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트레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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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배우.
2. 활동[편집]
50년 넘게 배우로 활동했으며, 캐서린 헵번과의 오랜 불륜으로도 유명하다.
1921년 21살 때 리폰 칼리지[1] 를 다니며 공연에 출연하던 중 토론 대회에 참여하려고 뉴욕에 왔다가 충동적으로 당시 카네기홀에 위치해있던 미국 극예술 아카데미(AADA)의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너무 못생겼다"는 이유로 영화에 잘 출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극 "The Last Mile"을 통해 감독 존 포드에게 발탁되었다. 포드와의 첫 만남에서 한 말도 "전 진짜 못생겼고, 그걸 증명해'보일' 수 있습니다"였다고. 어차피 또 실망할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 선수쳐 한 말이었지만, 포드는 출연료까지 후하게 쳐주었다. 이후 포드는 할리우드에서 트레이시의 대리 아버지 역이 되어주었는데, 한 순간 둘 사이는 차갑게 식어 수십 년 후에야 다시 협업했다.
1967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몇 달 뒤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으로 아카데미상에 9번째 후보 지명되었다.[2]
3. 주요 출연 작품[편집]
3.1. 캐서린 헵번과의 공동주연작[편집]
4. 사생활[편집]
결혼한 이후에도 사창가를 드나들고 여러 여배우와 대놓고 바람피웠다. 그러나 가톨릭 뿌리 때문에 늘 죄책감을 느끼며 결국 아내에게 돌아갔다.
아들 자니(Johnny)는 청각장애인이었고 몸이 전반적으로 매우 약했다. 트레이시가 사창가에서 옮아온 성병 탓일 가능성이 커서 트레이시는 주기적으로 아들을 생각하며 괴로워했지만 사창가에 가는 걸 그만두지는 못했다.
불륜 상대 중엔 로레타 영, 잉그리드 버그먼, 조운 크로퍼드, 진 티어니 등이 있다. 로레타 영과는 매우 진지했지만 트레이시가 이혼은 못하겠다고 해서 헤어졌다. <I Take This Woman>(1940)를 찍을 때 헤디 러마와 불륜했다.
이런 여자 문제로 아내와 공식 별거에 들어갔다가 몇 개월 뒤 다시 합친 적이 있다. 아들에게 헌신한 아내를 트레이시는 존경하고 신성시했지만, 아들이 태어난 이후로 자신에게 덜 신경 쓰게 된 걸 마땅찮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기 전 자신을 24시간 돌봐주던 아내의 모습을 캐서린 헵번에게서 찾았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알코올 의존증과 불면증을 고쳐주기 위해 노력했다. 트레이시는 헵번과 만난 후 아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아예 집에서 나와버렸다.
평생 이혼하지 않고 캐서린 헵번과 불륜 관계를 유지하면서 1952년 경엔 진 티어니와도 이중으로 사귀었다. 헵번과 사귀던 시기에 잠깐 잠자리만 가진 여배우들 숫자까지 따지면 백 단위가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성애자라는 주장이 있다.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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