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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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애양원교회 담임목사
손양원
孫良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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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2년 6월 3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칠원군 상리면 남구리
(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
사망
1950년 9월 28일 (향년 49세)
북한군 치하 전라남도 려수시 려수읍 왕십리 617 미평과수원 골짜기
(현 전라남도 여수시 둔덕동 617-10)
본명
손연준
학력
칠원공립보통학교[1](졸업)
중동학교 (퇴학/명예졸업)[2]
경남성경학원 (수료)
평양신학교 (졸업)

산돌[3]
별명
사랑의 원자탄
가족
배우자 정양순(1907~1977)
아들 손동인(1924~1948), 손동신(1930~1948), 손동장, 손동길[4]
딸 손동희(1933~), 손동림, 손동연, 사위 김원하
양자 안재선[5](1931~1979)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
수훈
건국훈장 애족장[6]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일생
3. 백범과의 인연
4. 가족 및 은인
5. 기념관
5.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여수시)
5.2. 애국지사 손양원기념관 (함안군)
6. 사단법인 산돌 손양원 기념사업회
7. 기타
8. 저작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맞서 투쟁한 목사이자 항일독립운동가. 또한 애양원(愛養園)에서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에 전력하였으며, 한국전쟁 중 죽음을 맞이 하였다.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애양원 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기에 그는 피난을 하지 못했으며, 아들을 죽인 원수마저도 사랑으로 품은 손양원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8월 15일 국가독립유공자로 선정,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제 3212호
훈장증
故 손연준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5년 8월 15일
대통령 김영삼
국무총리 이홍구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입함
총무처장관 김기재


2. 일생[편집]


대한민국개신교 장로회 목사. 별명 "사랑의 원자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에서 손종일(孫宗一, 1871.1.17 ~ 1945.4.13) 및 김은수(1873.2.10 ~ 1936.5.26)의 3남 1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손양원은 1908년 부친의 입신과 함께 7세에 입신하여 맹호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으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12세 때 칠원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보통학교 3학년(15세) 때 일이다. 조회 때 천왕이 사는 궁성 쪽을 향해 절하는 소위 '동방요배'라는 것을 하는데 손양원 목사는 이를 거절하다가 교장에게 불려 가게 되었고 신사 참배에 반대한 이유로 퇴학당하였으나 선교사 맹호은(孟皓恩, 맥크레이) 목사의 도움으로 다시 복교할 수 있었으며, 1917년 7월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8세 되던 해에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아버지가 3.1운동에 참가하여 옥에 갇혔기에 손양원 목사도 찍혔다. 그는 서울에 있는 동안 낮에 학업에 열중하고 밤에 만두를 팔았으나, 이를 계속할 수 없어서 고향에 내려와 잠시(약 3년) 고향에서 가족을 돌보면서 지내야 했다. 하지만 불타는 향학심을 누를 길이 없어, 그는 192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스카모(巣鴨)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 시기에 교회출석은 물론 노방전도도 열심히 하였으며 1923년 귀국하여 그해 10월 칠원읍 교회 집사로 피선되었다. 1926~1934년에 전도사로서 부산 감만동의 나환자 수용시설 상애원(相愛園)에서 일했다. 이곳에서 매견시(1865-1956, 梅見施, Mackenzie) 선교사와 인연을 맺었다.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직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기독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 당시의 일화 중 하나로 환자들 중 상태가 심한 환자들만 격리해놓은 방이 있었다. 간호사들조차 신문지를 깔고 들어가니 그런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환자 중 하나가 "우리가 짐승이냐?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 라고 외치면서 간호사들 중 하나를 목침으로 때려 죽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맨발로 그 방에 들어가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기도를 올리던 손 목사는 상처를 직접 입으로 빨아 고름을 빼냈다. 한센병이 전염병인지라 애양원에서 크게 걱정을 하며 수차례 검사를 시행했지만 다행히 손 목사에게는 발병하지 않았는데 이에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내가 나병에 걸리면 그들과 똑같아질거고 그러면 환자들이 나에게 더 거부감 없이 대할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였다고 한다.

1940년에는 평양의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당시 수감 생활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서 실명 위기까지 왔었다고 한다. 이 때 나온 기도 중 하나가 기독교인들에게 유명한 솔로몬의 부귀보다 의 고난이 귀하다는 이야기로 아내 정양순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왔다. 그가 수감되어 있을 때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신앙을 바꿔보려고 했는데, 불교관련 책을 강제로 읽고 감상문을 쓰게 하거나 일본인 스님을 불러서 그가 불교신자로 바뀌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와의 종교 담론을 하던 그 스님은 전도가 끝까지 먹히지 않고, 오히려 손 목사의 반론에 할말도 없어지자 결국 분노가 폭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 목사의 뺨을 때리고 만다. 그럼에도 손 목사는 오히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니 이쪽 뺨도 치십시오."하며 뺨을 내밀자 그 스님은 아예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바람에 감방 간수들이 끌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7]

해방 이후에는 목사가 되어서 다시 애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출소한 뒤 최초로 설교자로 참여한 예배에서는 설교를 시작하려다가, 그때까지도 버젓이 예배당에 놓여있던 가미다나(かみだな, 神棚)를 보고[8] 격분하여 그 자리에서 바닥에 던져 개박살내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설교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손양원의 두 아들인 손동인 씨와 손동신 씨는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좋게 보던 반란군 세력이 반란 당시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가족들과 애양원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하였다. 두 사람의 장례 예배 때 손 목사는 감사 기도를 올린 것이다. 감사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와 함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반란이 진압된 이후 손 목사는 실제로 반란군 인사 중 안재선이란 좌익학생[9] 이 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10] 이를 용서하고 안재선 씨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이다.[11]

격분한 마을 사람들과 애양원 환자들에 의해 안재선 씨의 처형이 집행되려 할 때, 손 목사는 설교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여고생이던 딸 손동희 씨에게 '빨리 가서 안재선 씨가 마을 사람들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말리고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부탁했는데, 당연히 손동희 씨는 자신의 친오빠들을 죽인 살인자를 살리는 것도 모자라 한 가족이 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처형장으로 가면서도 '이놈을 죽일까, 살릴까?'하고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고 한다.[12] 그렇게 목숨을 건진 안재선 씨는 자신의 행동을 참회했고 진심으로 손양원 목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따랐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모두들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다. 당시 환자들은 한센병 환자인 자신들을 북한군이 해치지는 않을테니 손 목사에게 떠나라고 종용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여수로 진격한 북한군에게 기독교 목사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북한군에게 붙잡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을 때에도, 식사 시간 때마다 들어오는 주먹밥 중 가장 작은 것을 집어먹었고 그마저도 반으로 쪼개서 감방의 사람들 중 가장 굶주리고 있던 사람에게 "나는 본래 소식가라서 이것만으로도 족합니다."라며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같이 갇혀있던 사람들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했다. 향년 49세.

안타깝게도 이때는 인천에서 한창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고 서울이 수복된 때였기에, 만약 이로부터 단 이틀만 더 버텼으면 그도 무사히 살아남았을 수도 있었다. 이때 북한군들이 총을 쏘던 순간, 젖먹던 힘으로 손에 묶인 밧줄을 기적적으로 풀고 정신없이 뛰어서 탈출하여 다행히 살아남은 김창수라는 이름의 생존자가 있었고 그는 세상에 손 목사가 죽기 직전까지의 모습을 알렸다. 장례식 때 손양원 목사 장례의 상주를 맡은 안재선 씨가 가장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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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목사의 장례식 모습. 상복을 입은 키큰 남자가 안재선 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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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목사의 장례식이후 가족사진.

손 목사는 안재선 씨가 자신을 따라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데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을 참회하며 살았고, 1978년 12월 16일 후두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신도로 사역 활동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손 목사의 아들들을 살해한 것을 참회했다.

그때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양동생 손동희에게 한 말은 천국에 가서 너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겠다였다. 그의 아들인 안경선 목사[13]의 증언으로는 그가 신학교에 입학도 하고 그곳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며 생활했으나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그런 사람의 설교를 누가 들으려하겠냐는 자격지심에 목사가 되길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인 안경선 씨는 "신학교에 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달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사가 되었고, 현재도 손 목사의 유복자 막내아들인 손동길 씨를 작은아버지로 모시면서 함께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안경선 목사는 서울기독대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에서 목회를 하다가 아프리카 부룬디의 한센인 마을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의 한센인 목회를 양손자가 계승하게 된 것이다.

손양원의 묘지는 그가 봉사했던 애양원 근처에 있다. 두 아들이 묻힌 곳에 함께 묻혔다. 손양원이 총살당한 곳인 여수시 둔덕동에는 그를 추모하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3. 백범과의 인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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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와 손양원의 기념사진.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경을 쓴 남자가 손양원이다.

백범 김구(1876 ~ 1949)는 백범은 안재선 씨를 용서한 손 목사의 일화를 듣고, 손 목사야 말로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이라고 말하며 큰 존경심을 표했으며, 자신이 세우려고 계획하던 학교의 교장으로 손 목사가 적임이라 생각하고, 1949년 3월 26일에 손 목사를 직접 찾아가 교장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나병환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고 말하며 김구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에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은 김구는 손 목사에게 친필 휘호를 적어주었다. 김구가 전해준 이 휘호는 현재 애양원 근처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덮인 들판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말 것은, 오늘 내가 걸은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문인 이양연(李亮淵,1771~1853)의 <야설(野雪)>

1949년 4월 17자 <서울신문>에 손양원 목사의 선행과 대인배적 면모를 알리는 글을 게시했다.

"(전략) … 여수 교회의 손양원 목사의 사적을 듣고서 나는 그 분의 종교가다운 온정과 자비심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했다.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목사이다. 그는 무고한 동포들을 학살한 좌익 소아병자를 완전히 고쳐서 선량한 인간이 되게 하였다.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학살한 좌익 학생에게 온정과 원호의 손을 쥐어주면서 회유시킴으로써 다수의 좌익 사람들로 하여금 잔인한 파괴 행동을 버리고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도 손목사와 같은 아량과 포용성과 수완이 있다면 공산주의도 이길 수 있고 남북통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감정을 삼가고 이지를 발휘해야 한다."



4. 가족 및 은인[편집]


부모님: 손종일(1871) 장로, 김은수(1873) 집사
형제자매 3남 1녀: 손봉연(女, 1896), 본인(1902), 손문준(?), 손의원(1909)
자녀 4남 3녀: 손동인(1925), 동신(1930), 동희(女, 1933), 동장(1936), 동림(女, 1940), 동연(女, 1947), 동길(1950).

  • 손종일 장로
"내 자손에게 무엇보다도 신앙을 전작 하겠다." 이는 손종일 장로의 자손 교양의 수훈이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이 아버지의 입신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민족자존과 국가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손양원 목사에게 나라사랑과 민족애로 나타나게 되었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입신과 함께 불타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고 활활 타오르는 그의 신앙은 가정에 새로운 삶의 지표를 세워놓았다. 손양원 목사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확고한 신앙 정신 아래서 신앙을 배우게 되었고 그 신앙이 훗날에 귀한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 부친 손종일 장로는 1919년에 엄주신, 박순익, 윤형규, 신영경 등과 함께 칠원만세운동(3월 23일, 4월 4일, 8일, 13일)의 준비부터 거사까지 이끌었다. 훗날 아들 손양원이 신사 참배를 반대하여 일본 경찰에 끌려갈 때, 손종일은 아들의 귀에 대고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누가복음 9장 26절) 및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10장 37절) 말씀을 들려주었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에게, 감옥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의 명령만을 붙들라는 것이었고, 변절할 상황이 생기면 순교하라는 말이었다.
神社不參拜한 普校生三名退學 (漆原) 동아일보 1937.10.21

지난달 22일 생업보국일에 칠원에서는 관민일체로 신사참배를 하였음에 불구하고 유독 기독교 신자들만이 불참배를 하였기 때문에 경찰당국은 교회 대표로 손종일(孫宗一), 엄주신(嚴柱信) 양씨를 불러 경고를 하였는데 지난 15일에는 관민, 학생 전부가 신사참배를 하는데 그중 기독교 신자의 자제 3명이 불참배한 것이 문제되었다. 보통학교에서는 즉시 이 사실을 도 학무과에 보고하는 동시에 이들 3명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고 앞으로도 일반 생도들의 신사참배의 열성을 고취하기로 되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 손양원 목사와 주기철 목사의 만남
손양원 목사와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은 그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경남성경학교에서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은 손양원 목사가 신앙인으로서 거듭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주기철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으며 "신사참배 문제 이후로 설교할 때에 우상 죄를 공격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으며 "가장 잘 죽은 사람 누구인가? 주를 높이다가 죽은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시록 14:13),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가 가장 잘 죽은 사람일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손양원 목사는 옥중에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부모나 자녀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도 더 슬퍼서 30일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애곡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손양원 목사에게 항상 귀감이 되었으며 손양원 목사는 주기철 목사를 존경하여 그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은혜의 사람에게 믿음의 세례를 받다. (맹호은, Frederick John Macrae)
맥크레이 선교사는 1884년 5월 14일 스코틀랜드 콧펜(Cockpen)에서 태어났으며, 1891년 아버지 존 맥크레이(John MacRae) 목사가 호주 멜버른의 투락(Toorak)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아들 맥크레이도 호주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선교대회에 참가했던 맥크레이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해 11월 2일 호주 장로교 한국 선교사로 첫 발을 디뎠다. 한국어 선생에게 '은혜의 사람'이라는 뜻의 '맹호은(한국명: 孟皓恩)'이라는 이름을 받고 나서 30여년의 한국 선교 기간 동안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한국에 도착한 지 1년 후, 그는 커럴 의사와 함께 진주, 거창, 함양, 함안, 웅천에 있는 교회들을 대상으로 거의 300km에 이르는 장거리 전도 순회여행을 하였다. 그는 코넷(cornet)을 불며 2년여 동안 40~50개의 장터를 돌앋니며 전도를 했다. 또한 그가 타고 다녔던 오토바이는 마산 지역 최초의 것이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코넷을 불며 선교하는 큰 키의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 화제의 대상이었다. 아담슨(Rev. Andrew Adamson, 한국명: 손안로, 한국사역 1894~1914) 선교사에 이어 마산포교회(현 문창교회)를 발전시켰다. 또한 손양원 목사를 배출한 함안 구성 교회에서 마산지방 남녀사경회를 1918년 개최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였으며 손양원 목사의 소년 시절에는 직접 세례를 맡았으며 손양원 목사가 칠원보통학교 시절 동방요배 거부로 퇴학을 당하자 복교할 수 있도록 힘쓰기도 했다. 1920년에는 창신 학교 교장(3대)으로 취임하여 창신 학교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마산 최초의 의신 유치원, 불우한 소녀들을 위한 마산여자야학교 등을 설립하여 마산 지역의 교육 및 선교의 기초를 닦았다. 1940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후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코틀랜드에서 1973년 1월 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5. 기념관[편집]



5.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여수시)[편집]



손양원 목사가 활동한 애양원이 있는 여수시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손양원 목사의 유복자 막내아들 손동길 목사가 2015년부터 기념관에서 직접 안내를 맡고 있다. 기념관은 여수공항 뒷편 도성마을에 위치하고 있고, 여수 버스 35순천 버스 96의 종점이라서 쉽게 찾아올 수 있다. 손양원의 영향 때문에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권 지역은 전남 지역 내에서도 개신교 성향이 비교적 강한 편이다. 애양원은 현대에도 남아 있는데, 한센병 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피부과정형외과 전문 병원으로 바뀌었다.

한때 '손양원 목사가 나환자의 고름을 빨아내는 모습'을 표현한 밀랍 인형이 있었다. 2019년 한센연합회의 항의로 이 물건을 치워버렸다고 한다.

기념관 내에, 토플하우스 건물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이 있다.
한성신학교, Hanseung Seminary (토플하우스)
1) 손 목사님이 나환자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부흥집회시마다 받은 사례비를 적립해서 세우려 했으나 순교하시고, 그 뜻을 받들어 보이열(Boyer) 목사가 1955년에 설립함. 2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 1959년에는 제1회 23명 졸업, 1963년에 제2회 22명 졸업.
2) 손양원 목사 당시 환우들의 병 상태가 심각해 비 환우인 목사가 함께 살면서 목회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 환자들을 목사로 양성시키고자 학교설립을 계획했으나 세우지 못하고, 그 뜻을 받들어 1956년 4월 12일 개교, 3년제로 2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됨.
토플하우스
1) 1955년 전국의 한센인들을 위한 한센인 지도자 양성소인 한성신학교 건물로 세워졌다. 지금은 마지막 미국인 원장이자 22년간 애양원 원장으로 헌신한 토플(S.C. Topple, 도성래) 선교사의 이름을 붙여, '토플하우스'로 불리고 방문객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막내 아들 손동길 목사 등 유족 측은 애양원 교회와 기념관이 손양원 목사의 역사를 왜곡했으며, 손양원의 행적을 장사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손양원 연구에 대한 몇 가지 보충 (무덤 앞)
1) 두 형제의 비문 중 식민지 부분
6년 박해 때, 애양원의 원장은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애양원교회는 가족을 도울 수 없었다. 가족을 돕던 몇 명은 가족과 6년을 쫓겨났다. 해방 후 두 아들은 당시 교회 입장을 품었다.
불과 3년 만에 아들들은, 깨끗하게 순교했다. 아버지는 교회가 잘 길렀다며 묘비를 적었다. 묘비를 읽으며 모든 교인들은 한 없이 울었다.
2) 손양원은 통합 교단이 아니라는 증언
손양원은 한국 교단들이 분열하기 전 순교했다. 손양원은 분열하기 전의 초기 고려파 신앙이다. 현재 고신, 합동, 통합 교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3) 손양원은 동상을 반대했다는 증언
동상을 만들면 우상으로 갈 위험성이 많아진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은 우상을 반대한 것이다. 신앙인의 문서는 신앙의 자료로 연구할 수 있다. 그래서 유가족은 유품들을 무척산에서 소각하고 문서처럼 연구 자료들만 애양원에 맡겨 놓았다.
4) 나환자의 고름을 빨았다는 증언
나환자의 고름을 빨아 냈다는 말은 늘 많았지만 실제 본 사람은 없고 그럴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전기는 잘 적으려고 강조를 좀 지나치는데 당시를 아는 분들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앙으로는 그러고도 넘칠 분이라 한다.


5.2. 애국지사 손양원기념관 (함안군)[편집]



종교건축과 기념비건축의 권위자인 이은석 건축가의 역작으로서, 손양원 목사의 생가 터 주변 부지 3,656㎡에 복원된 생가, 지상 2층, 지하 1층(펌프실) 규모의 전시장, 기록보관실을 갖추었고,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덕산 4길 39에 자리한다.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 목사는 일본 천황숭배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이다. 한센병 환자를 가족같이 돌보고 두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을 양아들로 삼는 등 용서와 사랑을 실천한 참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 이 숭고한 박애 정신을 기리고자 2015년 9월 20일 그의 고향인 이곳 함안에 함안군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함안군 현충시설인 이 기념관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그의 사상과 정신을 본받을 수 있게 하여,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또한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의 인생 전체에서 드러나는 다차원적 사랑정신(애국심, 인류애, 아가페)이 "나라사랑(Loving Country)", "사람사랑(Loving People)", "하늘사랑(Loving Heaven)"의 세 가지 테마공간으로 구성되어 손양원 목사 일대기 및 함안의 독립운동사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칠원교회가 생가터 400평을 매입했고, 거기에 국가 예산 11억7천, 경상남도 3억6천, 함안군 33억6천, 손양원 기념사업회 3억1천 등 총 52억 투입해서 건립했다. 허성식(河盛植, 1952 ~) 51대 함안군수(2010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가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세 번이나 읽고 감동받아 오열하다가 건설 예산을 따냈다고 한다. 허성식 군수는 이와 같은 행보는 키루스 2세(고레스 왕)의 행보와 무척 닮았다.

기념관 앞에 석장(石匠) 임경모 선생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산돌 손양원 선배를 기리며…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나 예수처럼 살다 간 사람 산돌 손양원 선배님! 평생 말씀대로 사시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시다.
그의 영성 이어받기를 원하는 서울 중동의 후배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애틋한 마음 모아 삼가 기념석을 세우다.
주후 2016년 5월 30일
중동 기독신우회 회원 일동

손양원 목사 생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에 위치한다. 안내판에 붙은 사진은, 손양원 목사 부친 손종일 장로의 회갑을 기념하여 생가에서 찍은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는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올바른 가르침과 사랑으로 성장하였다.

양자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 목사가 관장으로 있다가, 2020년 3월 2일에 손동희 권사의 외동아들 박유신 목사(1962 ~, 조직신학 전공)에게 관장에 부임했다.

마산고속버스터미널 안에서 함안 버스 113-1를 타고 칠원읍 용산사거리에서 내린다. 기념관은 칠원교회 뒤편에 있다.

2017년 10월 21~22일, 2018년 10월 16~21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현충시설 체험박람회'에 참가했다.

이 건축물은 2017년 한국문화공간건축학회상, 2019년 한국건축가협회상, 2020년 Architecture Master Prize를 수상했다. 또 2021년 2월의 현충시설로 선정되어,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에도 등재되었다(제40대 한국성 경남동부보훈지청장, 2021년 1월 6일 취임).

손양원 기념관(Son Yang Won Memorial Museum)은 한 인물의 유산을 전시하는 박제된 전시 방식에서 탈피하여, 그의 삶이 보여준 저항, 희생, 화해의 정신을 세 개의 전시 공간을 통해 인식할 수 있도록 구축한 '상징적 공간 기념관'이다.

닫힌 조형 / 번잡과 고요 사이

두 개의 콘트리트벽으로 이루어진 원형 실린더는 강한 조형성으로 기념관의 상징성을 드러낸다. 실린더는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수공간을 향해 열려있지만, 수평적으로는 완전히 닫혀있다. 높은 벽을 이용해 기념관 내외부의 경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두 벽 사이에는 경사로가 조성된다. 소란스러운 바깥 세상과 고요한 기념관을 연결하는 전이공간이자 완충지대다. 내면적 고요를 찾아가는 이 길에서 방문객들은 사색에 잠기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건함에 젖어든다.

들린 볼륨 / 성과 속 사이

손양원은 천상의 가치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인물이다. 기념관은 '떠 있는 볼륨'으로 그의 경건한 정신을 표현한다. 육중한 콘트리트 볼륨은 대지에 흩뿌려지듯 배치된 기둥들과 버팀목 역할을 하는 실린더에 의해 땅으로부터 띄워지게 된다. 이러한 '떠 있는 볼륨'은 구조적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며, 그 호기심은 다시 신비함과 엄숙함으로 전환된다.

손양원의 고결한 삶은 백색의 자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정신을 담아낸 기념관의 콘크리트 실린더도 백자와 비슷하다. 투박한듯 고상한 모습은 백자의 외관과, 속이 비워져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는 점은 백자의 내부와 꼭 닮아있다.

경사 통로 / 직각과 대각 사이

세 개의 직사각형 전시실은 그 바깥을 스치듯 가로지르며 상승하는 경사로와 연결된다. 각각의 전시실 틈새로 보이는 곡선의 경사로는 박스형 볼륨과 만남으로써 대비의 정점을 이룬다. 큐브가 정적이라면 통로는 역동적이고, 수공간과 하늘같은 정적 배경은 물위의 파동과 구름의 동적 효과와 대비를 이루면서 실린더 내외부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또한, 실린더 사이의 좁은 길은 손양원이 평생동안 겪은 심신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케한다. 그 경험을 통해 저항, 희생, 화해를 몸소 실천하며 외롭지만 묵묵하게, 슬프지만 강하게 전진하였을 그의 발걸음을 되새겨보는 공간이다.

공간 전시 / 전시물과 공간 사이

이 기념관은 상징화 된 공간으로 손양원의 정신을 후대에 전한다. '유물 전시관'보다는 '공간 전시관'인 셈이다.

첫 전시실은 좁고 어두운 통로를 거쳐 들어가게 된다. '백색의 방(White Room)'이라 불리는 이 공간은 일제에 저항하다 투옥된, 손양원의 '나라 사랑(Loving Country)' 정신을 상징한다. 두 번째 전시실은 '돌의 방(Stone Room)'이다. 갈라지고 곪아 터진 한센인들의 피부를 거친 돌을 이용해 형상화한 방으로, 그의 '사람 사랑(Loving People)' 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마지막으로 전신실인 '불은 방(Red Room)'은 그의 삶이 보여준 아가페적 사랑, '하늘 사랑(Loving Heaven)'을 표현한 공간으로, 기념관의 핵심이자 긴장감이 극대화되는 공간이다. 방문객들은 두 개 층 높이의 붉은 방을 가로지르는 브릿지 위에서, 손양원의 죽음을 떠오르게 하는 거친 질감의 핏빛 벽을 내려다보며, 긴장감 넘치는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C3KOREA, '성과 속 사이 추모와 사색' 중






6. 사단법인 산돌 손양원 기념사업회[편집]


본 기념사업회는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님의 나라사랑과 이웃사랑, 하나님 사랑의 고귀한 정신과 삶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2009년 발기인 모임을 갖고, 2010년 1월에 창립총회를 하여 국가보훈처로부터 법인설립허가(국가보훈처 2011101호)를 받았습니다.

매년 순교기념일인 9월 28일에 순교기념감사예배와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손목사님의 자료를 발굴하고 있으며, 출판사업으로 『소설 손양원』(홍성사/유현종)과 청소년을 위한 『만화 손양원』(키아츠), 논문집 『산돌 손양원의 목회와 신학』(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과 본 사업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협력하여 2,000페이지에 가까운 『신사참배문제 자료집 vol. Ⅰ, Ⅱ, Ⅲ』을 출간하였습니다.

특히 순교 65주년에 손양원 기념관 개막을 맞아 『산돌 손양원 목사 자료선집』(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이만열)과, 손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사진 화보집 『십자가의 길』(기념사업회/신윤식 선교사)을 많은 재정을 들여 발행하여 전국의 신학대학 등에 기증하였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최우수상을 수상한 창작 오페라 『오페라 손양원』을 후원하였으며, kbs와 함께 다큐멘터리 「죽음보다 강한 사랑」과 영화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권혁만 감독」을 제작하여 일반 극장(CGV와 롯데시네마)에서 개봉, 상영하여 민족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귀한 사랑을 평생 몸으로 실천하신 삶과 그 자취를 알렸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모교회인 칠원교회가 2008년에 개사육장으로 사용되고 있던 생가터(400평)를 매입한 것을 계기로 국가보훈처, 경상남도, 함안군과 적극 협력하여 2014년 4월 23일에 생가복원과 기념관을 착공하여 2015년 10월 20일에 개관, 지금까지 함안군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관리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본 기념사업회는 손양원목사님의 순교신앙을 바탕삼아 학술연구, 국내외 순회 전시, 문화콘텐츠 작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경남 일원에 흩어져 있는 주기철 목사, 호주 선교사 등 순직, 순교한 분들의 신앙과 삶을 함께 기리며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장년층과 함께 다음 세대들이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닮아가기 힘쓰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7. 기타[편집]


당연한 소리지만 손양원(孫良源)의 양원과 애양원(愛養園)의 양원은 한자부터 다르다.

손양원 목사의 생애를 다룬 책으로는 딸인 손동희 권사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와 소설 <사랑의 원자탄>이 있다. 2012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창작 오페라 '손양원'이 제작되기도 했다. 다만 오페라의 경우엔 개신교 색채가 강해서 종교적 입장에 따라서 평이 갈리는 편이다. 2013년 12월 25일 성탄 특집으로 KBS가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개신교 진영에서는 국민의례국기에 대한 경례의 방법이 국기에 머리를 숙여 절을 하는 방법에서 가슴에 손을 얹는 형태로 바뀌어 정착된 것이 손양원 목사의 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북 포항시에 위치한 한동대학교에는 손양원 목사의 이름을 딴 Residential College인 손양원RC가 개설되어 있다. 2018년 3월 1일 기준 교내 기숙사 중 하나인 벧엘관이 손양원RC 전용관으로 쓰이는 중이다.

2013년에 손양원을 다룬 뮤지컬이 상연되었다.

국민일보 기독뉴스에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순수한 순교자"(2014년 6월 16일) 기사가 게재되었다(박재찬 기자).

2015년 1월 29일에 순천시 중앙동 황금로 패션상가거리에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동신의 순교지 표지판이 세워졌다.

2019년 10월 5~6일, 여수 진남문예회관에서 2019 손양원목사 순교 70주년 뮤직&드라마 콘서트를 상연했다. 윤범호 배우가 손양원 역을 맡았다. 공연 첫날 권오봉 여수시장, 주승용 국회부의장, 최도자 국회의원 등이 자리했다.

제 36호
명예졸업장
성명: 故 손양원
1902년 6월 3일생
위 사람은 1919년 본교 입학 후 부친의 독립운동 주도로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이후 6.25 전쟁으로 순교할 때까지 목회자로서 평생 동안 나환자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성인으로 존경 받을 뿐만 아니라 국가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는 등 공적이 뚜렷하여 본교 명예졸업장 수여 규정에 의거 명예졸업장을 수여합니다.
2014년 2월 6일
중동고등학교장 김병민
명예졸업장
성명 故 손양원
1902년 6월 3일생
위 사람은 1919년 본교 1학년을 수료하고 일본 유학을 한 후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당한 다음, 해방 후 목사 임직을 받고 순천 애양원(한센병환자 수용소)에서 희생적 사역을 하던 중, 1948년 여·순 반란사건 때 두 아들이 공산군에 피살되고, 본인도 1950년 6.25전쟁 때 공산군에 피살되어 순교를 하시므로 성자로 추앙을 받는 한편, 국가독립유공자로서 건국훈장을 받은 공적이 위대하므로, 금번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관 준공에 즈음하여 본교 명예졸업장규정에 의해 이 졸업장을 수여합니다.
2015년 10월 20일
창신고등학교장 장대성


8. 저작[편집]


고대영 작곡, 그가 작사했다고 알려진 "주님 고대가"라는 CCM(음악)가 있다. 손 목사가 이 노래를 즐겨 불렀으나, 하동 지역에서 개척 전도사로 일하던 전점용 전도사가 작사한 것이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 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 되는 교회가 흰 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손양원 목사의 시 중 <꽃이 피는 봄날에만>에는 작곡가 김국진이 1987년 곡을 붙여 현재 새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

꽃이 피는 봄날에만 주의 사랑 있음인가
열매 맺는 가을에만 주의 은혜 있음인가
땀을 쏟는 여름에도 주의 사랑 여전하며
추운 겨울 주릴 때도 주의 위로 변함없네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 마귀 유혹 손짓 하나
고생중에 인내하면 최후 승리 이루리라
세상 권력 등에 업고 믿는 자를 핍박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아 회개하고 돌아오라
우상의 힘 얼마가며 인간의 힘 얼마가나
하나님의 심판날에 견디지를 못하리라
저 천국을 바라보니 이 세상은 나그네 길
죽음의 길 피하라며 나의갈 길 막지말라
내게 맡긴 양을 위해 나의 겨레 평화 위해
우리 주님 가신 길을 충성으로 따르리라 아멘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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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함안 칠원초등학교[2] 2014년 명예졸업장 추서[3] 산돌은 '살아있는 돌'이란 뜻이다. 신약성경베드로전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4] 아버지 순교 당일 출생.[5] 강철민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진 적이 있다.[6] 1995년 추서[7] 다만 판본에 따라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손 목사가 저 말을 하며 뺨을 내밀자 오히려 무릎을 꿇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내 살아 생전에 미륵불께서 현신하신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다니.!"라며 감격했다고 한다.[8] 일제 시대에는 기독교 탄압이 심했고, 그나마도 예배를 보기 전에 신토신단에 참배를 하지 않으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 악습이 해방이 된 뒤에도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9] 손양원 목사의 아들로서 새 삶을 살 때, 친부모에 대해 언급된 바가 없다. 사건 이전의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다. 본인도 본인 부모님도 남로당 계열 사람이었다고 한다.[10] 다만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씨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목사를 보면 이때 안재선은 자신은 이 둘을 죽이지 않았고 단지 확인 사살만 한 것이라고 자신의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했는데 오히려 시민들은 한번 죽인 걸로도 모자라 죽은 사람에 또 총을 쏘아 두번 죽였냐?며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11]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딸 손동희 권사의 회고록을 보면 두 아들의 유품이 전달됐을 때 하염없이 통곡했다고 한다.[12] 이후로도 안재선 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오빠들을 살려내던가, 자살로 사죄하라"는 식의 원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를 용서하고 오빠로 받아들였다고 한다.[13] 1960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