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드라구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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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테판 드라구틴.jpg
이름
스테판 드라구틴
(영어: Stefan Dragutin, 세르비아어: Стефан Драгутин)
출생
1250년에서 1253년 사이
사망
1316년 3월 12일
직위
세르비아 국왕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세르비아 왕국의 5대 국왕.


2. 생애[편집]


스테판 우로시 1세와 앙주의 엘레나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언제 출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으나, 부모가 결혼한 1250년에서 1253년 동생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의 출생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십대 때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손녀 카테리나와 결혼했으며, 1268년 전쟁 도중 스테판 우로시 1세를 사로잡은 헝가리 측은 드라구틴이 더 많은 권력을 얻고 국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다는 조건을 달고 풀어줬다. 이후 그는 '하위 왕'으로 언급되었지만, 우로시는 약속과는 달리 그에게 실권을 넘기지 않았고 영지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기까지 했다.

1275년 두브로브니크와의 전쟁 직후, 새로 확보한 영토를 자신의 영지로 양도해달라고 요구했다. 부친이 이번에도 거절하자, 1276년 헝가리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가트스코 전투에서 부친을 물리치고 소포차니 수도원에 보내버리고, 새 국왕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 엘레나에게 광대한 영토를 할당할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 밀루틴은 테살리아의 데스포티스 요안니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딸과 결혼하여 어머니의 궁정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궁정은 2개로 나뉜 꼴이 되었고, 그동안 스테판 우로시 1세의 중앙집권 정책에 억눌러 있던 지방 귀족들은 이 틈을 타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후 헝가리에 의지해 왕위를 유지하려 애썼으며, 두브로브니크와의 조약을 갱신하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을 대적하는 시칠리아 왕국과도 동맹을 유지하였지만, 미하일 8세가 헝가리와 관계를 개선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직접적인 무력 충돌을 벌이지도 않았다. 단지 1281년 시칠리아군이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 소규모 세르비아 부대가 동로마 제국의 변경 지대를 습격했다가 시칠리아군이 패배하자 본국으로 철수했을 뿐이다. 하지만 미하일 8세는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세르비아로 쳐들어가 리플리얀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로 귀족들의 신망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1282년, 그는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졌다. 부상이 심각해 생명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대주교 다니엘 2세의 전기 <성 스테판 드라구틴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데제프에서 평의회를 소집한 뒤, 건강상의 이유로 동생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드라구틴이 치료 결과를 기다리지도 않고 즉각 양위를 선포했다는데 의문을 제기하며, 데제프 평의회는 세르비아 귀족들의 주도로 소집되었고, 동로마 제국에게 수모를 당한 데 불만이 있던 그들은 왕의 중상을 핑계로 양위를 단행했다고 추정한다. 이후 세르비아 북부 일대를 영지로 받았다.

그는 세르비아 북부 일대에 정착한 뒤 한동안 밀루틴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283년 동로마 제국에 대한 밀루틴의 원정에 참여해 마케도니아를 통과하여 에게 해 연안에 도달했고, 여러 도시와 요새를 점령했다. 그 후 밀루틴이 계속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는 북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284년 헝가리를 압박하여 마흐바, 베오그라드, 우소라와 솔리를 확보했다. 당대 사람들은 베오그라드를 근거지로 두고 통치하는 그를 '슬렘의 왕'으로 불렀다. 또한 1284년 장남 블라디슬라프가 헝가리 왕족인 콘스탄차 모로시니와 결혼했다. 이렇듯 세력이 강성해지자, 그는 나폴리, 베네치아, 로마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밀어낸 밀루틴에게 칼을 갈기 시작했다. 1291년경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한편, 불가리아의 브라니체보를 공동으로 통치하던 보야르 다르만과 쿠델린은 마흐바 일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헝가리는 이들을 상대로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를 거듭하기만 했다. 마흐바를 받아낸 뒤 두 보야르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일으켰다. 브라니체보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원정이었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세르비아군이 브라니체보에서 철수한 뒤, 다르만과 쿠델린은 타타르 용병대를 고용하여 그의 영역으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밀루틴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밀루틴은 이에 응해 그와 함께 브라니체보로 쳐들어갔다. 1290년 브라니체보가 함락되었고, 이 지역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1292년, 불가리아 비딘의 데스포티스 시슈만 1세는 브라니체보를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세르비아로 쳐들어가 페슈를 습격했다. 밀루틴과 즉각 반격에 나서 비딘을 포위했다. 시슈만 1세는 다뉴브 강으로 달아난 뒤 후원자인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에게 의지했다. 밀루틴은 노가이 칸의 개입을 두려워해 빼앗아간 불가리아 영역을 모두 돌려주고 아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를 인질로 보냈다. 1299년 노가이 칸이 토그타 칸과의 전쟁 도중 살해되자,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밀루틴은 아들에게 제타를 영지로 하사했다. 제타는 전통적으로 왕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으므로, 데찬스키가 새 왕으로 예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동생의 이 같은 조치에 분노했다. 이보다 앞서, 세르비아 왕위를 넘길 때 차기 후계자는 자신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밀루틴은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는 아들 블라디슬라프의 미래를 위해 반란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밀루틴은 그의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의 딸인 시모니다를 다섯번째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세르비아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지속하여 마케도니아 일대를 정복하고 싶었기에, 그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1300년, 내전은 기어이 발발했다. 세르비아의 대다수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고, 밀루틴은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았다. 상황은 그에게 유리했지만, 그는 이를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다. 1301년 1월 헝가리 왕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한 뒤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3세를 지지하는 세력과 카로이 로베르트를 지지하는 앙주 세력과의 내전이 발발했다. 아들 블라디슬라프의 헝가리에서의 지분 때문에, 그는 이 내전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생 밀루틴과의 전쟁을 벌이는 동시에 헝가리에도 병력을 보내야 했고, 이로 인해 밀루틴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한편 밀루틴은 귀족들에게 버림받았지만 은광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이어갔다. 1302년 밀루틴이 루드릭의 은광을 점유한 뒤, 두 사람은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1303년 협약은 파기되었고, 전쟁은 10여 년간 지속되면서 세르비아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1308년, 카로이 로베르트가 최종적으로 헝가리의 왕이 되었다. 드라구틴은 로베르트에게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하였고, 이로 인해 헝가리와 적대관계가 되어버렸다. 밀루틴이 1311년 말 또는 1312년 초에 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고위 성직자들이 나서서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두 통치자는 전쟁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기로 했고, 데찬스키의 세르비아 왕위 승계를 인정했다. 그 대신, 그의 아들 블라디슬라프는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기로 했다. 1314년 2월, 그는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서 카로이 로베르트와 평화 협약을 맺어 헝가리와의 전쟁도 종식하였다.

1314년 2월 8일, 그의 어머니 엘레나가 사망했다. 세르비아 수도 라스에서 추도식이 열렸지만 그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밀루틴이 자신을 잡으려 들까 두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밀루틴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반란을 일으켰다. 밀루틴은 반란을 가차없이 진압하고, 감옥에 오래 가두었다. 그 후 라스로 찾아가 어머니의 무덤에 참배하였고, 밀루틴과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오래도록 품었던 앙금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테옥티스토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고, 스렘의 왕위를 블라디슬라프에게 넘겨줬다. 그는 마흐바의 정교회 포교를 지원하였으며, 여러 곳에 교회와 수도원을 지었다. 1316년 3월 12일에 숨을 거뒀고, 뒤르셰비 스투포비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밀루틴은 형이 사망한 직후 협약을 파기하였고, 1319년 블라디슬라프를 몰아내고 스렘 일대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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