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골매(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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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골매
Peregrine Fal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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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
송골매
결성
1979년
해체
1991년
장르
하드 록, 팝 록, 팝 메탈, 재즈 록, 사이키델릭 록, 로큰롤, 하우스 음악, 유로댄스 디스코
멤버
[ 펼치기 · 접기 ]
▼1기(데뷔)
배철수, 구창모, 이봉환, 이응수, 지덕엽

▼2기(과도기)
배철수, 구창모, 김정선, 이봉환

▼2기(전성기)
배철수, 구창모, 김정선, 이봉환, 오승동, 김상복

▼2.5기
배철수, 김정선, 이봉환, 오승동, 김상복

▼3기(신 송골매)
배철수, 이태윤, 김정선, 이봉환, 이건태, 이종욱

▼3.5기(2010 송골매)
이봉환, 김정선, 최승찬, 정준교, 고중원

▼4기(재결성)
배철수, 구창모, 이태윤, 장혁, 이성열(기타), 함춘호, 전달현(기타), 박만희(키보드), 안기호(키보드), 최태완(피아노)




1. 개요
2. 역사
2.1. 1979~1991
2.2. 2022 재결성
3. 역대 라인업
4. 디스코그래피
4.1. 음악적 장르 시도
5. 기타
5.1. 송골매 디럭스 (2010)



1. 개요[편집]


1979년에 결성한 대한민국의 록 밴드.


2. 역사[편집]



2.1. 1979~1991[편집]


<배철수>
송골매라는 밴드는 "연주력을 향상 시키기 위한 노력의 역사다" 전 그렇게 생각한다.


당대 최고의 대학교 캠퍼스 밴드였던 활주로[1] 출신의 배철수를 중심으로 1979년 결성되었고 1978년 제 2회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배철수(활주로 6기), 지덕엽(활주로 9기)와 베이시스트 이응수(활주로 8기)와 키보드의 이봉환을 영입하여 시작되었다.[2] 송골매라는 이름은 한국항공대학교의 교조에서 따왔다.

대표곡으로, '모두 다 사랑하리', '세상만사','하늘나라 우리 님', '모여라' 등이 유명하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한국의 청년문화는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가요 대탄압으로 인해 전부 싹이 잘려 나갔다.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팝송을 들으며 음악적인 갈증을 해갈했고,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그룹사운드가 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산울림, 송골매 같은 밴드들은 한국식 록음악을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이들은 당대 최고의 스타 가수 대접을 받았다. 즉, 한국 록 음악의 암흑기 때를 대표하는 인기 밴드였다.

1979년에 발매한 송골매 1집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고, 1981년에 지덕엽의 군 입대와 이응수의 학업 문제로 탈퇴하여,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에 배철수는 평소에 알고지내던 블랙테트라[3] 2기 보컬 구창모와 기타리스트 김정선[4]에게 전화를 하고 그 두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색약수터라는 암자로 이봉환과 같이 찾아 가서 팀을 같이 하자고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합의가 되어 배철수(보컬, 드럼), 이봉환(키보드), 구창모(보컬, 베이스), 김정선(기타) 이렇게 4인의 멤버로 클럽 등을 돌며 라이브 공연 위주로 활동하면서 2집 녹음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배철수의 생각에는 뭔가 모자란 부분이 있어 당시 군복무를 하던 오승동[5]을 섭외했고,[6] 오승동의 친구였던 김상복(베이스)까지 영입하였다.

우리도 우리의 그런 인기를 감당할수 없을 정도 였다.
당황스러우면서 적지않은 부담을 느꼈다. (인터뷰 중)


그 결과 기타와 보컬의 배철수, 리드보컬 구창모, 기타의 김정선, 베이스의 김상복, 드럼의 오승동, 키보드의 이봉환이라는 라인업으로 1981년에 발표한 송골매 2집은 송골매의 침체기를 한번에 뒤집어 버린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7], 이 곡은 전체적으로 1970년대 미국에서 인기 있었던 디스코에 Funk rock 적인 부분을 결합한 음악이다. 처음의 기타 리프는 1971년 빌보드 1위를 차지했던 Isaac Hayes의 "Theme from Shaft"[8]를 연상시킨다. 이때 한국에서 흑인 음악을 하는 이들이 극히 적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Funk를 기반으로 한 디스코-락 넘버를 히트한다는 것은 대단하다. 1982년 당시 한국에서 흑인 음악을 소개하고 히트시키던 아티스트는 송골매와 조용필밖에 없다. 사랑과 평화는 1979년의 잠깐 히트로 끝났고, 조용필은 4집에서 자존심, 못찾겠다 꾀꼬리 등의 흑인 음악 스타일의 곡들을 히트시킨 바 있다.

1983년에 발표한 송골매 3집은 전작에서의 인기를 또 한번 실감하듯 '처음 본 순간''아가에게', '빗물', '한줄기 빛' 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담으로, 1983년 젊음의 행진에서 무대를 펼칠 때 배철수 인생의 마지막 무대가 될 뻔했던 위험한 방송사고가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이 항목 참고. , 그러나 그런 위험을 격고 동경가요제의 참가 하고싶었던 배철수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일만의 퇴원하여 일본으로가 맴버들과 만나서 동경가요제의 참가하였다. 세간의는 그의 행적을 보며 "진정한 뮤지션은 열정 하나 만으로 아픔을 뒤로하고 가요제의 참석하였다. 우리도 배철수라는 뮤지션의 대한 열정을 인정하고 본받아야된다." 라고 배철수의 대한 이슈 와 찬사가 이어졌다.

1980년대 초반 송골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송골매를 주연으로 한 영화가 줄줄이 개봉되었을 정도였다. 1982년작 "갈채",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1983)

" 구창모의 보컬이 참으로 아깝다고 생각하였다. 그를 붙잡고 설득을 하였지만, 밴드의 현실과 구창모씨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아까웠기 때문에 그를 말릴수는 없었다. 사이가 그후 조금 소원해졌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화해하여, 각자의 히트곡을 들고 나와 서로를 응원하고 아직까지도 우린 송골매의 일원으로 생각한다라고 생각하여 가요계 생활때도 친하게 지내왔으며, 세월이 지나 지금은 둘도없는 단짝 친구다. (배철수 인터뷰중) "


그러나 1984년 당시 기획자로부터 솔로 가수 제의를 받은 구창모가 탈퇴하면서 4집활동에 적신호가 켜진다. 이후 송골매의 리드보컬은 배철수가 맡게 된다. 4집에서 히트곡이었던 "난 정말 모르겠네"는 당시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뉴웨이브 사운드의 곡이다. 듀란 듀란이나 컬처 클럽 등의 뉴웨이브/신스팝 사운드가 아니라, Go Go's나 Men At Work와 같은 뉴웨이브/Pop rock 계열의 스타일이다. 1982~1983년에 영미권에서 인기가 많았던 시운드이다. 그 당시만 해도 신스팝 계열과 Pop rock 계열의 뉴웨이브가 공존하던 과도기적 시대였다. 실제로 기타 리프와 곡 분위기가 초기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호주 뉴웨이브 밴드 "Men At Work"와 흡사하며, Go Go's의 밝은 뉴웨이브 분위기도 든다.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락 밴드 "Huey Lewis & The News"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1984년 당시 기준으로 꽤 트렌디한 뉴웨이브 곡이다.

" 그룹을 하는 한사람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까워요, 우리나라에서 밴드 음악은 비주류 음악이라 활성화가 잘안되고 락음악이 밴드로써 활성화 되는 방법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 무언가 그룹사운드가 다른나라의 비해 굉장히 저평가 되는 부분이 많은데 무엇보다 지금계신 여러분들이 도와 주셔야 되죠, 다음 앨범을 내어 음악을하면 좀더 강하고 무거운 음악을 하고싶다. '1986년 100분쇼 가요대상 수상자 배철수 인터뷰중 "

1985년에 발표한 송골매 5집은 라원주, 이응수의 지원을 받아 한국적 가락의 시조 창법의 "하늘나라우리님 2" 를 받았지만, 무언가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음악은 아닌거같다는 배철수 의 생각의 의해 "배철수가 편곡하여" 비교적 메탈도 아닌 그렇다고 말랑말랑한 가요적 락이 아닌 비교적 강력한 하드 락 사운드의 하늘나라 우리님 1 을 발표하여 '하늘나라 우리님'이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그당시 떠오르던 락의 시초라고 불리던 "들국화 밴드"를 대적하여 서로의 위치에서 양분하여 락장르의 인기를 책임지고 지탱하였다. 그러나 이기시가 송골매의 사실상 마지막 전성기에 깃발을 꽂았다.

1986년에 발표한 송골매 6집은 특별한 히트곡이 없었는데 1986년은 백두산, 시나위, 부활이 데뷔를 한 해이고 헤비메탈의 르네상스였던 시기이기에 큰 빛을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기존의 댄스음악이 서서히 인기장르로 떠오르게되고, 같은 출신의 밴드인 "다섯손가락" 서럼 서정적이면서 조금더 풋풋한 약간 감성적인 8비트 그룹, 밴드지만 춤을주면서 노래도 하고 악기도 비교적 이질적이지만 단순한 연주 와 외모도 말끔한 이미지의 그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송골매에게 도전하는 신그룹들이 송골매의 입지와 트렌드를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이러한 부진과 음악적 갈등으로, 2집 때 영입했던 김상복(베이스)과 오승동(드럼)이 팀을 떠나게 되었고, 그러자 배철수는 노래라면 몰라도 연주에서 만큼은 최고의 밴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종욱(키보드), 이태윤(베이스)[9], 이건태(드럼)[10]를 영입하게 된다.

" 음악이라는게 연주력만 좋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다. 클럽에서는 우리팀의 연주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한다고 칭찬했지만, 중요한건 "음악의 대한 정신, 곡의 대한 애정" 이 필요하다고 음악을 접을 때쯤에 깨닫게 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 아 난 음악의 대한 재능이 조금 부족하구나" 그래서 굉장히 많이 내 자신의 대해 회의적이고 지쳐있던 시기였다. (배철수 인터뷰중) "

멤버 재편 후 발표한 7집에서는 다소 강했던 사운드를 뒤로하고 보컬의 "락" 적인 음역과 "세련"해진 연주력을 과시하기 위해 키보드, 신디사이저 리프를 적극 활용한 "웅장한 사운드를" 추구하여 '새가 되어 날으리'[11]가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

1988년 5월에 8집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러나 이미 송골매가 더 이상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태윤이 부른 '외로운 들꽃'이 조금 히트되어 송골매의 체면을 살려 줄수 있었지만, 송골매 스타일의 음악 추구와 보컬면의 잔잔함은 이태윤 이 아닌 원년 맴버들의 빈자리를 추구하였고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발라드곡은 불후의 명곡이 되어버린다.

" 자니윤쇼를 보고 음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그때 엄청 감동을 많이 받았어. '베이직 베이스 TV 채널에 이건태 출연편에서 언급'

1989년부터 1990년까지 1년 동안 KBS에서 방영했던 '자니 윤 쇼'에서 하우스 밴드를 맡았다. 이는 88 올림픽 메인광장에서 개최된 외국 선수들을 위한 이벤트에 송골매가 출연하여 연주를 할 때 쟈니윤과의 첫 만남에서 나중에 쟈니 윤이 토크쇼를 하게되면 음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자니윤쇼의 1년간 고정출연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송골매가 나름대로 아직까지 그들의 인기가 건재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기도 한다.(배철수 효과가 나름 멱혔기때문....) 그후 1년후 자니윤쇼가 폐지되며 자연스럽게 9집앨범 발표와 배철수가 라디오 DJ의길로 어쩌면 계기가 되는 발판이 되기도한다. '자니윤쇼 첫회 라이브', '자니윤쇼 마지막회 라이브'

물론 이시기때쯤에 구창모와 다시 뭉쳐 새로 앨범 제작을 논의 중이라고 소리가 들렸다. 방송에서도 몇번 같이하고, 클럽에서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같이 무대의 설때도 있었으니. 무엇보다 다시한번 대중들이 그둘이서 같이 무대의 서는걸 보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물어가는 송골매와 구창모의 바쁜일정과 훗날 그가 가요계를 떠나게된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인해 그둘은 기약없는 약속만 남긴채 각자의 활동을 마무리 하는 단계로 간걸로 예상되어 다소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었다.


1990년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 9집에서는 '모여라'라는 히트곡을 냈다. Huey Lewis & The News 풍의 블루스 록과 뉴웨이브를 기반으로 한 팝 록 사운드이다. 중간의 기타 솔로는 1980년대 중후반의 글램 메탈을 연상시킨다.

쉿! 모였으면 뒤돌아가! (송골매 9집의 모여라 끝부분에서)

이후 송골매의 프론트맨이었던 배철수가 본격적으로 라디오 DJ를 맡게되고, 뮤지션으로서의 행보를 접으면서 밴드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배철수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생활과 창작이 양립이 되지 않는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었다고 한다. 방송 무대를 나가야 홍보가 되고 몸값이 올라가고, 또 그 홍보와 몸값을 바탕으로 밤무대를 뛰어야 밴드 생활이 유지되고... 그런데 그렇게 365일 밤무대를 뛰다 보면 연구를 할 시간도 적고 새로운 영감과 창작력 역시 솟지 않는다고 한다.[12]

무엇보다 90년대 이후부터는 가요계의 트렌드가 밴드가 아닌 댄스음악의 흐름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DJ이나 댄스음악 그룹은 '메이저'가 됐지만 밴드는 '마이너'스러운 흐름으로 바꿔었기 때문에 라이브보단 전자음악을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게 되었다고... 밴드들이 먹고 살기위해선 가요나 락음악보단 댄스음악이나 유로댄스음악을 연주해야만 했다. 솔로로 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시대의 흐름은 너무나도 가혹하게 바뀌어 가기 때문에 어쩔수없는 선택이 었다는것이다. 쉽게말해 박수칠때 잘 떠난 케이스.


2.2. 2022 재결성[편집]















2022년 하반기(9월 11일~12일) 양일 간 서울 콘서트를 시작으로 '열망'이라는 타이틀의 전국 투어를 예고하였다. 38년 만에 구창모가 재합류했으며, 베이시스트 이태윤이 음악감독을 맡는다. 송골매의 오랜 팬들은 물론이요, 한국 대중 음악에 관심이 지대한 이들에게까지 큰 화제를 모았다.

70세를 목전에 둔 노령화는 어쩔 수 없지만, 연륜으로 기량을 커버하며 2시간 30분을 꽉 채우는 배철수, 구창모, 이태윤의 스킬에, 양일 총합 2만 관객이 뜨겁게 열광했다. 서울콘의 흥행 덕에 11월까지 진행되는 전국 투어도 예매 문의가 증가했다.


2.3. 2023 40년만의 비행[편집]


2023년 1월 21일 KBS2 TV에서 2023 설 대기획 송골매 콘서트 40년만의 비행을 방송한다.
2023년 4월 21일 ~ 23일(토~일요일)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송골매 열망 앵콜공연을 한다.


3. 역대 라인업[편집]


  • 1집 - 배철수(드럼/보컬), 이봉환(키보드), 이응수(베이스), 지덕엽(기타)
  • 1집 - 2집 과도기 - 배철수(드럼/보컬), 이봉환(키보드), 구창모(보컬/베이스), 김정선(기타) #
  • 2집 ~ 4집 - 구창모(리드보컬),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김상복(베이스), 오승동(드럼)
  • 5집 ~ 6집 -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김상복(베이스), 오승동(드럼)
  • 7집 ~ 9집 신 송골매 -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이종욱(키보드), 이태윤(베이스/보컬), 이건태(드럼)
  • NEW 송골매 2010 - 이봉환(키보드/보컬), 김정선(기타), 최승찬(키보드, 보컬), 정준교(베이스), 고중원(드럼)
  • 재결성 송골매 열망 2022 - 배철수(기타/보컬),구창모(보컬), 이태윤(베이스/보컬), 이성열(기타)/함춘호(기타, 방송라이브 한정), 전달현(기타), 박만희(키보드), 안기호(키보드), 최태완(피아노)


4. 디스코그래피[편집]







4.1. 음악적 장르 시도[편집]


비교적 생각보다 많은 음악적 도전을 하였기에 줄여서 요약했다.
  • 1. 하드 록 : 송골매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장르로써 주로 배철수가 음악적으로 많은 도전을 하였다. 록과 메탈의 중간 경계에서 배철수가 자기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비교적 트윈기타 (리듬, 리드 기타)를 주로 연계하며 연주함.
  • 2. 팝 록 : 역시 송골매하면 떠오르는 장르로써 구창모가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이었다. 좁게는 펑크한 음악부터 넓게는 휭키한 흑인풍 리듬을 구사하는 아주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했다. 음역대를 주로 높게 잡고, 주로 이 장르에선 베이스를 메인 을 두고 뒤에 악기들이 배경이 되는 연주법을 추구함. 추후 3기 맴버인 베이스 이태윤이 조금더 음악적인 면에서 추구하기도 하였다.
  • 3. 팝 메탈 : 송골매의 3기 라인업부터 시도했다. 비교적 기타나 베이스 보단, 키보드, 신디사이저 리프를 적극 활용하면서 전주나 도입부분이 끝나면 달리는 곡으로 기타연주와 베이스, 드럼 의 빠른비트가 진행한다. 비교적 쭉가다 훅 올라가는게 특징, 가끔 배철수, 이태윤이 시도하였으며, 키보드 이봉환이 주로 이런곡을 시도하였다.
  • 4. 재즈 록 : 베이스 이태윤이 주로 시도하였다. 다소 엉성해 보일 수 있는 슬랩 주법을 적절한 난이도와 컨트롤로 조금 더 대중적으로 연주하며 노래를 시도하였다. 특히 드럼과 베이스의 합을 조화롭게 리듬을 주로 하며, 송골매 후기 라인업이 프로다운 연주력을 가지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이 부분에서 배철수도 나름 추구하기도 했다.
  • 5. 사이키델릭 록 : 활주로 때부터 송골매에 이르기까지 추구하던 한국적인 록 음악을 추구하는데 많은 시도를 하였다. 특히 특유의 리프와 토속미가 가득한 배철수를 보컬로 추구하며 각 앨범에 1곡씩은 꼭 시도하고, 그걸 다른 장르와 결합하여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들리는 소리와는 다르게 의외로 따라하기에는 난이도가 조금 있다.
  • 6. 로큰롤 : 전반적으로 6집까지 모든 사운드와 기본적인 연주 흐름은 이 장르를 주로 하였다. 그리고 각 앨범마다 꼭 하나씩 있는 송골매의 특유의 로큰롤을 수록하였다. 초기엔 구창모도 자주 활용하였지만, 후에 갈수록 배철수가 활용 하게 된다. 그리고 의외로 배철수가 좀 더 이쪽이 더 잘맞는 느낌도 있다.
  • 7. 하우스 음악 : 자니 윤 쇼에서 거의 대부분 연주하였다. 이를 통해 송골매 3기 일명 '신송골매'가 우리나라에서 연주를 가장 잘하는 밴드로 인식되기도 한다.
  • 8. 유로댄스 디스코 : 주로 클럽이나 야간 업소에서 연주했으며, 가끔 방송에서 연주하였다. 아무래도 가볍지만 춤을 추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기에 웅장하고 강렬한 연주를 하였다. 그러나 다소 연주력에 비해 보컬이 배철수다(...).아무튼 이 장르를 통해 연주력은 인정하였지만, 자기들의 음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장르를 시도하였지만, 음악적인 실험 도전보단 흥행과 트랜드의 흐름이 다소있어 요약하여 여기까지만 설명하였다.


5. 기타[편집]



5.1. 송골매 디럭스 (2010)[편집]


2010년 키보디스트였던 이봉환이 보컬이 되어 '송골매 디럭스'라는 이름으로 재결성되었지만 반응은 '배철수랑 구창모 없이 무슨 송골매냐'는 분위기. 게다가 팬카페와 관련해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 다음은 현재 카페를 양도한 카페지기 심연(深緣)의 마지막 메일 전문.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카페를 양도하려 맘먹었고 진행중에 있습니다. 헌데 내막을 모르는 회원들이 대부분이기에 대강이라도 해명을 해야 제가 떠난 이후에 구구한 억측들이 생기지 않을것 같아 작별인사겸 말씀드립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송골매와 블루버드간의 결별로 인해 불똥이 저한테 튄거지요.카페는 작년5월 송골매의 재기를 준비하면서 필요를 느껴 이봉환님이 지인에게 부탁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운영이 되지않아 당시 매니지먼트를 맡고있던 블루버드의 김용환씨가 양도받았는데, 라이브클럽 운영과 공연기획등으로 카페운영에 전념을 할수가 없었던 용환씨가 블루버드에 라이브공연을 보러다녀서 친분이 있었던 저를 추천했고 이봉환님이 3,4개월간을 매달리면서 간곡한 부탁을 하셔서 끝까지 거절치 못하고 수락을 했습니다.그런데 카페지기 양도직후 송골매와 블루버드 간에 문제가 생겨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로 카페지기 수락을 막았더라면 제가 쓸데없는 일에 체력을 소모하진 않았을거 아닙니까? 그 이후 리더 이봉환님은 태도가 180도 바뀌었고 급기야는 얼마전 자신의 게시글들을 모두 삭제한후 탈퇴하였습니다. 헌데 지금에 와서 본인이 만든 카페이니 자신들의 측근에게 카페를 양도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카페란 팬들의 공간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팬들에 의해 굴러가는 곳입니다. 제가 블루버드쪽과 가까운 사이라 본인들의 편에서서 일을 하지 않을거란 판단이었겠지요.그런 사람이었다면 사건후 바로 물러나거나 폐쇄했을겁니다. 앞뒤분간 못하는 사람 아닙니다. 맡아만 준다면 어떻게 운영하든 무슨짓을 하든 일체 관여안하겠다고 하시더니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시는 그 모습 너무 비겁하단 생각 안드십니까?이유없이 회원을 강퇴시켜 그랬다구요? 그당시 제가 카페지기도 아니었지만 어떤 운영자가 아무 이유없이 회원을 강퇴처리 하겠습니까? 왜 그랬는지 아시는분들은 아실겁니다. 본인들을 위해 구설수를 막아보려 그랬다는 생각은 못하시는지... 차라리 상황을 얘기하며 정중히 사과하고 부탁을 했더라면 일이 이지경이 되지는 않았을겁니다. 한때는 송골매의 진정한 팬이었고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이었는데 비수를 꽂다니요... 카페지기가 월급받는 자리던가요? 제돈 써가며 시간 투자해가며 좋은소리 못듣는 그런자리입니다.감정대로 하자면 카페를 폐쇄하고 싶었으나 양도하기로 결심했던건 순수하게 송골매를 좋아해서 가입하신 회원님들을 생각해서였습니다. 송골매라는 타이틀을 가지신 분들이 팬카페에 집착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을 넘어 측은지심도 생깁니다. 음반이 나오면 회원들 상대로 판매도 해야하고 공연 땐 티켓도 팔아야 하니 필요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팬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을 때 빛이 나는겁니다.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팬카페는 언젠가는 곪아 터집니다.부디 송골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더이상 없길 바라며 그 위상에 걸맞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다가서기 바랍니다. 더이상 상처받는 팬들이 없길 바랍니다. 이후에 저에대한 억측이나 모함의 얘기들, 제 귀에 들려오지 않길 부탁드립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답니다. 이 정도는 정말 최소한의 감정표현입니다.그리고, 그간의 자료들 모두 없어졌는데 회비잔액(\111,000)은 이봉환님 통장으로 송금했습니다. 회비까지 횡령했다는 소리 나올까 겁이 납니다. 앞으로 본인들과 뜻을 같이하는 측근들에 의해 본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잘 이끌어 가시겠지요. 아마도 그동안 저한테 반기를 들었던 분들이 중심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지금에서야 이해가 됩니다... 그런식의 처세술로는 큰그릇이 될 수 없답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힘을 주셨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메일 안에 나오는 라이브 클럽 '블루버드'는 송골매 디럭스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준 라이브 카페로 송골매 디럭스의 공연을 여러번 주도한 적이 있다. 여러모로 예전의 송골매의 이름은커녕 악명만 남기지 않아도 좋을 지경. 결국 스튜디오 앨범 하나만 남았다.

[1] 한국항공대학교 스쿨 밴드[2] 이응수는 원래 항공대 재학생이었고 이봉환은 항공대 출신은 아니었지만(경희대 출신) 배철수와는 고교 동기로 오랜 친분이 있었다.[3] 홍익대학교 스쿨 밴드[4] 김정선은 블랙테트라에서 활동했지만 홍익대 출신은 아니었다. 최종 학력은 단국대 중퇴.[5] 블랙테트라 2기 앨범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해변가요제 참여 멤버는 아니었다.[6] 오승동은 당시 캠퍼스 출신 밴드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프로의식을 가지고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7]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리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곡이다. 이 곡으로 1982년 가요계를 석권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8] 당시 엄청난 블록버스터 영화이자 흑인 주연으로 흥행을 거둔 첫 번째 영화였던 "Shaft"의 주제곡이었다. 얼마나 이 당시 임팩트가 컸으면 이 영화 이후 흑인 주연 영화가 대폭 늘었고 노래 자체는 1990년 심슨 가족에서도 패러디되었다. 리사와 바트가 카라오케에서 "Theme From Shaft"를 부른다. Theme From Shaft에서도 첫 부분에서 특유의 기타 리프를 쓴다. 그 곡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펑키한 디스코 넘버로, 1978년~1979년 즈음의 디스코 곡들과 비슷하다.[9] 부활(밴드)의 전신인 디 엔드의 베이스 주자였다.[10] 이 셋은 송골매 활동 후 위대한 탄생에서 같이 활동하게 된다.[11] 이 노래는 '높은음자리'의 멤버 김장수가 작곡했다.[12] 배철수가 했던 말은 아니지만, 당시에 이런 밤무대를 뛰다 보면 결국 관객들이 좋아하는 넘버를 하게 되고 그 스타일의 연주를 하게 되기 때문에 뽕삘이 물들게 되고 앨범을 만드려고 할 때 뭔가 새로운 것을 해 보고 싶어도 도무지 뽕삘을 뺄 수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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