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샤 미하일로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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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샤 미하일로비치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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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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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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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대
파일:AC 밀란 로고.svg

7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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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7c1d21; font-size: 0.9em"
토리노
98대



SS 라치오 주장

알레산드로 네스타
(1999~2002)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2002~2004)


세자르
(2004~2005)


시니샤 미하일로비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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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ESM.png

1998-99 · 1999-00



세르비아의 前 축구인


파일:Sinisa.jpg

이름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Siniša Mihajlović
Синиша Михајловић

출생
1969년 2월 20일
유고슬라비아SFR 크로아티아SR
부코바르스리옘주 부코바르
사망
2022년 12월 16일 (향년 53세)
이탈리아 로마
국적
[[세르비아|

세르비아
display: none; display: 세르비아"
행정구
]]
|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신체
185cm
주발
왼발
직업
축구 선수 (수비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HNK 보로보 (1986~1988)
FK 보이보디나 (1988~1990)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90~1992)
AS 로마 (1992~1994)
UC 삼프도리아 (1994~1998)
SS 라치오 (1998~2004)
인테르나치오날레 (2004~2006)
코치
인테르나치오날레 (2006~2008 / 수석 코치)
감독
볼로냐 FC (2008~2009)
칼치오 카타니아 (2009~2010)
ACF 피오렌티나 (2010~2011)
세르비아 대표팀 (2012~2013)
UC 삼프도리아 (2013~2015)
AC 밀란 (2015~2016)
토리노 FC (2016~2018)[1]
스포르팅 CP (2018)[2]
볼로냐 FC 1909 (2019~2022)
국가대표
63경기 9골 (유고슬라비아 / 1991~2003)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지도자 경력
5. 사망
6. 플레이 스타일
6.1. 프리킥
7. 코칭 스타일
8. 수상
8.1. 선수
8.1.1. 우승
8.1.2. 개인 수상
8.2. 감독
8.2.1. 개인 수상
9. 여담



1. 개요[편집]


세르비아의 前 축구인.


2. 클럽 경력[편집]



2.1. 유고슬라비아 리그 시절[편집]


집시 출신의 세르비아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인 어머니를 두었고, 그의 고향 부코바르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접경지였다. 이 때문에, 미하일로비치는 유스시절에는 크로아티아 최고의 팀인 디나모 자그레브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디나모 자그레브는 미하일로비치를 테스트에서 떨어뜨렸고, 이후 절치부심한 미하일로비치는 다른 팀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만 21세의 나이에 겨울 이적시장을 통하여 유고슬라비아 최강의 팀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입성한다. 이적 첫시즌만에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유고슬라비아 리그, 유로피언컵 우승등 더블에 공헌하였다.


파일:red-star1.png

21세의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입단 첫시즌에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하며 온 유럽의 주목을 받았던 시절[3]

다만 컵 대회에선 하이두크 스플리트에게 0-1석패로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트레블에 실패하고 만다. 그 다음 시즌에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는가 싶었지만 유고 내전이 발발하였고, 부코바르는 전쟁터가 되는등 악재가 터지고 만다. 결국 이런 상황에 미하일로비치는 1992년에 세리에로 건너오게 된다.


2.2. AS 로마[편집]


당초 유벤투스의 관심을 받았으나, 같은 유고 출신인 부야딘 부스코프가 감독으로 재임한 로마에 입단하게 된다.

이적 후 그는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지만 그가 있었던 두 시즌간 팀 리그 성적은 10위, 7위로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심지어 두 번째 시즌은 유럽 대항전 참가없이 온전히 리그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7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에 실망한 그는 1993-94 시즌이 끝나고 이적을 모색하게 된다.

이후 한참 뒤 은퇴 후 가진 인터뷰에서 로마에서의 두 시즌이 선수 생활 중 가장 최악이었다고 밝혔다. 그럴만도 한게 유벤투스의 관심을 뿌리치고 같은 동포인 감독을 따라 오게 됐는데 막상 와보니까 팀은 형편없는 성적만 거듭하니 실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취업사기


2.3. UC 삼프도리아[편집]


1994년 여름, 직전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과 리그 3위의 호성적을 기록한 삼프도리아에 입단한다. 지난 두 시즌간 로마에서 실망스러운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삼프도리아로의 이적은 그의 야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데뷔전은 8월 말 AC 밀란과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경기였는데, 그의 장기인 프리킥으로 데뷔골을 만들어냈지만,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서 실축을 하며 우승컵을 내주는 극과 극의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4시즌간 삼포도리아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며 세리에에서 수준급 선수로 거듭나게 된다.


2.4. SS 라치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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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월드컵이 끝나고 850만 유로에 라치오에 입단한다. 당시 팀에는 삼프도리아 시절 사제 지간이었던 스벤예란 에릭손이 감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는 라치오와 전성기를 함께하게 되는데, 1999년엔 라치오의 유일한 국제 타이틀인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하고 2000년엔 라치오 최초로 세리에 A코파 이탈리아 타이틀을 획득하며 더블을 달성하는데 일조하였다.

2004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는 유벤투스를 만나 승리를 거두면서 라치오에서 마지막 트로피를 거머쥐고 라치오와의 6년간 동행을 마치게 된다.


2.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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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5살의 노장이 된 그는 2004년 여름 인테르에 입단한다. 머문 시간은 2년으로 짧았지만, 세리에 A 1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회 우승을 견인하고 2005-06 시즌이 끝난 뒤 현역 커리어를 잘 마무리한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국대에서는 그가 승선할 무렵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유로 92 출전자격을 박탈당했고[4] 1994년 월드컵은 물론 그 다음 유로 대회도 유고 연방국은 출전 금지가 되었다.

1998년이 돼서야 세르비아 축구 대표팀 선수로서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을 뛸 수 있었고, 유로 대회도 2000년이 되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대회가 되었다. 그래도 월드컵은 16강 진출, 유로에서는 8강 진출에 성공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직후 선수생활 마지막 팀 인테르의 로베르토 만치니 사단의 수석코치로 들어가서 만치니가 팀을 떠날 때까지 2시즌간 함께했다.

2008-09 시즌에 세리에 A로 승격한 볼로냐 FC 1909에 부임하며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볼로냐가 17위로 강등을 겨우 피하면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09-10 시즌에는 칼초 카타니아 감독으로 부임해 리그 13위를 기록했고 2010-11 시즌에는 ACF 피오렌티나 감독으로 부임하고 첫 시즌 9위를 기록했다. 2011-12 시즌 초반 팀이 부진에 빠지면서 2011년 11월 경질되었다. 후임자는 델리오 로시.

2012년에는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지만 세르비아가 유로 2012에서 부진했고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하면서 2013년 10월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13년 11월에는 경질된 델리오 로시 감독 후임으로 UC 삼프도리아에 부임해서 12위로 2013-14 시즌을 마쳤다. 2014-15 시즌에는 리그 7위를 기록하고 유럽대항전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팀을 떠났다.[5]

2015-16 시즌에는 AC 밀란을 맡으면서 클라렌스 세도르프 , 필리포 인자기 감독을 거치면서 망가져버린 팀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결승전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잔루이지 돈나룸마를 발굴한 것도 그가 밀란 감독을 맡았을 때의 업적이다.[6]

그러나 2016년 4월 12일 미하일로비치는 팀 성적 부진의 책임으로 밀란의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7]

그리고 2016년 5월 25일 토리노와 계약 기사가 떴다. 2016-17 시즌에는 구단의 기대를 받으며 맨체스터 시티에서 조 하트를 영입하는 등 수비를 더 보강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유망주 안드레아 벨로티가 리그 26골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리그 9위를 기록했다. 2017-18 시즌에는 크게 부진했던 조 하트를 돌려보내고 PSG에서 좋은 기량을 보여주다가 경쟁에서 밀린 시리구를 불러들였다. 임대 자원인 이아고 팔케도 완전영입하면서 유럽대항전 진출을 노렸으나 주요 공격자원인 안드레아 벨로티로 여러가지 실험을 저지르면서 경기력이 눈에띄게 떨어져 경질되었다. 발테르 마차리가 부임해 선수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았지만 시니샤 때문에 토리노는 2018-19 시즌 리그 순위는 같지만 득점수가 지난시즌보다 20점 적었다.

2018년 여름에 포르투갈의 명문 스포르팅 CP와 계약했지만 프리시즌 캠프의 위치를 바꾸려고 해서 선수단의 기량에 악영향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10일만에 경질되었다.[8]

2019년 1월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필리포 인자기 대신 볼로냐를 맡았고, 전반기에 강등권에서 놀던 팀을 최종 순위 10위로 마무리시키며 매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019년 7월 백혈병이 발견되어 사임했으나, 투병하면서 감독직을 병행하기로 했다. 2019-20 시즌에는 대형 유망주 리카르도 오르솔리니를 완전영입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이외에도 유망주를 여럿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적은 리그 12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백혈병을 앓았기에 고위험군에 속해 물리적 거리두기 뿐만 아니라 팀에 대해 회의를 할 때도 화상회의로 진행 하는 등 철저히 대비하였으나, 8월 중순 경 코로나에 감염 되었다가 다행히 9월 초에 완치 했다고 한다.#

현지 시각 2022년 9월 6일, 경질 통보를 받고 볼로냐 FC 1909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5. 사망[편집]


볼로냐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백혈병 투병 중이던 미하일로비치는 이후 갑작스러운 혼수상태에 접어들어 의식 불명에 빠졌고, 2022년 12월 16일, 가족의 품에서 향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플레이 스타일[편집]



강력한 킥력과 뛰어난 정확도를 바탕으로 언제나 질좋은 롱패스를 하였으며 터프한 대인방어와 대담한 플레이, 그리고 엄청난 투지를 보여주던 그는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볼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였다.


6.1. 프리킥[편집]



데이비드 베컴, 지쿠, 주니뉴 페르남부카누와 더불어 프리킥의 달인 중 한명이며 통산 66번의 프리킥을 성공시켰다. 세리에 A에서는 통산 28골을 넣었고 이는 세리에 A 역대 최다 기록이다.


특히 1998년에는 전설이 될 기록을 남기는데 SS 라치오 소속으로 전 소속팀이었던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전/현역 축구선수들을 통틀어서 그 누구도 기록하지 못했던 세계 축구 역사상 최초로 프리킥으로만 3골을 넣는 해트트릭을 성공시켰다.#[9]


7. 코칭 스타일[편집]


한마디로 말하자면 4세 어린 로베르토 만치니라고 할 수 있다.

공격력보다는 빡빡한 수비와 단단한 중원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며 공격수의 자유도가 높은 편이다.

2019-20 시즌 볼로냐에 영입해서 육성하는 유망주들을 보면 선수육성 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수상[편집]



8.1. 선수[편집]



8.1.1. 우승[편집]







8.1.2. 개인 수상[편집]




8.2. 감독[편집]



8.2.1. 개인 수상[편집]


  • 세르비아 올해의 감독: 2019
  • 가제타 스포츠 어워드 - 레전드: 2019
  • 세리에 A 이달의 감독: 2021년 4월


9. 여담[편집]


  • 고향인 부코바르는 유고연방시절엔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세르비아의 자치주인 보이보디나의 경계선에 위치한 도시다. 그런 도시기에 크로아티아 땅에 있지만 인구의 10%정도는 세르비아계였고 미하일로비치는 세르비아계 친구들과 가까이 지냈었다. 그러나 유고 내전후 고향은 완전히 갈라졌다. 고향을 방문했더니 크로아티아 영토가 된 부코바르에서 축구팀 사진 중 자기 혼자만 구멍이 나있는 등 고향 사람들은 미하일로비치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하필이면 그 부코바르에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크로아티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하일로비치는 이로 인해 고향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렇다고 세르비아에 돌아가봐야 2등시민 취급받을 수 밖에 없었기에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은퇴할때까지 세리에 A에서만 뛰었다. 부인도 이탈리아 사람이고. 한편 딸 중 하나가 알레산드로 볼리아코와의 사이에서 2021년에 딸을 낳아 외할아버지가 됐다.

  • 성질머리가 매우 더러운 편이라 파트리크 비에이라와 경기 도중 비에이라가 미하일로비치에게 먼저 "집시 쉿"(Gypsy Shit, 쓰레기 집시라는 뜻이다.)이라고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말했다가 이걸 들은 미하일로비치는 가뜩이나 유고 내전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분노하여 비에이라한테 "네로 데 메르다"(Nero de merda, 깜둥이란 뜻.)라고 욕을 했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비에이라에게 자신은 원숭이 같은 인종차별주의적인 욕이 아닌 민족 관련 욕을 경기 도중 듣게 되어 자신도 맞불로 같은 욕을 하게 되었다고 하며# 나중에서는 서로 화해했다고 한다. 이렇게 욱하는 성질 때문에 곤욕을 많이 치렀다.[10] 그리고 경기 중에 fuck을 날렸다. 게다가 유년 시절 친구 중에 세르비아 극우파들이 있어서 크로아티아인들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크로아티아계였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상대로도 인종차별 폭언을 했던 전력도 있다.[11] 심지어 작년에는 이탈리아 판 가요무대에 즐라탄과 듀엣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며 미소를 짓는 등 그동안 미하일로비치의 모습과는 반대되는 무대를 본 팬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 참고로, 이 사건 이후 즐라탄의 변호인이 독순술 전문가까지 고용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내려고 했는데,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말해서 못 알아냈다는 얘기가 있다.

  • 감독을 맡게 된 이후에는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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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7-18 시즌 중 경질.[2] 선임 10일 만에 경질.[3] 참고로 사진에서 빅 이어의 왼쪽 하단에 누워 환호하는 앳된 선수가 바로 미하일로비치다.[4] 유고 대신에 출전한 덴마크가 유로 대회를 우승했다.[5] 하지만 리그 6위 제노아의 서류제출이 늦어지며 삼프도리아는 어부지리로 유로파리그에 진출하게 된다.[6] 돈나룸마는 20세도 안되는 나이에 유럽리그 선방률 4위를 기록했다.[7] 그런데 감독대행 브로키의 밀란은 시니샤 때보다 망가진 경기력을 보여주고 리그 7위로 밀려난채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8] 물론 이 처사는 팀내에서 총감독의 지위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이때 스포르팅 CP의 회장이 교체되면서 구조조정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9] 또한 미하일로비치는 프리킥으로 해트트릭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였으나, 터키 2부리그인 TFF 1.리그에 속해있는 발르케시르스포르의 선수 타쉬큰 찰르시가 2021년 9월 8일 아키사르스포르를 상대로 전반 41분, 45분, 후반 추가시간에 프리킥 해트트릭을 달성했다.링크[10]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가 상술했듯 자신의 고향이 전쟁과 세르비아 민병대의 학살로 인해, 크로아티아 땅이 된 이후 세르비아계를 원수취급하면서 반강제로 실향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도자 커리어로 넘어간 이후에는 성격이 상대적으로 유해졌지만 지금도 전쟁에 대한 기억은 생각하기 싫다고 한다.[11] 사실 즐라탄은 아버지가 보슈냐크인, 어머니가 크로아티아인인 보스니아 사람으로 보스니아 내전때문에 난민이 되어 스웨덴에 간신히 정착해 굴곡있는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무슬림인건 아버지의 종교를 따라서이기 때문. 정작 시니샤 본인 어머니도 크로아티아 사람인데다, 시니샤도 처지만 놓고보면 똑같이 내전때문에 고향을 잃고 해외로 나갈수 밖에 없던 강제적 실향민이라는 것이다. 후술하는 인테르 시절의 화해는 서로 같은 처지라는 걸 나중에 알았기때문이 아니었을까... 놀라운 건 즐라탄이 인테르로 이적했을 때 미하일로비치는 인테르의 코치로 있었고, 둘은 오히려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즐라탄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만큼 프리킥에 관해 많은 걸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고 한다.[12] 미하일로비치와 같은 성질의 로이 킨이 선더랜드 감독이 된 이후에도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팀성적도 안 좋았던 걸 보면 아주 대비되는 삶이다. 반면 현역 시절 성질 더럽기로 유명했던 로베르토 만치니는 성격이 많이 유해진 정도를 넘어서 발로텔리까지 품어주는 보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