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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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프랑코
오라시오 카르테스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
산티아고 페냐



파라과이 제50대 대통령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마티아우다
Alfredo Stroessner Matiauda


출생
1912년 11월 3일
파라과이 이타푸아 주 엔카르나시온
사망
2006년 8월 16일 (향년 93세)
브라질 브라질리아
국적
[[파라과이|

파라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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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정당
콜로라도당
임기
제50대 대통령
1954년 8월 15일 ~ 1989년 2월 3일
배우자
엘리히아 모라 스트로에스네르 (1945–2006)
복무
파라과이 육군
1929년 ~ 1989년

1. 개요
2. 생애
2.1. 집권 이전
2.2. 집권과 폭정
2.3. 대외 관계
2.4. 경제 정책
2.5. 사생활
2.6. 몰락
2.7. 말년
2.8. 최후



1. 개요[편집]


제50대 파라과이 대통령이자 군인, 독재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후 무려 35년 동안 파라과이의 대통령으로 집권했으며 무자비한 정적 탄압과 부정부패, 문란하고 기행적인 사생활 등으로 인해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악명 높은 친미 독재자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생애[편집]



2.1. 집권 이전[편집]


1912년 11월 3일에 파라과이 이타푸아 주의 엔카르나시온의 독일계 집안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후고 슈트뢰스너는 독일 바이에른 호프 출신 이민자에 맥주 양조장 화계사였고 어머니 에리베르타 마티아우다는 스페인계 이민자 집안 출신 농부였다.

1929년에는 프란시스코 로페스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온순하고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해 오다가 1931년에는 중위에 임관했다. 1932년 9월 볼리비아와의 차코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1940년 소령 진급에 이어 1946년엔 참모장까지 빠르게 진급했다. 1947년 파라과이 내전이 발발했을 때 포병 사단을 지휘하여 아순시온의 노동자 반군을 진압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히니오 모리니고의 신임을 받았으며 1948년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남미에서 최연소 장군이 되었다. 1945년경에는 엘리히아 모라 델가도(Eligia Mora Delgado, 1910~2006)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하지만 스트로에스네르는 이후 무소불위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멋대로 정권을 갈아치웠는데 1949년 1월에는 펠리페 몰라스 로페스를 지지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후안 나탈리시오 곤살레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같은 해 9월엔 페데리코 차베스를 지지하여 펠리페 몰라스 로페스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이바지했다. 1951년에는 파라과이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2.2. 집권과 폭정[편집]


우리는 폭력으로 흔들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평화의 통치 아래 통치해 왔습니다.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하술할 내용들을 보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이 아닐 수 없다. 출처


1954년 5월 4일 군대와 자신이 소속된 콜로라도당의 지원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대통령 페데리코 차베스를 축출했다. 토마스 로메로 페레이라가 이끌던 짧은 임시 정부[2] 이후 그는 다른 모든 정당들을 금지시키고 동년 7월 11일에 열린 특별 대선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여 만장일치로 파라과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54년 8월 15일 제50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헌법과 시민권을 정지시켰으며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가혹한 탄압을 시작했고 1958년, 1963년, 1968년, 1973년, 1978년, 1983년과 1988년에 부정선거를 동원해 7번이나 재선하면서[3] 장장 35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으며[4] 1967년 8월 25일에는 1968년 선거 이후에 만료된 임기만 그 한도에 포함되도록 규정하는 식으로 헌법을 개정하며 5년 임기로 3선 출마를 허용했고 원래대로라면 권력을 내놓아야만 했던 1977년에는 5년 임기로 무제한 출마가 가능하도록 헌법을 수정했다. 이 장기집권의 트라우마로 인해 파라과이의 현행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단임제로 제한되고 있으며 실제로 2017년 입법부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오라시오 카르테스가 재선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수정안을 논의했을 때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결국 백지화되었다.

스트로에스네르는 정부가 재판 없이 누구든지 무기한 체포하고 구금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공개 집회나 시위도 금지했고 국민들은 콜로라도당에 가입해야만 직업과 의료와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선거 기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간 동안 계엄령을 선포한 채 국가를 통치했다. 더불어 정부나 여당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금지해 많은 언론인들이 감옥에 보내지거나 고문을 당해 파라과이에는 그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가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스트로에스네르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파라과이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면서 이러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덤으로 1975년부터는 남미 6개국[5]의 군사정권이 '좌파 척결'을 목적으로 공동적으로 실시한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스트로에스네르는 파라과이 정치 전반에서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했는데 1947년부터 집권 여당인 콜로라도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1962년 야당의 활동이 다시 합법화되었지만 제대로 된 활동은 거의 용납되지 않았고 탄압도 계속됐으며 전술한 것처럼 선거는 콜로라도당에 유리하도록 조작되었기 때문에 야당은 현실적으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1974년 11월에 아순시온 외곽의 농가에서 체포된 게릴라 7명이 심문 과정에서 '스트로에스네르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콜로라도당의 고위 관리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증언한 것이 알려지자 스트로에스네르는 당 지도부를 의심해 1천 명 이상의 고위 관리와 당원들을 체포하고 심문하도록 명령했으며 덤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요원을 보내 해외에 망명한 자신의 정적들을 납치하게 했다.

스트로에스네르의 정적들에 대한 인권유린은 최고점에 달했는데 한동안 그가 집권했을 때 100만 명이 해외로 도피하고 40만 명이 투옥되었으며 4천~5천 명이 사망했다는 말이 돌았으나 2008년에 파라과이 진실과 정의 위원회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19,862명이 투옥되어 18,722명이 고문을 당하고 3,470명이 추방당했으며 377명이 '실종'되고 59명이 초법적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2019년 9월에는 스트로에스네르의 옛 저택에서 반정부 인사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

스트로에스네르 치하에 행해진 고문들은 여느 남미의 군사정권처럼 마찬가지로 아주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실제로 스트로에스네르의 반대파들에게는 구타, 채찍질, 3일 동안 잠도 안 재운 채 서 있게 하기[6], 민감한 부위에 전기고문하기, 냄비를 머리에 얹고 쇠로 두드리기,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기, 사람들을 몇 주 동안 음식과 물도 주지 않은 채 빈 트렁크에 가두기 등의 야만적인 고문이 행해졌으며 특히 가장 많이 쓰이던 고문은 정적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배설물이 담긴 욕조에 강제로 담가 질식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반체제 인사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지른 비명 소리는 녹음되어 가족들에게 전화로 재생되었고 때로는 유족들을 위협하기 위해 수감자가 이미 살아 있음에도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도록 피 묻은 옷이 유족들의 집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정치범의 심문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파라과이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겔 앙헬 솔레르[7]가 체포된 후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될 때[열람주의][8] 스트로에스네르는 그 끔찍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을 전화로 엿듣고 있었다.

특히 1968년부터 파라과이 수사부장이었던 파스토르 코로넬[9]은 스트로에스네르에 대한 반대파에 대한 체포, 납치, 심문, 고문, 암살을 주도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반대파에 대한 심문, 고문에 참여했는데 심지어 앙헬 솔레르의 살해도 코로넬의 사무실 안에서 코로넬 본인이 직접 자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가입한 콜로라도당 소속의 민병대[10]를 이끌면서 반대파에 대한 폭행과 살인을 자행하기도 했고 자신의 소유지에 정적들의 시체를 암매장하기도 했으며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와도 함께 마약 밀매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비록 1980년 9월 17일에 파라과이로 망명을 온 니카라과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사주를 받은 아르헨티나의 게릴라에게 암살되자 코로넬의 위상은 추락했으나[11] 그럼에도 코로넬은 스트로에스네르가 물러날 때까지 수사부장 직함에 있었다.

그리고 스트로에스네르는 본인에 대한 우상화도 자행하여 수도인 아순시온의 중앙광장에 '스트로에스네르: 평화, 힘, 그리고 안녕(安寧)'이라는 내용의 대형 네온사인을 설치한 것은 물론이고 도로, 광장, 학교, 공항 등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며 모든 관공서와 대부분의 상점, 심지어 정적들의 집에까지 자신의 초상화를 걸었고 동부 국경 지역에 자기 이름을 붙인 선전도시 푸에르토프레시덴테스트로에스네르[12]를 건설하기도 했다[13]. 심지어 자기 생일을 '행복한 날(fecha feliz)'이라고 부르면서 공휴일로 지정해 아침부터 밤까지 성대하게 생일파티를 열기도 했는데 이 생일잔치에서 스트로에스네르는 '그가 파라과이의 수호성인인 것처럼 기념되었다'고 한다.

덤으로 이 시기 파라과이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군사정권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선전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아들이 군사 퍼레이드를 보고 "아빠 나도 군인이 되고 싶어요." 이러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넌 이미 군인이란다."라고 답을 해 주는 내용이 있었다.

심지어 스트로에스네르는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파라과이의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정책과 학살을 실시했는데 실제로 아체(Aché)족은 전체 인구의 85%에 육박하는 900명이 학살당했으며 여성들은 성노예가 되었고 아이들은 '하인처럼 만든다'는 이유로 유괴되었다[14].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로에스네르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한테 배웠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언어 중 하나인 과라니어를 부흥시키기도 했다.


2.3. 대외 관계[편집]


스트로에스네르 정부는 미국과 긴밀한 군사적,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미국도 스트로에스네르의 권력이 유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당시에는 미국이 반공주의를 내세우기만 하면 그 어떤 독재정권도 노터치하는 정책을 내건 덕택(?)이었다. 실제로 1962년과 1975년 사이에 미국은 스토로에스네스 정부에 1억 4천 6백만 달러를 지원했고 파라과이 장교들이 미국의 서반구안보협력대학원(WHINSEC)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미국의 장교들이 파라과이 장교들의 고문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이 '라틴 아메리카를 위한 실행 가능한 민주주의 모델이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우호관계는 1986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마약 밀매와 돈세탁, 독재에 대한 국제 여론 악화로 인해 스트로에스네르 정부를 독재로 칭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덤으로 스트로에스네르는 장제스 치하의 대만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 중이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자국의 군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타이베이시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스트로에스네르는 일본을 숭상하였는데 메이지 유신제2차 세계 대전 후의 경제 발전에 흥미를 가져 1972년 4월에 일본을 방문하거나 파라과리 현에 있는 일본인 이주자 거주지인 라 콜메나(La Colmena)에도 최소 22번이나 방문한 것은 물론이고 메이지 천황이 자신과 생일이 같다는 것을 이용해 자신을 '메이지 천황의 환생'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심지어 1989년에 쇼와 천황이 죽었을 때는 대통령령으로 중앙관청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복을 입을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스트로에스네르 집권기의 파라과이와 일본의 관계는 증진되어 일본은 파라과이에 적극적으로 기술 원조를 했고 심지어 당시 파라과이가 받은 외국 원조의 75%가 일본에서 온 것이었다고 한다. 한편 스트로에스네르는 장제스도 존경하여 1986년에는 아순시온에 '장제스 거리'를 만들어 이 거리 주변에 중국식 공원과 장제스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15].

덤으로 스트로에스네르는 니카라과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파라과이로 망명할 때 받아 주는 행보를 보였으며 아돌프 히틀러나치에 큰 동정심을 느껴 요제프 멩겔레, 에두아르트 로슈만[16] 등의 나치 전범들의 망명을 받아주고 파라과이 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나치와 관련된 논문을 군사 학교를 포함한 학교에 전달하기까지 했고 크로아티아우스타샤 출신 파시스트들을 위한 '휴식 캠프'도 운영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지휘관 딘코 사키치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이처럼 스트로에스네르가 나치 전범들을 하도 은닉해 준 나머지 외신들은 종종 스트로에스네르 정부를 "가난한 자의 나치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2.4. 경제 정책[편집]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에도 하술할 내용과 같이 파라과이의 국민 상당수는 스트로에스네르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실제로 일각에서는 스트로에스네르를 개발독재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스트로에스네르는 국제 대출 기관을 통해 국가 부채를 갚았으며 미국, 서독, 일본 등으로부터 차관을 받아 고속도로, 교량, 송유관 등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1971년부터 1984년까지는 세계 최대급 수력발전소이타이푸 댐과 아르헨티나 국경 인근에 있는 야시레타 댐(Yacyretá Dam)을 건설하는 등 파라과이의 경제 성장을 위한 정책을 취했고[17] 이 덕분에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파라과이의 경제성장률이 12%에 육박하는 등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후배인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비슷하게 국가의 경제는 어느 정도 성장했으나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거의 그대로였다. 특히 토지개혁을 한답시고 부자들의 땅을 몰수한 뒤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질 목적으로 지지자들에게 차별적으로 토지를 나눠준 일은 파라과이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삽질이다. 결국 상당수의 빈농들과 원주민들은 외딴 곳으로 쫓겨나거나 해외로 이주를 가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파라과이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그의 독재 정치의 장점(?)이라면 정치적 불안정성에 의한 비용을 줄인 것이다. 1927년부터 1954년까지 파라과이 대통령은 22명의 대통령이 집권했고 특히 1948년부터 1954년까지는 6명의 대통령이 집권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물론 스트로에스네르의 집권 이후 발생한 부패는 그 비용을 훨씬 능가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파라과이에는 정부, 콜로라도당, 무장세력에게 사업의 특혜가 집중적으로 분배되었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지에 무기, 마약, 위스키, 자동차 부품, 이국적인 동물들 등을 밀수출했는데 당시 파라과이의 밀수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파라과이의 밀수량이 공식 수출액의 3배를 차지했다는 추산까지 있을 정도다. 거기에 많은 토지들이 소수의 기득권층들에게 집중되면서 파라과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는데 실제로 옥스팜앰네스티의 조사에 따르면 파라과이 인구의 1.6%가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전체 땅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경제학자 루이스 로하스(Luis Rojas)의 말에 따르면 파라과이에서는 단 2.5%의 토지 소유자가 농지의 최소 8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스트로에스네르는 2006년에 사망할 당시 기준으로 미화로 30억 달러를 남겼으며 파라나주의 과라투바에 방이 14개나 있는 여름 별장을[18], 미나스제라이스주에 농장을, 리우데자네이루의 부촌인 바하다티주카에 부동산을 보유했고 경주마도 보유했다고 하며 그가 불법적으로 취급한 재산들은 맏아들 구스타보가 관리했다고 한다.


2.5. 사생활[편집]


스트로에스네르의 사생활은 약간이나마 있었던 경제적 치적을 전부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불륜혼외정사는 애교에 확인된 은 최소 15명, 사생아만 최소 34명이었고 심지어 그와 관계를 가진 여성들 중에는 13살 소녀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그리고 스트로에스네르는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는 연쇄 아동 성폭행범이기도 했다.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의 최고위층이 소녀들을 성노예로 부린다'는 소문은 스트로에스네르의 집권 당시에도 공공연하게 퍼진 나머지 1977년 12월 20일자 워싱턴 포스트에도 보도될 정도였으며 실제로 1975년 11월에 사호니아 지역에 있는 스트로에스네르가 자주 방문하던 전직 중령 레오폴도 포폴 페리에(Leopoldo Popol Perrier)의 집 인근 모래 더미 위에서 8~9살 정도의 소녀 시신 3구가 발견되었는데 성적 학대의 흔적들이 보이는 이 시신을 발견한 말레나 애쉬웰(Malena Ashwell)이라는 여성은 이를 미겔 앙헬 솔레르[19]에게 전달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 솔레르는 상술한 내용대로 참혹하게 살해당했으며 애쉬웰은 1976년 1월 9일에 비밀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코로넬에게 스트로에스네르 암살 음모에 연루됐다는 거짓 누명을 뒤집어쓰고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으나 유력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20] 1달 뒤인 2월 13일에 '파라과이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망명했고 상술한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 아다 로드리게즈(Ada Rodríguez)라는 가명으로 사실을 전했다.

스트로에스네르 일당의 성추문의 추악한 실체는 스트로에스네르가 사망한 지 2년 뒤인 2008년에 줄리아 오조리오(Julia Ozorio, 1956~)라는 여성이 쓴 '장미와 천 명의 군인들(Una rosa y mil soldados)'이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확실하게 드러났는데 당시 폭로된 내용들로 미루어 보면 스트로에스네르의 성범죄는 그 정명석지미 새빌, 쟈니 키타가와 같은 희대의 연쇄강간범들마저 능가하는 최악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12세 때부터 2년 동안 스트로에스네르의 성노예로 살았다가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오조리오의 증언에 따르면 대통령 호위 연대의 사령관이었던 페드로 훌리안 미에르스(Pedro Julián Miers)는 군인들을 보내 '같이 오면 너의 친척들에게 공공기관에 자리를 내주겠다'며 파라과이 전역의 농촌에서 납치해 온 10~15세 사이의 여러 소녀와 아순시온의 사호니아(Sajonia) 지역에 하렘을 유지했다고 하며 이들 중 가장 '훌륭한' 아이들은 스트로에스네르에게 보내졌는데 이렇게 납치된 여아들은 스트로에스네르와 그의 부하들에게 무자비하게 강간당했다고 한다. 실제로 스트로에스네르 본인은 사호니아를 1주일에 한두 번씩 들르면서 1개월마다 약 4명의 여아를 강간했으며 군인들의 여아 납치가 워낙 극심한 나머지 아순시온의 빈민가의 학교에서는 "'빨간 두건'이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 간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스트로에스네르 일당의 이러한 엽기적인 성노예 행각의 피해자는 1천 명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증언에 따르면 스트로에스네르는 대놓고 페도필리아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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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에스네르는 15세가 넘은 여성들이 '이미 뼈가 튼튼하다'며 15세 이하의 여아들을 선호했으며 납치한 소녀들 중 일부에게 벌거벗거나 짧은 드레스를 입은 채로 사진을 찍게 한 후 이 사진들을 집에 쌓아 놓았고 15~16살이 되어 '더 이상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은' 여성들 중 일부는 살해되었다고 한다. 단순히 '흑인이다', '운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경우도 있었으며 이 소녀들에 대한 살인들 중 일부에는 스트로에스네르가 직접 참여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전직 경찰이자 30년 동안 스트로에스네르의 운전기사로 지냈던 엘비오 아코스타(Elvio Acosta)는 2012년에 스트로에스네르가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린이들의 피로 목욕을 했다."는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끔찍한 증언도 했는데 이 치료법은 아우슈비츠에서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을 자행한 요제프 멩겔레가 권한 것이었다고 한다[1]. 게다가 당시 고위 군인들은 7살밖에 안 된 아이들까지 집에서 납치하고는 그 아이들이 자기를 섬기도록 그루밍하기까지 했다고 하며 스트로에스네르 본인도 8~9세 정도의 소녀들을 강간하기도 했다.

게다가 오조리오가 책을 출판한 후에도 콜로라도당의 고위층들은 뻔뻔하게도 '당의 이름을 더럽혔다'며 그녀를 협박했다고 한다. 2016년 7월부터 파라과이 법무부는 스트로에스네르의 아동 성범죄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파라과이의 진실과 정의 위원회는 추가적인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했으나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수치심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해졌다.[참고자료]

한편 1980년 3월 8일에 추방된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토지와 기술을 전해 달라며 무장 시위를 하자 스트로에스네르는 경찰을 동원해 이 '반란군'들을 말살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10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아폴로니아 플로레스 로텔라(Apolonia Flores Rotela, 1968~)라는 12살 소녀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아순시온 병원에 입원하자 스트로에스네르는 그 병원을 2번 방문하고는 그녀에게 '널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고 '보호'하겠다'며 그녀를 '입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스트로에스네르에게 "그는 왜 나에게만 교육을 제공하는 것일까? 어떻게 그는 굶주리고 학교도 없는 자신의 백성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했고, 그들은 그에게 총알만 바쳤을까"라며 과라니어로 반항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 말을 들은 스트로에스네르는 아폴로니아를 또 다른 게릴라로 '기소'하도록 명령했고 경찰은 아폴로니아를 게릴라로 기록해 그녀를 구금한 후 고문, 강간했다. 참고로 그녀는 파라과이 역사상 가장 어린 '게릴라'였다고 한다.


2.6. 몰락[편집]


1987년 4월, 이듬해 있을 대선을 위해 일시적으로 계엄령을 해제했지만 야당 정치인들은 계속해서 체포되었고 1988년 2월 대선에서 89%의 득표율로 7번째 재선에 성공했으나 스트로에스네르는 이 무렵부터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받고는 요양 중이었는데 1989년 2월 3일 최측근이었던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장군[21]이 주도한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군부는 스트로에스네르의 아들이 뒤를 이어 집권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두 아들 중 큰 아들 구스타보(Gustavo Stroessner, 1945~2011)는 한때 유력한 후계자였고[22] 작은 아들 알프레도(Hugo Alfredo Stroessner, 1947~1993)는 코카인 중독자였다.

또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장군을 필두로 한 콜로라도당의 전통주의자파는 보다 인도적인 통치 방식을 선호하면서 스토로에스네르와 갈등을 빚었다. 1989년 1월 스트로에스네르는 친(親)로드리게스 장군들을 해임하고 자신의 충성파 세력으로 채워넣었다. 같은 해 2월 2일엔 로드리게스 장군을 불러 최후 통첩을 날렸으나 다음날인 2월 3일에 군사 쿠데타로 화답받아 하루도 안 돼서 실각했다[23].

한편 파스토르 코로넬은 스트로에스네르의 축출 직후 투옥되었고 정치범에 대한 여러 고문과 살인에 대한 책임과 개인적 연루로 인해 징역 25년을 선고받은 후 2000년 9월 19일에 비만으로 인한 심혈관 합병증으로 향년 81세를 일기로 옥사했는데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견해를 결코 바꾸지 않고 독재 정권에서 자신이 자행한 악행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2.7. 말년[편집]


악질 독재자로서의 행보로 인해 법정 최고형[24]도 갈 뻔했으나 국외 망명이 허용되어 쿠데타로부터 이틀 뒤인 2월 5일에 브라질로 망명했다. 브라질로 망명한 스트로에스네르는 맏아들 구스타보와 함께 브라질리아 인근의 라고 술(Lago Sul)에 있는 '장관의 반도(Península dos Ministros)'라고 불린 부촌에 있는 수영장과 전용 엘리베이터가 딸린 침실이 8개나 되는 집[25]에서 살았는데 자신의 거주지 인근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거나 파라노아 호수 인근에서 일광욕을 하러 나가는 것 외에는 이웃들조차 모습을 잘 보지 못했을 정도로 은둔 생활을 해 나갔지만[26] 때때로 자신의 저택에서 콜로라도 당원들과 파라과이 정치인들을 맞이하거나 발코니에 앉아 집 옆에 있는 어린이집의 아이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브라질에서 스트로에스네르는 자중하면서 생활했는지 브라질리아에서 일어난 그 어떠한 정치적 스캔들에도 연루되지 않았다.

한편 스트로에스네르는 궐석재판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 사이에 1992년 12월 22일에는 변호사 출신 인권운동가 마틴 알마다[27]에 의해 파라과이의 람바레시에서 파라과이를 위시하여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군부정권의 비밀경찰의 만행들이 적나라하게 적힌 문서 70만 개가 보관된 '테러 아카이브(Archivos del Terror)'가 발견되었다. 이런 와중에 1993년 1월 8일에는 막내아들인 휴고 알프레도가 자살하는 일도 겪었으며 말년에는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라고 술에 있는 다른 단층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2.8. 최후[편집]


원래 스트로에스네르는 파라과이로 돌아가 고국에서 죽으려고 했지만 파라과이 정부에 의해 강력한 비난과 체포의 위협을 받았고 결국 스트로에스네르는 2006년 7월 16일에 탈장 수술을 받은 후 폐렴 합병증이 악화되어 삽관 치료까지 해야 했으며 그로부터 정확히 1달 뒤인 [2006년 8월 16일 오전 11시에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브라질리아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94세를 일기로 피부암과 폐렴 합병증으로 인한 패혈성 쇼크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스트로에스네르의 몸무게는 겨우 45kg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사망 하루 뒤인 8월 17일에 그의 가족들과 친구 일부만 참여한 가운데 브라질리아의 공동묘지에 비공개로 매장되었다.

그가 죽을 때 파라과이 사람들은 과거의 일이라며 그의 죽음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당시 니카노르 두아르테 대통령은 스트로에스네르의 국장은 물론이고 유해 송환도 거부하여 지금도 스트로에스네르는 브라질리아의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참고로 스트로에스네르의 사망 당일 파라과이 하원 회의에서 후안 비센테 라미레즈(Juan Vicente Ramírez) 차관은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1분간의 묵념을 제안했지만 이에 항의한 의원들이 자리를 떠나면서 회의는 중단되었다.

한편 스트로에스네르의 아내는 남편이 쫓겨난 후 남편이랑 같이 브라질로 도피했다가 후에는 미국의 마이애미로 이주했으며 남편의 사망으로부터 약 반 년 전이었던 2006년 2월 3일에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날은 남편을 몰아낸 쿠데타가 일어난 지 정확히 17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파라과이의 젊은 사람들 중에는 상술한 만행들에도 스트로에스네르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이는 파라과이에서 스트로에스네르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야당 상원의원 에스페란자 마르티네즈(Esperanza Martínez, 1959~)의 말에 따르면 '독재 정권의 종식은 정권 자체의 주역들에 의한 똑같은 구 체제의 개편에 불과하며, 그들은 동일한 정치 및 경제 모델을 그대로 두었다'고 언급했고 파라과이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그의 독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2009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파라과이 국민의 41%는 스트로에스네르가 여전히 집권했다면 나라가 더 잘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며 스트로에스네르의 추종자들은 늦어도 2018년까지 '행복한 날'에 파라과이의 대통령궁 앞에서 스트로에스네르의 생일을 성대하게 축하하는 파티를 지속해 왔고 덤으로 2018년에 당선된 전 파라과이 대통령인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28]의 아버지는 스트로에스네르 시기 대통령비서실장이자 '황금 4인조'의 일원으로 알려진 최측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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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성씨는 독일 성씨 슈트뢰스너(Strößner)가 스페인어식으로 변한 것이다.[2] 1954년 5월 5일 ~ 1954년 8월 15일[3] 71.6%의 득표율을 기록한 1968년 대선을 제외하면 모두 84% 이상의 득표율을 확보했다.[4] 20세기는 물론이고 전체 아메리카의 지도자 중에선 피델 카스트로 다음으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참고로 피델 카스트로는 20세기 아메리카 지도자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비군주 지도자 중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인물이기도 하다.[5]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브라질[6] 기절하면 그를 강제로 목욕시키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7] Miguel Ángel Soler, 1923~1975. 1946년 모리니고 정권이 일시적으로 정치 자유화 조치를 내렸을 때 외무장관직을 역임한 이력이 있으며 1950년 초 파라과이 공산당에 입당했다. 체포되기 직전에 자신이 운영하던 '앞으로(Adelante)'라는 지하 신문에 실어 출판할 후술할 스트로에스네르의 성추문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 고발을 뒷받침할 자료들과 증언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열람주의] 솔레르는 문자 그대로 산 채로 전기톱으로 썰려 죽었다고 한다.[8] 솔레르의 유해는 2009년 12월 23일에 경찰 특수 그룹의 개인 무덤에서 파편으로 발견되었고 2016년 8월 30일에 신원이 확인되면서 솔레르는 스트로에스네르 시기의 사망자 중 유해가 발굴된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원이 확인된 인물이 되었다. 실제로 현재까지 발견된 스트로에스네르 시기 사망자의 시체 36구 중 신원이 확인된 것은 솔러의 것을 포함해 4구에 불과하다.[9] Pastor Coronel, 1919~2000. 수사부에서 일하기 전에는 교육문화부에서 일했으며 120kg에 달하는 거구였다고 한다.[10] 이들은 콜로라도 행사에서 마체테를 높이 들어보이는 상징적인 행위를 하며 '마체테로스(Macheteros)'라고도 불렸다.[11] 실제로 스트로에스네르는 소모사의 안전을 개인적으로 보장하며 그 조항을 코로넬에게 맡겼다.[12] 번역하면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의 항구'라는 뜻이다.[13] 이 도시는 1989년에 시우다드델에스테로 개칭되면서 스트로에스네르의 흔적을 지웠다.[14] 다만 이 원주민 학살은 대부분이 농부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특정 대상에 대한 멸족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으나 적어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이 학살을 방치했다는 것만큼은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15] 실제로 파라과이는 현재까지도 남미에서 유일하게 대만과 수교한 나라이며 오늘날에도 파라과이는 대만의 수교국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6] Eduard Roschmann, 1908~1977, 슈츠슈타펠대위급 직위였던 '최상급돌격지도자' 직급을 가졌으며 1943~1944년에 라트비아의 리가 게토의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18시간의 강제노동과 처형, 빈사 상태의 수용자들을 굶주린 개에게 던져주는 등의 만행으로 최소 3천 명(10세 미만 어린이 800명 포함)의 목숨을 앗아간 인물이다. 1948년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목재 수출입 회사를 운영하다가 1976년에 서독이 그를 서독으로 인도하려고 하자 파라과이로 도피했고 1977년 8월 8일에 파라과이에서 사망했다.[17] 물론 이타이푸 댐 건설 과정에서 최소 8만 명의 원주민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추방당하고 건설 과정에서 160명의 노동자가 죽는 등의 어두운 면도 있었다.[18] 집권 당시에는 스트로에스네르의 휴양지로 쓰였다. 2021년 모습[19] 당시 파라과이 공산당 총서기. 페브레리스타당에서 활동할 때 1946년 모리니고의 일시적 정치 자유화 조치 과정에서 짧은 기간 동안 외무부 장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20] 그녀의 할아버지는 콜로라도당의 지도자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IMF의 관리였다고 한다.[참고자료] 출처 1 출처 2 출처 3 출처 4 출처 5 출처 6 출처 7[21] 스트로에스네르와 사돈 관계이기도 하다.[22] 동성애자라는 설이 있지만 아내와 자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스트로에스네르는 1982년 봄에 대대적인 동성애자 탄압 프로그램을 실시해 수백 명의 사람들을 체포하기도 했다.[23] 뒤를 이은 로드리게스는 민주화를 약속했으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전임자와 수준이 오십보백보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증했다.[24] 로드리게스는 취임 후 파라과이에서 사형제를 폐지했다.[25] 가격이 1,000만 헤알(한화로 약 24억 원)에 달했다.[26] 실제로 브리질에서 스트로에스네르는 외출할 때 항상 파라과이인 경호원을 동반한 채 차를 타고 갔다.[27] Martín Almada, 1937~. 1974년에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에 체포되어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고문을 당했으며 석방 후 프랑스로 망명을 갔다가 1992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1993년에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했다. 2021년 12월 6일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참고 자료[28] 비록 아버지가 쌓은 막대한 부 덕에 대통령의 손자가 다니던 명문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적어도 본인은 스트로에스네르가 축출될 때 만 17세의 소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스트로에스네르의 만행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