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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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기원 논란
4. 언어
5. 여담


1. 개요[편집]


중국소수민족. 원어로는 시버(Sibe)족으로, 시보(锡伯)는 중국어 음차이다. 한국어로는 석백족. 인구는 약 19만 명으로, 이 중 13만여 명은 랴오닝성에 그리고 약 3만 4천여 명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리 카자흐 자치주차부차얼 시보 자치현[1]에 살고 있다. 시버어는 만주어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만주어와 유사하며 풍습 또한 매우 비슷하다.


2. 역사[편집]


시버부는 15~17세기 현 창춘시 솽양구(双阳区)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족 중 하나로, 그 추장은 수완(Suwan)부 구왈갸(Gūwalgiya) 씨족의 니아합기(尼雅哈奇)라는 인물이다.[2] 16세기 중반 괄차(Gūwalca)부와 함께 후룬베이얼 지역으로 부터 이주해온 코르친부에 예속되어 간접지배를 받았다.

1636~40년대, 코르친에 대한 지배체제가 확립되면서 시버 씨족들은 좌령으로 편제되어 코르친 10기에 예속됐고, 이후 1692년에야 팔기로 편제되었다. 때문에 시버인들은 구만주와 달리 종족적 정체성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해 이들은 치치하르, 버두너 등으로 사민되었다.

1699년 버두너와 치치하르의 시버인 6만 5천여 명은 성경에, 그 외의 기린우라의 시버인 6천여 명은 베이징에 이주했다. 이듬해 치치가르 출신 시버인 3만 6천여 명은 후호트 일대로 이주됐다. 한편 버두너 일대에 남아있던 시버인들은 코르친 고를로스기 영지에서 살면서 물고기를 황실에 공납했다. 건륭제 때 청 조정은 서북 변경의 국경 방비를 위해 성경 일대에 있던 20~40세 시버인 남성 1,020명과 그 가족 3,275명[3]을 뽑아, 고향에서 4천㎞ 이상 떨어진 신강의 천산북로로 사민시켰다. 당시 시버족들은 2만호의 수많은 평민 한족들을 사로 잡아 노비로 강등시켜 끌고 갔는데 그 끌려간 한족 노비 들도 현재는 시버어를 사용하며 시버족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생긴 험난한 현지 정착 과정은 현재 시버족들 사이에 슬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고, 많은 전설과 민요의 원천이 되었다. 마치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 정책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신장에 주둔한 만주족 기인들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인근 지역 무슬림들에게 맡긴 것과 다르게 시버족들은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1864년 신장에서 무슬림들이 봉기했을 당시 만주족이나 몽골족들이 회족이나 위구르인들에게 포위당해 때죽음을 당한 것과는 별개로 이들은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신장의 시버족들은 담배와 아편을(...) 재배, 판매하는 근면한 부농으로 유명했다. 시버족의 언어와 풍습은 그야말로 만주족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만주에 잔류한 시버족들은 상당수가 여타 만주족, 몽골족들에게 그대로 동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현재 인구 19만 중 요녕성에 시버족의 인구가 13만이다.

일본제국이 1930년대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에 만주국을 설치하자 동북 시버인들은 동북항전에 동참하여 만주군과 관동군에 맞섰다. 한편 신강에 주둔한 팔기만주 시버영은 신강성자치정부가 하남현(河南县)을 설치한 1938년까지 유지됐는데, 이들은 1944년에 소련의 지원을 받은 위구르인이 수립한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과 일부 러시아계 중국인 백군 난민 등과 협력하여 중국 국민당을 적대했다.


3. 기원 논란[편집]


만주족, 우데게족, 나나이족과 같은 숙신 및 퉁구스계 민족이라는 주장이 확실하다. 청나라 시절에는 시버인들이 자신들을 만주족과 같은 조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건국 이후에는 시버족이 선비족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지만 역사적 문헌적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도 만주족과 완전히 유사하며 풍습 또한 서진 때 작성된 위서 삼국지 동이전에 나온 선비족과 매우 다르다. 거주지역 및 풍습과 문화, 언어 체계는 만주족과 유사하며 청초 여행가이자 서예가인 양빈(楊賓)의 《유변기략(柳邊紀略)》에 의하면, 시버인들이 자신들이 만주족과 같은 조상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며,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숭덕제가 눈강의 시버인에게 동일한 선세라 말한 바 있다. 만주원류고는 청나라 황실의 숭조사업의 일환이라는 소리도 현대에 나오는 비판일 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이전까지는 시버족이 선비족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만주족의 일파로 주장되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부터 많은 소수민족을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시버족이 선비족의 후예가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퍼졌고 해외에서는 시버족이 선비족의 후예라고 소개되어졌다. 하지만 시버족이 선비족의 후예라는 것에는 아무런 문헌적 근거가 없으며 시버족 자체가 만주족과 풍습이 유사하고 언어가 같다고 할 정도로 비슷하여 만주족의 일파라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

만주에는 만주족들도 여러 분파가 있으며 나나이족과 비슷하게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의 통합에 반대하며 반목하게 되면서 형성된 민족이 현재의 시버족이된 것이다.

4. 언어[편집]


학자에 따라 만주어의 방언으로 봐야 한다고도 하지만, 정설에 따르면 퉁구스어족 남퉁구스어파 시버어라는 만주어와 매우 유사한 언어를 쓰는데, 음운 면에서는 만주어보다 복잡한 모음조화 규칙을 지녔다.



시버어와 만주어의 의사소통 정도를 알 수 있는 영상.

퉁구스어 계통의 역사를 추적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강으로 강제이주된 덕택에 여진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설도 있을 만큼 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어서 만주계 언어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문자는 만주 문자를 살짝 변형해서 쓴다.

현재는 일리 카자흐 자치주의 일리사범학교에서 제2언어로 가르치고 있으며, 사용 인구는 약 3만 명으로 만주어보다 훨씬 많다. 또한 신문도 발행되고 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 안에 있는 차부차얼 시보 자치현의 2008년 11월 25일자 뉴스 영상.


5. 여담[편집]


전통 음식 중에 만두에 해당하는 음식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호박을 넣는다.

시버족 출신 유명인으로 여배우 동려아가 있으며 아버지는 시버족의 유명한 작곡가이며 어머니는 한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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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abcal. 시버어로 곡창지대라는 뜻이다. 찹찰 시버족 자치현으로도 알려져 있다.[2] 니아합기는 다른 사료에서 옥군한(玉军汗)으로도 기록되는데, 이는 그의 후손이 사시한 한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의 동생 주찰(珠察)의 8세손 피옹돈은 후금개국5대신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최후가 안씁인 9세손 오보이강희제의 섭정을 맡은 바 있다.[3] 이훈(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