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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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광희.jpg
성명
신광희(申光熙)
생몰
1879년 3월 17일 ~ 1941년 8월 30일
출생지
경상남도 문경군
사망지
미국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신광희는 1879년 3월 17일 경상남도 문경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로 이주한 뒤 3년간 대한제국 군대에 들어가 사위대 하사로 근무했다. 1905년 에네켄(henequén) 농장에서 일하기로 계약을 맺고 멕시코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 3년간 노역한 그는 1908년 80~100페소를 지불하고 농장에서 나온 뒤 친목회 활동을 전개했다. 1909년 5월 24일 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창립되자 서기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 재무를 그만둔 김윤원 대신 대리로 업무를 처리했다.

1910년 4월에 열린 통상회에서 회장과 부회장 등 임원진의 교체가 있었지만, 신광희는 계속 서기직을 맡았으며, 6월부터는 메리다지방회 회관에 남녀 학생 십여 명을 모아 놓고 조선의 역사지지 등을 가르쳤다. 1910년 12월 김제선, 정춘식 등과 함께 타바스코로 이주하여 농장 주인과 5년의 계약을 맺고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집을 새로 짓고 토지를 개간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을 ‘신한동(新韓洞)’이라고 불렀다. 신광희는 신한동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그 외에 동장에 정춘식, 서기에 김기창, 재무에 박국천, 찬조원에 김윤원·김태진 등이 선임되었다.

1911년 1월 25일에는 자치 제도를 만들고, ‘멕시코 타바스코 신한동 헌장’ 12조를 제정하였다. 그러나 7월에 홍수가 심하게 나느 바람에 유카탄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다시 베라크루스주 남쪽의 와하케뇨로 이주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를 설립했으며, 1912년 5월에 설립된 일신국어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한인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 후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흥사단에 가입하여 단우번호 57번을 부여받았다.

또한 1920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실업부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 노백린 등이 중국 내 항일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비행사양성소(飛行士養成所)를 설립하자 이에 가입했다. 비행사양성소에서 약 4년간 재무로 활동한 그는 비행기 5대를 매득하여 50여 명의 학생들에게 둔전병식(屯田兵式) 군대교련을 통해 항일 무장투쟁의 사관들을 배출하는 한편, 1920년 11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1천 달러 이상을 후원하여 임시정부 재무부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여생을 보낸 그는 1941년 8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 양로원에서 병사했다. 향년 63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광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