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무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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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원인
3. 전개
4. 매체에서의 묘사
5. 여담



1. 개요[편집]


순무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고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강철폭풍 속에서』 中 저자 에른스트 윙어의 작중 표현

순무의 겨울(Steckrübenwinter; The Turnip Winter)은 독일 제국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세 차례 찾아왔던 기근과 고난의 겨울을 이른다. 대전 중후반기 독일 제국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때 독일인들이 먹었던 '순무'는 사실 순무(turnip)가 아니고 유채의 일종인 루타바가(rutabaga; steckrübe)로, 18세기에 개량된 순무와 양배추의 교잡종이다[1]. 생긴 것이 순무와 비슷해서 '스웨덴순무(Swedish turnip)'라고도 하며 몇몇 지방(콘월 등)에서는 아예 순무 그 자체로도 불린다. 이러한 용례에 따라 '순무의 겨울(The Turnip Winter)'이라는 표현이 생겨 굳어진 것이다.


2. 원인[편집]


사태의 원인은 독일이 여러 나라를 적국으로 돌리면서 교역을 포함한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고 영국강력한 해군을 동원해 해상무역을 봉쇄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몇몇 중립국[2]들이 독일과 계속 무역을 이어갔지만, 그 정도 크기의 시장과는 아무리 교역을 해도 필요량을 충족할 수 없었으므로 독일은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전선에서 싸우는 독일 제국군 장병들과 후방 민간인들까지 매일매일 먹여 살리려면 상당한 양의 식량 자원이 필요했으나 이걸 자국의 물자로만 충당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독일이 평시에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원래라면 생산 활동을 할 인력들이 징집되어 전선에 수백만 명, 군수공장에 수백만 명이 투입된 상황이니 당연히 식량과 소비재 생산량은 급감하여 파탄날 수 밖에 없었다. 농촌에서 사람뿐만이 아니라 말(馬)들도 대거 징발당한 것 역시 노동력 부족에 한몫했다.

게다가 공기에서 빵을 만든다는 질소비료 생산 공장은 (역시 수요가 폭증한) 화약공장으로 전환되었고, 재래식 비료인 두엄은 그 원료인 똥오줌을 생산하던 소와 돼지 등을 잡아먹으며[3] 마찬가지로 생산이 줄었다. 국제무역 단절, 노동력 부족, 비료 부족이 겹친 셈이다.


3. 전개[편집]


전쟁이 장기화가 되면서 노동력 부족이 심화가 됐고, 특히 농업에서 타격이 심했는데. 1916년부터 배급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된 독일에서는 감자가 동이 날 위기에 처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흉작으로 인해 수확량이 반으로 떨어지면서 1916년 11월에는 독일 감자의 씨가 거의 말랐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감자의 대용 식품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루타바가였다. 루타바가는 비슷한 부류의 뿌리채소 중에서는 그나마 전분이 많고 무엇보다 북극권에 가까운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겨울을 버텨낼 정도로 추위에 강한 채소였기 때문이다.

원래 루타바가는 돼지에게나 먹이는 사료 작물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빈민이 아니고서야 굳이 루타바가를 찾지 않았지만, 당시 독일 제국은 그런 배부른 말 할 상황이 아니었다.

독일 정부는 루타바가를 감자처럼 쪄서 먹는 것을 시작으로 온갖 요리를 창작해냈는데 "루타바가 튀김", "루타바가 샐러드", "루타바가 커틀릿", "루타바가 빵"[4]까지 만들었다. 나중에는 루타바가를 즙을 내어 물기를 짜내 만든 "루타바가 버터"까지 만들어서 "루타바가 빵"에 발라먹었다고 한다. 감자처럼 전분질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응용요리가 가능했던 것.

맛은 이견 없이 밀이나 감자로 만든 것보다 별로였다고 한다. 게다가 제공하는 열량조차 곡물이나 감자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했다.[5] 그나마 다른 식재보다 잘 자라고 재배기간도 짧아서 대량으로 양산이 가능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

1917년부터는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나발이건 독일인 모두가 하루 삼시세끼 루타바가로 만든 대용식을 먹는 상황에 놓였다. 겨울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미 독일인들의 원래 주식인 감자나 밀은 1916년 겨울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1917년 봄, 여름, 가을에도 내내 루타바가로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 그래도 제정 러시아를 제외한 협상국들은 주리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쟁 말인 1918년 독일군 병사들의 하루 식사는 "루타바가 스튜"와 "루타바가 빵"이었다. 그나마도 전선의 배급 상황은 우선순위가 높았던 것으로, 2선이나 민간에서는 "톱밥 빵"이나 "루타바가 잎" 따위를 먹으며 버텨야 했다. 영양실조로 최대 52만 4천 명이 죽었으며, 면역력 약화 등으로 질병[6]으로 죽은 사람까지 셈하면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같은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무려 1914년 10월부터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7]

이런 상황은 종전까지 계속되었고 독일 군부가 결국 항복하기로 결정한 것도 미국의 참전이나 마지막 공세의 실패 때문만이 아니라 보급이 붕괴되어 전쟁 지속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루타바가서양에서 1차 대전 독일군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1차 대전에서 이 고충을 몸소 겪었던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 수뇌부는 2차대전에선 식량 보급에 신경을 더 쓰고 나름대로 전쟁이 잘 풀릴 땐 1차대전 때보다 많이 확보한 피지배 영토의 주민들을 쥐어짜서 독일 군민들을 잘 먹였지만 1944년 이후 전황이 급속도로 패망하고 외부 점령지를 상실하면서 44년 말~45년 초부터는 또 식량난을 겪어야 했다. 2차 대전 종전 직후에는 승전국들 역시 대부분 식량난이 심각했기에 패전국 식량 보급은 우선순위가 낮았다. 그렇게 루타바가의 겨울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재현되었다.

이 두 루타바가 겨울의 안 좋은 기억 탓인지 현재까지도 독일에서 루타바가는 그다지 선호받지 못하는 채소라고 한다. 마치 스팸이 영국에서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4. 매체에서의 묘사[편집]



카친스키는 이들 중 가장 어려보이는 신병에게 말을 건다. "보아하니 내내 괜찮은 걸 얻어 먹지 못한 것 같군, 어때?" 신병은 얼굴을 찡그린다. "아침에는 순무 빵이었고, 점심에는 순무찜이었고, 저녁에는 순무 커틀릿에다 순무 샐러드였어." 카친스키는 고참병처럼 휘파람을 불며 말한다. "순무 빵이라고? 그렇다면 너희들은 운이 좋았군. 여기선 톱밥으로도 빵을 만든단 말이야. 그럼 흰 콩은 어떻게 생각하나? 배 터지게 먹고 싶지 않아?" 신병은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놀리지 마." 카친스키는 이렇게 말할 따름이다. "반합을 갖고 따라와." 우리도 호기심이 생겨 그를 따라간다. 그는 짚으로 된 침상 옆의 작은 통으로 우리르 데리고 간다. 거기에는 정말 콩과 소고기를 삶은 요리가 절반쯤 차 있다. (중략) 그는 생색내듯 소년 병사에게 1인분을 퍼주고 말한다. "다음에 반합을 가지고 여기에 올 때는 왼손에 시가나 씹는 담배를 가져오는 거야, 알았지?"

우리가 빼앗아 온 콘비프는 온 전선에 걸쳐 명성이 자자하다. 심지어 가끔씩은 이 콘비프 때문에 아군이 기습 공격을 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식량 사정이 대체로 좋지 않아 우리는 시종 배를 쫄쫄 곯고 있기 때문이다. 다 합해서 우리는 통조림을 다섯 상자나 노획해 왔다. 이걸로 보아 적군에게는 그럭저럭 먹을 게 제공되는 모양이다. 빵도 없이 순무 잼으로 허기를 달래는 우리에게는 이것도 진수성찬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고기가 주위에 널려 있으니 그냥 손을 뻗어 집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하이에는 얇은 프랑스 흰 빵을 집어서 탄띠 뒤에 삽처럼 쑤셔 넣고 왔다. 빵 한쪽에는 피가 묻어 있지만 그 부분만 떼어 내버리면 상관 없다. 이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또 우리가 힘쓸 일이 생길 것이다. 배불리 먹는 것은 훌륭한 엄폐호처럼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음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탸덴은 또 코냑이 든 두 개의 수통을 노획해 와서, 우리는 그것을 돌아가면서 마신다.

우리의 음식은 이미 거의 동이 났고 무엇보다 질이 좋지 않다. 예를 들어 여섯 조각으로 잘라 물에 삶은 스웨덴 순무가 있다. 그리고 잘 씻지 않아 아직 더러운 당근 줄기가 있다. 감자에는 검게 썩은 반점이 있지만 그래도 맛이 일품이고, 최고의 음식은 희멀건 쌀 수프이다. 그 수프에는 잘게 썬 쇠고기가 둥둥 떠다녀야 하지만, 너무나 잘게 썰었거나 안넣은 나머지 고기는 눈을 씻고 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집으로 휴가를 온) 나는 이제 일어서서 나의 배낭을 침대 옆으로 가져와, 내가 가져온 것을 풀어 놓는다. 그것은 카친스키가 마련해 준 오전한 에담산 치즈 하나, 군용 빵 두 개, 4분의 3파운드의 버터, 두 통의 간 소시지, 1파운드의 기름, 그리고 쌀 한 부대였다. "집에서도 분명 쓸 수 있는 것들이죠." 어머니와 누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여긴 식량 사정이 나쁘죠?" 나는 물어본다. "그래, 별로 넉넉하진 않아. 그런데 전쟁터에는 충분하니?" 나는 빙그레 웃으며 내가 가지고 온 물품들을 가리킨다. "늘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요.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 만해요."



2022년 리메이크작에서도 순무의 겨울을 다뤘다. '아침도 순무빵, 점심도 순무빵 미치겠네' 라면서 순무를 거칠게 내려놓는 병사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프랑스 농가에서 목숨 걸고[8] 거위와 달걀을 서리하는 주인공 일행이 등장한다. 특히 독일군이 프랑스군 참호를 점령하는 와중에 주인공 일행 중 일부가 취사장 내지 야전식당에 들어서 적들을 사살한 뒤 소시지며 빵과 꿀, 과일잼, 술, 통조림 등 수많은 음식을 보자마자 잔군 소탕이고 나발이고 전투조차 내팽개치면서 허겁지겁 집어먹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들어온 주인공도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같이 합류하여 프랑스군이 전차를 끌고 반격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동안이나마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장면은 가히 명장면.


5. 여담[편집]


사실 1차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은 루타바가(를 이용한 대용식품)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온갖 상상치도 못할 물건들이 대체 식품(ersatz)으로 재탄생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것이 치커리로 만든 대용 커피[9]였는데 커피를 수입할 수 없게 된 독일 제국은 치커리시금치, 그리고 초콜릿 등으로 대용커피를 만들었다. 초콜릿은 대체 어떻게 수입한 거지? 벨기에를 점령하고 있어서 차라리 초콜릿을 보급해주지 전쟁 말기에는 도토리를 볶아 콜타르설탕을 섞어서 커피를 만들기도 했는데 실제로 마셔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러나 1918년부터는 그것마저 없어서 100% 루타바가로 커피를 만들었고 맛도 끔찍한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그리고 톱밥에 소량의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만들었으며 하얗게 만들기 위해 분필가루까지 넣었다.[10] 물론 무진장 딱딱한 데다 사람이 먹지 못하는 목재 부산물이 잔뜩 들어 있는 이런 빵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외에 후추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로 양을 늘렸고 기름을 얻기 위해 사람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기름까지 채취했다. 그리고 1917년 가을부터는 버터조차 씨가 마르자 루타바가 전분과 오래되어서 응고우유, 그리고 설탕을 섞은 대용품을 만들었으며[11] 고기가 귀해지자 이나 , 등을 이용해서 고기를 만들었다. 사실상 서양에서 콩고기의 시초가 바로 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대용 고기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1918년 말부터는 달걀마저 없어서 콩과 루타바가, 옥수수 등을 이용해서 인조달걀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양제로 널리 쓰이는 클로렐라도 이 무렵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다.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던 독일이 단시간에 많은 인구를 먹일 식량을 찾는 와중에 찾아냈고 이후 미국이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편 이 시기의 미군은 최전방으로 건너온 구세군의 에반젤린 부스라는 여성과 11명의 자원봉사자들[12]에게 도넛을 배급받고 있었다. 미군인 이들을 '도넛 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군의 사기 증진을 위해 홍보까지 하며 훗날 미국에서는 이를 기리는 도넛의 날을 만들기까지 했다. 미군은 아이러니하게도 30년 뒤 제2차 세게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베를린 봉쇄가 벌어지자 물자를 공수하며 대량의 사탕과 초콜릿을 같이 투하해 주었다. 이러한 일화는 미군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여유가 있고 그 여유로 부식을 어떻게 배급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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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주로 네덜란드나 북유럽, 1916년 이전까진 루마니아도 포함된다.[3] 독일 제국은 이미 1915년 초에 돼지살육(Schweinemord)이라고 불리는 정책으로 돼지를 5백만 마리(총 돼지의 1/3 정도)나 도축했다. 일시적으로 돼지고기 공급을 늘림과 동시에 사료용 곡물을 아끼기 위한 정책이었는데,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니었지만 딱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이었다.[4] 밀가루에 루타바가를 섞어서 구워낸 빵이 아니고 말린 루타바가를 넣고 틀에 모양을 만들어서 찜통에 넣고 쪄낸 괴식. 겉보기에는 빵처럼 보였지만 그냥 루타바가 찜인 셈. 당대에는 힌덴부르크 빵(Hindenburg-Knolle)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유래는 물론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5] 루타바가 100그램에서 40kcal 이하가 나온다. 약 80kcal 정도인 감자의 절반 정도, 360kcal 정도인 밀가루의 1/9 정도에 해당하는 허접한 열량이다. 그나마 무(15kcal)보단 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괜히 현대에 들어서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다이어트한다고 먹는 것이 아니다.[6] 때마침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이 독일에서도 크게 유행하여 28만 7천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7] 심지어 전쟁 이전 부다페스트 곡물거래소는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그것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거래소로 그 수출량 역시 제정 러시아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전쟁으로 수출 판로와 생산이 아작난 것.[8] 들키면 농부가 산탄총을 들고 와서 사격한다.[9] 일반적으로는 재료를 까맣게 탈 때까지 볶아서 만들었다. 루타바가는 몰라도 치커리는 맛이 진짜 커피와 매우 흡사했다고 한다. 사실 이 치커리 커피는 원래 유럽에 커피가 들어오기 전에 마시던 음료였고 커피 대용품으로 사용한 건 19세기 프랑스의 대륙봉쇄령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커피 대용으로 삼은 것이 원조다.[10] 이건 사실 중세 유럽에서 악덕 상인들이 매우 자주 저지르는 행위였다. 19세기 미국의 식품회사에서도 우유에 분필가루를 섞기도 했다. 이유는 물 탄 우유의 농도와 색깔을 맞추기 위해서였다나.[11] 비슷한 케이스로 나치 독일 시절 코카콜라 독일 지사가 환타를 만들 때 우유로 치즈나 버터를 만들다 남은 찌꺼기인 유장(乳漿, Buttermilk. 시큼한 맛이 난다)이라고 불리는 노란색 액체와 사과주를 빚고 남은 섬유질, 여기에 약간의 과일주스와 이산화탄소를 넣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각 병마다 맛이 미묘하게 달랐다고 하며 이걸 유래로 전후에도 환타는 콜라나 스프라이트와는 달리 다양한 맛을 제공한다. 사실 환타 자체가 대용 콜라로 탄생한 음료이며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설탕이 매우 귀해지자 음식에 넣을 설탕이 없어 환타를 대신 집어넣는 가정도 흔했다고 한다.[12] 이들 중에는 당시 16살밖에 되지 않은 '스텔라 영'이라는 소녀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