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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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신기석
申基碩 | Shin, Ki Suk


파일:신기석 의원.png

창씨명
이와타 키세키(岩田基碩)

지양(芝陽)[1]
본관
평산 신씨[2]
출생
1908년 음력 5월 6일[3]
경상북도 예안군 읍내면 만촌동
(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301번지[4])
사망
1989년 2월 2일 (향년 80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강남성모병원
학력
예안공립보통학교[5] (졸업)
안동공립보통학교[6] (졸업)
대구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상훈
황조소성훈장(1963.12)
국민훈장 모란장(1972.12)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국제법/국제정치학자, 교육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2. 생애[편집]


1908년 음력 5월 6일(양력 6월 4일) 경상북도 예안군 읍내면 만촌동(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301번지)에서 아버지 우계(迂溪) 신봉균(申鳳均, 1887 ~ 1955. 10. 25)[7]과 어머니 야성 정씨(野城 鄭氏, 1884 ~ 1966. 4. 21)[8]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안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이었던[9] 1919년 안동군 예안면에서 3.1 운동에 참여하고 1년을 쉬면서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1920년 안동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 1922년 졸업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1927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제2종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모교인 안동공립보통학교의 촉탁교원으로 6개월간 근무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동숭동[10]에 거주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해 1928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5회로 문과A(법과 진학반)에 입학했다. 경성제대 예과 재학 중에 생도 총대표를 맡았다. 1930년 예과를 수료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로 진입했으며 학부에서 학생회 이사(理事)를 역임했다.[11] 학부 재학 중이던 1931년 10월 신현중(법문학부), 조규찬(의학부) 등이 주도한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京城帝大 反帝同盟事件)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고, 경성부 본정경찰서에서 33일간 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았다.


파일:신기석(1931년).png

1931년 10월 25일, 경성부 본정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그 뒤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1930년 11월 4일 출옥했다. 출소 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도 관련 학생들의 처분을 두고 교수회의가 열렸는데, 국수적이었던 문학 계열 교수들의 처벌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성향이 농후했던 사회과학계열의 교수들이 "식민지 학생으로서 그럴 수도 있으니 불문에 붙이자."고 감싸주어서[12] 경징계 중에서도 가장 약한 단계인 1주일 근신 처분만 받고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1933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법학사를 받았으며, 동 대학원으로 진학해 1933년 4월부터 1937년 3월까지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국제법·외교사연구실의 조수[13]로 근무하였다(참조). 대학원에 있으면서 <신동아(新東亞)>에 "1933년도 국제연맹의 업적"(1933.12), "1914년의 회고와 1934년의 전망"(1934.1), "재만조선인근황(在滿朝鮮人近況)"(1934.2) "이태리의 길드국가"(1934.3), "국제연맹을 싸고 도는 위기"(1934.4), "평화조약과 구주국제정국의 동향"(1934.11), "자르地方歸屬人民投票問題"(1935.1), "일만통제경제와 만주의 중공업(日滿統制經濟와 滿洲의 重工業)"(1935.6) 등을, <신흥(新興)>[14]에 "조선통상교섭사의 일절(朝鮮通商交涉史의 一節)"(1935.8), "한러외교사(韓露外交史)"(1935.10)를, 그리고 <조광(朝光)>[15]에 "조선인의 극동러시아령 이주내력(朝鮮人의 極東露領 移住來歷"(1936.12), "극동제국의 정치외교사(極東諸國의 政治外交史)"(1937.1) 등 논문을 게재했고 1935년에는 2년의 조수 임기를 한 차례 연장해가며 모교에서 교수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조선인인 그를 포함한 자교 출신 조수들을 밀어내고 도쿄제대 학부 졸업생들이 경성제대에 조교수로 부임해오는 현실에 좌절하였다.[16]

이 때 만주국에서는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제국 국적자에게 부여되었던 치외법권을 폐지하면서 만주국에 체류하던 수많은 조선인의 법적 대우 문제를 담당할 전문가가 필요했고, 경성제대에 국제법을 전공한 조선인 연구자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해왔다. 이에 당시 학생감을 맡고 있던 와타나베 도운(渡邊洞雲) 교수는 국제법외교사연구실의 유일한 조선인 조수였던 신기석에게 만주행을 제안했고, 이렇게 신기석은 모교의 추천을 받아 만주국 관료로 가게 된다. 마침 신기석은 법문학부 조수로 근무하고 있던 1935년 7월 경성제국대학 만몽문제연구소의 일원으로 만주를 시찰하고 기행문《유만잡기》를 동년 8월 동아일보에 9회에 걸쳐 발표한 바 있었다.[17]

1937년 5월 만주로 건너간 신기석은 만주국 산업부 속관으로 근무하면서 만주국의 고급관료 양성 기관인 대동학원에 입학해 1년간 교육을 받고 1938년 졸업했다. 이후 만주국 산업부 개척총국의 고등관시보로 근무하던 중 1939년 만주국 고등관특별적격고시에 합격하여 사무관(친임관 3등)으로 승진했고, 1945년에는 이사관(친임관 2등)으로 승진해 흥농부 농산사(農産司) 수도(水稻)과장으로 재직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당초 국제법 전문가로서 경성제대의 추천을 받아 갔으나, 막상 만주 현지에서는 관련 업무를 맡지 못한 탓에 연구와 다소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면서도 "만주조선인 교육현황(滿洲朝鮮人 教育現況)"(1939.2 <조광(朝光)>), "만주미곡생산에 있어서의 조선농민의 지위(滿洲米穀生產에 있어서의 朝鮮農民의 地位)"(1941.4 <춘추(春秋)>)[18], "朝鮮人 開拓民의 前途"(1941.6 <조광>) 등에 논문을 싣는 등 연구 노력을 이어갔음을 강조하고 있다.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한 그는 학계로 돌아와 1946년 3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정치과 교수에 부임하여 정치사, 외교사, 국제법을 맡아 가르치다가 국대안 파동으로 사직하였다. 1947년 3월에는 연희대학교 교수에 부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했고, 1948년 3월 모교로 복귀해 1949년 8월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이 초창기 교수 시절이 잠 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연구와 수업 준비에 몰두했을 정도로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학문에 열중했던 시기라고 한다. 1948년「근세동양외교사」(동양문화사), 1949년「근대외교사」(탐구당) 등의 저서를 펴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1949년 당시 고려대학교 정법대학장으로 있던 경성제대 선배 현민 유진오로부터 1949년 7월부터 미국 정부 초청 연수로 1년간 미국 유학을 다녀오게 된 자신의 자리를 대신 맡아달라고 부탁을 받고 신기석은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교수로 옮기게 되었다. 전시연합대학을 끝내고 환도한 1951년 7월 상처했고, 10월에는 총장 업무를 맡고 있던 유진오의 직위를 공식적으로 물려받아서 1954년 3월까지 고려대 정법대학장을 지냈다. 1954년 4월 6일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 제5분과 회원에 선출되었고 대한국제법학회 이사가 되었으며 외무부 외교사실연구 조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9월부터 1958년까지 중앙대학교 법정대학장을 지냈으며, 1955년부터 1956년까지 美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 유학하여 조지타운 대학교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구교수로 연수하였다.

1957년 국제정치학회 회장을 지냈고, 문교부 장학위원으로 고등고시 출제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경희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서범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 사이 1959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일보서울신문에서 논설위원으로,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참의원 자문위원,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외무부 외교자문위원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에 추대되어 1963년까지 역임했다. 그 사이 1962년에는 문교정책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어 활동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1963년 12월 황조소성훈장을 수령하였다. 1963년 중앙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제4대 부산대학교 총장(참조),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영남대학교 초대 총장, 다시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제6대 부산대학교 총장(참조)을 역임하였다. 부산대학교의 역대 최장 재임 총장이다. 1967년 저서 「韓末외교사연구(清韓종속관계론)」(일조각)을 발간했고 1968년 6월 그의 환갑을 기념해 『지양 신기석 박사 회갑기념논문집(芝陽申基碩博士回甲紀念論文集)』이 편찬되었다.

1972년 12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중구-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해 4선 출신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신민당 김응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1979년까지 의정 활동을 했다. 국회 활동 중 나이와 상관없이 선수에 따라 대접받는 통에 60대 후반의 나이로 초선의원이 된 그는 젊은 다선의원들로부터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국회에서는 전문 분야인 외교, 통일, 북방 관련 안건 및 교육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1976년 3월 민주공화당 국토통일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칠순이 넘은 고령임을 이유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1980년 3월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위원에 취임하였으며, 1981년 4월 학교법인 선인학원의 관선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5년「新稿동양외교사」(탐구당), 1979년「간도영유권에 관한 연구」(탐구당), 1980년「북정일기」(탐구당) 등의 저서를 냈다.

1989년 2월 2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강남성모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 제5분과(정치학 등)에 최초로 선출된 국내 1세대 국제정치학/국제법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만주국 관료 행적으로 인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해외 부문(만주)에 신기석을 포함시켰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구[19]

[[무소속|
무소속
]]

7,246 (21.22%)
낙선 (3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구[20]
12,849 (21.65%)
낙선 (2위)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중구-영도구[21]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27,497 (25.95%)
당선 (2위)
초선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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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안면에 있던 그의 고향마을이 영지산(靈芝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2] 제정공파(齊靖公派) 33세 현(鉉)◯, 언(彦)◯, 윤(允)◯, 종(鍾)◯ 항렬. 초명은 신현대(申鉉大). 평산신씨제정공파보 제9권 398쪽 참조.[3] 양력 6월 4일.[4]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5] 4년제[6] 4년제였던 예안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5학년에 편입하였다.[7] 자는 도현(道見).[8] 정성린(鄭聖麟)의 딸이다.[9]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의 수학기간이 소학교와 같은 6년으로 늘어났으나, 예산상 문제로 과도기에는 군청 소재지 보통학교부터 먼저 6년제가 되었고 면 소재 보통학교는 4년제였던 상태였다고 한다.[10]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11] (芝陽申基碩博士八旬紀念文隻)「八十平生」앞에 실린 사진 중 학생회 이사 시절 시가 기요시 총장, 법문학부장, 의학부장 등 보직 교수들 그리고 학생회 이사 8명이 찍은 단체 사진이 수록되어있다. 신기석 본인을 제외한 학생회 이사 전원은 일본인이라고 부기되어있다.[12] 특히 그를 학문 후계자로 삼으려던 정치학 정치사 제2강좌 담임교수 마쓰모토 카오루(松本馨, 영국정치사 전공)는 신기석이 출소하자마자 그의 집에 처음 찾아온 사람이었을 정도라고 한다.[13] 오늘날의 박사과정생 및 유급 포닥[14] 1929년 7월 창간호부터 1937년 1월 통권 9호까지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조선인 학생들이 발행한 학술지.[15] 1935년 11월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정치 경제 시사 문예 철학 종교 등 각 부문을 망라해 발행한 월간종합잡지로, 신동아와 쌍벽을 다투었다.[16] 해방 전까지 경성제대 학부 출신으로 모교 교수(강좌 주임교수)로 임명된 인물은 제2회 졸업생 일본인 단 한 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경성제대 교수진은 거의 전부 도쿄제대 출신으로 구성되어있었다고 한다.[17] 신기석은 원래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하는데, 학부 졸업 즈음 그를 아끼던 외교사 강좌의 오쿠다이라 다케히고(奧平武彥) 교수에게 상담하자 '꼭 신문기자를 해야겠다면 바로 조선일보동아일보에 갈 게 아니라, 일본의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에서 최소 3년 정도 일해보고 옮기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이 그의 일본행을 반대하여 신기석은 신문기자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차선책으로 대학 교수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법외교사연구실 조수가 되었다.[18] 1940년 8월 조선일보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당한 후 동아일보 기자였던 양재하가 중심이 되어 1941년 2월부터 조선춘추사에서 우수한 논문 및 문학작품을 수록하여 편찬한 월간종합잡지이다.[19] 제6선거구[20] 제9선거구[21] 제1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