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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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상[C]
장경우[C]
류수환[C]
김지호[C]
이성재[1]
강창희[C]
이성배[C]
[A] A B 임기 중 사망.[B] A B C D E 임기 중 사퇴.[C] A B C D E F G H 승계.[1] 승계 전 사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송지영
宋志英[* 宋志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 SONG JI YOUNG


파일:external/tv.pstatic.net/201410301744404631.jpg

창씨명
야마모토 시에이(山本志泳)

우인(雨人)
본관
여산 송씨[1]
출생
1916년 12월 13일
평안북도 박천군 남면 동하동[2]
(현 평안북도 박천군 맹하리)[3]
사망
1989년 4월 24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3가 서울을지병원
학력
난징 국립중앙대학 (중문학 / 중퇴[4])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92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운동
2.3. 광복 후
3.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전 언론인, 소설가,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1916년 12월 13일 평안북도 박천군 남면 동하동(현 박천군 맹하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12살 되던 1928년 평소 정감록에 심취해있던 조부의 주도하에 가족들과 함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432번지로 이주했고,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 1943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할 당시에는 중국 상하이시 자오펑로(兆豊路) 288호에 살고 있었다.

10대에 영주군 풍기면 삼가리 달밭골에서 사촌 동생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 1918 ~ 2004)과 함께 한문·국문학·역사 등을 배웠고, 이후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가산리 상선암에서 수학하면서 독학으로 사서오경주역을 깨우쳤다.

그 뒤 1935년 7월 24일 동아일보사 맹중리(孟中里)분국 기자임명되면서 언론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이어 1936년 5월 9일에는 동아일보사 풍기지국 기자로 임명되었다. 1937년 6월 1일 동아일보사 풍기지국 총무에 임명되었고, 1939년 11월 1일에는 동아일보사 신경지국 총무에 임명되어 만주특파원 등을 지내기도 했다.

2.2. 독립운동[편집]


1940년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상하이로 건너가 잠시 상하이시보(上海時報) 기자로 재직하다가, 같은 해 난징시로 가서 난징 국립중앙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대학에서 만난 조일문·신영묵·이정선·이일범(李一凡)·박철원(朴哲遠)·박익득(朴益得) 등과 함께 중화민국 국민정부 특파원인 능지남(凌志男) 상교와 접선했고, 이에 비밀결사 한족동맹(韓族同盟)을 조직했다. 그 뒤 쑤징허(蘇景和)·왕해청(王海靑)·능담여(凌澹如)·임세원(林世源) 등 중국인 학우들의 협조로 일본군의 동향을 탐사하고 독립운동 참여를 희망하는 청년들을 규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 각 지대(支隊) 등에 후송했다.

1943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김병호(金炳豪)를 통해 공작원이 되라는 권유를 받고 대학을 중퇴한 뒤 임시정부 특파원이 되었다. 이후 1년여 간 임시정부와 연계해 조선인 유학생들을 포섭하고 반일 선전을 하는 등 지하 공작활동을 하고 그 공작 현황을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1944년 남경시에서 김병호가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남경시를 비롯한 화중 지방 일대에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닥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조일문·이정선·이일범·김덕원(金德元) 등 동지들과 함께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고, 1944년 8월 15일 재외상해일본제국영사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돼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이던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으나 가까스로 화를 면했고, 일주일 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비로소 석방되었다.

2.3. 광복 후[편집]


8.15 광복 후인 1946년 민세(民世) 안재홍의 한성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 때 문예지 백민에 젊은날의 노래를 발표하여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제신문 기자를 거쳐 1958년 조선일보에 논설위원으로 입사했으며, 1년여 뒤에 편집국장으로 승진했다. 한편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1961년 민족일보(民族日報)에 논설위원으로 몸담다가 5.16 군사정변 후 열린 혁명재판에서 사장 조용수, 감사 안신규(安新奎)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8년이 넘게 복역하면서 우수의 일월이라는 소설을 집필하였다. 결국 감형으로 1969년에 풀려났다. 1969년 10월 조선일보에 재입사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70년부터 3년간 무협소설 「천풍」을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1979년부터 5년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지내며 1980년 신군부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을 때 입법의원으로 참가해 언론기본법을 제정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제6번)으로 당선되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1984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언론인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전두환 집권기 들어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는 등 적극적으로 신군부에 영합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욕을 왕창 퍼먹기도 했다.

1989년 4월 24일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3가 서울을지병원[5]에서 지병당뇨고혈압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그의 유해는 1989년 4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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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 (6번)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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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년 1월 5일 여산 송씨 대종중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2] 여산 송씨 집성촌이다.[3] #. #2[4] 3학년 때 중퇴했다.[5] 1996년 12월 경영악화로 폐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