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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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공화국
República Española
Segunda Repúb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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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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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4월 14일 ~ 1939년 4월 1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스페인 왕국
프랑코 정권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
국가
리에고의 노래(El Himno de Riego)
위치
오늘날의 스페인, 아프리카 식민지
수도
마드리드(1931년~1936년)
발렌시아(1936년~1937년)
바르셀로나(1937년~1939년)
정치체제
공화제(이원집정부제)
국가원수
대통령
주요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
마누엘 아사냐
주요 총리
호세 히랄
후안 네그린
언어
스페인어
지역 공동 공식언어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종교
가톨릭(다수 종교)
인구
약 24,000,000명(건국 당시)
약 26,000,000명(1936년)
민족
스페인인
주요사건
1931년 공화정 설립, 공화국 헌법 발표
1933년 우파 연정 집권, 카사스비에하스 사건
1934년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
1936년 좌파 연정 집권, 스페인 내전
1939년 내전 패배, 멸망
통화
스페인 페세타

1. 개요
2. 역사
2.1. 설립
2.2. 이념 충돌
3. 제2공화국 체제의 이념 대립
4. 평가
4.1. 긍정
4.2. 부정
4.2.1. 공화주의 정권의 무능
4.2.2. 인민전선 정권내 정파 갈등 문제



1. 개요[편집]


보르본 왕조스페인 왕국을 무너뜨리고 1931년 탄생한 스페인 역사상 두 번째이자 현재로써는 마지막 공화정 체제.

알폰소 13세가 해외로 망명한 이후 공화주의자들이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탄생했다. 새로 탄생한 공화정은 토지 개혁과 같은 일련의 사회 개혁 작업을 시도했지만 좌우파 모두에게서 거센 반발을 사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6년 2월 총선에서 간발의 차로 패배한 우파 국민전선의 불만을 등에 업고 1936년 7월 스페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의 쿠데타는 좌우파가 총결집한 끝에 3년에 걸친 치열한 스페인 내전으로 발전했고 결국 1939년 4월 스페인 제2공화국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에 패배하고 멸망한다. 이후 스페인 전역을 접수한 프랑코는 총통(Caudillo)에 올라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내전에서 살아남은 잔존 공화파 세력은 프랑스 파리로 망명해 그곳에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스페인 제2공화국을 계승한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는 프랑코가 사망하고 국왕으로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1977년 자발적으로 해체된다.


2. 역사[편집]



2.1. 설립[편집]


스페인은 자유와 정의의 체제하에서 조직된, 모든 계급의 노동자들의 민주공화국이다.

- 스페인 제2공화국의 헌법 1조 1항.

192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은 1929년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붕괴되고 만다. 이후 새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931년 4월 12일 스페인 전역에서 지방 자치 단체 선거가 열렸는데 여기서 공화주의 세력이 대승을 거둔다. 국왕 알폰소 13세는 망명을 떠났고, 퇴위 직후 주요 도시의 거리에서는 군중들이 "공화국!"을 외쳤다. 선거 이틀 후인 4월 14일 스페인 제2공화정이 공식적으로 선포된다. 가톨릭 신자이면서 중산층을 대표하는 중도세력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총리직에 올랐고 일련의 토론을 거쳐 같은 해 12월 헌법이 개정된다.

새로운 헌법을 통해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귀족들이 지니고 있던 각종 봉건적 특권은 철폐되었고 스페인 사상 최초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또한 새로운 헌법은 공화파와 여러모로 불편한 관계였던 스페인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는 것에도 초점을 맞췄다. 정교분리를 목표로 교회의 재산은 정부의 감시를 받았고 가톨릭 사제들이 교육을 맡는 것 역시 엄격히 금지되었다. 심지어 가톨릭 사제들에게는 스페인의 시민권을 행사하는 것조차도 제한(...)하는 조치가 명시되어 교황 비오 11세가 격렬하게 비난할 정도였다. 그리고 스페인 개혁을 위한 결정적인 움직임으로 새로운 헌법은 공공재, 토지, 은행 등을 국유화하는 절차를 마련할 것을 명시했다.


2.2. 이념 충돌[편집]


가톨릭 반격의 선봉은 가난해진 자유주의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복지와 교육 기능을 담당하게 된 수도회들이 맡았다. 왕정복고기에 여자 수도회는 세 배, 남자 수도회는 열 배로 증가했다. 수도회의 괄목할 성장은 자유주의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수도원, 수도회들과 예수회의 교육 사업을 반동적인 교회 중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았다. 자유주의적 반교권주의자들과 가톨릭 교도들은 모두 음모론에 빠져들었다. 예수회가 교황청의 비밀 군대였으며, 가톨릭 교도들은 프리메이슨이 자유주의 질서를 파고들 것이라고 보았다.

-Raymond Carr 외 지음. 김원중·황보영조 옮김. 《스페인사》SPAIN: A HISTORY. 290쪽.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에 지주층, 가톨릭 세력, 보수파 지식인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공공연히 국가의 교회 장악 움직임에 반발했고 지주층은 조세 피난처, 탈세 등의 방식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도 나름대로 새로운 헌법과 공화국 정부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불만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잦은 충돌을 빚어 냈고 1932년부터 1934년에 걸쳐 스페인 전국의 성당이 방화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토지 개혁을 실시했는데 농민과 지주 모두의 눈치를 봐야 했던 정부는 지주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절충안을 선택했지만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불만만 더 크게 만들었다. 토지 개혁을 놓고 정국이 갈리던 상황에서 1933년 총선이 시행되었고 여기서 보수주의 세력들이 뭉친 스페인 자치 우익연합(CEDA)이 승리를 거둔다. CEDA의 지지를 받은 공화주의 우파 정권은 일련의 토지 개혁을 모두 보류했고 덤으로 지방자치제를 축소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해 카탈루냐는 유이스 콤파니스를 중심으로 독립파들이 카탈루냐국을 수립했고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아나키즘,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킨다.[2][3] 그러나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고[4] 우파 정부는 지방 자치 폐지, 토지 개혁 중단과 같은 정책을 써서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좌파 공화주의자들에게 원성을 샀다.


2.3. 스페인 내전[편집]


이러한 정책에 이를 갈던 좌파 세력들은 '인민 전선'이라는 이름으로 1936년 총선에서 대단결을 이룬다. 원래 이 당시 스페인 좌파들은 아나키즘, 공산주의,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공화주의(급진적 자유주의) 등으로 분열되어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특히 좌파 중 가장 비중이 컸던 아나키즘 노동조합 CNT의 경우 아나키스트답게 선거 불참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좌파 정권 창출이 힘들었다. 그러나 중도우파 정권 3년 동안 안달루시아 일대의 아나키즘 소작농 공동체들이 지주들에게 크게 두들겨 맞고 이것에 반발해 들고 일으킨 아스투리아스 반란도 작살을 내면서 다른 정파들과 타협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으로는 우파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인식이 CNT 내에 퍼지면서 결국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해서 아나키스트까지도 총괄한 좌파 연립 정권인 인민전선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로 CEDA를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도 반혁명국민전선을 결성했지만 공화주의 우파들의 미적지근한 반응과 파시스트(팔랑헤)의 반대로 흐지부지하게 끝났다.[5]

그리고 이 단결이 결실을 이루어 인민전선은 집권을 이루어낸다. 인민전선 내각은 정치범 석방, 농민 보호(토지 개혁, 조세 개혁, 지대 인하 등), 노동자 권리 증진(임금 인상, 노조 설립 등)과 같은 정책을 다시 펼치면서 개혁에 시동을 건다. 하지만 인민전선에서도 공화주의 좌파같은 온건파들만으로 내각이 구성되었고 라르고 카바예로 같은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정권에 참여를 거부하는 등 선거 후에는 연합이 순탄하지 않았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자신이 이끌던 PSOE 좌파의 입각을 막을 뿐만 아니라 프리에토 계열인 PSOE 우파의 입각도 방해했다.

하지만 가톨릭/지주/군부가 주축이 된 극우 세력들은 중도좌파 정부의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노조를 향한 백색테러가 난무했고 군부에서는 공공연하게 쿠데타 음모가 튀어 나왔으며 지주와 가톨릭 교회는 정부의 개혁에 대놓고 '배째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스페인 혁신의 칼보 소텔로와 팔랑헤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공연히 애국세력들의 쿠데타를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왕당파(RE: 에스파냐 혁신) 지도자였던 호세 칼보 소텔로를 공화국이 새로 창설한 헌병군 조직이었던 돌격 경찰대(Guardia de asalto) 대원들이 암살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구실로[6] 1936년 7월 17일 군부가 대대적으로 대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스페인 내전이 터졌다.

반란군에 가담한 인물 중에는 나중에 스페인의 독재자 자리에 오르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시 있었는데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코가 반란군에 가담한 것에 대해 크게 놀랐다. 본래 인민전선 정부 역시 군부의 쿠데타를 우려해 쿠데타를 일으킬 것 같은 성향의 장군들을 모두 오지로 좌천시켜버렸다. 이때만 해도 프랑코는 호세 산후르호, 마누엘 고데드, 호세 안토니오 데 리베라 등과 같이 공공연하게 극우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스페인 군부 내에서 그나마 정치적인 발언을 안 하고 자기 하는 일만 묵묵히 하였으며,[7] 쿠데타 직전 흉흉한 군부의 분위기에 대해 지금 당장 조치가 필요하다면서 필요하다면 자신도 도울 것이라며 정부에 밀서를 보낼 정도였기에 그런 프랑코가 반란군에 가담한 소식을 듣고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민전선 정부는 소련국제여단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버텼으나 서방 국가들의 외면과 고질적인 내분,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등 파시즘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반란군에게 열세에 몰렸고, 3년의 걸친 피비린내나는 내전 끝에 결국 1939년 프랑코에게 항복, 제2공화국은 패망한다.


3. 제2공화국 체제의 이념 대립[편집]


스페인 좌파 공화주의자(IR, UR)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반면 우파 공화주의자(PRR, DLR, PRC)들은 가톨릭/왕당파와의 반목으로 서로 협력하지 못했다.[8]

제2공화국 헌정 질서는 내전 이전에는 극단적인 좌우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우선 제2공화국 정부를 세운 공화파 내부에도 자유주의/공화주의를 대표했던 양대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DLR 계열)나 마누엘 아사냐(IR 계열) 같은 인물들도 많았고 이들은 당연히 본격적인 좌익 인민 공화국 정권을 기대했던 사회주의자들과 크게 충돌했다. 또한 공화국 초창기(1931년~1933년)에는 AR의 아사냐 정권, 그리고 그후 2년간의 우파 정권때는 PRR의 레룩스 정권, 인민전선 총선 승리 이후에도 IR이 정권을 주도해서 온건한 공화주의적 통치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머릿수로만 따지면 좌파 내에서 가장 강력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무정부주의자 CNT 입장에서는 중앙 권력과 국민국가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했다. 이들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해봐야 큰 의미가 없다는 입장에서 다른 좌파, 공화파 정치 세력과 연대도 지극히 제한적으로 하며 1936년 내전 발생까지 그대로 제 갈 길 갔다. 게다가 무정부주의자들을 차치하고도 PSOEPOUM, PCE, UGT 등의 사회주의 좌파들 역시 서로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PSOE 내부의 프리에토를 필두로 한 온건파[9]와 라르고 카바예로의 강경파[10]간의 분쟁이 극심했으며 그와중의 공식적 산하 노동조합인 UGT와도 파벌투쟁이 지속되었다. 트로츠키주의과 좌파공산주의의 연합체인 POUM과 스탈린주의였던 PCE의 공산주의 내부 투쟁의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아울러 인민전선을 비판한다고 모조리 수구 꼴통으로 몰고 가기는 어렵다.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프랑코 정권이 굉장히 잔인한 정부 체제이기는 하지만 당시 스페인인들 전부가 인민전선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제2공화정 당시에도 1933년에서 1936년까지는 우파 정부가 다스렸고 공화주의 우파 계열은 1936년 선거에서 공화주의 좌파와 CEDA에게 표를 빼앗겨서 절멸되기 전까지만 해도 공화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심지어는 동시대 스페인 극우 중 프랑코와 같이 국가군에서 싸운 인물들 중에서만 골라도 실패한 바르셀로나의 쿠데타 사령관이었던 마누엘 고데드, 그나마 스페인 군인들 중에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독일군에게 칭송받은 후안 야구에, 세비야를 먹고 남부에서 혼자 동네 왕초 노릇하다가 프랑코에게 깨갱한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11] 등도 '좌익은 당연히 때려잡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왕정까지 복고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할 만큼 왕정이란 기관 자체에는 딱히 애착이 없었고, 팔랑헤 사상가 오네시모 레돈도[12], 라미로 레데스마[13] 같은 본격 사상적 파시스트들에겐 왕정도 '퇴폐하고 썩어빠진' 청산해야할 적폐란 입장이었다. 공화주의 헌정 체제를 선호했던 우파 인사들 또한 충분히 있었다. 스페인 정치에서 공화주의가 좌파의 전유물이 된 것은 스페인 내전과 공화주의를 불온 사상으로 보고 말살하고자 했던 프랑코 통치 이후의 유산이다.


4. 평가[편집]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스페인 현지에서는 이를 무력으로 뒤집어엎은 프랑코 정권에 대한 평가 및 현재의 입헌군주국 체제의 정치대립과도 연관되어 민감한 주제이다. 스페인 주류 정치권에서 여전히 공공연하게 공화국을 주장하는 세력을 크게 공산당, 당 청년 조직 등 사회노동당 좌파, 2010년대 이후 포데모스 같은 신좌익 풀뿌리 정치세력으로 본다면, 프랑코 정권과 여기서 정권을 계승받은 복고 보르본 왕정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고, 제2공화국 체제를 '폭력으로 부정당한 스페인 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로 추앙하는 세력도 민주화 이래 항상 전체 민심의 1/4에서 반정도로 큰 세력을 유지해왔다. 이런 역사적 헌정, 정통성 논쟁에 별로 관심 없는 일반 주류 민심은 왕가가 뭔가 대중 마음에 드는 일 할 때는 근왕 정서가 높아지고, 반대로 경제도 나쁘고 민심이 험악한 상태에 전왕 후안 카를로스의 사냥사건과 비자금 스캔들 같은 왕실 관련 사건이 터지면 다시 공화주의 정서가 올라가는 들쭉날쭉한 성향을 보인다.

프랑코 정권의 구국의 쿠데타론, 내셔널리즘과 교권주의의 혼종을 변화없이 그대로 주장하는 우익들은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주류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생생히 발휘했다. 하지만 점점 세월이 지나고 스페인도 서방세계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합류하면서 극소수로 전락했다. 스페인 주류 정계에서 최후까지 프랑코 정권 관료의 시각과 입장을 답습하던 원로 정치인 마누엘 프라가가 2012년 노환으로 죽은 이후 딱히 정치적 후계자도 없다. 또 옛날 같으면 스페인군, 가톨릭 교회, 지역 토착 전통주의 정치세력 같은 기관들이 스페인 우파의 파시즘과 근왕주의 아젠다를 젊은 층에게 전달했겠지만 21세기인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현대 스페인군의 젊은 사병들 태반은 '그리스도 왕과 신성한 스페인 군주정' 같은 소리에 딱히 감흥이 없는 그냥 월급 벌고 스페인 시민권 따러온 라틴아메리카 출신 이민자 병사들이 태반이고[14], 가톨릭 교회는 동네 노인들 로타리 클럽이요, 시골 전통주의 자치단체들은 젊은이들 전부 다 대도시로 빠지면서 노인들과 같이 늙어버렸다.[15]

따라서 출신배경으로 보면 옛 독재정권 내 기술관료, 온건파들의 정치적 후예지만, 파시즘과 2차대전 당시 히틀러, 무솔리니 흔적 묻은 건 질색하며 부정하는 나머지 서방세계의 눈치도 계속 봐야하는 주류 인민당 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놓고 옹호도 부정도 할수 없는 제2공화국-내전-프랑코 독재로 이어지는 스페인 근현대사 언급하는거 자체를 너무너무 불편해한다. 스페인 내전 자체가 터지자마자 전세계 반파시스트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고, 클레멘트 애틀리, 빌리 브란트, 요시프 브로즈 티토, 모리스 토레즈 같은 전후 유럽 정치권을 주름잡은 동구권의 공산주의 정치인들과 서유럽의 온건좌파 사민주의 정치인들 양쪽 모두에게 있어 스페인 내전은 당시 국제여단 모집을 지원하거나, 친공화파 언론에 글을 쓰는 등 전쟁 이전 '순수한 청년 혁명가' 시절을 보냈던 집단적 경험이 있어 프랑코 정권에 대한 철저한 혐오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냉전기 내내 서방의 주류 우익은 점차적으로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고 서방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공산권과 맞선 명분싸움에 있어 항상 약점거리가 되므로 골치아프고 외면하고 싶은 문제로 취급했다. 따라서 1955년 UN 가입 때도 동구권의 가열찬 비난과 격렬한 논쟁을 겪어야했고, 유럽연합(당시에는 EC), NATO 같은 진짜 핵심적인 서방권의 국제조직은 끝까지 프랑코가 살아있을 땐 가입 초청 입벙긋도 하지않았다.

반대로 유럽의 자유주의/사회주의 계열의 중도나 좌익 세력에게 스페인 내전은 사실상의 성전으로 아직까지도 자주 언급되며 회상되는 사건이다.

델머 버그씨 같은 사람들을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이미 망한 대의를 위해 싸우는 몽상적인 이상주의자로 비난할수도 있다. 그리고 하필이면 버그씨 같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국가 권력에 종속시키며 인류에게 이득보다 해악을 훨씬 더 많이 끼친 공산주의란 사상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고백하건데, 12살 무렵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읽은 이후 난 이 사람들(국제여단원)들이 스페인에서 보여준 희생과 용기에 대한 존경심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 서고에서 읽은 이 책은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고, 미국 중서부에 나고자라 스페인에서 싸우다 죽은 이 책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 캐릭터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로버트 조던은 결코 기계적인 일차원적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싸우고 있는 명분에 회의를 품기도 하고, 완장질하는 소련군 고문들을 불신하기도 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책 마지막에서 부상당한 조던은 자기가 스페인에서 싸우다 죽게되는 이유를 고민하다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특정한 이데올로기 따위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같이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스페인 민중을 위한 원초적인 사랑을 위해 싸웠던 것이라고 말이다... (중략)

나는 버그씨가 믿었던 사상에 결코 찬동할수 없고, 그가 주장했던 믿음 대부분에 반대할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밖 세상에 대해 가졌던 사랑과 뜨거운 열정, 이타심 만큼은 나도 공유하고 믿을수 밖에 없다.... 이 종은 바로 버그씨를 위해 울렸던 것이다.

미국 공화당 소속 보수 우익 사실 영어로 하면 다 똑같은 Republican이라 그렇다더라.거물 정치인, 존 매케인, 한 공산주의자를 추모하며. 2016년 사망한 최후의 미국인 국제여단 링컨 대대원 델머 버그 부고문


심지어 '유럽 빨갱이'들의 사상 놀음에 대해 예나 지금이나 혐오하는 분위기인 미국에서도 미국 내 가톨릭 우익 정치세력을 제외한 주류 보수 우익은 프랑코 정권에 대해 "우리 개새끼긴 한데 개새끼"란 껄끄러운 인식을 공유하고, 스페인 공화국의 명분상 정통성은 인정하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미국의 전통적인 주류 보수 프로테스탄트 우익들은 스페인 내 좌파 '빨갱이'들을 싫어했지만, 대놓고 귀족주의, 교권주의, 민주주의 부정을 주장하는 스페인의 보수 우익들 또한 바로 본인들 조상들이 유럽을 떠나면서 그렇게 욕하고 부정한 사상적으로 상종 못 할 건 마찬가지인 부류였다.[16] 미국은 2차대전 이후 파시즘과 나치에 대한 혐오와 여기에 맞선 싸움을 애국주의의 일부로 선전하면서 서방권에 포섭은 해야하지만 동구권 상대로 영원한 유럽 내 서방진영의 명분상 혹덩어리였던 프랑코 정권을 굉장히 불편해했다. 이런 복잡한 역사적 문맥 때문에 스페인 내외 양쪽으로 극우와 선을 긋는 자유시장 기반 주류 보수 우익의 제2공화국과 스페인 내전에 대한 역사적 태도는 주로 아예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피할수 없는 문맥에서는 공화국도 저지른 인권 탄압, 비민주성을 지적하며 공화국도 문제 많았다란 소극적인 양비론적 비판이 주류적 자세이다.

4.1. 긍정[편집]


제2공화국 정부는 다양한 정파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뭔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었고 이 다양한 정파 중에서는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니세토 알칼라사모라와 마누엘 아사냐, 사회노동당 당수로서 민주적 과정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며 카바예로의 파벌과 대립한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당시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인 유이스 콤파니스[17] 같은 진실성 있는 민주주의자들도 충분히 있었다.[18] 2공화국 체제를 공공연히 뒤집고자 했던 극우 파시스트 국민 진영이나 프랑코 정권보다는 훨씬 나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이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불안정은 사실 전간기 유럽 국가 치고 영국 빼고 내전을 우려할 만큼 정치적 테러와 극단주의, 이념적 증오가 팽배하지 않았던 나라가 없었고 영국도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심지어 바로 그 의회 자유민주주의의 고향인 영국, 미국의 정치적 상황도 대공황의 그늘아래 오스왈드 모슬리, KKK 같은 각종 극단주의적 정치 집단이나 휴이 롱 같은 선동가들이 판치며 극심한 정치적 불안을 겪던 시대였다. 이런 세계적 측면을 고려할 때 프랑코 정권이 처음 발제하고 현대 스페인의 보수 우익이 계승한 스페인 제2공화국은 이러나 저러나 망할 수밖에 없었던 예정된 실패였다는 관점은 스페인 사회 내부적으론 실제로 보수우익이 저지른 쿠데타와 내전, 독재, 학살에 대한 사후 자기변명적 성격이 짙고, 외부의 시각에선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좌파, 그 중에서도 카바예로[19]와 같은 급진파들의 반교회적 개혁은 중도우파 지식인들과 평범한 민중들도 당혹시킬 정도이기는 했다. 그래도 제2공화국은 유의미한 민주주의와 세속주의 헌정 질서에 대한 실험이었고 공화국 이념의 근대성은 우파 내에서도 내전 발생 직전까지도 받아들였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좌파 내에서는 CNT가 거의 독단적으로 19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을 일으켰고 라르고 카바예로같은 스페인의 레닌은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좌파 중에서도 비교적 중도적인 이들 대다수는 이를 부정하고 정부 진압에 협력했다. 반면 극우파 세력은 군부, 가톨릭 교회, CEDA, 알폰소 왕당파, 카를로스파, 팔랑헤 불문하고 다수의 지지를 얻어 성립된 정부[20]를 무력으로 뒤집는데 반발하지 않았다. 또한 내전 직후 장악한 쿠데타 세력에게 넘어갔던 갈리시아, 카스티야 라 비에하 같은 지방에서는 전쟁을 거의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시아의 예를 들면 내전 발생 후 5년 만에 공식적으로 처형한 것만 3천 2백명, 비공식적으로 살해한 수만 4천 명이 넘었다. 굳이 이 지역들의 통계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친프랑코 성향 인사들이 종종 가지고 오는 주된 레퍼토리가 아래 항목에서 서술된 "누가 이겨도 내전은 터졌고 좌파가 이겼으면 그만큼 심했을 것이다!"인데, 파시스트 진영이 벌인 정치적 학살이 그리 순진무구하게 '자위적 성격'이라면 애초에 내전이고 할것도 없이 거의 무혈점령한 지방에서도 수천 단위의 학살이 벌어진거 자체가 말이 안된다.

적색테러는 공화파 내부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테러를 주도한 CNT-FAI와 POUM 및 PCE 내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으며 아사냐, 프리네토, 네그린, 디아스, 이바루리, 올리베르와 페스타냐 등의 유력 정치인들은 학살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에 비해서 백색테러는 규모와 질은 둘째치고 국민파 내부에서 반발은 커녕 오히려 정화을 더 조장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스페인 내전의 성격에 대해선 학계 내에선 이미 합의가 이루어져 있으나 대중에선 그렇지 않다.[21]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 역사학 교수 앙헬 비냐스*


스페인의 현대사에서 제2공화국과 프랑코 정권의 관계를 '쿠데타와 그로 인해 중단된 민주주의'로 보는 데에는 거의 학계의 합의가 이루어져왔다. 기존 학계 내에서 스페인 내전의 해석에 대해 가장 우파적인 자세를 취하는 스텐리 페인, 줄리어스 루이즈[22] 같은 학자들이 그나마 인민 전선도 알고 보면 나쁜 짓 많이 했다 정도의 수준에서나 반박한다. 현재 활동하는 학자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골적으로 친프랑코 사관을 주장하는 피오 모아 같은 경우 학계의 야인[23][24]이고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 같은 극우파 학자들은 프랑코 정권이 살아있을 때나 정권의 공식 사관 역할을 했지 민주화 이후에는 남아 있는 프랑코 추종자들 상대로만 글쓰고 팔아 먹는 자기들만의 리그다.

사회적 기반 측면에선 아무리 민주주의적 절차가 난항을 겪었다 한들 1930년대는 민주주의란 제도 자체가 성숙하지 않았던 시대였고, 시대적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 제2공화국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이었던 민주 정부는 아니었다. 공화 진영과 쿠데타군 양쪽 모두 현대 민주주의와 관계 먼 인간들도 많았지만, 전자의 경우 반대로 정치적 테러, 물리력을 통한 헌정 질서 위협 같은 근본적인 방법론 면에서 진실성있는 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도 강했기에 34년 좌파만의 독단적인 무장 봉기는 아스투리아스의 CNT와 UGT 좌파만의 지역적 반란으로 끝난 반면, 우파의 36년 쿠데타는 전면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좌파와 인민전선 진영의 통합성이 너무 약했다거나 기반이 취약했다는 것은 능력의 문제지 도덕, 명분의 문제가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누가 선빵 때렸냐라는 문제를 무시하고 '알고보니 이만큼 공화파도 못한거 많더라'라는 논리를 펴는 것은 쿠데타 진영의 원죄를 은폐하는 주장이다. 권위주의적이라는 스탈린주의자 스페인 공산당이 전쟁 중간에 막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제2공화국이 처음부터 망할 것이 예정되었기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구국의 쿠데타' 사관의 본질은 피해자 탓하기에 불과하다. 공산당이 권력을 얻어가는 과정을 구축한 것은 국민진영이 일으킨 내전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프랑코 정권의 개국공신이자 친척이며 권력 2-3위를 왔다갔다한 라몬 수녜르만 하더라도 프랑코가 죽은 후 쓴 회고록에서 승전 이후 정권의 숙청, 테러, 보복 원칙은 "사법 정의를 머리부터 거꾸로 뒤집으며 ("justicia al reves")" 의도적으로 오히려 당시의 '관군'을 '반란군' 취급하는게 국민진영과 프랑코 정권 초기의 사법 정책이었다고 근본적인 프랑코 정권의 정통성 문제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바가 있다. 실제로 집행 과정에서 아예 형식적인 법적 절차도 생략하고 그냥 막무가지로 총살한 경우를 제외하고 프랑코 정권 아래 법원에서 '사법처리'된 구 공화파 정치범, 포로들은 전부 군사 반란죄란 국가군 본인들이 저지른 죄명 아래 처벌되었다.

즉, 정상적인 국가의 적법성, 정통성 논리에선 도저히 답이 안나오니 프랑코 정권의 지도자들은 아예 마치 스페인 주류 보수 우파도 공화정 체제를 인정했던 1931-36년 사이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양 스페인 국체의 주권은 당대 실존했던 의회 정치, 민주 정권, 민의 등등이 아니라 프랑코주의자 본인들에게만 통하며, 개념 자체도 지극히 봉건적인 가톨릭 교회, 에스파냐 군주정으로만 설정하고 마치 공화정의 존재 자체가 스페인 민족에 대한 반역이었다고 우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프랑코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내전 당시 공화파가 "제 2의 레콘키스타를 주장하는 양반들이 바로 그 무어인 용병들을 대리고와서 스페인 민중을 쳐죽이는 작태가 어딨냐"가 항변하니 끌고 온게 악명높은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의 '좌익은 유전병이고 따라서 비국민' 이론이다. 애초에 본인들도 막상 민주주의란 정치의 장에선 아무리 두들겨패도 대중 장악력에서 좌익에 비해 떨어지는 현실을 마주하기 전까진 카를리스타 같은 아예 협상 자체가 불가능한 우익 내 소수파 원리주의자들 제외하곤 주류 우익들도 받아들였던 공화국 헌정을 뒤집는덴 결국 이런 지극히 파시스트스러운 궁색하기 짝이 없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관점에선 씨알도 안먹히는 논리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마누엘 프라가 사후 스페인 정계 내에서 프랑코 정권의 입장을 대표하는 후계 세력도 안 생기고, 현대 스페인 주류 보수 우익은 아예 이 주제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다. 정권간의 차이점을 비교하자면 제 2공화국 정부와 인민전선 내각은 오히려 아스투리아스, 카사스 비에하스 같은 사건에서 주로 CNT, 혹은 라르고 카바예로 계열 UGT 급진파 과격파에게 제동을 걸으며 우파 진영과도 협상을 하려고 했던반면, 쿠데타군 연합 국민전선은 본인들도 상당히 극심한 내부적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민주주의, 단일 종교 교권주의가 핵심일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권이란 점이 핵심적인 차이이다. [25]

극우파의 쿠데타와 파시스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서방 각국은 프랑코의 승리가 절대적이었던 1939년 2월 전까지도 공화국을 정통으로 인정했다. 1936년 대선 당시에 CEDA의 기권에도 불구하고 PRR, PCR 등의 공화주의 우파 정당은 인민전선-마누엘 아사냐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했다.[26] 쿠데타 당시와 이후에도 미겔 마우라[27] 같은 사람은 공화국을 지지했다.[28] 다만 알레한드로 레룩스[29][30]가 초기에 쿠데타를 찬양하는 등 공화주의 우파 세력은 공화국 지지에 대한 명확한 일관성은 없었다. 알칼라사모라 역시 인민전선 민병대에 의해서 집이 털리자 해외에 그대로 있었다. 미겔 마우라 같은 경우는 아나키스트들이 살해하려는 것을 프리에토가 보호한 이후로는 네그린이 제시한 평화협정 13조를 지지하는 등 끝까지 공화정부 편에 섰다. 그 외에도 레룩스나 알칼라사모라, 심지어 힐 로블레스조차 프랑코 체제를 거부해서 망명을 떠났다. 총선 당시의 총리였던 바야다레스 역시 공화파를 지지했다. CEDA 내의 일부 중도우파 정치인들도 공화정부의 편에 있었으며, 쿠데타 당시 프리에토 등의 중도좌파 정치인들과 좌우 연립정부를 세우려고 했었다. 즉 중도우파 내부에서도 상당수는 공화국을 지지했으며, 2차대전처럼 극우와 극좌+자유민주주의(중도좌우파 포함)의 대결로 봐야 한다.


4.2. 부정[편집]


스페인 제2공화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학자들[31]도 어느 정도 있다. 일종의 수정주의(Revisionism)인데, 이에 대해서는 신프랑코주의라고 폄하하는 입장[32](orthodox)이 대부분이다.[33]

그리고 굳이 오늘날 스페인 왕국 헌법 체제 입장에서 반드시 스페인 제2공화국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할 실익도 없다. 오늘날 스페인 왕국의 민주화 이행과정에서는 국민진영계열 우파들 중 온건파[34]들의 역할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공화국 계승 여부보다 1976~78년 이행기 과정에서 민주적 국민투표를 거쳐 나름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것[35]이 온건 우파의 주장의 근거다. 또 50년대까지는 스페인 제2공화국 망명정부가 국내외적으로 나름의 영향력을 확보했지만 프랑코 정권이 국제사회로 복귀하고 스페인 공산당 같은 주요 정당도 제2공화국 망명정부 아래서 활동하기보다 그냥 독자적으로 지하에서 저항활동을 추진하게 되면서 망명정부에 대해 연연하지 않게된 것도 이유가 된다. 다만 오늘날에는 화해의 관점에서 제2공화국이나 프랑코 정권 둘 중 누가 정통이냐 논쟁은 극단적인 경우 아니면 그냥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제2공화국 수립 90주년 기념식 때는 극우정당인 VOX 빼고 온건 우파이자 구 프랑코 정권 인사가 창당한 PP도 참여하거나 아니면 프랑코를 제2공화국 정부와 별개로 스페인 대법원에서 1936년 10월 1일 훈타에서 선출된 이래 '국가원수'로 규정한다던가 하는 것 등등이다. 판례에서 명시적으로 규정한 경우 추후 판례나 근거법 문언 등이 바뀌기 전까지는 다른 사안에도 적용되고 적어도 스페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그에 정면으로 반하는 판단을 하지 않는다.[36]

그리고 스페인 제2공화국은 본질적으로 현행 스페인 헌정 체제와 어긋난다. 현행 스페인 헌정 체제는 제2공화국을 무력으로 뒤집어엎은 프랑코 정권을 개혁해 탄생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내전기나 프랑코 정권 시절의 인권 침해나 전쟁 범죄를 현행 헌정체제 하에서 법을 통해 규정하는 것이 아예 모순은 아니나, 제2공화국 체제의 정통성 자체를 현행 스페인 헌법의 차원에서 긍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법철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1936년 쿠데타같은 본질적인 정치적 격변은 법적으로 규정이 불가능하다.[37] 정당성 자체에 대한 법 차원을 떠난 논쟁이라면 모를까 1936년 7월 쿠데타를 '적법한' 공화정부에 대한 '위법'적인 쿠데타라고 규정하는 것은 오늘날 법체계 기준에서는 의미가 없고,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제2공화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학자들이라도 일반적으로는 프랑코 정권을 더 정당하다고 보거나 더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Payne 같은 사람도 정통성이나 도덕성에 있어서 공화국이 우위였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극단주의 정치권과 맞물려 놀며, 나머지 학자들은 슬슬 피하려는 소수를 제외하면 공화국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주로 공화국도 알고보면 대량 학살, 반대파 집단 수용소 같은 전쟁 범죄도 꽤 저질렀고[38], 프랑코 정권도 나름 몇년 뒤엔 정치범들 좀 풀어주고 정치적 집안 정리 이후 이념에 기반한 국정에서 능력주의를 도입하는 등 나름 근대적인 면이 있었지 순 100% 반동꼴통 정권인건 아니였다는 등[39] 상대적, 양비론적 재평가에 가깝다.

그리고 공화국 정권에 대한 옹호자들이든 비판자들이든 주목하는게 아나키스트들이다. 스페인의 각종 정당 당파 가운데 머릿수나 군중 동원력으로 치면 가장 지분이 큰 당파는 국민 국가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이었다. 이런 특수성을 반영하여 공화국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대부분은 우익 논객들이 주장하지만, 이들과는 또 별개로 주류 공화주의 좌파보다도 더 극좌 포지션에서 제2공화국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있다. 다름 아닌 바로 내전기 그 시절부터 나머지 스페인 공화주의 주류 좌파와 불편한 동거를 지속해온 CNT 계열 아나키스트 성향 학자들이 취하는 입장이다.

2공화국 정권도 거의 반에 가까운 세월은 부르주아 계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보수 정당이 여당이었고, 이 시절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급진 노동운동과 주류 정치권의 충돌은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지, 내전이 터지고 진짜 일시적으로라도 단결하지 않으면 다 같이 죽을 상황이 되기실제로 3년 뒤지만 그렇게 되긴 했다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나키스트들과 공화국 정당들은 험악한 관계였다. 이들 아나키스트 계열 학자들은 주로 내전 발발 당시 현실 부정에 빠져 쿠데타세력과 협상시도나 하며 좌익 민병대에게 무기 분배할 타이밍을 놓쳐 카디스, 세비야, 바야돌리드, 레온 등이 쿠데타군에게 거의 무저항으로 넘어가게 만든 온건 중도계열 정치인들의 실책을 강조하며 공화국 주류 정치인들은 오히려 마음 속으로 절대 민주주의란 체제 자체도 인정할 마음도 없고, 좌익과 타협할 생각도 없는 우익 군부 상대로 자꾸 어설프게 협상을 시도하다 우익 세력이 점점 더 대담해져서 결국 민주주의 헌정 자체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이런 극좌 성향 공화정의 비판자들은 공화정 체제 자체를 전 이베리아 노동자 자치 코뮨으로 넘어가기 위한 임시 중간과정 정도로 보고 공화주의 주류 좌파의 소위 '민주적 정통성' 주장 자체에 회의적인 편이다.

4.2.1. 공화주의 정권의 무능[편집]


출범 당시에야 국민적인 지지를 입어 공화국이 출범한 것은 맞지만 그 공화국은 분명 취약했고 초기의 중도 정권과 중도우파 정권 그리고 다시 중도좌파 정권으로 바뀌는 혼란기를 겪으면서 정부가 안정적으로 굴러가기에 필요할 정도의 충분히 많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포용하지 못했다. 당장 1936년 총선만 해도 제2공화국을 부정했고 민주주의는 그저 피 안 흘리고 집권을 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 CEDA를 포함한 우파는 좌파 인민전선에 비해 1% 남짓한 차이[40]로 겨우 밀리다시피 했다.[41] 유사한 사례는 여성정책에 대해서도 있었는데 제2공화국은 여성에 대한 투표권 인정이나 여권 신장 등에 대해서도 많은 배려를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수혜를 받은 대부분의 여성들은 대부분 가톨릭의 영향을 깊이 받아 신부님들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이들[42]로 반공화국적 성향을 띠는 게 대다수였다.

1931년의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은 상당히 우발적으로 이루어졌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니세토 알칼라사모라도 상당히 당황했었다. 7년간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때 탄압받았던 UGT CNT 등의 사회주의/아나키즘 노조는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카탈루냐/바스크/갈리시아 등의 지방은 독립을 꿈꿨다. 반대로 왕당파와 교회, 지주 및 군부로 대표되는 구 기득권층은 정권을 되찾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산후르호의 1932년 쿠데타 등)이를 어찌어찌 임시로 봉합하고 공화주의 좌파-우파 세력의 타협을 통해서 마누엘 아사냐를 필두로 한 온건한 정권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사회 개혁에 대한 입장에서 좌우의 극한 충돌이 이어졌다.[43] 지진부진한 개혁에 사회주의자들은 정권 지지를 포기했고 보수주의자들은 CEDA[44][45] 를 결성해서 단합해서 선거에 나섰다. 직전의 충돌로 공화주의 우파는 좌파와의 타협을 포기했고 CEDA와의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으나 반교권주의와 국체 문제(공화정이냐 군주정이냐)로 파열음이 계속 일어났으며 장관 자리를 안주면 정권을 뒤엎겠다는 CEDA의 협박으로 급진공화당[46]의 레룩스는 CEDA에 일부 장관직을 양보했다. 그리고 그걸 계기로 극좌파에 의한 아스투리아스 광산 노동자 파업[47]이 일어나는 등 중도우파 정권은 개판으로 흘러갔다. 결국 중도우파 정권은 정권 내부의 분열과 급진당의 각종 부패 스캔들로 몰락하고, CEDA에 정권을 넘기기는 싫었던 정부가 조기총선을 실시한다.

1936년 총선거 승리로 집권한 중도좌파 정권 역시 정치적 기반이 굉장히 취약했다. 공화주의 우파와의 사이가 끝장난 만큼 공화주의 좌파는 자유주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당 정치와 민족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에게 표 구걸을 해야 했었다. 이점은 스페인의 많은 정치 세력의 인정을 받지 못한 인민전선 정권의 취약함을 드러낸 격이다. 또한 카탈루냐나 바스크 정부는 기본적인 목표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이었고 따라서 이를 두고 중앙정부와의 마찰은 필연이었다.[48] 다만 스페인 좌익은 공화국 헌법부터 국체를 '통합적 국가 (estado integral)'이라 규정하고,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 지방은 '고유 민족 (nacionalidad historíca)'으로 인정하며 연방주의적 국체를 추구하긴 한다. 이에 따라서 현대 스페인에서도 지역 민족주의, 분리주의 문제에 대해 좌익들은 '이베리아 공화국 연방'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반면, 우익에선 연방주의 담론 자체를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의 위장 물타기쯤으로 간주한다. 먼 훗날 78년 민주주의 헌법에서도 행정구역을 자치공동체 (comunidad autonoma)로 바꾸며 카탈루냐, 바스크 등에게 해당 지역 내에서 현지어 공식언어화 등 파격적인 지방자치제를 인정한것도 제2공화국 시기 도입된 역사적 민족법 (nacionalidad historica)가 기반이다.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군부에 대해서도 항시 긴장상태를 유지했고 종래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는 물건너 갔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들어갈 때도 총기를 휴대하고 들어갔고, 항상 쿠데타를 갈망했던 군부는 제쳐두고서라도 '스페인' '중앙정부'와 따로 놀고 싶어하던 아나키스트나 카를로스파, 분리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유달리 강했다. 특히 국가 주권 자체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이 내전 발발 당시 공화진영에서 1, 2위를 다투는 실세집단이 된 것은 스페인만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분명 군부 쿠데타가 제2공화국 붕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 것은 맞지만 군부만이 내전을 연 것도 아니고 제2공화국 공화진영은 스페인 내전을 치르면서도 바르셀로나의 5월 사태나 내전 막바지 카사도와 미아하의 쿠데타 등 자기들 내부에서도 두 번씩이나 내전 중의 내전을 겪었다.

사실 1936년 쿠데타가 내전으로 비화된 데에도 당시 제2공화국 정부에서 주요 각료 자리를 차지한 공화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좌파 간 갈등이 주요했다. 쿠데타로 식민지와 주요 거점들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공화좌파는 쿠데타가 일어난 현실을 직시하길 거부했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자 제2공화국 정계에서 중도파격인 공화좌파가 약해지고 제2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되는 사회주의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는 초동 대응에 실패했고[49] 그 대가로 공화주의 좌파는 내전 발발 직후 사실상 무력화되고 사회주의인 라르고 카바예로가 수상이 된다.

결국 공화주의 정권은 중도우파(1933~1935)정권이든 중도좌파(1936) 정권이든 공화주의-자유주의자들끼리의 협력을 피하고 우파와 좌파 각각의 극단파(CEDA, 팔랑헤 및 PSOE, 공산당, 아나키스트)와 협력을 한 끝에 극단파에게 잡아먹히는 등의 비극을 나았다. 이는 정치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스페인[50]에서 국민들 사이에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한 합의가 거의 부재했고 그에 따라서 공화정부 합법성에 대한 호소가 별로 먹히지 않는 정치환경에 비추어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이것 또한 상대적으로 봐야하는지라 1930년대는 나면서부터 민주공화정체가 자리잡은 미국부터 휴이 롱, 코글린 신부등 극우 대중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그보다는 비교적 불안정했던 프랑스 제3공화국 같은 경우도 60년 이상 이어지면서 2차대전까지 민주정이 유지되었던 것이지 1934년 프랑스 폭동으로 대표되던 정치적 혼란은 전간기에도 심각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의회 민주주의의 터줏대감인 영국도 케이블 가 전투를 비롯해 기본적으로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적 가치 자체가 심각하게 도전받으며 흔들리는 시대였다. 이 와중 스페인 공화국이 전형적인 중도의 부재로 인해 침몰한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비역사적, 문학적 관념에 더 가까운 '두개의 스페인' 발상까지 운운하며 스페인 공화정을 근본적으로 실패했던 체제로 분류하는 건 바로 그 프랑코 정권의 대변인들이 하던 주장이지만 말이다.


4.2.2. 인민전선 정권내 정파 갈등 문제[편집]


크게 PSOE 좌파[51]/UGT[52]/CNT[53]/POUM 등의 혁명세력의 과격한 입장과 PSOE 우파 일부[54]/PCE[55]의 권위주의적 태도로 나눌 수 있다.

국민전선의 극우파 뿐만 아니라 인민전선에서도 PSOE의 강경파 일부가 총선에서 국민전선이 이기면 볼셰비키식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에 무력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56] 하필 선거에서 진 게 국민전선이었고[57] 따라서 극우파가 반란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는 굳이 스페인 극우파만 한 이야기도 아니고 앤터니 비버도 한 이야기다. 스페인 내전의 원인을 설명할 때 단지 우파와 프랑코의 쿠데타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스페인 역사의 흐름을 무시한 지나치게 정치적인 설명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천봉쇄의 오류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UGT/CNT/POUM 등의 혁명세력 또한 국가 자체에 비판적이었고 정권 내에서도 계속해서 과격한 행동을 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양상이 다를 뿐 스페인 내전의 공화진영 정파 중 힘 좀 쓴 정파 치고 적색테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정파는 없다. 공화주의자들이나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주의자들 정도가 '비교적'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힘이 없었거나 조기에 프랑코에 정복당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제2공화국의 입장에서 말하면 쿠데타를 일으킨 우파나 국가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이나 법적 정당성[58]이 없다고 하기 충분하다.

물론 법적 정당성은 공화주의적 입장에서 반란군과 아나키스트들을 동시헤 비판하는 데에만 쓰이고, 원래부터 정부와 국법의 권위 자체를 경멸하는 아나키스트들 입장에서는 의미없는 소리. 특히 스페인에선 위에서 강조한 특수성 그대로 실제로 산업 도시의 거리와 소작농들이 일하는 밭 노동현장에서 정치 투쟁을 주도한게 공화주의 정파가 아니라 아나키스트 본인들이여서 정당 정치인들의 민주적 대표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여건도 충분했다. 따라서 앙헬 비냐스, 폴 프레스턴 등 진보좌파 공화주의 사관에 대하여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반박이 애초에 2공화국 정권 자체가 인민정권으로서 정체성과 '편가르기'를 오히려 확실하게 못해서 우파가 성장하고 폭력적 보복을 가할 빌미를 줬다는 '미완의 정권, 미완의 민주주의' 담론이다. 이를 보면 애초에 일반적으로 스페인 내전과 이념 대립 구도를 대중적으론 좌익 공화파 vs 우익 쿠데타군[59]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과 달리 일반적으로 '공화진영'으로 퉁치는 아나키스트와 공화주의자들간의 국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당시에나 지금이나 현격하다는걸 볼수 있다. 따라서 논쟁의 성격 자체가 정치적일수 밖에 없는 정통성 논쟁과는 별개로 역사학계는 갈수록 공화국과 내전기에 대한 시각이 이분법적이 아니라 '공화진영', '국민진영' 양자 내에서도 일정 부분에선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여러 당시 정치집단간의 다자적 관계에 집중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 후반기에 가면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소련과 공산당[60], 카바예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네그린에 유린당하다시피 하게 된다. 의회는 무력화되었고 주요 의사결정은 거의 전적으로 총리인 네그린과 공산당 손에 결정되었다. 스페인 공화국 군 수사국 SIM은 NKVD를 모델로 비공산당계 정치인, 군인, 기타 정파들을 제5열이나 트로츠키주의자, 간첩으로 몰아 숙청과 팀킬을 일삼았고 네그린은 심지어 프랑코의 국민진영을 벤치마킹해 공화국 내 정당을 단일당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 시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네그린의 권력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61]에 비견될 정도였다는 기록 역시 있다.[62][63] 프랑코 정권보다 나았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선 대 악 중의 양자택일이라기보다 최악 대 차악 중의 양자택일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진영만큼은 아니지만 공화진영 역시 범죄를 저질렀다. 예를 들어 공화국이 보유한 금이 부족해지니 국민진영 지지자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해 예산으로 쓴다던가[64], 소련과 정치적 관계가 꼬여 국제여단 단원들이나 다른 국제 의용병들이 엉뚱하게 피를 본다던가[65]에 집어넣는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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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충 보면 그전이나 현대 왕정 시절 국장과 똑같아 보이지만 위의 관이 왕관이 아니라 중세 자치 도시 성벽이 왕관 모양으로 된, 성벽관이라 하는 시민관의 일종인 공화주의 상징물이다[2] 일설에는 힐 로블레스를 비롯한 CEDA 의원들의 입각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한다.[3] 아스투리아스 광부 노동자 파업이라고 말해지는 파업으로 PSOE와 그 산하의 UGT와 일부 CNT 조합원이 참여했다.[4] 이 때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코 프랑코였다. 프랑코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모스크바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기 때문에 조국을 이들로부터 구해야겠구나'라고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고...[5] 통념과는 다르게 공화주의 우파 정권(1933~1936)에서 CEDA와 정부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좌파에 반대하는 것에만 의견이 일치했지 가톨릭 교회에 대한 견해, 공화정 국체에 대한 찬반여부 등 다른 대부분 요소에서는 의견이 많이 갈렸다. 따라서 공화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공화정이라는 국체에 공감하면서 비교적 쉽게 단결할 수 있던 것에 비해서 공화주의 우파와 보수주의자들은 공화정이냐 왕정이냐를 놓고 끝까지 갈등을 벌였다.[6] 구실인 이유는 이 암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산후르호, 몰라, 프랑코, CEDA 당수 힐 로블레스, 팔랑헤를 중심으로 쿠데타 계획을 36년 총선 때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암살 한참 전부터 카를로스파 민병대인 레케테는 나바라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하고 있었고, 외국산 무기는 이미 밀반입되고 있었다.[7] 이 덕분에 프랑코는 국민전선을 구성하던 여러 파벌들 눈에 지도자로 가장 적절한 인물로 비춰졌으며, 여기에 프랑코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호세 산후르호와 에밀리오 몰라가 항공기 사고로 죽는 행운까지 겹치고 프랑코가 본인의 정치력으로 국민전선 내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하면서 프랑코는 확고부동한 국민전선의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8] 프랑스 혁명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유럽의 정치 스펙트럼을 (독특한 포지션인 전체주의를 제외하고) 좌우 1차원으로 분류하면 대략 '사회주의&아나키즘-공화주의-자유주의적 입헌군주주의 / 보나파르트주의-봉건주의 왕당파' 정도가 된다. 스페인 가톨릭 교회와 공화주의자들의 반목은 이런 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9] 자유주의 공화국에 온정적인 계파[10] 급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띈 계파[11] 의외로 처음부터 군부는 왕정이나 공화정 둘 중 어느 한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는 않았다... 라기보다는 그냥 별 생각이 없었다. 이념에 대한 충성도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케이포 데 야노는 스페인 제2공화국 개국공신이었고 프랑코의 동생으로 공군 장교였던 라몬 프랑코도 골수 공화파였지만 그래도 형을 따라간 특수한 케이스다. 카나리아와 포르투갈에 짱박힌 프랑코와 산후르호를 대신해 사실상 본토에서 쿠데타를 주도한 에밀리오 몰라도 처음에는 그냥 별 생각없이 공화정을 지지했다가 그를 따라 참여한 카를로스파를 기겁하게 했다.(왜 왕당파가 공화주의자와 함께 쿠데타에 참여했냐면 딱히 연줄이 없었기 때문) 몰라가 산후르호 사후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군부 최선임자 미겔 카바네야스도 공화주의자였고 그 아들은 아예 대놓고 PSOE의원이었다가 아버지가 힘이 없어서 지켜만보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코에 찍혀서 망명했다. 프랑코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 생각없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왕당파 소속 지지자들이 칭얼대서 할 수 없이 왕정을 택한 것이다. 공화진영에 남은 군인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공화진영에 남은 군인들 중에는 물론 이념때문에 남기도 했겠지만 아무 생각없이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과 연줄이 없어서 그냥 남은 케이스도 꽤 있었다. 대표적인게 호세 미아하다. 내전 발발 당시 의외로 장성급 장교들 중에서는 공화진영에 남은 비율이 상당히 높았지만 그 아래 영관급 장교들은 주로 국민진영에 가담했다.[12] 히스파니아 행동 카스티야 평의회의 창립자. 가톨릭 신자로써 가톨릭 국교화를 주장했던 팔랑헤주의자였다.[13] 사실상 스페인 민족생디칼리슴의 창시자로 노동조합의 자가관리(다만 기업가들도 모두 참여하는 형식의 노동조합), 지방 직접민주주의등을 주장했으며 이후 레돈도와 같이 민족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JONS)를 세웠다가 팔랑헤랑 합당했으나 팔랑헤가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며 탈당한 적 있다. 종교적으로는 불가지론자였으며 그렇기에 전통왕당파등의 가톨릭주의자들과 사이가 꽤나 안좋았다고 한다.[14] 현대 스페인 군인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변하고 인적 자원 자체가 변하면서 나머지 서구 민주주의 국가처럼 일반적인 국가와 헌법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지, 옛날 이념적으로 경도되어있던 시절의 스페인군처럼 특정 이데올로기에만 기반한 '충성심'이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부는 스페인 사회 주요 세력 중 가장 프랑코의 영향이 강한 곳이다. 물론 1930년대나 21세기 현재나 꼭 친프랑코나 극우 일변도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정도로.[15] 사실 아직도 각종 집회를 열거나 박물관을 열거나 문화적 행사를 통해 꾸준히 생존신고는 하고 있지만 정치집단으로서는 죽었다고 봐도 된다.[16] 미국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 우파가 극단화된 케이스로, 현재는 강경 보수주의 성향을 보이지만 그 기반은 우파 자유지상주의나 (위계적 신분제가 있는 가톨릭과 척진) 청교도 사회보수주의에 근거해있다. 세습적 신분제와 위계적 종교(가톨릭)에 근간을 둔 유럽의 (정통) 보수주의와는 성향이 다르다. 미국은 그러한 정통 보수주의의 일종인 영국의 토리(현재 보수당)주의에 반대해서 자유주의적으로 세워진 국가이기에 공화당조차도 현대 보수주의를 주장하지 진짜 반동적 보수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17] 콤파니스가 내전 발발 이전 기성 온건 우파 성향의 카탈루냐 부르주아, 급진 좌익 노조세력 사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전형적인 정치 협잡꾼 모략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정치에서 법외 수단이 아닌 정치 모략을 부정하지는 않는다.[18] CNT/POUM와의 타협은 실질적 권력을 쿠데타 막은 CNT가 있는 상태에서 본인은 최소한 기존 '정부'의 명함이라곤 유지하겠다고 손잡은 것이다. 쿠데타군을 공화국의 정규 군대, 경찰이 아니라 독립 무장 노조가 몰아내고 시를 점령한 상황에서 콤파니스가 협력 안한다고 뻣대면 내전이 일어날 거고 콤파니스도 CNT가 당시 상황에선 가장 주도적이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좌파, 공화파 세력을 다 쓸어버리고 진짜 권력을 독점하기엔 본인들 이념적 모순도 있고, 그만큼의 세력은 안된다는걸 통찰하고 일부러 두루티, 올리베르를 초청하여 "오늘의 승자는 댁들이오, 도시의 통치권은 당신들에게 있소" 같은 드립을 치며 권력을 '넘겨주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이렇게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 많은 지방 정부 수반이 아니키스트 혁명가들에게 숙여 드가는척 하면서 보존했던 '국가'의 서류상 존재는 37년 넘어가면서 공화국 정부가 다시 내부 통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9] 이 사람은 CNT가 일으킨 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도 지지의사를 보내기도 했다.[20] 다만 왕당파들의 경우 정당성 면에서는 할 말이 있다. 따지고 보면 왕에게 충성하는 입장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은 역적패당이기 때문이다.[21] 원문: "hay bastante más consenso sobre la Guerra Civil de lo que se piensa, pero no así en la sociedad.[22] Juilus Ruiz, 에딘버러 대학 역사학과로 재직 중이고 스페인계지만 영국에서 나고 자란 영국 시민이기 때문에 영어식으로 표기한다.[23] 폴 프레스턴같이 전통적인 사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사역사학자 취급을 하는 반면, 스탠리 페인같은 수정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고평가받았다. 스페인의 과거사에 관련한 이러한 전통주의 vs 수정주의 논쟁은 스페인 국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망라해 거의 전세계레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24] 피오 모아는 프랑코 사망 즈음에는 스페인 공산당 소속 민병대원이었다가 우파로 전향했다. 한 때는 우파와 폭력 충돌도 벌였던 적이 있었다고.[25] 다만 레데스마 라모스등의 급진적 좌파 팔랑헤출신들은 이러한 국민전선의 계급협동적, 교권적, 비직접민주적 행태에 화가나 탈당하는 일도 있었다. JONS(Juntas de Ofensiva Nacional Sindicalista)가 대표적인 예시.[26] 다만 PPR은 물러나는 니세토 알칼라사모라의 정당이라 기권(사실상 반대)했다.[27] 보수공화당(PCR)의 대표[28] 쿠데타 직후 아사냐는 원래 마우라를 임시 총리로 임명해서 우파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폭동 협박으로(대충 케렌스키처럼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이다) 그 계획을 포기하고 마르티네스 바리오를 총리로 임명해서 몰라와의 협상을 하게 한다.[29] 아마 레룩스는 그저 1936년 쿠데타가 흔한 프로눈시아미엔토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코 독재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억압적이고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었다.[30] 사실 이건 당시 쿠데타를 이끈 몰라를 포함한 군부와 관계가 있다. 다른 세력과 달리 막상 군부는 처음부터 왕정 복고를 외치거나 제2공화국 체제를 부정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냥 일단 닥치고 들고 일어나는 것만 생각해서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몰라 본인은 케이포 데 야노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아도 일단은 공화주의자로서 면모를 보였고 다름아닌 바지사장인 카바네야스가 레룩스의 급진공화당 출신이었다. 공화정 삼색기를 부정하고 왕정제 깃발을 쓰거나 공화국 깃발인 리에고 찬가 대신 국왕 행진곡을 쓰게 된 것은 프랑코가 국민전선의 확고부동한 1인자 자리에 오르고나서부터의 일이다.[31] Stanley Payne, Julius Ruiz 등[32] Paul Preston, Helen Graham, Julian Casanova 등[33] 일례로 Payne은 쿠데타가 칼보 소텔로의 암살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군부가 CEDA에 선거자금을 지원한 구 귀족층이나 자본가들이 기부한 돈으로 이미 5월부터 무기를 해외로부터 반입하고 있었다. 다만, 칼보 소텔로의 암살이 주도층이 아니라 참여를 머뭇거렸던 이들의 쿠데타 가담을 촉진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칼보 소텔로의 암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암살을 한 당사자가 엄연히 군경, 즉, 공무원이라는 점도 들 수 있다.[34] 가톨릭, 카를로스파, 왕실, 아니면 형식만 팔랑헤 소속인 테크노크라트 등등.[35] 제2공화국 헌법은 1931년 제정, 개정 과정에서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았다.[36] 대법원은 대놓고 프랑코가 내전 중 국민진영 소속 군 지휘관들에 의해 추대된 1936년 10월 1일부터 국가원수였다고 2019년에 만장일치로 언급했다. 헌법재판소는 그보다는 조금 온건하지만 프랑코가 1939년 이후 새로이 수립된 체제의 국가원수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했고(1936~1939년은 언급X) 과거 1982년의 판례에서는 1936년 8월, 즉, 스페인 내전 발발 후, 국민진영이 제정한 법령을 이용해 공화국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병사의 승진은 효력이 없다고 보았다. [37] 이것은 카를 슈미트도 지적한 문제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이건 독재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건 각종 독립운동이고 국공내전이고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이고 한 나라를 바꿀 중대한 정치적 격변은 법의 틀을 벗어난 문제다.[38] 줄리어스 루이즈의 주장[39] 스탠리 페인이 주로 연구, 주장한 내용이다[40] 구체적인 득표율이나 의석 비중은 학자마다 다르다. 다만 당시 선거 규칙 자체가 좌우파 중 연정을 한 쪽에 유리했기 때문에 의석은 지지율에 비해 대략 2/3 정도로 좌파가 더 많이 받았다. 물론 이전 선거에서는 우파가 비슷하게 더 많이 받았다.[41] 단 선거자금 대다수를 CEDA가 받은 상황에서 진 것은 국민전선이 별로 인기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힐 로블레스는 패배 이후에 노동자들을 적당히 착취했어야 했다면서 자신을 지원한 자본가들을 역으로 공격했다.[42] 이를 베아타라고 한다. 참고로 주로 진보좌익, 여성계에서 정치적 압력으로 여성참정권을 이루니 막상 여성들이 종교적 보수 우파로 몰표하는건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다. 계급배반 투표 이딴소리 운운할 필요도 없이, 시대적 여건상 20세기에 정치화된 여성운동가들에 비해 어느 사회든간에 전통적인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집안일, 가족구성원의 멘탈 관리를 주로하며 신앙심이 더 깊어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43] 다만 반교권주의는 대통령 알칼라사모라 같은 소수의 가톨릭 신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공화주의 정파(AR, PRR, PCR 등)가 동의했다.[44] 사실 팔랑헤가 생기기 이전에도 스페인 우파는 이념은 몰라도 적어도 행태상으로 볼 때 이미 충분히 파시즘 코인을 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식 경례를 하거나 훗날 유명해질 Arriba Espana같은 구호를 외친다던가. 다만 CEDA의 최좌파는 일부 공화주의적 신념을 가진 자유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당수인 힐 로블레스도 당대에는 파시스트적 행보를 보였지만 프랑코 정권 붕괴 후에는 온건한 기독교민주주의 정당을 창설했다. [45] CEDA와 공화우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공화우파는 그래도 가톨릭이 국교가 아닌 공화국을 지키자는 주의였지만 CEDA는 제2공화국을 부정했고 가톨릭을 국교로 보던 그 때 그 시절로의 복귀를 여겼다. 단지 민주주의를 정권을 얻기 위한 평화적이고 합법적 수단으로 여겼다. 다만, 제2공화국 외에 어떤 정부를 대안으로 여길지에 대한 뚜렷한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46] 폴 프레스턴에 따르면 사실 급진공화당은 원래는 진보적인 축에 속했지만 추후 제2공화국이 들어서고 나서 우경화된 경우이다. 즉, 애초부터 왕정과 가톨릭에 우호적이거나 적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은 주류 우익들과 어울리는데는 한계가 있는 셈이다.[47] 이 사건은 좌우익 강경파들이 의회제 민주공화국 시스템 하에서 대화를 통한 정치적 문제 해결보다 폭력을 통한 해결이 최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즉, 스페인 내전이 제2공화국을 끝장냈다면 이 폭동은 그 이전에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안긴 격으로 볼 수 있다.[48] 아사냐 대통령이건 네그린 총리건 간에 특히 카탈루냐 독립이라는 선택지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 점은 프랑코 장군을 비롯한 국민진영 측 인사와 의견이 일치했다.[49]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 같은 공화주의자는 쿠데타 발발 직후 몰라 같은 쿠데타 수장 격 인물과 대화를 시도했다.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무기 지급과 같이 당시 주요하리라 여겨졌던 결정적 대응을 하는 것은 훨씬 늦은 뒤에 가서 하게 되었다.[50] 19세기 이래 혁명, 반란, 쿠데타같은 정치적 격변이 수십차례에 걸쳐 일어났다.[51] 카바예로 계열[52] 노동조합총동맹[53] 다만 CNT지도부와 CNT 조합원간의 차이는 꽤 컸다. FAI가 그렇기에 존재했던 것이며 혁명적 생디칼리슴,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적 성격은 당시 자발적 집단화를 실현했던 조합원 노동자들이고 지도부들은 정부에 협조하는 개량주의적 성격이였다. 이러한 조합원들이 분노해서 일어난 것이 바르셀로나 5월사태[54] 네그린 계열, 일부라고 표시한 이유는 프리에토 계열이 있기 때문이다.[55] 현재는 유럽공산주의적 성격으로 꽤나 갔으나 내전 당시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56] UGT 수장인 스페인의 레닌-라르고 카바예로가 대표적이다. 국민진영만큼은 아니지만 공화진영에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 (네그린과 PCE 등) 그리고 제2공화국 출범 이전 왕정시기부터 스페인은 쿠데타가 빈발했는데 좌파의 역사적 시조이기도 한 자유주의자들 역시 쿠데타를 일으켰다.[57] 당시 선거 결과는 15만 표 차로 박빙의 승부였으나 선거 규칙상 의석 대부분은 좌파가 차지했다.[58] 러시아 혁명당시에도 아나키스트들은 최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와 적대했지만 그 이전에는 볼셰비키와 손잡고 의회민주주의를 타도하는데 열의를 보였다. 다만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세력은 전부다 성격이 달랐고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은 의회민주주의 폐지 이후 레닌이 직접민주주의적 코뮌을 구현하지 않는다고 좌파 사혁당과 연합해서 레닌을 암살할려고 했다가 쓸린 적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마흐노는 이걸 보고 혼란주의적 테러리스트 새기들이라고 욕까지 한 적이 있다.[59] 심지어 우익 쿠데타군들도 이분법으로 나눌수 없을만큼 자신들 끼리 총질이나 탈당, 전향등을 했었다. 레데스마 라모스의 JONS 좌파 팔랑헤가 대표적이며 프랑코는 통합에 반대하는 카를리스타, 좌파 팔랑헤 세력을 모두 숙청했을 정도였다.[60] 내각은 여전히 스페인의 기존 정당들이 차지했지만 이미 스페인 공산당은 정부 대신 스페인의 실세 집단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61] 왕정 말기의 독재자, 팔랑헤당의 수장 호세 안토니오의 부친이다.[62] 하지만 네그린이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한 것은 맞지만 체제 자체는 민주정이었다. 말하자면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에 가까웠고 프랑코나 스탈린식의 전체주의랑은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63] 프랑코주의자들의 말처럼 네그린이 공산당의 꼭두각시였으면 돌로레스 이바루리처럼 모스크바로 망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그린은 끝까지 런던과 파리에 남았다. 또한 오히려 공화국 내부 상황과는 다르게 네그린 정부는 영국의 국민정부(사실상 보수당 정권)에게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찬사를 받았다.[64] 이렇게 확보한 예산은 제2공화국이 망하고 프리에토같은 일부 거물급 정치인이 확보해 망명지에서 자기 생활비로 쓰게 되었다.[65] 처음에는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 공화국을 돕겠다는 명목 하에 전세계에서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입국해 나름 성과를 거뒀지만 소련은 입국하면서 이들의 여권을 입국하고 이들의 휴가나 제대 후 귀국은 시간이 갈수록 제한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숙청은 국제여단원이라도 예외는 아니었고(소련인들조차도 수틀리면 소련으로 끌려가서 숙청되던 시기였다.), 결국 국제여단은 이들은 38년 네그린이 독일, 이탈리아 개입을 줄일 여지를 만들기 위해 송별연과 함께 전부 귀국시킨다. 이때 귀국한 이들은 7800여 명이었다. 나머지 귀국이 어려운 이들은 외인부대로 편입되었거나 행정상 미비로 여전히 수용소에 있는데도 카탈루냐가 39년 초 국민진영에 넘어갈 때까지도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