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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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르 루이스 메노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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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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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파일: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36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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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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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드리드
55대





아르헨티나의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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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César Luis Menotti
출생
1938년 11월 5일 (85세) /
아르헨티나 산타페주 로사리오시
국적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display: none; display: 아르헨티나"
행정구
]]

신체
193cm
직업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CA 로사리오 센트랄 (1960~1963)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1964)
CA 보카 주니어스 (1965~1966)
CA 로사리오 센트랄 (1966-1967)
뉴욕 제너럴스 (1967-1968)
산투스 FC (1968)
CA 주벤투스 (1969)
감독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70 / 수석 코치)
CA 우라칸 (1970~1973)
아르헨티나 대표팀 (1974~1983)
아르헨티나 U-20 대표팀 (1978~1979)
FC 바르셀로나 (1983~1984)
CA 보카 주니어스 (198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87~1988)
CA 리버 플레이트 (1988)
CA 페냐롤 (1990~1991)
멕시코 대표팀 (1991~1992)
CA 보카 주니어스 (1993~1994)
CA 인데펜디엔테 (1996~1997)
UC 삼프도리아 (1997)
CA 로사리오 센트랄 (2003)
푸에블라 FC (2006)
테코스 UAG (2007)
국가대표
11경기 2골 (아르헨티나 / 1963~1968)

1. 개요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2.2. 감독
2.2.1. 초창기
2.2.3. FC 바르셀로나
2.2.4. 방랑기
2.2.5. 멕시코 대표팀
2.3. 말년
2.4. 스타일: 메노티주의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7년에 테코스 UAG 감독을 맡았다.

공격적이고 아름답고 화려한 축구를 추구하는 '메노티주의'의 장본인.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자국 아르헨티나 대표팀에 메노티주의를 덧입혀서 멋진 첫 우승을 안겼으며, 이후 그의 축구 철학은 현대축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1]


2. 축구인 생활[편집]



2.1. 선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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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 센트럴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메노티

메노티는 1938년 11월 5일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8년 로사리오 센트럴의 유스팀에 입단해 2년간 리저브 팀에서 활동했고 1960년 7월 3일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로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로사리오 센트럴이 보카 주니어스를 3:1로 제압했다.) 그후 메노티는 로사리오 센트럴에서 1963년까지 3년간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동하며 86경기 47골을 기록했다.

그러던 1964년, 메노티는 라싱 클럽으로 이적했다. 그는 이 팀에서 한 시즌 동안 18경기 12골을 기록한 후 1965년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지만 부상을 연이어 당하는 악재를 겪으며 18경기 6골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주전에서 밀려난 메노티는 1966년 친정팀인 로사리오 센트럴로 복귀했다. 1967년, 메노티는 다시 뉴욕 제너럴스로 이적해 1968년까지 29경기 5골을 기록했으며 1968년 브라질의 산투스로 이적해 당시 펠레와 함께 뛰며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 후 1969년 아틀레티코 주벤투스로 이적해 1970년까지 뛴 후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한편 국가대표로는 1963년에 차출되어 2경기에 교체 출전했다.


2.2. 감독[편집]



2.2.1. 초창기[편집]


선수 생활을 정리한 메노티는 1970년 뉴웰스 올드보이스의 수석코치로서 코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후 CA 우라칸에서 기술 코치 역할을 맡던 메노티는 1972년 CA 우라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우라칸은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약체로 분류되었고 어느 누구도 이 팀을 주목하지 않았다. 메노티는 이 팀을 맡아 공격을 우선시하는 전술 스타일을 도입, 아르헨티나의 최강팀 중 하나인 라싱 클럽을 5:0으로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하더니 놀랍게도 1972-73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 우승은 우라칸이 1931년 창단한 이래 첫번째 우승이며 현재까지 이 클럽의 유일한 우승이기도 하다. 약체팀을 맡자마자 공격 축구로 우승을 덜컥 달성해버린 그의 명성이 치솟자,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그를 대표팀 감독으로 삼아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준비하게 했다.


2.2.2.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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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을 무렵, 아르헨티나는 월드컵을 자기네 국가에서 열었으니 반드시 우승을 달성해야 한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월드컵 개막 3년전부터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금지하고 지속적인 합숙훈련으로 조직력을 다졌으며 발렌시아에서 활약하고 있던 마리오 켐페스를 임대해 아르헨티나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당시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 아르헨티나 월드컵 조직위원회에게 우승 못하면 총살이라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압박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메노티는 국가대표를 잘 이끌었다. 아르헨티나는 조별 본선[2]에서 헝가리, 프랑스, 이탈리아와 한 조를 이루었다. 이 세 국가 모두 축구 강국으로 유명했기에 매우 어려운 조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비록 이탈리아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헝가리, 프랑스를 제압하며 조1위를 기록, 조 2위를 기록한 이탈리아와 함께 다음 단계로 진출했다.

아르헨티나는 뒤이은 8강[3]에서 폴란드, 브라질, 페루와 한 조를 이루었다. 아르헨티나는 우선 폴란드를 2:0으로 제압했고 브라질과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페루와의 경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모두 1승 1무인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3차전에서 얼마나 많은 골을 넣느냐에 따라 결승전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다. 브라질은 폴란드를 상대로 3:1로 승리했고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상대로 6:0 완승을 거두며 브라질을 다득점 차이로 제치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은 당시 유럽을 호령하는 축구 강국 네덜란드와의 대결이었다. 정규 시간 90분 동안 1:1 동점을 거둔 양팀이었지만 연장전에서 아르헨티나가 2골을 몰아넣었고 결국 아르헨티나가 네덜란드를 격파하고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당연히 공격적인 축구 스타일로 대표팀 우승을 이끈 메노티에 대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성공에는 추악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월드컵 역사상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함께 가장 추악한 월드컵으로 평가받을 만큼 악명이 높다. 아르헨티나는 우승을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먼저 아르헨티나가 치르는 조별 본선[4] 3경기를 모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하도록 했고 나머지 경기는 모두 마르델 플라타에서 하게 함으로서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경기장을 이동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본선 1차전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헝가리 선수가 먼저 골을 넣자 거친 파울을 남발해 헝가리 선수들이 공을 잡질 못하게 만들었고 심판은 이런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제지하긴 커녕 헝가리측 선수 2명에게 퇴장을 줄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억지로 퇴장을 명령하는 등 편파적인 판정을 서슴지 않았다. 이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헝가리를 상대로 2:1 신승을 거두었다. 당연히 격분한 헝가리 감독은 "아르헨티나의 12번째 선수는 심판이다"라고 인터뷰했다.

아르헨티나는 그후에도 심판의 일방적인 편파 판정에 힘입어 상대를 제압했으며 페루와의 경기에서 6:0 대승을 거두자 브라질 측은 페루가 아르헨티나와 미리 짜놓고 일부러 대패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결승전 전날에는 경기장 바로 옆 건물에서 고문이 자행되고 있었고 결승전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아르헨티나 응원과 심판의 편파판정 때문에 네덜란드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메노티가 이룩한 1978년 월드컵 우승은 오늘날 별로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당시 메노티는 아르헨티나 대표팀과 아르헨티나 청소년 감독을 겸 했었고, 월드컵 우승 다음해인 1979년 당시 최고의 유망주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열린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해 월드컵에 이어 청소년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아무튼 조국을 우승으로 이끈 메노티는 이후에도 감독직을 맡았지만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선수들의 사기가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아르헨티나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5]에 진출하여 헝가리, 엘살바도르를 격파해 12강[6]에 진출하는 선전을 벌였지만 이탈리아, 브라질과 죽음의 조를 결성하는 악재에 직면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에게 2:1로 패하고 브라질에게 3:1로 패배 탈락(11등)해 월드컵을 조기 마감하고 말았다. 그후 메노티는 책임지고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2.2.3. FC 바르셀로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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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3월, 메노티가 바르셀로나의 47대 감독으로 전격 부임했다. 그는 1983년 3월 12일에 베티스와의 경기에서 감독 데뷔전을 치러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후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부임 첫 시즌에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 CF를 결승에서 2-1로 꺾고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코파 데 라리가[7] 결승에서도 다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디에고 마라도나의 활약으로 통합 스코어 4-3으로 앞서 우승, 컵 더블을 차지했다.

뒤이어 83-84 시즌 개막 직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아틀레틱 빌바오를 통합 스코어 3-2로 꺾고 다시 우승했지만 그 빌바오에 밀려 바르셀로나가 염원하는 리그 우승은 실패했고 1983-84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났다. 이 시기 공격적 낭만주의 성향의 메노티의 바르셀로나와 수비적 실용주의 성향의 클레멘테의 빌바오가 짧은 시간 라이벌리를 형성하기도 했다. 또한 이때 마라도나도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했지만 빌바오의 안도니 고이코이체아의 위험한 태클에 무릎 부상을 당하고 간염을 앓는 등 여러 악재를 겪어 그리 성공적인 활약을 하지 못했다.[8]


2.2.4. 방랑기[편집]


바르셀로나를 떠난 후 2년간 휴식하다가 1986년 11월 보카 주니어스로 부임해 1987년 여름까지 임시 감독으로 일했고 1987년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부임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 성적이 좋지 않았고 급기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4:0으로 무기력하게 패하자 격분한 팬들의 항의에 직면한 끝에 감독 부임 29일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1989년, 메노티는 리버 플레이트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시즌 성적이 좋지 못해 사임 압박을 견디지 못해 시즌 도중 사임해야 했고 1990년 우루과이의 축구 클럽 페냐롤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91년 경질되었다.


2.2.5. 멕시코 대표팀[편집]


1991년 8월, 메노티는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멕시코 감독으로 일하는 동안 알베르토 가르시아 아스페, 호르헤 캄포스, 카를로스 에르모시요 등의 젊은 선수들을 길려냈고 멕시코 축구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후 메노티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멕시코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4위를 기록하는 데 기여한 후 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했다.


2.3. 말년[편집]


1996년, 메노티는 인데펜디엔테의 감독으로 부임해 1996-97 시즌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 축구 클럽인 삼프도리아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8경기에서 영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자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메노티는 2003년 친정팀인 로사리오 센트랄로 돌아와 임시 감독을 수행했고 2006년 푸에블라, 2007년 테코스 UAG 감독을 수행한 후 감독 인생을 완전히 은퇴하고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2.4. 스타일: 메노티주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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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74 시즌 약체팀이던 CA 우라칸을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으로 이끌던 시기에 구사한 4-1-2-3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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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결승전 당시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의 포메이션

메노티는 정치 성향이 좌파적인 인물이다. 비록 아르헨티나 우익 군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을 맡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좌파적인 성향을 결코 숨기지 않고 오히려 이를 떳떳이 밝히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축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메노티는 축구를 이념에 접목시켰다. 그가 보기에 공격과 수비는 이념의 대결이며 공격은 좌파이고 수비는 우파였다. 또한 그는 축구라는 스포츠는 상대팀보다 골을 더 넣는 것이며 리드를 지키기 위해 수비에 전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봤다. 공격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의성과 흥겨움의 표현인 데 반에, 수비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결과에 집착하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유명한 발언이 있다.

"여기 우파 축구와 좌파 축구가 있다. 우파 축구는 인생이 투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한다. 우리는 희생을 강요하고 강철같은 선수가 되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라고 말한다. 이런 축구는 선수들의 성장을 지체시키고 시스템 속에서 뛰어다니는 유용한 바보들을 양산한다."


이러한 그의 공격적이며 선수들의 창의적인 플레이 및 화려한 기술을 중시하는 축구 철학은 숱한 추종자들을 양산했고 '메노티주의'라는 개념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르헨티나 축구계는 화려하고 공격적인 축구를 중시하는 '메노티주의'와 결과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빌라르도주의'의 대립으로 전개되었고 이런 대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그의 축구 철학은 비단 아르헨티나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결과지상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에도 몇몇 감독들은 그의 이상을 굳건히 따르고 있다.

다만 최근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행보를 볼 때 메노티주의는 빌라르도주의에 밀려 주류에서 멀어지는 분위기다. 현재 메노티주의를 추구한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으로는 마르셀로 비엘사호르헤 삼파올리가 있는데 이 두 감독 모두 월드컵에서 매우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마르셀로 비엘사는 2002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는 우승후보 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정작 2002월드컵 본선[9]에서는 국가 디폴트 선언 및 일본 관중들의 집단 야유 세례 + 죽음의 조 + 마이클 오언의 할리우드 액션이라는 4단 콤보 불운으로 결국 조 3위로 탈락(18등)했으며[10], 호르헤 삼파올리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그야말로 눈이 썩어들어가는 경기력으로 겨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으나 경기 내용은 2002년보다 더 못하여서 자국으로부터도 16강 진출 당했다. 라는 혹평을 들었다.[11] 반면 빌라르도주의를 추구한 알레한드로 사베야리오넬 스칼로니는 각각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준우승과 2021 코파 아메리카 브라질,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12]에서 우승하면서 결과를 중시하는 빌라르도주의가 아르헨티나 대표팀에 도움을 주고 있다. 참고로 호세 페케르만도 메노티주의 감독이란 소리도 있으나 그 역시 유사시 빌라르도주의 수비전술을 구사한다.


3. 둘러보기[편집]






[1] 메노티주의는 이후 카를로스 빌라르도의 실용주의 축구인 '빌라르도주의'와 대립 양상을 보였으며, 빌라르도가 실제로 월드컵 우승을 따내면서 메노티의 축구철학은 다소 위축되기도 했다.[2] 16강 조별리그[3] 74월드컵과 78월드컵 2라운드 8강은 토너먼트가 아닌 8강 조별리그로 4강전없이 8강 각 조 1위만 결승행, 각 조 2위는 탈락하여 3,4위전으로 갔다. 그래서 8강에서 폴란드, 브라질, 페루와 조편성이 되었다.[4] 16강 조별리그[5] 첫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6] 82월드컵 당시 2라운드는 12강 조별리그로 각 조 1위만 4강 토너먼트에 진출하였다.[7]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유지된 스페인의 리그컵 대회다.[8] 그래도 출전한 경기에선 환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58경기 38골을 기록했다.[9] 32개국 본선 진출 대회[10] 그래도 2004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및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나름 검증된 감독이다.[11] 지난 2014 준우승(2위)보다 14계단 하락한 16위(16강)으로 탈락했다.[12] 마지막 32개국 본선 진출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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