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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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


파일:Kant-KdrV-1781.png

작가
임마누엘 칸트
언어
독일어
발매일
1781년
장르
철학서(인식론, 형이상학)
1. 개요
2. 형이상학과 순수이성비판
2.1. 형이상학에 대해서
2.2. 순수이성비판의 형이상학적 목표
2.3.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수학물리학을 정초했다?
2.4. 순수이성비판 번역어를 둘러싼 논쟁
3. 주요 내용 정리
3.1. 도입 (Einleitung)
3.1.1. 선천과 후험[1]
3.1.2. 분석과 종합, 그리고 '선천적 종합'
3.1.3. 선험철학 혹은 순수이성비판의 이념
3.2. 순수이성비판의 구조
3.3. 선험적 감성론
3.3.1. 공간론
3.3.2. 시간론
3.3.3. 사물들 자체와 사물들 자체의 불가지론
3.4. 선험적 논리학
3.4.1. 본문에 들어가기에 이해를 위한 보충 설명들
3.4.1.1. (들어가기에 앞서) 순수이성비판 선험적 논리학의 이해를 위한 배경
3.4.1.2. 선험적 분석론의 개괄적 요약
3.4.1.2.1. 선험적 분석론의 세항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적 주의
3.4.1.3.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3.4.2. (제1편) 개념의 분석론
3.4.2.1. 제1편 개념의 분석론 중 '제2절 지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에 대해서 가능한 하나의 이해[2]
3.4.3. (제2편) 원칙의 분석론
4. 관련 강의 영상
5. 관련 문서

언어별 명칭
한자

독일어
Kritik der reinen Vernunft
영어
the Critique of Pure Reason


1. 개요[편집]


임마누엘 칸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이다. 서양 근대 철학사를 관통한 합리주의경험주의 간의 논쟁을 잠정적으로 마무리지었다고 여겨지며, 이후 철학사에서 인식론, 형이상학, 과학철학, 심리철학 등 무수한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읽다보면 단어 하나하나의 뜻은 알겠는데 문장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수면제

칸트의 주요 저작은 주로 세 가지로 나뉜다.
  • 첫 번째는 "순수 이성 비판"이요, 이는 "어떻게 인간이 지식을 창출해 내며, 사물을 알 수 있는지"를 논한다.
  • 두 번째는 "실천 이성 비판"이요, 이는 "어떻게 인간이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논한다.
  •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판단력 비판"이요, 이는 "어떻게 인간이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것의 여부를 판단하며, 그것을 직관할 수 있는지"를 담고 있다.
이 세 저작은 "진리(眞)", "윤리(善)", "아름다움(美)"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진리에 대해서 논하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저작에서 칸트가 굳이 순수이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지식은 경험판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경험""후험적"인 것이고, "외부적"인 것이다. 그래서, 외부적인 "경험"이라는 요소를 제거한 채, 순수한 인간 이성만을 둔 채로 그 작용 방식을 논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은 오직 이성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비판"이라는 단어는 "판단", "분석"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독일어 "Kritik"의 번역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순수한 인간이성을 분석한다." 라는 의미의 제목인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작업으로 인간 이성의 그 작용원리와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모든 인간 지식의 참과 거짓에 대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는 다음의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시대는 또한 이성에 대해, 이성이 하는 업무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인 자기 인식의 일에 새로이 착수하고, 하나의 법정을 설치하여, 정당한 주장을 주장을 펴는 이성은 보호하고, 반면에 근거 없는 모든 월권에 대해서는 강권적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영구불변적인 법칙에 의거해 거절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 법정이 다름아닌 순수 이성 비판 바로 그것이다.

A판 서문 XI (백종현 역)


2. 형이상학과 순수이성비판[편집]



2.1. 형이상학에 대해서[편집]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인 형이상학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이 단어 "Metaphysics"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메타(meta: 뒤)와 피지카(physika: 자연학)의 결합으로 생성된 것으로서, 그 단어의 의도는 자연학을 공부하고 나서 배우는 학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원래는 자연을 초월한 학문이라는 의미보다, 단순한 차례나 목차에 해당하는 명명이었던 셈.

하지만, 그 학문의 성격은 자연을 이해하는 인간의 지혜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지혜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인식은 제1의 원인이나 원리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의 통념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경험자도 단순한 감각만 가지고 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한층 지혜 있는 사람이지만 다만 이 경험자보다도 기술자 쪽이, 또 일꾼보다도 설계자 쪽이, 그리고 제작적(생산적)인 지식보다도 관조적인 지식 쪽이 한층 지혜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상으로 보면 지혜란 그 어떤 원인이나 원리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 김천운 옮김, 형이상학, 동서문화사, 제1권 제1장에서 발췌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시작된 이 학문은 2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부분의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서 각 시대별로 다루어져 왔고, 지금 논하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 임마누엘 칸트 역시도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일반적으로 근대철학에 있어서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철학의 한 분과는 이 형이상학을 보다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명시하기 위해서 나타낸 표현이요, 현대의 인지과학, 뇌인지과학 등의 학문들은 인식론을 생리학적 혹은 신경학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학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2.2. 순수이성비판의 형이상학적 목표[편집]


순수이성비판 역시도 서양철학의 전통에 따라서 형이상학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칸트가 살아 있을 당시 세상의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을 다루는 인식론은 크게 두 가지 분파로서 나뉘었다. 하나는 영국 철학자들 (존 로크, 조지 버클리, 데이비드 흄)을 중심으로 주창된 경험론, 다른 하나는 프랑스 및 독일 철학자들 (르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을 중심으로 주창된 합리론이 그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2가지로 나뉘며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 문제를 탐구하였고, 이를 통해 형이상학을 가장 원천적인 측면에서 다시 접근하여 그 성립의 가능성을 재검토하고자 하였다. 당시에는 과학이 등장하면서 형이상학이 논리적 빈약으로 인해 지위를 위협받고 있었는데, 이성을 통해 형이상학을 증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진리와 앎의 토대(경험론과 합리론을 초월한 인식의 기초)의 학문으로 다시 세우고자 하는게 칸트의 목표였다.[3]

아래는 일반적으로 서술되는 칸트의 형이상학적 주제에 관한 글이다.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주제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이며, 이는 특정한 이해 방식에 따른 것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을 "모든 경험과는 독립적으로 이성이 추구하는 바 인식"으로 정의하며, 이 책에서 그의 목표는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에 대한 결정, 그리고 [형이상학의] 원천, 정도, 그리고 그 경계를 원리에 의거하여 확정하는 것"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 형이상학은 선험적 지식, 혹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정당화되는 지식에 관한 것이며, 그는 선험적 지식을 이성과 연관시킨다. 『비판』의 과제는 인간의 이성이 선험적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그러한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게 어느 정도인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마이클 롤프, 「임마누엘 칸트」,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2.3.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수학물리학을 정초했다?[편집]


아니다. 피상적으로 읽으면 이렇게 오해해버릴 수 있다.

저자 임마누엘 칸트수학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인간이 '선천적 종합 인식'을 통해 얼마나 지식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지를 눈부시게 보여주는 실례라며 예찬했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 학문들을 정초하려고 한 적도 없으며, 실제로 정초하지도 않았다.

일단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이미 존재하며, 칸트가 생각하기에 이 학문들에서 선천적 종합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 나아가 실제로 그런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이미 입증되어 있다. 따라서 칸트는 그런 인식이 이미 가능하다는 사실 위에서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칸트는 이를 집요하게 탐구하여 '형이상학'에 관한 연구에 적용해보고자 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이 존재하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이었기에 형이상학적인 선험적 종합 인식이 가능한지를 따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칸트는 이미 다른 저작에서부터 논리학과 수학, 물리학이 어떻게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지 탐구해 왔고 그 이유가 다음과 같다고 결론을 내었다.[4]

논리학의 경우 → 인간의 생각의 타당성이라는 명확한 분야로 연구범위를 제한했다.
수학의 경우 →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의 모든 면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다.
물리학의 경우 → 이 경우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세하게 다뤄진다. 간단하게 말하면 선천적인 동시에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 지식을 확장할 수 있다. 자세한 건 본문을 참고하자.

2.4. 순수이성비판 번역어를 둘러싼 논쟁[편집]


순수이성비판은 저자 임마누엘 칸트가 독일인이지라 독일어가 원전이며, 따라서, 독일어와 언어적 접점이 없는 한국어로서는 해당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 자체가 매우 정의하기 난해한 단어들을 남용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여러 복잡한 의미들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경우의 단어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가 매우 어려운 숙제가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이러한 단어들은 원 저작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어떤 문맥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의 여부와 그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사용한 'Transzendental' 이라는 단어와 'Transzendent'라는 단어는 접미사의 차이만 존재하는 어원이 같은 단어임에도 그 의미가 정반대로 상이하게 사용되었다.
그래서, 해당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는지를 놓고, 현재 한국 철학계에서 논쟁하는 실정이다.

한국 철학계의 해당 논쟁에 관한 사항은 한국어 번역 논쟁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다만 해당 문서에서는 현재 칸트학회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논외로 하더라도, 필요없는 논쟁을 줄이고 일관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서a priori는 '선천'으로, transzendental은 '선험'으로, transzendent는 '초험'으로 번역한 최재희 번역본의 용어를 사용한다.[5][6]

상이한 역어 체계하에서 공부한 이들의 이해, 소통 편의를 위해 다음 표를 올려두니 참고 바란다.
파일:국내칸트철학용어주요경쟁역어비교대조표최종.png


3. 주요 내용 정리[편집]



3.1. 도입 (Einleitung)[편집]



3.1.1. 선천과 후험[7][편집]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의 경험은 상대적인 것이고, 따라서,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지식들은 상대적인 성격들을 지닌다. 가령, '이 사과는 달다'라는 어떤 사실은 어떤 사람에게는 참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거짓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지식들은 이러한 상대성을 뛰어넘어서 모든 경우에도 참인 경우가 있다. 수학의 명제들이 그러하다. 가령, '이차 평면도형에 있어서 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의 합은 나머지 한 변의 길이보다 길다.'라는 명제는 반드시 참이다.

이렇게 반드시 참인 명제들은 인간의 경험에서 얻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후험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은 대부분 상대적이고, 사건의 필연성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는 경험 이전에 나타난 것이요, 따라서 '선천적'이라고 불릴만한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은 확실히 우리의 오성이 감성적 감각이라는 재료에 손질하여 만들어낸 최초의 소산이다. (중략) 경험은 확실히 무엇이 있다는 것을 고하되, 무엇이 필연적으로 있어서 그것 외의 딴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고하지는 않는다. 하기에 경험은 진정한 보편성을 주지 않는다.

(중략) 그런데 동시에 내적 필연성이라는 특성을 가지는 이성의 보편적 인식은 경험에서 독립해야 하고 그 자신에 있어서 명석하고 확실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편적 인식은 선천적 인식이라고 칭한다. (중략) 그런데 수학은 확실히 대상과 인식을, 그것들이 직관에 있어서 나타나게 되는 한에서 다루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박영사, 2002, A1~A4



3.1.2. 분석과 종합, 그리고 '선천적 종합'[편집]


이에 더하여 칸트'종합판단'과 '분석판단'을 구분하였다.

"그 내용에 따라 판단들은 한낱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덧붙이는 바가 아무것도 없거나, 확장적이어서 주어진 인식을 확대하거나 한다. 전자는 분석판단이라고, 후자는 종합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 서설』, IV 266, 백종현 역 (아카넷, 2012)


즉 "A는 B다"라는 형식의 판단이 있을 경우, 분석판단이라면 B는 A에 이미 '포함'된 반면, 종합판단이라면 B는 A에 포함되지 않고 덧붙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모든 분석판단은 선천적이며, 또한 모든 후험적 판단은 종합적이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면 칸트는 선천적인 동시에 종합적인 판단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런 선천적 종합판단의 대표적인 예시를 수학으로 봤다. 왜냐하면 수학적 판단은 오직 직관(Anschauung)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8] 더불어 칸트는 '실체는 항존하며 고정불변적이다' 같은 "보편적인 자연법칙들"을 아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선천적 종합적 판단에 해당한다고 봤다.[9]

따라서 칸트는 선천적 종합판단으로도 인식을 확장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선천적 종합 판단으로 받아들인 인식은 명백히 보편적이다. 예를 들어 1+1=2라는 명제가 인간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그런 한정된 지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현상에 통하는 보편적 인식이다. 어떤 사실을 '정신적 습관'으로 주장했던 회의주의자 데이비드 흄과 달리 칸트는 객관성을 인식(직관)으로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칸트는 수학이 인간의 선험성을 근거할 수 있다며 예찬(?)하기도 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칸트에게 있어서 선천적 종합판단이란 첫째, 반드시 보편타당하며, 둘째, 인간의 오성안에서 각기 다른 개념들이 종합적으로 발생된 판단인 것이다. 앞서 말한 단순한 산술의 예에 있어서 '7+5=12'라는 예시는, 첫째, 반드시 보편타당하며, 둘째, 7과 5와 12라는 각각의 수의 개념들이 서로 다름에도 하나의 수식 아래에서 종합적으로 타당함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종합적인 것이다. 그래서 수학의 명제들은 '선천적 종합판단'이 되는 것이다.


3.1.3. 선험철학 혹은 순수이성비판의 이념[편집]


칸트는 이러한 선천적으로 타당한 명제들이 인간 이성의 어떤 작용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 내부에는 이러한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명제들을 적어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어떤 구조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천적으로 보편타당한 명제들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다.[10] 이러한 순수한 이성의 기관들을 다루는 학문을 '선험적 철학 혹은 선험철학'이라 불린다.

상술한 모든 것에서 순수이성의 비판일 수 있는 하나의 특별한 학문의 이념이 생긴다. 외래적인 것이 섞여 있지 않은 모든 인식은 순수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떠한 경험도 감각도 섞어 넣어지지 않고, 따라서 전혀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식은 절대로 순수하다고 불려진다. (중략)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관한 우리의 선천적인 개념들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나는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의 체계가 선험적 철학이라고 불릴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박영사, 2002, A10~A12


3.2. 순수이성비판의 구조[편집]


순수이성비판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닌다.

I. 선험적 원리론
제1부 선험적 감성론
1절 공간론
2절 시간론
제2부 선험적 논리학
1문 선험적 분석론
(개념의 분석학(12범주에 대한 설명),
원칙의 분석학(범주에서부터 나오는 양,질,관계,양상에 대한 선험적 종합 판단))
2문 선험적 변증론 (주된 내용은 순수 이성의 네 가지 오류추리)
II. 선험적 방법론

그리고, 이 글에서는 상기에 구분된 구조에 따라 개괄적인 설명을 논하기로 한다.
참고로, 순수이성비판의 지성과 감성의 형식들(시간, 공간//범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때, 칸트는 B판에서는 일관되게 '형이상학적 증명'을 먼저 제시하고 그 다음 '선험적 증명'을 제시한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형이상학적 시간, 공간, 범주와 같은 것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서부터 제시되는 논변이라 할 수 있고, 선험적 증명은 그러한 것들이 없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데에 기인하는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3.3. 선험적 감성론[편집]


칸트의 선험적 감성론을 들어가기에 앞서, 주의할 사항이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감성이라는 말은 감정과는 다르다.[11] 여기서 감성이란 사물과 사건(이하 사물들 자체라고 표기 한다.)을 인지하는 이성의 한 구조의 부분이요, 사물들 자체를 감각을 통해서 이성 안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감성을 선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오직 순수하게 감성만을 남긴채 나머지를 분리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감각도, 경험적 개념도, 사고도 여기에 투입시켜서는 안 된다. 오직 순수하게 감성만을 관찰하여 이를 도식한다.[12]

이하 칸트의 설명이다.

인식이 대상에 관계하는 방식과 수단이 어떠하든 간에, 인식이 대상에 직접 관계하고 또 모든 사고가 그 수단으로서 구하고 있는 것은 직관이다. 직관은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중략) 대상에 의해서 우리가 촉발되는 방식을 통해서 표상을 얻는 능력 즉 수용성을 감성이라고 한다.

(중략) 나는 감각에 귀속하는 것을 전혀 내포하지 않는 모든 표상들을 선험적 의미에서 순수하다고 한다. 따라서 감성적 직관들 일반의 순수한 형식은 심성 속에 선천적으로 발견되겠고, 이런 형식에 있어서 현상들의 모든 다양은 일정한 관계 중에서 직관된다.

(중략) 이래서 우리는 선험적 감성론에서 우선 감성을 고립시키겠다. 이런 일은 오성이 그 개념을 통해서 사고하는 일체를 분리하는 데서 성립한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박영사, B33~37



3.3.1. 공간론[편집]


아래 서술을 볼 때 유의할 것은, 일반명사인 "개념"과 "직관"이 칸트에게서 기술용어로 쓰인다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인식은 직관이거나 개념인데, 직관은 인식이 직접적으로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이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기능인 감성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감성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직관들은 지성에 의해서 사고되며, 지성으로부터는 순수하거나 경험적인 개념들이 생겨난다.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은 4가지이다.
첫째, 공간은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혹은 비롯된 것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공간 속에 존재하고, 각 사물들은 사물들 간에 달리 놓여 있는 각각의 공간에서의 장소에 놓인 것으로 인식될 것인데, 이러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간 개념이 사물의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공간은 외적인 경험들의 추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제이고, 따라서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것이 아니다.
둘째, 사물들 자체는 경험적으로 주어지고 이것들은 시시 때때로 변화하며 사라지기도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서든 사물이 놓여 있을 공간 그 자체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사물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공간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만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물들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간은 사물들에 앞서 '선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선험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셋째, 공간은 경험 독립적인 개념이 될 수 없다.[13] 공간은 개념과는 달리 우리 모두는 단 하나의 동일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생각할 수 있고, 공간 전체는 근본적으로 하나로서의 전체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관계에 대한 개념이었더라면 그 부분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될 수 없고, 일종의 층위적인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넷째, 공간은 무한한 표상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떠한 개념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될 수 없다. 그러니 공간은 경험과 무관한, 순수 직관이어야만 한다.

공간에 대한 선험적 설명, 즉 형이상학적 설명의 재차 정당화는 기하학과 연관되어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우리가 절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 기하학적인 명제[14]가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 보편타당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선천적 직관이어야만 한다. 만약에 공간이 선천적이지 않고 경험적이라면 그러한 기원으로부터 우리가 얻게 되는 모든 지식은 경험적 지식의 특징에 따라서 보편타당할 수가 없을 것이고, 공간이 직관이 아니라 개념이었다면 그것은 종합적이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기하학이 선천적이고 종합적인 학문이라면 [15] 공간은 경험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보편적으로 심어져 있는 필연적인 형식에서 기인한 선험적 직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칸트는 공간을 '물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지 않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아니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칸트에게 있어서 공간은 '정신 안에서 사물들을 존재하게끔 하는 외감의 형식'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우리가 어떤 사물을 눈으로 보았을 때, 이는 우리의 마음안에서 투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철학에서는 현상혹은 표상이라 부른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보이는 방식대로 사물들을 관찰한다. 왜냐하면, 각기 마음안에 투영되는 사물들의 표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 마음안에 나타나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간'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먼저 짚어두어야 할 점이 있다. 공간은 '관념'이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경험으로부터 추론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사물을 시각적으로 지각한 이후 그것을 심상 안에서 그려낸다.[16] 그것이 기억에 의한 것이든 추상적으로 그려낸 것이든 그 원천은 우리의 감각에서 얻어진 것을 기초로 한다. 즉 '경험'을 기초로 한다. 그리고 공간은 이 '경험'에서 얻어지는 사물들의 모습을 마음 안에서 그려내는 장소이다. 이 해석에서 많은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서양철학에서 사고와 감각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구분되어 있다. 감각은 불완전한 것으로서 고대 서양철학(특히 플라톤의 인식론에서 보이는 것처럼)에서는 질낮은 인식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전통은 크게 변하지 않고 근대철학까지 이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의 오직 완전한 질서와 법칙은 이성의 사고로서만 도출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와 같은 학자는 공간을 2차 방정식의 도해로서 수식적으로 풀이함으로서 공간의 질서를 '사고'로서 도출할 수 있다고 여겼다. 직관과 감각은 불완전한 것으로서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공간에 대한 정의를 '직관'(감각적으로 사물을 정신으로 수용하는 작용) 과 연결시켰다. 칸트는 공간을 외관의 직관작용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즉 생각이나 사고가 아니라 직관작용의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감관을 통해서 얻어진 여러 사물들 자체의 정보들은 불규칙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필연적인 선천적 표상'에 의해서 규칙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공간은 사물들 자체를 규칙적으로 배열한다. 직관은 무규칙적이고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성격이 칸트가 이전의 철학계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칸트는 직관에서부터 인간 인식의 규칙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공간의 질서 즉 기하학적 확실성이 보여주는 질서가 바로 그 근거이다.

이에 대한 칸트의 원문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공간은 외적 경험에서 추상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감각이 내 바깥에 있는 어떤 것에 관계하기 위해서, 즉 내가 감각들이 서로 분리해 있고 또 나란히 있는 것으로 표상하기 위해서, 따라서 감각들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장소에 있는 것으로 내가 표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근저에 공간의 표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후략)

2.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작용의 근저에 있는 필연적인 선천적 표상이다. 공간 안에 대상이 없는 일은 넉넉히 생각될 수 있으나, 우리는 공간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공간은 외적 현상에 의존하는 규정으로 보아지지 않고, 외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보아진다. 즉 그것은 외적 현상의 근저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선천적 표상이다.

(중략)

3. 공간은 추리된 개념이 아니다. 혹은 흔히 말하듯이 물자체 일반의 관계에 관한 일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 직관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우리는 단지 하나의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여기서는 초판에서의 설명)모든 기하학적 원칙들의 절대 필연적인 확실성과 그것들의 선천적인 구성 가능성은 공간의 이 선천적인 필연성에 기인해 있다. 만약 공간-표상이 후천적으로 얻어진 관념이요, 보편적인 외적 경험에서 이끌어내진 관념이라면, 수학적 규정의 제일원칙들은 지각들 외의 아무런 것도 아닐 것이다. 즉 그것들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지니는 것이겠다. 그리고 두 점 사이에는 하나의 직선만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이 아니라, 단지 경험이 그렇다고 가르쳐 주는 바의 것이 되겠다. 경험에서 이끌어내진 것은 오직 상대적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요, 귀납을 통해서 얻어져 있는 것이다.

4. 공간은 주어진 무한한 크기라고 표상된다. (중략) 그러나 개념과는 달라 공간은 표상의 군을 (무한하게)자기 속에 포괄한다고 생각된다. (유일한 공간의 분할된 모든 부분들은 동시에 무한이기에 말이다.)

(중략)

(이상의 개념들로부터 나오는 결론 2)공간은 오로지 외감 전 현상의 형식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즉 감성의 주관적 조건임에 틀림없고, 이 조건 아래서만 외적 직관이 우리에게 가능하다. 그런데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는 '주관의 수용성'은 객체의 모든 직관에 반드시 선행하기 때문에, 모든 현상의 형식은 모든 현실적 지각 이전에 따라서 선천적으로 심성에 주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박영사, 2002, B38~43



3.3.2. 시간론[편집]


칸트는 시간 역시 경험적이나 선천적인 개념이 아니고 순수 직관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자 하며, 이를 위해서 형이상학적/선험적 증명을 시도한다. 여기에서는 공간과는 다소 다르게 형이상학적 증명이 다섯가지로 제시되나, 형이상학적 증명의 세 번째 증명이 선험적 증명인 것으로 서술되기에 마찬가지로 네 가지의 형이상학적 설명과 한 가지의 선험적 증명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과도 유사하게,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물들 간의 다른 장소가 공간 없이 설명될 수 없듯) 시간 개념을 전제함 없이는 동시에, 혹은 다양한 시간상에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수 없다.
둘째, (공간 없이 사물이 표상될 수 없듯) 시간 자체을 없애면 현상도 없어진다. 즉, 시간이 배제된 현상은 있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시간이 없이 공간조차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간은 연장성'延長性'인데, 이는 존재의 연장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간이 없다는 것은 존재가 연장하지 않음을 의미함으로 공간 그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는 선험적 증명으로)
넷째, 시간은 보편 개념일 수 없고 순수 직관이어야 하는데 이는 시간 역시 공간과 마찬가지로 그 부분들이 시간 전체와 전혀 차이 없고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의 전체의 시간만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시간의 근원적 표상은 무한하며, 그것의 제한은 일정한 순간을 나눔으로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일은 개념에서는 불가능하므로 시간은 직관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은 계기적, 즉 순차적으로 발생한다. 이는 필연적인 시간의 흐름의 질서가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서,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의 인과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모든 시간 개념이 없고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어떠한 대상이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게 됨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또한 변화라는 것은 결코 분석적일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종합적일 것이다.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통해서만 생각 가능한 근본적인 운동과 변화라는 개념이 이처럼 선천적이고 종합적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 개념 또한 경험에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독립적인 직관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세계는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안에 있는 선험적 원칙에 의해서 '계기적'인 시간 질서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들어온다.[17] 그래서, 시간은 인간의 이성이 세계를 이해하는 기준이요, 그 형식이 된다. 그리고 시간은 이성 그 자체가 현상계를 받아들이는 '형식'이기에 내부에 존재하며, 공간이 보다 외적 직관에 닿아있는데 반해서, 시간은 이성의 계기적 질서에 더욱 맞닿아 있기에 '내적 형식'이다.

칸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형이상학적 설명2). 시간은 모든 직관의 기초에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우리는 '현상 일반'에 관해서 시간 자신을 없앨 수가 없다. 비록 시간으로부터 현상을 없앨수는 있지만, 그러므로, 시간은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 현상이 실재하는 것은 모두 시간 중에서만 가능하다. 현상들은 예외 없이 제거될 수 있으나 (현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조건으로서의)시간 자신은 없앨 수가 없다.

(형이상학적 설명3=선험적 설명)시간 관계에 관한 절대당연한 원칙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일반의 공리들의 가능성도 시간 자신의 선천적 필연성에 기인하고 있다. 시간은 일차원만을 갖는다. 즉 서로 다른 시간들은 동시적으로 있지 않고 계기적으로 있다.(즉 서로다른 공간들이 계기적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있듯이) 그러한 시간의 원칙들은 경험에서 이끌어내질 수 없다. 경험은 엄밀한 보편성도 절대필연적인 확실성도 주지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겠는 말은 보통의 지각이 이때까지는 그렇다고 가르친다는 것뿐이요, '반드시' 그러한 상태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의 원칙들은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이러한 규칙들 아래서 일반적으로 경험들이 가능하다.

(중략)

(결론의 두 번째 부분)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와를 직관하는 형식임에 틀림이 없다. 시간은 외적 현상에 관한 어떤 규정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외적인 형태에도 혹은 위치에도 속하지 않고 우리의 내적상태에 있어서의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태도 주지 않는 바로 그 까닭에서, 우리는 이런 결함을 유추로써 다음과 같이 보충하고자 한다. 즉 우리는 시간의 계속을 무한히 진행하는 선일과 표상한다. 이 선에 있어서 다양한 것은 일차 일차원만을 갖는 계열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런 선의 성질로부터 시간의 모든 성질을 우리는 추리한다. 그러나 단지 선의 부분들은 동시적으로 존재하되 시간의 부분들은 항상 계기적으로 있다는 한 성질만 제외한다. 이상에서 시간 자신의 표상이 직관이라는 것도 명백하다.. 시간의 모든 관계는 외적 직관에 의해서 표시될 수 있기에 말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박영사, 2002, B47~50



3.3.3. 사물들 자체와 사물들 자체의 불가지론[편집]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즘은 들어봤을 법한 단어, 사물들자체와 그에 대한 불가지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곡해되고 오인되어 왔다. 칸트는 우리 두 눈앞에 있는 사물을 인지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인지한다면,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다. 그리고 감관에 의한 것들은 보편적이지도 절대적으로 타당하지도 않다. 단지 각 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상황에 따라서 서로 각양각색으로 보일 뿐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동일성을 지닐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적으로 정의하는 보편적 절대적이라는 성격을 가질 수는 없다.

칸트의 이러한 해석은 사물들 자체에 대한 고전적 인식을 뒤바꾸어 놓았다. 적어도 플라톤 철학에서부터 등장하는 '이데아'라는 단어의 개념은 사물들의 본질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모든 각 사물의 이데아가 존재하고 그 이데아를 알아내는 것이 지식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칸트는 이러한 관점을 과감히 버렸다. '이데아'라 불리는 것은 망상이다.[18] 우리는 감성적 직관의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래서, 사물들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온전한 지식을 얻는다던지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던지 하는 것은 순진한 망상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은 결코 완성되는 일 없이 사물들 자체를 대면할 뿐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상과 같은 주의가 노리는 것은 상술한 공간의 관념성을 도저히 불충분한 실례에 의해서 설명하려는 생각을 막으려는데 있다. 즉 색, 맛 등은 사물의 성질로 보아지지 않고, 십인 십색일 수 있는 우리 주관의 변화로 보아지는 것이 정당하기 대문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그 자신이 원래 현상임에 불과한 것, 가령 장미 같은 것이, 경험적 의미에서 물자체 그것으로 보아지지만, 이런 일은 색이 각인의 눈에 각양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공간 안 현상들의 선험적 개념은 이런 견해에 대한 하나의 비관적인 경고가 된다. 즉 공간 중에서 직관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물자체 그것도 아니요, 공간은 물자체 그것이 고유하는 사물의 형식도 아니며, 대상자체는 우리에게 전혀 미지(未知)이고 우리가 외적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감성의 한갓 표상임에 틀림이 없으며 우리 감성의 형식이 공간이라고 우리는 경고한다. 감성의 진정한 대응자 즉 '물자체 그것'은 공간을 통해서 전혀 인식되지도 않고 인식될 수도 없다. 우리는 물자체 그것을 경험에 있어서는 문제로 삼지도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역, 박영사, 2002, B45-46, 선험적 감성론에서 발췌


여기서 흔한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추가적으로 언급한다. 칸트가 말한 사물들 자체의 불가지론은 사물들 자체를 '알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알 수 없다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소금을 경험한다고 하자. 우리는 소금의 색깔(아마도 흰색인)과 맛(대체로 짠맛인), 그리고 형태(일반적으로 가루의 형태를 띄고 있는)를 감관으로 파악하기에 그것을 소금이라고 인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금에 대한 모든 정보가 아니다. 화학적으로 보자면, 소금은 염소와 나트륨이 결합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물리적 구조(원자의 결합구조 같은 것)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파악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소금에서 느끼는 흰색이나 맛 역시도 상대적인 것이다. 흰색을 검은색으로 여기지는 않겠지만, 흰색의 정도가 있을 것이고, 소금에서 짠맛의 정도나 짠맛 이외의 다른 맛을 사람에 따라 각기 달리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칸트가 '십인 십색'이라고 칭한 것이다. 사물들 자체는 인간이 상대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관의 영역에서밖에는 관찰되지 않으며, 비록 우리가 여러 정보들을 추가적 경험 등을 통해서 종합한다고 할 지라도, 사물들 자체(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그 사물자체)와 필연적으로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별개의 것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온전히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3.4. 선험적 논리학[편집]



3.4.1. 본문에 들어가기에 이해를 위한 보충 설명들[편집]


이하 해당하는 설명들은 순수이성비판의 본문이 아니라 예비적 설명을 위해서 추가된 것들이다. 따라서, 순수이성비판의 저술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은 건너 뛰어도 좋은 내용일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본문 이해를 위해 환기할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에 참고해 두면 바람직 하다.


3.4.1.1. (들어가기에 앞서) 순수이성비판 선험적 논리학의 이해를 위한 배경[편집]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선험적 논리학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철학사 전체를 통과하는 형이상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 칸트가 선험적 논리학에서 논하고자 할 '지성'[19]은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구되어온 주제로서, 형이상학은 그 지성 혹은 이성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 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는 초기에 자연과 사물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연에 대한 여러 정보와 지식들이 어떤 에 기준하여, 정리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 많은 지식들은 이성의 규칙적인 작용[20] 에 의해서 발생하고, 이는 인간의 이성이 어떤 규칙에 의해서 작용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기한 내용에서 첫번째 문제인 어떤 틀에 대한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이라고 불리는 연구서에 서술되어 있으며, 이는 이후 논리학 및 범주론이라는 철학의 연구 분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두번째 문제인 이성의 규칙적인 작용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이라는 연구서에 서술되기에 이른다.

이후 서양 철학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이 문제에 몰두하기 시작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근대철학에 이르러 인식론이라는 형태의 학문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정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범주론과 이성의 규준 (흔히,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을 별도로 구분하고 서로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의하지 않았으며, 후대의 철학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입장을 따로 수정하지 않았다. 다만, 철학자들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자신들의 사상으로 전환시킬 따름이었다. [21]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및 4원인설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의 범주론(카테고리)과 판단표를 간단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22]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및 4원인설
범주
1. 실체. 2. 양. 3. 질. 4. 관계. 5. 장소. 6. 시간. 7 위치. 8. 소유. 9. 능동. 10, 수동
4원인설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표
구분
판단
범주
분량
전칭판단(보편적)
단일성
특칭판단(특수적)
다수성
단칭판단(개별적)
전체성[23]
성질
긍정판단
실재성
부정판단
부정성
무한판단
제한성
관계
정언판단
실체와 우유성(偶有性)[24]
가언판단
인과성과 의존성
선언판단
상호성
양상
개연판단
가능성-불가능성
실연판단
현존성-비현존성
필연판단
필연성-우연성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와 4원인설을 함께 엮으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범주란 사물들의 속성의 종류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범주는 그 자체로서 명제를 구성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제란, 주어와 서술어의 종합으로 이루어지는데, 범주는 이 가운데에서 서술어의 영역에만 취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 시계는 1946년 스웨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는 명제가 주어졌다면, 이 시계는 실체, 1946은 시간, 스웨덴은 장소, 만들어진 것이다.는 수동적 성질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성질을 의미함)나타낸다. 이와 같이, 범주는 서술어로 표현되는 사물들의 성질인 것이다.
이에 반해, 4원인설은 사물 그 자체를 이성이 인식하는 방식을 의미한다.[25] 질료인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물들의 속성이요, 형상인은 그 사물이 마음속에서 그려내는 대표적인 모양세, 작용인은 그 사물이 작용하는 방식, 목적인은 그 사물이 잠재적으로 나타나게될 모습이거나 작용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인설을 이성(그의 경우에는 이것을 지혜라고 불렀으나)의 작용방식과 연결시켰으며, 그 지혜의 결과로 인식된 사물들이 범주에 의해 서술되고 논리적으로 정리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칸트는 천년이 넘도록 난제로 남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제를 한번에 묶어서 해결하려 하였다. 칸트에게 있어서 논리란 단순한 말장난이거나 수사법이 아니었다. 칸트에게서 논리란 인간의 이성이 이해한 사물들 자체가 언어를 통해서 규명되어 나타낸 형식이다. 그리고 논리는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 만들어 지며, 이성의 판단은 선험적인 것이므로, 칸트는 논리를 판단과 결부하였고, 그 결과 논리는 선험적(선험적 논리학)인 것이다.
또한, 범주란 사물들의 내용들이 이성 안에서 구분되고 정리되는 구역을 의미하였고, 그래서 범주는 사물들의 속성이 아니라 사물들을 구별하는 이성의 속성이 되었다.
칸트는 이러한 이성의 작용방식 (분량, 성질, 관계, 양상)을 일반적인 판단들과 결합시켜 먼저 정리한 다음, 이를 다시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 다시 말해 사물에 대한 판단이라 할 수 있는 지성의 범주로 서술한 것이다.

여기서 칸트의 업적을 다시 환기하고자 덧붙여 설명하자면, 서양철학사는 형이상학을 영국 방식의 경험론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방식의 합리론으로 양분되어 가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영국의 경험론이 인간의 지성을 경험의 결과로 본 결과로서, 형이상학의 전통을 벗어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 분열을 다시 결합시켰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국의 경험론의 정신 하에 합리론 탐구가 가능함을 보이고자 하였다. 영국의 철학자들은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흄이 그렇지만) 지식이란 오직 경험의 한계 내에서, 경험의 축적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이며, 논리란 그것을 정리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때 형이상학적 실체니 원리니 하는 것은 경험으로 파악되는 것이아니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하지만, 칸트는 경험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탐구만이 적법하다는 것, 또 논리가 경험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앗다는 점에서 경험론의 전통을 따르나, 경험론자와 다르게 우리의 논리에는 (칸트가 정리하기 전까지는) 경험과 독립적으로 알 수 있는 그것들을 종합하는 감성과 지성의 원리가 존재하며, 이들은 경험되는 것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일지를 고민해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경험의 범위 안으로 탐구를 제한하더라도 또 다른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철학은 그러한 분야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의 모토이며, 이 중 지성에 대한 논의가 선험적 논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선험적 논리학은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지만 안타깝게도 매우 난해하며 또한 난잡하다. 이는 칸트가 10년 넘게 기록한 자신의 연구를 1년 안에 정리하면서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간행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잘 정리된 저서들은 목차가 먼저 만들어져서 뼈대를 이루고 글의 내용들이 살을 이루어서 만들어 진다. 하지만, 이 책은 살이 먼저 만들어지고 나중에 목차를 집어넣어 뼈대가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방식의 저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매우 혼란을 겪으며, 이는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칸트 또한 이러한 부분을 어느정도 감안하여 이후에 형이상학 서설이라는 책을 냄으로서 보다 간략한 설명을 시도하였고, 해당 저서에서는 일단 이 책으로 대략적인 얼개를 잡은 다음 구체적인 논의를 순수이성비판에서 보라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26]

선험적 논리학은 크게 1편 개념의 분석론과 2편 원칙의 분석론으로 나뉜다. 1편의 주요 내용은 범주에 대한 형이상학적/선험적 증명이고, 2편은 12범주의 네 대분류에 맞게(양, 질, 관계, 양상) 각각 따라나오는 선천적 종합 판단들이다(양-직관의 공리, 질-지각의 예취, 관계-경험의 유추, 양상-경험사고 일반의 요청).


3.4.1.2. 선험적 분석론의 개괄적 요약[편집]

먼저 개념의 분석학에서 칸트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내적, 외적 감성적 틀을 거쳐 우리에게 주어지는 직관을 다시 우리는 위의 서론에 서술한 12개의 판단표에 각각 상응하는 12개의 범주, 즉 지성의 형식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때 직관은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의 내부에 있는 이성은 능동적으로 판단을 한다는 뜻이다. 일단 이를 위해서 칸트는 (위에 있는) 판단표에서의 범주를 먼저 제시한다. 범주라는 개념은 잘 알려져 있듯이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고안했던 기준이었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는 맹점이 있다는 걸 비판하고 새로운 범주가 필요하다는걸 먼저 서술한 다음(위 표의 왼쪽), 그러한 일반적인 판단의 범주에 맞도록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각각 상응하는 선험적인 범주가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먼저 제시되는 형이상학적 증명이다.

범주 혹은 지성의 형식에 있어서 선험적 증명은 우리가 실제로 이러한 범주에 맞게 사물을 판단하는지를 검토하는 부분이다. 이는 상상력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것으로 알려져있는 A판의 설명과 B판의 설명이 다른 것으로 악명이 높고, 실제로 이 부분은 칸트가 완전히 다시 쓴 부분들 중 하나이며, 순수이성비판에서 이해하기가 가장 골때리는 부분 중 하나이다.[27] 뒤에 쓰여진 B판의 논의를 간략하게만 서술해 보면, 사물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인식에는, 칸트가 보기에는 '나는 (어떤 사물이 ~~~하다고) 사고한다'라는 인식이 항상 붙을 수 있고, 그러한 인식이 붙을 수 있어야만 그 인식은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 이는 감성의 두 형식인 시공간의 선험적 증명에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물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물이 특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한편 시간의 변화를 겪는다고 여기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거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시공간이라는 형식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사물이 나의 표상이라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물을 나의 표상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칸트에게 있어서 나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근거이자 동시에 내가 나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잡다한 것들을 하나의 대상에 통일시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표상은, 여러 가지 잡다한 표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단일한 표상으로 나에게 1인칭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28]

이러한 내 사물 인식을 살펴볼 때, 사물(들)은 통일된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지는데 나에게 원래 주어지는 사물으 성질들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잡다한 다수일 수 밖에 없었을테니, 그것들이 통일되어 지각되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나라는 사고 주체 하에 하나로 통일시켜 본다는 것이다. 어떤 표상이 나의 표상임을 인식하는 이와 같은 자각적인 활동 일반은 칸트에게서는 '통각'이라 불리는데, 칸트는 내가 사물을 나의 표상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는 통각의 '분석적' 통일이 일어난다는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내가 사물의 여러 성질을 통일시켜서 보게 된다는 '종합적'통일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하기에 종합적 통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무언가가 사고 대상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나의 표상으로 여겨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통각의 분석적 통일) 그러한 대상들을 1인칭적으로 인식하는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나와, 그 주체의 사고 하에서 대상은 여러 가지 성질을 통일적으로 가진다는 것이(통각의 종합적 통일) 함축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합적 통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이것이 위의 범주표에서, 혹은 앞서 설명된 형이상학적 증명에서 제시한 12범주에 따라 일어나리라는 것이 개념의 분석학의 범주에 대한 B판의 선험적 연역 부분에서의 칸트의 주장의 개략이다.

이러한 12범주의 네 분류, 즉 양, 질, 관계, 양태는 다시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최소한의 선험적 종합 판단을 가능하게 해 준다고 칸트는 이어서 원칙의 분석학을 통해 주장한다. 간략히 서술하자면 칸트는 우리가 1) 양의 범주에 따라 대상을 판단할 것이므로 모든 대상은 연장적이라 여길 것이고, 2) 질의 범주에 따라서도 대상을 판단할 것이므로 모든 실재적인 것들은 밀도를 가질 것이며 3) 관계의 범주에 따라 실체는 고정적이고 그 양이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고 여길것이고, 모든 것이 인과법칙의 영향 하게 있다 볼 것이며, 이들은 각각 모두가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볼 것이고, 4) 모순을[29] 담고 있지 않은 존재는 가능하다고 여길 것이고, 우리에게 감각되는 것은 현존하다고 여길 것이며, 경험의 보편적인 조건과 관련된 것들(칸트가 드는 것은 공간과의 연관속에서 생각되는 삼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도형)은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칸트는, 우리가 순전히 경험 안으로 탐구의 범위를 제한하더라도 흄과 같은 강력한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사물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 곧 지성과 감성의 형식에 대한 지식,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지는 사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제 칸트의 유명한 말인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즉, 칸트에게서 사물에 대한 인식이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수동적으로는 잡다를 처음 받아들이는 내적, 외적 감성의 형식과 우리가 능동적으로 어떠한 것을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지성의 형식이 동시에 작동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어떤 대상이 시공간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인식되는 것도 불가능하며(감성), 또 어떤 대상이 반드시 나의 표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어야만 하고 또한 여러 가지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지성)[30][31] 의미이다. 이 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즉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과 그에 관한 형식인 시공간이 없거나 혹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없다면, 사물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생각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처럼 인식에 있어서 우리 안의 감성의 형식과 지성의 형식이 둘 다 필요하며,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위의 유명한 인용구의 의미인 것이다.


3.4.1.2.1. 선험적 분석론의 세항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적 주의[편집]

아래 선험적 분석론의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기 전, 해당 항목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을 넣는다.
먼저 제1편에 해당하는 개념의 분석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 혹은 개념이 어떻게 선험적 범주와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에 주의가 필요한데, 우리가 흔히 가지는 개념은 직관적으로 얻어진 경험의 여러 직관적 요소들이(이른바 직관으로부터 얻어진 관념들) 서로 얽혀 있다. 다시 말해서, 개념들은 일반적인 경험의 산물(産物)이다. 그런데, 이러한 직관적 요소들이 불규칙하게 얽혀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얽혀있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적인 상관관계가 선험적 범주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험적 범주는 거의 일상생활에서 의식되는일 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흔히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가지는 일반적 개념안에서 어떻게 선험적 범주가 관여하고 있는지를 분석하여 논한다. 이것이 개념의 분석론이다.

다음 제2편에서는 원리의 분석론이라고 하는데, 선험적 범주의 존재가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칸트는 해당 항목에서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 자발적인 지성의 능력인 범주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수용적인 감성과 함께 작동하여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과정을 어떻게 우리가 '선험적'으로 알게 되는지를 대해서 증명한다. 이 증명에는 '시간'의 선험적 성질이 그 근거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간의 선험적 근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이해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32] 그리고 지성과 감성의 중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해당하는 이 과정을 칸트는 '도식'이라고 부른다.

아래에서 논하게 되겠지만, 칸트가 시도하는 이러한 방식은 (범주론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근거로 인간의 인식과 이성을 논하려하는 시도) 최초이다. 설사 있었다고 할 지라도(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재, 과거, 미래를 인식과 연결시키려 한 것과 같이)칸트의 시간개념이나 선험적 성질이니 하는 것으로 인식의 척도를 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항목에 대한 당혹스러움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아무런 예비 없이 접근하는 사람들의 당혹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철학사에서 많은 철학자들, 아니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명칭에 대해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명사가 그 철학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무관심했다. 이는 칸트의 경우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나마, 칸트는 현상, 감관 등이라고 하는 철학에서 사용되는 명사들이 본서에서 어떻게 정의되는지에 대한 주의를 기울인 것 같지만, 그마저도 충분하지는 않다. 그 이해의 보충을 하려던 결과 초판과 재판에서의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결론에 이르렀으나, 이는 매우 지엽적이고 전문적인 사항이므로 여기서는 그 문제까지는 다루지 않도록 하자.


3.4.1.3. 코페르니쿠스적 전회[편집]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또는 전환)라는 이 유명한 단어는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스스로 사용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순수이성비판의 재판본의 머릿말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 표현은 적절히 사용된 것이다. 종래의 철학자들은 진리의 기준이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외부에 있다고 여겼고, 이는 사물들로부터 발생되리라 믿었었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 즉 주체는 고정된 자리에서 사물들을 관찰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칸트는 사물은 고정되어 있고, 우리 자신이 돌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즉, 사물의 모습은 우리가 보는 시점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인식이 고정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변화한다고 할 지라도 그곳에는 원칙과 규칙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그래서 칸트는 기존의 철학자와는 다른 시도를 하는데, 사물을 탐구해서 주체까지 이해하려고 했던 철학의 흐름을 뒤집고 주체를 이해해서 사물까지 이해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외부세계를 연구해서 앎을 탐구하던 기존의 철학에 반대하고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주체 자신의 인식 틀(시간, 공간 등)로 연구방향을 전환했다. 이것이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중심으로 했던 천문학(천동설)을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천문학(지동설)으로 전환시킨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칸트는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하였다.[33]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최초 사상에 관해서도 사정은 같다. 그는 모든 성군이 관찰자의 주위를 돈다고 가정했을 때 천체운동의 설명이 성공 못한 이후로, 이제야 관찰자를 돌도록 하고 도리어 별들을 고정시켰을 때에 설명이 더 잘 성공할 것이라는 기도(企圖)를 하였다. 대상의 직관에 대한한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방식의 기도를 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역, 박영사, 2002, 재판의 머릿말 가운데에서 발췌



3.4.2. (제1편) 개념의 분석론[편집]


순수이성비판은 사실 목차와 차례가 대단히 지저분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는 위에서 서술한 바, 칸트가 10년 이상이 걸린 연구의 기록들을 1년에 걸쳐서 한꺼번에 서술한 관계로 발생하였다. 그리고 복잡한 차례와 목차의 문제로 인해서, 칸트 연구자들이 가지는 첫번째 과제가 해당 절목의 주요 내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 문제는 칸트가 초판과 재판을 다른 절목의 내용으로 중복 기입함으로써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선험적 분석론의 가장 큰 절목이 되는 개념의 분석론과 원칙의 분석론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되, 개념의 분석론을 재판의 순번을 먼저 따르며,[34] 초판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천적 근거는 별개의 하위절에서 설명한다.

개념의 분석론 부분에 들어오면서 독자들은 심각한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인데, 칸트가 아무런 예비 설명 없이 느닷없이 오성의 기능을 범주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분석론은 우리의 선천적 전 인식을 순수한 지성(오성)의 인식 요소들로 분해하는 데에 존립한다. 이 무렵에 다음의 네 가지 점이 중대하다.1. 개념은 순수한 개념이요,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 2. 개념은 직관과 감성에 속하지 않고, 사고와 오성에 속한다는 것. -중략- 4. 개념에 관한 우리의 표(表)[35]

는 완전하고, 순수한 오성의 전범위와 완전히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번역, 2002, 박영사, B89 제1문 선험적 분석론


순수이성비판을 큰 틀에서 보자면, 현상을 우리 마음에서 직관적으로 규정하며 성립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원리는 선험적 감성론에서 다루었다. 즉, '감성'과 '직관'은 다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부분은 사고가 남아있다. 이 사고를 관장하는 인간의 정신기능을 가리켜 '지성'[36]이라 칭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판단'과 '범주'라는 것이 문두에서 등장하며 지성을 설명하니, 범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매우 당혹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범주에 대한 정의는 칸트는 뜬금없이 글 중간에 서술하는 바, 아래에 다시 서술되겠으나 미리 기술한다.

나는 미리 범주라는 말을 설명하여 두고자 한다. 범주란 대상 일반의 개념이요, 이런 개념을 통해서 대상의 직관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의 하나에 관해서 결정된 것으로 보아진다. 정언 판단의 기능은 주어의 객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이었다. 그러나 지성의 논리적인 사용에 관해서는 두 개념 중에 어느 것에 주어의 기능을 주고, 어느 것에 객어의 기능을 주어야 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내가 만약 물체의 개념을 실체의 범주 속에 집어넣는다고 하면, 실체 범주에 의해서 경험에서의 물체의 경험적인 직관은 항상 주어로만 보아지고 결코 한갓 객어로 보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정된다. 실체의 범주 이외의 딴 범주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8-129,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여하튼, 개념의 분석론은 범주를 다루며, 감성학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증명이 두 가지였던 것과 같이, 이 범주에 대한 칸트의 증명 역시, 적극적 증명이라 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증명과, 소극적 증명이라 할 수 있는 선험적 증명 두 가지로 주어진다. 이 중 형이상학적 증명은, 지성이 수행하는 기능 일반인 "판단"이란 어떠한가에 대한 탐구로부터, 그러한 일반 논리학으로부터 사물을 사물로 인식하는 조건에 대한 연구, 곧 선험적 논리학의 내용이 무엇일지를 이끌어내는 과정으로 진행되며, 따라서 범주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 논의가 형이상학적 증명에서 나타나게 된다. 반면 이러한 범주가, 곧 감성을 통해 들어온 직관을, 우리의 틀에 따라 재해석하는 지성의 기능이 있어야만 "나는 생각한다" 라는 표상, 곧 순수통각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의가 범주에 대한 선험적 증명이다. 이 둘은 각각 범주의 내용, 그러니까 범주라는 것이 어떠한 사실인지에 대한 발견하는 논의와, 그와 같이 발견된 범주가 어째서 타당한지를 다루는 정당화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형이상학적 증명으로 들어가 보자면, 칸트는 이 증명을 위해서, 제일 먼저 기존의 일반논리학에서 사용되던 판단이란 무엇인지를 논의한다.

모든 판단에는 하나의 개념(범주 혹은 모형)이 들어 있다. 이것은 많은 표상들에 타당하고, 이런 많은 표상 중에서 대상에 직접 관계하는 표상 즉 주어진 표상(주어)도 포함된다.

-중략-

왜냐하면 하나의 직접적 표상대신이 이런 표상과 그 외의 여러 표상을 포괄하는 하나의 보다 더 높은 표상이 대상을 인식하고자 사용되고 이 때문에 많은 가능한 인식이 하나의 인식에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성의 모든 작용을 판단들로 환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오성은 일반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고 생각될 수 있다.

-중략

만약 우리가 '판단 일반'의 전 내용을 무시하고, 판단에 있어서의 '오성의 형식'만을 주목한다면, 판단에 있어서의 사고 기능은 각각 세다리를 포함하는 네 항목 아래 개괄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네 항목은 다음의 표로 적당히 나타내질 수 있다.

|| 1.분량 || 2.성질 || 3.관계 || 4.양상 ||

|| 전칭판단 || 긍정판단 || 정언판단 || 개연판단 ||

|| 특칭판단 || 부정판단 || 가언판단 || 실연판단 ||

|| 단칭판단 || 무한판단 || 선언판단 || 필연판단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93-B95, 오성의 논리적 사용 일반 등에서 발췌


이 판단의 표는, 칸트가 전통적인 논리학 저서의 내용을 자신의 현재 필요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실례를 들어 보자면, "모든 프랑스인들은 와인을 좋아한다"라는 판단은 양에서는 전칭적이고, 질에서는 긍정적이고, 관계에서는 정언적이고, 양상에서는 확정적[필연적]이겠다. "장-피에르는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양에서는 단칭이고, 질에서는 부정적이고, 관계에서는 정언적이고, 양상에서는 확정적[필연적]이겠다.

그리고 칸트는 선험적 논리학이란 이러한 판단을 사물의 인식 가능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니, 지성의 일반적인 판단에 대한 이 표를 수정하여 선험적 논리학의 범주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인식 가능 조건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일단 사물에 대한 판단의 질료는 감관이 최초로 주는 것이었고, 그 기능을 하는 능력을 '감성'이라 한다는 것은 앞에서 선험적 감성론에 대한 논의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여기에 더하여, 칸트에 따르면, 사물이 우리에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 직관의 질료들이 지성을 통해서 하나로 결합되는 과정을 거쳐야 우리에게 비로소 사물은 사물로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을 칸트는 '종합(Synthesis)'라고 칭하며[37], 이와 같이 사물 인식에서 반드시 필요한 종합은, 지성의 활동이니, 지성의 일반적인 활동인 판단의 일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성의 일반적인 활동인 판단은, 사물 인식이라는 특정한 맥락 하에서 그 맥락에 맞게 다소 변형되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선험적 논리학에서 이러한 의미로 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판단을, 바로 '범주'라는 이름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다음은 칸트의 언급이다.

질료가 없어서는 오성의 순수한 개념은 아무런 내용도 없겠고, 따라서 전혀 공허한 것이겠다. 그런데, 시공은 순수한 선천적 직관의 다양을 내포하지만, 그러한 데도 우리 심성의 수용성의 조건에 귀속한다. 이 조건 아래서만 심성은 대상의 표상을 받아들일 수 있고, 따라서 이 조건은 '대상의 개념'도 항상 촉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고의 자발성은 다양에서 인식이 발생하자면, 다양이 먼저 어떤 방식에 있어서 통관되고 받아들여지며 결합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작용을 나는 '종합(Synthesis)'이라고 말한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02,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 중에서 발췌


판단이 포함하는 각종 표상들에 통일을 주는 개념의 동일한 기능이, 직관이 포함하는 각종 표상들의 단순한 종합에도 통일을 주고 있다. 이런 통일이 보편적으로 말해서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래서 직관 일반의 대상에 선천적으로 관계하는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수효는 모든 가능한 판단의 (일반)논리적인 기능들이 상술한 표에서 보였던 그 수효만큼 생긴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순수한 개념들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범주'라고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의도를 성취한 결과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자못 떨어져 있지마는, 우리의 애초 의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와 같기에 말이다.

|| 1.분량 || 2.성질 || 3.관계 || 4.양상 ||

|| 단일성 || 실재성 || 속성과 자존성 || 가능성-불가능성 ||

|| 다수성 || 부정성 || 인과성과 의존성 || 현존성-비존재성 ||

|| 전체성 || 제한성 || 상호성(능동과 수동) || 필연성-우연성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06,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 중에서 발췌


판단의 표와 범주에 대해서 더 말하자면, 칸트는 언급했듯이 위의 범주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논하고자 했던 범주와 같은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말했다. 하지만, 전술되었듯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의 범주가 불완전하다고 여겼으며, 사실 그 때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취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물 간 것으로 취급되어졌기 때문이다.[38]

이러한 기본개념들을 탐구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총명한 사람에게 적절한 기도(企圖)였으나, 그러나 원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마주치는 대로 주어모았고, 우선 열개를 손에 넣어서 범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에 또 따로 다섯 개를 발견했다고 믿었고, 이것을 후범주라는 이름 아래서 첨가하였다. 허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07,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 중에서 발췌


그렇다면, 여기서 칸트의 범주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 사례는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또한, 진지하게 형이상학을 연구한 사람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그외에 언급된 범주론에 관한 내용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칸트는 거기에 대한 고의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내가 현재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체계의 완성이 아니라, 체계에 대한 원리들을 완성하는 것뿐이다. 이렇기에 파생개념을 추가하는 일을 나는 다른 기회에 하기로 보류한다.

-중략-

이러한 파생개념에 주의하고 되도록이면 이러한 파생개념을 완전하기 기재함은 필요하고도 불쾌하지 않은 노력이 되겠으되, 이런 노력을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범주들을 정의하고 싶지마는, 이러한 정의를 나는 이 분석론에서 고의로 생략한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08-109,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 중에서 발췌


다만 칸트는 자신의 범주표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세 가지 주석을 2판에서 다음과 같이 추가한다. 물론 위에서 상기한 바와 같이 칸트가 정확하에 어떠한 방식으로 일반적인 판단표가 12개라고 보는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판단표에서 어떻게 선험적 논리학의 열두 범주가 유도되는 것인지의 과정이 정말로 논리적인지, 그리고 도대체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지는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세 주석은 이를 이해하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1) 범주의 큰 분류에서 세 번째 항목들은(전체성, 제한성, 상호성, 필연-우연) 앞의 두 항목을 같이 고려함으로써 얻게 된다. 즉, 전체성이란 다수인 것들을 단일한 것으로 볼 때 얻게 되는 것이며, 제한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나는 와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39]벤다이어그램에서 특정 부분을 제외한(부정한) 나머지 부분 전체가 실질적으로 어떠한지를 고려하는 것이며, 상호성이라는 것은 모든 실체들이 인과법칙에 따라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표상한 것이고, 필연이란 가능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것이 실제로도 세상에 현존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2) 분량-성질에 속하는 것들은 단항인 반면, 관계-양상에 속하는 것들은 그렇지 않은데, 칸트는 이 이유로 전자에 속하는 것들은 수학적이지만, 후자에 속하는 것들은 역학적이라는 것을 든다. 3) 판단표에서의 관계와 (정언/가언/선언) 범주에서의 관계 간에는 (실체와 우유/원인과 결과/상호성) 특히 선언 판단과 (A거나 B거나 C...이다)상호성 간에는 상관관계가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칸트는 이에 대해서 선언 판단에서 각 항들, 곧 A, B, C와 같은 것들은 개별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 선언문이라는 맥락 하에서 다른 것들과 같이 고려되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며, 이는 실체들이 인과법칙에 따라서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는 관계로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주석을 단다.

칸트의 사례 적용의 누락은 차치 하더라도, 칸트가 시도하려 한것은 우리가 직관한 '현상'들이 어떤 규칙, 다시 말해, 범주에 의해서 정리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왜 이러한 범주가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칸트가 제시하는 두 번째 연역, 곧 범주에 대한 선험적 연역이다.

대상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두 가지만이 있다. 첫째는 직관이요, 이것을 통해서 대상은 오직 현상으로서만 주어진다. 둘째는 개념이요 이것을 통해서 직관에 대응하는 대상은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진술한 것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하다. 첫째 조건 즉 오직 대상이 직관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은 객체의 형식상의 근거로서, 선천적으로 심성 속에 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감성의 이 형식의 조건과 반드시 일치한다. 현상은 이 형식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경험적으로 직관되고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 무엇을 직관하도록 하지는 않더라도 대상 일반으로서 생각하도록 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 선천적인 개념이 또한 먼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대상의 모든 경험적인 인식은 반드시 이러한 개념에 합치한다. 이러한 선천적인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경험의 객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대저 그럴 적에는 범주는 필연적으로 즉 선천적으로 경험의 대상과 상관한다. 왜냐하면, 범주에 의거해서만 그 어떠한 대상은 일반적으로 생각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5-126,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칸트의 인식에서 중요한 부분의 첫째인 직관은 선험적 감성론에서 언급하였고, 이제 이것이 어떻게 사고되는 것인가를 얘기한다. 즉, 어떻게 개념으로 인지되는지 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어떤 대상을 생각 할 때,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대상을 '개념화' 시킨다. 하지만, 사고되는 대상은 직관되어야만 그 내용을 알 수 있기에 선행되어야 하고, 개념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추상화되어 사고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 직관으로 들어온 대상과 언어의 개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들을 근본적으로 엮어줄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칸트는 범주를 그 직관과 개념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것이 선천적으로 우리 정신안에 존재해야만 우리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개념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들은 후천적이고 무작위한 것들 즉 무질서 한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상을 개념화할 때, (언어적 명제의 논리적 정의만 보더라도 명확하겠지만)대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개념의 질서는 감관으로 얻어진 대상이 필연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고하는 마음안의 질서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가 가능하려면(개념이 생성되려면), 감관을 통해서 대상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 대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형식이 필요하다. 이를 범주라 칭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인식에서 직관과 개념사이에 존재하는 작용의 공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존 로크'가 대표적인데, 그는 개념을 구성하는 그러한 근거가 직관, 즉 경험에서 유도된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영국의 경험론자들의 일관된 견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칸트는 여기에서 경험론을 배척하고, 다시 유럽 대륙의 합리론의 입장을 취한다.

이래서 모든 선천적 개념의 선험적 연역은 우리의 전 탐구가 인도받는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즉 선천적인 개념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인 조건으로 (경험에서 발견되는 직관을 위한 조건이건, 혹은 사고의 조건인건 간에) 인정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중략-

저 유명한 로크는, 이러한 고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지성의 순수한 개념을 경험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지성의 개념을 경험에서 이끌어 내었고, 그것으로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있는 인식을 얻으려고 모험할 만큼, 자뭇 무조리한 태도도 취했다. 데이비드 휴움은 이러한 모험을 할 수 있기 위해서, 개념의 기원이 선천적이어야 할 것을 인정은 하였다. 그러나, 오성이 자신 중에서 결합되어 있지 않은 개념을 대상에 결합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것을 그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또 그는, 오성 자신이 이런 개념을 통해서 오성의 대상이 발견되는 경험의 창립자 일 수 있겠다는 것을 착안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개념을 부득이 경험에서 도출하였다.(즉 주관적인 필연성에서 다시 말하면, 습관에서 도출하였다. 이것은 가끔 되풀이된 심리적 연상인 까닭에 경험 중에서 생겼으나, 드디어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어지는 바다.)

-중략-

(로크와 휴움) 두사람이 착안했던 경험적인 도출은 우리가 가지는 선천적인 학적 인식인 순수수학일반자연과학 현실성과는 조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경험적 도출은 이 두 학문의 사실에 의해서 거부된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7,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칸트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초판과 재판을 통해서 중복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영역에서 칸트는 보다 적극적인 설명을 통해 감성과 지성을 설명한다. 칸트의 주장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아래 문단을 주목하길 바란다.

감성과 오성이라는 양 극단은 구상력의 선험적 기능을 매개로 해서 필연적으로 결합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전자는 현상을 주어도 경험적 인식의 대상을 주지 않겠고, 따라서 아무런 경험을 주지 않겠기에 말이다. 현실적 경험은 현상들의 각지, 연상, 최후에 재인(再認)에서 성립하거니와 이제 최후, 최고의 요소(재인,再認)에 있어서 현실적 경험은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개념들이 경험의 형식적 통일을 가능케 하고, 따라서 그것과 함께 경험적 인식의 모든 객관적 타당성(진리성)을 가능하게 한다.

-중략-

이래서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 있어서의 질서와 합규칙성은, 우리 자신이 집어넣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우리 마음의 본성이 근원적으로 이것들을 자연 안에 집어넣지 않았다면, 이것들은 자연 중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자연의 통일은 현상들을 연결하는 필연적인 통일 즉 선천적으로 확실한 통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감성은 우리에게 (직관의)형식을 주되, 오성은 규칙들을 준다. 오성은 현상에 있어서 무슨 규칙을 발견하려고, 이것을 찾아내는 일에 항상 종사한다. 규칙은 그것이 객관적인 한에서 (그러므로 대상의 인식에 필연적으로 의존하는 한에서) 법칙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많은 법칙들을 알지마는, 그것들은 보다 높은 법칙들의 특수한 규정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높은 법칙들 중에서 최고의 법칙은 선천적으로 지성 자신에게 생기고, 경험에서 취해 온 것이 아니라, 현상들에 그 합법칙성을 주며, 이 때문에 바로 경험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은 현상들을 비교해서 (귀납적으로) 규칙을 작성하는 능력이 아니다. 지성 자신이 자연에 대한 입법자 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A125-126,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이 언급은 아마도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칸트는 종래의 철학자들, 특히 영국의 경험론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다. 칸트가 보았을 때, 인간의 인식이 형성한 모든 지식의 규칙성은 자연이 그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스스로가 창조하지 않은 어떤 선험적 원리를 통해서 규칙들을 창조한 것이다.

칸트의 이 주장은 상당히 과감한데, 여기에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아마도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만류인력의 법칙이라던지, 상대성이론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자연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작위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다는 말인가?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칸트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논제를 좀더 전개하자면, 만류인력은 관찰된 사실이 아니라 사고로 유추된 사실이다. 무슨 얘기냐하면, 실제로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을 지구 바깥에서 보는 것으로 '상상'하였다. 다시 말해, 사고 하였다. 그로 인해서, 사과의 낙하운동은 지구 중심을 향하여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바깥에서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본 것이고, 따라서 모든 천체에 작용하는 물리작용이라는 결과를 '사고'를 통해서 도출한 것이다.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든 무엇이든 간에 만류인력은 경험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그 경험을 통해서 연역되는 사고와 개념이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 스스로가 자연원리의 입법자라고 평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왜 하나의 대상을 경험하고도 서로 다른 개념을 도출하는지 이다. 위에서 말한 만류인력의 사례처럼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이 어떤이에게는 아무런 의미없는 하나의 현상, 어떤이에게는 사과가 잘 익었겠다라는 하나의 현상, 어떤이에게는 만류 인력이라는 물리적 작용이라는 현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이 각기 달리 보이기 때문에 나온 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정신 안에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여 나온 결과인 것 이다. 뉴턴은 그 가운데에서 우주적 개념과 자신의 경험을 관계시켜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범주를 정의한다.

나는 미리 범주라는 말을 설명하여 두고자 한다. 범주란 대상 일반의 개념이요, 이런 개념을 통해서 대상의 직관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의 하나에 관해서 결정된 것으로 보아진다. 정언 판단의 기능은 주어의 객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이었다. 그러나 지성의 논리적인 사용에 관해서는 두 개념 중에 어느 것에 주어의 기능을 주고, 어느 것에 객어의 기능을 주어야 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내가 만약 물체의 개념을 실체의 범주 속에 집어넣는다고 하면, 실체 범주에 의해서 경험에서의 물체의 경험적인 직관은 항상 주어로만 보아지고 결코 한갓 객어로 보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정된다. 실체의 범주 이외의 딴 범주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8-129,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칸트가 말한바대로 정언판단이란 주어와 객어(서술어)의 관계이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라는 명제는 단순한 정언명제이다. 여기서 주어는 소크라테스요, 사람이다는 객어(술어)일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주어자리에 와야 한다는 것은 명제가 규정하지 못한다. 명제는 어떤 규정된 사실을 서술하는 언어적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범주의 역할이 필요하다. 범주는 여기서 무엇이 주어가 되는 지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범주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대상의 여러 표상(여러 대상들의 성질 등)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지하게 하며, 명제는 그것의 성격을 서술하는 표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어떤 대상 규정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여러 표상들을 먼저 종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기능을 통각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서술은 아래와 같다.

표상들의 다양은 직관에서 주어질 수 었고, 직관은 감성적일 뿐이며, 즉 감수성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직관의 형식은 선천적으로 우리의 표상 능력 중에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주관이 촉발되는 방식 이외의 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양 일반의 결합은 감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고, 따라서 감성적 직관의 순수 형식 중에 동시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결합하는 것은 표상력의 자발성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 자발성은 감성과 구별해서 지성(오성)이라고 불러야 하기 때문에 -중략- 모든 결합은 오성의 작용이다. 이런 오성의 작용에 우리는 종합이라는 일반적 명칭을 부여한다.

-중략-

무릇 오성이 먼저 그 무엇을 결합하지 않았으면, 오성은 분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무엇은 오성에 의해서만 결합된 것으로서 표상능력에 주어질 수 있기에 말이다.

-중략-

이런 통일은 결합의 모든 개념들에 앞서 있는 것이요, 단일성의 범주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범주는 판단에 있어서의 형식 논리적 기능에 기인하되 판단에 있어서 주어진 개념들의 결합, 따라서, 그것의 통일이 벌써 사고되어 있기에 말이다. 하기에 범주는 먼저 결합을 전제하고 있다.

-중략-

모든 생각 이전에 주어지는 표상을 직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다양은, 그것이 발견되는 바 동일한 주관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일과 반드시 상관한다. 그러나 이런 표상은 자발성의 작용이다.

그런 표상은 감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나는 이 표상을 순수통각이라고 불러서, 경험적 통각과 구별하고, 또 그것을 근원적 통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자기 외의 것의 것에서 끌어내질 수 없는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자기의식은, 그것이 모든 딴 표상에 수반할 수 있고 또 만인의 의식에 있어서 유일하고 동일한 바, 내가 생각한다는 표상을 산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즉 직관에 주어진 다양에 대한 통각의 시종일관된 동일성은 표상들의 종합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종합의 의식을 통해서만 그런 동일성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각종 표상들에 수반되어 있는 경험적 의식은 그 자신 산만한 것이요, 주관의 동일성과는 무관계하기 때문이다. -중략- 즉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종합적 통일을 전제하고 서만 가능하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9-133,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아까 예로 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라는 명제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이 명제를 규정하기 전에, 우리는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을 먼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판단은 인지에 대한 결과이며, 명제는 그 판단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을 우리가 지각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생김새나, 인종이나, 성격(인간의 면모 등으로서나)이나 등등의 성질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성질들을 각기 개별적인 것이고, 아무상관 관계 없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에게 그 성질들을 집어넣는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으로 결합 혹은 종합한다. 이러한 이성의 작용을 통각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작용이 우리 인식의 배후에서 모든 인식작용에 대해서 이루어 지는 것을 칸트는 '순수통각'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라는 명제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명제는 (칸트의 명증에 따르자면) 분석적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표상을 끄집어낸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이 명제를 사용하기 이전에 미리 소크라테스 라는 대상 안에 '사람'이라는 표상을 집어넣어야 한다. 명제는 그래서 판단에 의해서 제시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사물을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한가지 자연스런 의문을 지닐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우주의 끝이라던지 영혼이라던지 사후 세계라던지 경험할 수 있거나 혹은 경험 이외의 것 까지 모든 사고할 수 있는 것에 이 '범주'가 적용되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범주는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오직 (감관에 의해서 경험되는) 사물에 대해서만 적용될 따름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래서 대상을 생각하는 것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결코 같은 일이 아니다. 즉, 인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대상 일반을 생각하게 하는 개념(범주)이다. 둘째는 대상이 주어지게 하는 직관이다.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이 주어질 수 없다면, 개념은 형식상으로는 생각이겠지만, 아무런 대상도 가지지 않을 것이요, 그런 개념에 의해서는 사물의 인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내가 아는 한에서, 나의 생각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중략-

허나 시공중의 사물은, 그것이 지각인 한에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즉 경험적 표상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하기에 오성(지성)의 순수한 개념은, 그것이 수학에서처럼 선천적인 직관에 적용되는 때라도, 선천적 직관이 따라서 이것을 매개로 해서 오성(지성)의 개념이, 경험적 직관에 적용될 수 있는 일에 의하는 외에는, 범주는 직관을 통해서도 사물의 인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는다. 즉 범주는 경험적 인식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만 쓰인다.

이런 경험적 인식이 객관적 경험이라고 일컬어 진다. 이렇기에 범주는 사물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인정되는 한이 아니라면, 사물을 인식하는 데에 쓰이지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47-148,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좀 쉽게 예를들어 설명하자. 앞에서 예로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가능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의 여러 표상들이 범주에 의해서 정리되고 종합되겠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소크라테스라는 인물 자체가 우리가 경험 가능한 (비록 현재는 실제로 간접적일 지라도)대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에는 인력이 작용한다'라는 명제 역시도 사물이 끌어당겨지는 경험되는 직관적인 여러 현상이 '인력'이라는 명칭에 속하기 위해서 범주에 의해 그 개념이 종합되어져서 인지된다. 따라서, 우리가 언명하는 모든 경험적 사실에는 이 범주가 적용되거니와, 그렇지 않은 대상에는 이 범주가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범주는 직관으로 인지된 대상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B125-126참조)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범주는 감관의 대상에만 적용된다는 명제는 지극히 중대하다. 그것은 대상에 관하여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쓰이는 한계를 규정하기에 말이다. 이것은 선험적 감성론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의 순수 형식이 쓰이는 한계를 정했던 것과 같다.

시공은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감관의 대상에게만, 따라서 경험에만 타당하다. 이 한계를 넘어서서는 시공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공은 감관중에만 있고, 감관 바깥에서는 현실성이 없기에 말이다.

-중략-

만약 우리에게 비 감성적 직관의 객체가 주어졌다고 가정한다면, 그런 객체는 감성적 직관에 속하는 것을 도무지 가지지 않는다는 전제 속에 있는 바 모든 객어에 의해서, 우리는 그런 객체를 확실히 표상할 수 있다. 그러나 객체의 직관 중에 그 무엇이 적극적으로 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소극적으로 객체의 직관이 무엇이 아니다, 없다 라고만 지적하는 일은 아무런 진정한 인식도 아니다.

-중략-

가령 실체의 개념 즉 주어로서만 존재하고 술어로서는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관해서,[40]

[41] 경험적 직관이 그 개념을 적용하는 경우를 나에게 주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고 형식에 대응하는 어떤 사물이 과연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아는 바 전혀 없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49,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이제 몇가지 내용을 남겨두고 개념의 분석론이 마무리된다. 먼저 이해를 돕기위해, 여기서 지금까지 칸트가 다루었던 인식론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감성은 직관을 행하는 인간 정신의 부분이요, 대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진 대상들은 우리의 정신 안에서 나타나는데, 이를 표상이라 부르며, 이 표상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원칙(내감, 외감의 형식)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지성(오성)을 통해서 그 대상들을 '판단'하는데, 이 판단에 앞서서 각 대상들의 여러 표상들은[42] 정신 안에서 '종합'되어야 하는데 이를 통각이라 지칭한다. 그리고 이 통각은 범주에 의해서 규준되어 그 질서에 맞게 대상의 여러 표상들을 종합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 내용을 다시 언급하며 정리한다.

지성(오성)의 순수한 개념에 있어서의 다양의 종합 즉 다양의 결합은 단지 통각의 통일에만 상관하였고, 그런 까닭에 다양의 종합은 인식이 오성에 의존하는 한의 선천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였으며, 따라서 선험적이었을 뿐더러, 순전히 지성적(오성적)이기도 하였다. - 중략 - 그리고 지성(오성)은 선천적인 감성적 직관의 다양에 향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우리 인간의 직관 대상이 반드시 종속하는 조건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 이래서 한갓 사고형식으로서의 범주가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 즉 대상에 적용된다.-중략-

감성적 직관의 다양에 대한 이러한 종합은 선천적으로 할 수 있고, 또 필연적이로되, 이런 종합을 형상적인 것 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것과 구별되는 것이 직관 일반의 다양에 관해서 한갓 범주 중에서 생각되는 종합 즉 오성의 결합이다. 그러나 형상적 종합과 지성적 종합의 양자가 다 선천적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딴 선천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에, 그 두가지 종합은 선험적이다.

그러나 형상적 종합이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적 통일에만 즉 범주에서 생각되는 바 선험적 통일에만 상관할 적에, 즉 순 지성적인 결합에서 구별되어,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이라고 한다. 구상력이란, 직관중에서 대상이 지금 있지 않지만, 대상을 표시하는 능력이다. -중략- 구상력은 그것만이 오성의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을 오성의 개념에 줄 수 있는 주관적 조건인 점에 기본해서, 감성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은 형상적인 것으로서 지성적 종합에서 구별되어 있다. 후자는 오성에 의할 뿐이요, 구상력의 도움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50-152,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칸트는 여기서 구상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조금 뜬금 없을 것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적은 정확한데, 왜냐하면 칸트가 이 구상력에 대한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편인 원칙의 분석론에서 다루기 때문이다. 칸트는 앞으로 다루게 될 주제를 여기서 미리 정리를 위해 다룬 것이다.
아무튼, 칸트는 (통각의 작용인) 표상들의 근원적인 통일이 범주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를 토대로 우리는 지성의 판단 재료를 생성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고 판단한다고 해 보자. 그럼,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마음 속에 떠올려 보아야 한다.(구상, 재생이라는 종합(A100))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여러 표상들의 종합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이것을 자발적으로 종합한다.(통각) 그 종합된 표상을 바탕으로 우리는 '판단'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마음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소크라테스를 명명함과 동시에 그것의 재료들을 머릿속에서 불러내어 다시 그려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는 사고작용 즉 '지성'에 의한 결과이지 직관을 행하는 '감성'에 의한 결과가 아님을 규정하였다. 그래서 구상력은 감성에 속할 지언정 지성의 동시에 받아 작용하며, 그 내용들을 내용상 통일하는 '통각' 작용은 오성의 결과인 것이다.[43]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를 항상 또 우리의 내심에서 인정한다. 선을 생각 속에서 먼저 실지로 그어보는 일 없이, 우리는 선을 생각할 수 없다. 동그라미도 먼저 생각 중에서 그려보지 않고서는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 한 점에서 서로 수직적인 세 선을 그어보는 일 없이는 삼차원의 공간을 표상할 수 없다. -중략- 주관의 작용으로서의 운동은, 따라서 공간에 있어서의 다양의 종합은, 우리가 다양한 공간을 도외시하고 내감을 형식상 규정하는 작용에만 주의할 때에, 비로소 계기의 개념도 산출한다. 즉 지성(오성)은 다양의 이러한 결합을 내감에서 발견하지 않고, 지성(오성)이 내감을 촉발함으로써 다양의 결합을 산출한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54-155,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이제 칸트는 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자아론'에 대해서 잠깐 다룬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대상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는 이성과 그 대상을 다시 불러일으켜 사고하는 이성은 별개의 이성이기 때문이며, 보다 중요하게는 이러한 직관하거나 사고하는 자기 자신을 직관하는 자아, 즉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이 찾아온다.[44]

칸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어떻게 해서, 생각하는 자아가 자기 자신을 직관하는 자아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주관으로서 자기 자신을 직관하는 자아와 같은 것이냐? -중략- 이 문제는, -중략- 자세히 말하면 직관과 내적 지각과의 객관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보다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곤란성을 가지고 있다.

-중략-

표상 일반의 다양한 선험적 종합에 있어서, 따라서 통각의 종합적인 근원적 통일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현상하는 그대로도 아니요, 내가 내 자체인 그대로도 아니라 오직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식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표상은 생각함이요, 직관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인식하자면, 모든 가능한 직관의 다양을 통각이 하는 통일로 가져 가는 바 사고 작용 외에, 다양을 주는 바 일정한 종류의 직관이 필요하다. - 중략 -

따라서 나는 내가 존재하는 그대로의 내 자신에 관한 인식을 가지지 않고 오직 '내가 내 자신에 현상하는' 그대로의 내 자신에 관한 인식을 가진다.

이래서 자기 의식은 아직도 도저히 자기 인식은 아니다.

-중략- 자기 인식을 위해서는 나는 자기 의식 외에, 즉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하는 외에, 나의 이 생각을 규정하도록 하는 내심중의 다양한 직관을 필요로 한다. 나는 지성자로 현존하고 이 지성자는 그의 결합능력을 의식할 뿐이다. 그러나 지성자가 결합해야 하는 다양에 관해서는 지성자가 내감이라고 부르는 제한적 조건에 나는 복종하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이 지성자는 직관에 관해서 지성 자신에 단지 현상하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요, 그의 직관이 지성적일 경우에 인식될지도 모르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식 할 수는 없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58-159,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누구이다' 라고 규정하려면 나에 대한 여러 직관, 개념들이 필요하게 된다. 가령, 나의 성격, 나의 가정 환경, 나의 외모, 나의 인종, 등등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외부에 의존하는 별개의 것들 즉 직관에 의존하는 것인데, 나는 누구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는 그 자체는 이미 생각하고 있는 나 혹은 그 생각을 바라보고 있는 나로서 현존하는 나 자신인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식이라 부른다. 내가 경험하는 세계의 다양성으로부터 빌려온 나 자신의 개념에 대한 인식 자기인식은 흔히 자아관이라 부르지만, 우리가 관심을 두는 이성적 질서에 통일을 부여하는 자기자신은 아닌 것이다.

이 논변은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뭇 진지하며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해서 자기 의식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주목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 앞서 말한바 우리의 정신은 직관이나 통각, 사고, 판단 같은 별개의 정신작용으로 구분되며, 둘째, 우리의 정신이 다양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인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아가 분열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45]은 이러한 다양성을 우리 내부에서 '통일'하고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기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4.2.1. 제1편 개념의 분석론 중 '제2절 지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에 대해서 가능한 하나의 이해[46][편집]


위 절의 논의에서, 형이상학적 연역이 맞다고 치고, 거기에서와 같이 지성의 판단은 12개로 나뉘고, 그에 상응하는 사물 인식의 틀, 곧 범주가 주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이러한 범주는 왜 반드시 사실인 것으로 여겨져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이어지는 범주에 대한 선험적 연역에서 칸트는, 이러한 범주를 통하여 우리의 표상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정확한 의미로 "나는 생각한다"는 표상을 가실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자연스러운 표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성이 범주를 통해서 감성이 수용한 바를 연결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범주에 대한 선험적 연역으로 제시한다.

이 논변은 조악하게 말하자면 두 단계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는 도대체 내가 (어떤 한 순간의 대상일)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 붙을 수 있는 표현이 가능하려면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지를 따져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과정을, 괄호 안의 내용과 괄호 밖의 내용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괄호 안의 내용, 곧 "나는 생각한다"와 엮이게 되는 표상의 조건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를테면, 내가 사과를 떠올린다고 하자. 이 사과는 (내가 굳이 변화 중인 사과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면) 변화하는 사과, 곧 시간 선상에 있는 사과가 아니라, 고정된 형태를 가진 특정한 한 순간의 사과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감성이 수용하는 표상은 결코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와 같은 정지한 표상일 수가 없다. 내가 나에게 있어서 주어지는 특정한 시점의 한 대상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여러 표상으로부터 이미 한 사물에 대한 인식에 다다라 있어야만 한다. 즉, 사과를 바라볼 때에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여러 표상, 곧 표상들의 잡다를, 나는 지성을 통하여 연결시켜서 대상으로 만들어 내지 않고서는, 그것의 한 시점의 형태를 다시 분리시켜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어떤 표상을 분리해 내는 것은, 이미 내가 표상의 잡다들을 한 인식으로 결합시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에 대한 사고는 반드시 어떤 연결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결합과 반대인 것으로 보이는 분해 분석도 항상 이 결합을 전제로 한다"(B130).

이제는 다른 쪽으로 넘어가, "나는 생각한다"는 표현, 곧 칸트가 근원적 통각 및 순수통각이라 부르는 표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를 살펴보자(B131-2). 여기에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현은, 모든 표상에 대해서 동일한 의미로 덧붙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에서 등장하는 "나"는 내가 여러 표상을 떠올릴 때마다 달라지는 그러한 자신이 아니고, 어떤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동일한 나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47] 이것이 거짓이라면, 곧 "나"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바가 계속 달라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매 표상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지 못하고, "나"는 여러 다른 지시 대상을 가지게 될 것인데, 이는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한 바와 같이, "내가 표상들의 잡다를 한 의식에서 파악할 수 있음으로써만, 나는 이 표상들 모두를 나의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내가 의식하는 표상들을 가지고 있는 그 수효만큼의 다채 다양한 자기"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B134).

그런데 이와 같이 인식 주체로서의 나를 동일한 나로 여기는 것이, (곧 분석적인 동일성) 가능하게 해 주는 근거가 있다면, 표상들을 전부 별개인 것이므로, 이 동일성은 표상들에 놓인 것이 아니라, 그 표상들을 한데 묶는 존재가 어떤 의미로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고 여겨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 표상에 대해서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알기 위해서는, 이미 나는 나에게 감성의 형식을 통해서 주어지는 잡다를 결합하는 능력과, 그것들을 결합하는 것으로서의 내가, 바로 그 능력을 통하여 동일한 것이 (곧 종합적 동일성) 참이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칸트의 표현을 따르면, "내가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한 의식에서 결합할 수 있음으로써만, 내가 이 표상들에서 의식의 동일성을 스스로 표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고, "다시 말해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어떤 종합적 통일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B133).

이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서, 여기에서 나의 지성을 통해서 인식되는 대상이란 주관적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 대상이어야만 한다는 칸트의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를 통해서 칸트가, "나의 표상들로서 그것들은 (내가 그것들을 그대로 의식하든 말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그것들이 하나의 보편적인 자기의식 안에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그 조건을 따라야만 한다"는 문장에서 서술하는 바로 그 "조건"이 정해지는 것이다(B 132-3). 칸트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드는 하나의 근거는 19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사물에 대해서 내려지는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이, 이미 그러한 사물들을 나와는 독립적인 객관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칸트는 인식에 있어서 관계사 "이다is(혹은 ~~하다)"라는 것의 작용에 주목한다. 그가 드는 사례를 들자면, 우리는 "이 물체는 무겁다"라고 표현하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의 순전한 주관적인 종합, 곧 "나에게 있어서 이 물체는 무거운 것으로 인식된다"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B141). 이 점에서 물체가 무겁다는 것은 비록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사실에 대한 판단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를 서술하는 방식은, 나에게 있어서 어떠하다는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나와는 독립적인 객관적인 세계의 사물이 어떠하다는 객관적인 판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일정한 분석틀에 의해서 (=앞에서 형이상학적 증명에서 밝힌 열두 범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나는 생각한다" 에서 "나"라는 것이 동일하게 인식될 때에 일어난다고 칸트는 이어서 주장한다. 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분리하여 표상할 때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미 이 사물을 인식하게 해 준 잡다를 하나의 의식에서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지성에 의해서 일어나는 이러한 결합은, 당연히 판단의 일종이며, 이 판단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해서 내려지는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이러한 앞의 두 논의를 합치면, 우리가 가지는 사물과 관련된 "나는 생각한다"는 선험적 통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성을 통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필요로 하는데, 이 과정은 사물과 관련된 객관적인 논리적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20절) 그리하여 그는 최종적으로, "모든 가능한 지각은 포착의 종합에 의존하지만[48], 이 포착의 종합 자신, 곧 이 경험적 종합은 선험적인 종합에 그러니까 범주들에 의존하므로, 모든 가능한 지각들은, 그러니까 또한 언제나 경험적 의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것은, 곧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면에서 범주들에 종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히게 된다(B 164-5).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경험적인 사물에 한정된 판단표, 곧 범주에 대한 온전한 표와 그것이 있어야만 우리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특수한, 그러나 모든 경험적으로 가능한 표상들에 따라다닐 수 있는 표상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범주에 대한 두 연역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서술한 해석은 매우 간략화되어 있고, 다른 방식의 해석이 불가능한 것 또한 아니다.

3.4.3. (제2편) 원칙의 분석론[편집]



개념의 분석론이 범주에 대한 두 증명, 곧 형이상학적 증명과 선험적 증명을 다루었다면, 원칙의 분석론은 이러한 범주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의는 이에 관한 두 논의, 곧 범주의 사용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도식론에(혹은 도식기능) 대한 논의와 그러한 조건 하에서 우리의 선험적 인식의 기초에 놓여 있는 종합 판단들, 곧 순수 지성의 원칙들을 다루는 논의를 담고 있다(A136/B175)

먼저 칸트는 도식론을 다루는데, 이는 범주의 사용 조건이다. 이는 범주에 대해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질문, 즉 과연 이것이 어떻게 인식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질문과 닿아 있다. 우리의 인식에서 지성과 감성이 동시에 요구된다는 것은 칸트의 일관적인 주장이나, 이러한 주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범주라는 것이, 그것이 어떻게 감성의 두 형식과 합쳐져서 인식이 되는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즉, 감성은 칸트에게서 인식의 수용적인 부분이고, 직관을 대상으로 가지며, 지성은 인식의 능동적인 부분이고, 감성을 거쳐서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결합하여 개념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 둘은 이처럼 완전히 다른 능력이므로, 어떻게 이 둘이 만날 수 있는지가 설명되어야 할 것인데, 바로 이러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 도식론인 것이다.

칸트는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지성과 감성이 우리의 인식에서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또한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경험적인 것을 포함하지 않으면서도, 이 둘울 매개해 주는 표상이, 곧 한편으로는 지성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적이어야만 한 무언가에 대한 표상이 필요하다고 하며, 이를 선험적 도식이라고 이름붙인다.

칸트가 지성과의 매개를 구성하는 재료로 사용되는 것은 범주와 같이 보편적이면서도 선험적인 시간이다. [49] 선험적 상상력의 생산물이기도 한 이러한 도식은, 순수 직관의 매개 안에서 개념적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범주들의 내용을 시간과 관계지어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은, 범주의 표의 순서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된다. 즉, 양의 범주의 순수 도식은 수이고, 이는 시간이 곁에 연달아 있는 것으로 표상되는 것처럼, 하나에 하나를 더해가는 과정을 포괄하는 표상이다. 질의 범주에서는, 실재성의 도식은 감각 일반에 대응하는 것이고, ~임을 지시하는 것으로, 부정성의 도식은 반대로 ~이 아님을 지시하며, 이러한 실재에서 부정까지는 (1에서 0에까지에서처럼) 완전히 있는 것에서부터 완전히 없는 것에까지, 어떤 양적인 이행이 있는 것이다. 관계의 범주에서, 실체의 도식은 실제 시간상에서 영속하는 것 내지는 고정불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사물에서 변하는 우유적인 것들의 기반이 되는 것, 곧 기체에 대한 표상이다. 인과의 도식은, 어떠한 것이 실재적으로 정립되었을 때에, 무엇인가가 그에 있따르는 것이며, 상호성의 도식은 하나의 보편적인 규칙에 따르는 한 실체 규정들이 다른 실체 규정들과 동시적인 것이다. 양태에 있어서는, 가능의 범주의 도식은 한 대상이 어떤 시점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현실성의 도식은 특정한 시간에서의 현존으로, 필연성의 도식은 모든 시간에서의 한 대상의 현존으로 주어진다.

칸트는 이와 같이 자세히 나열된 도식은, 다시 보다 큰 범주에 맞게 다시 설명된다. 칸트에 따르면, "양의 도식은 대상에 대한 계기적 포착에서 시간 자체의 산출(종합)을, 질의 도식은 감각(지각)과 시간 표상의 종합 내지는 시간의 채움을, 관계의 도식은 모든 시간에서 (시간 규정의 규칙에 따르는) 지각들 상호간의 관계를, 마지막으로 양태 및 그 범주들의 도식은 대상이 과연 시간에 속하며, 어떻게 속하는가를 규정하는 상관자로서 시간 자체를 내용으로 갖고 표상화"한 것이며, "따라서 도식들이란 다름아니라 규칙들에 따르는 선천적인 시간 규정들"이고 "시간 계열, 시간 내내용, 시간 순서, 마지막으로 시간 총괄에 관계"하는 것으로 설명된다(A145/B184). 그리하여 다시금, 우리의 모든 범주는 감성의 형식의 조건, 특히 그 중에서도 시간의 조건에 맞게, 그리고 오직 그렇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 설명되고, 범주의 적용 대상은 경험적인 대상으로 한정된다는 것이 설명되는 것이다.

원칙의 분석학에서 이어서 논의되는 내용은, 우리가 실제로 사물에 대해서 내리는 종합적 판단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 방향을 안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순수 지성의 원칙들, 곧 범주와 관련된 여러 명제들이다. 그리하여 여기에서의 논의 대상은 사물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 데에 있어서 그 최상의 원칙을 명제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원칙이 되며, 짧게 말하자면 종합적인 인식과 관계되는 이 원칙들의 집합은 범주들의 객관적인, 곧 객관적인 대상을 구성하는 사용을 위한 규칙이겠다. 이처럼 여기에서의 논의는 범주의 역할과 그 적용 가능성에 대한 논의 이후에 따라나오는 것이기에 바로 이 부분에서 범주에 따른 우리가 그 대상을 객관적인 지성의 활동에 맞게 결합시키는 것이, 대상 인식의 조건이자,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대상이 되는 존재의 이유라는 점이 따라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은 저 유명한 "모든 종합 판단들의 최상 원리는 '모든 대상은 가능한 경험에서의 직관의 잡다의 종합적 통일의 필연적 조건들에 종속한다'"는 것, 곧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은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라는 논의가 이 부분에서 설명된다.

구체적으로, 원칙의 분석학에서 제시되는 순수 이성의 원칙들은, 각 범주에 따라서 다음의 순서로 제시된다:

1) 직관의 공리들: 모든 직관들은 연장적 크기들이다.
2) 지각의 예취들: 모든 현상들에서 실재적인 것, 즉 감각의 대상인 것은 밀도적 크기, 다시 말해 도[정도차]를 갖는다.
3) 경험의 유추들: 경험은 지각들의 필연적 연결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A. 제 1유추 - 실체 고정불변성의 원칙: 현상들의 모든 바뀜에서도 실체는 고정적이며, 실체의 양은 자연에서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
B. 제 2유추 - 인과성의 법칙에 따른 시간계기의 원칙: 모든 변화들은 원인과 결과의 결합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C. 제 3유추 - 상호작용 또는 상호성의 법칙에 따른 동시에 있음의 원칙: 모든 실체들은 공간상에서 동시에 지각될 수 있는 한에서 일관된 상호작용 속에 있다.
4)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들: (1) 경험의 형식적 조건들과 합치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가능적으로 실존한다)
(2) 경험의 질료적 조건(즉 감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실제로 있다(현실적으로 실존한다)
(3) 현실적인 것과의 관련이 경험의 보편적인 조건들에 따라 규정되는 것은 반드시[필연적으로] 있다(실존한다).

칸트는 이와 같은 인식의 원칙들은, 경험적인 영역을 관장하긴 하지만, 범주가 감성의 형식인 시간과 합쳐서 따라나오게 된 도식론의 조건 하에서 제시되었으므로, 우리의 인식에 대한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원리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도식과 연결시켜 보았을 때에 대체로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이러한 명제들은, 칸트에게서는 이미 그 자체로 명증하고 탄탄한 학문인 수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에 있는 사물이 우리의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기초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고, 그리고 이를 통해서 흄의 회의론에 대한 진정한 응답이 제기된다고도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4. 관련 강의 영상[편집]





5. 관련 문서[편집]


[1] 한국어에서는 본 문서에서 채택한 번역어상 형태가 다소 다르지만, 원래 짝을 이루는 단어들이다. 원어는 a priori와 a postriori[2] 이것이 가능한 하나의 이해라고 서술된 것은, 하나는 이 부분에 대한 칸트의 논의를 이해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아래의 서술은 명제적인 내용을 최대한 배제하고 서술된 칸트의 입장을 완전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명제를 사례로 들어 칸트의 입장을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칸트 본인은 명제에 대한 논의는 원칙의 분석론에서 다루며, 그의 원래 논의에서는 명제적 판단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기하면서 읽도록 하자.[3] Kant, Immanuel. Untersuchung über die Deutlichkeit der Grundsätze der natürlichen Theologie und der Moral.2, e-artnow, 1764.281[4] 이하, 그리고 뒤의 내용은 강영안,'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강대학교 출판부,2009,pp50-54[5] 칸트 문서에서는 백종현 번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6] 중앙대 맹주만 교수나 전남대 김상봉 교수의 학파 등은 a priori는 선험으로, transzendental선험론적으로, transzendent은 초월적/초험적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선험론적은 선험에 대한 논의적이란 뜻이고 초월적은 말그대로 경험을 넘어서 초월적이란 뜻이다.[7] 한국어에서는 본 문서에서 채택한 번역어상 형태가 다소 다르지만, 원래 짝을 이루는 단어들이다. 원어는 a priori와 a postriori[8] 예를 들어, 자연수의 덧셈인 1+1=2라는 명제를 보자. 우리는 이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사고에 의존하지 않는다. 직관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 1+1=2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이라는 개념에서 2라는 개념을 추가적으로 알기 위해선 두 개의 1을 상상해서 인식을 확대해야할 것이다. 덧붙여서, 유클리드 평면에서의 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의 합은 남은 변의 길이 보다 크다라는 명제는 필연적인데, 왜냐하면 그냥 직관적으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9] 『형이상학 서설』, IV 295, 백종현 역 (아카넷, 2012)[10] 칸트에게 있어서 '순수'라는 단어는 비경험적인, 경험에 앞서서 온전히 타당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11] 주의를 주자면 감정이란 심리적 욕구의 상태가 두뇌 변연계의 활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심적 상태를 의미한다.[12]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한국에서 사용되는 감성이라는 단어는 감정이라는 그 의미가 매우 혼용된다. 그러나, 감정은 인식이 아니며, 철학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는다. 감정은 심리학적 현상으로 심리학에서 주로 다룬다. 여기서 사용하는 감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서 직관에 해당하는 활동을 하는 부분을 지칭한다.[13] 이미 첫째 설명에 따라 공간이 경험적인 개념일 수는 없다[14] 예를 들어, 삼각형의 두 변의 합은 다른 한 변보다 길다 등의[15]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하학으로 인식되던 시대에 살았기에 유클리드 기하학의 사례를 대고 있으나, 현대식으로 말하면 기하학 대신 공간에 대한 어떤 선천적이고 종합적인 학문 일반을 생각해 보아도 될 것이다.[16] 예를 들어 앞에 책이 있다고 하자, 책의 색깔, 모양 등은 시각에 의해서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눈을 감고 감관에서 더 이상 책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책의 모습을 마음안에서 그려낼 수 있다. 이는 사물들이 감관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서 재인식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기억속에 잔존하여 사고에 이전될 것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표상'이라 부른다. 즉, 인간은 자신의 마음안에서 그려낸 사물을 지각하여 인지하는 것이다.[17] 여기서 오해가 있을 수 있어 미리 말한다. 모든 인간이 현상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각기의 이성안에서 사물들을 각자의 계기성에 맞추어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그 현상의 질서가 각기 개별적으로 맞추어질 것이다. 그래서 시간의 질서는 현상의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에 어줍잖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고와서 시간의 상대성이니 어쩌니 하는 논리를 펴지 않길 바란다.[18] '플라톤은, 감성계가 오성에 대해서 그다지도 많은 방해를 하기 때문에, 이념의 날개에 의탁하여 감성계를 떠난 피안에, 즉 순수오성의 진공중에 감히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자기의 이러한 노력이 아무런 전진도 이루지 않은 것을 깨닫지 못했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박영사, 2002, A5 초판의 들어가는 말 중에서, 이처럼 칸트는 아예 대놓고 플라톤의 이데아 이념을 비판했다.[19] 본문은 최재희역의 순수이성비판을 사용하고 있고, 해당 서적은 독일어 'Verstand'를 오성(悟性)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근래 한국 철학계에서 지성(知性)이라는 표현을 더욱 선호하는 바, 이에 지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함[20]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자 언급하는 바, 아리스토텔레스는 직접 4원인설을 이성의 규칙적인 작용이라고 논한적이 없다. 다만, 그것이 자연만물에 적용되는 원인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원인이 인간의 지혜에 의거해 발견되는 것은 명확한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이성의 작용방식과 관계되어 있음을 그 역시도 유추할 수 있다.[21] 중세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목적인을 하느님의 창조목적의 개념과 연결시켜 버렸고, 이는 종래의 형이상학이 신학과 합쳐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후에 언급하겠지만, 칸트는 이 부분을 확실하게 비판하게 된다.[22] 참고로 철학자 칼 포퍼도 여기서 말하는 칸트의 선험적 틀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Popper, Karl. "Kant’s critique and cosmology." Conjectures and refutations. Routledge, 2014. 255-266.[23] 이 표에서 전칭에 대응하는 범주가 전체성이고, 단칭에 대응하는 범주가 단일성일 것 같지만, 단일성을 문자 그대로 단일한 것이 아니라 표준 또는 단위의 의미로 이해하고, 단칭에 대응하는 전체성을 구체적인 것들의 전체로 이해한다면 이상할 것이 없다. 임마누엘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역, 2002, 박영사, 113p의 역자의 각주에서 발췌[24] 하나의 실체가 실존하는 특수방식임에 틀림없는, 실체에 관한 규정들을 우유성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역, 박영사, 2002, B229, 실체지속에서 생기는 원칙 중에서 발췌[25] 물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4원인을 가리켜 직접 서술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이해하는 지혜의 원리라고 표현하였다.[26] 순수이성비판에서 특히 선험적 논리학은 칸트가 부연설명을 2중 3중으로 해놓은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설명이 매우 난잡해진다. 칸트 역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순수이성비판을 재판(再版)으로 내놓았지만 오히려 설명이 더 늘어나 버렸다. 따라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도 자신감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괜히, 근대 서양 철학사 최고 난이도 책이 아니다.[27] 어느정도로 골때리는가 하면,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에서 발간하고 네이버에서 서비스하는 철학사전의 순수이성비판 항목에 첨부되어있는 지식지도에서도 이 부분은 매우 소략하게만 서술되어있다.[28] 여기에서의 '단일'은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이해할 때 잡다한 것의 뭉치로 여기지 않고 그것들을 내 앞에 주어진 사물에, 그 사물이 하나건 여럿이건, 전부 속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니까 내 앞에 야구공이 여러개가 있건 하나가 있건, 나는 그 야구공들이 가지고 잇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곤 하는 다양한 성질들을 - 둥그럼, 하얀색임, 실밥이 있음 - 등을 각각의 야구공에 속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29] 예: 두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30] 이를테면, 무엇이든지 특정한 양을 가지고 질감을 지니며 어떠한 인과법칙 하에 놓일 것이며 어떤 양태를 지닌다고[31] B판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서 대상이 나의 표상인 것과 연관된 지성의 기능은 통각, 판단들이 함께 묶이는 것과 연관된 지성의 기능은 판단력인 것으로 여겨져야 할 것으로 보이나, A판과 B판의 판단력에 대한 칸트의 서술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또한 칸트 스스로는 희한하게 판단력이 감성이라고 서술하기도 하여 이 부분은 해석상의 논쟁점 중 하나이다.[32] 여기서 한가지 더 주의를 주자면, 이 시간에 대한 칸트의 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들고와서 순수이성비판의 물자체 불가지론과 엮을려는 몰이해에서 비롯한 가소로운 시도는 꽤나 있었다. 그러니 그러한 시도는 하지 않도록 하자.[33] 강영안,'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강대학교 출판부,2009,p56[34] 선험적 감성론에서 하위 절목인 공간론과 시간론에 2~8까지의 하위 절목이 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9~27의 연속되는 하위 절목이 선험적 분석론에 기입되어 있다. 이는 칸트가 해당 내용들을 연속적으로 나열하여 기록할 의도를 지녔음을 나타낸다.[35] 이는 범주표를 의미한다[36] (독일어Verstand 영어Understanding, 최재희 역의 본서에서는 '오성悟性'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어색한 일본식 번역어인 오성은 현재 국내 철학계에서는 사용을 자재하고 있다.)[37]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서두에서 언급한 선험적 종합판단이니 할 때 언급한 그 종합이 맞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아니라 단순히 '종합'이라 일컬었냐면, 여기서 칸트는 경험일반에서 사용되고 있는 종합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38]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ooIMX%2FbtqAhrw8wGJ%2FlzbZ2cZyrPf0aRDGgGFLI0%2Fimg.png 해당 초상화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르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밟고 있는 그림이다. 그는 칸트보다도 128년이나 전에 태어났다. 칸트의 시대 보다 1세기나 앞서서 당대 서양철학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은 비평적으로 탐구하며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다.[39] 문장 자체는 제한과 부정이 같으나, 부정은 내가 와인을 싫어한다는 그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고, 제한은 나에 대해서 저 문장을 통하여 생각해 본다면, 나에게서 확정적인 것은 와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일 뿐이고, 이를 제외한 나의 다른 모든 부분들은 미정적이라는 것이다.[40] 쉽게 설명하자면, 이름은 있지만 그 내용이 뭔지 서술할 수 없는 것들. 가령 신이나 영혼이나 하는 것 등등은 칸트에 의하면 서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칸트가 무언가를 서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고 즉 경험했다는 것인데, 영혼이나 신이나 하는 것 등등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만 있을 뿐이다.[41] 다만 이는 이론이성의 관점에서 신과 영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론이성을 통해서는 이것들에 대해서 불가지론만이 주어질 수 있지만, 실천적 맥락에서는, 전지, 전선, 전능한 신과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요청(혹은 전제)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42] 가령, 앞서 소크라테스의 사례로 예를 들어보자면, 소크라테스는 가령 남자, 노인, 철학자, 등등의 여러 표상들을 개념적으로 포함하고 있다.[43] 구상력의 종합에 관계하는 통각의 통일은 오성이다. 그리고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에 관계하는 통각의 통일은 순수한 오성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A119, 해당내용은 재판의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의 초판본 부분인데, 본문 서술에서는 재판과 중복되어 생략되었다.[44] 철학에 조예가 깊은 이들은 이것이 이후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임을 알 것이다. 헤겔은 인식을 과정으로 도식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아 안에서 서술하려고 하였다.[45] 심리학적으로 이런 작용이 불완전하게 발생한다는 사례도 있지만 그것은 별개로 하자.[46] 이것이 가능한 하나의 이해라고 서술된 것은, 하나는 이 부분에 대한 칸트의 논의를 이해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아래의 서술은 명제적인 내용을 최대한 배제하고 서술된 칸트의 입장을 완전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명제를 사례로 들어 칸트의 입장을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칸트 본인은 명제에 대한 논의는 원칙의 분석론에서 다루며, 그의 원래 논의에서는 명제적 판단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기하면서 읽도록 하자.[47] 로크에서처럼 기억과 같은 이 '나'들을 묶어주는 것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묶어주는 어떤 동일한 역할을 하는 주관으로서의, 경험과는 상관없는 동일성이 있다는 말이다.[48] 위에서 서술한, 하나의 분리된 표상을 얻기 위해서는 종합이 이미 필요하다는 논의[49] 공간은 왜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인데 칸트는 아마도, 우리가 가지는 표상들 중에는 심적 사건과 같이 공간 위에 놓이지는 않지만 시간은 필요로 하는 표상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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