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야크 스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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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前 축구인


파일:Sjaak swart OV.jpg

이름
스야크 스바르트
Sjaak Swart
본명
이사야 스야크 스바르트
Jesaia Sjaak Swart
출생
1938년 7월 3일 (85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뮈데베르크
국적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신체
180cm
직업
축구선수(라이트 윙 / 은퇴)
소속
AFC 아약스 (1956~1973)
국가대표
31경기 10골 (네덜란드 / 1960~1972)
별명
Mr. Ajax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1. 개요[편집]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2. 선수 경력[편집]


파일:Sjaak swart YV.jpg

"Mr. Ajax"

프로 통산 603경기[1]

228골[2]


1949년, 11세의 나이에 아약스 아카데미 유소년 선수로 클럽에 합류한 스바르트는 1956년, 18세의 나이에 SC 텔스타와의 더치컵 경기에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처음에는 기존의 주전 선수들에 밀려 자주 소집 명단에서 제외되었지만 이따금씩 경기에 나설 때마다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당시 아약스를 지휘하던 카를 후멘베르거 감독에 의해 1군 주전 멤버로 발돋움했다.

결국 스바르트는 데뷔 시즌인 1956-57시즌, 아약스가 10년 만에 에레디비시 우승을 차지하도록 도왔다.

다음 시즌인 1957-58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아약스의 불세출 스트라이커인 헹크 흐루트와 함께 듀오를 이뤄 34경기에서 56골을 넣으며[3] 그 시즌 에레디비시를 폭격했다.

1958-59시즌, 스바르트는 21세 생일을 앞두고 두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60-61시즌에는 KNVB 베이커 우승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다음 시즌 리그에서 암울한 4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리그 컵 대회에서도 탈락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아약스는 매우 심각한 부진에 빠졌으며 스바르트 개인적으로도 지난 4시즌 중 가장 적은 골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62년 인터토토컵(당시 인터네셔널 챔피언스컵)에서 라이벌 팀인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4: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다시 부활의 불씨를 지피는 듯 보였으나 갈수록 암흑기에 빠지면서 1962년 리그 2위에 랭크되었던 아약스는 1965년 강등권까지 추락하고 만다.

하지만 1965년 아약스 선수 출신 감독인 리누스 미헬스가 감독으로 취임한 데 이어 희대의 천재 루키인 요한 크루이프의 등장으로 아약스의 천지개벽을 위한 촉매제를 제공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리누스 미헬스의 아약스 첫 번째 시즌에는 에레디비시 우승을 차지했으며 스바르트는 7시즌 연속 25경기 이상의 리그 경기 출전을 기록함과 동시에 개인 통산 다섯 번째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미헬스 감독의 지도 하에 그의 두 번째 시즌 또한 환상적이었다. 스바르트는 25골을 터뜨리며 아약스가 리그와 컵 우승을 차지해 더블을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다음 시즌인 1968년 아약스는 다시 한 번 리그 우승을 일궈내며 리그 3연패를 달성, 통산 13번째 에레디비시 우승컵을 손에 넣는 기쁨을 누렸다.

이렇게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여포마냥 독주하는 안방 호랑이 아약스였지만 유럽 대항전에서는 1966년 유러피언컵 8강 진출 기록이 팀의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을 만큼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미헬스의 토탈풋볼 철학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1969년, 스바르트와 아약스는 처음으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하는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경기에서 결승 상대인 AC 밀란피에리노 프라티에게 아약스의 수비진이 우후죽순으로 탈탈 털리면서 4:1로 대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충격적인 유러피언컵 대패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바르트는 개인 통산 5번째 시즌 15골을 기록하면서 리그와 컵 더블을 획득하는 데 다시 한 번 크게 기여했다. 33세인 스바르트의 경력은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유럽 챔피언에 오르기로 투지를 다졌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참사 2년 후인 1971년, 그와 아약스는 스코틀랜드 챔피언 셀틱 FC와 스페인의 거함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차례로 격파하고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다시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비록 스바르트는 신성 아리에 한에게 자리를 내줬지만 아약스가 파나티나이코스 FC에게 2:0으로 손 쉽게 승리를 거두면서 스바르트는 마침내 유럽 챔피언이 되었다.

이후에 스바르트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팀에 기여하기 위해 계속해서 헌신했다. 첫 유러피언컵 트로피를 든 다음해, 아약스는 모든 대회에서 5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구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그들의 하이라이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클럽의 2년 연속 유러피언 컵, 헬레니오 에레라와 인터 밀란카테나치오를 상대로 얻은 승리였다.
스바르트는 준결승 SL 벤피카전에서 결승골 터뜨려 팀을 결승으로 이끈 데에 이어 결승 인테르전에서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수비수 자친토 파케티를 반대 번호로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토탈풋볼의 정수를 보여주는 맹활약을 펼치며 카테나치오 플레이 시스템을 붕괴시켰고 결국 요한 크루이프의 2골로 인테르를 침몰시킨 아약스가 2연속 유럽 챔프 자리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1972년의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이후 35세의 스바르트는 아약스의 라이트 윙 포지션을 떠오르는 유망주인 요니 렙에게 양보하기 시작했고 트로피를 든 클럽 영웅으로 명예롭게 은퇴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스바르트는 1972-73시즌까지 뛰기로 결심했고 클럽에서 17년차에 접어든 윙어는 그의 동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스바르트는 1973년 9골을 넣어 리그 우승과 아약스가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이에른 뮌헨 등을 꺾고 다시 한 번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하는 데 일조했다. 결승전에는 요니 렙이 뛰었지만 결국 유러피언컵 3연패의 일원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1972-73시즌이 끝난 뒤 더이상 팀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한 스바르트는 36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4. 기록[편집]


파일:Mrajaxt.jpg

4.1. 대회 기록[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1] 아약스 역대 최다 출전 기록.[2] 아약스 역대 최다 득점 3위.[3] 흐루트는 38골을, 스바르트는 18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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