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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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송재필
2. 인천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송재필



1. 안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송재필[편집]


성명
송재필(宋在弼)
이명
송정삼(宋正三)
생몰
1888년 2월 17일 ~ 1965년 11월 8일
출생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사망지
경기도 안성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송재필은 1888년 2월 17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한 양성면, 원곡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이날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경찰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워 버렸다. 다시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 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 토자 토요테(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타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파괴했다. 그 다음엔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의 기물을 파괴하고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이튿날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되돌아 온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안성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5년 1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송재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인천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송재필[편집]


성명
송재필(宋在弼)
생몰
1921년 10월 31일 ~ 1968년 9월 20일
출생지
경기도 인천부 화정
사망지
경기도 인천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송재필은 1921년 10월 31일 경기도 인천부 화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인천상업학교(仁川商業學校) 졸업생을 중심으로 오륜조(五輪組)를 조직하여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 반대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3년 7월경 일본 메이지대학에 재학하던 중 일제의 강제 학병모집에 항거하여 결의문을 작성하고 인천상업학교 졸업생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충북 영동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고문을 받고 1944년 6월 대전형무소로 송치되었다. 이후 재판을 기다리다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고, 인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8년 9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송재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