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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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R. 채핀(John R. Chapin, 1827~1907)[1]이 그린 시카고 대화재 그림.

Great Chicago Fire
1. 개요
2. 진행
3. 결과
4. 1873년 공황의 기폭제가 되다


1. 개요[편집]


1871년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화재. 19세기 최악의 피해를 끼친 재해 중 하나이다.


2. 진행[편집]


시카고 대화재는 1871년 10월 8일에 시작되었다.[2] 원인은 알 수 없다. 캐서린 올리어리라는 이주민의 암소[3]가 헛간의 등불을 걷어찬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이는 당시 신문 기자가 꾸며낸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였다.[4] 여러 가지 다른 설도 있지만 현재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설은 없다.

당시 화재는 수평 화재였다. 한 곳에 불이 나면 가연성 물질로 지어진 다른 건축물에 순식간에 옮겨 붙었다. 화재가 나기 직전 한 주에만도 20건의 화재를 다루었던 시카고 시 소방 당국은 화재 신고가 들어왔을 때 신속히 대응하지 못했고, 소방관들이 도착했을 때는 많은 수의 목조 주택과 농장이 불길에 휩싸인 데다가 강한 바람이 불길을 걷잡을 수 없이 퍼뜨리고 있었다. 목조 건물, 도시에 쌓여 있는 많은 양의 재목, 나무로 된 보도가 불길이 타오르는 데 일조했다. 하필이면 당시 시카고에서 축산 엑스포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축사들 사이사이에는 나무 보도블록톱밥을 섞은 흙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기까지 했다.

소방국은 비교적 폭이 넓은 시카고 강을 마지노 선으로 삼아 진화에 나섰지만, 불길은 시카고 강을 건너 상수도 시설을 파괴했고, 따라서 소방관은 더욱 애를 먹었다. 불길이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로 일어나면 화재 폭풍이 일어나는데, 이 불의 회오리는 불똥을 마구 사방에 흩뜨린다. 대형 산불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 시카고 도심에서 벌어진 것. 실제 증언에 의하면 베개만 한 불덩이가 시카고 강을 건너서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10월 9일 월요일 이른 오전에는 중앙 상업 지구가 황폐해지고, 은행들도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지하의 은행 금고들은 불길로부터 버텨냈지만 며칠 동안 문조차 열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문을 열자마자 외부 공기와 접촉하면 과열된 금고 안에서 자연 발화가 일어나 내용물이 모조리 타버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 새로 지은 오페라 하우스법원 건물도 불탔다. 카운티 홀(군청)의 종탑은 오전까지 버텼으나 그날 오후 결국 지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지역에서만 수천 명이 불길을 피해 피난을 가야 했다.


3. 결과[편집]


결과적으로 화재는 시카고 시의 건물 3분의 1 가량을 전소시키고 10만 명을 이재민으로 만들었으며 300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소위 '불타버린 지역'은 길이 6.4㎞에 너비 1.2㎞에 이르렀으며, 8㎢ 넓이에 34개의 블록, 45㎞ 길이의 도로, 190㎞ 길이의 보도, 2천 개의 가로등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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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으로 표시된 곳이 전소된 구역, 인접 지역은 피해를 입은 지역을 나타낸다. 사실상 시카고 구 시가지가 몽땅 불탔다.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뒤, 즉시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세기 후반 시카고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5년 후에는 도시 어느 곳에서도 화재로 인한 피해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건물들이 깨끗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화재를 계기로 시카고에는 목조 건축 대신 강철과 석조를 이용한 건축들이 대세를 이루었고, 19세기 말~20세기에 빠르게 발전하는 건축 기술이 반영되어 시카고에는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마천루의 밀집도가 대단해져서 이후 시카고는 미국 마천루 건축의 박물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1937년, 이 사건을 주제로 타이론 파워가 주연한 인 올드 시카고라는 영화가 있다. 개봉 당시 미국 국내에서 관객 1000만이라는 경이로운 흥행을 가져왔다.


4. 1873년 공황의 기폭제가 되다[편집]


시카고 대화재는 시카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미국사적으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860년대 동서 대륙 횡단 철도의 건설은 전례 없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으며 1870년대에 들어서는 너도 나도 새롭게 발전하는 산업이었던 철도 건설과 운송 사업에 투자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철도 산업의 수익성이 너무 낮아 정부가 눈물을 머금고 기업들에게 각종 혜택을 배풀어야했으나, 동서횡단철도가 건설되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운송 비용이 낮아진데다 추가적인 철도 건설까지 보장되자 모두가 한탕을 노리고 철도 건설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도 건설 산업 붐은 어디까지나 그 특성상 더욱 많은 자본이 유치되어야 유지될 수 있음을 뜻했고 자연스럽게 불안정한 산업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붐이 꺼진 하나의 이유가 시카고 대화재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미국 중서부 제1의 대도시인 시카고의 중심지가 사실상 전소하면서 전례 없는 대도시 전면 재건축 사업판이 시카고에 펼쳐졌고 이는 수많은 미국 토건 사업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특히 대륙횡단철도 건설 이후 미국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른 시카고였기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파산할 위험도 컸던 철도 산업 투자에 비해 시카고 대화재로 인한 재건축 사업은 시카고 시민들이 갑자기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가지 않는 한 성공할 확률이 훨씬 컸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토건 사업가들은 철도 건설 및 운송 사업에 투자하는 대신 시카고 재건축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871년 보불전쟁과 그 이전의 보오전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타협,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던 파리 코뮌 등등으로 인한 유럽의 정치, 외교적인 불안이 확산되면서 유럽의 증시가 폭락했고, 다급해진 유럽 자본가들이 미국 철도 사업에 투자했던 자본을 회수해가면서 순식간에 철도 사업은 빌린 돈의 이자조차 갚을 수 없을정도로 투자자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갔으며 줄줄이 도산하였다.

철도 사업의 도산으로 인해 남북전쟁 당시 채권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던 "채권왕" 제이 쿡을 비롯한 상당한 수의 거부들과 유니온 퍼시픽 철도, 노던 퍼시픽 철도 등 거대한 철도 회사들이 파산을 선언했고, 이들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사람들은 불안에 휩쌓여 은행에 맡겨둔 돈을 급하게 찾으려고 은행으로 밀려들었다. 뉴욕 금융거래소는 뱅크런을 막기 위해 10일간 폐장되었지만 때는 늦었다. 전 미국의 증시가 폭락하고 공황이 찾아온 것이다. 이를 1873년 미국 장기불황(Long Depression)이라고 부른다.

1870년대 장기불황은 미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장기불황은 기존 미국의 사업을 떠받치던 철도 사업과 농업, 전통적 공업의 종말을 의미하였으며 장기불황을 통해 미국 산업은 대대적으로 구조조정되었다. 특히 밴더빌트와 J.P. 모건 등의 사업가들이 이 혼란의 시기를 틈타 작은 기업들을 합병해 사업을 크게 불리는 방식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1873년 불황기에서 시작되어 1893년까지 유지된 이러한 시대를 도금시대라고 부른다.

한편 서부의 농민들은 장기공황으로 삶이 크게 어려워졌으며, 이들을 타겟팅한 "인민주의(포퓰리즘)" 운동과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등장했는데 이는 민주당 진보화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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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2] 공교롭게도 같은 날 위스콘신 주의 '페시티고'라는 도시 근처 숲에서도 초대형 산불이 발생해 최소 1,5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발생시켜 산불 희생자 수 역대 1위로 남아 있다.[3]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The Great Disasters"에서는 "미국 역사상 제일 유명한 "라고 평했다.[4] 어느 정도 증거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이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당시 올리어리 부인의 집에서 일하던 잡역부(문맹이라서 이름을 X라고 서명)가 법원에서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했기 때문. 그러나 정황 증거상 증언이 실제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현대 사학자들에게는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