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투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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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팝
론 애쉬튼
데이브 알렉산더
스콧 애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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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cography ]





스투지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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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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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투지스
The Stooges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이기 팝, 스콧 애쉬튼, 론 애쉬튼, 제임스 윌리엄슨, 데이브 알렉산더
입성 연도
2010년
후보자격 연도
2008년
후보선정 연도
2010년
















스투지스
The Stooges

파일:582c954bcc2bb.image.jpg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결성
1967년
미국 미시건 앤아버
데뷔
1969년 8월 5일
데뷔 앨범
The Stooges
멤버
이기 팝 (보컬, 1967-2016)
스콧 애쉬튼 (드럼, 1967-2014)
론 애쉬튼 (기타, 베이스, 1967-2009)
데이브 알렉산더 (베이스, 1967-1970)
스티브 매카이 (테너 색소폰, 1970-1971, 2003-2015)
제임스 윌리엄슨 (기타, 1970-1971, 1972-1974, 2009-2016)
마이크 와트 (베이스, 2003-2016)
장르
프로토 펑크, 개러지 록, 하드 록
활동 기간
1967년 ~ 1971년
1972년 ~ 1974년
2003년 ~ 2016년
레이블
엘렉트라 레코드, 컬럼비아 레코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
2. 역사
3. 멤버
4. 디스코그래피



1. 개요[편집]


미국의 록 밴드. 프로토-펑크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비록 상업적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후대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밴드의 보컬 이기 팝은 흔히 펑크의 대부(Godfather of Punk)로 불린다.


2. 역사[편집]


스투지스는 보컬 이기 팝과 기타리스트 론 애쉬튼, 드러머 스콧 애쉬튼 형제, 베이시스트 데이브 알렉산더에 의해 1967년 미시간앤 아버에서 결성되었다.

밴드의 주축인 보컬 이기 팝(Iggy Pop), 본명 제임스 뉴웰 오스터버그 주니어(James Newell Osterberg Jr.)은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고등학교 스쿨밴드 이구아나스(Iguanas)의 드러머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블루스 스타일을 지향하는 로컬 밴드 프라임 무버스(Prime Movers)에 가입한 이후 과거에 적을 두었던 밴드 이구아나스에서 이기(Iggy)를, 그리고 머리와 눈썹을 민 자신의 친구 지미 팝에게서 팝(Pop)이라는 이름을 따왔다. 이기는 본래 드러머로 프론트맨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지만 도어즈의 공연을 보고 짐 모리슨에게 큰 영감을 받아 본격적으로 프론트맨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기 팝은 도어즈, 롤링 스톤즈, 제임스 브라운, 그리고 MC5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1967년 훗날 최초의 펑크 록 그룹으로 여겨지는 스투지스(Stooges)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보컬리스트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스투지스는 특유의 과격하고 단순한 음악과 프론트맨 이기 팝의 온갖 기행에 가까운 퍼포먼스로 금세 악명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신인 밴드를 발굴하려던 엘렉트라 레코드의 눈에 띄게 된다. 본래 MC5와 계약을 맺으러 공연장에 찾아온 관계자는 MC5 앞 차례로 공연하던 스투지스의 공연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밴드는 MC5의 계약 도중에 꼽사리 껴서(...) 레코드 계약을 맺게 된다.

엘렉트라와 계약 후 발표한 첫 음반 'The Stooges'는 프로토-펑크의 명반으로 후대 록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이 앨범에서 스투지스가 들려준 'I Wanna Be Your Dog'이나 'No Fun'같은 곡의 파격적인 가사와 밴드의 단순하고 직선적인 연주가 함께하는 개러지 록은 당대에 유래가 없는 독특한 음악으로 이후 펑크 록 음악의 청사진이 되었다. 이 앨범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전 멤버였던 존 케일에 의해 프로듀싱되었는데 케일은 근본적으로 클래식 음악현대음악에 조예가 있는 뮤지션이었고, 스투지스가 선보인 새로운 형태의 록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는지 앨범의 사운드를 마치 아트 록스러운 깔끔하고 단정한 사운드로 프로듀싱했다. 그는 수 차례의 스튜디오 작업으로 앨범의 사운드를 다듬었으며 피아노, 비올라, 심지어 'I Wanna Be Your Dog'에서는 징글벨을 연주해 넣기도 했다[1][2]. 밴드도 이러한 접근에 따라 'We Will Fall'같은 무려 10분에 달하는 명상적인 대곡을 만들기도 했다. 스투지스의 이러한 음악은 그러나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고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스투지스 앨범 중에서는 평가가 비교적 낮은 편이고 멤버들 역시 이 음반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반으로 평가받으며 음반의 역사성, 상징성을 중시하는 비평가들의 경우 이 앨범을 스투지스 최고의 앨범으로 꼽기도 한다.

비록 첫 음반이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밴드는 여전히 자작곡을 쓰고 공연을 다녔다. 한편 이 시기 멤버들은 서서히 대마초, 헤로인 등 각종 약물에 빠져들었고, 이기 팝은 아예 무대에 오를 때마다 LSD 한 알씩을 삼키고 공연하는 등 마약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밴드의 약물 중독이 심해질수록 이들의 라이브는 점점 더 과격해져갔고 이기 팝은 무대 위에서 자해를 일삼으며 특유의 악명높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한편 스투지스의 두 번째 앨범의 프로듀서는 존 케일이 아닌 60년대 개러지 록 밴드 더 킹스멘의 건반 주자였던 돈 갈루치(Don Gallucci)로 내정되었다. 자기가 프로듀싱할 밴드를 보러 간 갈루치는 밴드의 강렬하고 원초적인 라이브 공연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 밴드는 라이브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음반에 담아내야 한다"고 프로듀싱 노선을 굳힌다. 이렇게 시작된 스투지스의 2집 'Fun House'의 레코딩은 스튜디오 작업을 최소화하고 밴드가 라이브 공연에서 보여주는 강력한 사운드를 최대한 음반에 그대로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밴드는 최소한의 오버더빙을 제외하고는 모든 곡을 라이브로 녹음했고 심지어 트랙리스트마저 당시 공연의 세트리스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이렇게 완성된 Fun House는 당대 발매된 음반 중 가장 거칠고 혼란스러운 소리를 담고 있는 음반이 되었다. 앞면에 담긴 'Down on the Street', 'T.V. Eye'같은 곡부터 전작에 비해 횔씬 더 시끄럽고 강렬한, 원초적인 사운드를 갖고 있었고 앨범의 뒷면에서는 아예 곡의 형식조차 무너지고, 그들이 라이브에서 그랬듯 극단적인 소음과 이기의 절규로 이루어진 혼돈스러운 소리로 앨범을 마무리한다. 이 앨범은 대중적으로는 전작에도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며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일부 컬트적인 추종자들을 낳았고 후대의 펑크/노이즈 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Fun House'의 실패 이후 밴드는 사실상의 해체 상태에 돌입했다. 연이은 상업적 실패도 실패였지만 밴드 멤버들이 제대로 연주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심각한 마약 중독자들이 된 것도 한몫 했다. 이들이 더이상 정상적으로 공연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엘렉트라 레코드는 밴드와의 계약을 파기한다. 결국 1971년 7월 9일 스투지스는 공식적으로 해산한다. 밴드의 해산 이후 약물 재활 치료를 받으며 음악적 활로를 모색하던 이기 팝은 한 나이트클럽에서 데이비드 보위와 만나게 된다. 이기와 보위는 음악 취향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죽이 잘 맞아 곧 친구가 되었으며, 보위의 주선으로 이기는 컬럼비아 레코드와 새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된 이기는 고향 친구인 기타리스트 제임스 윌리엄슨[3]과 함께 영국으로 날아가 새로운 밴드 멤버를 물색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자 애쉬튼 형제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합류 요청을 한다. 이렇게 보컬 이기 팝, 기타 제임스 윌리엄슨, 베이스 론 애쉬튼[4], 드럼 스콧 애쉬튼의 새로운 스투지스의 라인업이 짜여졌다.[5] 이 새로운 밴드는 Iggy & the Stooges라는 명의로 세 번째 앨범 'Raw Power'를 발표한다. 이 음반의 곡들은 대부분 이기 팝과 제임스 윌리엄슨의 합작으로 작곡되었고, 전작의 극단적인 사운드를 의식해 거칠면서도 곡의 구조를 무너트리는 극단적인 시도는 하지 않고 기존 록 음악에 가깝게 곡을 유지시키는 중도적인 성향을 보였다. 앨범의 프로듀싱과 믹싱은 데이비드 보위의 작품이었는데, 이기 팝은 보위가 이 앨범을 지나치게 얌전하게 믹싱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6] 이 앨범은 당대 평론가들에겐 호평이었으나 여전히 팔리지 않으며 또다시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이렇듯 스투지스의 상업적 성과는 늘 기대에 못 미쳤지만 이 앨범은 역대 최고의 펑크 앨범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위상이 높고 일반적으로 스투지스의 최고작으로 꼽힌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이 앨범을 끝으로 스투지스와의 계약을 파기했으며 밴드는 이후 공연을 돌다가 1974년 2월 다시 해체되었다.

밴드의 해체 이후 이기 팝은 데이비드 보위와 어울리며 솔로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기의 솔로 활동이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자, 스투지스에 대한 재조명 역시 시작되었다. 펑크 록 혁명 이후 이들의 음악은 재발굴되었으며 펑크의 시초 격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스투지스는 이 재평가의 흐름을 받아 해산한지 30년만에 원년 멤버로 2003년 재결성했고 멤버들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라이브 퍼포먼스로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 'The Weirdness'와 'Ready to Die'의 정규 앨범 두 장을 냈으나, 아쉽게도 라이브와는 달리 앨범의 퀄리티는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후 꾸준히 투어를 이어가다 2009년 1월 론 애쉬튼이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이에 밴드는 기타리스트 자리에 제임스 윌리엄슨을 영입해 다시금 활동에 나섰으나, 2014년 스콧 애쉬튼 역시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결국 2016년 다시 해체했다. 제임스 말로는 원년 멤버는 이기와 자신 밖에 안 남았는데 스투지스로 활동할 이유가 없고, 투어 도는 것에도 지쳤던 게 큰 해체 이유라고. 이기 솔로와 밴드 간의 균형 맞추는 일도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기는 다시 솔로 활동으로 돌아갔다. 이기 팝의 솔로 활동은 본인 문서를 참고.


3. 멤버[편집]


이기 팝(1947~)(보컬) : 펑크의 레전드격 인물, 문서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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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 애쉬튼(1948~2009) (기타, 베이스): 1집, 2집에서는 기타를 쳤고 3집에서는 베이스를 쳤다. 밴드가 해체된 후에는 동생 스콧 애쉬튼과 Destroy All Monsters, Dark Carnival 등의 디트로이트 펑크 밴드에서 활동했다. 롤링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60등을 했다.

파일:151221-A1-07a_1920_150dpi.jpg
• 스콧 애쉬튼(1949~2014) (드럼): 론 애쉬튼의 동생으로 밴드 해체 후 형 론과 함께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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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브 알렉산더(1947~1975) (베이스): 팀에서 가장먼저 마약에 중독되었다. Fun House 앨범의 공연에서 마약에 취한 상태로 연주를 했는데 다 틀리게 연주하고 화가난 이기에 의해서 해고 당했다. 1975년에 알콜중독으로 27세에 사망했다.

파일:marshallamp.jpg
• 제임스 윌리엄슨(1949~) (기타): Raw Power 앨범 부터 참여했다. 스투지스가 2003년 재결합하고 2009년 론 애쉬튼의 사망으로 다시 밴드에 참여했다.


4. 디스코그래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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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서 이 곡의 유튜브 댓글을 보면 "가장 저속한 크리스마스 캐럴"이니 "산타클로스가 썰매 과속할 때 듣는 음악"이니 하는 드립이 잔뜩 달려있다(...)[2] 묘한 것은 존 케일은 이미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멤버로서 White Light/White Heat라는 빡센 노이즈 록 음반을 만든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투지스의 과격한 면모를 확 죽이는 프로듀싱을 한 것.[3] 스투지스 해체 직전 마약 중독으로 빠진 론 애쉬튼의 대타 기타리스트로 공연한 경력이 있다.[4] 이기가 제임스 윌리엄슨이 기타 실력이 더 낫다고 여겨 론 애쉬튼을 강제로 베이스로 밀어냈다. 론 애쉬튼은 죽을 때까지 이를 굴욕으로 여겼다.[5] 원 베이시스트 데이브 알렉산더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도저히 밴드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후 27세의 나이로 급성 폐기종으로 사망한다.[6] 이후 이 앨범의 1997년 재발매 당시 이기 팝이 직접 이 앨범을 재믹싱했지만 지나치게 크고 거칠어진 소리로 크게 호불호가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