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 뮤지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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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 뮤지얼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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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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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탠 뮤지얼
Stan Musial

포지션
외야수
득표수
571,279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42
1944
1946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Musial%20Stan%20Plaque_NBL.png
스탠 뮤지얼
헌액 연도
1969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3.24% (1회)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4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모트 쿠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스탠 뮤지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마티 매리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4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필 카바레타
(시카고 컵스)

스탠 뮤지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밥 엘리엇
(보스턴 브레이브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4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밥 엘리엇
(보스턴 브레이브스)

스탠 뮤지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재키 로빈슨
(브루클린 다저스)






파일:stan-musial-in-color1.jpg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No. 6
스탠리 프랭크 "스탠" 뮤지얼
Stanley Frank "Stan" Musial

출생
1920년 11월 21일
펜실베이니아 주 도노라
사망
2013년 1월 19일 (항년 92세)
미주리 주 라두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
183cm / 79kg
포지션
외야수, 1루수[1]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38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STL)
소속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41~1963)

1. 개요
2. 수상 경력
3. 생애
4. 사망
5. 플레이 스타일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7. 기타
8. 연도별 성적




1. 개요[편집]


Stan the Man[2]

[3]

미국의 전 아구 선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만 뛰었던 프랜차이즈 스타이며[4]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다. 단순히 카디널스 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체로 보아도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윌리 메이스와 비견할 만한 기록을 쌓은 선수이다. 별명은 'Stan the Man'.

2. 수상 경력[편집]


수상
3회 월드 시리즈 우승 (1942, 1944, 1946)
20회 올스타 (1943, 1944, 1946~1963)
3회 NL MVP (1943, 1946, 1948)
7회 NL 타격왕 (1943, 1946, 1948, 1950~1952, 1957)
2회 NL 타점왕 (1948, 1956)
6회 NL 안타왕 (1943, 1944, 1946, 1948, 1949, 1952)
8회 NL 2루타왕 (1943, 1944, 1946, 1948, 1949, 1952~1954)
5회 NL 3루타왕 (1943, 1946, 1948, 1949, 1951)


3. 생애[편집]


1920년 펜실베이니아 주 도노라에서 폴란드계 아버지와 체코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뮤지얼의 본명은 스타니스와프 프란치셰크 무시아우(Stanisław Franciszek Musiał)였고 그는 학교에 입학 할 때야 자신의 이름을 스탠리 프랭크 뮤지얼로 바꾸었다. 어릴적부터 동생과 다른 동네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해왔던 뮤지얼은 이웃이었던 전 마이너 리그 투수인 조 바바오에게서 야구를 배웠다. 뮤지얼이 15세 때 그는 조 바바오가 감독이었던 세미 프로 팀인 도노라 징크스[5]에 합류해 선발로 뛰었고 데뷔전에서 6이닝동안 13탈삼진을 잡았다. 이 때 상대는 모두 성인이었다.

한편 그는 도노라 고등학교에서도 야구를 했는데 이 때 팀 메이트였던 버디 그리피[6]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고등학교에서 도노라 그레이하운드(The Donora Greyhound)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뮤지얼은 야구농구를 병행하고 있었고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운동 장학금을 제안받게 된다. 한편 그를 투수로 주목해왔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뮤지얼에게 계약을 제안했고 뮤지얼은 반대하던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설득해 프로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계약이 곧바로 효력을 발생하지 않았기에 뮤지얼은 도노라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더 할 수 있었다.

마이너 리그에 입성한 뮤지얼은 첫 2년 동안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방출 위기에 몰렸지만 3년차에는 투수와 외야수로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시즌 막판 다이빙 캐치를 하다가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친 뮤지얼은 결국 타자로 완전히 전향하게 된다.

타자로 전업한 뮤지얼은 마이너 리그에서 4할이 넘는 타율을 올렸고 이에 1941년 팀은 시즌 막판 그를 메이저 리그로 승격시켰다. 첫 풀타임 시즌인 1942년 뮤지얼은 .315 .397 .490 10홈런 72타점에 2루타 32개와 3루타 10개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포스트시즌에서는 부진했지만 팀은 뉴욕 양키스를 꺾고 월드 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1943년 뮤지얼은 .357 .425 .562 13홈런 81타점에 2루타 48개와 3루타 20개를 기록하면서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고 팀을 챔피언십 시리즈로 이끌었다. 홈런은 13개로 다소 적은 숫자지만 총루타는 메이저 전체 1위를 기록하는 등 장타생산은 초창기 시절부터 독보적이었다. 이듬 해인 1944년 .347 .440 .549 12홈런 94타점에 2루타 51개와 3루타 14개를 기록하면서 팀을 월드 시리즈로 이끌었고 월드 시리즈에서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꺾고 우승했다.

1945년 군복무로 인해 경기에 나서지 못한 뮤지얼은 1946년 팀에 복귀해 .365 .434 .587 16홈런 103타점 2루타 50개 3루타 20개라는 성적을 올리면서 타격 6관왕[7]에 올랐고 자신의 두번째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팀을 다시 월드 시리즈로 이끌었다. 이 해 월드 시리즈에서는 내셔널 리그 타격왕이었던 뮤지얼과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이었던 테드 윌리엄스와의 대결로 주목 받았다. 정작 둘 모두 부진했지만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고 우승했다. 그리고 이것이 뮤지얼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본래 타고난 홈런 타자는 아니었으나 꾸준히 파워를 향상시켜 왔던 뮤지얼은 1948년 .376 .450 .702 39홈런 131타점 2루타 46개 3루타 18개라는 무시무시한 성적[8]을 올리면서 타격 9관왕[9]에 올랐다. 물론 그 해 MVP는 뮤지얼의 것이었다.

이후 1949년부터 1951년까지 3년 동안 MVP 2위[10]를 기록하는 등 1958년까지 꾸준히 정상급의 성적을 보여주었다.

1958년 통산 3000안타를 돌파했지만 홈런 수가 떨어진 뮤지얼은 이듬 해인 1959년 처음으로 타율 3할에 실패하며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해 테드 윌리엄스도 처음으로 3할에 실패했다.

만 41세였던 1962년 19번째로 참가한 올스타전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사람들이 나는 너무 어리고 당신은 너무 늙었다고 하는데 우리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합시다"[11] 라는 말을 들은 뮤지얼은 .330 .416 .508 19홈런 82타점 2루타 19개 3루타 1개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약속을 지켰지만 케네디는 이듬 해 11월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

뮤지얼은 1963년을 마지막으로 수많은 기록을 남긴 채 은퇴하게 된다. 22시즌 동안 뮤지얼이 기록한 통산 성적은 .331 .417 .559 wRC+ 158 fWAR 126.8 bWAR 128.2와 475홈런 1,951타점 3,630안타였다.[12]

이후 뮤지얼은 1967년 카디널스의 단장으로 복귀해서 월드 시리즈 우승에 성공했으며, 우승 이후 단장직에서 물러나 1980년까지 카디널스의 부사장 겸 단장 특별 보좌역으로 재직했다.


4. 사망[편집]


2013년 1월 19일 노환으로 인해 향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13] 그가 별세한 후 내셔널 하키 리그세인트루이스 블루스에서는 모든 선수들이 뮤지얼의 등번호와 이름이 새겨진 저지를 입고 나와 경기하는 추모 행사를 가졌고 4월 9일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7월 3일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경기가 스탠 뮤지얼 메모리얼 데이로 열렸으며, 스탠 뮤지얼의 손자가 시구를 맡았다. 공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알버트 푸홀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뮤지얼은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후 7번[14]이나 타격왕을 차지한 타격의 달인이었다. 이를 상징하는 또 다른 기록이 3,630안타로 행크 애런에 의해 경신되기까지 내셔널 리그 1위의 기록이었고 현재로 따져도 메이저 리그 4위[15]다. 한편 뮤지얼의 통산 월간 타율은 모두 .323 이상이며 주전으로 활약했던 16시즌 연속 .31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7번의 타격왕이라는 업적에 의해 가려졌지만, 사실 그는 6번의 30홈런 시즌을 만들어낼 만큼 뛰어난 장타력을 보유했으며, 22년의 선수 생활동안 기록한 통산 장타율 .559는 그의 압도적인 장타 생산력을 증명한다. 단순히 홈런을 제외하고도 장타를 수없이 때려댔는데, 그가 기록한 6,134총루타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전체 3위이자 역대 좌타자들 중 1위이며, 그의 밑으로 수많은 홈런 타자들이 줄지어 있다. 1위는 행크 애런, 2위는 알버트 푸홀스. 통산 도루는 적지만 3루타로 자신의 속도를 보여주었던 뮤지얼은 라이브볼 시대 이후, 홈런보다 보기 희귀해진 3루타를 심심찮게 때려냈으며 5번이나 리그 3루타 1위를 기록하였다. 통산 3루타 횟수는 무려 177개.

그리고 그가 쌓아온 대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까지도 카디널스 구단에서 대부분의 타격 기록은 그가 보유하고 있다.[16]

메이저 리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위대한 강타자로 평가받는 뮤지얼이지만 의외로 미묘하게 저평가 받았던 선수이기도 하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아무래도 동시대에 앞서 언급한 테드 윌리엄스나 조 디마지오를 비롯해 미키 맨틀, 윌리 메이스, 행크 애런처럼 그 이상의 성적과 명성을 날린 타자들이 많이 있었고[17] 7회 타격왕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마지막 4할 타율56경기 연속 안타 때문에 다소 덜 부각되는 탓도 있다.

데드볼 시대 선수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트리스 스피커가 동시대의 절대자였던 전설의 4할 타자 타이 콥[18]에게 밀린 기록 때문에 후대에 관심을 못 받았고, 에디 콜린스[19]가 블랙삭스 스캔들과 같은 2루수인 후배 로저스 혼스비[20]에 의해 심히 인지도가 떨어져서 저평가된다면, 라이브볼 시대 선수 중에서는 스탠 뮤지얼이 가장 저평가된다고 볼 수 있다.[21] 둘다 오히려 일찍 은퇴한 조 디마지오나 미키 맨틀보다는 역대 탑10 야수 혹은 타자에 더 어울리는 엄청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디마지오랑 WAR이 비교도 안 된다 메이저리그 전체 최고 레전드 라인의 구성원인데, 그냥 카디널스 레전드나 레드삭스 레전드나 인디언스 레전드[22]라는 식으로 프랜차이즈 레전드로 평가받고 끝날 선수들이 아니다.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스탠 뮤지얼
116
390
452 (역대 1위)
76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Right Field (3rd)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스탠 뮤지얼
128.1
64.2
96.2
우익수 HOF 입성자 평균
73.2
43.0
58.1


7. 기타[편집]


  • 뮤지얼은 실력뿐만 아니라 훌륭한 성품과 성실함을 갖춰 팬들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선수 생활 동안 단 한번도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과 벤치의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라운드의 신사였다.

  • 종목은 다르지만 축구의 스탠리 매튜스와 유사한 점이 많다. 둘다 이름에 스탠이 들어가고, 각 종목에서 최고의 상이라 할 수 있는 MVP와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각 나라 최고 권위의 훈장을 받았다는 점도 똑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단 한번도 심판의 판정이나 경고를 받은 적이 없는 그라운드의 신사였다.


  • 1958년 10월 21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을 방문해 서울운동장에서 전서울군과 친선 경기를 열었는데, 그는 김양중이 던진 스트라이크로 들어온 공이 볼 판정을 받자 다음 공에 일부러 헛스윙해 삼진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신사적인 쇼맨십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 중 하나.[23]

  • 올스타전이 연장전에 접어들자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 포수였던 요기 베라가 뮤지얼에게 지루하다는 식의 얘기를 하자 자기가 끝내주겠다고 한 뒤 끝내기 홈런을 날린 적이 있다.

  • 1957년 올스타전에서는 신시내티 레즈 팬들의 올스타 투표 몰표 사건이 일어났는데 8명의 포지션 플레이어들 중에서 무려 7명이 레즈의 선수들로 도배되었지만 유일하게 뮤지얼의 자리만 지켜졌다.[24]

  • 1973년에는 미시간 주에 있는 폴란드계 미국인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1989년 세인트루이스 시 명예의 거리에 입성했고 2000년에는 미시간 주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 2006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월드 시리즈 5차전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고 2009년 올스타전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시구용 공을 전달하기도 했던 그는 2011년 2월 15일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받았다.


8.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스탠 뮤지얼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41
STL
12
49
20
4
0
1
8
7
1
2
1
.426
.449
.574
1.023
0.6
0.7
1942
140
536
147
32
10
10
87
72
6
62
25
.315
.397
.490
.888
5.5
5.3
1943
157
701
220
48
20
13
108
81
9
72
18
.357
.425
.562
.988
9.9
9.5
1944
146
668
197
51
14
12
112
94
7
90
28
.347
.440
.549
.990
9.3
8.9
1945
징병으로 인한 군복무
1946
156
702
228
50
20
16
124
103
7
73
31
.365
.434
.587
1.021
8.8
9.3
1947
149
678
183
30
13
19
113
95
4
80
24
.312
.398
.504
.902
4.5
5.1
1948
155
698
230
46
18
39
135
131
7
79
34
.376
.450
.702
1.152
11.1
11.3
1949
157
722
207
41
13
36
128
123
3
107
38
.338
.438
.624
1.062
9.2
9.2
1950
146
645
192
41
7
28
105
109
5
87
36
.346
.437
.596
1.034
6.6
7.2
1951
152
678
205
30
12
32
124
108
4
98
40
.355
.449
.614
1.063
8.6
8.8
1952
154
678
194
42
6
21
105
91
7
96
29
.336
.432
.538
.970
7.8
7.6
1953
157
698
200
53
9
30
127
113
3
105
32
.337
.437
.609
1.046
7.5
7.6
1954
153
705
195
41
9
35
120
126
1
103
39
.330
.428
.607
1.036
7.3
6.5
1955
154
656
179
30
5
33
97
108
5
80
39
.319
.408
.566
.974
5.8
6.2
1956
136
682
184
33
6
27
87
109
2
75
39
.310
.386
.522
.908
4.8
5.5
1957
134
579
176
38
3
29
82
102
1
66
34
.351
.422
.612
1.034
6.1
6.1
1958
135
549
159
35
2
17
64
62
0
72
26
.337
.423
.528
.950
4.0
4.1
1959
115
404
87
13
2
14
37
44
0
60
25
.255
.364
.428
.792
0.4
0.3
1960
116
378
91
17
1
17
49
63
1
41
34
.275
.354
.486
.841
1.7
1.9
1961
123
431
107
22
4
15
46
70
0
52
35
.288
.371
.489
.860
2.3
2.6
1962
135
505
143
18
1
19
57
82
3
64
46
.330
.416
.508
.924
4.0
1.6
1963
124
379
86
10
2
12
34
58
2
35
43
.255
.325
.404
.728
1.2
1.3
MLB 통산
(22시즌)

3026
12721
3630
725
177
475
1949
1951
78
1599
696
.331
.417
.559
.976
126.8
1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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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뮤지얼은 외야수로 1,890경기, 1루수로 1,016경기를 출장하는 등 2개 포지션에서 통산 1,000경기 이상을 출장한 역대 최초의 선수이다. 외야수로 데뷔했던 뮤지얼은 팀의 사정에 맞춰 외야수와 1루수를 거의 매년 번갈아 맡았으며 두 포지션을 동시에 소화한 시즌도 있었다.[2] 1952년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원정경기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뮤지얼을 보고 몇몇 다저스팬들이 "그가 나온다!(Here comes the man!)"라고 외치던 게 그의 별명으로 굳어졌다.[3] 오늘날에 The Man이라고 하면 대충 '싸나이' 정도의 어감으로 매우 흔히 사용되지만, 당대의 구어로 The Man이라고 하면 '그분'이라고 보면 되며, 뉘앙스 측면에서 최고의 권력자 또는 존경을 받는 인물이나 파워 엘리트 등으로 받아들여진다. 앞에서 언급된 일화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남자' 정도의 의미가 아니였다. 훗날 로스엔젤레스 에인절스가 알버트 푸홀스를 영입하면서 The Man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엘 옴브레(El Hombre)라는 별명을 붙여서 밀어주려 하자 나로서는 감히 그렇게 불릴 수 없다며 거절했을 정도. 그와 동일한 이름을 쓴 스탠 리 역시 Stan 'The Man' Lee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4] 이후 등장한 그의 후계자로는 2000년대 최고의 야구 선수인 알버트 푸홀스가 꼽힌다. 생전 뮤지얼은 푸홀스가 카디널스에 남아 자신의 기록들을 깨주기를 원했지만 계약 문제로 인해 에인절스로 떠나자 섭섭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5] Donora Zincs, Zinc는 아연이란 뜻이다[6] 켄 그리피 시니어의 아버지이자 켄 그리피 주니어의 할아버지. 그러나 시니어가 2살일 때 집을 나갔다고 한다.[7] 타율-장타율-득점-안타-2루타-3루타 1위.[8] 뮤지얼이 1948년 기록한 103장타는 1995년 알버트 벨이 다시 103개를 기록하기 전까지 아무도 달성하지 못했다.[9] 타율-출루율-장타율-득점-타점-안타-2루타-3루타-총루타 1위. 홈런 1개 차이로 타격 10관왕을 놓쳤다. 이 해 홈런왕은 40홈런을 기록한 랄프 카이너와 조니 마이즈였다.[10] 1949년 : .338 .438 .624 36홈런 123타점 2루타 41개 3루타 13개
1950년 : .346 .437 .596 28홈런 109타점 2루타 41개 3루타 7개
1951년 : .355 .449 .614 32홈런 108타점 2루타 30개 3루타 12개
[11] 케네디는 1917년생으로 이 당시 미국 최연소 대통령이었고, 스탠은 1920년생으로 야구선수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 물론 케네디가 뮤지얼보다 3살 많긴 했다.[12] 흥미롭게도 홈, 원정 경기에서 정확히 절반씩인 1,815개를 기록했다.[13] 공교롭게도 같은 날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명감독 얼 위버가 숨졌다.[14] 역대 타격왕 수상자 1위는 타이 콥의 12회, 2위 토니 그윈호너스 와그너의 8회, 3위는 뮤지얼과 로저스 혼스비.[15] 1위는 피트 로즈, 그 이후로 타이 콥, 행크 애런, 뮤지얼로 이어진다.[16] 그리고 그의 기록들을 깰 것으로 예상되던 게으른 천재 후배가 세인트루이스를 떠나면서 앞으로도 수십년 정도는 그의 기록으로 남게 될 듯하다.[17] 일반적으로 선수의 급이 비슷하다면 500홈런 타자와 3,000안타 타자 중 500홈런을 더 높게 치는 경향이 있다.[18] 트리스 스피커 아니었으면 1907~1919년까지 13년 연속 타격왕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울 뻔했지만, 중간에 1916년에 트리스 스피커가 타격왕을 하는 바람에 9년 연속 타격왕 및 12회 타격왕으로 그쳤다. 스피커는 타이 콥만 없었어도 타격왕 여러번 먹었을 선수이다.[19] 메이저리그 전체 통산 야수 WAR 10위 안에 들고, 투수까지 넣고 전체 선수로 해도 15위 안에 드는 위대한 2루수이다. 교타와 도루의 달인이자 2루 수비의 지존이라 불렸다. 선수 말년에 베이브 루스와 MVP 경쟁도 했을 정도. 문제는 2루수 1위가 로저스 혼스비라 2루수로는 2위라는 것. 심지어 20대에는 최고스타였지만, 30대 중반부터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선배 2루수 냅 라조이보다 저평가되기도 한다. 콜린스가 WAR 차이로 냅 라조이를 압도하는 넘사벽인데도 불구하고. [20] 막상 은퇴했을때는 이사람이 기자들한테 더 저평가받아서 4수 합격자 콜린스보다 더 늦게 명예의 전당에 가는 5수 합격의 대굴욕을 당했었다. 그래도 우타자로는 세계 프로야구 역사에서 객관적으로 비견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압도적인 타격 기록을 수없이 세웠다보니, 후세에 그의 생전 사생활 이미지를 모르는 전세계 야구팬들이 기록을 보고 재조명할 수 밖에 없었다. 혼스비는 달리기 느린 우타자가 2루수를 하면서도 좌타 1루수 루 게릭보다 더 뛰어난 타격을 했다고 봐야 하는 수준이다. [21] 루 게릭의 경우도 루 게릭병으로 은퇴한 것때문에 그 질병만 주목받아, 베이브 루스와도 비견되던 어마어마했던 기록들이 덜 주목받는 선수 중 하나다. 그러나 인기구단 양키스의 스타였기에, 뮤지얼이나 스피커, 콜린스 수준으로 심각하게 저평가 당하지는 않는다.[22] 스피커는 레드삭스와 인디언스 두 팀 모두를 우승시킨 선수이다. 레드삭스 시절에는 베이브 루스라는 위대한 투수와 팀을 이끌었고, 인디언스 때는 감독 겸 선수로 팀을 우승시켰다. [23] 이날 경기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시구를 던지기도 했다. #[24] 물론 메이저 리그 사무국은 조사에 착수해 투표의 절반 이상이 신시내티발 몰표임을 확인하고 포드 프릭 당시 커미셔너는 직권으로 행크 애런윌리 메이스를 다른 신시내티 선수 2명을 대신할 올스타로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