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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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당 전투
Battle of Sedan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일부
기간
1870년 9월 1일 ~ 9월 2일
장소
스당 프랑스
교전국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1803-1892).svg 프로이센 왕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국
지휘관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1803-1892).svg 총사령관 빌헬름 1세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1803-1892).svg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1803-1892).svg 프리드리히 왕세자[1]
파일:작센 왕국 국기.svg 알베르트 왕세자[2]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나폴레옹 3세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에마뉘엘 펠릭스 드 빔펜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장 오귀스트 마그리트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오귀스트 알렉상드르 뒤크로
결과
프로이센군의 승리
병력
200,000명
130,000명
피해
1,310명 전사
2,107명 실종
6,443명 부상
3,220명 전사
14,800명 부상
104,000명 포로

1. 개요
2. 배경
3. 전개




1. 개요[편집]


프랑스어: Bataille de la Sedan
영어: Battle of Sedan

1870년 9월 프로이센군뫼즈 강 연안 스당 요새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에게 포로로 잡히며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


2. 배경[편집]


프로이센군은 8월 내내 프랑스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략을 펼쳐 연승을 거두었다. 나폴레옹 3세는 노련한 아쉴 바젠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베젠은 느리고 우유부단했다. 그 결과 바젠이 이끄는 군 전체가 메츠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는 프랑스군에게 엄청난 타격이었고 나폴레옹 3세는 그를 구하기 위해 9만 명 이상의 병력을 모아 파트리스 드마크마옹 장군과 함께 진격했다.

프랑스군은 벨기에와의 국경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해 전선의 왼쪽 날개를 공격했지만,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간파한 후 프로이센 2개 군이 메츠를 포위하도록 남겨놓은 채 다른 2개 군을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8월 30일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조우한 프로이센군은 뷰몽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프랑스는 5,000명의 사상자를 낸 채 스당으로 퇴각했다. 나폴레옹 3세는 이곳에서 탄약과 물자를 보충한 후 다시 공격에 나서려 했지만 프로이센군은 쉴 틈을 주지않고 신속히 스당을 포위했다.


3. 전개[편집]


"이제 그들을 쥐구멍에 몰아넣었습니다."

빌헬름 1세에게 전황을 보고한 헬무트 폰 몰트케의 말


9월 1일 오전 4시경 프로이센군이 스당 앞의 바제유 마을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져 스당 시민군까지 산탄총을 들고 싸웠으며 프로이센군은 일시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마을 바깥으로 전투가 확대되어 프로이센군은 바제유 북쪽을 공격하고 프랑스군은 역공을 가하며 그들을 막아냈다. 전투를 지휘하던 마크마옹은 포탄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면서 오귀스트 뒤크로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뒤크로는 퇴각하려고 했지만 프로이센 군단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오후를 넘기면서 프랑스군은 사실상 궤멸되었고 식량과 물자도 떨어졌다. 나폴레옹 3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백기를 든 신하를 보내 빌헬름 1세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

"나는 병사들과 함께 죽는 데 실패했소. 이제 남은 선택은 폐하의 손에 내 칼을 맡기는 것 뿐이오"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는데 전군이 항복하고 장교가 아닌 모든 병사는 수용소에 갇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나와 항복 조건 완화를 요청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단호히 거절했다.


4. 스당 전투의 날[편집]


"스당 전투의 날(Sedantag)"인 9월 2일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까지 사실상 독일 통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었다.

독일 제국 선포일이나 프랑크푸르트 조약 조인일과 같은 다른 날짜들은 독일 제국의 다른 제후국들, 특히 남부의 바덴 대공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이에른 왕국 등이 기념하기에 껄끄러워 하였고[3] 따라서 독일 모든 지역들이 불편 없이 기념할 수 있는 전투의 승전, 즉 스당 전투의 날이 사실상 독일 통일의 기념일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좌파와 노동권의 인사들은 스당 전투의 날 기념을 독일 통일의 날로 기념하는 것을 불편히 여겼고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1919년 8월 27일 독일 내무부 장관의 선언과 함께 스당 전투의 날 기념은 끝맺었다. 2차대전 이후에 성립된 독일연방공화국은 과거의 군국주의 유산과 연을 끊고자 하기에 앞으로도 이 기념일이 복권될 가능성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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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군 사령관[2] 제4군 사령관[3] 이는 본디 독일 통일 자체가 프로이센 왕국을 위시로 한 북독일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는 문제로부터 비롯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