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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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起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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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한성부 판윤을 지낸 소효식(蘇效軾)의 차남이다.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를 지낸 소자파(蘇自坡, 1451 - 1524)의 동생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소세온(蘇世溫, 1474 - 1537) ·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며 대사간을 지낸 소세량(蘇世良, 1476 - 1528) · 마량진수군첨절제사(馬梁鎭水軍僉節制使)를 지낸 소세공(蘇世恭, 1479 - 1554) · 좌찬성을 지낸 소세양(蘇世讓 / 1486 - 1562)[1] 형제에게는 숙부가 된다. 아우는 도사(都事)를 지낸 소계파(蘇季坡)이다.


2. 행적[편집]


1491년(성종 22년)의 실록[2]을 보면 각 위(衛)의 부장(部將)들에게 <대전(大典)>을 강하게 하여 현명한 자를 뽑아 아뢰도록 하는 성종의 명이 있었는데, 이에 불통(不通), 즉 불합격했지만 쓸만한 인재라는 평을 받은 다섯 명의 부장 중에 소기파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1490년 이전에 무관으로서 출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494년(성종 25년)에 북방 변경정벌에 종군하였고, 1500년(연산군 6년)에 강계(江界) 이평(梨坪)[3]에 침입한 여진족을 붙잡아 베는 등 한동안 북방 변경의 여진정벌작전에 종사하였으며, 이 전공으로 1508년(중종 2년)경에 부령부사(富寧府使)에 올랐다.

부령부사를 지내면서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1509년(중종 4년)에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종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이때 이를 전하러 이장곤(李長坤)이 부령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부사를 교체하여 새 부사가 부임하는 줄 알고 이장곤에게 달려와서 "부사님이 더 계시게 해달라"면서 간절히 부탁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이 다시 조정에 보고되자, 중종이 특별히 소기파의 자급(資級)[4]을 한 등급 올려주었다.

중종실록에서는 소기파의 자급을 한 등급 올려주었다는 기록[5]에서 "기파(起坡)는 무인(武人)으로서 성격이 청렴 결백하여 가산(家産)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적을 만나면 자기를 잊으며 강하고 용맹스럽기 비할 데가 없는 사람이다. 북방에 있을 적에는 사람들이 일컫기를 ‘철내금(鐵內禁)’이라고 하였다"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듬해인 1510년(중종 5년)에 웅천[6]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이곳에서도 부령부사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 그러던 중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큰조카 소세온 · 셋째 조카 소세공과 함께 왜적들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뛰어난 활솜씨와 무예실력으로 왜적들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이때 왜적들의 시체를 뒤적여서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있으면 가슴을 찔러 숨통을 끊고 그 피를 자신의 얼굴에 바르고 나서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내어 술안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세간으로부터 소야차(蘇夜叉)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7]

삼포왜란이 진압된 후에 그 공을 인정받아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는데, 왜란 당시의 잔학한 행적 때문에 일등에 책록하는 것을 꺼림칙해하는 의견들도 있었으나, 앞서 서술한 듯이 웅천현감으로 선정을 베푼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거기다가 중종이 그대로 공신으로 봉하도록 하여 일등공신으로 녹훈되었다.

1516년(중종 10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써 전라수군절도사(全羅水軍節度使)에 올랐으며, 1521년(중종 16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승진하였으나 다른 수령들과 상피(相避)[8] 문제가 있다는 대신들의 의견으로 한 번 체직되었다가 이듬해인 1522년(중종 17년)에 다시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 해에 전라도 관찰사 신상(申鏛, 1480 ~ 1530) 휘하에서 전라도의 여러 진(鎭)을 침략하는 왜구를 토벌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후 관직이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527년(중종 22년) 명나라에 보낼 사신단의 정조사(正朝使)로 거론되었지만, 70이 넘은 고령에 병을 앓고 있었던 이유로 고사했다. 그 뒤로는 실록에서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얼마지 않아 노령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뒷날 1544년(중종 39년) 사량진왜변이 일어나자 삼포왜란 당시 웅천현감이었던 소기파의 활약이 다시 거론되기도 하는 것[9]으로 보아 사후에도 그 무용은 상당히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성품이 청렴하고 소탈하여 욕심이 없었고, 승진에도 크게 구애받지 않았으며, 지방 수령으로 부임할 때는 백성들의 고충을 자애롭게 돌보며 선정을 펼쳐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고 크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전장에 임해서는 삼포왜란 때처럼 적을 잔학할 정도로 도륙하고 심지어 식인을 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으므로 세간에서 크게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이런 잔혹한 행동은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는 의도적인 행위였거나, 평생 전장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PTSD가 생겨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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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는 양곡(陽谷)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중종-명종 조의 문신이다. 당대의 명사였던 황진이와의 열애로도 유명한 인물이며 송설체(松雪體)를 잘 쓰는 것으로도 이름이 있었다.[2] 성종실록 260권, 성종 22년(1491년) 12월 16일 무오 3번째 기사)[3] 지금의 자강도 화평군 리평리[4] 벼슬아치의 위계(位階)[5] 중종실록 7권, 중종 4년(1509년) 2월 7일 2번째 기사[6] 지금의 웅천동[7] 중종실록 11권, 중종 5년(1510년) 4월 22일 정미 6번째 기사[8] 관료 인사의 공정성을 위하여 관료들을 일정한 범위 내의 친족과 동일 관사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한 제도.[9] 중종실롱 102권, 중종 39년(1544년) 4월 20일 무자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