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덴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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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즉위 이전
2.1. 출생
2.2. 황태자 책봉
2.3. 유럽 순방
2.4. 섭정 시기
3. 즉위 후
3.1. 즉위
3.3.1. 맥아더와의 만남
3.4. 전후
3.5. 노년
3.6. 사망



1. 개요[편집]


쇼와 덴노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즉위 이전[편집]




2.1. 출생[편집]


파일:쇼와 천황 1902.jpg
1902년(메이지 35년), 1살 때의 모습.
어렸을 때 어칭호미치노미야(迪宮)였으며, 도장에 새겨진 인장명은 와카타케(若竹)였다. 신화 속 상상의 인물들을 제외한 역대 천황들 중에서 재위 기간(치세 64년)이 가장 길며, 2번째로 장수한 천황이다.[1] 아버지 다이쇼 덴노는 47세로 단명했으며,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 역시 60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하고 중년에 사망한 것과 대비된다. 역대 천황 중 유일하게 공식 석상에서도 안경을 써서 일본 황실의 오랜 전통이자 관습을 처음으로 깨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일본제국 도쿄시 아카사카 구 아오야마(현재 위치는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의 아카사카 어소에서 메이지 덴노장손이자 훗날 다이쇼 덴노가 되는 요시히토 황태자와 사다코 황태자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랫동안 측실 소생으로만 계승되어 오던 일본 황실의 관습을 깨고, 황태자비 소생의 적장자(嫡長子)로서 대를 이었으며, 어머니 사다코 황태자비가 본인 뒤로 남동생을 셋[2]이나 낳았기 때문에 일본 황실은 메이지 덴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게 되고 이후로는 역대 천황들뿐만 아니라 다른 황족들도 축첩을 하지 않아 일본 황실에서 후궁 제도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태어났을 때 키는 51cm였고, 몸무게는 약 3kg 정도였다. 히로히토는 생후 70일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친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추밀원의 고문이었던 카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의 누마즈(沼津) 저택에서 홀로 자랐다.[3] 1908년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한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원장이던 노기 마레스케 육군대장의 밑에서 엄격한 황실 후계자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동갑이자 영친왕이방자 비도 히로히토와 같은 시기에 가쿠슈인에 다녔는데, 그녀 역시 노기 장군이 대단히 엄격했다고 회고했다.

생년월일로 보면 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여섯 지도자 중 다른 지도자들인 추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1883년생), 아돌프 히틀러(1889년생), 연합국의 윈스턴 처칠(1874년생), 이오시프 스탈린(1878년생), 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년생)와 비교해봤을 때 6명 중 유일하게 19세기 후반이 아니라 20세기에 태어났다. 히로히토가 태어났을 때 다른 지도자들은 벌써 청년기~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10대 청소년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30대~40대였다. 동시대 다른 지도자들은 50대~60대 정도였다. 그러한 이유로 유일하게 1980년대 말까지 장수하기도 했다. 정작 가장 연상인 윈스턴 처칠이 쇼와 덴노 다음으로 늦게 죽어서 제대로 자연사했다고 볼 수 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병사,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종전 전 총으로 인한 타살 및 자살이다. 하여튼 늦게 태어난데다 장수하여 6대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살아본 인물이다. 다만 실권자인 도조 히데키 총리가 다른 지도자들과 비슷한 연배인 1880년대생이긴 하다.영상 참고

2.2. 황태자 책봉[편집]


파일:히로히토 입태자.jpg
1916년, 15살 때의 모습.
1912년 7월 30일에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고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嘉仁皇太子)가 뒤를 이어 일본 제123대 다이쇼 덴노로 즉위하자,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은 황태손(皇太孫)에서 황태자(皇太子)로 지위가 올라가게 되었다. 다이쇼 덴노의 즉위 후, 가쿠슈인 초등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황족신위령(皇族身位令)에 따라 육해군 소위로 가게 되었고 일본 육군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1914년 3월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에 할머니 쇼켄 황후(昭憲皇后)[4]가 사망했다. 1918년에는 방계 황족인 쿠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1919년 만 18세가 되자, 히로히토는 정식으로 성년식을 한 후 바로 황태자에 정식 책봉되었다.

파일:Emperor_Hirohito_and_empress_Kojun_of_japan1.jpg
1924년(다이쇼 13년),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
사실 나가코 여왕은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 형질이 있다"는 이유로 황태자비 결정이 취소될 뻔했으나, 결혼 당사자인 히로히토 황태자는 당시 "나가코 여왕이 좋다"며 감싸주었다고 한다. 덴노가 된 이후로도 나가코 황후와 금슬이 좋았다고.


2.3. 유럽 순방[편집]


파일:쇼와 천황 영국군복.jpg
영국 육군 정복을 입은 모습.

아버지 다이쇼 덴노의 병이 날로 급속히 악화되고 있던 가운데,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황태자 히로히토를 유럽에 보낼 것을 제안하였다. 미래의 덴노가 될 히로히토가 견문을 넓히고, 유럽 국가들과도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다카시 등 여러 인사들이 찬성을 표하였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다이쇼 덴노가 병상에 누워 있는 와중에 아들인 히로히토가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불효(不孝)'라는 주장도 있었고, 유럽에서 테러 등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히로히토의 어머니인 데이메이 황후도 아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유럽 방문 계획에 우려를 표하였다.[5] 원로들은 황후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실패했고, 결국 요양 중이었던 다이쇼 덴노를 직접 찾아가 허락을 받아낸다. 유럽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히로히토는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파일:631px-Crown_Prince_Hirohito_and_Lloyd_George_1921.jpg
파일:쇼와 조지5세.jpg
1921년, 영국을 방문한 히로히토와 영국 수상이던 로이드 조지[6]
당시 영상
같은 시기, 히로히토와 당시 영국의 국왕인 조지 5세.
파일:히로히토 에드워드 01.jpg
파일:히로히토 에드워드 02.png
당시 일본의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와 영국의 왕세자였던 에드워드[7]
히로히토는 1921년 3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순방했다. 특히 영국과는 1902년영일동맹을 맺은터라, 우호국의 국빈으로서 히로히토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국왕인 조지 5세는 히로히토를 "나의 아들과도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아껴주었다고 한다.[8]

히로히토도 일본 안에서만 지내다가 처음 해외를 나와서 감회가 남달랐는지, 이 시기가 자신에게 가장 자유로웠고 즐거웠던 시기였다고 훗날 회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럽 순방 전에는 다이쇼 덴노의 그늘 아래서 미온적으로나마 존재해 존재감이 없던 히로히토가 유럽 순방과 각국 유럽 정상들과 회담을 통해 세계적인 인기 황태자로 급부상하여 일본의 황태자, 인기스타로 돌아온 것을 실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2.4. 섭정 시기[편집]


6개월 간의 유럽 순방에서 귀국한 후, 1921년 11월 25일섭정(攝政)에 취임했고[9] 그때부터 셋쇼노미야(攝政宮)라고 칭해졌다. 당찬 여장부였던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는, 유약하여 신하들에게 곧잘 무시당하던 남편과 어린 장남을 대신해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메이지 시기 때부터의 거물급 인사들과 힘겨루기를 했다. 그 때문에 히로히토의 치세는 1921년 11월 25일부터 1926년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죽을 때까지의 섭정 5년도 어찌보면 포함되는 셈이다.

재위 중 1923년 12월 27일에는 궁정 문밖에서 사회주의자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로부터 저격을 당하는 '토라노몬 사건'이 발생하였다.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난바에게 저격을 받았을 당시에 히로히토는 자동차 안에 있었는데 "누가 총을 쏘나 보다" 하면서 태연했다고 한다. 난바는 저격을 시도한 직후 붙잡혀서 주변에 있는 경찰이며 일본 국민들한테 무자비하게 구타, 폭행을 당하여 얼굴을 못 알아보게 만든 후에, 큰 불충죄인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부친인 난바 사쿠노신(難波作之進)은 당시 일본제국의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당의 주요 직위를 두루 거치는 등 주요 정치계에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으나 아들이 이런 짓을 벌이자, 주변으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을 정도로 위협을 받아 자진해서 직위를 내려놓고, 아들이 사형되자 가문에 수치심이 든다 하면서 집을 폐쇄하고 곡기를 끊고 죽었다고 한다. 난바의 사형이 집행된 후, 히로히토는 신하들에게 "난바 가족의 갱생에 힘써라" 라고 명하여 유가족들의 복지에 힘쓸것을 지시했다.

동년에 히로히토 황태자는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과 결혼하려 했으나, 관동대지진(관동대학살)의 영향으로 이듬해인 1924년(다이쇼 13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3. 즉위 후[편집]



3.1. 즉위[편집]


파일:쇼와 천황 즉위.jpg
쇼와 천황의 즉위식
1926년 12월 25일에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오랜 숙환으로 끝내 사망하자 그는 일본 제124대 천황이 되었고 연호를 쇼와(昭和)로 바꿨다. 1928년 11월 10일 교토 어소[10]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국가 중대사에 깊이 관여했고, 특히 군사나 외교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다이쇼 치세에서 실추되었던 황권을 손에 쥐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11]


3.2. 사쿠라다몬 의거[편집]


나이 30살이었던 1932년에 조선인 이봉창에게 폭탄으로 살해 시도를 당했다.[12] 하지만 폭탄 2개 중 하나는 잘못 던져져 말과 마부(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고, 하나는 불발이 되어 실패. 폭탄 투척 이후 일경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의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의사 바로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13] 이에 죄책감을 느낀 이봉창 의사는 스스로 자수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후 난바 다이스케와 마찬가지로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격렬하게 비난하는 어조'로나마 의거를 전할 수 있었으며[14], 특히 중화민국 언론에서는 대놓고 "아쉽게도 불발되었다"는 기사로 보도했다.[15]


3.3. 태평양 전쟁[편집]


1933년 12월 23일에는 장남이자 훗날 천황이 되는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이 태어났다. 이후 거듭되는 전쟁에서 전반에는 단숨에 동남아시아 전역을 점령하면서 승전보를 울렸지만 후반부터는 미국의 압도적 물량으로 인해, 일본 제국은 결국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등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고 나서 소련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대침공하자, 쇼와 덴노는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군부의 쿠데타 시도(궁성사건)를 저지하고 밀어붙여서 "성단(聖斷)"이라는 명분하에 항복을 결정하고 1945년 8월 15일, 국민들에게 포츠담 선언(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한다는 조건)의 수락을 통보하고 미래를 도모하자는 내용의 라디오 연설을 했는데 이를 옥음방송이라고 한다. 사실 일본 당국은 소련이나 스페인, 스위스 등을 통해 연합국과의 중재 강화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련이 침공할 때까지.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항복 요구를 거부해왔던 것이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자.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연합국의 요구를 따라 쇼와 덴노에게 무조건 항복을 진언했고, 쇼와 덴노와 내각이 항복하려 하자 군부는 궁성사건을 일으켰으나 수포로 돌아간다. 같은해 11월 12일 육군과 해군 폐지에 따라 새로이 제정된 천황어복을 착용하고 이세신궁에 전쟁이 끝났음을 선조들에게 보고하고자 참배하였다.


3.3.1. 맥아더와의 만남[편집]




항복 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쇼와 덴노는 도쿄의 미국 대사관에서 첫 회견을 하게 되었다. 맥아더 회고록에 따르면 첫만남 당시 맥아더는 쇼와 덴노에게 미국산 담배를 주면서 굴욕을 주려고 했으나, 쇼와 덴노는 개의치 않고 맥아더에게 "나는 전쟁 노력에서 국민이 내린 모든 결정과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당신이 대표하는 국가의 판단에 복종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그에게 말하였다.[16] 쇼와 덴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맥아더는 그 이전까지는 "You(당신)"라고 호칭했던 것을 "Your Majesty(폐하)"라고 정정했다고 한다. 후에 맥아더는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 국민들에게 갈 불이익을 자신이 대신 떠맡으려는 그 용기에 크게 감동했다고 술회했다.

더글라스 맥아더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1946년 1월 1일 새해 아침에 인간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인간선언 이후 천황은 더 이상 신격화(현인신, アラヒトカミ/인간의 탈을 쓴 살아있는 신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고,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 선언하였으며, 정치 일선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재산 역시 모두 궁내청(당시는 궁내성)에게 몰수당해 거리로 내몰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17] 다만 황실의 존치를 결정한 마당에 히로히토 본인과 그 직계에 한정해 생활비를 일정 수준으로 주기로 해서 이때부터 일본 황실은 일본 의회(국회)에서 예산을 타서 쓰게 되었다. 그러나 예산을 타서 쓰게 되도 쓰이는 돈은 일일이 내각 산하의 궁내청에서 모두 일일이 감시하고 철저히 관리한다. 즉 권력을 가질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버린 것이다. 미국 정부가 그를 전범으로 처벌하자고 했으나[18] 맥아더 장군이 "천황을 처벌하면 일본 국민들이 적으로 간주되어 전후 점령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편지 서한을 보내면서 그는 전범 재판에 기소되지 않고 공소권 없음 처리되었다.

파일:uey5weDj.jpg
더글러스 맥아더와 쇼와 천황.
위의 사진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19]이 게재금지 처분을 내려 일본 언론 역시 보도하지 않았으나 미군정이 이틀 만에 게재금지를 강제로 해제하고 반드시 보도하도록 지시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맥아더는 쇼와 덴노 접견 시 군주인 그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으나, 정장 차림으로 꼿꼿하게 경직된 표정을 짓고 서있는 히로히토와 달리 맥아더는 정복도 입지 않은 일상적인 전투복 차림으로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넣은 채 찍은 모습으로 누가 일본의 실세인지 깨닫게 해줘 사진을 보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애초에 맥아더는 미국의 수장인 대통령이 아닌 일개 군부 사령관인데 반해 히로히토는 일본의 최고존엄인 천황이다. 에드워드 베르가 쓴 책 <히로히토 - 신화의 뒷편>에 의거하면 이는 맥아더의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진으로 일본인들은 천황도 결국 인간이라는 것과[20] 지금 일본의 주도권을 가진 것은 미국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렇지만 절대로 미군정이 천황을 괄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위의 인간선언도 맥아더가 천황에게 부탁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국화와 칼>에 따르면 쇼와 덴노는 인간선언에 대해 '현인신이라는 것은 명목상인 것이지 어차피 국민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도 않는다.'라며 쑥쓰러워했다고 한다.[21]


3.4. 전후[편집]



파일:쇼와 1947.jpg

1947년 12월 7일 히로시마[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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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사진
1947년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서 쇼와 덴노는 일반적인 입헌군주제의 군주처럼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지만, 미군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당시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연합군사령부)의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관에 의해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되찾자 그는 여러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더 이상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신 헌법(평화헌법)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인 천황으로 현재까지 좌정하고 있다.

히로시마 행행(行幸)
또한 히로시마 등 각지의 전쟁 피해 지역을 순회하며 국민들과 직접 만나기도 했다. 히로시마의 수많은 시민들이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만세'를 외치는 모습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은 천황의 위세를 느낄 수 있다.

상징적으로 남기도 했지만, 2019년에 재군비와 개헌의 필요성에 의욕을 보였다는 사실이 초대 궁내청 장관 다지마 마치지가 히로히토 천황과의 대화를 기록한 '배알기(拜謁記)'의 내용이 공개되기도 했다.#


3.5. 노년[편집]


파일:showa tenno.png
파일:노년의 쇼와.jpg
노년의 모습
파일:Hirohito-1982.jpg
1982년의 모습

1964 도쿄 올림픽 개회를 선언하는 쇼와 덴노(19분 37초)
여하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쇼와 덴노도 여느 입헌군주국 군주와 같이 천황이라는 공적 업무인 '공무(公務)'는 그냥 새 헌법 하에서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수행했고, 대신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생물학 연구에 관심을 쏟으며 이에 몰두했다. 1971년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전쟁 후 처음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적국이었던 영국네덜란드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여러 정상들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계 대학생들과 퇴역 참전용사들이 천황 히로히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옥좌(玉座)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일은 황후와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이다. 또 미국 여행을 갈 예정이기도 하다. 1964 도쿄 올림픽1970 오사카 만국박람회도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제2차 세계 대전이다.

1975년 인터뷰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과 제일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변

1975년 10월에 히로히토 천황과 그의 아내 나가코 황후는 미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히로히토와 뉴스위크지의 기자 버나드 크리셔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버나드 크리셔는 "일본이 개전을 결단한 정책 결정 과정에도 폐하(陛下)가 가담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낼 때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 개시 때에는 내각의 결정이 있었고, 나는 헌법에 따라 일본 내각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9월 22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일본인들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이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면 아직도 살아 있는 그들을 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면서 옛 신하들을 배려해주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몇 주일 후 천황 부부는 국빈 자격으로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회담을 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깊은 슬픔과 위로의 뜻을 전하고, 미국 관광길에 올라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를 찾았다.[23] 그리고 디즈니랜드에서 선물로 받은 시계가 있는데, 디즈니랜드에서 일본 천황의 공식 방문을 기념하여 만든 특별 한정 기념품이었다. 히로히토는 이 시계를 받고 "디즈니랜드의 풍경이 아름답다."며 마지막으로 크게 미소 지었고, 나중에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그 시계를 무덤 속에 넣었다고 한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규탄집회가 일어난 것과는 달리[24] 미국은 미소냉전으로 동맹관계를 맺은 터라 별다른 일 없이 미국 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


3.6. 사망[편집]



1988년(쇼와 63년) 8월 15일 종전 43주년 당시 모습이며 그가 공식석상에 등장한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이후 해외의 여러 정상들을 차례로 만나며 살던 쇼와 덴노는 1988년(쇼와 63년) 9월 19일[25],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이후 입원해 투병하다 1989년(쇼와 64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십이지장에 생긴 암으로 인한 숙환 때문에[26]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89년 2월 24일 무사시노 능에 매장되었다. 쇼와 덴노의 후계자로 그의 장남이던 황태자 아키히토가 삼종신기(剣璽等承継の儀)를 받고 황위에 오르게 되었고 연호를 쇼와 덴노가 사망한 다음 날, 1989년 1월 8일 0시(자정) 정각에 헤이세이(平成)로 바꾸면서 헤이세이 시대(平成時代)가 막을 연 뒤, 쇼와 시대1989년 1월 7일을 끝으로 막을 내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쇼와 덴노의 병세는 일본 언론에 의해 전 세계에 공개되었는데[27], 1988년 9월 19일 토혈[28]해 수혈을 받았지만 이후 토혈과 하혈[29]이 반복되어 수혈도 반복되었다. 장에서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해 수액으로 영양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9월 24일에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인공호흡기를 부착했고 10월 19일에는 각혈[30]해 수혈받았다. 11월 6일에는 최악의 토혈과 하혈을 일으켜 긴급수혈을 받았고 12월 5일에도 출혈을 했다. 12월 12일에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NHK에서 히로히토 천황 사망 3분 후에 방송한 소식. 미야오 이와오 궁내청 차장이 사망 전인 오전 4시의 천황의 상태를 발표하는 내용과 긴급임시뉴스.

NHK에서 쇼와 천황이 사망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방송한 내용. 후지모리 쇼이치 궁내청 장관이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한 것을 발표한 내용과 관련 임시뉴스. 영상 2분 6초에서 천황이 사망한 것을 알릴 때는 "천황폐하 붕어"(天皇陛下 崩御)라는 글귀를 띄운 이후 차임음[31]을 2번 연달아서 겹치게 울린다. 위 2개의 동영상에서 나오는 궁내청 장관은 후지모리 쇼이치(藤森 正一). 해당 영상 후반에는 훗날 일본 총리를 역임하는 당시 내각관방장관 오부치 게이조(小渕 恵三)의 모습도 보인다.

쇼와 덴노가 붕어(1989년 1월 7일)했을 때 당시 일본인들의 반응으로 대체적으로 지금은 절대다수가 노환으로 인해 사망했을 노년층은 아주 슬퍼하는 분위기였지만, 젊은 층이나 중장년층들은 비교적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쇼와 덴노의 장례식(大喪の礼(대상의 례)/「御葬列(어장렬)」) 장면[32]

사망 당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KBS 9시 뉴스 보도) 히로히토 천황 사망 당일과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가기 전날에 나온 한국의 보도로 당시 관방장관인 오부치 게이조헤이세이(平成) 연호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장면도 나온다.[33]

사실 1988년 여름부터 히로히토 천황이 십이지장 종양으로 토혈하고 하혈하면서 점점 위독해지자 일본의 모든 행사와 콘서트, 일본 총리의 해외일정이 취소되고 전 일본이 숙연 및 자숙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는 3년 연속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축하연 없이 위로회(慰勞會)로 조용하게 넘어갔다. 1978년부터 매해 개최된 기린컵도 1990년까지 2년간 개최를 중단하기까지 했다. 또한 광고계에서는 '건강하세요', '멋진 인생', '드디어 그날이 온다' 등의 멘트가 사라졌다. 역시 천황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언론에서는 이 분위기를 선도하여 모든 기사를 일본 황실의 동향파악에 집중하고 천황이 매일 어느 정도의 맥박을 유지하는지까지 일일이 기사화했다.

외신측 일부 언론들은 국내 언론들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난이 있기도 했다. 1988년 9월 21일영국 황색언론 <더 선>에서는 Hells waiting for this truely evil emperor(지옥이 이 정말로 사악한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도했고, 10월 7일에 김재훈 한겨레사회연구소 이사가 신생 진보일간지 <한겨레신문> '더불어 생각하며' 칼럼에서도 "쇼와 본인이 죽기 전에 과거사에 진심으로 직접 사죄하라"고 촉구하였다.

일본 전역은 '자숙'(自粛)으로써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으며, 연일 천여 명의 사람들이 천황이 머무는 고쿄(황거)에 몰려들었다. 쇼와 천황은 일본 현대사를 관통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죽음 자체에는 비교적 덤덤할지언정 관심은 누구에게서나 쏠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해를 넘겨서 오래 끌자, 천황의 사망 당일의 일본에서는 그의 치세를 추억하는 노인들이 고쿄 앞에서 대성통곡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차분했다. 오히려 정규방송이 안 나온다고 방송국마다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항의 전화가 빗발칠 정도였다고 한다. 정규방송이 빠지고 추모방송이 주구장창 나오다보니 생긴 일인데,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으니 이런 반응이 나온 것. 그래서인지 비디오 대여점의 매출이 상승했다고 한다.[34][35] 아키히토 생전 퇴임 당시 이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쇼와 덴노 사망 당시엔 엄숙주의가 너무 심해서 진이 빠졌다. 아키히토는 생전에 퇴임해서 즐길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다' 라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다.

이 시기 웃픈 일화가 하나 있다. 언제 쇼와 덴노의 사망 시각이 언제인가 가장 빨리 알아내기 위해 고쿄 근처에서 거의 노숙을 하던 한 기자가 있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야말로 노숙자 몰골이 되었다. 그런 꼴을 한 기자 옆을 지나던 한 어린이가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저 아저씨는 뭐야?"(あのおじさんは何?)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勉強しなければああなるんだ。)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쇼와 덴노 사후 담화에서 "일본 국민들을 전화(戰禍)에서 구해내기 위해 '종전'(終戦)이란 이름으로 결단있게 성단(聖断)을 내리셨다"는 식으로 천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죽은 시기가 1989년 초, 즉 해를 넘기고 겨우 1주일 지난 시점이라, 쇼와 연호(昭和64年)를 박은 달력들이 대거 폐기처분되고 헤이세이 연호(平成元年)가 찍힌 달력들을 새로 발행하느라 고생이 있었다.[36]

한편 쇼와 덴노의 둘째 손자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礼宮文仁親王)은, 할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가쿠슈인 대학 1년 후배인 카와시마 키코와의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후미히토 친왕은 24세, 키코는 23세였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약혼 발표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가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상중이었기 때문이다. 상중의 약혼 발표와 곧 이어진 결혼(1990.06.29.)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으나, 황실에 시집와서 잘 적응해 열심히 사는 키코 비의 모습 덕분에 비판 여론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의 손녀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紀宮清子内親王)는 1969년 4월생으로, 1989년 4월에 만 20세 성년을 맞이했다. 당연히 원래대로라면 그녀를 위한 각종 축하행사가 치러져야 했으나,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이듬해로 미루어졌다.

파일:1989년 01월 09일 경향 김대중 히로히토 조문 기사 사진.png

사망 당시 미국소련에서도 조문단을 파견했고 대한민국노태우 정부강영훈 국무총리 등 조문단을 파견했는데, 파견 과정에서 전민련준비위 등 재야 민주단체와 호국보훈단체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당시 야당들도 국내에 설치된 조문실에서 조문을 했는데 이 당시 김대중대통령평화민주당 총재시절 야당 총재로서 주한일본대사관에서 조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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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위는 아들인 아키히토로, 2021년 9월 12일부로 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장수 기록을 경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12월 23일에 아키히토가 88번째 생일을 맞이함에 따라 더욱 확실해졌다. 아키히토는 90세에 가까운 고령으로 인해 건강상으로는 여러 지병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위독해져서 갑자기 별세하지 않는 이상 여전히 장수할 가능성이 높다.[2] 차남 야스히토, 3남 노부히토, 4남 다카히토.[3] 이는 일본 황실화족(귀족) 사회의 오랜 전통/관습이었다. 그러나 쇼와 덴노의 맏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가 2남 1녀 모두를 떨어뜨리지 않고 모두 자신의 품에서 직접 키우는 것을 시작으로 이 전통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나루쨩 헌법 ナルちゃん憲法으로, 일명 ‘황실 육아법’이라 불리며 당시 일본 부모들에게 엄청난 열풍을 일으켰다.[4] 조선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한자음이 똑같다.[5] 계획을 제안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데이메이 황후와 사이가 나빴던 점도 있다.[6] 왼쪽에서 두번째[7] 나이는 에드워드가 히로히토보다 7살 더 많았지만, 둘 다 자신의 나라의 차기 군주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이후 약 50년 뒤인 1971년에 또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8]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조지 5세의 아들 세대가 양국의 군주가 된 시기에는 영국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추축국이 되어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영국 국왕은 조지 5세의 아들인 조지 6세였다.[9] 쉽게 말하자면 대리청정이다.[10] 쇼와 덴노를 끝으로 교토 어소에서는 더 이상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는다. 교토 어소에 있는 물건(타카미쿠라, 高御倉)을 도쿄고쿄로 가져와 즉위식을 거행한다.[11] 이는 1936년에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인 2.26 사건 당시, 쇼와 천황이 군대의 대원수로서 자신이 직접 근위사단을 지휘하여 반란군들을 진압하고자 했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12] 참고로 이봉창 의사는 의거 이전에도 히로히토와 연관이 있었다. 조선인 대신 일본인처럼 살고 싶었던 이봉창 의사가 전향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히로히토 즉위식을 보러 교토에 갔다가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일주일 동안 구금된 것이었다.[13] 이봉창 의사는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일본 헌병 장교의 명함을 도용했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은 것.[14] 당시에는 총독부의 검열 때문에 신문 기사가 검열을 못 통과하면 내보낼 수가 없었다. 이런 검열 제도는 해방 후에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시절에도 보도지침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서 언론들은 정부의 입맛에 맞게 보도를 해야 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신문 독자들은 신문을 액면 그대로 읽지 않고 속뜻을 추론하면서 행간을 파악하는 식으로 읽었다.[15]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의 황제를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맞지 않았다(韓人李奉昌 狙擊日皇 不幸不中/한인이봉창 저격일황 불행부중)." 이 기사를 본 일본 측은 격노했고, 결과적으로 이 보도는 1차 상하이 사변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이어진다.[16] 위의 영상에 나온 맥아더의 통역관이었던 포비온 바워스도 쇼와 덴노가 자신을 사형시켜도 괜찮으니 자신의 이름으로 싸워온 사람들을 구명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증언하며, 아키히토 황태자의 가정교사가 되는 엘리자베스 바이닝 여사도 자신의 일기에서 쇼와 덴노가 자신을 사형시켜도 상관없다고 발언했다고 저술했다.[17] 참고로 같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른 이탈리아 왕국의 사보이아 왕가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움베르토 2세 부자는 왕정유지와 공화정 전환이 거의 반반인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아예 쫓겨나 영구 입국 금지까지 당했다.[18] 일각에서는 천황제 폐지 가능성을 언급하나 실제로는 천황제 자체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의 합의로 이미 유지하기로 내부 합의를 했기 때문에 전범처리가 의미하는 바는 히로히토를 폐위시켜 전범으로 처벌하고 대신 다른 황족을 천황으로 앉히는 것이었다.[19] 전후 첫 총리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노미야'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황족 가문이었다. 그래서 명색이 황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라 연합군 최고사령부에게 자주 대항했다. 결국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겨우 54일 만에 총리직을 시데하라 기주로 전 외무대신에게 넘겨버렸다. 시데하라는 외교관으로 시작해 외교관의 수장인 외무대신을 거쳐 궁내성의 영어교사로까지 일할 정도로 영어에 아주 능통해서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말이 잘 통했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에게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히가시쿠니는 일본 역사상 최단 재임 총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수명으로는 오히려 최장수(102세) 총리였다.[20] 다만 천황 숭배 자체가 없어지진 않아서, 이후에는 인간 천황을 숭배하게 되었다.[21] 다만 쇼와 덴노의 이 말과는 별개로 인간선언의 엄밀한 의미는 "지금까지의 모든 천황들은 사실 신이 아니었다."가 아니라 "앞으로 짐과 그 이후의 천황들은 신이기를 포기하겠다."에 가까웠다. 즉 전체부정이 아니라 부분부정.[22] 사진 오른쪽 끝에 원폭돔이 보인다.[23] 그런데 이때 디즈니가 히로히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히로히토는 왜인지 손을 피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디즈니가 당황했다고 한다. 종전 이전에 천황과 대화할 때는 직접 말도 못하고 중간에서 시종이 전해주면서 대화를 하는 식이라 악수도 당연히 할 수 없는데, 아마도 그 시절의 예절이 몸에 배어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다.[24] 영국에서는 특히 히로히토에 대한 증오가 엄청나서, 히로히토가 정원에 기념식수를 하자마자 한 사람이 다음 날 바로 나무를 베어버리고 뿌리까지 죽이기 위해 땅에도 제초제염소산나트륨을 부어버린 뒤 "그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They did not die in vain)"이라고 쓰인 팻말을 걸어 놓았다. 숙소인 호텔 입구에서는 어떤 남자가 나타나 자신의 아버지가 일본의 포로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며 소리질렀고 히로히토가 이를 무시하며 지나가는 소동이 빚어졌다. 전쟁으로 생긴 영국인들의 혐일감정은 엄청나서, 후일 참전용사인 루이 마운트배튼 공은 자신의 장례식에도 일본인들은 초대하지 않도록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고 이에 대한 일본 대사관 및 버킹엄 궁의 입장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25] 1988 서울 올림픽이 개막하고 불과 이틀 뒤였는데, 이 때문에 바로 옆 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이었지만 일본에서는 흥행을 하지 못했다.[26] 궁내청은 쇼와 덴노의 병명을 생전에는 공개하지 않았고 사후에야 공개하였다. 투병 중에 아사히신문이 히로히토의 병명을 췌장암이라 보도했다가 항의를 받기도 했다.[27] 천황의 체온, 맥박, 혈압, 분당 호흡 수가 일정 주기마다 방송사 텔롭으로 공개되었다.[28] 吐血, 피를 토함[29] 下血, 항문에서 피를 흘림[30] 刻血, 기침하면서 피를 토함[31] 국가적인 재난이나 비상 사태, 그 밖의 위기 상황이나 총리대신의 중대한 기자회견 등이 생겼을 경우, 지역 방송을 끊고 도쿄 본사의 방송을 전국에 긴급 송출할 때 쓰이는 차임음이다. NHK에서 비상 사태 또는 위기 상황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 오부치 게이조 관방장관이 신연호 헤이세이를 발표하기 직전에도 이 차임음이 다시 울린다.[32] 해당 영상의 14:08 부분을 보면 천황의 이 보이는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관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걸 알 수 있다.(다른 영상 썸네일에서의 모습) 당시 썼던 관은 3중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체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에서 왕의 장례를 할때 썼던 관은 재궁이라고 부르며 일반인들의 관들보다 크게 짰다.[33] 일본 보도영상 및 KBS 보도 영상은 베타맥스 기반이나, MBC는 VHS 화질이다.[34] 1월 9일에 정상적인 방송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TV광고는 15일까지 자숙(自肅)을 실시했었다. 쇼와 덴노 사망 당시 정상적인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던 방송국은 NHK 교육TV, NHK 라디오 제2방송뿐이었다.[35] 대한민국에서도 10.26 사건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당시에 KBS 3TV교육라디오, AFKN을 제외하고 정규방송과 광고를 모두 중단했으며 라디오도 하루 종일 클래식과 장송곡이 나왔었다. 당시에는 비디오 테이프가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대체 수단이 없었다.[36] 이 때문에 아들인 아키히토는 이런 혼란이 없게 하기 위해 사전에 각료들과 말을 맞춰 놓고 정해진 시점에서 생전퇴위를 하였으며 나루히토 역시 80~90대가 되면 동생 후미히토에게든, 조카 히사히토에게든, 아니면 황실전범을 수정해서 친딸 아이코에게든 생전퇴위할 가능성이 높다. 현임 레이와(나루히토) 때까지는 연호를 유지하고 그 이후에는 이런 혼란이 없게 하기 위해서 연호를 폐지하거나 연호를 만들되 공문서 같은 곳에서만 사용하게끔 하거나 조치를 취하게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