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정치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소련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 펼치기 · 접기 ]
상징
국기 · 국장 · 국호 · 노동자 마르세예즈 · 인터내셔널가 · 소련 찬가 · 낫과 망치 · 붉은 별
정치
정치 전반 · 소련 공산당 · 소련 공산당대회 · 크렘린 · 레닌 영묘 · 최고회의 · 소련 장관회의 · 헌법
블라디미르 레닌 · 이오시프 스탈린 · 니키타 흐루쇼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유리 안드로포프 · 콘스탄틴 체르넨코 · 미하일 고르바초프
최고지도자(서기장) · 국가수반 · 대통령
군사
소련군(장비 · 소련 육군 · 소련 해군 · 소련 공군 · 소련 방공군 · 소련 전략로켓군) · 스타프카 · 소련 국방장관 · 스페츠나츠 · 정치장교 · 바르샤바 조약기구 · 열병식
소련의 핵개발(RDS-1 · 차르 봄바 · 세미팔라틴스크) · 소련군 vs 미군 · 소련군 vs 자위대 · 대외전쟁
치안
소련경찰(Милиция) · 소련 내무군 · 비밀경찰(체카(펠릭스 제르진스키) · NKVD · KGB
경제
경제 · 경제사 · 소련 루블 ·
인문
민족 · 언어 · 종교
역사
역사 ·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 신경제정책 · 대숙청 · 독소 폴란드 점령(카틴 학살) · 대조국전쟁 · 냉전(6.25 전쟁 · 스푸트니크 쇼크 · 쿠바 미사일 위기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1980 모스크바 올림픽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소련 존속 여부 국민투표 · 8월 쿠데타 · 소련 붕괴
외교
외교 · 미소관계 · 소련-유고슬라비아 관계(티토-스탈린 결별) · 중소관계(중국-소련 국경분쟁 · 중소결렬) · 독소관계(독소 불가침조약) · 독러관계 · 북소관계 · 한소관계 · 소련-대만 관계 · 친소 · 소비에트 제국 · 브레즈네프 독트린
문화
문화 · 사회주의 리얼리즘 · 사미즈다트
막심 고리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미하일 숄로호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스트루가츠키 형제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 아람 하차투리안 · DDT(밴드) · 키노
소련 요리
우주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 세르게이 코롤료프 ·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 유리 가가린 ·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 알렉세이 레오노프
스푸트니크 · 소유즈 우주선 · 보스토크 계획 · 보스호드 계획 · 살류트 프로그램 · 미르 우주정거장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 소유즈-아폴로 테스트 프로젝트



1. 개요
2. 사상·이념
3. 헌법
4. 행정부
5. 입법부
6. 정치적 테러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소련정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2. 사상·이념[편집]


(1) 정치경제론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 현실사회주의)
  • 소련의 이념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 있고 또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널리 전파된 공산주의 이론의 원형이다. 이 이론은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이론과 블라디미르 레닌의 경험론(혁명론, 전술)을 융합함으로써 더욱 더 공격적이고 급진적으로 혁명을 달성하자는 것이 주된 논리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적에 대한 시위, 테러, 전쟁 등이 대의라는 미명 하에 정당화할 수 있으며, 초고속 공업화와 급격한 집단농장화 등도 여기에서 출발하게 된다.
  • 이것이 초극단적으로 변질된 것이 스탈린주의이지만, 사실 이는 이론적 실체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숙청과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 등에 대해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이기 때문이다. 시기상 스탈린의 집권기 전후로 한정되어 이러한 논의되며, 그 성격은 전체주의적 성격이 짙다. '빨간 파시스트' 정도의 포지션이라고 보면 되겠다.
  • 스탈린 사망 이후에는 흐루쇼프브레즈네프가 스탈린주의를 개량해서 만든 현실사회주의가 중·후반기의 중요 이념이 되었다
  • 기본 이념 : 사회주의, 공산주의

(2) 혁명론 (초기: 세계혁명주의 → 중기: 일국사회주의)
  • 세계혁명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확산을 위해서 소련이 주도가 되어 대대적으로 지원하자는 주의이다. 소련 결성 초기에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와 같은 소련의 권력자들은 사회주의의 확산을 위해서 전 세계의 약소국식민지를 상대로 일종의 '로비'를 했다. '돈 더 얹어줄게. 너도 사회주의를 수용하렴.' 이 지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중화민국쑨원이었고, 이게 종국에는 잘못 되어서 중국 공산당이 급성장하였고[1] 마오쩌둥중국대륙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를 채택한 국가가 차츰 확산되었다.
  • 세계혁명주의는 스탈린의 집권,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숙청, 독소전쟁(대조국전쟁)의 개시로써 폐기되고, 스탈린이 주창한 일국사회주의가 전면으로 등장하였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일단 소련부터 잘하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외적 상황도 있었지만 소련 자체가 너무 낙후되어 있던 터라 그들의 이념적 기반(유물론, 혁명론 등)을 들춰 보면 절대로 그들의 '혁명'은 성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집단농장도 만들고, 곳곳에 대형공장과 발전소 짓고... 제2차 세계대전에 시작 직전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소련은 농사나 짓던 후진국에서 탈피하여 이미 독일의 경제력을 올라서는 공업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소련 내부 단속도 강화되어, 구성국들의 가입, 탈퇴가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궁극의 목표인 '세계 혁명'보다는 소련의 파이를 키우는 데에 더 열중하기 시작했다.

(3) 개혁·개방주의 (페레스트로이카 - 글라스노스트)
  • 양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피 말리는 경쟁이 시작되었다.(냉전) 하지만 소련은 끝내 미국을 이길 수가 없었다. 우주경쟁에서 스푸트니크유리 가가린 등 살짝 앞섰지만, 1983년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스타워즈'[2]를 언급할 때쯤이면 이미 소련은 골로 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과도하게 중화학공업, 군수산업, 우주산업에 집중된 경제구조에서 문제가 생긴 상황이었다. '길고 큰 전쟁'도 더 이상 없는데 저 거대한 군수공장을 어떻게 돌릴 것인가? 그러다가 레이건의 낚시질에 딸려갔고, 소련은 경제적인 능력을 싹 날려버리고 말았다. 사실 가장 결정적이었던건 1985년부터 1986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진행된 사우디와 영국간의 석유전쟁이었다. 이 시기 석유전쟁으로 인해 1985년 상반기만해도 30달러대였던 유가가 1986년 10달러 아래로 떨어졌고 이후에 유가가 회복되었지만 국가재정의 상당한 부분이 줄어드는 바람에 막대한 재정적자가 유발되었다. 결국 마지막 소련의 집권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래서 등장한 것이 개혁·개방이다. 개혁·개방주의는 순수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의 부분적 도입을 하고, 전 세계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며, 브레즈네프 때부터 나타난 무능한 공산귀족(노멘클라투라)들을 제거했다.

(4) 기타


3. 헌법[편집]


소련 헌법은 총 4번에 걸쳐 수정되었다. 이 중 제헌 헌법(1918년 헌법)은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하기 전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철의 장막을 규정한 헌법은 2차 개정 헌법(스탈린 헌법)부터다.


소련 헌법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본으로 한다.[3] 각 개정 헌법 간 차이가 있다면, 초기 헌법들은 '세계혁명주의'에 규정했으나 2차 개정 헌법부터는 '일국사회주의'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 개정은 소련 최고회의에서 의결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4. 행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소련 장관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입법부[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소련 공산당

소련은 소련 공산당이 이끄는 일당제 국가였기 때문에, 국가 권력기구와 별도로 당내 권력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최고의결기관은 소련 공산당 대회(Съезд КПСС/Congress of the CPSU)이다. 여기서는 당의 기본 노선을 설정하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ПСС/Central Committee of the CPSU) 위원과 중앙위원 후보를 선출한다. 당 대회는 1년에 4회 정도 개회되며, 개회되지 않을 때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상무를 전담한다. 중앙위원의 임기는 5년이다.

당 중앙위원회는 보다 실권을 가진 인원들로 압축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4]을 구성하며, 이 정치국의 실제적인 업무를 전담할 10여 명의 서기들로 구성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Секретариат ЦК КПСС)이 구성된다. 한 마디로 이 서기국의 수장인 서기장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내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체제는 스탈린 집권 이후부터 확립된 체제로, 항상 고정적이지 않았다. 레닌 생전에는 레닌의 직책이던 인민위원평의회 주석이 사실상 다른 국가의 총리수상과 비슷한 최고지도자를 담당했다. 하지만 서기장직을 재임하던 스탈린이 레닌 사후 서기장직을 지닌 채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되며 서기장이 곧 공산당의 당수이자 소련 최고지도자의 직함이 되었다. 스탈린 시절 확립된 소련 정치시스템은 훗날 대다수 현실사회주의 국가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소련 말기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일원으로 일당제가 폐지되고 다당제가 도입되면서, 최고지도자의 역할도 서기장에서 대통령으로 넘어가지만 1년도 지나지 못해 소련이 붕괴하면서 사라졌다.

당 중앙위원회 위원 이상의 실세들이 소련의 국가 권력 기구인 소련 최고회의나 장관회의의 직책을 알아서 권력순대로 겸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니콜라이 포드고르니가 은퇴한 이후, 서기장이 최고회의 의장을 겸직하기도 했다. 스탈린 시대나 흐루쇼프 시대에는 연방 공산당 서기장이 보통 장관회의 주석을 겸했는데, 만일 서기장 직함이 없는 상태에서 소련 최고회의 의장이나 소련 장관회의 주석을 맡는다 할지라도, 권력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이렇게 소련이 직함과 실제 권력이 일치하지 않는 복잡한 권력 구조을 지니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집단지도체제라는 명목 때문이었다. 원래 레닌은 죽기 직전 당내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당시 공산당에서 유력한 인사들이 서로 권력을 나눠 집단지도체제를 이루도록 당부했다. 이후 스탈린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레닌을 혁명의 주도자에서 사실상 신격화시키면서 집권했다. 따라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레닌의 유지를 받드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권력구조를 여러 인사들이 분점한 듯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한 명이 독점한 독제체제를 구축했다. 스탈린 사후에도 소련에서는 일명 트로이카라 불리는 집단지도체제가 몇 번 등장했지만,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서기장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일인지도체제에 가깝게 돌아갔다. 이러한 정치구조는 2차대전 이후 탄생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도 이식되어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진 당내 권력투쟁의 배경이 되었다.


6. 정치적 테러[편집]


국제적인 학술단체 «메모리얼» 관리국장 А.Б.로긴스코에 따르면, 1921년 이래 소련에서는 정치적 이유가 있는 형사법적 사건이 5백만건이 된다. 이들 중 약 10%가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정치적 테러의 희생자수는 450만명이 된다. 여기에 보충하면 강제추방된 700만명이 있다. 그러므로 소련이 정치적 이유로 광범위하게 탄압한 희생자의 수는 약 1150-1250만명이다.(내전[5]

희생자의 상당수가 빠진 숫자이다.) 또한 이 숫자에는 «라스쿨라치바니예[6]» 및 홀로도모르 피해자가 빠져 있다, 1921—1922, 1932−1933, 1946−1947년. [정치적 탄압의 숫자에]이것을 떨어트리는 것을 불가능하다, 기근의 사망률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해결법과 경제적 계산 착오이다: 최소 500만명의 목숨을 빼앗은 1920년대 초반 기근,1932-1933 — 최대 6,7백만명 희생자, 1946-1947 — 최대 150만명.[중략]

«소비에트 마을의 비극» 계획 관계자들이 숫자를 보다 정확하게 한 «커다란 테러»[7]

의 희생자 수:1937-1938년에 체포자 중 총살사형으로 판결받는 현상이 현저히 더 크게 일어났다— 이전에 생각되던 68만 2천명이 아닌 72만 5천−74만명. 일부 특히 잔인하고 난폭한 징벌 정책 사항 몇개의 연구가 있다, 예를 들면, 1933년 나림스콤 지방 유형자들의 광범위한 전멸의 역사. 이 출판물은 다음 부분들을 인상적으로 생기가 넘치게 묘사한다,«청소»당한 숫자를 포함하여, 형사상으로 제일 작은 부분에 속하는 자들, 또한 강제 집단화에 반대한 사람들, 방랑자, 집시들이 시베리아 습지에서 먹을 것도 거처도 없이, 그들과 함께 추방된 상습범죄자들에 의해 테러를 당할 운명들. 망명자와 더불어, 정권 가장자리에 있는 대량의 버림받은 피압박자 집단에 대한 혁신적 성격의 전문적인 논문이다.[중략]

공산주의 테러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연구원들은 현재 인정한다.(겁을 주는 실재하거나 상상된 적대자를 제거, 볼셰비키 독재의 강화, 새로운 사회체제 편성, 적대적 사회집단의 대표자 인물들과 민족집단에 대한 청소) 보편적인 단 한가지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중한 서구의 역사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설명에 동의한다, 테러 및 독재 형벌 기관이 레닌주의-스탈린주의 시기 에 사회적-경제적 및 군사적-외교적 해결과제를 유효하게 해결하려는 욕구를 위해 강요됐다는 것, 탄압이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피할 수 없는 대가라는 것을 이해한다.[8]

[9]

[ 러시아어 원문 ]
По мнению председателя правления Международного общества «Мемориал» А.Б. Рогинского, с 1921 г. в СССР на преследуемых по политическим мотивам было заведено 5 млн уголовных дел. Если учесть, что примерно 10% из них были осуждены несколько раз, число жертв политического террора составит 4,5 млн чел. К ним следует прибавить примерно 7 млн депортированных. Таким образом, количество пострадавших от массовых политических репрессий в СССР составляло около 11,5−12,5 млн чел. (без учёта значительной части жертв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Также в это число не входят «раскулаченные» и жертвы голодоморов 1921—1922, 1932−1933, 1946−1947 гг. [37] От этого нельзя абстрагироваться, поскольку голодная смертность была вызвана в первую очередь политическими решениями и хозяйственными просчётами: голодов начала 1920-х гг. унёс не менее 5 млн жизней, 1932−1933 гг. — до 6−7 млн жертв, в 1946—1947 гг. — до 1,5 млн [38].[중략]
Участники проекта «Трагедия советской деревни» уточнили количество жертв «Большого террора»: к расстрелу в 1937—1938 гг. было приговорено заметно большее число арестованных — не 682 тыс., как ранее считалось, а примерно 725−740 тыс. [42] Часть особенно жестоких эксцессов карательной политики стала предметом отдельных исследований, например, история массовой гибели ссыльных в 1933 г. в Нарымском крае, на о. Назино [43]. Эти издания дают впечатляющую картину того, как в число «вычищаемых» в ходе паспортизации были включены, наряду с меньшей частью криминального элемента, также противники насильственной коллективизации, бродяги, цыгане, оказавшиеся затем в сибирских болотах, без еды и жилья, обречённые на террор со стороны высланных вместе с ними уголовников-рецидивистов и мучительную смерть. Новаторский характер носит недавняя коллективная монография о многочисленных маргинальных париях режима, в том числе ссыльных [44].[중략]
В настоящее время исследователи признают, что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террор выполнял целый ряд функций (устрашение ликвидацией реальных и мнимых противников, укрепление большевистской диктатуры, формирование нового общества, очищенного от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враждебных социальных, а также национальных групп), отказываясь от какого-то одного универсального объяснения. Среди серьёзных западных историков многие согласны объяснять террор и всевластие карательных органов ленинско-сталинского периода вынужденным стремлением эффективно решить социально-экономические и военно-дипломатические проблемы, видеть в репрессиях неизбежную плату з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ую модернизацию.

Тепляков, А. Г. "Эпоха репрессий: субъекты и объекты." Между канунами. Истор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в России за последние 25 лет. 2013 #



7. 최고지도자[편집]


명목상 통치자를 제외한, 실질적 통치자들의 명단이다.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bgcolor=#cd0000><width=15%> 초대 ||<width=35%>
인민위원장

블라디미르 레닌 ||<bgcolor=#cd0000><width=15%> 제2대 ||<width=35%>
이오시프 스탈린 ||
||<bgcolor=#cd0000><width=15%> 임시 ||
게오르기 말렌코프 ||<bgcolor=#cd0000><width=15%> 제3대 ||
니키타 흐루쇼프 ||
||<bgcolor=#cd0000><width=15%> 제4대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bgcolor=#cd0000><width=15%> 제5대 ||
유리 안드로포프 ||
||<bgcolor=#cd0000><width=15%> 제6대 ||
콘스탄틴 체르넨코 ||<bgcolor=#cd0000><width=15%> 제7대 ||
미하일 고르바초프 ||




[1] 쑨원과 중국 국민당 입장에서는 잘못된 거겠지만,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호재다.[2] 우주급 규모로 전쟁을 하는 개념[3]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 역시 헌법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적으로 표방한 경우가 많다. 가령 오늘날 중국 헌법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명시했다. 다만 조금 추가된 게 있다면,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사상'이라는 것. 한편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대신 '주체사상'을 명시했다.[4] 1952년부터 1966년까지는 '지도국' 정도의 뜻인 'Президиум(Presidium)'를 썼으나, 1966년부터 정치국이라는 명칭으로 환원했다.[5] 레닌시기 러시아 내전[6] 내쫒음, 강탈[7] 한국에선 ‘대숙청’이라 부른다[8] '근대화'는 '현대화'로도 번역가능[9] 소괄호는 논문 저자가 논문에서 쓴 글. 위 논문에서 말한 희생자는 사망자를 가르키는 게 아니라 사망자 포함하는 의미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소련 문서의 r1179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소련 문서의 r1179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4 02:05:59에 나무위키 소련/정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