밖에 없어 결국 지쳐 탈진하고 인간들의 투척 무기로 창이나 돌 등을 던져 사냥한다. 또한 인간이 직립 보행을 한다는 것도 의외로 도움이 되는데, 사족 보행을 하는 대부분의 동물들 입장에서 직립 상태의 인간은 꽤 큰 동물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초식동물을 도망치게 할 때 뿐만 아니라 육식동물의 먹잇감을 빼앗을 때도 유리하다.[17]

또한 대부분의 육식동물들과 달리 를 도구와 정교한 손동작으로 부숴 단백질로 구성된 골수까지 빨아먹을 수 있었다. 동물들 중 단단해서 씹기도 어렵고 잘못하면 이빨이 깨질 수도 있는 뼈까지 먹는 동물은 하이에나처럼 저작력이 특별히 강하거나 아예 뼈째 삼키는 몇몇 동물들 외에는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점도 다른 동물보다 생존에 유리했던 점이며, 초기 인류의 생존에 나름 적잖은 공헌을 한 요소라고 보여진다.

물론 스캐빈징 활동도 사실 '살아있는 사냥감을 추적하고 잡는다'만 아닐 뿐 과정도 결과도 사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렵활동과 많은 유사성을 지닌 활동이다. 즉 사냥 만큼이나 장거리, 장시간의 이동을 요구하고 종종 다른 육식동물과 경쟁하게 될 수도 있는, 사냥 못지 않은 위험부담을 지닌 활동이며 따라서 대체로 남성들이 맡았다. 덧붙여 구석기 시대에 인류의 수렵활동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기술적 발전의 하나는 '의 발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활의 발명으로 인간은 추적하기는 상대적으로 좀 더 쉽지만 개체수는 더 적은 대형동물이 아니라, 주변에 더 많기는 하지만 따라잡기 힘들던 중, 소형 동물들 또한 사냥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위험을 덜 감수하면서도 더 안정적인 식량 특히 단백질 공급을 가능케 했다는 것. 별도의 전문화된 어로 도구 없이 물고기도 활과 화살로 잡는 집단들도 적지 않다.

또 큰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대체로 남성들의 일이었지만, 수렵과 함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던 어로활동이나, 작은 동물을 잡는 것 등은 그리 성별을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8]

식물성 식량 채집활동은 주로 여성에 의해 이뤄졌지만, 남성들도 일부 참여하기는 했다. 그리고 어로(및 그 외 조개류 등의 수산물을 획득하는 활동을 포함한) 활동을 일상적인 주요 식량공급원으로 삼을 수 있는 환경의 집단이 되면, 식량자원의 구성비는 당연히 수렵, 채집 및 어로가 1:1:1 수준이 된다.

어로의 경우 물고기가 개체수도 많고 도구만 있다면 사냥보다 더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에 역시 중요했다. 주로 쓰는 도구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작살, 그물이였다가 미끼로 물고기를 유인해 잡는, 앞의 둘보다 좀 더 쉬운 낚시가 발명되었다. 당연히 물고기뿐만 아니라 조개류, 갑각류, 두족류 등의 다른 수산물을 식량원으로 채취하는 것도 포함이다. 특히 양이 많든 적든 먹을 만한 조개류가 있는 지역이라면 일단 '도망이나 저항하지 않고(못하고), 종종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잡을 수 있는' 식량을 그냥 놔둘 이유는 없다. 많은 수산물의 경우 종에 따라 차이는 좀 있지만 잡기 쉽거나 수가 많은 경우가 많다는 채집의 장점과 단백질이 높다는 고기의 장점을 모두 가진 자원이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 약 7만 5천 년 전 - 장신구 유물이 나온 남아프리카 해안의 유적에서도 조개를 채취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장신구 자체도 조개껍질로 만든 것이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조개류의 섭취가 두뇌 발달을 가속시켜서 정교한 문화의 발달이 가능했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또한 잡식성인 인류가 먹었던 원시 곡류나 원시 과일류들이 생태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인구수의 압박이 적은 이 시대 특성상 '야생에서 곡식 수확'으로 식단의 일부를 구성하는 일이 가능했다. 사냥 대상인 동물들의 풍부함도 비슷하게 현대보다 더 유리했다.[19] 따라서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다시 식물이 자라나고 다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겠지만, 그 과정(농경)을 인위적으로 하는 노력을 투여할 필요가 없었고 거기에 전념할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인지 먹을 것이 많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 곳에 정착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농경 시대 이전의 개개인이 농경 이후보다 노동 강도면에서 더 편했다는 여러 이야기도 있다. 어차피 자연 자원의 밀도라는 게 정해진 이상, 인간 집단이 돌아다니면서 채집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다. 따라서 충분히 채집하고 나면 그 이상의 채집 활동은 그냥 헛고생이다. 그래도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헛고생하면서 돌아다니다보면 쓸데없이 영양분을 낭비하고 부상의 위험과 자연의 위협에 마주칠 확률을 늘릴 뿐이니까, 적당히 식량을 모으면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하는 게 좋은 것이다. 구석기 인류의 채집/수렵 활동은 풀밭 산보가 아니다. 헛되이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어차피 남는 시간'에 인류는 그냥 퍼져서 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장신구 제작에서 벽화 그리기까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인류만의 정신문화, 예술을 일구게 된다.

지구상 모든 곳이 먹고 살기 편한 곳일 수 없는데, 모든 걸 자연에서 얻어야 하는 석기 시대에 어떻게 채집으로만 먹고 살 수 있었겠느냐[20]는 의문에 대한 가장 그럴 듯한 답변은, '그럴 수 있는 곳만 찾아 다니며 살았고, 그럴 수 있는 규모의 인구를 유지했다'는 것. 즉 한 지역의 자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지역을 이동하는 생활 패턴과 거의 제로 성장에 가까운 인구 저성장 상태가 유지되어야 가능한 것이었고, 어느 정도는 꽤 오랜 기간 그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전자 - 이동성의 결과로 결국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아메리카까지 퍼져나간 거고, 후자 - 낮은 인구 성장율의 유지는 높은 영유아 사망률 등 자연적 요인과 더불어 '영유아 살해'를 비롯, 알려진 혹은 - 분명한 의학적 효과는 확인되지 않은 약초 등의 - 알려지지 않은 여러 수단이 동원되었을 수도 있다.[21][22]


2.1.3. 인류의 대확산[편집]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시작되는 인류의 조상과 아종들은 이 시기 동안 지구 전체로 퍼지면서 분화해나갔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에렉투스 게오르기쿠스, 하이델베르크인,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모두 '사람속(Homo)'에 속하는 종들이 구석기 시대 당시 전 세계로 퍼진 이후 종의 분화를 일으켜서 나온 결과물이다.

석기와 원거리 투사무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채집과 수렵이라는 두 에너지 확보 수단을 보유한 현생 인류의 조상들은 이를 바탕으로 광범위하게 이동해서 전세계로 퍼지는데 성공한다. 이에 대해서는 채집과 동굴 생활 자체가 해당 근거지의 자원을 전부 소모하면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던 동기와 함께, 장거리 이동에 특화된 신체구조 덕분에 이를 가능케 했던 특징 덕분에 일어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쉽게 말해 장거리 이동이 힘들었던 다른 생물들은 자원을 전부 소모하면 개체 수가 자연적으로 감소하면서 균형을 맞추지만 장거리 이동이 가능했던 인류는 이를 '근거지 이동'이라는 돌파구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체로는 다른 동물이 그렇고, 아직 수렵 - 채집 사회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소수 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상적으로는 '계절적 이동'을 하며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거주 지역의 기후나 식생 등의 변화가 발생했을 때 일반적인 동물들이 이동하는 범위와 비교하자면 인류는 다른 종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고,[23] 또 수렵과 채집이라는 이중의 에너지 확보 수단을 보유했던 덕분에 다양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여기에 현생 인류가 탄생하기 이전인 호모 에렉투스 시절부터 을 발견함에 따라 인류는 아프리카 초원에 서식하는 '열대동물'치고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극한지역까지 진출하게 된다.

결국 인류는 지질학적, 혹은 생물학적 시간으로 따지면 유례없이 짧은 시간 동안 전 세계로 퍼졌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300만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인류는 호주, 태평양, 아메리카, 북극 근방까지 이동했다. 가히 대여행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렇게 이동해서 인류는 이미 구석기 시대에 단일종으로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 서식하는 육상동물로 등극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하면,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열대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확산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열대동물'이라는 생물학적 본바탕에는 사실상 아무런 변화도 없다. 이를테면 피부색이나 모발 등의 사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몸에 털이 없다시피하고, 전신의 피부에 땀샘이 잔뜩 존재한다. 이렇듯 인류는 '체열을 저장하는 것' 보다 '체열을 방출하는 것'에 훨씬 더 특화되어 있는 종이다. 즉, 북극에서 살고 있는 이누이트들조차 '아프리카의 평원에서 돌아다니는 것'에 최적화되었다고 할만한 종이다. 인종마다 다른 멜라닌 보유량이나 체모의 길이 정도는 북극여우-사막여우의 차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차이다. 애초에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 '단일종'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랬던 이유는 우선, 구석기 시대의 인류의 대확산 시기 도중 분화해 나간 아종들을 죄다 날려먹은 것이 크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생인류의 조상은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등 많은 근연종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죄다 멸종해버렸다. 이후 구석기 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60만 년 전쯤에 하이델베르크인으로부터 현생인류가 갈라져 나오고 30만 년 전쯤에 근연종인 네안데르탈인, 이후에 데니소바인 등이 또 분화했지만 이들마저도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전부 멸종해버렸다. 근연종이 걸핏하면 멸종되어 나가떨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람속(Homo)'에 속한 인류와 그 아종들의 대확산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현생인류도 멸종위기 전까지 몰렸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근거로 현생인류의 유전자풀은 심각하게 좁다. 얼마나 좁냐면 70억 인류 전체의 유전자풀보다 수십 마리로 이루어진 아프리카 어딘가의 침팬지 서식지의 유전자풀이 더 다양하다.

어쨌든 이런 '열대동물스러운' 생물학적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인류는 빙하기의 유럽과 아시아에 진출하고, 결국은 극지방까지, 다시 말해 원래 서식지인 아프리카 평원과 비교하면 기온만 따져 섭씨 60~70도 이상 차이가 나는 환경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근연종이 죄다 멸종하고 심각한 유전자 병목현상을 겪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고, 그 결과 2020년대 기준 70억을 넘는 개체수를 보유하며 전 세계에 서식지를 일구는데 성공했다.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켜 중기 구석기 시대까지는 대체적으로 동굴에서 살던 것이 후기 구석기 시대에 들어서는 막집('움막 집'이란 뜻이다)을 지어서 살게 되었다. 또한 해양에도 진출하여 5만 년 전 "어보리진"은 호주 대륙에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빙하기라 해수면이 낮아진 상태였다고 해도 동남아에서 호주대륙에 도달 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이는 정교한 배를 만들고 이주할 만한 질서와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인구 수가 별로 많지 않았고 자원을 이용하기 쉬웠기 때문에, 오히려 이 바로 다음의 시대보다 전체적인 삶의 질은 높았다. 자원(주로 식량)의 분배 문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서로 다른 부족이나 군락 간에 분쟁과 충돌은 있었을지언정 일정한 생활 공간을 공유하는 하나의 사회 집단 내에서는 아직까지 계급적으로 고착된 분배 불평등이 나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 시기를 '원시 공산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런 점에 주목한 명명이다.

단백질 섭취량과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도 일부 수렵 채집인들은 잘 먹고 잘 산다. 농경의 이점은 삶의 질보다도 부양할 수 있는 인구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유목 민족과 정착 민족의 수만 세어 봐도 농경에는 많은 인구를 지탱할 수 있는 압도적인 생산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바꿔 말한다면 '개개인의 복리'의 차원에서 농경 사회, 특히 초기의 농경사회는 나은 점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지만[24], '집단 대 집단'의 경쟁에선 훨씬 유리했다는 것이다. 결국 농경-정주 집단이 더 좋은 자연환경을 지닌 지역을 차지하고, 수렵채취 집단은 농경이 불가능한 더 열악한 지역으로 계속 밀려나며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현생인류라 볼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쯤 아프리카에서 등장했으며, 10만 년 이후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빠져나온 시점에서 당시에 생존해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접촉한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는 혼혈이 발생할 수 없을 만큼 유전적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었지만 실제로는 약간의 혼혈이 발생했다는 것이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유전체 분석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아시아와 유럽인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비율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볼 때(2% 내외), 레반트/코카서스 인근에서 막 아프리카를 벗어난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로도 네안데르탈인과의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초기에 아시아로 이동한 멜라네시아/네그리토 사람들은 추가로 아시아 데니소바인과의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25] 덧붙여 막연히 현생 인류보다 무식하고 투박할 것으로 인식되어 오던 것과 달리, 석기 제작 기술로 비교할 때 네안데르탈인의 기술이 같은 시기 현생 인류보다 딱히 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네안데르탈인들의 석기를 유적을 바탕으로 실제로 재현서 제작해본 결과, 그 제작에 필요한 기술이 현생 인류의 석기에 비해 낮지도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생 인류의 석기에 비해 더 효율적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의 손 모양을 따져보면 (당연히) 네안데르탈인들에겐 그 쪽이 더 손에 맞는 쓰기 편한 석기였다고. 즉 석기 기술의 수준이 아니라 그걸 쥐고 쓸 손의 차이가 반영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당시 인간의 사냥감과 무리 지어 지구력으로 사냥한다는 점이 늑대와 생태지위가 완전히 겹쳐 엮이는 일이 많았다. 이때 인간들은 늑대들이 경계나 사냥 추적용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길들여 로 가축화했다. 즉 개는 구석기 시대 때 인간이 최초로 가축화한 동물이다.

2.1.4. 유적[편집]



2.1.4.1. 호남[편집]


2.1.4.1.1. 전라남도[편집]

  • 화순 도산유적
  • 순천 죽내리유적[26]
  • 장흥 신북유적[27]
  • 순천 월평유적[28]

2.1.4.1.2. 전라북도[편집]

  • 임실 하가유적
  • 진안 진그늘유적


2.2. 중석기 시대[편집]


/ Mesolithic

중석기 시대를 따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고, 구석기 시대의 일부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홀로세가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이 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작고 날랜 동물들이 많이 나오면서 이에 맞춰 이 개발되었다. 또한 작은 동물 및 물고기를 잡거나(화살, 작살, 작은 투창 등) 해체하기 위하여 조각이 작은 잔석기가 많이 쓰였다.

이는 유럽 및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륙에 따른 구분법으로, 지역에 따라 중석기 시대의 구분이 굉장히 모호한 지역도 있다. 가령 고고학자들은 동아시아에서의 중석기 시대를 기원전 8,000-6,000년대로 추측하지만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초기 농경을 통해 초기 도시 국가가 태동하고 있었다. 예리코 성은 이미 기원전 8천 년대부터 성벽을 쌓았다.[29] 또한 동아시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산물로 여겨지는 토기가 이미 구석기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화살촉과 같은 잔석기 사용이 분명한 흔적은 기원전 10,000년 이전에 이미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5,000년경과 기원전 40,000년경에 인류의 이주가 시작된 아메리카 대륙이나 오세아니아에서도 초창기에는 활을 사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 지역에서는 활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잊혔을 뿐. 여전히 중석기 시대에 대한 구분은 굉장히 모호하며, 보편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연구할 거리가 무궁무진하다고 하겠다.


2.3. 신석기 시대[편집]


/ Neolithic

파일:갈판과 갈돌.jpg
갈판과 갈돌.

신석기 시대와 구석기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토기의 등장과 간석기(=마제석기)의 사용, 농경과 정착 생활 여부 등이 있다. 이러한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고 한 가지만 등장해도 보통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대략 기원전 8000~12000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당연히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 사학계는 기원전 4000~3000년경에 한반도에 농경(신석기 혁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약 1만 년 전에 등장한 제주도 고산리식 토기가 있긴 하지만, 이 토기는 제주도에서만 한정되었을뿐더러 그 후 몇 천 년 동안에 존재한 토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신석기 시대로 편년해야 할지 논란이 되고 있다. 고산리식 토기의 연대가 과연 10,000년 언저리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상태이다.[30]

농경이 등장하지만 이 시대에도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많이 기본으로 하며 생활하였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등에서 당대의 수렵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기초적인 농경이 슬슬 시작되어 , , 수수 등의 잡곡으로 약간의 농경 농업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기초적 농업을 했던 대한민국과 다르게 예외도 있어서 일본의 신석기 시대는 수렵 및 채집 생활이 충분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경우, 아예 농경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

이 당시에는 관개기술이나 파종법 등 농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석기 후기에 들어서도 농경은 조악한 형태와 소규모로 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농경(벼농사)은 아무래도 철제 농기구 사용과 관개수로 정비에 노동력 동원이 가능한 계급제와 국가 제도가 정비된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래도 구석기에 비해 탄수화물(섭취 후 당으로 변환되며 지방으로 축적됨) 섭취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성인병과 비만은 신석기혁명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인류는 동굴과 막집을 버리고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을 짓기 시작하며, 이나 과 같이 본격적으로 돌을 이용한 건축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초기형 물레와 베틀은 이 시기에 이미 존재. 즉 이 시기부터 직물이 생산되고, 천옷이 존재했다.

초기 신석기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유적으로는 예리코가 있다. 최근에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괴베클리 테페 같은 종교 목적의 거대 건축물이 등장하고 약 2~3000년 뒤 그 근처에서 최초의 농경지와 도시 유적이 발견되면서 아직 농경 문화에 들어서기 전인 수렵 채집민들도 이미 조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요리의 흔적도 이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 14,000년 전 빵조각 유물과# 1만 2천 년 전 맥주를 발효시기키 위한 절구가 발견되는 등 #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괴베클리 테페보다 앞서있어, 원래 학설인 '유목민이 정착해 농사를 짓다가 사람들이 모여살고 종교가 등장하고, 농산물을 가지고 요리를 했다.'에서 '유목민이 술과 빵을 빚어먹다가 종교가 생기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폭등하는 술과 빵 소요 때문에 농사를 짓기 시작해서 정착민이 되었다.' 라는 인과관계가 바뀐 학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는 각 지역마다 토기를 기준으로 편년이 나뉘지만 크게 3가지로 나누자면, 융기문토기의 전기, 침선문(= 빗살무늬 토기)의 중기, 민무늬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각 시대 토기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나오지는 않고, 토기 내에서도 다양한 구분과 변형이 존재한다. 흔히들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 아는 포탄형의 빗살무늬 토기는 중서부 지역에서 등장하는 토기이다. 그 외의 토기는 대부분 평평한 바닥을 띠고 있다. 세계 각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양식의 토기가 존재하며, 이미 원시적인 형태의 문화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시가 되고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류가 '노동'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다. 농경이 시작되자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보다 여가 시간과 영양 수준이 오히려 줄었다. 농업 혁명으로 인해 인류 전체의 질적 생산량은 크게 늘었지만 사람 개개인의 생활 수준은 오히려 퇴보한 것이다.[31] 현생 인류의 부계 혈통으로 지목되는 'Y 염색체 아담'을 다뤘던 NGC의 Genographic Project 다큐에서도 소개되듯, 7만 년 전 인간이 살았던 아프리카 동부 해안 유적에서 조개 껍질을 갈아 만든 목걸이 따위가 나올 정도로, 구석기 시대에조차 인류의 정신 문화는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면서 유물의 질적 수준은 급격하게 하락한다. 채집 시절에 근사하게 목걸이도 만들고 절구도 모양 좋게 다듬어서 썼지만, 농사 짓기 시작하면서 바빠서 그런 건 없다가 되어버렸다. #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정신 문화의 상실'은 잉여 자원과 이로 인한 '재산' 개념의 생성,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시작된 계급사회와 '사치'의 개념이 도입되고 나서야 원래대로 회복한다. 쉽게 말해 농업 혁명도 산업 혁명 마냥 인류 전체의 여유와 문화를 일시적으로 앗아간 셈인 것이다.

유골의 경우도 채집 시절에는 영양 상태가 좋고 키도 컸지만, 농경 시대에 들면서 키도 작아지고 관절의 마모도 심해졌다. 그러고도 식량이 모자라 다툼이 잦았는지, 이 시대에 발견되는 유골의 상당수에서는 전투로 인한 타박상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대체적으로 농업이 불러온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현상의 원인이라고 지목되고 있다. 아무리 조악한들 농사는 농사고 농업과 채집, 수렵의 병행은 인류로 하여금 '정착생활'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전쟁과 약탈 행위가 벌어지고 그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원시적인 초기의 농경으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특히 일시적인 기상 변동 등 국지적인 자연적 압력에도 취약했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급작스런 인구 밀도 증가와 무엇보다 가축 사육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전염병 등으로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기를 겪기도 하는 등 농경사회의 정착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뤄진다.

다만 농경을 시작한 인류가 폭증하는 인구밀도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불화들을 감수할 만한 이득은 분명히 있었다. 자연 환경과의 대항에 있어서 사냥/채집 시기의 인류는 잘해봤자 먹이 사슬 중에서 상위에 올라가는 수준의 권력을 지닌 것뿐이었다면, 농경 사회로 인한 인구 증가와 사회 체제를 구축하고 나서 비로소 인류는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단계를 넘어 자연과 대립하면서 독립된 인류 집단 내부 환경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 변화나 급작스러운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확률적 안전성, 유전자적 규모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초기 농경사회의 떨어지는 농업 효율과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 강도를 당시의 농경인들이 무엇을 믿고 버텼는가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되곤 했다. 이 부분에서는 2010년대 초 발견된 괴베클리 테페 유적지의 연구 결과가 반대의 결론을 내놓기도 했다. 즉, 농경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이고 나서 생긴 집단이 먹고 살기 위해 농업을 했다는 설. 다시 말해 초기 단계의 농경을 시작한 소수의 신석기인들이 그런 장밋빛 미래를 예상하고 농경 초기의 생활 수준 하락을 버텨내 인구를 증가시킨 게 아니라, 일단 사람이 모여서 인구가 늘어나자 뭐라도 먹고 살려고 하다보니 농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이 맞을 경우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주장한 것 같이 인류의 상호 주관[32]이 인류 발전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예술적 정신 활동의 질적 하락은 숙련 기술이 도입된 농경으로 인한 생산량 증가로 인하여 잉여 농산물이 집중되는 지배 체제가 구축되고, 구석기인보다도 더 풍부한 자원과 시간을 활용 가능한 소수층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퇴보한 양을 회복했다. 이러한 초잉여 자원 집중에 의한 경제 활동은 구석기 시대의 수준을 넘어서서 현재까지 계속 발달중이다. 간석기, 청동 사용 기술의 체계화로부터 NASA의 우주 개발에 이르는 활동은 수많은 개개 인류에게서 수집된 세금이라는 집중 자본이 점점 성장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산업혁명 초창기 인류는 늘어난 노동 강도와 업무량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잉여 자원(자본)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나중에는 보낼 정도로 이를 회복하게 된다. 농업혁명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많은 고고학자들의 예측이다.

또한, 언뜻 직접적인 이득이 미미해보이는 농경과 정착생활이라는 인류 생활형태의 변화는, 또 다른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특징과 큰 발전을 결과적으로 이끌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토기의 발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든다는 개념을 넘어서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열처리를 통한 토기 제작기술의 발달이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

기민하게 이동할 필요성이 있고 소지품을 간소화시켜야 하는 구석기 시대의 생활 패턴에서는 토기라는 고품질의 용기가 그다지 필요가 없다. 무겁고 파손에 취약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쉽게 벌충이 가능하고 수선과 제작이 쉬운 잎/지푸라기/덩굴 등의 망태, 바구니형의 그릇이 훨씬 더 유용했다. 반면 토기는 물이 새지 않고 썩어 무너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대가로 짊어지고 다닐 만한 무게와 내구성이 아니었다. 빗살무늬 토기의 모양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무언가를 나르는 도구라기보단 거의 거주지에 설치하는 빌트인 주방기구 수준의 형상과 활용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정 도구의 발달은 인류에게 이전까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의 테크트리를 열어 주는데, 바로 토기를 구우면서 정교화시킨 불의 제어와, 광물질을 열처리하여 성질을 변화시키고 특성을 끌어올린다는 신소재공학적 접근법의 실마리를 인류에게 떠올리게 해 준 것. 이전까지 불의 용도가 화염 그 자체의 특성과 물질을 파괴하고 변형한다는 단일 단계로서의 도구로 인식되었다면, 이후 인류의 불에 대한 시선은 열을 발생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달성하는 조절 가능한 도구'로서 제어하고 컨트롤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다시 말해 야금술이 탄생한 것이다.

가까이는 구리의 발견에서부터 청동 등의 합금제련법을 알아내기 위한 기술의 발달, 철을 사용하기 위한 고온 획득의 연구, 이후 유리의 발견 등 수많은 '신소재' 들이 이 때 눈을 뜨게 된 물질에 특정한 조건을 가하면 새로운 물질을 얻어낼 수도 있다 라는 개념 덕분에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인류의 추구를 잘 보여주는 것이 원자의 발견 이전에 '적절한 조건과 적절한 원재료가 있다면 어떠한 새로운 물질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라는 희망에 기초하여 연구하던 연금술이다.

신석기 시대의 끝 무렵에 인류는 금속을 다루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어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2.3.1.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편집]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의 개시는 상당히 이른 편인데, 이는 동아시아의 최초의 토기 제작 시기가 후기 구석기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각지에서 1만 년 전에 토기 제작이 시작되어 중국 하북성 남장두(Nanzhuangtou, 南莊頭), 호남성 옥섬암(Yuchanyan, 玉蟾岩), 강서성 선인동(Xianrendong, 仙人洞) 등에서 초기 토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러시아 아무르 강 유역의 Gromatukha, Gasya, Khummi 유적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초기 토기가 발굴되었다. 한반도의 경우 절대연대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양양 오산리와 제주도 고산리에서 신석기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동아시아 토기 제작 기술의 발명과 토기 사용의 확산은 어느 한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전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별개의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역별 토기의 장식 형태나 토기 모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기가 출현한 지역이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주변 지역에서 모방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초기 토기는 아직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용도별 토기가 등장하지 못했고, 토기를 굽는 온도도 낮아 무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풀이나 동물 털을 섞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농경이 시작되기 전에 토기가 등장하고 있으며, 초기 토기의 용도는 저장용이 아니라 조리용으로 추정된다.

관련 문헌
  • 유태용 (2010) - 고고학적 측면에서 본 한민족의 정체성, 민족학연구, 9, pp83-118.
  • 임상택 (2013) -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토기문화
  • YV Kuzmin (2006) - Chronology of the earliest pottery in East Asia: progress and pitfalls. Antiquity, 80, pp 362-371.


2.3.2. 황하 유역의 신석기 문화 전개 양상[편집]


자산 문화(Cishan culture, 磁山文化), 배이강 문화(Peiligang culture, 裴李崗文化), 가호 유적(Jiahu site, 賈湖)

배이강 문화는 1977년 하남성 정주시 배이강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대표로 하는 기원전 7천 년경에 시작된 신석기 문화이다. 가여하(賈汝河)에서 복우(伏牛) 산맥 북쪽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초기부터 숫돌을 사용해 석기를 갈아서 다듬는 기술적 진보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토기 제작은 초기에는 모래와 같은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점차 개선되었다. 가마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더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구워내기 시작했고, 용도별로 기종이 분화하기 시작했다. 바닥이 평평한 물항아리, 바닥이 둥근 사발, 입구가 좁은 호리병, 술잔이 대표적인 기종이다. 이와 더불어 토기를 받치는 삼발이 구조나 토기 바닥에 덧댄 지각(支脚)이라 불리는 구조가 배이강 문화의 대표적인 지표이다.

집자리는 땅을 반쯤 파고 만든 움집이었고,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원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돼지 등을 사육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축을 키우는 것보다 수렵이 식량 확보에 더 기여했을 것이다. 십여명 내외의 가족이 3~4집이 모여 씨족을 이루고, 여러 씨족이 모여 하나의 부족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부족을 구성하는 가족 집단이나 부족 집단 사이의 격차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장 방식은 시신을 반듯이 눕힌 형태로 묻은 개인장이다.

자산 문화는 배이강 문화 지역의 북쪽에 존재한 지역 변이 문화로, 하북성의 하북 평야와 태행 산맥 동쪽 지역에 존재했다. 토기를 포함한 물질 문화 양상을 보았을 때 배이강 문화와 강력한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배이강 문화에 속하는 문화로 판단된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토기에 지각이나 삼발이를 사용하는 배이강 문화와 달리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아 맥주컵과 같이 옆면과 아랫면이 평평한 토기가 함께 만들어졌다. 이런 영향력은 다른 황하 지역에서 확인할 수 없는(후리 문화는 예외이다) 옥이 나오거나 도자기 가면이 나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자산 문화는 황하 유역 문화 중에서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곳으로 생각된다. 흥륭와 문화 지역과 함께 최초로 기장 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장과 조는 곧 황하 유역의 주요 농경 작물이 되었다.

가호 유적은 배이강 문화 지역의 남쪽에 존재한 유적으로 배이강 문화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유적이다. 기본적으로 배이강 문화에 속하지만 양자강 유역의 물질 문화와 생활 양식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배이강 문화에 속하는 토기 이외에 손잡이용 두 귀가 달리고 토기 아랫부분이 볼록 부풀어 오른 긴 모가지-입구 좁은 병과 같은 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기장과 조를 기른 배이강-자산 문화와 달리 곡물은 쌀에 의존했고, 기장/조는 전혀 재배하지 않았다. 매장 양식 역시 양자강의 영향을 받아 이차장(매장으로 모든 예식이 끝나지 않고 추가로 매장 의식을 더 치르는 행위)이 이루어졌다.

관련 문헌
  • DJ Cohen (2011) - The Beginnings of agriculture in China: A multiregional view, Current Anthropology, 52,pp. 273-293.
  • YV Kuzmin, AJT Jull, and GS Burr (2009) - Major patterns in the neolithic chronology of East Asia: Issues of the origin of pottery, agriculture, and civilization, Radiocarbon, 51, pp891-903.
  • X Liu, HV Hunt, and MK Jones (2015) - River valleys and foothills: changing archaeological perceptions of North China's earliest farms, Antiquity, 83, pp 82-95
  • Z Yanping (2013) - The Early Neolithic in the Central Yellow River Valley, c.7000–4000 bc, A Companion to Chinese Archaeology



2.3.3. 관련 문서[편집]




3. 관련 영상[편집]


인도네시아 파푸아 주에 거주하는 다니족의 일족인 다비마벨족은 지금도 돌도끼를 만들어 사용하는 석기 문명의 원형을 가진 부족이다.

EBS 다큐, 인류 원형 탐험 - 석기 문명의 삶 파푸아 다비마벨족(Dabimabel)



4. 창작물에서[편집]


석기시대가 배경인 작품 목록은 분류:선사 시대/창작물 문서로.

시대적으로 원시 시대이거나 금속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원시적인 부족이 주로 석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실제 사용된 석기와는 달리 그냥 나무 손잡이에 돌멩이 매달아 놓은 식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가장 대표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다름 아닌 돌도끼다.

공룡이 원시인들과 서로 공존하면서 살아가는게 묘사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은데 실제 공룡은 6600만년 전중생대 백악기에 멸종했고 초기 인류가 출연하여 석기 시대가 시작된 시기는 그보다 까마득히 훗날인 258만 8천년 전 신생대 제4기다. 석기 시대 창작물에서 자주 보이는 대표적인 오류라 할 수 있다. 공룡이 먼 옛날에 멸종한 동물의 대명사다 보니 친근함을 주기 위해 원시 인간 문명과 함께 묘사하느라 용인되는 모양.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은 일단 배경이 석기 시대. 다만 배경만 석기 시대일 뿐 돌 도구나 이미 멸종했을 공룡 등을 이용해서 현대에 있을법한 물건은 어지간하면 다 구현하는 오버 테크놀러지스러운 광경을 보여준다. 사전적 의미의 석기시대라기 보다는 '스톤펑크'에 더 가까운 작품. 이 작품이 미친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석기 시대를 다루는 작품들 상당수가[33]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과 같이 배경은 석기 시대이지만 사회상은 도리어 현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작가들이 석기 시대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현대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 다만 도라에몽 극장판노비타의 일본탄생은 웬만한 학습만화 못지않게 석기시대에 대한 고증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캠페인 세팅 중의 하나인 다크 선은 환경 파괴로 인해 금속 자원 전반이 씨가 말라버려 세계관 전체가 석기시대로 퇴보한 상태이다. 일반적인 무기 중에 가장 쓸 만한 날붙이가 흑요석이고, 그 외에는 뼈 도구 정도나 보이는 수준이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시대 중 하나로 등장한다.

마인크래프트 플레이의 시작과 끝. 돌 곡괭이와 가죽 옷으로 일어나 네더라이트 곡괭이와 네더라이트 갑옷으로 귀결된다. 게임 내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으면서 가장 범용성 좋은 재료가 바로 돌인지라 어느 정도 금속을 얻게 된 후에도 돌 도구를 그야말로 징하게 쓰게 된다. 모드를 떡칠해서 온갖 기상천외한 자원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처음 시작하면 돌 도구는 반드시 만들어 쓰게 마련이다.

학원기이야담에서 희대의 개깡패 여주인공인 유소연이 어린시절 홍콩할매귀신에게 산속에서 극한 생존 수련을 받을 때 사용하는 것이 나왔다.

파 크라이 프라이멀은 석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다. 트레일러에서는 기초적인 언어와 함께, 창과 활로 매머드를 잡는 모습이 나왔다.

영화 세계사의 여러 시대 중 첫번째 파트로 등장한다. 인류가 벽화를 그리고 노래를 부르게 되는 과정이 다루어지며 공룡이 함께 존재했던 것으로 그려진다.


5. 기타[편집]


미 전략 공군의 아버지 커티스 르메이가 즐겨 쓰던 어휘이다. 자세한 내용은 커티스 르메이 문서로.

이름이 석기 시대라고 해서 돌로 만든 도구만 썼던 것은 아니다. 나무로 만든 목기도 많이 썼지만, 석기는 단단해서 세월의 풍화에도 견뎌서 유물로 남았으나 목기는 풍화되어서 사라진 것이 많기 때문에 석기만 보이는 것이다. 당연히 돌맹이보다 나무토막이 가공하기가 쉽다.

비슷한 경우로 아인슈타인의 인터뷰 내용이 있다. "장차 어떠한 병기들로 전쟁을 수행할 것 같습니까?"라는 언론의 질문에 "3차 대전에서 쓰일 무기가 어떤 것들인지 모르겠지만 4차 대전에선 돌과 나뭇가지가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유튜브 채널 Primitive Technology는 촬영용 카메라와 바지 이외에는 어떠한 현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34], 석기와 자연에서 채집한 재료만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므로 알맞는 광석만 찾으면 청동기 시대철기 시대로 옮겨갈 가능성도 있다. 드디어 철을 굽는 데 성공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 '위대한 인류'에서는 출연자들이 최초로 석기를 사용한 호모 하빌리스 시대부터 호모 사피엔스 시절의 상황을 재현했다. 맹수가 남긴 고기 뜯어먹고, 불피우고, 짐승 가죽 벗겨서 외투 만들어 입고 빙하를 건너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한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런던 대학교 그룹, 브라질 상파울루대 등 국제 공동 연구팀이 브라질 세하 다 카피바라 국립공원에 사는 카푸친원숭이(꼬리감는 원숭이)가 구석기인처럼 돌을 깨서 뾰족한 석기(타제석기)를 만드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관련 논문을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Nature)' 최신호에 발표했다고 한다.

현재 파나마의 카푸친원숭이가 석기 시대로 진입했다고 한다.# 물론 까마귀나 곰 등의 다른 몇몇 동물들도 필요에 따라 도구를 사용할 줄 알지만, 이 원숭이의 경우 용도에 따라 석기를 가공하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심지어 중국의 동물원에서는 파나마 원숭이가 돌을 날카롭게 가공해서 유리를 깨고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을 정도.#

[1]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보통 동기 시대를 설정하지 않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캅카스 이북의 초원지대에서는 동기 시대가 꽤 장기간 지속되었다.[2] 구석기 시대를 뜻하는 고유 명사와 형용사가 스펠링을 공유하기 때문에 Period/Age/Era 따위의 명사를 뒤에 붙여도 되고 빼도 된다. 다만 생긴 게 생긴 거다보니 형용사처럼 쓰는 편이 일반인들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들리는 편이다. 단독으로 쓸 경우 The Paleolithic이라고 하면 보다 확실한 느낌을 줄 수 있다.[3]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 200~400만년 전 기준.[4]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간의 정의는 '도구를 쓰는 동물'이었다. 그래서 당시 수많은 석학들은 해달이 사람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토론을 했다. 그때는 동물 행동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이런 분류가 가능했으나, 지금은 수많은 연구로 동물들이 도구를 사용하는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완전히 사라진 분류방식이다. 허나 이런 도구 쓰는 동물들은 대부분 어디까지나 있는 물건을 도구로 활용할 뿐 물건을 용도를 갖춘 도구로 만들진 않는다. 그러나 카푸친 원숭이는 이런 사례에서 벗어나 직접 도구를 만드는 수준이 된 것이다.[5] 돌을 깨는 것 외에 다른 걸로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면 까마귀 정도다. 물론 이들은 돌을 깨지는 않기 때문에 석기시대에 진입했다고 보지는 않는다.[6] 들판의 돌멩이와 달리 뗀석기는 만들 때 어떻게, 왜 만드는지 정하고 깨뜨렸단 뜻이다.[7] 돌을 서로 후려쳐서 파편이 떼어져 나가서 만들어진 석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먹도끼 같은 걸 보면 어지간한 생명체는 죽일 것처럼 생겼다.[8] 추리물에서 트릭이나 흉기로 쓰일 만큼 위력적인 암석이다.[9] 규슈에서 생산된 흑요석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며, 백두산에서 생산된 흑요석이 대구에서 출토된 경우가 있다.[10] '석기 제작의 흔적'이 발견되어도 완성품이 있어야 어떤 것을 만들고 썼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11] 석편을 이어붙여 원석을 복원하는 접합 연구가 활발한 일본의 경우 짧게는 수십 미터에서 길게는 킬로미터 단위로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석기가 서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다.[12] 물론 그렇다고 구석기 시대 인류가 '실용품' 부분에는 '장인정신'을 전혀 발휘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대표적인 물건이 바로 '돌화살촉'. Mythbusters에도 나온 것이지만, 돌화살촉을 단 화살과 그냥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불로 구워 단단하게 만든 훨씬 간단한 화살을 비교해봤더니 사냥에 필요한 실제 성능에선 거의 아무 차이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내린 결론은 '돌화살촉은 실제로 더 성능이 좋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과시용 물품에 해당할지도 모른다.'였다. 물론 위에서도 등장했듯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 말 ~ 신석기 시대 초의 '정착 채집사회'에선 절구 같은 실용품도 돌을 갈아 정성들여 만들었던 경우도 있다. '내구성 소비재'라면 공을 들여 만들기도 했던 것 같다.[13] 사실 모비우스 라인(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고 되지 않는 지역을 나누는 가상의 선)의 의미는 미개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어떻게 이동했는지 가설을 제시하는 것에 있다. 한동안은 인도 동부에서부터 이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지 않았단 점을 근거로, 인류가 동아시아에 유럽보다 빨리 들어가지 않았나 추정했다. 유럽에는 아슐리안 석기가 발명된 뒤에 들어갔다는 것. 물론 이 석기에 맞는 재료의 부족이나 유행 때문에 바꿨을 수 있다.[14] 사실 남아프리카의 코이산족(또는 '!쿵족'이라고도 불리는) 등 현존하는 수렵 채취 사회 - 사실 정확히는 '수렵 채취 사회에 가까운 사회'에 가깝다. 엄밀하게 따지면 오늘날 100% 수렵 채취에 의존해서 생활하는 집단은 사실상 남아있지 못하다 - 는 대체로 영양구성에서 채집식량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게 실제 농경이전 구석기 시대에도 주된 양상과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확답하기 어렵다. 동시에 다른 연구들은 - 구석기인들의 유골에 대한 분석 등을 바탕으로 - 실제로 구석기 시대 인류는 전반적으로 오늘날 남아있는 수렵채취 집단의 평균적 상태에 비해 더 높은 비중으로 동물성 단백질 식량을 얻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높은 경우엔 60~65% 까지, 낮은 경우엔 50% 내외의 칼로리와 영양소를 동물성 식량에서 얻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물론 오늘날 남아있는 수렵채취 사회와 마찬가지로 4:6~1:2 정도의 비율로 식물성 채집식량의 칼로리 비중이 높았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연구도 있고 말이다.[15] 식물성 식량을 획득하는 활동이 대체로 일정한 것에 비해, 동물성 식량의 획득방식에는 유형이 많은 이유는 당연히 그 주된 방식인 사냥이 더 변수가 많고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보충적인 여러 단백질 획득방식을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16] 정확히는 살만 발라낸 것이 아닌 통곤충의 그것이 낮다는 것이다. 곤충이 효율적이라는 것은 이건 투입된 사료 대비 효율을 말하는 거고 실제로 직접 곤충을 채집해서 먹어야 할 경우에는 사료 효율은 의미가 없다.[17] 지금도 마사이족들도 이런 식으로 사자들의 먹잇감을 가로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눈속임이라서 육식동물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가져가 먹어야 한다.[18] 극지방의 이누이트처럼 자연환경이 극한적이어서 수렵활동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우, 직접 동물을 잡는 것은 남성들의 몫이지만, 사냥이 식량공급의 주 원천이고, 또한 다른 지방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더 장시간의 사냥여행을 요구하는 성격상 사냥과정 전체는 사실상 남녀를 아우르는 공동체 전체의 일거리에 속하며, 여성들도 사냥그룹에 동행, 사냥도구와 의복 수선 등의 '야전지원업무'를 분담한다. 말하자면 서포터.[19] 근대까지 지역에 따라서는 수렵 채집으로만 생활했던 북미 원주민 생활권에서도, 빙하기 이후 신생대 거대 포유류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수렵 채집 상태의 인류만으로도 생태계에 지속적으로 변화를 가할 수 있는 강력한 최상위 교란자라는 증거가 된다.[20] 그런 연구 내용 중 일부에 따르면 (흔히 부시맨이라 불리던)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의 경우 주당 20시간의 노동 시간으로 하루 평균 2,300Kcal 정도를 섭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21] 원시 사회에서 영유아 살해의 대상은 남아보다 여아가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여아를 줄이는 것이 인구 조절에 더 확실한 수단이므로. 그리고 남아는 굳이 영아 때 죽이지 않아도 사냥을 하면서 죽는다.[22] '!쿵'족에 대한 인류학 연구 - 대표적으로 마저리 쇼스탁의 '니사'- 에서는 이들이 전통적으로 식물에서 채취된 일종의 낙태약을 사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국내의 '아마존의 눈물'에도 소개되었던 아마조니아 '조에족'을 다룬 해외 다큐에서도 조에족이 나무 껍질 등을 피임약 혹은 낙태약 비슷하게 사용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이상의 정확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인류가 동식물에서 구해지는 화학 물질을 치료제나 독극물, 나아가 환각제까지 여러 용도로 사용해온 것 역시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식물 중에는 포유 동물의 에스트로겐이나 프로게스테론처럼 작용하는 물질을 포함, 동물에게 작용하는 유사호르몬 성분을 지닌 녀석도 꽤 있다. 이는 사실은 일부 식물이 살충 성분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의 방어 전략의 하나다. 즉 '포식자'인 대형 초식 동물에게 '피임약'을 먹여 번식율을 떨어뜨리는 전략. 한 지역에서 오래 돌아다닌 집단이 뭔가 약발이 듣는 걸 발견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23] 이에 대해 학자들은 거의 자전거와 자동차 수준으로 인류의 거주지 이동 범위가 넓었다고 비유를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인류가 몰빵한 지구력 스탯과 직립 보행이 장거리 이동에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24] 사실 농업의 발생 이후로도 몇 차례의 '농업혁명'을 더 거치고 나서야 비로서 수렵채취 사회 이상의 1인당 영양공급이 가능했다. 박하게 평가하는 경우엔 거의 근세~근대에나 가능해졌고까지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평균적인 수준이 아니라 농경 이후의 사회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평민층 및 하층계급'의 상태를 기준으로 따지면 그보다도 더 박하게 평가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25] K Prufer et al. (2014) - The complete genome sequence of a Neanderthal from the Altai mountains, Nature 505, pp43-49.[26] 전라남도기념물 제 172호[27] 전라남도기념물 제 238호[28] 사적 458호[29] 하지만 아직 문명 단계가 아닌 초기 신석기 문화 단계였다. 구리는 기원전 4천 년대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수메르 문명의 시작은 청동기의 도래와 함께 한다 보기에 기원전 3500년대 정도로 추정 중이다.[30] 해수면 상승으로 한반도 초기 신석기 유적이 수몰되었을 수도 있으나, 중국에서는 후기 구석기 토기가 발굴되고 있는 상황이라 그냥 다 없어졌다라고 하기는 조금 어색한 상황이다.[31]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현상은 산업 혁명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 할 수만 있다면 24시간 일을 시켜도 생산량은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 되자, 노동 시간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 실제로 바로 그런 이유로 증기기관이 발명되자마자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과 강도가 미친 듯이 높아졌다.[32] 상상력, 창의력 등에 의해 초월자, 율법, 이념, 평등 같은 실체가 없는 것을 집단적으로 믿는 능력.[33] 물론 학습만화는 논외. 애초에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작품이니 왜곡을 할 수 없다. 다만 석기시대에 대한 것이 주 내용이 아니라 배경 소재이기만 할 경우 이럴 수도 있다.[34] 중간에 편집점이 많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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