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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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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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5.17 내란 · 배경 및 전개 · 계엄군의 학살
관련 인물
및 단체

진압 및
왜곡 관련

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 황영시 · 이희성 · 최세창 · 박준병 · 하나회 · 주영복 · 신군부 · 지만원 · 김대령 · 이주천 · 서석구 · 김진태 · 이종명 · 김순례
저항 관련
윤상원 · 박남선 · 정상용 · 조비오 · 박관현 · 윤한봉 · 김완섭 · 광주시민 · 투사회보 · 시민군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 헤닝 루모어 · 인요한 · 김영택 · 김사복 · 조갑제 · 정동영 · 서청원 · 서정갑 · 심재철
피해자
사상당한 경찰과 시민 · 김경철
사건 사고
5.18
관련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 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일반
임을 위한 행진곡/논란 · 광주 폭격 시도 논란 ·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 (전우원)
왜곡 관련
5.18 민주화운동/왜곡 (북한개입설 · 무장폭동설) · 광주민주화운동 진보편향 명칭설 · '5.18 광수' 날조 논란
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 ·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채널A · TV조선) · 자유한국당 공청회 5.18 망언 논란 · 전두환 회고록
기타
창작물에서의 묘사 · 5.18 사적지 ·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 5.18 특별법 · 5.18 관련 의문점 · 임을 위한 행진곡 · 화려한 휴가 · 택시운전사 · 오월의 노래 · 오월의 청춘 · 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 · 관련 자료김남주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지휘관
5. 무장
6. 이후




1. 개요[편집]


[ 시민군 사진들 ]
파일:시민군1.jpg
파일:시민군2.jpg
파일:시민군3.jpg
경찰 시위진압용 보호구로 무장한 시민군들
전남도청 복도에서 경계근무 중인 시민군
복면을 쓴 시민군
파일:A_PMrHvCYAAA5-5.jpg
파일:시민군5.jpg
파일:장갑차에 올라와 있는 시민군.jpg
M1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광주 시민군
금남로 전남 도청앞에서 열리는 시민군 초궐기대회에서 경비중인 시민군
시민군 BAR 사수[1]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을 일으킨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동적 시위진압에 대항해 헌정질서 보호등을 위하여 저항권, 자위권을 발동한 시민들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조직된 무장 항쟁세력이다.


2. 배경[편집]


1979년, 하나회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 수사를 구실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특전사령부, 육군본부, 국방부등 주요 시설을 장악하여 반란을 성공시킨다. (12.12 군사반란)

그리고 1980년대 5월초, 민주화 요구 열기가 뜨거워지자 (서울의 봄) 신군부는 북한남침설을 유포, 사회를 불안하게 한후, 대통령하고 내각등을 '강압적'으로 협박하면서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5.17 내란)

5월 17일, 국회를 강제적으로 해산하고,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학생회를 무력화한 신군부(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18일에 특전사 부대들을 전두환 반대시위를 진행하고 있던 광주에 보내 폭동적 시위진압을 진행했다.

3. 전개[편집]


자세한건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서 참고.

5월 21일, 오후 1시정각 즈음,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나오는 애국가를 신호로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이대로 가다간 다 죽는다"라고 느껴서 경찰서와 예비군동대의 무기고, 아세아자동차, 화순 탄전 등을 점령, 카빈소총과 군용 차량, TNT 등 무기를 탈취해서 무장저항권을 발동시킨다.

오후 3시쯤에 시민군이 결성, 계엄군과 교전하고[1][2]. 전남대학교 병원 옥상에 LMG 2정을 설치하는 등 거의 내전에 준할 정도로 대한민국 역사 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했다. 당연히 시민들로 급조된 이들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한 피해 속에서 처절하게 대응하면서 저항을 이어갔다.

오후 8시 30분경, 시민들의 유례없는 대규모 저항에 결국 계엄군은 광주외곽으로 후퇴한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시민군은 광주를 지켜냈다. 계엄군은 겉으로는 시민군과 협상을 하면서도 시민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계엄당국이 보낸 프락치[3] 들을 보내는 등 위기도 많았다.

5월 26일, 학생들이나 미필에 대한 무기 반납 운동이 벌어졌고, 예비역 위주로 재편된 특별기동대가 창설되었다. 특별기동대는 70여명 정도였으며 시내 내부 치안유지와 계엄군의 도청진입을 막는 임무을 부여받았다.

5월 27일 새벽 3시, "상무 충정작전"을 발동한 계엄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광주 외곽에서 시내로 쳐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전남도청과 YWCA, 계림국민학교, 월산동, 광주공원 등 시내 요지를 장악하고 있던 시민군들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과의 압도적인 화력 차이로 인해 결국 오전 5시에 시내 주요 시설을 빼앗기고 궤멸/붕괴되었다.


4. 지휘관[편집]


  • 위원장 김종배(항쟁당시 26세) - 업무총괄
  • 내무담당 부위원장 허규정(항쟁당시 26세) - 도청 내부문제, 대민, 장례업무
  •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항쟁당시 30세) - 계엄사와의 협상업무
  • 대변인 윤상원(항쟁당시 29세) - 기자회견 및 지도부 공식 발표업무
  • 상황실장 박남선(항쟁당시 26세) - 시민군 조직 등 군사업무
- 기동타격대장 윤석루(항쟁당시 24세)[4]
-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항쟁당시 33세)
  • 기획실장 김영철(항쟁 당시 32세) - 제반 업무 및 기획
-기획위원 이양현(항쟁당시 30세)
-기획위원 윤강옥(항쟁당시 29세)
  • 홍보부장 박효선(항쟁당시 26세) - 궐기대회 및 제반 홍보업무
  • 민원실장 정해직(항쟁당시 29세) - 제반 대민, 장례업무
  • 조사부장 김준봉(항쟁당시 21세) - 치안업무(치안질서 위배 조사)
  • 보급부장 구성주(항쟁당시 25세) - 식량 조달및 식사업무


5. 무장[편집]


시민군의 소화기의 경우 대부분은 M1 카빈 / M2 카빈과 반자동 소총인 M1 개런드로 무장했지만 일부의 경우 자동화기로 M1918 BAR이나 M16A1도 운용했고 기관총으로는 LMG의 경우 M1919 브라우닝, M60 기관총을 HMG의 경우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을 운용했다. 이외에도 M1911 권총 등의 무기도 사용되기도 했다.

기갑차량의 경우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KM900 장갑차나, K-111을 제외하면 없다보니 주로 현대 포니, 현대 HD1000 등의 민수용 차를 사용했다. KM900 장갑차의 경우 시민군이 4대를 탈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가능했던 원인으로 광주에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있었고 차륜형 장갑차인 KM900의 조종이 화물차 운전과 비슷하기 때문에 가능했다.[5] 물론 차량의 경우 시위에도 큰 도움이 된만큼 차량은 총기와 함께 주요관리 대상이였다. 그래서 주로 수송용으로 사용됐으며, 일부 차량 중에서는 특수기동대의 경우 철판을 덧댄 테크니컬도 있었다.

6. 이후[편집]


1993년, 대법원은 이 시민군이 행한 행동들은 헌정질서를 지키려고 행동한 정당한 저항권 행사라고 못박았으며, 그들을 진압한 계엄군들과 하나회 신군부들을 폭동적 시위진압을 행한 사실상의 반란군으로 인정했다. 5.17 내란으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리행사를 비합법적으로 못하게 한 것도 신군부와 계엄당국이었으며, 시민들을 불법적으로 학살, 강간, 처형한 자들도 계엄군이었다.

시민들은 계엄군, 사실상의 반란군으로부터 자신들의 생명, 재산, 고장을 위해 무장했을 뿐, 극우 왜곡세력들이 소위 말하는 무장폭동이나 북한의 사보타주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저항권을 정당하게 행사한 몇 안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시민군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터지게도, 이 시민군을 진압한 최세창은 이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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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청부근, 전남대, 노동청등 그야말로 광주전체가 교전지역이였다.[2] 허나 후술하겠지만 시민군 자체가 급하게 조직된 단체여서 체계적이지 못하였고 아무리 군필자가 다수였다 한들 현역 특수부대까지 포함된 계엄군에 비하면 확실히 불리하기는 했다.[3] 보안사가 "편의대"라는 이름으로 조직, 보안사 소속 군장병들로 광주로 침투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내부 시설, 체포 대상자로 삼을 주요 인사들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일을 했다.[4] 19세의 청소년이었다는 증언도 있다.[5] 다만 정호용 장군의 진술 실수로 인한 트롤짓으로 인해 편의대가 주도한 일들도 꽤나 있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