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강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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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34년 현재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서 중화민국과 소련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놀랍게도 백군이 소련을 지원했었다.
2. 배경[편집]
1934년, 국민당의 지원을 받은 마중잉이 2차 우루무치 전투를 거의 승리로 이끄면서 신강의 성스차이를 패배시키기 직전이었다. 마중잉은 국민당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고 쿠물 반란을 일으켜 당시 공산당이 통치했던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고, 국민당에서 공식 승인을 받아 쿠물 칸국 충성파들과 함께 신강을 침공했다.
3. 전개[편집]
3.1. 소련의 개입[편집]
그런데 소련이 전차, 전투기, 머스타드 가스가 들어있던 포와 함께 7,000명의 소련 OGPU 부대로 구성된 2개의 여단[1] 이 마중잉이 이끄는 36사단에게 거의 궤멸당했던 성스차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표식이 없는 제복으로 위장하여 전투를 치렀고, 마중잉과 같이 싸우던 장배원은 연이어 이닝, 타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자살했다. 소련군은 인력이나 기술 면에서 우세했지만, 심각한 사상자와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중국 무슬림 부대들이 약 30일 동안 진격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때 장제스가 황소홍과 함께 36사단을 도와 원정군을 보내려 했지만, 소련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국제적인 문제를 피하려고 원정군을 철수시켰다.
4. 결론[편집]
마중잉의 36사단은 결국 4월 6일에 카슈가르로 후퇴했고, 아크수시까지 성스차이의 군대에게 추격당했다. 그러나 점차 추격은 약화되었고, 마중잉은 마랄베시와 페이자와트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소련군과 맞섰다. 6월에 폭격이 계속되자, 마중잉은 카슈가르에서 호탄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7월 4, 5, 6일에 마중잉이 호탄으로 진격한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진격한 후 소식이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 [2] 결국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신강 지역은 기존의 성스차이 정권과 남쪽의 퉁가니스탄으로 둘로 나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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