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밴드)

최근 편집일시 :

시카고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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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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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시카고
CHICAGO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로버트 램, 리 러프넌, 제임스 팬코우, 월터 페러자이더,
테리 카스, 피터 세트라, 대니 세라핀

입성 연도
2016년
후보자격 연도
1995년
후보선정 연도
2016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
이름
시카고
CHICAGO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92년 7월 23일
위치
6438 Hollywood Blvd.


파일:시카고(밴드) 로고.svg
파일:chicago-1974-portrait-billboard-650.webp
▲ 1974년 Chicago VII 앨범 시절의 8인조 시카고. (윗줄 왼쪽부터) 월터 페러자이더, 테리 카스, 리 러프넌, 피터 세트라, 대니 세라핀 (밑줄 왼쪽부터) 제임스 팬코우, 라우디르 드 올리베이라, 로버트 램
Chicago
출신지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현재 멤버
로버트 램 (키보드)
리 러프넌 (트럼펫)
제임스 팬코우 (트롬본)
토니 오브로타 (기타)
로렌 골드 (키보드)
왈프레도 레예스 주니어 (드럼)
레이 헤르만 (색소폰, 플루트)
닐 도넬 (보컬,기타)
에릭 베인스 (베이스)
라몬 이슬라스 (퍼커션)
전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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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페러자이더 (색소폰, 플루트)
대니 세라핀 (드럼)
테리 카스 (기타)
피터 세트라 (베이스)
라우디르 드 올리베이라 (퍼커션)
도니 데이커스 (기타)
크리스 피닉 (기타)
빌 챔플린 (키보드)
제이슨 셰프 (베이스)
드웨인 베일리 (기타)
트리스 임보든 (드럼)
브루스 가이지 (기타)
키스 홀랜드 (기타)
드류 헤스터 (퍼커션)
루 파디니 (키보드)
제프 코피 (베이스)
다니엘 드 로스 레예스 (퍼커션)
브렛 시몬스 (베이스)

활동기간
1967년 ~
데뷔
1969년 앨범 Chicago Transit Authority
레이블
Rhino Entertainment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1966 - 1969: 밴드 결성과 Chicago Transit Authority로서의 정식 데뷔
3.2. 1970 - 1977: 전성기와 앨범들의 연이은 성공
3.3. 1978 - 1981: 계약 문제, 테리 카스의 갑작스런 사망과 침체기
3.4. 1981 - 1982: 새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와의 만남과 음악적 변화
3.5. 1983 - 1984: 앨범 "Chicago 17"의 대성공 및 일부 멤버들의 음악적 갈등
3.6. 1985 - 1989: 피터 세트라의 밴드 탈퇴와 데이비드 포스터와의 결별
3.7. 1990 - 현재: 여전히 활동하는 시카고
4. 현재 멤버
5. 이전 멤버
6. 앨범 커버와 앨범 관례
7. 디스코그래피[1]
8. 차트
8.1. 앨범
8.1.2. 빌보드 200 2위
8.1.3. 빌보드 200 3위 ~ 10위
8.1.4. 빌보드 200 11위 ~ 20위
8.1.5. 빌보드 200 21위 ~ 30위
8.1.6. 빌보드 200 31위 ~ 100위
8.1.7. 빌보드 200 101위 ~ 200위
8.2. 싱글
8.2.2. 빌보드 핫 100 3위 ~ 10위
8.2.3. 빌보드 핫 100 11위 ~ 20위
8.2.4. 빌보드 핫 100 21위 ~ 30위
8.2.5. 빌보드 핫 100 31위 ~ 100위
9. 여담
10. 갤러리


1. 개요[편집]


파일:chicago 1969.jpg
파일:chicago 2023.jpg

1967년 미국 시카고에서 결성되어 현재까지 활동 중인 록 밴드이다.


2. 상세[편집]


현재까지 23장의 골드 앨범과 18장의 플래티넘 앨범, 8개의 멀티 플래티넘 앨범, 21개의 빌보드 핫 100 탑 텐 싱글, 미국에서만 앨범 4천만장을 판매하였고 전세계적으론 총 1억 2천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밴드이다.

1967년 결성 및 1969년 데뷔부터 1977년까진 프로듀서 제임스 윌리엄 구에르치오와 함께하며 록 음악에 트롬본, 트럼펫, 색소폰의 3중 관악기 섹션을 혼합하는 재즈 록, 퓨전 재즈팝 록 등의 음악들을 중점으로 하였다.
1979년도부턴 프로듀서 필 라몬, 톰 다우드와 함께하며 침체를 겪다가, 1981년 말을 기점으로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와 함께하게 되면서 소프트 록과 같은 대중적인 어덜트 컨템포러리 중점의 노선을 1990년대 초까지 이어갔고 포스터와 결별 이후 여러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하면서 90년대 중반, 2000년대 초중반부턴 다시 3중 관악기 사운드를 부활시키며 재즈 록, 소프트 록, 팝 록 음악 등을 다시 중점으로 하여 음악 활동을 현재까지 이어나가는 역사가 있는 밴드이다.
여러 상황으로 인해 멤버들의 변화와 음반사 변경, 프로듀서 변경도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음악적 색깔을 꽤나 고수하고 잘 잃지 않으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3. 역사[편집]



3.1. 1966 - 1969: 밴드 결성과 Chicago Transit Authority로서의 정식 데뷔[편집]


시카고드폴 대학교에서 클라리넷 연주를 전공하던 월터 페러자이더(Walter Parazaider)가 1966년 비틀즈Got to Get You into My Life등의 곡들을 듣고서 영감을 받아 관악기 세션이 있는 로큰롤 밴드를 위해 사람을 모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월터 페러자이더는 10대때부터 친구로 지냈던 기타리스트 테리 카스(Terry Kath)와 드러머 대니 세라핀(Danny Seraphine)과 함께 3인조 밴드를 결성했고, 트럼펫 연주자 리 러프넌(Lee Loughnane)도 테리 카스가 세라핀과 페러자이더에게 소개시켜주어 총 4인조인 '미씽 링크스(Missing Links)'를 결성한다.
미씽 링크스는 '관악기 섹션이 가미된 로큰롤 밴드'라는 원래부터 꿈꾸던 페러자이더의 프로젝트를 더 충실히 이행시켜보기 위해 추가로 멤버를 영입해야 했다. 페러자이더는 1966년 가을부터 동문인 트롬본 연주자 제임스 팬코우(James Pankow), 루스벨트 대학교 학생이었던 키보드 연주자 로버트 램(Robert Lamm) 총 2명을 더 모아 그룹을 완성시키기 위한 과정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1967년 2월 15일, 월터 페러자이더의 집 지하실에서 월터 페러자이더, 제임스 팬코우, 리 러프넌, 테리 카스, 로버트 램, 대니 세라핀 총 6명이 모여서 혼 섹션 로큰룰 그룹 프로젝트가 성공하도록 삶과 에너지를 바치기로 합의하며 그룹 빅 씽(Big Thing)을 결성한다.
페러자이더의 같은 대학 절친이자 CBS(콜롬비아 방송국 시스템)의 프로듀서가 되었던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James William Guercio)도 밴드 관리를 맡는 매니저와 밴드의 프로듀서 제안을 받아 동참한다.
빅 씽은 원래 키보드 담당인 로버트 램이 오르간 페달로 베이스 음도 겸해서 둘 다 연주했었으나 아무래도 다양한 베이스 음을 내기가 구조상 힘들다보니 확실한 베이시스트이자 테너 목소리를 가진 멤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 1967년 후반에 일리노이 주 시카고의 바나비즈 클럽에서 중서부의 가장 큰 클럽 밴드였던 '더 익셉션스(The Exceptions)'의 오프닝 공연을 빅 씽이 맡게 되었고 거기서 만난 익셉션스의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피터 세트라(Peter Cetera) 와 만나면서 인연이 생겼고, 세트라도 빅 씽에 참여하게 되어 총 7인조의 완성형 밴드가 되었다.

파일:the-big-thing-orig_orig.jpg
1967년 6인조 시절의 The Big Thing. 왼쪽부터 리 러프넌,테리 카스,월터 페러자이더,로버트 램,제임스 팬코우,대니 세라핀 순이다.

이후 인지도를 넓히고 1968년 6월 여름에 로스엔젤레스로 주 무대를 옮긴 빅 씽은 프로듀서 겸 매니저 였던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의 제안에 의해 월터 페러자이더가 타고 다니는 시카고 드 폴 대학교의 버스 노선을 기리기 위해(...) 밴드의 이름을 시카고 트랜싯 어소리티(Chicago Transit Authority) 로 바뀌었다.[2]
시카고 트랜싯 오소티리의 멤버들은 전부 결혼한 상태였으나, LA에 얻어두었던 방의 평 수가 작기도 하고 가족을 데리고 나올 여유조차 없었기에 각자 자신의 와이프들을 시카고의 본 집에 두고왔고, 그들은 밤낯으로 연습만 하느라 하루에 다섯 번은 이웃 주민들의 항의 전화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야간 나이트클럽에서 이전과 같이 공연을 하다가 타인의 음악만을 커버 연주하는것을 그만두고 자신들만의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1968년부터 Wake Up Sunshine, Lonliness Is Just A Word, Liberation, Someday(데모버전), Listen 등의 자신들만의 창작곡들도 커버 음악들과 같이 경기장과 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며 연주하고 다녔다.



시카고 트랜싯 오소리티가 데뷔 전인 1968년에 진행한 라이브 중 하나(여러 커버곡들도 포함되어있다.)

후에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는 시카고 트랜싯 오소리티와 CBS 사와의 계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쇼케이스를 두번 본 CBS는 시카고 교통국과의 계약을 두번이나 거절하였다.
두번이나 거절당하고 심지어 자금조차 부족했던 게르시오는 1968년 중후반, 당시 재즈 록 밴드였던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에게 두번째 앨범인 'Blood, Sweat & Tears'의 프로듀서를 맡아달라고 요청을 받았고, 게르시오는 시카고 트랜싯 오소리티 운영 자금 지원과 밴드와 CBS 간의 계약 체결 성공을 위해 블러드 스웻 앤 티어즈의 프로듀서를 맡았고, 그 이후 시카고 트랜싯 오소리티의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보여주며 마침내 CBS와의 계약 체결을 성공하며 CBS 산하 음반사인콜롬비아 레코드에 소속되게 된다.

그 후 시카고 트랜싯 오소리티는 1969년 1월 말 뉴욕 52번가에 있는 CBS 스튜디오에서 첫 앨범 녹음을 시작했다. 이때 그들이 처음으로 녹음한 곡은 1집 2번째 트랙인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라는 노래이다.
CTA는 첫 데뷔 앨범을 더블 앨범으로 제작하고 싶어했다.
밴드의 더블 앨범 제작 계획을 제임스 게르시오가 콜롬비아 사 측에 말하자, 콜롬비아 레코드 측은 시카고와 게르시오 자신들의 로열티를 줄이는것에 동의하면 더블앨범 제작을 허용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게르시오는 이에 동의하며 더블 앨범 제작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녹음과 제작을 끝마치고, 1969년 4월 28일,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Transit Authority를 발매하였다. 자세한건 Chicago Transit Authority 문서 참조.

첫 앨범은 발매 후 바로 히트를 치진 못했고 히트 싱글도 생산하지 못했으나(1969년, Question 67 & 68 싱글 차트 71위) 심야 록 음악 라디오, 대학 라디오를 통해 이들의 특색있는 앨범 및 음악을 접한 대학생들을 통해 입소문을 타게되며 점차 순위가 올랐고, 미국에서 빌보드 200 최고 17위에 1970년까지 판매량 100만장 이상을 달성하고 1972년까지 148주 동안 차트에 머무르며 신인 밴드로서는 이례적인 히트를 쳤고, 올해의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기까지 하는 등 파격적인 시작을 가졌다.

앨범 발매 후, 밴드 시카고 트랜싯 오소리티는 처음부터 Chicago Transit Authority 즉, 시카고 교통국에게 상표권 침해에 대한 법적 소송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후에 밴드명을 Chicago 로 축약하여 바꾸었고, 이후 현재까지 이 이름으로 밴드 활동을 진행하는 중이다.

파일:tlzkrh.png
피터 세트라(밑줄 왼쪽)가 합류하고 2년 뒤인 1969년의 7인조 시절의 시카고

3.2. 1970 - 1977: 전성기와 앨범들의 연이은 성공[편집]


시카고는 1969년 8월, 투어를 돌던 중에 두번째 앨범을 녹음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게 되어 두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준비한다.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은 뉴욕 스튜디오가 아닌 아닌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의 CBS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제목을 정해야했으나, 앨범명에 대한 멤버들의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좀처럼 잘 정해지질 않았고, 논쟁이 끊이질 않자 결국 그냥 자신들의 그룹명인 'Chicago'에 앨범 번호를 매겨 제목을 짓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앨범 제목은 Chicago(Chicago II)가 된다. 이전인 1969년에 이미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발매했기 때문에 두번째 스튜디오 앨범은 로마숫자 2로 넘버링이 되었다. 그리고 앨범 표지 디자이너로 존 버그(John Berg)와 처음 함께하며 앨범 표지도 함께 제작한다.

앨범 녹음 이전인 1969년 여름 투어 중 휴식 시간에 야구팀 시카고 컵스의 팬이었던 피터 세트라는 로스 엔젤레스 다저 스타디움에서 열린 LA 다저스시카고 컵스의 경기를 관람하였다. 피터 세트라는 컵스를 응원했고 결국 시카고가 LA를 상대로 7대0의 압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시카고 컵스가 이긴것에 화가 난 관람객이자 해병대원이었던 남자 4명이 자신들이 혐오하는 장발 머리스타일을 가짐과 동시에 시카고 컵스의 팬인 세트라에게 홧김에 먼저 시비를 걸며 결국 싸움이 나게 되었고, 해병대원들이 피터 세트라의 턱 세 군데를 부러트려 버리며 피터는 며칠간 중환자실에 철사를 턱에 봉합한 채 입원해야 했고, 퇴원을 했어도 철사를 몇달동안이나 감고 있어야 했다.
턱이 부러져 침대에서 요양하는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순 없었기에 그는 베이스 기타를 잡고서 차근차근 작곡을 하였고, 마침내 세트라의 첫 자작곡인 Where Do We Go From Here가 완성된다.

상술했듯, 턱이 세 군데나 부러져 철사를 봉합한 상태였던 피터 세트라는 회복 후 철사를 풀고나면 다시 턱이 벌어질까봐 두려워서 입을 제대로 벌리지 못했고, 이로 인해 이때부터 피터는 입을 최대한 벌리지 않는 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피터 세트라의 특유의 이를 최대한 다문채 노래하는 창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게 야구 경기장에서의 턱 부상으로 인해 피터 세트라는 첫 작곡과 창법 변화를 한번에 경험하게 된다. 첫 자작곡은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의 마지막 트랙에 수록하기로 결정하며 처음으로 노래에 자신의 크레딧을 올린다.

콜롬비아 레코드는 2집 발매 이전인 1969년 10월에 시카고의 첫번째 앨범인 Chicago Transit Authority의 수록곡인 Beginnings를 싱글 발매하여 흐름을 다시 지켜보기로 했으나, AM 라디오는 시카고가 데뷔할때부터 그들의 음악에 대해 여전히 관심이 없었던 탓에 노래를 틀어주지 않았고, 결국 싱글은 차트 진입조차 실패했다. 앞서 7월에 발매된 싱글 Questions 67 and 68은 그나마 차트 인에 성공해서 빌보드 핫 100 71위라도 달성했으나 후속 싱글인 Beginnings는 차트 진입조차 실패하였다. 그렇게 두 번째 앨범조차 실패하진 않을까 하는 우려도 생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1970년 1월 26일,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Chicago II)를 발매하게 된다. 시카고는 두번째 스튜디오 앨범 또한 LP 두 장짜리 더블앨범으로 발매하였다.
1970년 3월엔 이 앨범의 핵심 트랙인 7개의 곡으로 구성된 13분짜리 'Ballet for a girl in Buchannon'에서 첫번째 파트인 'Make me smile'이 라디오 친화적인 러닝타임인 2분 58초 버전으로 앞면, 5번째 파트인 'colour my world'[3]이 뒷면이 되어 양면으로 두 곡이 싱글 발매 되었고, 이전의 싱글들의 실패와는 다르게 Make Me Smile이 빌보드 핫 100 9위에 들게 되며 시카고에게 첫 빌보드 핫 100 10위권 달성이라는 기록을 쥐어줬다.
두 곡을 작곡한 제임스 팬코우는 로스엔젤레스의 산타모니카에서 자신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LA에서 제일 거대한 라디오 방송국인 KHJ 라디오를 틀었더니 갑자기 자신의 곡인 Make Me Smile이 흘러나왔고, 그것을 들은 팬코우는 놀랐는지 앞 차와 부딪칠 뻔하기까지 했다. 그때 팬코우는 "아,우리가 히트 싱글을 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시카고의 초기 경력 중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앨범 Chicago II마저도 빌보드 200 4위까지 달성하여 완전한 성공에 못을 박았다. 앨범 발매 3개월 후엔 RIAA(미국 음반 산업 협회)로부터 판매량 골드(10만장)를 인증받는다.(1991년엔 판매량 100만장 플래티넘 인증)
성공은 이 뿐만이 아니라 1970년 여름엔ㄴ 로버트 램이 작곡한 Chicago II의 재즈 록 트랙인 '25 or 6 to 4'[4]마저도 빌보드 핫 100 4위를 달성하며 연속된 성공을 가져다줬다.

2집의 대히트, 싱글들의 히트에 힘입어 콜롬비아 레코드는 1971년에 후속 싱글로 1집의 수록곡인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도 발매하는데, 이마저도 성공하게 된다. 이때부터 대중들이 드디어 시카고만의 관악기 록 사운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후 시카고는 같은해 7월 21엔 시카고는 빌 그레이엄(Bill Graham)이 주최한 Tanglewood의 공연에서 공연도 하게 된다. 이 공연에선 1집, 2집의 주요 곡들을 연주하였고 'Mother','I Don't Want Your Money'등의 미발표곡들도 초연하게 된다.


1970년 탱글우드(Tanglewood)에서의 공연

1970년 6월이 되면서 시카고는 또다시 새 앨범을 녹음할 시간을 얻었다. 심지어 이전의 두 스튜디오 앨범처럼 이번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마저도 더블 앨범으로 구상한다.
허나 시카고는 새 앨범에 수록할 곡들이 많이 고갈되어있었다. 예전에 써두고 쓰지않은 곡들이라 해봤자 제임스 팬코우가 쓴 Mother, 로버트 램이 쓴 I Don't Want Your Money와 Lonelines is Just a Word 등 뿐이지라 LP 두 장짜리 더블 앨범에 수록할 곡은 턱없이 부족했다.
피터 세트라가 다시 작곡에 힘을 썼고, 드러머 대니 세라핀과도 협업하여 곡을 쓰기도 했다. 월터 페러자이더도 처음으로 공동작곡에 참여한다.
피터 세트라를 비롯해 로버트 램, 테리 카스, 제임스 팬코우도 다시 작곡에 힘을 써서 마침내 트랙들을 완성하였고 녹음까지 12월에 완료한다. 곡 수가 부족했고, 그에 따라 곡들을 많이 쓰면서 녹음까지 하다보니 멤버들이 스튜디오에서 유독 피곤함을 더 겪기도 했다. 앨범명은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과 같이 3으로 넘버링하며 Chicago III로 결정한다. 항상 앨범마다 앨범명에 대한 멤버들의 논쟁이 끊이질 않았기에 앞으로도 이런 앨범명 전통을 유지한다.

1971년 1월 11일,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III를 발매하였다. 시카고는 'chicago III'를 통해 Funk, 재즈 록, 컨트리, 프로그레시브 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고 병역기피,평화,정의,베트남 전쟁 같은 주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앨범도 발매와 동시에 많이 팔려나가며 앨범차트 2위까지 오르며 시카고에게 앨범 최고 수위를가져다주었다. 앨범 발매 한달 후엔 판매량 10만장을 달성하여 골드 디스크까지 받게된다.(1986년엔 판매량 플래티넘 인증) 수록곡인 Free, Lowdown이 싱글컷 되었고, 싱글들도 이전 앨범 싱글컷들보단 못한 성적이었어도 무난하게 성공하며 앨범 판매에도 도움을 주었다.

시카고는 3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세개의 더블 앨범 모두 1971년 내내 차트에 머물렀고,

연속된 대성공을 겪고 있던 시카고는, 같은 해 4월 5일, 시카고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선사하게 되었다. 이 공연에선 1번, 2번, 3번 앨범의 곡들을 연주하였고, 일주일 간의 공연 끝에 4월 10일에 공연을 종료하게 된다. 이때 이 공연으로 인해 카네기 홀 티켓이 일주일동안 전부 빠짐없이 매진되는 상황을 만들어준 최초의 록 밴드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폭발적인 성과에 따라 카네기 홀 공연을 녹음 진행하게 되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 시카고는 이 공연 실황을 LP 4장짜리 박스세트로 제작하기로 한다.
그러나 콜롬비아 레코드는 이 박스 세트가 금전적 위험도가 있다고 판단하여 제작 및 발매에 회의적인 반응이 있었다.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인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는 해당 라이브 앨범 제작비 문제로 인해 콜롬비아 레코드와 협상을 이어가다가, 최종적으로 해당 라이브 앨범이 100만장 이상이 팔리지 않는다면 추가 비용을 부담하는 것에 동의하여 앨범 제작이 진행된다.

마침내 1971년 10월 25일에 시카고의 카네기 홀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이자 4번째 넘버링 앨범인 Chicago at Carnegie Hall을 2시간 48분 33초의 재생시간을 담은 LP 4장짜리 박스 세트로 발매하였다. 라이브 앨범에 LP 4장짜리라 LP 1장짜리 앨범보다 훨씬 가격이 비싸기도 하고 음질이 그닥 좋지는 않았으나 발매 후에 잘 팔리면서 빌보드 200 3위에 오르며 성공을 하게 되었다. 후에 10만장 판매 달성으로 골드 디스크도 수령했고 200만장까지도 팔리게 되어 청구서는 날라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해당 앨범에 대한 멤버들의 의견이 몇년간 갈리게 되는데, 피터 세트라와 제임스 팬코우는 베이스와 관악기들의 음향문제로 인해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말했다.
리 러프넌은 앨범의 일부는 좋았으나 안좋은 부분도 많았다고 하는 등의 의견을 내보였다.
그러나 월터 페러자이더는 일주일간 카네기홀을 매진시킨 최초의 록 그룹이 된것에 대해 기뻐하며 만족하기도 했고, 로버트 램도 자신의 곡이자 후에 다음 스튜디오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A Song for Richard and His Friends를 초연할 기회도 얻기도 했다보니 공연도 꽤나 만족했다고 하는 등 일부 멤버들의 호평도 있었다.

시카고는 1972년 2월에 월드투어를 시작하여 총 16개국을 돌며 20개의 공연을 하였다. 시카고는 당시에도 인기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반응도 좋아 시카고의 노래를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특히 독일, 호주, 일본에서는 시카고의 노래들을 관객들이 같이 부르는 등 더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제일 하이라이트였던 일본 오사카 페스티벌 홀에서 진행한 공연의 녹음을 담은 라이브 앨범인 'Live In Japan'을 일본 한정으로 더블 앨범으로 발매하기도 하였다. 월터 페러자이더에 의하면, 8트랙 기계 두 개를 연결하여 16트랙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이전 발매한 라이브 앨범인 카네기 홀 앨범보다 훨씬 뛰어난 음질을 제공하였으나, 앨범에 번호를 매기는 시카고의 관례에 따라 3번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III에 이어 4번(IV)으로 넘버링이 되는 카네기홀 앨범에 비해 Live In Japan 앨범은 번호가 매겨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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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2일 발표한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V의 앨범 커버. 시카고의 첫 빌보드 200 1위 앨범이다.

1972년 7월 10일,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V를 발매하였다. 이 앨범에선 이전 앨범보다 보컬없이 악기 연주로만 이루어진 트랙을 많이 감소시켰고, 이전 앨범들보다 비교적 촘촘하게 노래를 배열시켰다. 당시 AM 라디오는 점점 더 상업적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컬없이 연주 파트만 이어지는 노래는 AM 라디오에서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것이 안봐도 뻔했고, 해당 앨범의 작업 방식은 시카고 자신들이 주로 하는 작업방식이 아님을 스스로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화한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네번 째 앨범은 이전 앨범들보다 더 촘촘하게 9곡을 배열하였다.
3번째 앨범까지 모두 더블 앨범으로 발매한 시카고는 노래 저작권에 대한 대가를 받는 방식이 달라지게 되어, 이번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은 LP 한장짜리로 발매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앨범에 수록할 수 있는 노래 갯수와 해당 앨범에서 얻을 수 있는 저작권 수에 대한 제한이 없었으나, 후에 콜롬비아 레코드가 노래가 아무리 많아도 앨범마다 10개 노래의 저작권에 대해서만 비용을 지불하겠다고(앨범이 곡이 만약 12개라면 그 중 10개의 곡에만 저작권 비용 지불) 입장을 바꾸면서 총 10곡을 수록한 LP 한장짜리로 처음 발매하게 된다.
앨범은 9주동안 빌보드 200 1위를 유지하여 시카고에세 첫 빌보드 200 1위를 안겨주었고, 로버트 램 작곡의 'Saturday In the Park'[5]빌보드 핫 100 3위와 함께 시카고의 첫번째 골드 싱글을 달성하고, 1972년 10월에 발매한 앨범의 두 번째 싱글이자 피터 세트라와 테리 카스가 공동 작곡한 'Dialouge'또한 인기를 얻으며 싱글 차트 24위로 들어서며 또다시 성공한다.

Chicago V가 차트에서 계속 상승세를 이어가는 동안 시카고와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는 게르시오 자신이 감독이 되어 만든 영화인 'Electra Glide in Blue'를 작업하면서 투어와 녹음에 잠시 휴식을 가지기로 한다. 해당 영화는 애리조나 주에서 촬영을 하게 된다.

1972년까지 앞의 5개 앨범을 전부 뉴욕에서 앨범을 녹음했었던 시카고는 다음 앨범부터는 새로운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콜로라도주 로키 산맥에 있는 카리부 목장 녹음 스튜디오(Caribou Ranch Recording Studio)이다.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는기존까지 시카고가 녹음을 지행한 뉴욕 스튜디오의 이용비와 오래된 구식 장비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1971년에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가 해발 8500피트(약 2.6킬로미터)에 위치해있는 4000 에이커(16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이의 카리부 목장을 구입하여 그곳에 있던 헛간을 개조하여 녹음 스튜디오로 만들었고, 1972년에 스튜디오가 완성되어 차려지게 되었다.[6] 시카고는 처음으로 이 헛간 녹음 스튜디오에서 다음 앨범인 Chicago VI를 1973년 2월부터 녹음 절차에 들어갔다. 해당 목장 스튜디오는 시카고에게 작업 집중력을 높여주었고, 그로 인해 사운드의 전반적인 품질이 올라갔다.
(이후 4년간 이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녹음하게 된다.)
테리 카스와 제임스 팬코우는 그루브와 템포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타악기 세션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게 브라질의 뮤지션 세르지오 멘데스가 이끄는 Sergio Mendes & Brasil'66의 전 멤버이자 브라질 출신의 재즈 타악기 연주자인 라우디르 드 올리베이라(Laudir de Oliveira)도 세션으로 참가하여 함께 앨범을 녹음한다


1973년 카리부 목장 스튜디오 안에서 찍은 Chicago VI의 수록곡인 What's This World Comin' To 라이브 연주 영상.

그 후 1973년 6월 25일,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VI를 발매하였다. 목장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여 전반적이 음질이 향상된 레코드였다. 앨범 발매 이전에 먼저 싱글로 내보낸 제임스 팬코우, 피터 세트라가 공동 작곡한 'Feelin' Stronger Everyday'가 싱글 차트 10위를 달성하고, 두 번째 싱글이자 제임스 팬코우 작곡의 발라드인 'Just You 'N' Me'가 골드 싱글을 달성하며 히트하였다.
Chicago VI 앨범도 5주 연속 1위를 거두며 다시 한번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싱글 Feelin' Stronger Everyday는 처음으로 앨범 출시 이전에 발매한 시카고의 싱글이 된다.

1972년에 시카고가 투어와 녹음 휴식기간을 가지며 같이 작업했던 영화이자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가 감독으로서 만든 'Electra Glide in Blue'가 1973년 8월 19일에 개봉했다. 이 영화에 시카고의 멤버 피터 세트라, 테리 카스, 리 러프넌, 월터 페러자이더가 작은 비중의 역할로서 출연하였고 스크린 내에서 해당 영화의 사운드트랙도 연주도 하며 영화산업에도 잠시 진출하기도 한다.

같은 해 8월, 가을에는 6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다시금 시카고와 게르시오는 카리부 목장 스튜디오에 모였고, 이번 앨범의 첫 의도는 이전 앨범들보다 더 확실한 재즈 앨범이었다.
이번 앨범의 재즈 프로젝트를 위해 대니 세라핀과 월터 페러자이더, 제임스 팬코우는 'Aire', 'Devil's Sweet'같은 긴 길이의 재즈, 퓨전 곡들을 작곡하고 로버트 램도 'Italian From Newyork'같은 실험적인 재즈 음악을 작곡한다. 그리고 제임스 팬코우는 '(I've Been) Searchin' So Long'같은 발라드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앨범 발매 전부터 프로듀서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는 시카고가 이 앨범에서 진행시키려 했던 재즈 프로젝트가 앨범의 상업적인 결과에 위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게르시오와 마찬가지로 이번 앨범의 재즈 컨셉이 앨범의 상업적인 결과에 위험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고, 스스로 재즈 뮤지션이라 자처하지 않았던 피터 세트라는 이번 앨범의 재즈 컨셉으로 인해 작곡가로서 참여할 수 있는 분량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피터 세트라는 경쾌한 라틴 풍의 발라드 곡인 'Happy Man'을 작곡했다.
또한 피터 세트라는 당시 카리부 목장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비치 보이스와 여러번 만나며 멤버 칼 윌슨과 좋은 친구가 되었는데,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피터 세트라는 당시 카리부 목장에 있던 비치 보이스 스타일로 소프트 록인 'Wishing You Were Here'를 작곡하였다. 피터 세트라는 비치 보이스에게 'Wishing You Were Here'에서 백 보컬 및 코러스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칼 윌슨,알 자딘, 데니스 윌슨과 함께 화음을 맞추었다.

이번 6번째 스튜디오 앨범에서 처음으로 작곡에도 참여하려 했으나 피터 세트라와 같이 이번 앨범의 컨셉으로 인해 작곡 참여에 어려움을 겪던 트럼펫 담당인 리 러프넌도 'Call on Me'를 피터 세트라의 도움에 힙입어 작곡하였다. 해당 곡은 피터 세트라가 보컬을 맏게 되었고, 리 러프넌이 세트라가 베이스 연주와 보컬을 동시에 할 수 있게끔 가사와 곡의 멜로디 부르는 방식을 바꾸어 최종 완성하였다.
처음엔 완전한 재즈 앨범으로 프로젝트를 구상하였으나, 최종적으론 앨범에 재즈 트랙만이 아닌 재즈 요소가 상대적으로 덜한 노래들도 수록하기로 하며 더블 앨범을 다시 한번 만들기로 결정한다.
첫번째 LP는 재즈 트랙들, 두 번째 LP는 조금 더 가볍고 대중친화적인 트랙들로 구성하게 된다.
앨범 발매 이전인 1974년 2월에 제임스 팬코우 작곡의 '(I've Been) Searchin' So Long'을 먼저 싱글 발매했는데, 빌보드 핫 100 9위를 기록하며 시카고의 8번째 싱글차트 탑 텐 히트곡이 된다.

그렇게 한달 후인 1974년 3월 11일,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VII를 발매하였다.
후속 싱글들인 리 러프넌 작곡의 'Call on Me', 피터 세트라가 작곡한 'Wishing You Were Here'마저 각각 6위, 11위를 차지하며 히트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앨범 Chicago VII는 더블앨범으로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앨범 차트 1위를 달성하였고, 앨범을 발매한지 일주일밖에 안된 시점인 74년 3월 18일엔 10만장 판매 달성으로 골드 디스크까지 받으며 그룹의 위력을 또 한번 보여주게 된다.(12년 후인 1986년엔 100만장 판매 달성으로 플래티넘 디스크도 받게 된다.)
Chicago V, Chicago VI에 이어 3연속으로 1위 앨범이 터져나온 것이다.
이 앨범에도 세션 멤버인 라우디르 드 올리베이라가 함께하였으나, 앨범 참여 크레딧에만 올라가고 앨범 내부의 멤버 사진엔 계약 문제로 인해 올라가진 못하였다. 이후에 같은 해인 1974년에 시카고 정식 멤버로서 합류하였다.
시카고는 비치보이스와 일명 beachago 투어 활동을 1975년까지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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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더 드 올리베이라가 밴드에 합류하고 1년 후인 1974년 7월 15일 8인조 시절의 시카고


시카고와 비치 보이스, 두비 브라더스가 참여한 프로그램 1974년 "New Year's Rockin` Eve". 카운트 다운 후 1975년을 맞이하였다.

1974년 8월 1일에 시카고는 카리부 목장 스튜디오에 모여서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VIII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9월에 녹음을 마치고 앨범 발매를 하려 했으나, 6달 전에 발매한 앨범 Chicago VII이 아직도 6개월째 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며 건재했기 때문에 Chicago VIII는 다음해 1975년 3월까지 발매가 보류되었다. 앨범 발매 이전인 75년 2월에 리드 싱글 'Harry Truman'을 먼저 발매했다.
라우디르 드 올리베이라도 이번 앨범부터 시카고 멤버 라인업에 본격 모습을 드러냈고, 계약문제가 끝나 앨범 내부에 들어있는 포스터에 처음으로 본인의 모습을 올리게 되었다.

마침내 1975년 3월에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VIII를 다시 LP 한장짜리로 발매하였다. 로버트 램 작곡의 'Harry Truman' , 제임스 팬코우 작곡의 'Old Days' 2개가 싱글로써 히트하였다.
앨범 Chicago VIII도 빌보드 200 1위에 오르며 무려 앨범 4개가 연속으로 1위를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전 앨범들에 비해 시카고의 앨범들 중 제일 차트에서 짧게 머물렀고, 이전작들에 비해 다소 미지근한 평가가 나왔다.

같은 해 말엔 1번 앨범부터 7번 앨범까지의 히트곡을 담은 컴필레이션 앨범인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을 발매하여 이후 무려 50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역대급 대성공을 거둔다. 앨범은 당연히 빌보드 200 1위를 기록하였다.
이로써 시카고는 1972년 Chicago V부터 시작해서 Chicago VI, Chicago VII, Chicago VIII, Chicago IX(컴필레이션)까지 앨범 5개 연속으로 전부 빌보드 200 1위를 달성하며 1975년까지 전 세계 음반 판매량이 무려 2천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달성하는 등 초기 전성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1976년 6월 14일, 여덟 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X를 발매하였다. 이번 앨범은 전작들에 비해 확실히 달라진 점이 많았다.
Chicago X 앨범 작업에서는 특별한 결과물들이 존재하는데, 총 3가지로 나누어 서술하자면 이렇다.
첫번째는 트롬본 연주자 제임스 팬코우가 자신이 작곡한 수록곡 'You Are on My Mind'를 바탕으로 시카고의 음악 중 처음으로 자신이 단독 리드보컬을 맡게 되었다.
팬코우는 그동안 트롬본 파트와 백보컬, 작곡만을 이어왔고 리드 보컬은 맏은적이 한번도 없었으나, 이 곡은 직접 리드 보컬을 맡는것으로 결정이 난 것이다.

두번째로는 이 앨범에서 피터 세트라가 작곡한 발라드 'If You Leave Me Now'가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하며 시카고에게 첫 싱글 차트 1위라는 감격을 안겨주었다. 데뷔한지 7년만이었다.
발라드 넘버인 이 곡은 앨범에 수록할 예정이 없었다가 앨범에 한 곡이 더 필요한 상황이 나와 결국 맨 마지막에 녹음이 되어 A면 4번째 트랙으로 간신히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 노래가 첫 싱글 1위를 달성하게 된것이다.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 아일랜드, 호주, 캐나다, 네덜란드 등의 여러 나라에서도 줄줄이 1위를 하며 시카고에게 국제적으로 제일 성공한 싱글을 가져다준다. 1978년 8월까지 미국에서만 140만장이 팔리게 된다.
1974년 앨범 Chicago VII 때부터 보였던 피터 세트라의 발라드 작곡능력이 이 노래를 통해 정점을 찍게 된다.
테리 카스는 이 곡의 녹음에 일절 참여를 안했기에 당연히 이 노래에서 맡은 파트도 없었다. 그렇기에 Chicago X 앨범 투어, 무대에서 If You Leave Me Now가 연주될동안은 무대에서 항상 빠져있거나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해야하는 피터 세트라를 대신해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였다.

테리 카스와 로버트 램은 기존 시카고 스타일의 곡이 아닌 발라드 스타일의 If You Leave Me Now가 첫 싱글 차트 1위를 한것에 대해 그닥 좋게만 생각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곡이 싱글 차트 1위를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다주었기도 했고 If You Leave Me Now와 같은 발라드 스타일을 시카고 청중들과 라디오 청취자들이 점점 선ㄴ호하고있었기 때문에 이를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이후의 앨범에도 히트를 위한 대중적이고 감미로운 멜로디의 음악을 적어도 한 곡 이상은 추가하기 시작했다. 발라드 If You Leave Me Now의 대성공은 나중에 변하게 될 시카고의 미래를 예견하는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완전히 새롭게 돌아온 Chicago X는 발매 3개월만에 100만장이 팔려 시카고의 첫번째 플래티넘 앨범이 되었다. 이후 이 앨범으로 올해의 레코드 부문으로 그래미 상 후보에도 오르게 된다.


1976년 If You Leave Me Now를 연주하고 있는 시카고의 라이브 모습

1977년 9월 13일, 아홉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XI를 발매하였다. 피터 세트라가 작곡한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진 발라드 'Baby, What a Big Suprise'가 빌보드 핫 100 4위를 달성하게 된다. 앨범도 빌보드 200 6위를 달성하였다. 연이은 발라드의 성공은 시카고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참고로 이 앨범은 카리부 목장 녹음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마지막 시카고의 앨범이 되게 된다.


1977년 Chicago XI의 텔레비전 광고
시카고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앨범 5개가 연속으로 빌보드 200 1위를 달성하고, 1976년엔 싱글 차트 첫 1위라는 기록을 세우며 크나큰 성공을 쭉 이어가고 있었다.


3.3. 1978 - 1981: 계약 문제, 테리 카스의 갑작스런 사망과 침체기[편집]


1978년이 시작되며 밴드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전부터 시카고 멤버들은 프로듀서이자 매니저인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와 점점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월터 페러자이더의 말에 의하면 이전부터도 분열의 조짐은 있어왔으나, 1976년 Chicago X 앨범부터 본격적으로 게르시오는 시카고에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며 밴드를 이끌었고, 게르시오의 가혹한 리더십 아래에서 시카고 멤버들은 반쯤 혹사를 당했다고 한다. 어느새 시카고 멤버들은 윌리엄 게르시오 자신의 더 큰 이득을 위해 조종당하고 있던 꼴이었다. 심지어는 시카고 자신들이 음반 제작 기술을 배우려는 것도 게르시오는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인이 더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시카고 멤버들이 게르시오 간의 계약 내용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완전히 그와 돌아서게 된다.
1977년 말의 계약 내용을 보면, 시카고와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와의 수익 분배 비율은 밴드 전체 수익의 51%가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에게, 나머지 49%는 밴드 멤버 8명이 균등하게 나눠 가진다는 정말 터무니 없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수익의 절반 이상을 매니저이자 프로듀서 역할인 게르시오 혼자서 다 가져가고, 나머지 49프로만의 금액을 밴드 멤버 8명이 나눠 가졌다는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니 시카고 입장에선 매우 불공정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밴드 결성부터 함께한 게르시오와 시카고는 결국 오랜 사이를 마치고 시카고가 제임스 윌리엄 게르시오를 정식 해고하면서 서로 작별하게 된다. 후에 게르시오는 당시 자신이 시카고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도했다.

계약 문제에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의 미래와 노선이 크게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인 1978년 1월 23일, 원년 멤버이자 밴드의 큰 축을 담당해주었던 기타리스트 테리 카스(Terry Kath)가 어이없는 총기 오발 사고로 사망하여 한순간에 밴드의 곁을 떠나버린것이다.

사망 하루 전인 1월 22일에 테리 카스는 멤버 라우디르 드 올리베이라의 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인 1월 23일 오후 5시 경에 밴드 기술자인 돈 존슨의 집에서 파티가 열렸다. 테리 카스는 취미 중 총기를 사용한 표적 사격을 즐겨했었는데, 1978년부터는 정기적으로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그날 테리 카스는 파티에 참석하여 파티 종료 후에 38구경 리볼버 권총으로 실린더를 돌리며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놀았다. 돈 존슨은 카스의 행동을 보며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고 여러번 말했지만 이를 들은 테리 카스는 다른 9mm 자동 권총을 집은 채 돈 존슨에게 "걱정마지마. 봐, 장전도 되어있지 않은 총이야"라고 말하며 안심시키고 "이번엔 내가 어떻게 할 거 같아? 내 머리를 날려볼까?"라고 장난식으로 말했다.
테리 카스는 돈 존슨을 확실히 안심시키기 위해 빈 탄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 빈 탄창을 권총에 끼운 후 그 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너무 부주의했던 탓인지 하필 재수없게도 권총의 약실에 총알이 한 발 들어있었고 결국 총알이 그대로 발사되어 머리를 가격해 총기 오발사고로 어이없고도 비극적인 사망을 맞이한것이다.
불과 32번째 생일을 맞기 8일 전이었다.

이 오발사건은 신문, tv 프로그램들에서도 보도가 되어나갔고, 결성부터 함께한 중요한 밴드 멤버이자 친구였던 테리 카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시카고는 슬픔과 절망에 빠졌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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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테리 캐스의 사망소식이 담긴 신문페이지. 사망하기 직전 했던 마지막 유언들이 함께 적혀있다.

테리 카스를 한 순간에 잃은 시카고는 밴드의 해체까지 고려하였다. 당시에 자니 카슨 주연의 투나잇 쇼의 밴드 리더이자 밴드 시카고와 친분이 있던 칼 힐딩 세베린센(Carl Hilding Severinsen)이 테리 카스의 장례식 종료 후 시카고 멤버들에게 밴드를 해체하지 말고 계속 유지해달라며 격려하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마침내 시카고는 테리의 죽음을 겨우 극복하고 해체없이 다시 활동을 시도해보기로 결정한다.
(이후 원래 테리 카스가 맡았던 리드 보컬 파트는 로버트 램, 리 러프넌이 골고루 담당하게 된다.)
이후 새로운 프로듀서로 이전 앨범에도 믹싱 작업으로 같이 참여했었던 필 라몬(Phil Ramone)과 함께 작업하기로 하고, 새로운 기타리스트가 필요했기에 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기타리스트 멤버로 도니 데이커스(Donnie Dacus)를 영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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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0월 2일 발표한 앨범 Hot Streets의 앨범 커버
1978년 10월 2일, 열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Hot Streets를 발매하였다. 멤버의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 낸 이 앨범은 이전의 앨범들과는 많이 달랐다.
시카고는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그동안 고수해오던 앨범명 방식인 그룹 이름+로마숫자(앨범 발매순서로 넘버 책정)를 이번 앨범에선 깨뜨렸다. 그리고 이전 앨범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앨범 중앙에 그룹 로고를 크게 넣고 그 뒤에 다양한 디자인의 배경을 넣던 기존 앨범 커버와는 달리 그냥 하얀 배경에 시카고 멤버들 전원 사진이 들어갔고 앨범명인 'Hot Street'와 그룹 로고인 'Chicago'만이 들어가 있다.
이 앨범에서 싱글 3개를 냈는데, 그 중 사망한 멤버인 테리 카스를 추모하기 위한 앨범 수록곡이자 싱글 'Alive Again'와 후속 싱글인 No Tell Lover이 각각 14위를 달성하며 탑 20위권에 안착하며 무난하게 성공했다. 앨범도 마찬가지로 빌보드 200 12위를 달성하고 10월 말 이전에 플래티넘 디스크도 받으며 아직 시카고가 건재함을 알렸고, 그렇게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앨범이 나오고 추후에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앨범 표지에 대한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설문에 참여한 사람들의 90프로 가량은 시카고 멤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저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룹 로고가 박힌 기존의 앨범 커버 스타일을 압도적으로 선호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다음 앨범부터는 다시 기존의 앨범 관례를 적용시키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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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의 시카고. 테리 캐스가 사망하고 난 후 도니 데이커스(밑줄 3번째)가 자리를 대신하였다.

시카고는 1979년을 맞이하며 70년대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1970년대 후반은 비지스와 같은 그룹이 디스코를 주류로 끌어올리면서 그야말로 디스코 시대였는데, 시카고도 이러한 흐름을 피해갈 순 없었다. 디스코, 펑크와 뉴웨이브 음악이 유행하는 당시와는 달리 시카고의 재즈 록, 팝 록 중심 스타일은 그닥 선호되지 않는 방식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카고는 사운드를 바꿔야한다는 압박 속에서 다음 열 한 번째 스튜디오 앨범은 디스코 풍의 노래를 수록하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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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8월 13일 발표한 앨범 Chicago 13의 앨범 커버. 기존의 앨범 커버 방식이 다시 돌아왔다. Chicago 로고의 모양에 맞게 높이 세워진 빌딩이 야간에 빛나고 있다.

그렇게 1979년 8월 13일, 열 한 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13를 발매하였다.
전작에서 깨진 앨범 관례가 다시 지켜졌다. 앨범 커버의 디자인 방식은 다시 돌아왔고 앨범명도 다시 이전으로 돌아왔으나 앨범명에 기존에 사용하던 로마 숫자가 아닌 아라비아 숫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이 앨범에선 첫번째 트랙이자 디스코 풍 노래인 'Street Player'가 수록된다.
허나 퀄리티 면에서 평론단의 평가가 좋지 못하였고, 판매량도 전작들의 명성에 조금 떨어지는 최대 70만장 밖에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빌보드 200 21위를 달성하며 1집 Chicago Transit Authority의 17위 이후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시카고 앨범으로썬 처음으로 앨범 차트 탑 20위권에 들지 못하게 된다.
앨범의 첫 곡인 디스코 'Street Player'도 발매했으나 빌보드 R&B 차트 91위에나 겨우 오르며 실패를 맞이한다.
프로듀서 필 라몬과도 이 앨범을 끝으로 작별하게 된다.
그리고 기타리스트 도니 데이커스도 1980년 밴드를 떠나게 된다. 도니 데이커스가 떠나며 공석이 된 기타 포지션은 크리스 피닉(Chris Pinnick)이 세션멤버로 참여하며 메우게 되었다. 후에 1984년 Chicago 17이 발매될때 정식멤버로 승격하게 된다.

프로듀서 필 라몬과 작별하게 된 후, 프로듀서로 아레사 프랭클린,크림,에릭 클랩튼 등과 작업했던 톰 다우드(Tom Dowd)와 함께 다음 앨범 Chicago XIV를 작업하게 된다.
Chicago XIV는 피터 세트라의 작곡 비중이 더 늘어나게 되어 앨범 대부분의 곡을 작곡하게 된다.

그렇게 1980년 7월 21일, 열 두 번째 앨범 Chicago XIV를 발매하였다. 그러나 빌보드 200 71위라는 역대 최저 기록을 달성하고, 처음으로 시카고 앨범이 10만장의 판매량조차 달성하지 못하며 그야말로 실패했다.
심지어 해당 앨범의 첫 번째 싱글로 발매한 'Thunder and Lightning'은 빌보드 핫 100 차트 50위권 아래를 맴도는데 그쳤고, 두 번째 싱글인 'Song for You'는 차트 진입조차 실패하는 등 바로 전 Chicago 13 앨범보다도 더한 상업적 실패를 겪었다.
이번에도 역시 프로듀서 톰 다우드와도 작별하게 된다.

1968년부터 시카고와 계약해 온 음반사 "컬럼비아 레코드"는 1979년부터 시작된 시카고의 연속된 저조한 판매량과 실패를 보며 이에 대해 매우 실망하였고, Chicago XIV의 저조한 판매실적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1981년에 시카고에게 200만 달러의 바이아웃을 주고 정식 해고함으로써 그들과의 계약을 종료하게 된다.
계약 종료 이전에 아직 남아있던 계약의무로 인해 1975년 컴필레이션 앨범인 Chicago IX의 후속작이자 15번으로 넘버링 되는 앨범인 'Greatest Hits, Volume II' 컴필레이션 앨범을 1981년 발매하였다. 허나 빌보드 200 171위로 또 다시 실패하게 된다. 이렇게 시카고와 콜롬비아 간의 계약관계는 끝나게 된다.[8][9]
콜롬비아 레코드의 시카고 해고 이전이었던 1981년에 피터 세트라는 첫 솔로 앨범인 록 음반 'Peter Cetera'를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녹음하고 있었으나 시카고와의 계약이 해지되면서 앨범에 대한 권리 행사가 사라진 피터 세트라는 자기 자신의 앨범에 대한 권리를 콜롬비아로부터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앨범을 내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오기도 했다.
심지어 피터 세트라의 첫 솔로 앨범은 시카고가 음반사인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와 계약하며 워너 산하의 레코드사인 풀 문 레코드(Full Moon Records)에서 1981년 9월 발표했으나 음반사의 지원 및 홍보 부족으로 인한 영향인지 성공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시카고는 약 2년동안 음악적, 상업적으로도 연이은 실패를 겪었고 연이은 실패로 인해 멤버들끼리 서로 말도 잘 안할 정도로 사이도 소홀해지는 등 큰 침체기를 겪었다. 이 시기에 로버트 램과 같은 일부 멤버들의 알코올 및 약물 중독이 심해지기도 했다.


3.4. 1981 - 1982: 새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와의 만남과 음악적 변화[편집]


콜롬비아 레코드와의 계약 종료 이후로도 슬럼프를 겪던 시카고는 이후 1981년에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Warner Bros. Records)와 계약하여 워너 브라더스 소속 레이블인 풀문 레코드(Full Moon Records)에 소속되게 되었다.

1981년 가을, 시카고는 오랜 경력의 키보디스트인 빌 챔플린(Bill Champlin)에게 밴드 합류를 요청 한 뒤 시카고는 빌 챔플린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기존의 시카고 스타일이 아닌 현재 앨범부터 진행되는 팝 지향적인 사운드는 그가 다루는 라틴,재즈 타악기 사운드와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라우디르 드 올리베이라에게 밴드를 떠날 것을 요청한다. 올리베이라는 이에 수락하여 그렇게 7년간의 시카고 활동을 마치고 밴드를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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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디어 드 올리베이라가 탈퇴하고 빌 챔플린이 합류하여 다시 7인조가 된 1982년의 시카고
빌 챔플린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드러머 대니 세라핀은 캐나다의 프로듀서이자 작곡자인 데이비드 포스터와 함께 앨범을 작어하면 어떻겠냐고 하자 빌 챔플린이 이를 듣고 데이비드 포스터를 밴드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그리고 리 러프너도 음반산업에서 일하던 어빙 아조프에게 데이비드 포스터에게 일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조언을 듣고 최종적으로 시카고는 새로운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포스터와 함께 손잡게 되었다.2년간 연속된 슬럼프로 인해 시카고는 자신들을 부활시켜줄 수만 있다면 어떤 프로듀서든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딱 상황이 맞아 떨어지며 데이비드 포스터와 음악 작업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1981년에 콜롬비아 레코드가 자신들을 해고하며 주었던 바이아웃 금액인 200만 달러도 함께 사용하여 열 세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16'을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1982년 1월부터 Chicago 16 앨범 녹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포스터의 레코드 작업 방식은 이전에 밴드 자신들이 시카고로서 음악을 뽐낼 수 있도록 놔두었던 프로듀서들과는 달랐다.

데이비드 포스터와 작업하기 전에 시카고는 chicago 16 앨범에 실을 노래들을 잔뜩 녹음해두었으나, 데이비드 포스터는 노래를 듣고는 노래가 전부 최악이라고 하며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제임스 팬코우는 포스터가 노래들이 대놓고 별로라고 말한것을 듣고 순간 "내가 감이 떨어진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베이시스트인 피터 세트라도 앨범 녹음시에 포스터에게 베이스 파트가 별로라는 직설적인 말을 듣자 피터 세트라는 베이스 기타를 내려놓고 부스로 가서 포스터에게 '다시는 그딴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충고까지 하는 등 초반엔 포스터의 공격적인 프로듀싱에 시카고 멤버들 모두 주눅들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전부터 로버트 램과 같은 일부 멤버들이 알코올과 약물 남용으로 인해 작곡 능력이 떨어져 있던 탓인지 상술한 것처럼 포스터에게도 노래가 쓰레기같다며 비난받기도 했다. 피터 세트라도 이러한 일부 밴드 멤버들의 알코올,약물 중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결국 포스터는 앨범에 수록할 노래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강경하게 밴드를 진두지휘하였다. 포스터는 피터 세트라의 작곡 능력도 눈여겨보며 그와 함께 공동 작곡을 하여 앨범의 일부 노래들을 완성하기도 한다.

로버트 램: 저희의 세상을 젊은 친구(데이비드 포스터)가 뒤엎고 있었어요.


제임스 팬코우: (데이비드 포스터가) 갑자기 우리 노래들이 별로라 그러잖아요. 그럼 이런 생각이 들죠. '내가 작곡에 대한 감이 떨어진건가'?


피터 세트라: 데이비드가 저희 노래를 듣고 스피커로 한마디 했어요. (데이비드 포스터가)'이건 아니에요 베이스 파트도 이상해요.' 그래서 제가 베이스 기타를 내려놓고 데이비드가 있는 부스로 가서 말했죠. (피터 세트라가)'다시는 그딴식으로 말하지 말라'.

― 2017년 다큐 영화 데이비드 포스터, 오프 더 레코드에서 시카고와 피터 세트라의 인터뷰


하지만 당시 데이비드 포스터가 프로듀싱했던 새 앨범의 노래들은 최신식 신디사이저 음의 비중이 높아지는 대신 밴드의 대표적 특징인 관악기 파트가 감소하였고 심지어는 아예 관악기 파트가 없는 트랙도 존재하였다.
이번 앨범은 시카고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작곡가와 함께 작업한 첫 앨범이 되기도 했으며 앨범에 수록할 10곡 중 무려 8곡을 데이비드 포스터가 공동 작곡하며 앨범 제작에 큰 역할을 하였다.
로버트 램은 개인적인 문제와 데이비드 포스터에 의해 이 앨범부턴 작곡비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Chicago 16 노래 중 'Hard To Say I'm Sorry'의 후반 짧은 브라스 파트인 'Get Away'의 세트라,포스터,램 자기 자신의 3인 공동 작곡 이외엔 전혀 로버트 램의 크레딧이 들어가 있지 않게 된다. 심지어 제임스 팬코우도 작곡 비중이 눈에 띄게 감소되었다.
이전에 같이 일했던 프로듀서들과는 전혀 다른 데이비드 포스터만의 강압적인 프로듀싱과 악기 파트 일부 비중 감소 등으로 인한 멤버 일부 소외 등등으로 인해 일부 멤버들의 불만이 이 앨범 녹음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음반사인 워너 브라더스/풀문 레코드도 시카고의 관악기 사운드의 비중이 감소되는걸 원했기에 그렇게 관악기 섹션은 비중이 많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4월에 녹음을 마쳤다.

앨범 발매 전인 1982년 5월 17일에 파워 발라드 트랙인 'Hard to Say I'm Sorry'를 Chicago 16의 리드 싱글로 먼저 발매했다. 싱글은 약 4개월 후인 9월 11일에 빌보드 핫 100에서 2주동안 1위를 차지하며 시카고에게 두 번째 1위 싱글이라는 성공을 안겨다주었다.
심지어 Hard to Say I'm Sorry는 1위로도 모자라 빌보드 핫 100 탑 5위 안에 12주동안이나 머무르기도 했다.
Hard to Say I'm Sorry는 이전에 시카고가 지향하던 멜로디와는 전혀 딴판인 정말 완전한 신규 발라드 곡이었기 때문에 로버트 램, 제임스 팬코우와 같은 멤버들의 반발이 제일 심했던 Chicago 16 수록곡이었다. 그러나 이 싱글이 1위를 달성해버린 것이었다.

1982년 6월 7일, 열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16을 새로운 레이블인 '워너 브라더스/풀문'으로 발매하게 되었다.
앨범은 빌보드 200 9위를 기록하여 성공하였고 발매 2개월 후에 음반 산업협회로부터 판매량 골드 인증을 받았고, 6개월 후엔 판매량 플래티넘 인증까지도 받게되며 2년간의 침체기를 극복하며 밴드의 부활을 알렸다.


6년만에 다시 탄생한 두 번째 빌보드 1위곡 Hard To Say I'm Sorry의 뮤직비디오. 1979년 Chicago 13부터 시작되던 음악적,상업적 침체기를 다시금 극복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앨범이 성공하며 시카고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월터 페러자이더가 회상하길, 한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다가와 '제 첫 앨범인데 싸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라고 요청했는데, 그 앨범은 자신들의 신작 앨범인 Chicago 16 LP 음반이었고 월터 페러자이더는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오르는 중이었던터라 그 여자아이에게 공연이 끝나고 나서 싸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즉,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팬층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앨범과 싱글이 함께 성공하며 음반사의 저녁만찬에도 시카고 멤버들이 초대받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로버트 램은 밴드가 이와 같이 다시 상업적 활력을 되찾아 가던 와중에도 시카고의 음악적 방향에 대해 속으론 매우 갈등하고 있었다.

지난 활동 15년간에 밴드에는 주력 간판으로 내세우는 멤버가 따로 없었고, 모든 멤버가 각자 음악에서 다양성을 발휘하며 무대를 선보였고, 음악도 다양한 멤버에 의해 작곡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Chicago 16부터는 기존에 작곡을 자주 하던 멤버들이 대폭 비중이 줄어들고 관악기 사운드 비중을 감소시키는것을 추구하던 데이비드 포스터와 새 음반사에 의해 밴드의 색깔도 많이 변해버리다 못해 심지어 지금까지도 없었던 밴드의 간판 멤버(피터 세트라)가 생겨버리기까지 하니 로버트 램을 비롯한 다른 일부 멤버들도 점점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심지어 로버트 램은 밴드를 떠날뻔했다고도 나중에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버트 램은 자신이 좋아하고 아끼는 이 밴드를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하다못해 결국 이러한 데이비드 포스터의 작업 방식과 음악 스타일 변화를 이후로도 쭉 수긍하였다.



3.5. 1983 - 1984: 앨범 "Chicago 17"의 대성공 및 일부 멤버들의 음악적 갈등[편집]


1983년 중반부턴 새 앨범인 'Chicago 17'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Chcago 17 앨범의 녹음때에도 시카고 일부 멤버들의 불만은 여전히 존재했다.

데이비드 포스터가 앨범 녹음 시에 대부분 직접 키보드를 연주하다보니 키보드 담당인 로버트 램은 할 것이 맣이 사라져버렸고, 제임스 팬코우, 리 러프넌, 월터 페러자이더마저도 관악기 파트가 줄어듦에 따라 자신들의 담당이 아닌 신디사이저나 기타를 치게 되었고, Chicago 17의 수록곡 You're the inspiration의 뮤직비디오를 찍을때도 자신들이 관악기가 아닌 신디사이저를 아무말 없이 치고 있어야 했다. 제임스 팬코우는 Chicago 16을 시작으로 당시에 자신들의 관악기 파트가 전보다 대폭 줄어들어 버린것에 대해 속상해 하였지만, 자존심은 잠시 땅에 묻어두고 밴드의 유지를 위해 음악작업에 임하였었다.[10] 예전부터 작곡에 많은 비중을 담당하고 있던 제임스 팬코우와 로버트 램은 여전히 작곡의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해졌다. 심지어 이전 앨범 'Chicago 16'보다. 로버트 램은 chicago 17 앨범 제작에서 노래 'We Can Stop the Hurtin'의 3명 공동 작곡자 중 한명으로만 들어가고, 팬코우는 앨범 마지막 트랙이자 관악기 파트가 많이 들어간'Once in a Lifetime'을 단독 작곡하여 앨범에 수록하는데 성공하였다.

제임스 팬코우: 데이비드는 작곡과 연주에도 관여했어요. 데이비드를 믿고 맡겼어요. 필요했으니까요. 데이비드는 정말 (음악 작업이) 빨랐어요. (데이비드 포스터가)"간주를 넣어야겠네요" (인터뷰에서 제임스 팬코우가 빠르게 혀를 굴리고 마구 손짓을 하며) 다 됐다는 거에요. 엄청나더군요.Holly Shit 심지어 뮤직 비디오를 보면 저는 키보드 앞에 있고 리는 (자신의 담당도 아닌) 기타를 메고 있는데 어이가 없었죠. 금관악기 부분이 없었으니까요.

― 2017년 다큐 영화 데이비드 포스터: 오프 더 레코드에서 시카고의 인터뷰


물론 당시에 반감을 가지던 멤버들도 '자신들도 귀가 달려있으니 데이비드가 만든 그 시카고 음악들이 좋은 음악인건 확실히 알았다'라고 했지만, 예전 전성기 시절에 시카고가 주로 다루던 재즈 록, 팝 록 음악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론 거리가 먼 음악들이었다.

파일:Chicago 17.png
1984년 5월 14일 발매한 앨범 Chicago 17의 앨범 커버

1984년 5월 14일, 시카고는 마침내 열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17를 발매하였다. Chicago 17은 빌보드 200 4위를 기록하며 이전 앨범보다 성공하였고, 이전 앨범인 Chicago 16보다 훨씬 높은 판매량인 미국에서만 6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시카고의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며 평가도 좋게 받는 등의 정말이지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Chicago 17의 수록곡인 You're the Inspiration, Hard Habit to Break, Stay the Night, Along Comes the Woman 총 4개의 노래를 싱글로 발매하였는데 이마저도 전부 빌보드 핫 100 20위 안에 들며 히트를 하게 되었다. Chicago 17은 1985년에 3개의 그래미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 주요 앨범 히트곡들이 대부분 관악기가 거의 없다시피한 트랙들이기 때문에 확실히 시카고의 음악적 변화가 느껴진다. 심지어 해당 앨범의 홍보를 위한 투어를 진행했는데 북미와 아시아에선 티켓이 전부 매진이 되는 등 1970녀년대 초중반의 전성기를 이어 또다시 제 2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알렸다.


Chicago 17의 수록곡인 You're the Inspiration의 뮤직비디오. 정작 관악기 파트를 맡아야 할 월터 페러자이더, 리 러프넌, 제임스 팬코우가 대부분 무표정으로 신디사이저를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3.6. 1985 - 1989: 피터 세트라의 밴드 탈퇴와 데이비드 포스터와의 결별[편집]


1984년 5월 chicago 17 앨범 발표 후, 시카고는 앨범 홍보를 위한 투어 스케줄이 많아 바쁜상태였다. 바쁜 투어 활동에 지치기도 한 피터 세트라는 솔로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투어가 끝난 후에 휴식을 가지는 것을 시카고와 합의해보기 위해 제안을 했으나, 시카고와 음반사는 앨범과 투어활동을 더 원하는 상태였기에 피터 세트라의 제안을 거절하게 되었다. 그렇게 계속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며, 결국 시카고와의 의견차이 및 투어 일정의 피로감으로 지친 피터 세트라는 솔로활동에 더 전념하기 위해 1985년 시카고 여름 투어를 끝으로 시카고를 탈퇴하였다. 이전에 Chicago 16 앨범 발매를 기다리는 동안 1981년 9월 셀프 타이틀 솔로 앨범을 한번 낸 적 있던 피터 세트라는 1982년 Chicago 16과 싱글 "Hard to Say I'm Sorry"의 성공, Chicago 17과 여러 싱글들의 성공과 함께 로맨틱한 노래들을 작곡하며 밴드 내에서 자신의 입지 및 인기가 제일 높아지고 밴드의 얼굴 간판이 된 후부터 솔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보겠다고 마음을 완전히 굳히게 된 것이다. 솔로 전향을 하기 위해 피터 세트라는 결국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밴드를 떠난 피터 세트라는 데이비드 포스터와의 작곡 파트너를 유지한 채 두 번째 솔로 앨범 "Solitude/Solitaire"와 싱글 "Glory of Love"를 1986년 발표를 시작으로 솔로가도의 성공을 이어나가게 된다.[11] 밴드는 떠났지만, 소속사인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에선 그대로 남아 활동하였다.

제임스 팬코우: 저희는 음악을 즐기는 밴드이고 싶었어요. 시작부터 밴드였으니까요. 개별 행동을 하는 사람과는 함께하기 싫었어요. 피터는 말하자면 다른 드러머를 찾기 시작했고 데이비드를 만난 게 마음을 굳힌 계기가 됐죠. 솔로 나서기로요. 그래서.......(서로 갈 길을 가기로 했죠.)

― 2017년 다큐 영화 데이비드 포스터: 오프 더 레코드에서 시카고의 인터뷰


1985년에 밴드의 간판이었던 피터 세트라가 밴드를 떠나고 베이시스트 자리에 공백이 생기자 시카고는 피터 세트라의 공백에 대한 문제, 음악의 방향에 대한 문제, 현재까지 가지고 있던 대중적 인기 유지에 대해 다시 난감해진다. 그렇게 고민하다 시카고와 데이비드 포스터와 시카고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세션 멤버로 활동했던 베이시스트 제리 셰프의 아들이자 23살의 젊은 베이시스트인제이슨 셰프(Jason Scheff)[12]를 영입하였고, 제이슨 셰프는 탈퇴한 피터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밴드의 인기 멤버였던 피터 세트라가 나갔기 때문에 이를 의식한 시카고는 Chicago 17에도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시카고의 작곡 스타일을 더욱 줄이고 기존보다 더 앨범을 팝적인 노래들로 구성시키기로 결정한다. 여러 상황이 겹치게 되어 이전의 앨범들인 Chicago 16, hicago 17보다 시카고의 트레이드 마크는 더욱 줄어든 셈이다.
제이슨 셰프는 밴드에 들어온 후 데이비드 포스터에게 보컬 스타일을 어떻게 표현할지 묻자, 최대한 피터 세트라처럼 해달라고 답변을 받았다. 목소리 톤이 세트라와 비슷했기에 Chicago 18 앨범 중에 셰프가 리드 보컬을 맡은 노래들은 피터 세트라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기타리스트 크리스 피닉도 같은 해에 피터 세트라가 밴드를 떠난 후, 다음 앨범을 녹음하기 전에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크리스 피닉이 떠나며 공석이 된 기타리스트 자리는 앨범 'Chicago 18'에서 세션맨으로만 채워졌고, 그 중 밴드 정식멤버로 승격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Chicago 18 녹음이 끝난 직후에 정식 기타리스트 멤버가 없던 시카고는 밥 시거(Bob Seger)의 Silver Bullet Band 출신인 기타리스트 드웨인 베일리(Dawayne Bailey)를 밴드에 고용하여 마침내 정식 기타리스트 멤버가 생기게 되었다.

마침내 1986년 9월 29일, 열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18을 발매하였다. 한달 후에 발매한 앨범 수록곡 싱글 4개 중 "Will You Still Love Me?"가 3위를 기록하며 히트하였으나 앨범은 빌보드 200 차트에서 35위를 기록하며 판매량도 겨우 10만장에 미치는 등 엄청난 성공을 했던 전작 Chicago 17보다 훨씬 덜한 성적이 나왔다. 이 앨범을 끝으로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는 시카고와 음악 작업을 끝내고 결별하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풀문/워너 브라더스 가 아닌 풀문/리프라이스 레코드(Reprise Record)로 레이블을 바꾸게 된다.


1986년 Chicago 18의 히트 싱글인 Will You Still Love Me의 뮤직 비디오. 피터 세트라가 나간 후 영입된 제이슨 셰프가 피터의 역할을 대신하여 베이스와 보컬을 맡고 있다.

데이비드 포스터와의 음악 작업을 종료한 이후부턴 새로운 프로듀서 론 네비슨과 채스 샌포드와 함께 Chicago 19의 앨범 작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송라이터인 다이앤 워렌(Diane Warren)과도 작곡을 함께하게 된다.

1988년 6월 20일, 열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Chicago 19를 발매하였다. 전 앨범 Chicago 18보단 관악기 섹션의 비중이 많이 늘어났으나, 멜로디는 여전히 80년대 초중반의 신디사이저 음을 내세운 대중적인 록 음악이었다. 그러나 10만장밖에 판매하지 못했던 전작 Chicago 18과는 달리 이번 앨범은 판매량 100만장을 달성하며 다시 히트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앨버트 해먼드와 다이앤 워렌이 공동작곡한 노래이자 앨범의 첫 번째 싱글인 'I Don't Wanna Live Without Your Love'가 빌보드 핫 100 3위를 달성하였고, 심지어 똑같이 다이안 워렌이 작곡한 두 번째 싱글인 'Look Away'가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하며 시카고에게 세 번째 1위 노래를 가져다주었다. 심지어 세 번째 싱글인 'You're Not Alone'도 10위를 달성하며 대히트를 기록했고 히트 싱글 3개의 리드 보컬을 전부 맏은 빌 챔플린이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두개의 히트 싱글은 시카고가 작곡에 전혀 관여를 안한 노래였고 제이슨 쉐프는 이번에 히트한 두개의 싱글은 시카고의 시그니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스타일의 음악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앨범은 대니 세라핀이 마지막으로 드러머로서 참여한 시카고의 앨범이 되게 된다.

1989년 여름엔 오랜만에 비치 보이스와 함께 합동 여름투어를 진행도 하였고, 미국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이자 1982년부터 1989년까지 히트한 시카고의 노래들을 모은 시카고의 20번 앨범인 'Greatest Hits 1982-1989'가 빌보드 200 37위로 히트했고, 유럽에서 발매한 버전이자 콜롬비아 레코드 시절과 풀문/워너 브라더스 시절에 히트한 발라드 스타일 곡들을 모아놓은 'The Heart of Chicago'[13] 도 성공하였다.

3.7. 1990 - 현재: 여전히 활동하는 시카고[편집]


90년대가 시작되며 1990년, 원년멤버였던 드러머 대니 세라핀이 시카고에서 해고되어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정확한 해고사유는 알 수가 없고 많은 설들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대니 세라핀이 다룬 책에 의하면 시카고와 일하는 직원에게 물리적인 싸움을 걸었다는 것과 밴드와의 의견차이라는게 유력한 해고 이유로 보인다. 아무튼 사고로 사망한 테리 카스, 탈퇴한 피터 세트라에 이어 대니 세라핀도 해고되면서 원년멤버는 4명만이 남게 되었다. 공백이 생긴 드러머 자리는 22년전에 데뷔도 전의 시카고와 만나면서 그들의 팬이 된 10대의 초보 드러머였고, 80년대에 케니 로긴스의 드러머로 활동을 했던 트리스 임보든(Tris Imboden)이 시카고의 합류 요청을 받고 정식 멤버로서 드러머 자리를 이어받았다.
트리스 임보든은 밴드에 합류하겠냐는 시카고의 전화를 받고 바로 합류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투어가 일절 없이 1990년 여름을 보내고 있던 그였기에 시카고의 밴드 합류 요청 타이밍이 아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시카고는 1991년 1월 29일, 열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TWENTY 1을 발매하였다. 비중있는 관악기 섹션이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80년대의 사운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름부터 투어를 시작했지만 이미 투어를 시작하자마자 앨범이 차트에서 정체되어가고 있었고, 투어 도중에 Twenty 1 앨범의 수록곡은 'You Come To My Senses'를 빼면 앨범의 노래들을 전혀 연주하지 않고 이전의 노래들만을 연주하였다. Twenty 1에서 싱글 컷 된 노래들 중 최고 39위까지 갔던 'Chasin' the Wind'조차 투어에서 연주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앨범은 상대적으로 실패하였고, 이를 인정하며 시카고는 이 앨범을 끝으로 소프트 록 노선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92년에는 시카고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음악 부문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1993년엔 스튜디오 앨범Chicago XXXII: Stone of Sisyphus를 녹음하며 자신들의 주요 세션인 관악기 섹션 반주를 다시 내세우고 70년대의 전통 스타일로 일부 돌아오려 했으나, 레코드 회사의 개편 이후 바뀐 리프라이즈 레코드(Reprise Records)의 새로운 임원들은 앨범 발표를 거부하여 앨범 발표를 하지 못하였다. 리프라이스 레코드에 의해 앨범이 발매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화가 난 기타리스트 드웨인 베일리는 이의를 표명했으나 1994년 후반에 시카고는 드웨인 베일리와의 연간 계약을 갱신되지 않기도 했다. 결국 시카고는 리프라이즈 레코드를 떠나며 서로 분리되었다.

소속사가 없어진 시카고는 1994년에 투어 후 자이언트 레코드(Giant Record)와 계약하여 새 앨범인 Night & Day: Big Band를 녹음하였다.

1995년 1월엔 기타리스트 드웨인 베일리가 계약 종료로 밴드를 떠났고, 키스 홀랜드(Keith Howland)가 정식 멤버로 들어와 시카고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게 된다. 테리 카스의 오랜 팬이었던 그는 제이슨 셰프와 우연히 만나 막바지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하여 밴드의 정식 멤버가 된 것이다.

1995년 5월 23일, 열 여덟 번째 스튜디오 앨범Night & Day: Big Band를 발매하였다. 'Chicago','In The Mood' 등의 기존에 존재한 빅 밴드 명곡 등을 록 색깔로 재해석 및 커버한 노래들을 수록하였다. 이 앨범 이후부터 정규앨범 발표의 텀이 살짝 길어지기 시작했다.

1998년 8월 25일, 열 아홉 번째 스튜디오 앨범이자 시카고의 역사상 첫 크리스마스 앨범인 ChicagoXXV: Chirstmas Album을 발매하였다. 기존에 존재한 여러 크리스마스 명곡들을 재해석한 노래들을 수록한 이 앨범은 발매 당시에 큰 호평을 얻었고 차트에 7주 동안 머무르며 빌보드 200 47위를 달성하였다.

2003년에는 대한민국에 방문하여 첫 내한공연을 선사하게 되었다. SBS에 공연이 방영되었고 Ballet for a girl in bucannon, Hard to say I'm sorry, You're the inspiration, I'm man, dialogue 등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2003년 시카고의 첫 번째 내한공연 영상. 배철수의 음악캠프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1996년 노래 'What Might Have been'으로 유명한 키보디스트이자 가수인 루 파디니(Lou Pardini)가 2009년, 시카고에 정식 멤버로서 합류하게 되었다. 원년멤버인 로버트 램이 키보드를 담당하였지만 루 파디니가 합류하게 되면서 시카고에는 두명의 키보디스트가 존재하게 되었다.

2006년 3월 21일, 스무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XXX를 발매하였다. 7년 7개월 만에 발매된 스튜디오 앨범은 1991년 발매한 Twenty 1 이후로 15년만에 시카고의 자작곡들로 채워졌다. 특히 제이슨 셰프가 이번 앨범에서 제일 많은 작곡 크레딧을 올렸다. 이 앨범은 빌 챔플린이 마지막으로 참여한 시카고의 앨범이 되었다.
그렇게 3년 후인 2009년 8월에 28년동안 시카고의 멤버로서 활동한 빌 챔플린이 시카고를 떠났다.

2010년 2월 22일, 시카고가 두번째 내한 기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두번째 출연하게 되었다. 제임스 팬코우와 리 러프넌만 라디오에 참가하였다. 내한공연은 다음날인 2월 23일에 열렸다.
2010년 2월 23일엔 2번째 내한공연을 선사하였다.


2010년 시카고의 두 번째 내한공연 영상
위에서 설명했듯이, 1993년 당시에 발매하려 했던 앨범인 Chicago XXXII: Stone of Sisyphus는 음반사의 개편된 임원들이 발매를 거부하여 결국 정식 발표되지 못한채 그대로 묻히는듯 싶었다.
하지만 기나긴 논쟁 끝에 2008년 6월 17일, 스물 한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XXXII: Stone of Sisyphus가 15년 만에
확장 출시 후 드디어 발매되었다.
Stone of Sisyphus는 확장 출시 후, 비평가,팬들에게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빌보드 122위에 진입하였다.

2010년엔 스물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70년대 후반에 앨범 Hot Streets와 Chicago 13을 녹음할때 같이 일했던 프로듀서 필 라몬과 다시 앨범을 작업하였다.

그렇게 2011년 10월 4일, 스물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이자 두 번째 크리스마스 앨범인 Chicago XXXIII: O Chirstmas Three가 발매되었다.

2013년 4월 26일, 스물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XXXV: The Nashuville Sessions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기존에 시카고가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발표한 곡들 중 15곡 선정 후 새로 녹음되어 수록된 앨범이다.

2014년 7월 4일, 스물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XXXVI: Now를 발매하였다. 원년멤버 키보디스트 로버트 램은 시카고 초기에 추구했었던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곡을 이 이 앨범에 수록곡 "Naked in the Garden of Allah"를 통해 다시 표출하였다. 전쟁의 무서움과 평화에 대한 내용을 표출한다. 이 앨범은 80년대 이후 나온 시카고의 앨범 중 최고의 앨범으로 평가받았다. 앨범 'Now'로 시카고는 2006년 이후로 8년만에 앨범이 빌보드 200 100위권 안에 진입한 셈이다. 빌보드 200 82위.

2015년 말, 시카고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후보가 되었다. 후보자격은 1995년부터 있었으나 최종선정은 2016년이 되었다. 시카고는 이에 응하여 헌액 후 2016년, 전당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후보자는 원년멤버들인 로버트 램, 테리 카스, 피터 세트라, 제임스 팬코우, 리 러프넌, 월터 패러자이더, 대니 세라핀 총 7명이다. 대니 세라핀은 1990년 밴드를 떠났기에 현 멤버는 아니지만, 명예의 전당 시상식에 참여를 하여 에너지 넘치는 수상 소감을 하였고, 테리 카스는 현재 고인인 상태라 딸인 미셸 카스가 대신 상을 전해받고, 수상소감을 전하였다. 피터 세트라는 불참하였으나, 로버트 램이 수상소감을 전하면서 세트라를 언급해주었다.

2016년 10월 25일, 31년동안 시카고의 베이시스트를 맡았던 제이슨 쉐프가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18년동안 시카고 멤버였던 원년멤버 피터 세트라보다 13년을 더 밴드 일원으로서 함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제이슨 쉐프의 대체 인원이였던 기타리스트이자 가수인 제프 코피(Jeff Coffey)가 쉐프의 뒤를 이어 베이시스트 정식멤버로 승격하게 되었다.

2016년엔 월터 페러자이더가 심장질환이 생기게 되어 2017년에 와서는 시카고의 공연 투어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 1967년 결성부터 약 50년간을 시카고로서 활동했지만 질환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투어에서 은퇴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05년부터 월터 페러자이더의 대체 세션 멤버였던 색소폰,플루트 담당 레이 헤르만(Ray Herrmann)이 위에서 설명했듯이, 건강 문제로 투어 은퇴를 한 페러자이더의 뒤를 이어 같은 해 2016년에 정식 멤버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몇년 지나지 않은 2021년 4월엔 월터 페러자이더가 알츠하이머 판정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많은 팬들의 안타까움과 응원이 전해지고 있다.

2017년 2월 22일엔 제임스 팬코우와 로버트 램, 피터 세트라가 시카고 일원으로서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같은해 9월 17일에는 전 멤버이자 탈퇴 이후인 2001년에도 시카고와 공연을 같이 한적도 있었던 퍼커션 담당의 라우디어 드 올리베이라가 고향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공연 도중 심장 마비로 사망하기도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2018년 1월 17일, 28년동안 시카고의 드러머를 맡았던 트리스 임보든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쉽게도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결성 때부터 23년동안 시카고 멤버였던 원년멤버 대니 세라핀보다 5년 더 많이 밴드 멤버로 활동하였다. 트리스 임보든의 드럼 포지션은 퍼커션 담당이었던 왈프레도 레예스 주니어가 맡게 되고, 다니엘 드 로스 레예스(Daniel de los Reyes)가 새 멤버로 참여하여 퍼커션 자리를 채웠다.
다니엘 드 로스 레예스는 2018년 1월부터 5월까지 4개월간 활동하다 밴드를 떠났고, 또다시 공석이 된 퍼커션 자리는 라몬 "레이" 이슬라스(Ramon "Ray" Yslas)가 밴드 정식 멤버로 합류하여 채워졌다.
같은 해에 베이시스트였던 제프 코피도 밴드를 떠나게 되었고, 코피가 떠나며 공석이 된 베이스 포지션은 브렛 시몬스(Brett Simons)가 정식 멤버로 참여하여 채웠다.
시카고 헌정밴드 'Brass Transit"의 보컬리스트였던 닐 도넬(Neil Donell)이 시카고의 리드보컬로 정식 합류하게 되었다

2019년 10월 11일, 스물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이자 네 번째 크리스마스 앨범인 Chicago XXXVII: Chicago Chirstmas를 발매하였다. 앨범은 빌보드 홀리데이 앨범 판매 차트 1위를 달성하였다.


2019년 Chicago Chirstmas 앨범을 작업하는 시카고 멤버들의 영상이 담긴 메이킹 오프

2020년에 10월 16일에는 시카고가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게 되어 영광스런 명예를 얻게 되었다.

2021년 11월 15일에는 기타리스트 키스 홀랜드가 안타깝게도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긴 회복기간을 갖게 되어 기타 연주가 회복기간동안엔 불가해졌고, 홀랜드는 이 회복기간을 다음 인생의 전환점으로 여기고 12월 1일에 시카고를 떠나게 된다. 키스 홀랜드는 26년동안 시카고의 기타를 맡았으며, 결성부터 11년동안 활발히 활동하다 사고로 사망한 원년멤버 테리 카스보다 무려 17년을 더 많이 활동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키스 홀랜드가 떠나며 공석이 된 기타 포지션은 토니 오브로타(Tony Obrotha)가 시카고 정식멤버로 들어가면서 채우게 되었다.

2022년 1월 21일에는 13년동안 시카고에서 키보드를 연주했던 키보디스트 루 파디니가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2022년 기준 6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파워풀한 목소리와 고음으로 보컬을 맡으며 로버트 램과 함께 키보드를 연주하던 그가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빈 자리는 로렌 골드(Loren Gold)가 정식멤버로 들어오며 채우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6일엔 베이시스트 브렛 시몬스가 탈퇴하며 에릭 베인스(Eric Baines)가 정식멤버로 들어오며 베이스 포지션을 매우게 되었다.

2022년 7월 15일, 스물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Chicago XXXVIII: Born for This Moment를 오랜만에 더블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앨범은 빌보드 톱 앨범 세일즈 차트 21위를 기록하였다.

2023년 현재까지 해체 한번 없이 56년째 활동 중이다.원년멤버들 중 테리 카스의 사고사와 피터 세트라의 솔로 전향, 대니 세라핀의 탈퇴와 월터 페러자이더의 질환으로 인한 은퇴를 포함해서 엄청나게 많은 횟수의 멤버 교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한번도 해체된 적이 없이 리 러프넌, 제임스 팬코우, 로버트 램 총 3명의 남은 원년멤버들을 중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4. 현재 멤버[편집]


멤버들이 곡 마다 달리 보컬을 하고 한 멤버가 다양한 세션을 맡는 것이 이 밴드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주로 보컬을 맡았던 멤버는 피터 세트라, 로버트 램, 테리 카스, 빌 챔플린, 제이슨 쉐프다. 초기엔 7인조로 활동했으나, 이후로 여러번의 멤버 교체와 추가영입으로 인해 2022년 현재는 10인조의 대식구 밴드이다.(정식 멤버로 들어왔을때의 년도부터 책정함. 원년 멤버는 굵은 글씨체)

  • 로버트 램(Robert Lamm)[14] - 키보드 (1967~)
  • 리 러프넌(Lee Loughnane)[15] - 트럼펫 (1967~)
  • 제임스 팬코우(James Pankow)[16] - 트롬본 (1967~)
  • 왈프레도 레예스 주니어(Walfredo Reyes Jr) - 드럼 (2012~)[17]
  • 레이 헤르먼(Ray Herrmann) - 색소폰, 플루트 (2016~)[18]
  • 닐 도넬(Neil Donell) - 보컬 (2018~)
  • 라몬 이슬라스(Ramon Yslas) - 퍼커션 (2018~)
  • 토니 오브로타(Tony Obrohta) - 기타 (2021~)
  • 로렌 골드(Loren Gold) - 키보드 (2022~)
  • 에릭 베인스(Eric baines) - 베이스 기타 (2022~)


5. 이전 멤버[편집]


  • 월터 페러자이더(Walter Parazaider)[19] - 색소폰,목관악기 (1967~2017)[20]
  • 대니 세라핀(Danny Seraphine)[21] - 드럼 (1967~1990)
  • 테리 카스(Terry Kath)[22] - 기타 (1967~1978)[23]
  • 피터 세트라(Peter Cetera)[24] - 베이스 기타 (1967~1985)
  • 라우더 드 올리베이라(Laudir de Oliveira)[25] - 퍼커션 (1974~1981)
  • 도니 데이커스(Donnie Dacus) - 기타 (1978~1980)[26]
  • 크리스 피닉(Chris Pinnick) - 기타 (1980~1985)
  • 빌 챔플린(Bill Champlin) - 키보드 (1981~2009) [27]
  • 제이슨 셰프(Jason Scheff) - 베이스 기타 (1985~2016)[28]
  • 드웨인 베일리(Dawayne Bailey) - 기타 (1986~1994)
  • 트리스 임보든(Tris Imboden) - 드럼 (1990~2018)[29]
  • 브루스 가이지(Bruce Gaitsch) - 기타(1994~1995)
  • 키스 홀랜드(Keith Howland) - 기타(1995~2021)
  • 드류 헤스터(Drew Hester) - 퍼커션 (2009~2012)
  • 루 파디니(Lou Pardini) - 키보드 (2009~2022 1월 21일)
  • 제프 코피(Jeff Coffey) - 베이스 기타 (2016~2018)
  • 다니엘 드 로스 레예스(Daniel de los Reyes) - 퍼커션 (2018 1월~2018 5월)
  • 브렛 시몬스(Brett Simons) - 베이스(2018~2022 5월 6일)

6. 앨범 커버와 앨범 관례[편집]


파일:chicago vi.jpg
1973년 Chicago VI의 앨범커버. 미국 달러의 느낌으로 컨셉을 잡았다. 미국반 한정으로 실제 달러 제조에 사용하는 잉크도 활용했기 때문에 손으로 만졌을 때 입체적 촉감이 느껴지고 실제 달러의 촉감도 느껴지게끔 제작하였다. 앞 뒷면 표지 모두 동일.
(존 버그 디자인)

파일:chicago X.jpg
1976년 Chicago X의 앨범커버. 알루미늄 포장을 반만 대충 벗긴 그룹 로고가 새겨진 초콜릿 컨셉이다. 해당 LP 앨범의 속지도 알루미늄 포장을 전부 벗긴 상태의 초콜릿 조각이다.(존 버그 디자인)

파일:chicago xiv.jpg
1980년 Chicago XIV의 앨범커버. 지문 모양 속에 교묘하게 시카고의 밴드명이 들어갔다. LP의 속지는 전부 하얀 바탕에 참여진 크레딧이 들어가있지만, 신박하게도 해당 속지를 오른손 손가락을 이용해 집었을때 나올 지문의 모양이 속지에 그대로 찍혀있다.(존 버그 디자인)

시카고의 앨범들은 대부분 표면적 특징이 뚜렷하다. 그룹 로고를 중앙에 넣은채 다양한 배경을 사용한 앨범 커버들이 특징이다.
초기 전성기 시절 앨범 커버는 디자이너 존 버그(John Berg: 1932~2015)를 통해서 정말 다양하게 디자인하여 사용하였다.
실제 달러 제조에 쓰는 잉크를 사용한 입체감 있는 지폐 느낌의 앨범 커버, 알루미늄 포장을 벗기다 만 그룹 로고가 양극으로 새겨진 초콜릿, 그룹 로고 글자 모양의 고층빌딩, 검은 지문 속에 교묘하게 새겨진 그룹 로고 등등 창의성 있는것들이 많아 시각적인 재미와 예술성도 띄고있는 독특한 앨범커버를 디자인하였다. 실제로도 존 버그의 미술 전시회에 그가 생전 디자인한 시카고의 다양한 앨범커버들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룹명에 번호를 넣어 앨범 제목을 짓는 것도 주요 특징이다. 미국 앨범 발매 순서대로 번호를 넣는데, Chicago(밴드 이름) + 로마 숫자(앨범 발매 순서)이다. 이런 식으로 앨범명을 짓는 이유는 시카고가 새 앨범을 작업할때마다 항상 앨범 제목에 대한 논쟁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황을 없애고자 그냥 그룹 이름에 발매 순서대로 버노를 넣어 앨범명을 짓기로 결정한 것이다.
예를 들면 5번째로 발매된 앨범은 Chicago V, 10번째로 발매된 앨범은 Chicago X.[30]
이들이 더 독특한 이유는 미국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과 라이브 앨범이 스튜디오 정규 앨범과 이어져서 넘버링이 함께 된다는 것이다.
예시를 들자면 시카고의 세 번째 스튜디오 정규 앨범인 Chicago III에 이어 네 번째로 발매된 1971년 카네기 홀 공연의 실황을 담은 LP 4장짜리 박스세트인 "Chicago At Carnegie Hall"은 정규 앨범이 아닌 라이브 앨범이지만 넘버 4(IV)로 인정되어 그 다음 발표된 4번째 스튜디오 정규 앨범이 Chicago IV(시카고 4)가 아닌 Chicago V(시카고 5) 가 된다. 1975년 발매한 9번 앨범이자 첫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인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도 넘버링 라인업에 포함되어 넘버 9가 된다.
1969년부터 2023년까지 총 38번까지의 넘버링 앨범이 출시되었다. 이 38개의 앨범들 중 스튜디오 정규 앨범은 총 26장이다.
하지만 시카고가 콜롬비아 레코드와 계약이 끝난 1981년 이후 콜롬비아 레이블로 나온 시카고의 컴필레이션 앨범들과 일본,유럽등의 나라에서만 발매된 라이브,컴필레이션 앨범은 넘버링이 되지 않는다.

7. 디스코그래피[31][편집]


발매연도
제목
1969
Chicago Transit Authority
1970
Chicago II
1971
Chicago III
1971
Chicago at Carnegie hall
1972
Chicago V
1973
Chicago VI
1974
Chicago VII
1975
Chicago VIII
1975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
1976
Chicago X
1977
Chicago XI
1978
Hot Streets
1979
Chicago 13
1980
Chicago XIV
1981
Greatest Hits, Volume II
1982
Chicago 16
1984
Chicago 17
1986
Chicago 18
1988
Chicago 19
1989
Greatest Hits 1982-1989
1991
Twenty 1
1995
Night & Day: Big Band
1997
The Heart of Chicago 1967-1997
1998
The Heart of Chicago 1967-1998 Volume II
1998
Chicago XXV: The Christmas Album
1999
Chicago XXVI: Live in Concert
2002
The Very Best of Chicago: Only the Beginning
2003
The Box
2005
Love Songs
2006
Chicago XXX
2007
The Very Best of Chicago: 40th Anniversary Edition
2008
Chicago XXXII: Stone of Sisyphus
2011
Chicago XXXIII: O Christmas Three
2011
Chicago XXXIV: Live in '75
2013
The Nashville Sessions
2014
Chicago XXXVI: Now
2019
Chicago XXXVII: Chicago Christmas
2022
Chicago XXXVIII: Born for This Moment


8. 차트[편집]



8.1. 앨범[편집]



8.1.1. 빌보드 200 1위[편집]


  • Chicago V (1972)
  • Chicago VI (1973)
  • Chicago VII (1974)
  • Chicago VIII (1975)
  • Chicago IX (1975)

8.1.2. 빌보드 200 2위[편집]


  • Chicago III


8.1.3. 빌보드 200 3위 ~ 10위[편집]


  • Chicago (1970) 4위
  • Chicago at Carnegie Hall (1971) 3위
  • Chicago X (1976) 3위
  • Chicago XI (1977) 6위
  • Chicago 16 (1982) 9위
  • Chicago 17 (1984) 4위


8.1.4. 빌보드 200 11위 ~ 20위[편집]




8.1.5. 빌보드 200 21위 ~ 30위[편집]


  • Chicago 13 (1979) 21위


8.1.6. 빌보드 200 31위 ~ 100위[편집]


  • Chicago XIV (1980) 71위
  • Chicago 18 (1986) 35위
  • Chicago 19 (1988) 37위
  • Greatest Hits 1982 - 1989 (1989) 37위
  • Twenty 1 (1991) 66위
  • Night & Day: Big Band (1995) 90위
  • The Heart of Chicago 1967 - 1997 (1997) 55위
  • Chicago XXV: The Chirstmas Album (1998) 47위
  • Love Songs (2005) 57위
  • Chicago XXX (2006) 41위
  • The Best of Chicago: 40th Anniversary Edition (2007) 100위
  • Chicago XXXVI: Now (2014) 82위[32]


8.1.7. 빌보드 200 101위 ~ 200위[편집]


  • Greatest Hits: Vol.II (1981) 171위
  • The Heart of Chicago 1967 - 1998 Vol.II (1998) 154위
  • Chicago XXXII: Stone of Sisyphus (2008) 122위
  • Chicago XXXIII: O Chirstmas Three (2011) 170위



8.2. 싱글[편집]



8.2.1. 빌보드 핫 100 1위[편집]




8.2.2. 빌보드 핫 100 3위 ~ 10위[편집]


  • Make Me Smile (1970) 9위
  • 25 or 6 to 4 (1970) 4위
  •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1970) 7위 - 로버트 램
  • Beginnings (1971)[33] 7위
  • Colour My World (1971) 7위
  • Saturday in the Park (1972) 3위
  • Feelin' Stronger Every Day (1973) 10위
  • Just You 'N' Me (1973) 4위
  • (I've Been) Searchin' So Long (1974) 9위
  • Call on Me (1974) 6위
  • Old Days (1975) 5위
  • Baby, What a Big Surprise (1977) 4위
  • Hard Habit to Break (1984) 3위
  • You're the Inspiration (1984) [34] 3위
  • Will You Still Love Me (1986) 3위
  • I Don't Wanna Live Without Your Love (1988) 3위
  • You're Not Alone (1989) 10위
  • What Kind of Man Would I Be (1989) 5위

8.2.3. 빌보드 핫 100 11위 ~ 20위[편집]


  • Free (1971) 20위 - 테리 카스
  • Wishing You Were Here (1974) 11위
  • Harry Truman (1975) 13위
  • Alive Again (1978) 14위
  • No Tell Lover (1978) 14위
  • Stay the Night (1984) 16위
  • Along Comes a Woman (1985) 14위
  • If She Would Have Been Faithful... (1987) 17위


8.2.4. 빌보드 핫 100 21위 ~ 30위[편집]


  • Question 67 & 68 (1971) 24위 [35]
  • Dialogue (Part I & II) (1972) 24위
  • Love me Tomorrow (1982) 22위


8.2.5. 빌보드 핫 100 31위 ~ 100위[편집]


  • Question 67 & 68 (1969) 71위
  • Lowdown (1971) 35위
  • I'm a Man (1971) 49위 [36]
  • Brand New Love Affair (Part I & II) (1975) 61위
  • Another Rainy Day in New York City (1976) 32위
  • You Are On My Mind (1977) 49위
  • Little One (1978) 44위
  • Take Me Back to Chicago (1978) 63위
  • Go Long Gone (1979) 73위
  • Must Have Been Crazy (1979) 83위
  • Thunder And Lightning (1980) 56위
  • What You're Missing (1983) 81위
  • 25 or 6 to 4 (Newly Re-Recorded Version) (1986) 48위
  • Niagara Falls (1987) 91위
  • We Can Last Forever (1989) 55위
  • Hearts in Trouble (1990) 75위
  • Chasin' the Wind (1991) 39위 [37]
  • Here in My Heart (1997) 59위 [38]



9. 여담[편집]


1967년 밴드 결성부터 2023년 현재까지 단 한번도 해체없이 활동하는 밴드이다. 1978년 테리 카스의 사망 이후 멤버 교체가 너무 잦아지긴 했지만, 그 와중에 밴드 해체 및 활동 중단도 한번 없었고 그로 인한 재결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일부 노장 밴드들이 해체와 재결성 이력이 있거나, 앨범발매를 중단하고 공연만 이어가거나 하는 등의 사례가 많으나 시카고는 56년동안 공식해체가 한번도 없고 오리지널 멤버 7명 중 3명이 현재까지 남아있으며(로버트 램, 제임스 팬코우, 리 러프넌)2022년까지 앨범을 꾸준히 낸다는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80년대의 시카고 시절 팬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시카고도 데뷔부터 70년대 초중반까지 낸 곡들 중에 유난히 재생 시간이 긴 Libertaion, Devil's Sweet 등의 대곡들이 꽤 많았다. 제일 긴 시간의 파트는 앨범 Chicago III에 포함된 파트인 무려 22분 30초의 'Travel Suite'이다.[39] 단일 노래로선 1집 Chicago Transit Authority의 마지막 트랙인 Liberation이 14분 36초로서 제일 긴 시간의 재생시간을 갖고있다.

1978년 테리 카스 사망, 1985년 피터 세트라 탈퇴, 1990년 대니 세라핀 탈퇴, 2017년 심장질환 및 현재 알츠하이머로 인한 월터 페러자이더의 활동 중단으로 인해 현재 시카고의 원년 멤버는 로버트 램, 리 러프넌, 제임스 팬코우 3명만이 활동 중이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을 당시 밴드 최고의 히트곡을 만들어준 데이비드 포스터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어딘가 살아있겠지. 연락 끊은 지 오래 되었다.는 식으로 대답했다.[40]

원년멤버이자 기타리스트인 테리 캐스는 "록 음악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기타리스트 중 한명"으로 불림과 동시에 "록 음악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기타리스트 중 한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테리 카스는 지미 헨드릭스가 생전에 좋아하던 기타리스트 중 한명이었다.
60년대 말에 시카고가 Chicago Transit Authority 밴드명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지미 헨드릭스가 로스엔젤레스 위스키 고고(Whisky Go Go) 공연에서 시카고의 공연을 보고 월터 페러자이더에게 당신 밴드 기타주자(테리 카스)가 지미 헨드릭스 자기 자신보다 더 낫다고 말한 바가 있다. 테리 카스와 헨드릭스가 같이 담배를 듀오로 피며 웃는 사진도 존재한다.

결성 원년멤버들의 출생년도가 1944년생(2명)부터 1945년, 1946년(2명), 1947년, 1948년생까지 순서대로 나열이 가능하다.

게임에도 이들의 곡이 실린 적이 있는데, 락스타 게임즈Grand Theft Auto 5의 Los Santos Rock Radio에 'Chicago X'의 수록곡인 'If You Leave Me Now'가 실려있다.
유비소프트와치독에서도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앨범 'Chicago'의 수록곡인 'Wake Up Sunshine'이 나온다.

리듬게임에도 수록된 곡들이 많은데, 유비소프트의 Rocksmith2014의 DLC에 '25 or 6 to 4', 'Saturday in the Park'가 수록되어 있다.'
2010년에 출시된 리듬게임 Lips:I Love 80S에 'Chicago 17'의 수록곡 'You're the Inspiration'이 수록되어있고, Lips의 DLC에도 'Chicago 16'의 수록곡인 Hard to Say I'm Sorry', 'Chicago 17'의 수록곡인 'I don't Wanna Live Without Your Love', 'Hard Habit to Break'가 포함 되어있다.
Rock Band 3 본편엔 '25 or 6 to 4'가, DLC엔 'Make Me Smile'와 'Feelin' Stronger Every Day', 'If You Leave Me Now'가 포함된다.
도와줘! 리듬 히어로엔 1984년 'Chicago 17'의 수록곡 'You're the Inspiration'이 포함 되어있다.

2023년 개봉 영화 플래시(영화)에서 1970년 앨범 'Chicago' 수록곡인 '25 or 6 to 4'가 삽입되었다.

유튜브에 Leonid & Friends라는 슬라브계 멤버들이 모인 시카고 헌정밴드가 존재한다. 이들은 시카고의 여러곡들을 커버하였는데, 시카고의 히트곡들보다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노래들도 커버하였다.(Woman Don't Want to Love me, Ain't It Blue? 등) 원곡의 느낌을 해치지 않으면서 커버했다는것이 특징이다. earth wind & fire나 Blood, Sweet & Tears, The Ides of March 같은 다른 브라스 밴드의 일부 곡도 커버한 바가 있다. 현재는 투어도 돌고있다.


10.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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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넘버링에 포함되나, 컴필레이션 및 라이브 앨범인 것은 굵은 선 처리[2] 당시 시카고의 교통당국이었던 시카고 교통국의 상표명을 그대로 따왔다.[3] 색깔이란 의미의 단어 '컬러'를 영국은 'colour', 미국은 'color'로 표기한다. 하지만 시카고는 항상 노래에서 colour을 사용한다.[4] 새벽 4시가 되기 25분 또는 26분 전, 즉 3시 35분 또는 34분을 뜻한다.[5] 1972년 7월 4일에 맨해튼에 있었던 로버트 램과 월터 페러자이더가 뉴욕 센트럴 파크를 돌아다니다가 스틸 드러머, 가수,댄서,저글링 하는 사람들을 보고 신이 난 채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로버트 램은 공원에서의 경험을 담은 영화(개인 필름 비디오)를 만들었고, 나중에 그 필름들을 편집하여 일종의 악보로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6] 이 카리부 목장 녹음 스튜디오는 1980년대 중반부터 부진을 겪다가 1985년에 화재로 인해 300만 달러의 피해 금액이 발생하며 폐쇄되었다. 이 목장 녹음 스튜디오는 어스 윈드 앤 파이어, 비치 보이스, 엘튼 존 등의 명 아티스트들이 앨범들을 녹음하기 위해 이용한 유명 녹음 스튜디오이기도 했다.[7] 사실 테리 카스는 1970년대 말에 건강 문제와 약물 남용으로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긴 했었다. 그러나 동료 제임스 팬코우의 말에 따르면 테리 카스는 애초에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권고했다. 심지어 테리 카스가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목격한 돈 존슨도 있으니 결국은 테리 카스의 지나친 만용과 방심에 의해 발생한 사고사인것이다.[8] 2019년 다큐 필름인 "데이비드 포스터: 오프 더 레코드" 인터뷰에서 멤버 리 러프넌이 말하길, 컬럼비아 레코드사가 자신들을 해고하면서 "시카고는 이제 한물 간 밴드"라고 소문을 냈다고 한다.[9] 계약 관계는 끝났으나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시카고가 콜롬비아에서 녹음한 노래들의 테이프는 전부 콜롬비아 레코드의 소유였기 때문에 1980년대에 시카고가 새로운 레이블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동안 그 흐름에 맞춰 기존 시카고의 콜롬비아 시절 노래들을 수록한 컴필레이션 앨범 3개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 앨범들은 시카고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은 앨범들이고, 시카고 앨범 넘버링에 포함되지 않는다.[10]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포스터가 강하게 밀어붙여서 하긴 했지만 녹음 당시부터 로버트 램을 비롯한 일부 멤버들은 '이건 시카고의 음악이 아니야'라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11] 1985년, 피터가 밴드를 떠난 이후부터 2022년 현재까지 시카고와 재결합과 합동 공연을 한번도 가진적이 없다(.....) 현재는 시카고 원년 멤버들중에선 로버트 램과만 연락하며 지낸다고 한다.[12] 시카고의 역대 베이시스트 중 제일 오래 밴드에 남은 멤버이다.[13] 대한민국에서도 1990년에 해당 앨범(The Heart of Chicago)이 발매되었는데,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팔리며 성공을 하였다. 그래서 1990년대를 보낸 사람들 중 제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시카고 앨범이 해당 앨범과 Chicago 16, Chicago 17 등의 80년대 히트한 시카고 라이센스 LP였다.[14] 밴드에서 가장 영향이 큰 원년멤버. 작곡과 보컬을 주로 담당하였다. 결성부터 뛰어난 작곡 실력과 개성있는 음색의 보컬로 지금까지도 시카고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944년 10월 13일 출생[15] 74년부터 작곡에 비중을 두던 원년멤버. 1946년 10월 21일 출생[16] 작곡을 주로 담당하는 원년멤버. 1970년부터 작곡 실력을 입증하여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 멤버이다. 1947년 8월 20일 출생[17] 자신이 10대 때 처음 구매했던 앨범이 시카고의 1집 Chicago Transit Authority였고 시카고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하였다. 2012년에 자신이 좋아하는 시카고의 정식멤버로 들아와 2018년까진 퍼커션을 맡았으나, 2018년에 드러머 트리스 임보든이 밴드를 떠나게 되면서 2018년부터 드럼을 맡게 되었다.[18] 원래는 2005년도부터 시카고가 공연을 다닐때만 월터 페러자이더의 대체 연주자로서만 참여했으나, 2016년에는 월터 페러자이더가 질환으로 인해 투어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정식멤버가 되었다.[19] 밴드 결성의 장본인이자 밴드의 축을 담당하였던 원년멤버 중 한명이었다. 1945년 3월 14일 출생[20] 심장 질환으로 인해 2017년 투어부턴 공식 은퇴한 상태. 2021년 4월엔 알츠하이머 진단까지 받았다고 한다.[21] 드러머로서 큰 영향을 담당하던 원년멤버. 간간히 공동작곡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뛰어난 드럼 실력을 보여주던 초중기 시카고의 중요 멤버. 2010년 롤링 스톤 선정 100대 드러머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1948년 8월 28일 출생[22] * 초기 시카고의 록 적인 사운드에 큰 축을 담당해주었던 원년멤버였다. 작곡과 보컬을 주로 담당하였고 레이 찰스와 비슷한 음색과 뛰어난 기타 실력을 보여주어 초기 시카고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초기 재즈 사운드의 시카고 팬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멤버 1순위라 봐도 무방하다. 1946년 1월 31일 출생[23] 1978년 1월 권총 오발사고로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24] 초중기 시카고에 큰 영향을 가지던 원년멤버였다. 작곡과 보컬을 주로 담당하였다. 초중기 원년멤버들중에선 1944년 10월 13일생인 로버트 램보다 1달 더 일찍 출생하였으며 연월로 따지면 최연장자라고 볼 수 있다. 청량하고 독특한 보이스, 뛰어난 베이스 실력을 보여주던 초중기 시카고의 상징과도 같았던 인물. 초기, 중기 시카고 팬들이 그리워하는 멤버 2순위라 봐도 무방. 1944년 9월 13일 출생.[25] 1940년생[26] 1978년 테리 카스 사망 후 그 자리를 이어받아 영입되었다.[27] 1982년 Chicago 16부터 2009년까지 정식으로 함께한 멤버로, 출중한 키보드 실력과 허스키한 목소리의 메인, 리드보컬을 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부터 해온 라이브에선 너무 지나친 기교를 넣은 보컬로 인한 탓인지 빌 챔플린이 보컬을 맡는것을 싫어하는 팬들도 꽤 있는듯 하다....오죽하면 2003년 시카고 한국 내한공연 당시 첫곡이었던 "Make me smile"에선 빌 챔플린이 리드 보컬을 맡고 노래를 하는데, 유튜브에 올라온 이 영상의 댓글엔 '경고! 첫 곡부터 빌 챔플린이 노래하니 주의하라(........)'는 뉘앙스의 댓글까지 달리고 답글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빌의 2000년대 보컬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니 참고하자.[28] 1985년 피터 세트라가 탈퇴하고 난 후 그 자리를 이어 영입되었다. 밴드에서 제일 오래 활동한 베이시스트이다. 세트라와 비슷한 느낌의 보이스로 빌 챔플린과 함께 그룹의 메인보컬을 양분했었다.[29] 시카고가 앨범을 내기도 전이었던 1968년 시카고 트랜싯 어소리티 시절에 드러머 지망생이었던 16살의 트리스 임보든은 CTA의 공연을 보고 그들의 팬이 되었다. 1990년 대니 세라핀이 밴드를 떠난 후 그 자리를 이어받아 영입되었다.[30] 원년멤버 테리 카스가 사망하고 난 후 동년에 발매한 1978년 12번째 앨범이자 10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Hot Streets"를 새로운 방식의 앨범명, 새로운 디자인의 앨범 커버로 발매하여 일시적으로 앨범 디자인의 관례가 깨졌다가 다음 앨범부터 다시 원래의 앨범 디자인 방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Chicago 13은 로마 숫자(Chicago XIII)가 아닌 일반 숫자로 표기되었다. 하지만 21번째 앨범도 앨범명이 TWENTY 1으로 정해지면서 그룹 이름 +넘버 관례가 한번 더 깨졌다.[31] 넘버링에 포함되나, 컴필레이션 및 라이브 앨범인 것은 굵은 선 처리[32] 현재까지 시카고의 마지막 빌보드 200 차트 진입 앨범이다.[33]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와 같이 순위 달성 날짜가 1969년이 아닌 각각 1970년, 1971년인 이유는 음반사가 1970년 앨범 'Chicago'의 인기를 보고 69년 발매된 1집의 일부 곡들을 뒤늦게 싱글컷하여 발매했기 때문이다. 정작 시카고의 첫 싱글인 Question 67 & 68 는 1집 발매 후인 1969년 7월에 싱글 발매되었지만 71위라는 낮은 순위를 달성했다. Beginnings도 1969년 10월에 싱글로 발매되었으나 차트 진입조차 못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971년에 음반사가 다시 이 곡을 싱글로 발매하여 24위를 달성하게 되었다.[34] 도와줘! 리듬 히어로 크리스마스 스테이지에 수록되었던 그 곡 맞다. 데드풀 1편에서도 짤막하게 흘러나왔었다. 참고로 시카고 공식 채널에 업로드된 뮤직비디오보다 일반인의 모 채널에 있는 가사+음원 버전이 조회수가 3배 높게 나오는 노래다. 후자의 조회수는 1억뷰대.[35] 마찬가지로 1970년 앨범 Chicago와 싱글커트 곡들이 성공하면서 2년 뒤인 1971년에 재발매를 한 것이다.[36] 원래는 1969년 당시엔 싱글 발매가 되지 않았고 1970년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만 발매를 했지만, 1970년 앨범 Chicago II와 싱글커트 곡들이 성공하면서 2년만인 1971년에 미국에도 싱글로 발매된 노래이다.[37] 시카고의 마지막 빌보드 핫 100 차트 진입 곡이다. 91년 이후에 나온 싱글들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는 전부 진입을 하지 못하였다.[38] 59위는 미국 라디오 음악 차트 순위이며, 이 노래가 시카고의 마지막 어덜트 컨템포러리 주간 차트 1위 곡이다.[39] 6개의 곡이 각각 부제가 붙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곡처럼 연주된다.[40] 'Hard To Say I'm Sorry'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이지만 콘서트에선 거의 연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이건 자기들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 그런데 정작 피터 세트라 탈퇴 이후 내놓은 히트 싱글 Will You Still Love Me, Look Away 등은 발라드였다. 또 데이비드 포스터와 결별하고 다이안 워렌이 참여한 Chicago 19에서는 아예 16시절 사운드로 회기하여 빅히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