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당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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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新舊黨爭

1. 개요
2. 배경
3. 왕안석의 중앙정계 입문
4. 철종 시기
5. 휘종의 즉위와 권신 채경
6. 그리고 정강의 변



1. 개요[편집]


11세기 후반, 북송 조정 내에서 펼쳐진 구법파와 신법파의 당쟁을 일컫는 말이다. 11세기 후반에 전개된 신구당쟁은 송나라의 정치지형을 이해할 때 중요한 사건으로 작용한다.

2. 배경[편집]


북송은 인종의 정치로 전성기가 시작되었지만, 1038년 서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요나라와 대립하던 북송은 군사비 지출로 재정상의 문제가 일어났다. 북송의 관료제는 비대화되고, 지주의 토지 겸병, 대상인의 독점 행위, 세폐 문제 등에 대한 해결이 본격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개혁은 인종의 뒤를 이은 영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1067년 영종이 4년의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나고, 영종의 황태자 조욱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니, 이가 바로 북송의 제6대 황제인 신종이 된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한 인물이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데뷔하는데 그가 바로 왕안석이다.

3. 왕안석의 중앙정계 입문[편집]


신종은 즉위 이후, 왕안석을 등용하여 한림학사로 임명하였고, 1069년에는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 왕안석은 참지정사가 된 이후 다양한 개혁을 추진한다. 왕안석은 청묘법, 보갑법, 균수법, 시역법, 보마법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여 서하의 침공 등으로 피폐해진 북송의 재정난과, 농민과 중소상인들의 보호, 부국강병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희령변법)

왕안석의 개혁은 일반 농민들과 중소 상인들이 환영하였지만, 대지주나 권력자 등 기득권층들이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였다. 왕안석의 개혁에 반발한 인물들을 대표적으로 나열하면 한기, 구양수, 사마광 등이 있다. 한기, 구양수, 사마광 등은 정치적으로 왕안석의 개혁에 반대하는 당파를 조직하였는데 이들을 구법당으로 부르고, 왕안석의 개혁에 찬성하는 일파를 신법파로 불렀다. 신종 재위기는 구법당과 신법당간 당쟁이 격화된 시기였다.

왕안석의 개혁이 민생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신법파 내부에서도 왕안석의 개혁 추진 속도에 대해서 상당히 급진적이라는 비판과 더 심각해진 사회 모순으로 분열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희령 7년(1074년)에 대규모 가뭄이 발생하자, 구법당에서는 이것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분노라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왕안석과 신법 개혁을 규탄하고 왕안석의 퇴진을 요구한다. 결국 신종은 어쩔 수 없이 왕안석을 강녕부로 좌천시켰다.

왕안석의 세력이 약해지던 즈음에, 신법파 인물이었던 여혜경이 왕안석을 참소하였다. 왕안석은 1075년에 복직했으나, 여혜경의 참소와 비난으로 결국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4. 철종 시기[편집]


신종이 18년의 재위 끝에 1085년에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즉위하였다. 태황태후가 된 선인성렬황후는 구법당의 당수였던 사마광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 개혁을 폐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반동적인 조치에 대해, 소식을 비롯한 일부 사대부들이 반발하였다. 결국 사마광은 재상이 된지 1년도 안 되어 신법을 대체할 후속 조치를 강구하다가 병사한다. 한편 같은 시기에 신법당의 중심인물이었던 왕안석도 결국 세상을 떠났다.

1093년, 선인성렬황후가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한다. 철종은 태황태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배제되었던 장돈, 증포 등 옛 신법당 인물들을 다시 등용했다. 철종에 의해 신법 개혁이 다시 추진되면서, 원우당적(元祐黨籍) 사건이 발생한다. 신법당에 의한 구법당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벌어졌는데, 이미 죽은 사마광은 사후 관직이 강등되거나 사마광이 썼던 자치통감도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다.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은 철종 시기에 다시 격화되었다. 게다가 신법당 내부에서도 탄핵이 일어나 장돈이 이때 탄핵되었다. 그리고 신구당쟁의 연장선 상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소자성헌황후 폐출과 유씨의 현비 책봉이었다.

사마광과 왕안석 사후,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은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더욱 가속화되어 북송의 정치적 혼란을 불러왔고, 이는 이후 북송의 운명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5. 휘종의 즉위와 권신 채경[편집]


1100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헌민태자 조무가 있었지만 요절하였고, 결국 신종의 남은 아들들 중 후계자를 선정해야 했다.

신종의 아들들은 1100년을 기준으로 볼때 신왕 조필, 단왕 조길, 신왕 조우, 목왕 조시, 간왕 조사가 있었는데, 신왕 조필은 심각한 눈병을 앓고 있어서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간왕 조사는 철종의 모후인 흠성황후의 소생으로 철종의 친동생으로 철종의 후계자로 유력했다. 하지만 당시 북송의 태후였던 흠성헌숙황후는 과거 흠성황후 사이가 좋지 않았고, 흠성황후가 사실상 정실 취급 받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가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단왕 조길을 후계자로 주장했다.

장돈은 흠성헌숙황후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 분은 행동거지가 경박하여 황제가 되는 것이 불가합니다.


하지만 흠성헌숙황후는 단왕 조길을 후계자로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흠성헌숙황후의 단왕에 대한 개인적 총애, 흠성황후와의 개인적인 관계, 여기에 신법당과 구법당 간의 이해관계까지 얽히면서 결국 단왕 조길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북송의 제8대 황제 휘종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흠성헌숙황후는 일부 구법당 관료들을 복귀시켰고, 철종에 의해 폐출되었던 소자성헌황후를 원우황후로 복권시켰지만, 흠성헌숙황후는 1101년에 사망하였다.

흠성헌숙황후 사후 휘종이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했는데, 이때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인물이 바로 북송 최악의 간신으로 불리는 채경이었다. 채경은 소회황후와 손을 잡고 소자성헌황후를 다시 폐출시켰고, 휘종의 비호 아래에서 구법당과 신법당 할 것 없이 모두 탄압하여 북송의 권신이 되었다. 채경에 의해 북송의 정국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가운데, 휘종은 자신의 예술 활동을 위해 신종과 철종대에 개혁으로 안정되었던 국가 재정을 파탄내기 시작한다. 휘종이 즉위한 이후 신구당쟁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고, 휘종의 암군행보와 채경의 권력 장악이 주가 되었다.

6. 그리고 정강의 변[편집]


결국 휘종의 실정으로 인해 계속되는 사회모순에 시달리다 못한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대표적인 반란이 바로 방랍의 난이었다. 북송은 방랍의 난을 겨우 진압했지만, 국력의 쇠퇴가 현저히 드러났다. 이 와중에 금나라가 등장하면서 휘종은 금나라와 협력하여 1125년에 요나라를 박살냈지만, 이후 요나라의 천조제나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비밀리에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결국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금나라 군대가 북송을 침공하였고, 정강의 변이라는 최악의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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