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선)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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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4대 국왕
세종 | 世宗


세종 표준 영정 (1976년, 김기창 作)
출생
1397년 5월 15일
조선 한성부 준수방 장의동 본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즉위
1418년 9월 19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450년 4월 8일 (향년 52세)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동별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인근)
능묘
영릉(英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18년 7월 15일 ~ 1418년 9월 19일
제4대 국왕
1418년 9월 19일 ~ 1450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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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도 (裪)
부모
부왕 태종
모후 원경왕후
형제자매
12남 17녀 중 3남
배우자
소헌왕후
자녀
18남 4녀
종교
유교 (성리학)불교[1]
체중
75kg 이상 추정[2]
아명
막동(莫同)

원정(元正)
군호
충녕군(忠寧君) → 충녕대군(忠寧大君)
묘호
세종(世宗)
시호
조선: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장헌(莊憲)
섭정
상왕 이방원 (1418년 ~ 1422년)
세자 이향 (1442년 ~ 1450년)



파일:세종(조선) 어필.svg

세종의 친필 글씨 (열성어필)[1]

1. 개요
2. 생애
8. 어진
10. 여담
11. 어록
12. 관련 단체
1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의 제4대 국왕. 묘호세종(世宗),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본명은 이도( 李裪 ),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 막내)이었다.

세종은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에 태어났다.[2] 고려 왕씨 왕조의 군인으로 지내다가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뒤엎고 왕위에 올랐던 태조(조선), 정종(조선), 태종(조선)과 다르게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왕족으로서 왕위에 오른 첫 임금이다.

세종은 32년의 재위 치세 동안 수많은 치적을 남겨 조선은 물론 한국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현대의 대한민국/북한의 공용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으며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 지역의 국경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만큼 세종의 치세는 현대 한국인문화와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순신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3]

2. 생애[편집]


<조선왕조실록>에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환산시 5월 15일)에 당시 정안군[4]이었던 이방원과 군부인이었던 원경왕후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위로는 다섯 명의 형이 있는데 맨 앞의 3명은 어린 시절 요절했기 때문에 양녕대군효령대군에 이은 사실상의 3남으로 자랐다.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어릴 적부터 이미 될 성 부른 떡잎을 보여 한번 잡은 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단군이래 최고의 독서덕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병이 나 앓고 있을 때도 줄창 책을 읽으려 들었으므로 건강을 해칠까 걱정된 태종이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했으나 병풍 뒤에 꽁쳐놨던 《구소수간(歐蘇手簡)》이라는 책 하나를 붙잡고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얘기는 알음알음 퍼져있는 이야기. 원래 왕자는 일개 종친일 뿐 과거 시험을 봐서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재주가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 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생활이 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이다.

이방원피비린내 나는 살육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바로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 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계속되는 망나니 짓에 포기하고 말았다는게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사실이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린 결과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이 외척[5], 친척[6], 공신[7] 가리지 않고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애초에 싹을 다 조져놨으니 그 카리스마에 나댈 수가 있나. 본인의 성정이 어질고 마침 개기는 놈이 없으니 좋은 정책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상왕으로서 왕위에서만 물러나 세종의 보호자, 후견인 역할을 해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보통 위인전에서는 세종대왕이 대군 시절 사심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본인도 자신에게 대권이 올 가능성을 인지하고 야심차게 행동했다는 근거가 여럿 있다.

  • 첫째로 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대군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내었다. 이 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이 세자와 비교함과 동시에 칭찬하고 신하들이 역시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고 이는 세자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 둘째로 세자의 망동에 대놓고 직언으로 간하기도 했다. 매형인 이백강[8]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9]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10] 또 한번은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으며[11] 옆에 있는 신하들도 충녕대군의 말이 맞다며 모두 세자를 욕하는 등 세자의 속을 있는 대로 긁어댔다. 1달 뒤 열받은 세자가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로는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라고 오히려 두둔했다.[12]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세자가 골라 했다. 이런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 셋째가 아주 결정적이다. 충녕대군은 자신의 집에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도중 남재가 갑자기 충녕대군에게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태종)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는 말을 했다.[13] 이 때 남재와 충녕대군 두 사람만 있던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듣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당시의 상식으로는 꾸짖고 역모로써 고변하는 등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지만 충녕대군은 그냥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하고 웃을 뿐이었다.[14] 만일 충녕대군이 이를 꾸짖고 부왕에게 고발했다면 남재는 의금부에 끌려가 실컷 매타작을 당하고 목이 날아가거나 유배될 정도의 매우 위험한 언행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석이든 공석이든 말 한 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것이 전근대 왕조의 정치판이다. 하물며 왕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꼬드겼으니 조금만 삐끗했어도 남재는 물론이고 충녕대군까지 싸잡아서 역모죄를 의심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상의 일화들을 살펴볼 때 충녕대군은 분명히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 원래 집안을 이어야 할 장남은 인간말종이고, 어차피 장남이 아닌 이상 차남인가, 삼남인가는 상관이 없으니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움직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교 사회에서 양대 계승 명분중 적장자 계승이 불가능하다면 남은건 '택현(擇賢)'인데 이건 말그대로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한다는 뜻이라 둘째든 셋째든 상관이 없었다.[15] 그리고 추가로 차남인 효령대군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을 내보인 정황은 없기에 절대적으로 결격사유가 있는 대군들을 제하고 보면 장유유서로 보나 택현으로 보나 삼남 밖에는 답이 없었다.

양녕의 비행이 날이 갈수록 도를 넘을 정도로 심해지자 태종과 중신들도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전폭 신뢰하는 모습이 기록에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 명나라 사신인 황엄조차도 '충녕대군이 부왕처럼 영명(瑩明, 총명하다는 뜻)하니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돌아다녔고 실제로 조선에서 새로운 세자를 봉해달라는 표문을 명나라에 전하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라고 바로 알아맞혔다.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16]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다. 할아버지 태조고려 왕실의 옥새를 빼앗아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아버지 태종도 5번째 왕자로 왕위 계승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왕자의 난 두 번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군왕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개국 초에 신료들이 적장자[17] 아니면 공이 큰 왕자를 세자를 책봉하는게 옳다고 의견을 낸 만큼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가 바로 이방원이었다. 문제는 계모이자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자기 소생의 자식들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무리수를 두었고 이성계와 정도전도 동의한 바람에 개국 과정에서 마땅한 공이 없으며 나이도 어린 막내아들이 떡하니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18]

이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이방원은 가장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왕자의 난으로 결국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19]은 자신부터는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어서[20] 세자의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장남이 정신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왕좌를 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유혈 투쟁을 하는 꼴은 부모 입장에서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 역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는 계속 태종의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았다는게 문제.[21] 이런 와중에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세자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세자를 압박하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범생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땄다. 세종의 즉위 뒤 쓰여졌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후에 양녕대군으로 폐해지는 세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었다.[22]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막내 동복아우 성녕대군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는 이 때 활쏘기나 하면서 띵까띵까 놀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자를 감싸던 태종마저도 이 사실을 알고는 "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23]라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사실 세자에게는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다.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씨 집안을 갖은 꼬투리로 끝까지 멸문했다. 그런데 세자는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숙들[24]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이 폐세자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작 세자는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마냥 외면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세자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세자는 "외삼촌들은 죽어도 싸다"고 비웃었다. 민무회는 어이가 없어서 "아니 대체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습니까?"라고 확 내질러 버렸다. 어린 시절 민씨 집안에서 자랐던 세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하기는 했지만 결국 각종 개차반짓으로 입지가 좁아진 세자는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얼마 안 있어 그 일도 태종에 고변해서 민무휼과 민무회를 죽게 만들었다. 비록 토사구팽이 예정된 상태였지만, 세자가 자기의 마지막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민씨 숙청에 가담한 행동은 현명함이었을까 아니면 어리석음이었을까?[26]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 그러니까 속가제자가 되었다.[27]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린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을 못 마셔서다. 태종에 따르면 "군주가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나 의전 상 아예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못먹는데 충녕대군은 마시긴 하더다"는 이유였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사실 세종도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었다. 소주를 겨우 1~2잔 마실까 말까 할 정도. 다만 당시의 소주는 도수 40도 이상의 원조 증류식 소주였기 때문에 술을 안좋아하는 사람이 한두잔 먹는 것도 용한 것이긴 했다.

아아!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17일 2번째 기사. 정전에 나아가 세자경빈에게 책보를 내려주다.[28]


태종 18년(1418)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처음에는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한다. 사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앞선 두 의견을 물린 것으로 보아 형식적인 절차였을 가능성도 있다.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명분인 유학적인 장자 계승에 따르면 순성군이 후계를 이어가는 것이 옳았기에 말한 것이며 이어서 점복으로 하는 것은 과거 한성으로 돌아올 때 명분으로 활용되던 것으로 천명(天命)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29] 하지만 양녕대군을 폐세자하려는 생각을 하면서 태종이 다음 후계를 정하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도 세자 책봉 이후 양위까지 한 것을 보면 충녕대군을 세우고자 하였을 것이다.

충녕대군은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이 평소의 망나니에 개차반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 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 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재위 기간 초기에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30] 그러나 세종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도리어 양녕대군의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지 두 달여 만인 태종 18년(1418) 8월 10일 전격적으로 양위한다. 태종은 재위 기간 수시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위한다는 쇼를 벌이고는 했는데[31] 신하들은 그때마다 찬 바닥에서 절을 하며 말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양위 시에도 신하들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선위 파동이 오래 갈려나?' 했는데 태종은 세자에게 임금이 즉위식 때 입는 면복을 입혀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당연히 왕의 복장은 왕만 입을 수 있었다. 선위를 반대하여 뜰에 나아가 엎드리던 신하들도 면복 차림의 세자를 보고 군말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세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 4년(1422)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났다.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첫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로테스크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마저 멸문했던 것인데 선위 직후 심온영의정과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켰다가 시답잖은 사건을 끄집어냈다. 이른바 강상인 사건으로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부분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하자 그를 친히 국문해 함경도 관노로 보냈다. 태종이 이미 "왕이 30살이 될 때까지는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를 어겼다는 죄목. 그가 태종을 아주 오랫동안 모셔온 공신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형벌이다.

한 달 뒤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32], 이조판서 심정[33], 동부총재 이관이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엮어냈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 죽였으며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했다. 이 때 심온은 하루에 곤장을 2번 맞고 압슬형을 5번이나 받고도 자복하지 않았다가 유정현이 "이보시오, 심공, 당신 지위가 뭔지 알면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텐데 왜 자복 안 하시오?"라고 하자 결국 자복했다. 유정현의 말을 듣고 심온도 처음부터 태종이 꾸민 짓임을 깨달은 모양. 심온은 다음 날 바로 사약을 마셔버렸다.[34] 야사에는 "앞으로 반남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박은을 두고 한 말 같다. 실제로 박은도 이 일에 유정현처럼 연루되어 있어서 심온을 경계했고 세종비인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는데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켰다.

사실 이는 명나라 눈에 불경하게 보일 수 있는 짓이었다. 나라까지 직접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을 처형해버리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만들었으니 외교상 명나라에서 불편해 할 가능성[35]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했다.[36]

1차 왕자의 난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세종은 태종 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종과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으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들 문종 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었다.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 사상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3년상 기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효 이전에 심온 본인에 대해서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온갖 병에 시달리던 세종이 아들 문종에게 양위하려고 하였을 때 장인의 사면도 생각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37]

심온 옥사 재수사는 세종이 물갈이를 하기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던 정치 보복이었으나 세종은 일체의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38] 옥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박은은 태종이 사망하기 직전에 병사했는데 사후 관직 박탈과 같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 심온에게 자복을 받아내고 심온 일가의 처벌뿐만 아니라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했던 유정현도 계속 좌의정으로 일하며 국가의 재정 분야의 일을 하면서 궤장까지 받는 명예를 얻었으며 72세가 되어서야 은퇴해서 곧 자연사했다. 다만 그 때문에 소헌왕후는 개인적으로 고생했을 가능성이 큰데 심지어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소헌왕후 본인은 임산부[39]였으며 죽을 때까지 아버지가 신원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40]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 세종이 아버지에게서 어보를 받고 즉위했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세종 4년(1422)에 숨을 거두었지만, 아직 조선 조정은 온전히 세종의 것이라고 하기엔 일렀다. 태종은 죽었으나 아직 조정에는 태종 때의 사람들뿐. 세종 4년(1422) 당시 영의정 유정현[41], 좌의정 이원[42], 우의정 정탁[43],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호조판서 이지강 등 주변에는 태종의 사람들만 있었다. 이 신하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으려는 의도였는지 세종의 말에 따르지를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일을 진행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대표적인 일이 폐세자 양녕대군에 관한 일. 태종의 상을 치르기 위해 유배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양녕대군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내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려댄다. 이때 내용 중에는 "양녕대군의 거취는 신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있었다. 양녕대군의 일은 자기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았으니 지금 왕이라도 간섭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러한 상소가 줄을 잇자 세종은 상소를 던지기도 하고 무시도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양녕대군을 내보내게 된다.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하였구나.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2월 27일 병자.


즉위 초의 상황은 세종이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는 험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중 세종에게 1가지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소위 말하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44]이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양인 426명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고, 당시의 권문세가 임견미에게 뇌물을 바쳐 이를 허용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아들 김도련이 노비 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거의 천 명을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한 일이다. 김도련이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되었다. 노비를 무려 36구나 뇌물로 받아 뇌물 스캔들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떠오른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ㆍ우의정ㆍ좌의정ㆍ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연루되었고 이 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 가히 조선 초기 최고의 뇌물 스캔들이라 할 만했다. 당시 노비 1구당 현재 가치로 천만 원 정도[45]였고 노비도 사람인지라 자손을 낳으면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니 뇌물 스캔들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재위 4년(1422)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으나 4년 뒤(1426)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도록 명한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났으며 이 때 조말생이 노비 36명에 장물 780관, 현재 가치로 약 14억 원 남짓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말생은 교형을 받을 뻔했으나 유배로 그치게 된다.[46] 관리 17명이 노비 132명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나자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렸다. 이로 인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듬해 1427년(세종 9년) 1월 황희좌의정, 맹사성우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세종은 본격적으로 성군으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재위기간은 그야말로 업적의 향연이었다.

세종 8년(1426년) 2월 한양 대화재가 발생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하기는 했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조선 500년 동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난 중 한양을 가장 크게 파괴한 재난이었다.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47]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세자는 군사훈련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총괄했는데 금성대군[48]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49] 다음 날인 16일에는 전옥서[50]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양에 돌아와서 아내와 교대해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51][52]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붙어있는 가옥을 적당히 이격시켜 다시 짓도록 조치함과 아울러 그 사이마다 우물을 파서 화재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한양의 도시 구조를 바꿔놓았다. #

재위 9년(1427) 5월 박연경기도 남양에서 나는 옥으로 편경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편경은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9월 어린 왕족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宗學)을 세웠다. 교육 내용이나 수준은 성균관과 비슷했으리라 추측한다.

재위 11년(1429) 2월 주종소를 설치하여 편종을 법식대로 만들게 하였다. 5월 정초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6월 돌을 던지는 군사인석척군을 폐지하고 단오 때 행해졌던 돌 던지는 놀이인 석척희를 금지하였다. 7월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재위 12년(1430) 2월 농사직설을 반포하였다. 10월 공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법을 제정하였다. 11월 등에 매질을 가하는 편배를 금지하였다.

청동활자인 계미자가 고르지 못함을 인식하여 재위 2년(1420) 경자자, 재위 16년(1434) 갑인자, 재위 18년(1436) 병진자 등을 주조해 활판인쇄 기술을 더욱 발전케 했다. 재위 19년(1437) 장영실, 이천 등에게 지시해 앙부일구, 자격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만 전념한데다 20대 초반부터 왕위에 올라 열정적으로 국정을 돌보았고 육식을 즐겨하는데다 특별히 몸을 쓰는 사냥 등을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익히 알려진 대로 비만에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결국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고 재위 후반기들어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재위 24년(1442)부터 세자 향에게 국정을 대리청정케 하였다. 국정에서 물러난 세종은 이 시기부터 좋은 온천에 들러 요양을 하고 유명 사찰을 찾아 먼저 떠난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켰는데 훈민정음 창제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재위 25년(1443) 세종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백성들이 당시의 문자인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친히 28개 글자[53]를 창제하였다.

재위 26년(1444)과 27년(1445)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연달아 세상을 뜨더니[54], 재위 28년(1446) 왕비 소헌왕후마저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연이은 가족들의 사망 이후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재위 32년(1450) 음력 2월 17일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향년 52세에 승하하였다. 능호영릉이다.

3. 업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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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판과 반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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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특이한 기록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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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족[편집]


총 18남 7녀 (3명 조졸)
소헌왕후
영빈 강씨
혜빈 양씨
장녀 정소공주
장남 문종
차녀 정의공주
차남 세조(수양대군)
3남 안평대군
4남 임영대군
5남 광평대군
7남 금성대군
9남 평원대군
15남 영응대군
6남 화의군
11남 한남군
13남 수춘군
16남 영풍군
신빈 김씨
8남 계양군
왕녀(조졸)
10남 의창군
왕녀(조졸)
12남 밀성군
14남 익현군
17남 영해군
18남 담양군
상침 송씨
3녀 정현옹주
사기 차씨
왕녀(조졸)
숙원 이씨
4녀 정안옹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세종(조선)/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영릉[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영릉(세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어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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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영정을 그린 화가 김기창의 얼굴과 세종 어진

1973년 운보 김기창이 그린 세종의 어진은 정부 지정 표준영정이다. 충무공 이순신에 이은 표준영정 2호이며 여러 동상이나 만원권 지폐 같은 다른 곳에서도 대부분 표준영정을 참고해 세종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어진이 소실되었으므로 이 그림은 세종의 진짜 얼굴과는 전혀 관련없는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다. 또한 실제 세종의 인척들 중 초상화가 남아있는 사람들과 비교해봐도 얼굴이 닮지 않게 그렸고 화가 김기창 본인의 얼굴과 비슷하게 그렸다는 지적과 의혹이 있어 왔다. #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소실된 대부분의 다른 어진과 달리 1935년에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때에도 세종의 실제 어진은 없었다고 한다.# 더 과거, 가령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세종의 어진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전란을 겪으면서 화를 면한 어진은 이곳저곳에 있었던 태조와 반쯤 타버린 문종의 어진, 그리고 이이첨이 구해낸 세조의 어진밖에 없었다고 한다. 역사의식 함양을 위해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표준영정 지정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세종의 어진을 그리게 된 이가 바로 김기창이었다. 하지만 당시부터 어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하여 논란이 많았다.#

실제로는 더 후덕하고 수염이 그닥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고기반찬을 좋아했다는 기록이나 이방원이 상왕이 된 이후 세종이 뚱뚱하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고 한 대목을 감안하면 비만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주변 친족들의 인물을 통해 세종의 외모를 상상해본다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나 큰아버지 익안대군, 고모 경신공주, 형 효령대군, 차남 세조의 초상 자료가 남아 있으니 참고할 것. 특히 실록에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아버지 태종은 먼저 죽은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에 대해 회상을 하며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마 효령대군과 가장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렇다면 수염이 적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효령대군 초상화는 생각보다 숱이 짙은 수염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태조는 수염이 성글다는 말도 있으나, 지금은 실전된 장년기의 어진 사진을 보면 역시 제법 짙은 수염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아들 중 세조는 수염이 매우 적지만, 반대로 문종은 수염이 풍성했다.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056629_image2_1.jpg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동상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뒷편에 있다. 이 동상은 위의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제작자인 홍익대 김영원 교수는 "표준 영정을 참고했지만, 애민정신을 담아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평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는데...

2014년 9월 4일, KBS 여유만만에 출연한 고종황제손자인 황손 이석은 광화문 동상의 경우 현재까지 남아있는 효녕대군의 초상화와 자신의 얼굴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말을 하였다. # 다만, 황손 이석 씨의 발언은 전반적으로 과장과 허황이 있으니 가려 살펴야 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석 문서로.

이순신 장군 동상에 비해 상당히 큰 데다가 시선이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터라 묘하게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을 호위하는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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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가 그린 상상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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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진은 안태성 교수가 친인척 왕족의 초상화나 문헌기록을 근거로 추정해 그린 세종 어진이다. 현재 남아있는 세조의 어진과 효령대군의 초상화로 복원했는데 아무래도 조선 초기 전주 이씨 집안의 공통된 외모 특성인 얼굴이 넓적하다는 점이나 기록에 있는 비만, 시각장애 같은 특성을 적용해서 그렸다보니 현대인의 일반적 미적 감각 기준과 멀고 상당히 낯선 이미지가 나왔다. 복원 과정 링크. 이 것도 복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위의 표준영정들이 정말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상상해 그린 거에 비하면 이 쪽은 나름대로 자료를 가지고 합성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른 상상도보다는 실제에 조금 더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9.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세종(조선)/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여담[편집]


  • 한국 최초의 이지스 구축함인 KD-3 1번함은 이 왕의 이름을 따 세종대왕함으로 명명되었으며 이후 동일함급은 세종대왕급 구축함이 된다. 이지스함 1번함에 불릴 만한 인물이라면 세종 아니면 이순신뿐이지만,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KD-2 구축함에 명명되면서 후속함인 KD-3 1번함에 세종이 낙점된 듯하다. 두 급의 구축함 모두 한국 해군 제7기동전단의 일원으로서 활동 중이다.
파일:lBrkR4c.jpg
DDG-991 세종대왕함

  • 태종이 세종에게 자신이 죽어 상을 치를 때 육식을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단순히 세종이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 아니다. 본래 유교의 장례문화는 매우 가혹한데 부왕이 죽어 3년상을 치르면 무명옷을 입고, 삼시 세 끼 고기 없는 소식을 하는 것과 더불어 곡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 당연히 몸이 축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런 장례절차를 대부분 수일 정도로 간략화시켰다. 그러나 태종은 효심이 깊은 세종이 자신의 3년상을 정석대로 치를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55], 상중에 육식을 허락한다는 유언에 가까운 말을 남긴 건 자신의 장례보다는 건강하게 국사를 돌보는 것을 중요시하라는 뜻이다. 세종과 똑닮은 아들인 문종이 3년상을 줄지어 치르다 요절한 것을 보면, 이는 태종의 예리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56]

  • 북한에서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에 대한 지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세종시대에 백성에 대한 봉건적 착취는 더 심해졌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의외로 이런 시각은 일본 혐한들이나 뉴라이트, 이영훈식민지 근대화론 학자들과 유사하다. 의외라고 할 수도 있지만 뉴라이트 계열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들의 해석이 의외로 비슷한 것은 크게 놀랄 일만은 아니다.[57] 이에 대한 반론은 해당 문서로.

  • 세종대왕이 조선족? 도넘는 중국의 한국 빼앗기 위키피디아 중문판에서 일부 혐한 중국 네티즌들이 악의적으로 세종을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소수 민족을 의미하는 조선족이라고 적어두었으나 아직도 해결되고 있지 않아 한국인들과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친한파 외국인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58] 극단적 친중파와 조선족들은 조선 왕조 인물들과 한국인들은 원래 조선족이라며 세뇌를 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세종을 포함한 5천만 조선인이나 현대 한국인들은 8천여만 명의 한민족 혹은 조선 민족 일원으로 불려야 하며 조선족은 200만 명에 불과하고 조선 왕조 인물이나 한국인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게 사실이다.[60]세종대왕 사진을 대표사진으로 악의적 사용중인 위키피디아 중문판 조선족(朝鲜族)페이지[64]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아들인 문종과 함께 명나라묘호가 통보된 단 두 명의 임금이다. 원래 조선은 명나라, 청나라와 교류할 때는 태조성종이니 하는 묘호 대신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시호로만 사용했다. 왜냐하면 묘호란 기본적으로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는 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종이 죽었을 때에는 대놓고 "우리 왕 묘호 문종이라고 지었고 그 이전 선왕의 묘호는 세종이었음"이라고 명나라에 직접 알렸다. 다만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뭔가 외교적으로 문제시되긴 했던 모양이다.

11. 어록[편집]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하였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함석헌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후덕했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하였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주리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하물며 지금 묵은 곡식이 이미 다 떨어졌다고 하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준다 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도리어 주린 백성에게 조세를 부담시켜서 되겠는가. 더욱이 감찰을 보내어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서 조세조차 면제를 안해 준다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 1월 6일 신해 6번째 기사 - 강원도 원주 등지의 기민의 조세를 면제해 주니, 변계량이 이의를 제기하다


"관·민간에 폐단이 없도록 힘쓰라. 만일 공평하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법에 의하여 엄중하게 논죄하라."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1420) 8월 14일 경술 1번째 기사 - 여러 도에 손실을 조사하는 경차관을 보내다


정사를 보았다. 근신에게 이르기를,

"해를 거듭한 기근으로 백성들은 간혹 먹을 것이 떨어지는 일이 있는데도 여러 경차관(敬差官)은 대의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일 처리에만 마음을 써서, 왕년에 민간에게 대여한 곡식을 징납하기에 너무 심히 하므로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니, 경차관에게 유시하여서 백성이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자에게는 강제로 징수하지 못하게 하라.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므로 민간의 일을 다 알 수 없으니, 만일 이해관계가 민간에게 절실한 것이 있게 되면, 너희들이 마땅히 모두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1421) 1월 3일 병인 1번째 기사 - 경차관에게 명하여 가난한 백성에게서는 대여한 곡식을 징수하지 못하게 하다


정사를 보았다. 호조 판서 이지강(李之剛)이 계하기를,

"지금 밀과 보리가 익기 시작하여 백성의 식량이 대어 먹을 수 있으니 기민[65]

을 진제[66]하는 것을 중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밀과 보리가 익었다 할지라도 나는 굶주리는 백성이 있을까 염려되니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백성의 살림을 조사하게 하여 만일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구제하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1421) 4월 27일 기미 1번째 기사 - 이지강이 밀·보리가 익는다며 굶주린 백성의 구제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67]

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백성에게 친근한 관원을 신중히 선택하고 출척[68]하는 법을 거듭 단속하였는데도, 오히려 듣고 보는 바가 미치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된다."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 7월 3일 신사 3번째 기사 - 백성의 폐해를 구제하는 것 등에 관해 왕지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신(信=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1425) 4월 14일 계축 1번째 기사 - 동전과 저화의 교환에 대하여 논의하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오히려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녹비(祿非)가 나타나서 일의 증거가 더욱 명백한 것이 이와 같은데, 권채가 기어코 복죄(服罪)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형벌로서 신문할 것이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1427) 8월 29일 갑신 3번째 기사 - 권채와 그의 아내를 형벌로서 신문하도록 하다


"임금의 직책은 백성을 사랑함이 중한 것인데 내가 즉위한 지 10년이 되었으나, 하늘과 땅이 재변(災變)을 보이시니, 내가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쓰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닌가 근심스럽다. 지금 또 겨울이 따뜻하고 눈이 적으니 내년의 농사가 염려된다. 대신들이 너희들을 수령으로 삼을 만하다고 하므로 이에 보내는 것이니, 마침 진제(賑濟)할 때를 당하여 무휼(撫恤)하는 데에 마음을 쓰라." 하매, 백충이 대답하기를,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신 등이 감히 힘을 다하지 아니하오리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마음과 힘을 다하겠다고 말하니 내가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세종실록 38권, 세종 9년(1427) 12월 20일 계유 1번째 기사 - 충주 판관 이백충·금성 현령 서지경·맹산 현감 조전이 사조하다


"인군의 직책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백성의 굶주려 죽는 것이 이와 같은데, 차마 여러 도에서 바치는 반찬[膳]을 받을 수 있는가. 전에 흉년으로 인하여 이미 하삼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없애고, 오직 경기·강원 두 도만 없애지 않았었는데, 지금 듣자니 경기에도 굶주려 죽는 자가 또한 많다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두 도에서 바치는 반찬도 아울러 없애는 것이 어떠한가."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1437) 1월 22일 임자 3번째 기사 - 경기의 각관·전에서 올리는 반찬을 정지시키다


"너의 자질이 아름다움을 아노니 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마음과 힘을 다한다면 무슨 일인들 능히 하지 못하리오."

세종실록 90권, 세종 22년(1440) 7월 21일 신유 2번째 기사 - 함길도 경력 이사철이 하직하다


(전략)"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지 아니할 수 없다.[69]

너는 가서 힘쓰라."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1441) 12월 17일 기유 2번째 기사 - 임지로 떠나는 경상도 도사 권기를 인견하다


"우리 나라의 노비의 법은 상하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강상[70]

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의지할 바를 더하는 까닭에, 노비가 죄가 있어서 그 주인이 그를 죽인 경우에 논의하는 사람들은 상례[71]처럼 다 그 주인을 치켜올리고 그 노비를 억누르면서,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고 아름다운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 된 자의 대권[72]이건만, 임금 된 자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자를 죽여서, 선한 것을 복 주고 지나친 것을 화 주는 하늘의 법칙을 오히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된 자의 덕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후략)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 윤7월 24일 신축 3번째기사 - 노비를 함부로 구타하거나 죽이지 말 것을 형조에 전지하다


"왜인·야인을 접대하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은데, 평안한 것이 몸에 배어 해가 오래고 날이 깊어 모든 일에 게으르고 늦어질까 두려우니, 마땅히 삼가 조심하기를 항상 하루같이 하여 혹시라도 조금도 허술함이 없도록 하라."[73]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1450) 2월 14일 기축 3번째 기사


12. 관련 단체[편집]




13. 관련 문서[편집]



[1] 가전충효 세수인경(충과 효를 가문에 전하고 어질고 공경하는 정신을 지켜라). 본 글씨는 전의 이씨 이정간 공에게 하사한 것이며, 전의 이씨의 대표적 가훈.[2] 세종의 즉위년인 1418년위화도 회군(1388년)으로부터 꼬박 30년이 지난 시기이기도 하다.[3]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에서 세종대왕은 2위, 이순신은 1위를 차지하였다. 한국인 대상 설문조사에서 전근대 인물인 세종대왕과 이순신이 비슷한 지목도로 존경하는 인물 1, 2위를 차지하는 양상을 보인다.[4] 정비 소생을 대군, 빈 소생을 군으로 봉하는 제도는 태종 대에 완비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차 왕자의 난 이전에는 군, 이후에는 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태종이 정안군일 때 태어났다.[5] 심온, 민무구 [6] 양녕대군, 회안대군 [7] 이숙번, 이거이 [8]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의 남편[9] 신의왕후 한씨[10]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3월 20일 4번째 기사.[11]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1월 9일 2번째 기사[12]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2월 9일 2번째 기사[13] 한마디로 '너네 아빠처럼 형제를 제끼고 왕위에 오르는게 어떻겠냐'고 부추긴 것.[14] 태종실록 태종 15년(1415) 12월 30일 3번째 기사. 과대 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태종이 여기서 웃었다는 것은 태종도 내심 셋째를 세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15] 사실 아버지인 이방원 역시 다섯째임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에게 세자 자리에 언급된 적이 있다. 이방석이 세자에 오르기전에 대신들에게 언급된건 사실상 장남이었던 이방과 그리고 공이 가장 큰 이방원이었다. 셋째인 이방의와 넷째인 이방간은 고려도 안되었다는 말이다.[16] 조선에서 적장자로써 왕위에 오른 사례는 세종까지는 해당이 안 되다가 적장자 이향이 조선 제5대 왕 문종에 오르면서 조선에서 처음으로 적장자 왕이 나오게 된다. 그 후로는 적장손 이홍위까지 조선 제6대 왕 단종에 오른다.[17] 이방우가 병사한 뒤에는 이방과[18] 나이, 경력, 학업 성취, 기타 등등 이방과나 이방원보다 나은 것 하나없는 이방석을 올리는 것부터가 무리수인데 고려가 망하기 전에는 중앙 정권에 진출하기 위해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고려 권문세족들과 혼인시켜 이용해놓고 조선이 들어서자 하는 말이 "신의왕후 소생들은 하나같이 고려 왕가 혹은 권문세족이랑 엮여 있으니 부적합하다."이니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이방석이 청나라강희제 급으로 어릴 때부터 재능이 남다르다든지, 신의왕후 소생들이 대통을 잇기에는 능력이 모자란다든지 그런 이유라면 모를까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고려 중앙 정부 진출과 조선 건국을 위한 발판으로 써먹고 왕위는 어리고 능력도 뒷배도 공로도 부족한 신덕왕후의 소생에게 넘겨주는 셈이니 신의왕후의 아들들이나 조정 대신들이나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전주 이씨 집안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과 손에 피까지 묻힌 신의왕후의 아들들도 무시하고 조선 건국 이전 죽었지만 엄연한 정실 부인이었던 죽은 신의왕후도 무시하는 처사다. 사실 무시하고 있기는 했는데 신의왕후 한씨는 건국 직전 사망해서인지 '절비'라는 시호만 받고 왕후로 추존되지 못한 것과는 달리 신덕왕후는 중전에 올라서 왕비릉에 묻혔다.[19] 태종은 사실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정종에게는 서자들만 있었을뿐 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안군 이방원은 정종의 후계자로 지명될 때 세제(弟)가 아닌 세자(子) 책봉을 받았다. 신하들은 정안군이 정종의 양자이기에 앞서 아우이기 때문에 세제로 책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정안군은 세자로서 책봉받는 안을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정안군 자신이 적장자로서 왕위를 잇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해석된다.[20] 참고로 이 점은 세종과도 비슷해서 세종도 아들을 좋은 임금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엄청 기울였다. 태종과 다른 점이라면 태종은 실패했고 세종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손자둘째 아들의 손으로 폐위되어 죽었다.[21] 여기서 세자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왕세자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은 '삐뚤어지는 왕세자와 총명하고 반듯한 셋째 왕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적장자와 꼬투리 잡고 음해하는 왕자'로 바뀌어서 오히려 충녕대군에 대한 의심이 가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22]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태종실록 후기에서도 충녕대군이 알고보면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있다.[23] 요즘 말로 하면 "니가 그러고도 사람새끼냐?"[24]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25] 그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쳤다는게 함정이지만 나중에 사도세자죄인으로 몰려 죽은정조영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그대로 영조의 뒤를 잇는데 성공했는데 정조는 형제가 있었으나 자신만이 적자였고 양녕대군은 유일한 적자는 아니었다는게 좀 다르다.[26]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면 외삼촌들을 외면하는 쪽이 맞기는 했다. 태종의 스타일상 뒤치기 안 해도 알아서 족쳐버릴 것이고 민무회가 한 말은 신하가 세자를 핍박한 것이라 밝혀도 아쉬울게 없다. (괜히 가만히 있다가 그 발언이 심문 중에 나오면 '뭐가 켕기길래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는 말을 숨겼냐.'는 의심만 또 살 수 있었다.) 사태가 잠잠해진 뒤 행동을 잘 했다면 태종이 "어라? 쟤 외삼촌들 때려잡은게 옳았던 건가?" 생각하게 하여 세자 자리를 보전할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25] 양녕대군 입장에서는 여기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매우 곤란했는데 태종이 칭병하며 양위 연극을 할 때 민무구와 민무질이 '왕에게는 세자 외에 다른 아들은 필요없다'고 한 것을 (방석의 선례가 있어 적장자와 적장자 계승의 중요성을 거칠게 말했을 뿐인데)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라고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원경왕후마저 이거 때문에 명분에서 밀려 구해주지 못했는데 세자라고 이 있었을까?[27] 일반적으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불교를 멀리하려는 조선의 왕족인 만큼 그러지는 못했다.[28] 태종 18년(1418) 6월 17일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충녕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는 글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너그럽고, 그릇이 크고, 품위가 있으며, 진중하다는 뜻이다.[29] 특히 성리학을 근본 사상으로 하는 조선에서 세자 책봉을 점복으로 한다면 큰 오점이기에 그만 둔 것으로 보인다.[30] 세종 집권 당시의 여러 가지 망나니 짓은 백성들 사이에서 양녕대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위기에 처하지 않기 위한 (역모에 엮인다든가 하는) 나름의 처신이라는 설이 있다.[31] 선위 파동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신하들은 충성심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해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32] 이미 강상인 사건으로 경상도유배를 가 있었는데 이유는 병조판서였기 때문.[33] 심정과 의논한 것이 왜 문제냐고 할 수 있는데 심정은 심온의 동생이었다.세종 즉위년(1418)에 심정은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로 무관이였고 이관은 이조참판이였다.[34] 나중에 창작된 건지는 몰라도 세종이 왕자 시절에 튀는 행동을 자주 하자 박은이 "사위 단속 좀 하십시오." 했는데 심온이 무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실이라면 외척에 극도로 민감한 태종의 마음을 읽지 못한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할 수 있겠다.[35] 현대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과 사이가 매우 밀접한 우방국 국가의 고위 외교관이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과의 중요한 외교문제를 해결하고 귀국한다. 그런데 그 외교관이 고국에 돌아가자마자 심각한 국기문란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고 가족들도 흩어졌다고 생각해보자.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의아하게 여길 것이 당연하다.[36] 사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걸 보면 홍무제 이후로는 명나라의 정보력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것 같다. 홍무제의 정보력에 대해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서로. 이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은 안 하지만 상황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초기의 청나라와 대비된다.[37] 태종이 죽을 때에 아내인 원경왕후 사망시에 고기를 못 먹어 고생하던 아들 세종을 위해서 상중(喪中)이라도 꼭 고기를 먹이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유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태종의 아들 사랑은 이만큼 각별하다. 이런 아버지의 결정을 본인이 뒤집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웠을 것이다.[38] 선왕 대의 단호한 폐비 결정으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연산군, 경종 등은 어머니들을 조금이라도 복권하려고 했다. 이들은 피바람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뤄냈던 반면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복권을 관철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작게나마 복수도 행했는데 말이다. 30년간에 걸친 세종의 숙청 없는 정치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참 특이한 일이다.[39] 4남 임영대군을 임신 중[40] 어쩌면 문종이 심온을 사면시킨 것도 이같은 어머니의 마음 고생을 보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41] 태종의 뜻에 따라 충녕대군을 세자에 책봉토록 건의했던 인물.[42] 제2차 왕자의 난 공신(좌명 4등).[43] 제1차 왕자의 난 공신(정사 2등).[44] 서울시립대 사학과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시즌 2 155회에서 이 사건을 가리켜 "고려의 정치 체계에서 조선의 정치 체계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 평한다.[45] 노비 1명당 말 1필과 가치가 비슷했다고 본다.[46] 조금 더 말하자면 유배에서도 금방 풀려나지만 그때부터 조말생에 대한 진정한 처벌이 시작되었다. 십수 차례 사직서도 전부 불허되면서 일하고 또 일하다가 늙어 죽은 것이다.[47] 한성의 시전을 관리하는 관청.[48] 금성대군은 1426년 3월 28일에 태어났으므로 이 때 소헌왕후는 말 그대로 만삭이었다.[49] 즉위식도 만삭인 채로 치뤘다. 소헌왕후가 애를 많이 낳기는 했다. 실제로 조선 때에도 세종을 제일 명군으로 보았는데 최고의 왕비 역시 소헌왕후로 보았다.[50] 감옥죄수들을 관리하는 관청[51] 한국사 최초의 소방서[52] 소방관은 금화군, 물을 길어나르는 인원을 급수비라 명명하며 금화도감에 소속시켰다. 이후 인조가 필요없다는 이유로 폐지했다.[53] 창제 당시 기준으로 현대 한글에서 쓰는 자모수는 24자이다. 사용하지 않는 4자는 자음 3개(아랫이응,반치음, 여린히읗),모음 1자(아래아)다.[54] 세종대왕은 재위 초반(1424)에 이미 큰딸 정소공주를 잃었던 아픔을 겪었었다.[55] 태종의 형이자 한때는 걸출한 무인이었던 정종조차 3년상을 치르며 몸이 야위어질 정도인데, 그만큼 몸이 강골이 아니었던 세종이 3년상을 치른다면 건강악화를 버티지 못했을 건 자명했다.[56] 특히나 문종은 모친상을 치른 후 얼마 안가 부친상까지 치른거라 더했다.[57] 이영훈 계열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식민지 근대화에 대해 객관적, 학술적인 연구를 추구했으나 가면 갈수록 조선이나 한국인들을 맹목적으로 비하하고 일본 제국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 비판받고 있다.[58] 굳이 친한파가 아니더라도 세종은 외국인들이 많이 아는 편이다. 문자 체계를 자기 측근 몇 명만 데리고 뚝딱 만들어낸 전례없는 괴물이기 때문. '한 국가에서 널리 쓰이는 문자 중' 창제자와 창제 시기가 명확히 밝혀져 있는 유일한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59] 물론 1100년 전만 해도 발해처럼 한민족을 형성한 국가가 존재하기야 했지만 926년에 발해가 멸망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발해인들도 200여년 뒤 금나라 시기에 현지인과 동화되어 사라졌다.[60] 게다가 조선족 자체부터가 역사가 짧은데 중국으로 한민족이 넘어간 적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들이 넘어간 시기는 구한말부터다. 그러니까 2000년 넘게 한반도에서 잘 살아오고 있다가[59] 약 150년 전에 일부가 타국으로 넘어가서 최근 들어 갑자기 "우리가 정통성이 있다." 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나마 한반도에 남아있는 한민족도 타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처지가 비슷하니 마냥 꿇리는 것도 아니겠지만 이미 북한대한민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있는 상황에서 저러니 말도 안 되고 답도 없다.[61]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오는 칭호로 임오화변 이후 영조가 정조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에서 "청구에 너와 나 뿐이다."(=나를 계승할 사람은 너 뿐이니 안심해라) 라고 말한다.[62] 고려인은 중국 측에서 부를 때 간간이 등장한다..[63] 일단 그렇기에 현재는 한족은 중국에 존재하는 50여개 민족 중 하나일 뿐이다. 즉 저 주장대로라면 조선인이 조선족이라면 중국족 아래에 한족 있는 거냐는 말을 해도 논리상으로는 맞다. 물론 논리상 맞지 실제로는 구조상으로도 불가능하므로 결국 중국의 자승자박[64] 중국 당국과 중국 네티즌들은 조선족은 조선 민족 모두를 이르는 단어라고 우기지만 이 단어는 중국 당국이 민족 분류를 위해 비교적 최근에 만든 조어이며 명나라청나라 시기 중국인들이 한민족을 부르거나 한민족이 스스로를 부를 때에는 조선족이 아닌 조선인으로 불렀으니 주의한다. 애초에 조선이건 고려이건 자신들의 뿌리를 조선+삼한(+삼국) 식으로 보았고 심지어 자신들을 지칭하는 칭호마저 조선, 고려, 계림, 청구[61], 근역 등 다양했다... 이 중에서 그래도 조선이 중요하기는 했어도 그것은 단군조선기자조선에 근거한 중요성일 뿐 자신들을 지칭하는데 있어서는 조선 말고도 여러 칭호를 사용했으며 심지어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라 병자호란 직전, 청나라의 동태를 살펴본 사신은 "고려로 가려고 말을 먹이고 있다."(=우리나라로 침공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라고 말하는데 망한 지 200년 넘게 지난 고려를 침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결국 여기서 말하는 고려는 조선을 의미한다. 그만큼 고려-조선도 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한반도의 국가와 사람들을 일관되게 부르는 명칭은 없었다. 그러니 이제와서 조선족이 조선 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라는 것은 그들만의 망상일 뿐이다. 설사 맞다고 해도 그래봐야 기원을 아무리 오래 거슬러 올라가도 구한말이 고작이고 조선족의 시초도 구한말이라 아무리 빨라봐야 160년도 안 된, 좀 거칠게 말해 근본없는 주장이다. 심지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조차 아무리 조선에서 바꿨던 칭호이고 또 근본을 나타내기는 하나 정식으로 사용된 역사는 너무 없던 대한(대한민국)이나 조선 이전의 칭호인 고려(고려공산당, 고려공화국)를 사용하는 등 조선만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한반도 사는 사람=조선은 개논리인 셈, 무엇보다 조선족이라는 명칭 자체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단 1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상응할만한 표현은 오직 조선인으로만 등장하며[62] 이걸 또 '족' 이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중국인은 중국족이던가? 그나마 한인이 한족과 병용되어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시대상 전 중국인의 99%는 한족이었던 시대였다... 지금과는 달리 소수민족 포용(명목상)[63] 그런 거 없고 한족만이 중국인이고 나머지는 이민족이다시피한 시대였기에 똑같이 보는건 무리수[65] 飢民/饑民. 굶주린 백성.[66] 振濟.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제함.[67] 撫綬. 어루만져 편하게 함.[68] 黜陟. 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올리어 씀.[69] 디시인사이드에서 역대 한국 대통령 등을 평하는 글이 올라오면 자주 인용되는 말이기도 하다.[70] 綱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道理).[71] 上例. 위에 든 예시.[72] 大權. 국가를 통치하는 권한.[73] 세종이 세상을 뜬 것은 17일이지만 세종실록 중에서 세종 본인의 발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기록된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진짜로 일본인만주족이 작정하고 대규모로 조선을 치면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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