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령 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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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스페인 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스페인령 서아프리카
스페인령 모로코
스페인령 사하라
이프니
케이프 주비
스페인령 기니
플라사스 푸에르테스 데 아프리카[1]
[1] Plazas Fuertes de África. '아프리카의 요새들'이라는 뜻으로 스페인이 점령한 북아프리카의 몇몇 항구, 거점들이다. 현재는 세우타, 멜리야,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가 남아있다.



스페인령 사하라
Sahara Español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2px-Coat_of_Arms_of_the_Spanish_Sahara.svg.png
국기
국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0px-Spanish_Sahara.png
1884년 ~ 1976년
위치
서사하라
수도
엘아이운
정치체제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국가원수
국왕 → 대통령 → 카우디요(총통)
언어
스페인어, 아랍어
종교
가톨릭, 이슬람
성립 이전
스페인령 서아프리카
멸망 이후
모로코, 모리타니, 서사하라
1. 개요
2. 역사
3. 참고 문헌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884년부터 1976년까지 오늘날 서사하라 일대에 존속했던 식민지이다. 1976년 스페인군이 이곳에서 철수한 이후 모리타니모로코 두 국가가 이곳을 군사점령하면서 국제 분쟁 지역이 되었다.


2. 역사[편집]


파일:스페인령 모로코.png
본토를 제외한 붉은 부분 (서사하라, 카나리아 제도, 이프니)[1]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되었다. 스페인은 베를린 회의를 통해 서사하라 지대를 할양받았다. 스페인은 군인이자 탐험가인 에밀로 보넬리(Emilo Boneli)를 보내 신속히 보자도르 곶과 블랑코 곶(Cape Blanco) 사이의 서사하라의 해안지역을 점령했다. 보넬리는 초대 총독이 되었다.

1886년, 스페인 상업지리학회의 후원아래 탐험가 줄리오 세르베르와 생물학자, 기상학자를 동반한 원정대가 900km를 가로질러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령 사하라 곳곳을 탐험,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그 지역 최초의 과학적 탐사로 간주된다.

사하라를 할양받은 스페인은 엘아이운을 건설하고 부크라 지방에 인산염 광산을 개발하여[2] 식민 통치를 펼쳤으나 현지 원주민들의 반감과 저항에 부딪혔다. 1906년 대규모 반 스페인 봉기가 일어났고 이후에도 산발적인 봉기가 발생하여 스페인의 골치를 썩혔다.[3]

1898년 미서전쟁에서 패전한 스페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사하라의 매각을 추진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헝가리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어 사하라는 계속 스페인의 영토로 남았다. 이후 프랑스이탈리아도 사하라를 팔 것을 요청했지만 스페인은 두 국가의 요청을 거절했다.

1956년 독립한 모로코는 곧바로 서사하라 및 사흐라위 거주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사흐라위 독립 세력과 연대하여 스페인령 이프니를 침공했다. 스페인은 카나리아 제도에 주둔해있던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물리쳤으나 (이프니 전쟁(Ifni war) [4]) 1958년 앙그라 데 신트라 조약으로 기존에 모로코와 서사하라간 완충지 역할을 하던 주디 곶 식민지를 내어주었다. 전쟁의 발단이었던 이프니 월경지 역시 (식민지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 스페인 직할령으로 편입되었지만 모로코와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압박 끝에 1969년 모로코에 양도되었다. 이로써 기존 모로코 내의 모든 식민지를 돌려받은 모로코는 이제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하게 된 스페인령 사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6월 스페인에 대항하여 사흐라위 부족들은 젬라 봉기(Levantamiento de Zemla)를 일으켰다. 그러나 스페인의 진압으로 봉기가 좌절되자 원주민들 중 강경한 일부가 1973년 폴리사리오 전선(جبهة البوليساريو)을 창설하였다. 폴리사리오 전선은 서사하라 원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키웠고, 1975년까지 서사하라 내륙 대부분을 영향 하에 두며 세력을 과시했다. 프랑코 정권 말기 각종 대외적 압박과 부활한 반정권 민주화운동에 의해 안그래도 국내 여론이 흉흉했던 스페인군은 이 시점에선 이미 이름만 그랬던 스페인 외인부대를 주축으로 싸웠지만 낮은 사기와 지형의 문제로 인해 폴리사리오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후일 테크니컬이란 이름으로 불려진 중화기 탑제한 민수용 트럭 중심의 고속 사막기동전이 크게 재미를 보며 경험을 축적한것도 이 시절. 반면 스페인의 입장에선 누가봐도 딱 로컬 베트남 전쟁에 끌려왔던 장병들 중심으로 해시시[5]를 비롯한 마약이 퍼지며 현재까지도 골치아픈 사회문제의 한 장을 열었다.

그러나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자 스페인의 권위주의 통치도 끝나게 되었고, 모로코는 녹색행군을 실시하여 스페인을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스페인은 서사하라의 영유권을 주장하던 모로코, 모리타니와 함께 1975년 11월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하여 식민 지배를 종료하고 서사하라에서 철군하였다. 폴리사리오 전선은 이에 반발하여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고 알제리의 지원을 받아 무력 저항을 본격화하였다.[6] 폴리사리오의 게릴라 활동과 남부 흑인계의 내부 반발로 모리타니는 1979년 5월 평화협정을 맺고 서사하라 남부에서 철수했다.[7] 그러나 모로코는 서사하라 곳곳에 모로코 장벽이라 불리는 거대한 모래 장벽을 쌓고 폴리사리오 전선과 장기분쟁에 돌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경과는 서사하라 문서 참조.


3. 참고 문헌[편집]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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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디 곶 식민지는 정식으로는 모로코 북부와 함께 스페인의 모로코 보호령에 속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스페인령 사하라에서 관장하였다.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으로 여겨지던 곳이긴 하다[2] 화학비료의 연료가 되는 서사하라의 인산염 매장량은 세계적 수준으로 21세기 현재까지 인류는 인산을 대체할 만한 물질을 찾아내지 못했다. 나우루 같은 국가는 인산 광물인 인광석으로 한때 최상위 부국이 되었을 정도.[3] 대표적으로 샤이크 마 알아이아인의 봉기.[4] 1920년대에도 비슷하게 모로코 원주민 게릴라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들고 일어났고, 프랑스는 반란의 불씨가 자기들 식민지인 프랑스령 모로코에도 퍼질까 염려하여 스페인군을 지원했음에도 스페인군은 수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후인 1950년대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다.[5] 아프간전에서도 아프간군이 이런 마약을 피운다. 아프간군이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원인이다.[6] 다만 원래는 스페인은 폴리사리오전선한테 권력을 이양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모로코가 압박하고 오래지속된 폴리사리오의 게릴라전등에 의해 지쳐서 대충 철수한 것이다.[7] 당시 모리타니 정계의 무어인 중에는 서사하라 원주민에 호의적인 세력도 많았고, 모리타니 수도 누악쇼트까지 폴리사리오 전선의 활동이 활발해진것도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