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창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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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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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정부

초대
웡원하오
제2대
쑨커
제3대
허잉친
제4대
옌시산
제5대
천청

장제스 정부


장징궈 정부

제6대
위훙쥔
제7대
천청
제8대
옌자간
제9대
장징궈
제10대
순윈쉬안

장징궈 정부


리덩후이 정부

제11대
위궈화
제12대
리환
제13대
하오보춘
제14대
롄잔
제15대
샤오완창

천수이볜 정부

제16대
탕페이
제17대
장준슝
제18대
유시쿤
제19대
셰창팅
제20대
쑤전창

천수이볜 정부


마잉주 정부

제21대
장준슝
제22대
류자오쉬안
제23대
우둔이
제24대
천중
제25대
장이화

마잉주 정부


차이잉원 정부

제26대
마오즈궈
제27대
장산정
제28대
린취안
제29대
라이칭더
제30대
쑤전창

차이잉원 정부

제31대
천젠런
입법원장 · 사법원장 · 감찰원장 · 고시원장 · 행정원 부원장
청 내각총리대신 · 중화민국 국무총리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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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9대 행정원장

제2대 주 일본국 중화민국 대표부 대사
셰창팅
謝長廷(사장정) | Frank Hsieh Chang-ting


파일:셰창팅 행정원장.jpg

출생
1946년 5월 18일 (77세)
타이완성 타이베이시 젠청구
학력
국립타이완대학 (법학 / 학사)
교토대학 법학대학원 (법학 / 석사)
재임기간
제20 ~ 21대 가오슝시장
1998년 12월 25일 ~ 2005년 1월 31일
제19대 행정원장
2005년 2월 1일 ~ 2006년 1월 25일
제2대 주 일본국 중화민국 대표부 대사
2016년 6월 9일 ~ 현직
소속 정당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 2, 3
경력
제4 ~ 5대 타이베이시의회 의원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논란
3.1. 후쿠시마 방사능 원소 관련 논란
4.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만정치인이자 변호사.

민주진보당의 공동창립자 10인 중 한 명이며, '민주진보당'이라는 당명을 직접 지은 사람이다.

3선 입법위원가오슝 시장, 민주진보당 주석 그리고 대만 행정원장을 지냈다. 2008년 제12대 대만 총통-부총통선거에 총통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2. 상세[편집]


1946년 5월 18일 타이베이시 젠청구(현 타이베이시 다퉁구(大同區)에서 출생하였다(77세). 국립대만대학 법학과 학사, 일본 교토대학에서 법철학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1]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뒤 비교법학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인사 중에서는 천수이볜도 있었는데, 그와 함께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 당시 대표 변호사로써 활약하였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몸을 담기 시작한 것은 1981년으로, 당외조직[2]의 주요 인사로써 타이베이시의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85년부터 다른 민주화 운동 세력을 규합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시도는 1986년 민주진보당의 창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창당 당시 당명을 공모할 때 대만민주당과 진보민주당이라는 이름이 나왔고, 이 중에서 셰창팅이 제안한 민주진보당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 당명으로 선정되었다.

1990년 입법원에 진출하였고, 1994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당내 경선에서 천수이볜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중화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실시된 직선 총통선거에서 펑밍민 총통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으나 국민당리덩후이-롄잔 조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바이샤오옌 사건 당시 인질극을 벌이던 마지막 범인과 교섭하여 경찰에 투항시켜 일약 명성을 날리게 된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가오슝시장 후보로 출마하여 현임 시장이었던 중국 국민당우둔이를 제치며 당선되었으며, 2002년에 재선에 성공하였다. 가오슝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상하수도 정비를 우선적으로 실시하였고, 당시 심각하게 오염되었던 아이허(愛河), 첸전허(前鎮河)와 같은 강을 정비하고 다시 깨끗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밖에도 지하철인 가오슝 첩운을 기획하였으며, 가오슝 시의 낙후지역재개발하고(산둬상권이 이때 정비된다), 2009년 가오슝 월드게임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가오슝 시장 재임과 동시에 2000년부터 2002년까지 2년간 민주진보당의 주석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5년 1월, 천수이볜 총통에 의하여 유시쿤(游錫堃)의 후임으로 행정원장에 임명되면서 가오슝 시장직을 사임하였다. 셰창팅 내각은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당과의 직접적인 부딪힘을 줄이고 협상하려는 태도를 취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협상내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2005년 12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에 패배함에 따라 행정원장 셰창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하여 셰창팅 내각은 해산되었다. 그 후 2006년 타이베이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40%의 지지를 받으며 낙선하였다.

2008년 대만 총통 선거에 총통 후보로 러닝메이트 쑤전창과 함께 출마하였으나 마잉주-샤오완창 조에 참패하였다. 당시 마잉주가 이명박 대통령의 747 공약을 벤치마킹한 느낌이 물씬 드는 633정책을 내놓자, 셰창팅은 아이허 재정비/재개발 계획을 가지고 청계천스런 선거 마케팅을 하여 대만에서 뜬금없이 이명박 이슈가 선거전에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공약과 현실은 달랐다는게 함정.

2010년 10월 새로운 양안관계를 외치면서 민주진보당 정치인 중 최초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대만 국민들과 민진당 지지자들에게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2014년 민주진보당 주석 선거에 출마하고자 하였으나 차이잉원을 지지하며 물러났고, 2015년 지방선거에서타이베이시장에 무소속 후보[3]커원저가 당선되자 시정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16년 6월 3일 도쿄 주재 타이베이 대표부 대사로 정식 임명되었는데, 주일 '대사'라는 직함으로 발표되었다. 앞서 이루어진 주미 대표의 '대사' 직함 사용과 더불어, 차이잉원 정부의 대만 독자성 노선의 연장선상이라는 평가.


3. 논란[편집]



3.1. 후쿠시마 방사능 원소 관련 논란[편집]


셰창팅 주일 대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대지진 이후 세계가 방사능 문제에 민감해지고 있지만 실제로 후쿠시마의 미량의 방사성 원소는 신체에 유익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당 주리룬 주석은 이같은 말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일 대만대표가 아닌 주대만 일본대표라 여겨질 수 있다며 직접 오염수를 몇 잔 드셔 보고 국민을 안심시켜 달라 하여 비판하였고 허우여우이 국민당 총통 후보도 오염수 배출에 대한 대만인들의 우려를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며 증거 없는 그런 발언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 및 비판하였다. 결국 논란이 커지자 셰창팅 주일 대사는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온천의 라듐 효과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이지 방사능 원소에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2대 입법위원선거
타이베이시 제1선거구


83,264 (13.79%)
당선 (3위)
초선
1995
제3대 입법위원선거
비례대표 1번
3,132,156(33.2%)
당선 (2위)
재선
1996
제9대 정부총통 선거
중화민국 자유지구
2,274,586(21.1%)
낙선 (2위)

1998
제2대 직할시선거
가오슝시장
387,797 (48.71%)
당선 (1위)
초선
2002
제3대 직할시선거
386,384 (50.04%)
당선 (1위)
재선
2006
제4대 직할시선거
타이베이시장
525,869 (40.89%)
낙선 (2위)

2008
제12대 정부총통 선거
중화민국 자유지구
5,445,239 (41.55%)
낙선 (2위)

2012
제8대 입법위원 선거
전국부분구
4,556,424 (34.62%)
낙선(2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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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동양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2]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만의 정계는 이른바 3당 훈정에 참가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만 합법적인 정당으로서 독점하는 무대였으니, 블록 정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이들이 연합한 조직이 바로 당외이다.[3] 민진당에서는 커원저 초선 당시 타이베이시장 후보 공천을 하지 않는 등 암묵적으로 커원저를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